신라사

삼국사기 신라 본기 (원문+한글) 권 제 11

포맨#신기 2012. 2. 13. 19:17

三國史記卷第十一.

삼국사기 권 제 11

新羅本紀第十一.
<文聖王>·<憲安王>·<景文王>·<憲康王>·<定康王>·<眞聖王>.

신라본기 제 11
문성왕, 헌안왕,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 진성왕.

○<文聖王>立. 諱<慶膺>, <神武王>太子, 母<貞繼>夫人.[一云<定宗太后>.] 八月, 大赦, 敎曰: "<淸海鎭>大使<弓福>, 嘗以兵助神考, 滅先朝之巨賊, 其功烈可忘耶?" 乃拜爲<鎭海>將軍, 兼賜章服.

문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경응이다. 그는 신무왕의 태자이며, 그의 어머니는 정계부인이다.[정종 태후라고도 한다.]
8월, 왕이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왕이 "청해진 대사 궁복이 일찌기 군사를 거느리고 아버지 신무왕을 도와 선왕의 대적을 격멸하였으니, 그의 공로를 잊을 수 있겠는가?"라는 교서를 내리며, 곧 궁복을 진해 장군으로 임명하고 동시에 장복을 하사하였다.

○二年, 春正月, 以<禮徵>爲上大等, <義琮>爲侍中, <良順>爲伊 . 自夏四月至六月, 不雨. <唐><文宗> <鴻 寺>, 放還質子及年滿合歸國學生, 共一百五人. 冬, 饑.

2년 봄 정월, 예징을 상대등, 의종을 시중, 양순을 이찬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부터 6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당 문종이 홍려시에 조서를 내려, 인질 및 기한이 되어 귀국하게 된 학생 총 105명을 돌려 보내도록 하였다.
겨울에 기근이 들었다.

○三年, 春, 京都疾疫. 一吉 <弘弼>謀叛, 事發逃入海島, 捕之不獲. 秋七月, <唐><武宗> : 歸國<新羅>官, 前入<新羅>, 宣慰副使(+前) , 充< 州>都督府司馬賜緋魚袋<金雲卿>, 可<淄州>長史, 仍爲使, 冊王爲開府儀同三司檢校大尉{太尉} 使持節大都督< 林州>諸軍事兼持節充寧海□{諸} 軍使上柱國<新羅>王, 妻<朴>氏爲王妃.

李丙燾. [冊府元龜], [舊唐書].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
3년 봄, 서울에 전염병이 돌았다.
일길찬 홍필이 반역을 도모하였다. 그는 일이 발각되자 섬으로 도주하였다. 이에 따라 그를 체포하지 못했다.
가을 7월, 당 무종이 신라에 귀국할 관리를 선발하는데, 이전에 신라에 갔던 선위부사충연주도독부사마사비어대 김 운경으로 결정하였다. 무종은 그에게 치주 장사의 직위를 주어 사신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신라의 왕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지절충녕해제군사상주국신라왕'으로 책봉하고, 아내 박씨를 왕비로 책봉하는 칙명을 전하도록 하였다.

○四年, 春三月, 納倂 {伊 } <魏昕>之女爲妃.

趙炳舜. 『三國史節要』.
4년 봄 3월, 이찬 위흔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五年, 春正月, 侍中<義琮>病免, 伊 <良順>爲侍中. 秋七月, 五虎入神宮園.

5년 봄 정월, 시중 의종이 병으로 사직하자, 이찬 양순이 시중이 되었다.
가을7월, 호랑이 다섯 마리가 신궁의 정원에 들어 왔다.

○六年, 春二月甲寅朔, 日有食之. 大白{太白} 犯鎭星. 三月, 京都雨雹. 侍中<良順>退, 大阿 <金茹>爲侍中. 秋八月, 置<穴口鎭>, 以阿 <啓弘>爲鎭頭.

趙炳舜. 『三國史節要』.
6년 봄 2월 초하루 갑인일에 일식이 있었다. 금성이 토성을 범하였다.
3월, 서울에 우박이 내렸다.
시중 양순이 퇴직하자, 대아찬 김 여가 시중이 되었다.
가을 8월, 혈구진을 설치하고, 아찬 계홍을 진두로 임명하였다.

○七年, 春三月, 欲娶<淸海鎭>大使<弓福>女爲次妃. 朝臣諫曰: "夫婦之道, 人之大倫也. 故<夏>以<塗山>興, <殷>以< >氏昌, <周>以<褒 >滅, <晉>以<驪姬>亂. 則國之存亡, 於是乎在, 其可不愼乎? 今, <弓福>, 海島人也, 其女豈可以配王室乎?" 王從之. 冬十一月, 雷. 無雪. 十二月朔, 三日 出.

7년 봄 3월, 왕이 청해진 대사 궁복의 딸을 둘째 왕비로 삼고자 했다. 조정 신하들이 간하여 말하기를 "부부간의 도는 사람이 지켜야할 큰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하 나라는 도산을 얻어 흥성하였고, 은 나라는 신씨를 얻어 번창하였으며, 주 나라는 포사로 인하여 멸망하였고, 진 나라는 여희로 인하여 혼란하였습니다. 나라의 존망은 여기에 달려있는 것이니 어찌 신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지금 궁복은 섬 사람인데 그의 딸을 어떻게 왕실의 배필로 정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이 말을 따랐다.
겨울 11월, 우레가 있었고 눈이 내리지 않았다.
12월 초하룻날, 해가 세 개 나란히 나타났다.

○八年, 春, <淸海><弓福>怨王不納女, 據鎭叛. 朝廷將討之, 則恐有不測之患, 將置之, 則罪不可赦, 憂慮不知所圖. <武州>人<閻長>者, 以勇壯聞於時. 來告曰: "朝廷幸聽臣, 臣不煩一卒, 持空拳, 以斬<弓福>以獻." 王從之. <閻長>佯叛國, 投<淸海>. <弓福>愛壯士, 無所猜疑, 引爲上客, 與之飮極歡. 及其醉, 奪<弓福>劒斬訖, 召其衆說之, 伏不敢動.

8년 봄, 청해진의 궁복이 자신의 딸을 왕비로 삼지 않는다고 하여 왕을 원망하며, 청해진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이들를 토벌하자니 예기하지 못한 후환이 발생할 것이 염려되고, 그대로 두자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기에, 처리할 바를 몰라 걱정하고 있었다. 그 때 무주 사람 염장이 용감하고 힘이 세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가 와서 "조정에서 다행히 저의 청을 들어 주신다면, 저는 군사 한 명도 필요없이 빈 주먹만 가지고, 궁복의 목을 베어 바치겠습니다"라고 말하니, 왕이 이 말을 따랐다. 염장은 거짓으로 나라를 배반한 척하고 청해진에 투항하였다. 궁복은 평소 힘센 사람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를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면서 함께 술을 마시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가 술에 취하자 염장은 궁복의 칼을 빼앗아 목을 벤 후에, 그의 무리를 불러 사유를 설명하니, 그들은 엎드려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九年, 春二月, 重修<平議>·<臨海>二殿. 夏五{四} 月, 伊 <良順>·波珍 <興宗>等叛, 伏誅. 秋八月, 封王子爲王太子. 侍中<金茹>卒, 伊 <魏昕>爲侍中.

趙炳舜. 『三國史節要』.
9년 봄 2월, 평의전과 임해전을 중수하였다.
여름 5월, 이찬 양순과 파진찬 흥종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 당하였다.
가을 8월, 세자를 왕태자로 봉하였다. 시중 김 여가 사망하자, 이찬 위흔이 시중이 되었다.

○十年, 春夏旱. 侍中<魏昕>退, 波珍 <金啓明>爲侍中. 冬十月, 天有聲如雷.

10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시중 위흔이 퇴직하자, 파진찬 김 계명이 시중이 되었다.
겨울 10월, 하늘에서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났다.

○十一年, 春正月, 上大等<禮徵>卒, 伊 <義正>爲上大等. 秋九月, 伊 <金式{金貳}> ·<大昕>等叛, 伏誅, 大阿 <昕 >緣坐罪.

趙炳舜. 『三國史節要』.
11년 봄 정월, 상대등 예징이 사망하자, 이찬 의정이 상대등이 되었다.
가을 9월, 이찬 김식·대흔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 당하고, 대아찬 흔린이 이에 연루되었으므로 역시 처벌되었다.

○十二年, 春正月, 土星入月, 京都雨土, 大風拔木. 赦獄囚誅{殊} 死已下.

李丙燾.
[북한본].
12년 봄 정월, 토성이 달에 들어갔다. 서울에 흙비가 내렸으며,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사형수 이하의 죄수를 석방하였다.

○十三年, 春二月, 罷<淸海鎭>, 徙其人於<碧骨郡>. 夏四月, 隕霜. 入<唐>使阿 <元弘>,  佛經幷佛牙來, 王出郊迎之.

13년 봄 2월, 청해진을 없애고, 그 지방 사람들을 벽골군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여름 4월, 서리가 내렸다.
당 나라에 갔던 사신인 아찬 원홍이 불경과 부처의 치아를 가지고 왔다. 왕이 교외로 나가 그를 맞았었다.

○十四年, 春二月, 波珍 <眞亮>爲<熊川{熊州}> 都督. 調府火. 秋七月, 重修<鳴鶴樓>. 冬十一月, 王太子卒.

趙炳舜. 『三國史節要』.
14년 봄 2월, 파진찬 진량이 웅주 도독이 되었다.
조부에 불이 났다.
가을 7월, 명학루를 중수하였다.
겨울 11월, 왕태자가 죽었다.

○十五年, 夏六月, 大水. 秋八月, 西南州郡, 蝗.

15년 여름 6월, 홍수가 났다.
가을 8월, 서남 지방의 주와 군에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十七年, 春正{二} 月, 發使撫問西南百姓, 冬十二月, <珍閣省>災. 土星入月.

趙炳舜. 『三國史節要』.
17년 봄 정월, 사신을 보내 서남 지방의 백성들을 위문하였다.
겨울 12월, 진각성에 불이 났다. 토성이 달에 들어 갔다.

○十九年, 秋九月, 王不豫, 降遺詔曰: "寡人以 末之資, 處崇高之位, 上恐獲罪於天鑑, 下慮失望於人心, 夙夜兢兢, 若涉淵氷, 賴三事大夫, 百 卿士, 左右挾維, 不墜重器. 今者, 忽染疾疹, 至于旬日,  惚之際, 恐先朝露. 惟祖宗之大業, 不可以無主; 軍國之萬機, 不可以暫廢. 顧惟舒弗邯<誼靖>, 先皇之令孫, 寡人之叔父. 孝友明敏寬厚仁慈, 久處古衡{台衡} , 挾贊王政, 上可以祗奉宗廟, 下可以撫育蒼生. 爰釋重負, 委之賢德, 付託{托} 得人, 夫復何恨!  生死始終, 物之大期; 壽夭脩短, 命之常分. 逝者可以達理, 存者不必過哀. 伊爾多士, 竭力盡忠, 送往事居, 罔或違禮. 布告國內, 明知朕懷." 越七日, 王薨. 諡曰<文聖>, 葬于<孔雀 {孔雀趾}> .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19년 가을 9월, 왕이 병환이 들자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과인이 미미한 자질로 높은 자리에 처하여, 위로는 하늘에 죄를 짓지 않을까 두려워 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을까 걱정하였으니, 밤낮으로 깊은 물과 얇은 얼음을 건너는 듯 전전긍긍하면서도, 세 명의 재상과 여러 신하들의 보좌에 의지하여 왕위를 유지해왔다. 이제 나는 갑자기 병에 걸린지 열흘이 지났으니, 정신이 혼몽하여 아침 이슬 보다 빨리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 선조로부터 내려오는 사직에는 주인이 없을 수 없으며, 국가의 정치에 관한 모든 사무는 잠시라도 폐할 수 없다. 돌아보건대 서불한 의정은 선왕의 손자요, 나의 숙부이다. 그는 효성과 우애가 있고 명민하며 관후하고 인자하여, 오래도록 재상의 직에 있으면서 왕의 정사를 도왔으니, 위로는 종묘를 받들 만하고, 아래로는 창생을 기를 만하다. 이에 나는 무거운 책무에서 벗어나, 어질고 덕 있는 이에게 그것을 맡기려 하는 바, 그것을 부탁할 적임자를 얻었으니, 다시 무슨 여한이 있으랴? 살고 죽는 것과 시작하고 끝맺는 것은 만물의 위대한 기약이요,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은 천명이 부여하는 정해진 몫이다. 세상을 뜨는 자는 하늘의 이치에 이르는 것이니, 세상에 남는 자가 지나치게 슬퍼할 필요는 없다. 너희 여러 신하들은 힘을 다하여 충성할 것이며, 가는 사람을 장례지내고 살아있는 사람을 섬김에 있어서, 혹시라도 예절을 어기지 말 것이다. 나라 전체에 포고하여, 나의 뜻을 분명히 알게 하라!"
왕이 7일 만에 별세하였다. 시호를 문성이라 하고, 공작지에 장사지냈다.

○<憲安王>立. 諱<誼靖>[一云<祐靖>.], <神武王>之異母弟也. 母<照明>夫人, <宣康王>之女. 以<文聖>顧命卽位, 大赦, 拜伊 <金安>爲上大等.

헌안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의정[우정이라고도 한다.]이며, 신무왕의 이복 아우이다. 그의 어머니는 조명부인이니 선강왕의 딸이다. 문성왕의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이찬 김 안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二年, 春正月, 親祀神宮. 夏四月, 降霜. 自五月至秋七月, 不雨. <唐城郡>南河岸, 有大魚出, 長四十步, 高六丈{尺} .

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봄 정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냈다.
여름 4월, 서리가 내렸다.
5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당성군 남쪽 강변에서 큰 고기가 나왔는데, 길이가 40보, 넓이가 6척이었다.

○三年, 春,  貴人饑, 王遣使賑救. 夏四月, 敎修完 防勸農.

3년 봄, 곡식이 귀하여 사람들이 굶주리므로, 왕이 특사를 보내 구제하였다.
여름 4월, 왕이 교서를 내려, 제방을 축수하고 농사짓기를 권하였다.

○四年, 秋九月, 王會群臣於<臨海殿>, 王族<膺廉>年十五歲, 預坐焉. 王欲觀其志, 忽問曰: "汝游學有日矣, 得無見善人者乎?" 答曰: "臣嘗見三人, 竊以爲有善行也." 王曰: "何如?" 曰: "一高門子弟, 其與人也, 不自先而處於下. 一家富於財, 可以侈衣服, 而常以麻紵自喜. 一有勢榮, 而未嘗以其勢加人, 臣所見如此." 王聞之默然, 與王后耳語曰: "朕閱人多矣, 無如<膺廉>者." 意以女妻之, 顧謂<膺廉>曰: "願郞自愛. 朕有息女, 使之薦枕." 更置酒同飮, 從容言曰: "吾有二女, 兄今年二十歲, 弟十九歲, 惟郞所娶!" <膺廉>辭不獲, 起拜謝, 便歸家告父母. 父母言: "聞王二女容色, 兄不如弟, 若不得已, 宜娶其弟." 然尙疑未決, 乃問<興輪寺>僧. 僧曰: "娶兄則有三益, 弟則反是, 有三損." <膺廉>乃奏: "臣不敢自決, 惟王命是從." 於是, 王長女出降焉.

4년 가을 9월, 왕이 임해전에 여러 신하들을 모았을 때, 왕족 응렴이 열 다섯 살의 나이로 이 자리에 참석하였다. 왕이 그의 생각을 알고자 하여 갑자기 "네가 상당 기간 사방을 유력하며 견학한 바 있는데, 착한 사람을 본 일이 없었던가?"라고 물었다. 그는 "제가 일찌기 세 사람을 보았는데, 그들은 착한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어떤 행위인가?"라고 물었다. 그는 "한 사람은 높은 가문의 자제로서, 다른 사람과 교제함에 있어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남의 아래에 처하였으며, 한 사람은 재물이 많아 사치스러운 의복을 입을 만한데도 언제나 베옷을 입는 것으로 자족하였으며, 한 사람은 세도와 영화를 누리면서, 한 번도 남에게 세도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본 것은 이와 같았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잠자코 있다가 왕후에게 귓속 말로 "내가 사람을 많이 겪었지만 응렴 같은 자는 없었다"라고 말하고, 사위를 삼을 생각으로 응렴을 돌아 보고 말했다. "그대는 자중자애하라. 내가 딸이 있으니 사위를 삼도록 하겠다." 왕은 다시 술을 가져오게하여 함께 마시면서 조용히 말했다. "내가 딸이 둘 있는데, 형은 금년에 스무살이요, 동생은 열 아홉살인데 그대의 마음에 드는 대로 장가를 들라!" 응렴이 사양할 수 없어 일어나 절을 하며 감사의 뜻을 표하고, 곧 집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그의 부모는 "듣건대 왕의 두 딸의 얼굴은 형이 동생만 못하다고 하니, 만약 부득이 장가를 가야 한다면, 동생에게 장가를 드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응렴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다가, 흥륜사 중에게 물었다. 그 중은 "형에게 장가를 들면 세 가지 이익이 있을 것이요, 동생에게 장가를 들면 반대로 세가지 손해를 볼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응렴이 곧 "제가 감히 마음 대로 결정을 못하겠사오니, 다만 왕의 명령에 따르겠나이다"라고 아뢰니, 이에 왕이 맏딸을 시집 보냈다.

○五年, 春正月, 王寢疾彌留, 謂左右曰: "寡人不幸, 無男子有女. 吾邦故事, 雖有<善德>·<眞德>二女主, 然近於牝 之晨, 不可法也. 甥<膺廉>, 年雖幼少, 有老成之德. 卿等, 立而事之, 必不墜祖宗之令緖, 則寡人死, 且不朽矣." 是月二十九日, 薨. 諡曰<憲安>, 葬于<孔雀趾>.

5년 봄 정월, 왕이 병으로 누워 위독해지자, 측근들에게 말했다. "과인이 불행하게 아들 없이 딸만 두었다. 우리 나라에는 예전에 선덕·진덕 두 여왕이 있었지만, 이는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과 비슷한 일로써, 이를 본받을 수는 없다. 사위인 응렴은 나이가 비록 어리지만 성숙한 덕성을 갖추고 있다. 그대들이 그를 임금으로 세워 섬긴다면, 반드시 조종의 훌륭한 후계자를 잃지 않을 것이요, 내가 죽은 이후에도 나라에 해로운 일이 없을 것이다." 이 달 29일에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헌안이라 하고, 공작지에 장사지냈다.

○<景文王>立. 諱<膺廉>[膺一作疑{凝} .], <僖康王>&子{之孫} <啓明>阿 之子也. 母曰<光和>[一云<光義>.]夫人, 妃<金>氏<寧花>夫人.

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
경문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응렴['응(膺)'을 '의(疑)'라고도 한다.]이며, 희강왕의 아들인 아찬 계명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광화['광의'라고도 한다.]부인이다. 왕비는 김씨 영화부인이다.

○元年, 三月, 王御<武平門>, 大赦.

원년 3월, 왕이 무평문에 나아가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二年, 春正月, 以伊 <金正>爲上大等, 阿 <魏珍>爲侍中. 二月, 王親祀<神宮>. 秋七月, 遣使如<唐>貢方物. 八月, 入<唐>使阿 <富良>等一行人, 溺沒.

2년 봄 정월, 이찬 김 정을 상대등, 아찬 위진을 시중에 임명하였다.
2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냈다.
가을 7월, 당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8월, 입당사인 아찬 부량 등의 일행이 익사하였다.

○三年, 春二月, 王幸國學, 令博士已下, 講論經義, 賜物有差. 冬十月, 桃李華. 十一月, 無雪. 納<寧花>夫人弟爲次妃. 異曰{日} , 王問<與輪寺{興輪寺}> 僧曰: "師前所謂三益者何也?" 對曰: "當時, 王及王妃喜其如意, 寵愛浸深, 一也. 因此, 得繼太位{大位} , 二也. 卒, 得娶嚮所求季女, 三也." 王大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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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봄 2월, 왕이 국학에 가서, 박사 이하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경서의 뜻을 강론하게 하고, 정도에 따라 선물을 주었다.
겨울 10월, 복숭아와 오얏꽃이 피었다.
11월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영화부인의 아우를 둘째 왕비로 삼았다. 그 후 왕이 흥륜사 중에게 물었다. "대사가 전에 말했던 세 가지 이익이란 무엇인가?" 중이 대답하였다. "형과 결혼하면 그것이 당시에 왕과 왕비의 뜻대로 되는 것이니, 왕과 왕비가 기뻐하여 당신에 대한 사랑이 점점 깊어질 것이니, 이것이 첫째 이익입니다. 이로 인하여 왕위를 잇게 될 것이니, 이것이 둘째 이익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처음부터 원하던 둘째 딸을 취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세째 이익입니다." 왕이 크게 웃었다.

○四年, 春二月, 王幸<感恩寺>望海. 夏四月, <日本國>使至.

4년 봄 2월, 왕이 감은사에 가서 바다에 제사를 지냈다.
여름 4월, 일본국 사신이 왔다.

○五年, 夏四月, <唐><懿宗>降使太子右諭德御史中丞<胡歸厚>, 使副光祿主簿兼監察御史<裴光>等, 弔祭先王, 兼賻贈一千匹, 冊立王爲開府儀同三司檢校大尉{太尉} 持節大都督< 林州>諸軍事上柱國<新羅>王. 仍賜王官誥一道·旌節一副·錦綵五百匹·衣二副·金銀器七事. 賜王妃錦綵五十匹·衣一副·銀器二事. 賜王太子錦綵四十匹·衣一副·銀器一事. 賜大宰相錦綵三十匹·衣一副·銀器一事. 賜次宰相錦綵二十匹·衣一副·銀器一事.

趙炳舜. 『三國史節要』.
5년 여름 4월, 당 의종이 정사 태자우유덕어사중승 호 귀후와 부사 광록주부겸감찰어사 배 광 등을 보내 선왕을 조상하는 제사를 지내고, 동시에 비단 1천 필을 부의로 주고, 왕을 '개부의동삼사검교대위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상주국신라왕'으로 책봉하게 하였다. 그리고 왕에게 관직을 임명하는 문건 한 통·황제의 신임표 한 벌·비단 5백 필·옷 두 벌·금 은 그릇 일곱 개를 주고, 왕비에게는 비단 50필·옷 한 벌·은 그릇 두 개를 주고, 왕태자에게는 비단 40필·옷 한 벌·은 그릇 한 개를 주고, 대재상에게는 비단 30필·옷 한 벌·은 그릇 한 개를 주고, 다음 재상에게는 비단 20필·옷 한 벌·은 그릇 한 개를 주었다.

○六年, 春正月, 封王考爲<懿恭大王>, 母<朴>氏<光和>夫人爲<光懿王大后{太后} >, 夫人<金>氏爲<文懿王妃>, 立王子<晸>爲王太子. 十五日, 幸<皇龍寺>看燈, 仍賜燕{ } 百寮. 冬十月, 伊 <允興>與弟<叔興>·<季興>謀逆, 事發覺, 走<岱山郡>, 王命追捕斬之, 夷一{三} 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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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봄 정월, 왕의 선친을 의공대왕으로 봉하고, 어머니 박씨 광화부인을 광의왕태후로 봉하고, 부인 김 씨를 문의 왕비로 봉하고, 왕자 정을 왕태자로 삼았다.
15일, 왕이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 행사를 보고, 그 자리에서 백관들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겨울 10월, 이찬 윤흥이 아우 숙흥·계흥과 함께 역모를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자 대산군으로 도주하였다. 왕이 명령을 내려 그들을 붙잡아 참수하고, 삼족을 처형하였다.

○七年, 春正月, 重修<臨海殿>. 夏五月, 京都疫. 秋八月, 大水,  不登. 冬十月, 發使分道撫問. 十二月, 客星犯大白{太白} .

趙炳舜. 『三國史節要』.
7년 봄 정월, 임해전을 중수하였다.
여름 5월, 서울에 전염병이 돌았다.
가을 8월, 홍수가 나고 곡식이 잘 여물지 않았다.
겨울 10월, 사신들을 여러 곳으로 파견하여 백성들을 위문하였다.
12월, 객성이 금성을 범하였다.

○八年, 春正月, 伊 <金銳>·<金鉉>等謀叛, 伏誅. 夏六月, 震<皇龍寺>塔. 秋八月, 重修<朝元殿>.

8년 봄 정월, 이찬 김 예·김 현 등이 반란을 도모하다가 처형 당하였다.
여름 6월, 황룡사 탑에 벼락이 쳤다.
가을 8월, 조원전을 중수하였다.

○九年, 秋七月, 遣王子蘇判<金胤>等入<唐>謝恩, 兼進奉馬二匹· 金一百兩·銀二百兩·牛黃十五兩·人蔘一百斤·大花魚牙錦一十匹·小花魚牙錦一十匹·朝霞錦二十匹·四十升白 布四十匹·三十升紵衫段四十匹·四尺五寸頭髮百五十兩·三尺五寸頭髮三百兩·金釵頭五色 帶幷班胸各一十條·鷹金  子幷紛 紅 二十副·新樣鷹金  子·紛 五色 三十副·鷹銀  子·紛 紅 二十副·新樣鷹銀  子·紛 五色 三十副· 子金  子·紛 紅 二十副·新樣 子金  子·紛 五色 三十副· 子銀  子·紛 紅 二十副·新樣 子銀  子·紛 五色 三十副·金花鷹 鈴子二百顆·金花 子鈴子二百顆·金鏤鷹尾筒五十雙·金鏤 子尾筒五十雙·銀鏤鷹尾筒五十雙·銀鏤 子尾筒五十雙·繫鷹緋 皮一百雙·繫 子緋 皮一百雙·瑟瑟鈿金針筒三十具·金花銀針筒三十具·針一千五百. 又遣學生<李同>等三人, 隨進奉使<金胤>, 入<唐>習業, 仍賜買書銀三百兩.

9년 가을 7월, 왕자인 소판 김 윤 등을 당에 보내 사은하고, 동시에 말 2 필·부금 1백 냥·은 2백 냥·우황 15냥·인삼 1백 근·대화어아금 10 필·소화어아금 10 필·조하금 20필·마흔새 흰 세모직 40필·설흔새모시 40필·넉자 5치 짜리 머리털 150냥, 석자 다섯치 짜리 머리털 3백 냥·금비녀·오색 댕기·반흉 각 10개·응금쇄선자병분삽홍도 20개·신양응금쇄선자·분삽오색도 30개·응은쇄선자·분삽홍도 20개·신양응은쇄선자·분삽오색도 30개·요자금쇄선자·분삽홍도 20개·신양요자금쇄선자·분삽오색도 30개·요자은쇄선자·분삽홍도 20개·신양요자은쇄선자·분삽오색도 30개·금화응삽령자 2백 과·금화요자령자 2백 과·금루응미통 50 쌍·금루요자미통 50 쌍·은루응미통 50 쌍·은루요자미통 50 쌍·계응비힐피 1백 쌍·계요자비힐피 1백 쌍·슬슬전금침통 30 구·금화은침통 30 구·바늘 1천5백개를 바쳤다. 또한 학생 이 동 등 세 사람으로 하여금 진봉 사신 김 윤을 수행케 하여 당에 보내 글을 배우게 하고, 그들에게 책값으로 은 3백 냥을 주었다.

○十年, 春二月, 遣沙 <金因>, 入<唐>宿衛. 夏四月, 京都地震. 五月, 王妃卒. 秋七月, 大水. 冬, 無雪. 國人多疫.

10년 봄 2월, 사찬 김 인을 당 나라에 보내 숙위를 하게 하였다.
여름 4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5월, 왕비가 죽었다.
가을 7월, 홍수가 났다.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백성들이 전염병에 많이 걸렸다.

○十一年, 春正月, 王命有司, 改造<皇龍寺>塔. 二月, 重修<月上樓>.

11년 봄 정월, 왕이 관리에게 명령하여, 황룡사 탑을 개축하게 하였다.
2월, 월상루를 중수하였다.

○十二年, 春二月, 親祀神宮. 夏四月, 京師地震. 秋八月, 國內州郡, 蝗害 .

12년 봄 2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냈다.
여름 4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가을 8월, 국내의 주와 군에 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十三年, 春, 民饑且疫, 王發使賑救. 秋九月, <皇龍寺>塔, 成九層高二十二丈.

13년 봄, 백성들이 굶주리고 또한 전염병이 돌았으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가을 9월, 황룡사 탑이 낙성되었는데, 9층으로 되어 있고, 높이가 스물 두 장이었다.

○十四年, 春正月, 上大等<金正>卒, 以侍中<魏珍>爲上大等, <藺興>爲侍中. 夏四月, <唐><僖宗>降使宣諭. 五月, 伊 <近宗>謀逆犯闕, 出禁軍擊破之. <近宗>與其黨夜出城, 追獲之車裂. 秋九月, 重修<月正堂>. <崔致遠>在<唐>登科.

14년 봄 정월, 상대등 김 정이 죽으니, 시중 위진을 상대등, 인흥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 당 희종이 사신을 보내와 황제의 말을 선포하였다.
5월, 이찬 근종이 모반하여 대궐을 침범하므로, 대궐 지키는 군사를 출동시켜 격파하였다. 근종이 그의 무리들과 함께 밤에 성 밖으로 도주하는 것을 추격 체포하여 수레에 매어 찢어 죽였다.
가을 9월, 월정당을 중수하였다.
최 치원이 당 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하였다.

○十五年, 春二月, 京都及國東地震. 星 于東, 二十日乃滅. 夏五月, 龍見王宮井, 須臾雲霧四合飛去. 秋七月八日, 王薨, 諡曰<景文>.

15년 봄 2월, 서울과 동쪽 지방에 지진이 있었다.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가 20일 만에 없어졌다.
여름 5월, 용이 왕궁의 우물에 나타났는데, 잠시 후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모여 들면서 날아 갔다.
가을 7월 8일,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경문이라 하였다.

○<憲康王>立. 諱<晸>, <景文王>之太子. 母, <文懿王后>; 妃, <懿明>夫人. 王性聰敏, 愛看書, 目所一覽, 皆誦於口. 卽位, 拜伊 <魏弘>爲上大等, 大阿 <乂謙>爲侍中, 大赦內外殊死已下.

헌강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정이며, 경문왕의 맏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문의왕후이며, 왕비는 의명부인이다. 왕은 성품이 명민하였으며 글 읽기를 좋아하였는데, 눈으로 한 번 보면 입으로 모두 외웠다. 왕위에 오르면서 이찬 위홍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대아찬 예겸을 시중으로 임명하고, 서울과 지방에 있는 사형수 이하의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二年, 春二月, <皇龍寺>齋僧, 設百高座講經, 王親幸聽之. 秋七月, 遣使入<唐>貢方物.

2년 봄 2월, 황룡사에서 모든 중에게 음식을 대접하며 백고좌를 열어 불경을 강론하였다. 왕이 직접 가서 들었다.
가을 7월, 당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三年, 春正月, 我<太祖大王>生於<松岳郡>.

3년 봄 정월, 고려 태조대왕이 송악군에서 태어났다.

○四月{年} , 夏四月, <唐><僖宗>降使, 冊封王爲使持節開府儀同三司檢校大尉{太尉} 大都督< 林州>諸軍事<新羅>王. 秋七月, 遣使朝<唐>, 聞<黃巢>賊起, 乃止. 八月, <日本國>使至, 王引見於<朝元殿>.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4년 여름 4월, 당 희종이 사신을 보내 왕을 '사지절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대도독계림주제군사신라왕'으로 책봉하였다.
가을 7월, 당에 사신을 보내려다가, 황소의 난이 일어 났다는 소문을 듣고 중지하였다.
8월, 일본국 사신이 오니, 왕이 조원전에서 접견하였다.

○五年, 春二月, 幸國學, 命博士已下講論. 三月, 巡幸國東州郡, 有不知所從來四人, 詣駕前歌歌{舞} . 形容可駭, 衣巾詭異, 時人謂之山海精靈.[古記謂王卽位元年事.] 夏六月, 一吉 <信弘>叛, 伏誅. 冬十月, 御<遵禮門>觀射. 十一月, 獵<穴城>原.

李丙燾.
今西龍.
5년 봄 2월, 왕이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 이하 사람들에게 강론을 하게 하였다.
3월, 왕이 동쪽의 주군을 순행하였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 넷이 왕의 수레 앞에 와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들의 모양이 무섭고 차림새가 괴이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산과 바다에 사는 정령이라고 하였다.[고기에는 이 사건이 왕위에 오른 첫해에 일어난 일로 기록되어 있다.]
여름 6월, 일길찬 신홍이 모반하다가 사형을 당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준례문에 행차하여 활쏘는 것을 구경하였다.
11월, 왕이 혈성 벌에서 사냥을 하였다.

○六年, 春二月, 大白{太白} 犯月. 侍中<乂謙>退, 伊 <敏恭>爲侍中. 秋八月, <熊州>進嘉禾. 九月九日, 王與左右, 登<月上樓>, 四望, 京都民屋相屬, 歌吹連聲. 王顧謂侍中<敏恭>曰: "孤聞今之民間, 覆屋以瓦不以茅, 炊飯以炭不以薪. 有是耶?" <敏恭>對曰: "臣亦嘗聞之如此" 因奏曰: "上卽位以來, 陰陽和, 風雨順, 歲有年, 民足食, 邊境謐靜, 市井歡娛, 此, 聖德之所致也." 王欣然曰: "此, 卿等輔佐之力也, 朕何德焉?"

趙炳舜. 『三國史節要』.
6년 봄 2월, 금성이 달을 범하였다.
시중 예겸이 사직하자, 이찬 민공이 시중이 되었다.
가을 8월, 웅주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쳐 왔다.
9월 9일, 왕이 좌우의 신하들과 월상루에 올라가 사방을 바라보니, 서울에 민가가 즐비하고, 노래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왕이 시중 민공을 돌아 보면서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을 덮고, 나무가 아닌 숯으로 밥을 짓는다 하니 과연 그러한가?"라고 물었다. 민공이 "저도 일찌기 그렇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이어서 "왕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음양이 조화를 이루고, 바람과 비가 순조로워서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며, 변경이 안정되고 시정이 즐거워하니, 이는 왕의 어진 덕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이 즐거워하며 "이는 그대들의 도움 때문이지, 나에게 무슨 덕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七年, 春三月, 燕群臣於<臨海殿>, 酒 , 上鼓琴, 左右各進歌詞, 極歡而罷.

7년 봄 3월, 왕이 임해전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술기운의 오르자 왕은 거문고를 타고, 신하들은 각각 가사를 지어 올리면서 마음껏 즐기다가 헤어졌다.

○八年, 夏四月, <日本>國王遣使, 進黃金三百兩·明珠一十箇. 冬十二月, <枯彌縣>女, 一産三男.

8년 여름 4월, 일본국 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백 냥과 야명주 10 개를 바쳤다.
겨울 12월, 고미현 여자가 한번에 삼형제를 낳았다.

○九年, 春二月, 王幸<三郞寺>, 命文臣各賦詩一首.

9년 봄 2월, 왕이 삼랑사에 행차하여, 문신들에게 시 한 수씩을 짓게 하였다.

○十一年, 春二月, 虎入宮庭. 三月, <崔致遠>還. 冬十月壬子, 太白晝見. 遣使入<唐>, 賀破<黃巢>賊.

11년 봄 2월, 호랑이가 대궐에 들어 왔다.
3월, 최 치원이 돌아왔다.
겨울 10월 임자일에 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당에 사신을 보내 황소의 난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十二年, 春, 北鎭奏: "狄國人入鎭, 以片木掛樹而歸." 遂取以獻, 其木書十五字云: "<寶露國>與<黑水國>人, 共向<新羅國>和通." 夏六月, 王不預, 赦國內獄囚. 又於<皇龍寺>, 設百高座講經. 秋七月五日, 薨. 諡曰<憲康>, 葬<菩提寺>東南.

12년 봄, 북쪽 진에서 "적국 사람이 진에 들어와서 판자쪽을 나무에 걸어 놓고 돌아갔다"고 상주하면서, 그것을 가져다 바쳤다. 그 판자쪽에는 "보로국과 흑수국 사람들이 모두 신라국과 화친하고자 한다"는 열 다섯 글자가 씌여 있었다.
여름 6월, 왕이 병으로 편치 못하자, 전국의 죄수들을 석방하였고, 또한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열어 불경을 강론하였다.
가을 7월 5일,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헌강이라 하고,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지냈다.

○<定康王>立. 諱<晃>, <景文王>之第二子也. 八月, 拜伊 <俊興>爲侍中. 國西旱且荒.

정강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황이며, 경문왕의 둘째 아들이다.
8월, 이찬 준흥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서쪽 지방에 가뭄이 들어 황폐하였다.

○二年, 春正月, 設百(+高) 座於<皇龍寺>, 親幸聽講. <漢州>伊 <金 >叛, 發兵誅之. 夏五月, 王疾病. 謂侍中<俊興>曰: "孤之病革矣, 必不復起. 不幸無嗣子, 然妹<曼>天資明銳, 骨法似丈夫, 卿等宜倣<善德>·<眞德>古事, 立之可也." 秋七月五日, 薨. 諡曰<定康>, 葬<菩提寺>東南.

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봄 정월, 황룡사에 백고좌를 열고 왕이 직접 가서 강론을 들었다.
한주 이찬 김 요가 모반하므로, 군사를 보내 그를 처형하였다.
여름 5월, 왕이 병들자 시중 준흥에게 말했다. "나의 병이 위급하니 다시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불행히 뒤를 이을 자식은 없으나, 누이 동생 만은 천성이 명민하고 체격이 남자와 같으니, 그대들이 선덕왕과 진덕왕의 옛 일을 본받아 그녀를 왕위에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가을 7월 5일,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정강이라 하고,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지냈다.

○<眞聖王>立. 諱<曼>, <憲康王>之女弟也.[『崔致遠文集』第二卷, 謝追贈表云: "臣<坦>言: 伏奉制旨, 追贈亡父臣<凝>爲太師, 亡兄臣<晸>爲大傅{太傅} ." 又納旌節表云: "臣長兄國王<晸>, 以去<光啓>三年七月五日, 奄御聖代, 臣姪男<嶢>生未周 , 臣仲兄<晃>權統藩垣, 又未經朞月, 遠謝明時." 以此言之, 景文王諱<凝>, 本紀則云<膺廉>, <眞聖王>諱<坦>, 本紀則云<曼>, 又<定康王><晃>以<光啓>三年薨, 本紀謂二年薨, 皆不知孰是.] 大赦, 復諸州郡一年租稅. 設百(+高) 座<皇龍寺>, 親幸聽法. 冬無雪.

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三國史節要』.
진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만이며, 헌강왕의 누이 동생이다.[최 치원 문집 제2권 사추증표에는 "신하 탄은 말합니다. 삼가 하명을 받들어 저의 죽은 아비 응을 태사로 추증하고, 죽은 형인 정을 태부로 추증하였습니다"라고 되어 있으며, 또한 납정절표에는 "저의 맏형인 국왕 정이 지난 광계 3년 7월 5일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나, 저의 조카 요는 태어난지 아직 1년이 되지 않았으므로, 저의 둘째 형인 황이 임시로 나라를 다스리다가, 또한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를 보면 경문왕의 이름이 응인데, 본기에는 응렴이라 하였고, 진성왕의 이름이 탄인데, 본기에는 만이라 하였으며, 또한 정강왕 황은 광계 3년에 죽었는데, 본기에는 2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니, 모두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모든 주와 군의 1년간의 조세를 면제하였다.
황룡사에 백고좌를 열고 왕이 직접 가서 설법을 들었다.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二年, 春二月, <少梁里>石自行. 王素與角干<魏弘>通, 至是, 常入內用事. 仍命與<大矩>和尙, 修集鄕歌, 謂之三代目云. 及<魏弘>卒, 追諡爲<惠成大王>. 此後, 潛引少年美丈夫兩三人淫亂, 仍授其人以要職, 委以國政. 由是,  倖肆志, 貨賂公行, 賞罰不公, 紀綱壞弛. 時有無名子, 欺謗時政, 構辭榜於朝路. 王命人搜索, 不能得. 或告王曰: "此必文人不得志者所爲, 殆是<大耶州>隱者<巨仁>耶?" 王命拘<巨仁>京獄, 將刑之. <巨仁>憤怨, 書於獄壁曰: "<于公>慟哭三年旱, <鄒衍>含悲五月霜. 今我幽愁還似古, 皇天無語但蒼蒼." 其夕, 忽雲霧震雷雨雹, 王懼, 出<巨仁>放歸. 三月戊戌朔, 日有食之. 王不豫, 錄囚徒, 赦殊死已下, 許度僧六十人. 王疾乃 . 夏五月, 旱.

2년 봄 2월, 소양리에서 돌이 저절로 움직였다.
왕이 원래부터 각간 위 홍과 간통하고 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서는 언제나 궁중에 들어 와서 일을 보게 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명령하여 대구 화상과 함께 향가를 수집하게 하였는데, 이를 삼대목이라고 불렀다.
위홍이 죽자 혜성대왕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이후로 왕은 젊은 미남자 두 세 명을 남몰래 불러들여 음란하게 지내고,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나라 정사를 맡겼다. 이에 따라 아첨하고 총애를 받는 자들이 방자하여지고, 뇌물을 주는 일이 공공연하게 행해졌으며, 상벌이 공평하지 못하고 기강이 문란해졌다. 이 때 누군가가 이름을 감추고 시정을 비방하는 말을 만들어 관청 거리에 방을 붙였다. 왕이 그를 수색케 하였으나 잡을 수 없었다. 누가 왕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필시 문인으로서 뜻을 펴지 못한 자의 소행이니, 아마도 대야주에 숨어 사는 거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명령을 내려 거인을 체포하여 서울 감옥에 가두고 처벌하려 하였는데, 거인이 분하고 원망스러워, 감옥 벽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우공이 통곡하니 3년이나 가물었고,
추연이 슬퍼하니 5월에도 서리 왔네.
지금 나의 깊은 시름, 옛 일과 같건만
하늘은 말없이 푸를 뿐인가.
그날 저녁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덮이고 번개가 치며 우박이 내렸다. 왕이 이를 두려워하여 거인을 석방하여 돌려 보냈다.
3월 초하루 무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왕이 병들어 편치 못하자, 죄수들을 조사하여 사형수 이하의 죄수를 석방하고, 중 6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왕의 병이 곧 나았다.
여름 5월, 가뭄이 들었다.

○三年, 國內諸州郡, 不輸貢賦, 府庫虛竭, 國用窮乏, 王發使督促. 由是, 所在盜賊蜂起. 於是, <元宗>·<哀奴>等據<沙伐州>叛. 王命奈麻<令奇>捕捉. <令奇>望賊壘, 畏不能進, 村主<祐連>, 力戰死之. 王下 斬<令奇>, <祐連>子年十餘歲, 嗣爲村主.

3년, 국내 여러 주와 군에서 납세를 하지 않아 창고가 비고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자,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독촉하였다. 이로 인하여 도처에서 도적이 봉기하였다. 이 때 원종·애노 등이 사벌주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내마 영기에게 명령하여 그들을 체포하게 하였으나, 영기가 반도의 보루를 보고 두려워하여 진군하지 못하자, 촌주 우연이 최선을 다하여 싸우다가 여기에서 전사하였다. 왕이 칙명을 내려 영기를 참수하고, 나이가 10여 세인 우연의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뒤를 이어 촌주가 되게 하였다.

○四年, 春正月, 日暈五重. 十五日, 幸<皇龍寺>, 看燈.

4년 봄 정월, 햇무리가 다섯 겹으로 나타났다.
15일, 왕이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 행사를 구경하였다.

○五年, 冬十月, <北原>賊帥<梁吉>, 遣其佐<弓裔>, 領百餘騎, 襲<北原>東部落及<溟州>管內<酒泉>等十餘郡縣.

5년 겨울 10월, 북원의 도적 두목 양길이 그의 부하 궁예로 하여금 기병 백여 명을 거느리고 북원 동쪽 부락과 명주 관내 주천 등 10여 군현을 습격하게 하였다.

○六年, <完山>賊<甄萱>據州, 自稱<後百濟>, <武州>東南郡縣降屬.

6년, 완산의 도적 견훤이 주에 웅거하여 후백제라고 자칭하였다. 무주 동남쪽의 군현이 그에게 투항하였다.

○七年, 遣兵部侍郞<金處誨>, 如<唐>納旌節, 沒於海.

7년, 병부 시랑 김 처회를 당 나라에 보내 정절을 바치게 했는데, 그는 바다에 빠져 익사하였다.

○八年, 春二月, <崔致遠>進時務一十餘條, 王嘉納之, 拜<致遠>爲阿 . 冬十月, <弓裔>自<北原>入<何瑟羅>, 衆至六百餘人, 自稱將軍.

8년 봄 2월, 최 치원이 시국에 관한 의견 십여 조목을 작성하여 바쳤다. 왕이 이를 기쁘게 받아 들이고, 치원을 아찬으로 삼았다.
겨울 10월, 궁예가 북원으로부터 하슬라에 들어오니, 따르는 무리가 6백여 명에 달하였다. 그는 장군이라고 자칭하였다.

○九年, 秋八月, <弓裔>擊取<猪是{猪足}> ·< 川>二郡, 又破<漢州>管內<夫若>·<鐵圓>等十餘郡縣. 冬十月, 立<憲康王>庶子<嶢>爲太子. 初, <憲康王>觀獵, 行道傍見一女子, 姿質佳麗. 王心愛之, 命後車載, 到 宮野合, 卽有娠而生子. 及長, 體貌魁傑, 名曰<嶢>. <眞聖>聞之, 喚入內, 以手撫其背曰: "孤之兄第{弟} 姉妹, 骨法異於人, 此兒, 背上兩骨隆起, 眞<憲康王>之子也." 仍命有司, 備禮封崇.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9년 가을 8월, 궁예가 저족·성천의 두 군을 탈취하고, 또한 한주 관내의 부약·철원 등 10여 군현을 격파하였다.
겨울 10월, 헌강왕의 서자 요를 태자로 삼았다.
처음에 헌강왕이 사냥 구경을 하다가, 길 옆에서 한 여인을 보았는데, 그녀의 자태가 아름다왔다. 왕이 마음 속으로 그녀를 사랑하여 뒷수레에 태우고, 행재소에 와서 야합하였는데, 바로 임신이 되어 아들을 낳았다. 그가 장성하자 체격이 크고 용모가 걸출하므로 이름을 요라고 하였다. 진성왕이 이 말을 듣고 그를 궁에 불러들여, 손으로 그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나의 형제 자매의 골격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데, 이 아이는 등에 두 뼈가 솟아 있으니, 정말 헌강왕의 아들이다"라고 말하고, 곧 관리에게 명하여 예를 갖추어 높이 봉하였다.

○十年, 賊起國西南, 赤其袴以自異, 人謂之<赤袴賊>. 屠害州縣, 至京西部<牟梁里>, 劫掠人家而去.

10년, 도적들이 서남쪽에서 봉기하였다. 그들은 바지를 붉게 물들여 남들과 구별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붉은 바지를 입은 도적'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주와 현을 도륙하고, 서울의 서부 모량리까지 와서 인가를 위협하고 약탈하여 돌아갔다.

○十一年, 夏六月, 王謂左右曰: "近年以來, 百姓困窮, 盜賊蜂起, 此, 孤之不德也. 避賢讓位, 吾意決矣." 禪位於太子<嶢>. 於是, 遣使入<唐>表奏曰: "臣某言, 居羲仲之官, 非臣素分; 守<延陵>之節, 是臣良圖. 以臣姪男<嶢>, 是臣亡兄<晸>息. 年將志學, 器可興宗, 不假外求, 爰從內擧, 近已 權藩寄, 用靖國災." 冬十二月乙巳, 王薨於北宮, 諡曰眞聖, 葬于<黃山>.
三國史記卷第十一.

11년 여름 6월, 왕이 측근들에게 "근년 이래로 백성의 생활이 곤궁해지고 도적들이 봉기하니, 이는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이다. 숨어 있는 어진 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나의 뜻이 결정 되었노라"라고 말하고, 왕위를 태자 요에게 선양하였다. 이에 당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말했다.
"신하 아무게는 아룁니다. 희중의 관직에 처하는 것이 저의 본분이 아니며, 연릉의 절조를 지키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좋은 방도입니다. 저의 조카 요는 죽은 형 정의 아들입니다. 그는 나이가 열댓 살이 되었고, 종실을 흥성케할 자질이 있기에, 인재를 밖에서 구하지 않고 안에서 선택하여, 근일에 이미 나라 일을 임시로 맡겨 국가의 재난을 안정시키게 하고 있습니다."
겨울 12월 을사에, 왕이 북궁에서 죽었다. 시호를 진성이라 하고 황산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 11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