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신라 본기 (원문+한글) 권 제 5
三國史記卷第五.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集賢殿太學士監修國史上柱國致仕臣<金富軾>奉宣撰.
삼국사기 권 제 5
수충 정난 정국 찬화 동덕 공신, 개부 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 이례부사, 집현전 태학사, 감수국사, 상주국, 치사 신 김 부식이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편찬함.
新羅本紀第五.
<善德王>·<眞德王>·<大宗王{太宗王} >.
허성도.
신라본기 제 5
선덕왕, 진덕왕, 태종왕.
○<善德王>立. 諱<德曼>, <眞平王>長女也, 母, <金>氏<摩□{摩耶}> 夫人. <德曼>性寬仁明敏. 王薨, 無子, 國人立<德曼>, 上號<聖祖皇姑>. 前王時, 得自<唐>來牡丹花圖幷花子, 以示<德曼>. <德曼>曰: "此□□□□{花雖絶艶}, □□□□{必是無香} 氣." 王笑曰: "爾何以□□{知之} ?" □□{對曰} : "□□□□□{圖花無蜂蝶} , □□{故知}之 . 大抵女有國色, □□□{男隨之} , □□□□{花有香氣} , □□□□{蜂蝶隨之} 故也, 此花絶艶, 而圖畵又無蜂蝶, 是必無香花." 種植之, 果如所言. 其先識如此.
趙炳舜. 『三國遺事』李丙燾는 [三國遺事]와 [通鑑]을 참고하여, '此花雖絶艶, 而必無香氣.'로 보았고, 今西龍은 '此花( )( )( )( ), 必定無香氣'로 보았고, [북한본]은 東國通鑑을 참고하여, '此花雖絶艶, 必是無香氣.'로 보았다.李丙燾.
今西龍.李丙燾.
今西龍.李丙燾.
今西龍은 이 부분을 '畵花而無蝶'으로 보았다. 李丙燾.
今西龍.李丙燾.李丙燾.
[북한본].李丙燾.
[북한본].
선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덕만이며, 진평왕의 맏딸이다.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이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고 명민하였다. 진평왕이 별세하였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덕만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성조황고라는 칭호를 올렸다. 전 임금 때 당 나라에서 온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얻어 덕만에게 보인 적이 있었다. 덕만은 "이 꽃이 비록 곱기는 하지만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왕은 웃으면서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꽃을 그렸으나 나비가 없기에 이를 알았습니다. 무릇 여자로서 국색을 갖추고 있으면 남자가 따르는 법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따르는 법입니다. 이 꽃이 무척 고운데도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이는 틀림없이 향기가 없는 꽃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씨앗을 심었는데 과연 그녀가 말한 것과 같았다. 그녀의 앞을 내다 보는 식견이 이와 같았다.
○元年, 二月, 以大臣<乙祭>摠持國政. 夏五月, 旱, 至六月, 乃雨. 冬十月, 遣使撫問國內鰥寡孤獨, 不能自存者, 賑恤之. 十二月, 遣使入<唐>朝貢.
원년 2월, 대신 을제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여름 5월, 가뭄이 들었는데 6월이 되자 비가 왔다.
겨울 10월, 특사를 보내 국내의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으로서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자들에게 곡식을 주어 구제하였다.
12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年, 春正月, 親祀神宮, 大赦. 復諸州郡一年租調. 二月, 京都地震. 秋七月, 遣使大<唐>朝貢. 八月, <百濟>侵西邊.
2년 봄 정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내고 대사령을 내렸다. 모든 주와 군의 1년 납세를 면제하였다.
2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가을 7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8월,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三年, 春正月, 改元<仁平>. <芬皇寺>成. 三月, 雹大如栗.
3년 봄 정월, 연호를 인평으로 고쳤다. 분황사가 낙성되었다.
3월, 크기가 밤알 정도 되는 우박이 내렸다.
○四年, <唐>遣使持節, 冊命王爲柱國<樂浪郡>公<新羅>王, 以襲父封. <靈廟寺>成. 冬十月, 遣伊 <水品>·<龍樹>[一云<龍春>.], 巡撫州縣.
4년,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황제의 신임표를 가지고 와서 왕을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책봉하여, 아버지의 봉작을 잇게 하였다. 영묘사가 낙성되었다.
겨울 10월, 이찬 수품과 용수[용춘이라고도 한다.]를 보내 주와 현을 순행하며 백성들을 위로하게 하였다.
○五年, 春正月, 拜伊 <水品>爲上大等. 三月, 王疾, 醫禱無效, 於<皇龍寺>設百高座, 集僧講『仁王經』, 許度僧一百人. 夏五月, 蝦 大集宮西<玉門池>. 王聞之, 謂左右曰: "蝦 怒目, 兵士之相也. 吾嘗聞西南邊亦有地名<玉門谷>者, □□□□□□{其或有隣國兵} 潛入其中乎?" 乃命將軍<閼川>·□□□□□□□{<弼呑>率兵搜之} , 果<百濟>將軍<于召>欲襲<獨山城>, 率甲士五百人, 來伏其處. <閼川>掩擊盡殺之. <慈藏>法師入<唐>求法.
李丙燾. [三國遺事]. [通鑑].
今西龍은 '必有敵兵( )( )'으로 되어 있다. [북한본]은 [東國通鑑]을 참고하여 '意或有隣國兵'으로 교감하였다.李丙燾. [三國遺事]. [通鑑].
今西龍은 '弼呑等往搜之( )'로 보았다.
5년 봄 정월, 이찬 수품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3월, 왕에게 병환이 났으나 약과 기도가 모두 효험이 없었으므로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열고, 중을 모아 인왕경을 강의하고, 중 1백 명에게 도첩을 허락하였다.
여름 5월, 개구리 떼가 대궐 서쪽 옥문지에 많이 모였다. 왕이 이를 듣고 좌우 측근들에게 "개구리의 성난 눈은 병사의 모습이다. 내가 일찌기 서남쪽 변경에 옥문곡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있다고 들었다. 이웃 나라 군사가 혹시 이 골짜기에 잠입한 것이 아닌가 싶구나."라고 말했다. 그리고 곧 장군 알천과 필탄으로 하여금 그 곳에 가서 수색하게 하였다. 그 곳에는 과연 백제 장군 우소가 독산성을 습격하기 위하여 군사 5백 명을 이끌고 와서 숨어 있었다. 알천이 이를 습격하여 모두 죽였다.
자장 법사가 불법을 탐구하기 위하여 당 나라에 갔다.
○六年, 春正月, 拜伊 <思眞>爲舒弗邯. 秋七月, 拜<閼川>爲大將軍.
6년 봄 정월, 이찬 사진을 서불한으로 임명하였다.
가을 7월, 알천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였다.
○七年, 春三月, <七重城>南大石自移三十五步. 秋九月, 雨黃花. 冬十月, <高句麗>侵北邊<七重城>, 百姓驚擾入山谷. 王命大將軍<閼川>安集之. 十一月, <閼川>與<高句麗>兵, 戰於<七重城>外, 克之, 殺虜甚衆.
7년 봄 3월, 칠중성 남쪽에 있던 큰 돌이 저절로 35보 거리를 이동하였다.
가을 9월, 노랑 색의 꽃비가 내렸다.
겨울 10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칠중성을 침범하였다. 백성들이 놀라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왕이 대장군 알천에게 명령하여 이들을 안심시켜 다시 모여 살도록 하였다.
11월, 알천이 고구려 군사와 칠중성 밖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이 싸움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八年, 春二{正} 月, 以<何瑟羅州>爲北小京, 命沙 <眞珠>鎭之. 秋七月, 東海水赤且熱, 魚鼈死.
趙炳舜. 『三國史節要』.
8년 봄 2월, 하슬라주를 북소경으로 만들었다. 사찬 진주로 하여금 이 성을 수비하게 하였다.
가을 7월, 동해의 물이 붉게 변하고 더워져서 고기가 죽었다.
○九年, 夏五月, 王遣子弟於<唐>, 請入國學. 是時, <太宗>大徵天下名儒爲學官, 數幸國子監, 使之講論, 學生能明一大經已上, 皆得補官. 增築學舍千二百間, 增學生滿三千二百六十員. 於是, 四方學者雲集京師. 於是, <高句麗>·<百濟>·<高□{高昌} >·<&□蕃{□吐蕃}> , 亦遣子弟入學.
李丙燾. [唐書] 儒學傳.李丙燾. [唐書] 儒學傳.
9년 여름 5월, 왕이 자제들을 당 나라에 보내 국학에 입학시켜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 때 태종은 천하의 유명한 학자들을 모아 학관으로 임명하고, 국자감에 자주 가서 그들에게 강론을 하게 하였으며, 학생들 가운데 [예기]나 [춘추좌씨전] 가운데 한 가지 이상 능통한 자에게는 모두 관직을 주고, 학사 1천 2백 간을 증축하고, 학생을 3천 2백 60명으로 증원하였다. 이리하여 사방의 학자들이 서울로 모였다. 이 때 고구려, 백제, 고창, 토번도 자제들을 보내 입학시켰다.
○十一年, 春正月, 遣使大<唐>獻方物. 秋七月, <百濟>王<義慈>大擧兵, 攻取國西四十餘城. 八月又與<高句麗>謀欲取< 項城>, 以絶歸<唐>之路. 王遣使告急於<太宗>. 是月, <百濟>將軍<允忠>, 領兵攻拔<大耶城>, 都督伊 <品釋>·舍知<竹竹>·<龍石>等死之. 冬, 王將伐<百濟>, 以報<大耶>之役, 乃遣伊 <金春秋>於<高句麗>, 以請師. 初, <大耶>之敗也, 都督<品釋>之妻死焉, 是<春秋>之女也. <春秋>聞之, 倚柱而立, 終日不瞬, 人物過前而不之省. 旣而言曰: "嗟乎! 大丈夫豈不能呑<百濟>乎!" 便詣王曰: "臣願奉使<高句麗>請兵, 以報怨於<百濟>." 王許之. <高句麗>王<高臧>素聞<春秋>之名, 嚴兵衛而後見之. <春秋>進言曰: "今<百濟>無道, 爲長蛇封豕, 以侵 我封疆. 寡君願得大國兵馬, 以洗其恥, 乃使下臣致命於下執事." <麗>王謂曰: "<竹嶺>本是我地分, 汝若還<竹嶺>西北之地, 兵可出焉." <春秋>對曰: "臣奉君命乞師, 大王無意救患以善隣, 但威劫行人, 以□□{要歸} 地, 臣有死而已, 不知其他." <臧>怒其言之□□{不遜} , □{囚} 之別館, <春秋>潛使人告本國王. 王命大將軍<金庾信>, 領死士一萬人赴之. <庾信>行軍過<漢江>, 入<高句麗>南境, <麗>王聞之, 放<春秋>以還. 拜<庾信>爲<押梁州>軍主.
今西龍.李丙燾. [通鑑].今西龍.
11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7월, 백제왕 의자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서쪽 지방의 40여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고, 8월에 다시 고구려와 공모하여 당항성을 빼앗아 당 나라로 가는 길을 막고자 하였다. 왕이 사신을 당 나라로 보내 태종에게 급한 사정을 통보하였다. 이 달에 백제 장군 윤충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도독 이찬 품석과 사지 죽죽·용석 등이 이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겨울에 왕이 백제를 공격하여 대야성의 패배를 보복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이찬 김 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군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애초에 대야성이 패했을 때 도독 품석의 아내가 여기서 죽었다. 그녀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는 이 소식을 듣고, 온종일 기둥에 기대서서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사람이나 물체가 앞을 지나가도 알아 보지 못했다. 그는 얼마 후에 "아아! 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이길 수 없으랴!"하고는 곧 왕에게 나아가 "명령을 내려 주신다면 제가 고구려에 가서 군사의 파견을 요청하여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했다. 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고구려왕 고장은 원래 춘추에 대한 명성을 듣고 있었다. 그는 먼저 군사의 호위를 엄하게 한 뒤에 춘추를 만났다. 춘추가 말했다.
"지금 백제가 무도하여, 대악당이 되어 우리 국토를 침범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임금이 귀국의 군사를 얻어 치욕을 씻고자 하여, 저를 보내어 하집사에게 명령을 전하게 한 것입니다."
고구려왕이 말했다.
"죽령은 본래 우리 땅인데 너희들이 만약 죽령 서북땅을 돌려 준다면 군사를 파견할 수 있다."
춘추가 대답했다.
"제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군사를 빌리고자 하여 왔으나, 대왕께서는 이웃의 환난을 구원하여 이웃과 잘 지낼 뜻은 없고, 다만 남의 나라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주기를 요구하니, 저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 다른 것은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이 공손하지 않자 고장은 분노하여 그를 별관에 가두었다. 춘추는 사람을 시켜 비밀리에 본국 왕에게 이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왕은 대장군 김 유신에게 명령하여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로 가도록 하였다. 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 고구려의 남쪽 변경으로 들어가자, 고구려왕이 이를 듣고 춘추를 석방하여 돌려 보냈다.
유신을 압량주의 군주로 임명하였다.
○十二年, 春正月, 遣使大<唐>獻方物. 三月, 入<唐>求法高僧<慈藏>還. 秋九月, 遣使大<唐>上言: "<高句麗>·<百濟>侵凌臣國, 累遭攻襲數十城. 兩國連兵, 期之必取, 將以今玆九月大擧, 下{臣} 國杜 {社稷} 必不獲全, 謹遣陪臣歸命大國, 願乞偏師, 以存救援." 而{帝} 謂使人曰: "我實哀爾爲二國所侵, 所以頻遣使人和爾三國. <高句麗>·<百濟>旋踵 悔, 意在呑滅, 而分爾土宇. 爾國設何奇謀以免顚越?" 使人曰: "吾{臣} 王事窮計盡, 唯告急大國, 冀以全之." 帝曰: "我少發邊兵, 摠<契丹>·<靺鞨>直入<遼東>, 爾國自解, 可緩爾一年之圍. 此後知無繼兵, 還肆侵侮, 四國俱擾, 於爾未安, 此爲一策. 我又能給爾數千朱袍·丹幟, 二國兵至, 建而陳之, 彼見者以爲我□{兵} , 必皆奔走, 此爲二策. <百濟>國恃{負} 海之 {險} , 不修機械, 男女紛{分} 雜, 互{好} 相燕聚. 我以數十百船, 載以甲卒, 銜枚泛海, 直襲其地. 爾國以婦人爲主, 爲隣國輕侮, 失主延寇, 靡歲休寧. 我遣一宗支{枝} , 與{以}李丙燾. [冊府元龜]. 爲爾國主. 而自不可獨王{往}李丙燾. [冊府元龜]., 當遣兵營護, 待爾國安, 任爾自守, 此爲三策. 爾宜思之, 將從何事?" 使人但唯而無對. 帝嘆{難} 其庸鄙, 非乞師告急之才也.
李丙燾. [冊府元龜].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冊府元龜].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冊府元龜].李丙燾. [冊府元龜].李丙燾. [冊府元龜]....李丙燾. [冊府元龜].李丙燾. [冊府元龜].李丙燾. [冊府元龜].李丙燾. [冊府元龜].李丙燾. [冊府元龜].
12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3월, 당 나라에 들어가 불법을 탐구하던 고승 자장이 돌아왔다.
가을 9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말했다.
"고구려와 백제가 폐국을 침공하여 수십개의 성이 누차 공격을 당했습니다. 이제 이들 두 나라 군사가 연합하여 우리 나라를 필히 빼앗고자, 이번 9월에 군사를 크게 일으키려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나라의 사직이 유지될 수 없습니다. 삼가 저의 신하를 보내 대국에 우리의 운명을 맡기오니, 일부의 군대라도 빌려 주어 구원해주기를 원합니다."
황제가 사신에게 말했다.
"너희가 두 나라의 침략을 받는 것이 진실로 애통하다. 그렇기에 자주 사신을 보내 너희 세 나라가 화친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는, 사신이 발길을 돌리자마자 약속을 어기고 있다. 이는 너희 나라를 빼앗고 너희 나라를 나누어 갖자는 데에 뜻이 있는 것이다. 너희 나라에는 사직을 보전할 수 있는 무슨 특별한 대책이라도 있는가?"
사신이 말했다. "우리 임금께서는, 상황은 급하고 대책이 없으므로 급한 사정을 대국에 말하여 나라의 보전을 바라는 것입니다."
황제가 말했다.
"내가 변방의 군사를 조금 내고, 거란·말갈과 함께 곧장 요동을 치면, 너희 나라에 대한 포위가 자연히 풀릴 것이다. 이렇게 되면 1년 동안은 포위 상태를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후에 군사를 계속하여 보내지 않을 것을 그들이 알면, 도리어 함부로 침략을 할 것이다. 이리되면 네 나라가 모두 소란해지고 너희 나라도 편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첫째 계책이다. 내가 또한 너희 나라에 우리 나라가 사용하는 붉은 옷과 붉은 기 수천 벌을 주고, 고구려 백제의 두 나라 군사가 올 때 이것을 벌려 세워 놓아라. 그리하면 저들은 이를 우리 나라 군대로 여기고 반드시 모두 도주할 것이다. 이것이 두번 째 계책이다. 백제는 바다의 험한 요새를 믿고 병기를 수리하지 않은 채 남녀가 난잡하게 뒤섞여 놀고 있는 실정이다. 내가 수십 수백 척의 배에 무장한 군사를 싣고 소리없이 바다를 건너 바로 그 나라를 습격할 것이다. 너희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았다. 그렇기에 이웃 나라로부터 경멸을 당하고 있으며, 주인을 잃은 채 도적이 들끓고 있으니 편안한 시절이 없다. 내가 나의 친척 한 명을 보내 너희 나라의 임금을 삼겠다. 그러나 그가 혼자 임금 노릇을 할 수는 없을 것이므로 당연히 군사를 파견하여 보호하다가 너희 나라가 안정되면, 너희 나라에 맡겨 스스로 나라를 지키도록 할 것이다. 이것이 세번 째 계책이다. 장차 어느 계책을 따르겠는지 그대는 잘 생각하여 보아라."
사신은 다만 "예"할 뿐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황제는 그의 사람됨이 용렬하여, 군사를 요청하고 급한 상황을 호소할 만한 인재가 못됨을 개탄하였다.
○十三年, 春正月, 遣使大<唐>獻方物. <太宗>遣司農丞<相里玄奬>齎璽書, 賜<高句麗>, 曰: "<新羅>委命國家, 朝貢不闕, 爾與<百濟>, 宜卽 兵. 若更攻之, 明年當出師擊爾國矣." <蓋蘇文>謂<玄奬>曰: "<高句麗>·<新羅>, 怨隙已久. 往者<隋>室相侵, <新羅>乘 奪<高句麗>五百里之地, 城邑皆據有之, 非返地還城, 此兵恐未能已." <玄奬>曰: "已往之事, 焉可追論?" <蘇文>竟不從. 秋九月, 王命<庾信>爲大將軍{上將軍} , 領兵伐<百濟>, 大克之, 取城七.
趙炳舜. 『三國史記』 列傳.
13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태종이 사농승 상리현장에게 조서를 주어 고구려에 보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라는 운명을 우리 나라에 맡기고, 조공을 하지 않는 일이 없으니 너희 나라와 백제는 마땅히 군사를 곧 거두어 들여야 한다. 만약 또 다시 신라를 공격을 한다면 내년에는 틀림없이 군대를 동원하여 너희 나라를 공격할 것이다." 개소문은 현장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구려와 신라는 사이가 나빠진지 이미 오래이다. 과거 수 나라가 침범하였을 때, 신라는 그 틈을 타서 고구려의 땅 5백여 리를 빼앗고, 성읍을 모두 차지하였으니, 그 땅과 성을 돌려주지 않으면 이번 전쟁은 그만 둘 수 없을 것이다." 현장은 "지나간 일을 어찌 따질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으나, 개소문은 끝까지 따르지 않았다.
가을 9월, 왕이 유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하였다. 유신은 크게 승리하여 일곱 성을 빼앗았다.
○十四年, 春正月, 遣使大<唐>貢獻方物. <庾信>自伐<百濟>還, 未見王, <百濟>大軍復來寇邊. 王命□□{<庾信> /拒之 }, 遂不至家, 往伐破之, 斬首二千□{級} . □□{三月} , □□{還命} □於王, 未得歸家, 又□{急} 報<百濟>復來侵. 王以事急, 乃曰: "國之存亡, 繫公一身, 庶不憚勞, 往其圖之!" <庾信>又不歸家, 晝夜鍊兵. 西行道, 過宅門, 一家男女, 瞻望涕泣, 公不顧而歸. 三月, 創造<皇龍寺>塔, 從<慈藏>之請也. 夏五月, <太宗>親征<高句麗>, 王發兵三萬以助之. <百濟>乘虛, 襲取國西七城. 冬十一月, 拜伊 <毗曇>爲上大等.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李丙燾. 庾信傳.李丙燾. 庾信傳.李丙燾. 庾信傳.李丙燾. 庾信傳.
趙炳舜. [三國史節要].
14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유신은 백제를 치고 돌아와서, 아직 왕도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대부대의 백제군이 다시 변경을 침범하였다. 왕은 유신에게 출정을 명하였다. 유신은 집에도 가보지 못한 채 출정하여 백제군을 격파하고 2천 명의 목을 베었다. 3월에 유신이 돌아와 왕에게 복명하고 아직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백제가 다시 침노한다는 급보가 왔다. 왕은 사세가 급하다고 판단하고 유신에게 말했다. "나라의 존망이 공의 한 몸에 매었으니, 노고를 마다하지 말고 가서 대책을 도모하라!" 유신은 또 다시 집에 돌아가지 않고, 밤낮으로 군사를 훈련시켰다. 그가 서쪽으로 행군하는 도중에 자기의 집 앞을 통과하게 되었다. 온 집안 식구들이 나와 유신을 바라보고 눈물지었다. 그러나 그는 돌아 보지도 않고 싸움터로 갔다.
3월, 황룡사 탑을 세웠다. 이는 자장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여름 5월, 당 나라 태종이 직접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왕은 군사 3만을 동원하여 이를 도왔다. 백제는 이 틈을 타서 신라를 습격하여 서쪽의 일곱 성을 빼앗았다.
겨울 11월, 이찬 비담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十六年, 春正月, <毗曇>·<廉宗>等, 謂女主不能善理, 因謀叛擧兵, 不克. 八日{月} , 王薨. 諡曰<善德>, 葬于<狼山>.[『唐書』云: "<貞觀>二十一年卒." 『通鑑』云: "二十五{二} 年卒." 以本史考之, 『通鑑』, 誤也.]
○論曰: 臣聞之, 古有<女 >氏, 非正是天子, 佐<伏犧>理<九州>耳, 至若<呂雉>·<武 >, 値幼弱之主, 臨朝稱制, 史書不得公然稱王, 但書<高皇后呂氏>·<則天皇后武氏>者. 以天言之, 則陽剛而陰柔, 以人言之, 則男尊而女卑. 豈可許 出閨房, 斷國家之政事乎? <新羅>扶起女子, 處之王位, 誠亂世之事. 國之不亡, 幸也. 『書』云: "牝鷄之晨." 『易』□{云} : □□□{羸豕孚} ." 其可不爲之戒哉?
『북한본』.李丙燾.今西龍.今西龍.
16년 봄 정월, 비담과 염종 등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구실로 군사를 동원하여 반역을 도모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8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선덕이라 하고 낭산에 장사지냈다.[[당서]에는 '정관 21년에 죽었다'고 하였고, [통감]에는 '25년에 죽었다'고 하였는데, 이 책에서 고증한다면 통감이 잘못이다.]
저자의 견해 :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옛날에 여와씨가 있었으나, 그녀는 천자가 아니라 복희를 도와 9주를 다스렸을 뿐이며, 여치와 무조 같은 경우에는 어리고 약한 임금을 만났기에 조정에 나와 정사를 보았으므로, 역사서에서는 공공연히 임금이라 일컫지 못하고 다만 고황후 여씨, 측천황후 무씨로만 기록하고 있다. 하늘의 원리로 말한다면, 양(陽)은 강하고 음(陰)은 부드러운 것이며, 사람의 원리로 말한다면,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한 것이다. 어찌 늙은 할미가 규방을 나와 국가의 정사를 처리하는 것을 허락할 수 있을 것인가? 신라는 여자를 추대하여 왕위에 앉게 하였다. 이는 실로 어지러운 세상에나 있을 일이었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서경]에는 "암탉이 새벽에 운다"고 하였고, 주역에는 "암퇘지가 껑충거린다"고 하였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眞德王>立. 名<勝曼>, <眞平王>母弟<國飯>[一云<國芬>.]葛文王之女也, 母, <朴>氏<月明>夫人. <勝曼>姿質豊麗, 長七尺, 垂手過膝.
진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녀의 이름은 승만이며, 진평왕의 동복 아우인 갈문왕 국반[국분이라고도 한다.]의 딸이다. 어머니는 박씨 월명부인이다. 승만은 자태가 곱고 아름다웠으며, 키가 7척이었고, 팔을 늘이고 있으면 그 길이가 무릎을 넘었다.
○元年, 正月十七日, 誅<毗曇>, 坐死者三十人. 二月, 拜伊 <閼川>爲上大等, 大阿 <守勝>爲<牛頭州>軍主. <唐><大宗{太宗}> 遣使持節, 追贈前王爲光樣大夫{光祿大夫} . 仍冊命王爲柱國封<樂浪郡>王. 秋七月, 遣使入<唐>謝恩. 改元<太和>. 八月, 彗星出於南方, 又衆星北流. 冬十月, <百濟>兵圍<茂山>·<甘勿>·<桐岑{洞岑}> 三城, 王遣<庾信>, 率步騎一萬以拒之, 苦戰氣竭. <庾信>麾下<丕寧子>及其子<擧眞>入敵陣, 急格死之, 衆皆奮擊, 斬首三千餘級. 十一月, 王親祀神宮.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원년 봄 정월 17일, 비담을 목베어 처벌하였다. 이에 연루되어 죽은 자가 30명이었다. 2월에 이찬 알천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대아찬 수승을 우두주 군주로 임명하였다. 당 태종이 지절사를 보내 전왕을 광록대부로 추증했다. 그리고 왕을 주국으로 삼아 '낙랑군왕'으로 책봉하였다.
가을 7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은공에 사례하였다. 연호를 태화로 고쳤다.
8월, 혜성이 남쪽에 나타나고, 또한 별 무리가 북쪽으로 흘러갔다.
겨울 10월, 백제 군사가 무산성, 감물성, 동잠성의 3성을 포위하였다. 왕은 유신을 파견하여,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항하게 하였다. 그들은 악전고투로 기운이 다하였다. 그런 가운데 유신의 부하 비녕자와 그 아들 거진이 적진에 들어가 격렬하게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에 여러 군사들이 용감하게 공격하여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11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二年, 春正月, 遣使大<唐>朝貢. 三月, <百濟>將軍<義直>侵西邊, 陷<腰車>等一十餘城. 王患之, 命<押督州{押梁州}> 都督<庾信>以謀之. <庾信>於是訓勵士卒, 將以發行, <義直>拒之. <庾信>分軍爲三道, 夾□□{擊之} , □□{<百濟>} 兵敗走. <庾信>追北, 殺之幾盡. 王悅賞□□□□{賜士卒有} 差. 冬, 使<邯帙許>朝<唐>. <太宗>勅御史問: "<新羅>臣事大朝, 何以別稱年號?" <帙許>言: "曾是天朝未頒正朔, 是故先祖<法興王>以來, 私有紀年, 若太{大 /天 }朝有命, 小國又何敢焉?" <太宗>然之. 遣伊 <金春秋>及其子<文王{文汪}> 朝<唐>, <太宗>遣光祿卿<柳亨>郊勞之. 旣至, 見<春秋>儀表英偉, 厚待之. <春秋>請詣國學, 觀釋奠及講論, <太宗>許之, 仍賜御製<溫湯>及<晉祠>碑幷新撰『晉書』. 嘗召燕見, 賜以金帛尤厚, 問曰: "卿有所懷乎?" <春秋> 奏曰: "臣之本國, 僻在海隅, 伏事天朝, 積有歲年, 而<百濟>强猾, 屢肆侵凌, 況往年大擧深入, 攻陷數十城, 以塞朝宗之路. 若陛下不借天兵, 除凶惡, 則 邑人民, 盡爲所虜, 則梯航述職, 無復望矣." <太宗>深然之, 許以出師. <春秋>又請改其章服, 以從中華制. 於是, 內出珍服, 賜<春秋>及其從者. 詔授<春秋>爲特進, <文王{文汪}> 爲左武衛將軍. 還國詔令三品已上燕餞之, 優禮甚備. <春秋>奏曰: "臣有七子, 願使不離聖明□衛{宿衛} ." 乃命其子<文注{文汪}> 與大監□□. □□□□□□{<春秋>還至海上} , 遇<高句麗>邏兵. <春秋>從者<溫君解>, 高冠大衣, 坐於船上, 邏兵見以爲<春秋>, 捉殺之. <春秋>乘小船至國. 王聞之嗟痛, 追贈<君解>爲大阿 , 優賞其子孫.
趙炳舜. 『三國史節要』, 『三國史記』 列傳.李丙燾. 新本.李丙燾. 新本.李丙燾. 新本.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李丙燾. [通鑑].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今西龍.李丙燾. [通鑑].
辛鎬烈.李丙燾. [通鑑].
2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3월, 백제 장군 의직이 서쪽 변경을 침범하여 요거 등 10여 성을 점령하였다. 왕이 이를 걱정하여 압독주 도독 유신으로 하여금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유신이 군사들을 격려하여 작전을 시작하려 하자 의직이 저항하였다. 유신이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협격하자, 백제 군사가 패주하였다. 유신은 도망가는 백제 군사를 추격하여 거의 모두 죽였다. 왕이 기뻐하면서 군사들에게 공훈에 따라 상을 주었다.
겨울, 감질허를 당 나라에 보내 조회하도록 하였다. 태종이 어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묻게 하였다. "신라가 신하의 자격으로 대국을 섬기면서 어찌하여 당과 다른 연호를 사용하는가?" 질허는 "일찌기 대국 조정에서 정삭(正朔)을 반포하지 않았으므로, 선조 법흥왕 이래 우리 나름대로의 연호를 사용한 것이다. 만약 대국 조정의 명령이 있었다면, 우리 나라가 어찌 감히 다른 연호를 사용하였겠는가?"라고 말했다. 태종이 이를 수긍하였다. 이찬 김 춘추와 그의 아들 문왕을 당 나라에 파견하여 조회케 하였다. 태종은 광록경 유형을 교외까지 내보내 맞이하면서 그들을 위로하였다. 그들이 도착하자 태종이 춘추의 풍모가 영특하며 늠늠한 것을 보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춘추는 국학에 가서 석전과 강론을 참관하기를 요청하였다. 태종이 이를 허락하고, 당의 황제가 지은 온탕 및 진사비의 비문과 새로 지은 [진서]를 주었다. 태종이 하루는 춘추를 연회에 불러 황금과 비단을 더욱 후하게 주면서 "그대에게 무슨 소원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춘추가 무릎을 꿇고 "신의 나라가 멀리 바다 한 구석에 있어, 대국을 섬긴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제가 강성하고 교활하여 침략을 일삼아 왔습니다. 더구나 지난 해에는 대군을 거느리고 대대적으로 침입하여 수십개의 성을 점령하여, 대국에 입조할 길을 막았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군사를 보내 그 흉악한 무리들을 없애지 않는다면, 우리 나라 백성은 모두 포로가 될 것이며, 육로와 수로를 거쳐 술직하는 일도 다시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태종이 크게 동감하고 군사의 파견을 승락하였다. 춘추는 또한 관리들의 휘장과 복식을 바꾸어 중국의 제도를 따르겠다고 청했다. 이에 태종은 내전으로 하여금 진귀한 의복을 춘추와 수행원들에게 하사하였다. 태종은 조칙을 내려 춘추를 특진에, 문왕을 좌무위장군에 제수하였다. 춘추가 귀국할 때, 태종이 3품 이상의 관리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고 그들과 전별하였다. 태종이 그들을 우대하는 예절이 이와 같이 극진하였다. 춘추는 황제에게 "저의 자식이 일곱입니다. 원컨대 그 중의 하나인 문왕으로 하여금 성상의 곁을 떠나지 않는 숙위가 되게 하여 주소서!"라고 말하였다. 태종은 곧 그의 아들 문왕과 대감 (원문 2자 결자)에게 숙위를 명하였다. 춘추가 귀국하는 도중에 바다에서 고구려의 순라병을 만났다. 이렇게 되자 춘추의 시종인 온 군해가 큰 모자를 쓰고 대의를 입고 배 위에 앉아 있었다. 순라병은 그를 춘추로 알고 잡아 죽였다. 춘추는 작은 배를 타고 신라로 돌아왔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군해에게 대아찬을 추증하고, 그의 자손들에게 상을 후하게 주었다.
○三年, 春正月, 始服中朝衣冠. 秋八月, <百濟>將軍<殷相>率衆來, 攻陷<石吐>等七城. 王命太將軍{大將軍} <庾信>·將軍<陳春>·<竹旨>·<天存>等出相{拒} 之. 轉鬪經旬不解, 進屯於<道薩城>下. <庾信>謂衆曰: "今日必有<百濟>人來諜, 汝等佯不知, 勿敢誰何!" 乃 {使} {徇} 于軍中曰: "堅壁不動, 明日待援軍然後決戰." 諜者聞之, 歸報<殷相>. <(+殷)相> 等謂有加兵, 不能不疑懼. 於是, <庾信>等進擊大敗之, 殺虜將士一百人, 斬軍卒八千九百八十級, 獲戰馬一萬匹, 至若兵仗, 不可勝數.
趙炳舜.『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今西龍.『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
3년, 봄 정월에 처음으로 중국의 의관을 착용하였다.
가을 8월, 백제 장군 은상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석토 등의 일곱 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왕은 대장군 유신과 장군 진춘, 죽지, 천존 등에게 대항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들은 장소를 옮겨 가며 열흘이 지나도록 싸웠으나 백제군을 물리치지 못하고 도살성 밑에 진을 쳤다. 유신은 군사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틀림없이 백제 사람이 정탐을 하러 올 것이다. 너희들은 이를 모르는 체 하고, 절대로 누구인가를 묻지 말라!" 유신은 곧바로 사람을 시켜 진중을 여기 저기 돌아 다니면서 "결연한 자세로 움직이지 말라. 내일 구원병이 온 후에 결전을 하겠다."라고 말하도록 하였다. 첩자가 이 말을 듣고 돌아가 은상에게 그대로 보고하였다. 은상 등은 증원병이 온다고 생각하여 두려운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유신 등이 진격하여 적을 크게 쳐부수고, 장령 백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으며, 군졸 8천 9백 80명의 머리를 베고, 군마 만필을 얻었다. 노획한 병기 종류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四年, 夏四月, 下敎: 以眞骨在位者, 執牙笏. 六月, 遣使大<唐>, 告破<百濟>之衆. 王織錦作五言大乎頌{大平頌} , 遣<春秋>子<法敏>, 以獻<唐>皇帝. 其辭曰: "□□□{大<唐>開} 洪業, 巍巍皇猷昌. 止戈戎衣{威} 定, 修文□□□{繼百王 /契百王 }. □{統} 天崇雨施, 理物體含章. 深仁諧{偕} 曰用{日用 /日月 }, 撫運邁時康{陶唐 /虞唐 . 幡旗何{旣} 赫赫, 鉦{錚} 何 . 外夷違命者, 剪覆被天殃. 淳風疑{凝} 幽顯, 遐邇競呈祥. 四時和玉燭, 七曜巡萬方. 維嶽降宰輔, 維帝任忠良. 五三成一德, 昭我<唐>家皇{光} ." <高宗>嘉焉, 拜<法敏>爲大府卿以還. 是歲, 始行<中國><永徽>年號.
○論曰: 三代更正朔, 後代稱年號, 皆所以大一統, 新百姓之視聽者也. 是故苟非乘時竝起, 兩立而爭天下, 與夫姦雄, 乘間而作, 神器, 則偏方小國, 臣屬天子之邦者, 固不可以私名年. 若<新羅>以一意事<中國>, 使航貢 相望於道, 而<法興>自稱年號, 惑矣. 厥後承愆襲繆, 多歷年, 所聞太宗之 讓, 猶且因循至是, 然後奉行<唐>號. 雖出於不得已, 而柳{抑} 可謂過而能改者矣.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三國遺事].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三國遺事].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舊唐書].李丙燾. [舊唐書].
趙炳舜. [三國史節要].今西龍.李丙燾. 舊本.李丙燾. [三國遺事].李丙燾. [舊唐書].李丙燾. [三國遺事].李丙燾. 兩唐書.李丙燾. [舊唐書].趙炳舜. 『三國史節要』.
4년 여름 4월, 교서를 내려 진골로서 현직에 있는 자는 상아홀(笏)을 들게 하였다.
6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를 이긴 사실을 보고하였다. 왕은 비단에 5언시 태평송을 써서, 이를 춘추의 아들 법민으로 하여금 당 나라 황제에게 바치도록 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위대한 당 나라 왕업을 열었으니
높고 높은 황제의 앞 길 번창하여라.
전쟁을 끝내 천하를 평정하고,
학문을 닦아 백대에 이어지리라.
하늘의 뜻 받드니 은혜의 비 내리고
땅의 만물 다스려 빛나는 이치 얻었네.
어질음 깊고 깊어 일월과 어울리고,
시운도 따라오니 언제나 태평하네.
큰 깃발 작은 깃발 저리도 빛나며,
징소리 북소리 어찌 저리 쟁쟁한가?
외방의 오랑캐 황제 명령 거역하면,
하늘의 재앙으로 멸망하리라.
시골이나 도시에나 풍속이 순박하고,
멀리서 가까이서 좋은 일 다투어 일어나네.
빛나고 밝은 조화 사계절과 어울리고,
해와 달과 오성이 만방을 도는구나.
산신의 뜻으로 재상이 보필하고,
황제는 충신 인재를 믿으시니,
삼황과 오제의 덕이 하나가 되어
우리 당 나라를 밝게 비추리로다.
고종이 이 글을 아름답게 여기고, 법민에게 대부경을 제수하여 돌려 보냈다. 이 해에 처음으로 중국의 연호인 영휘를 사용하였다.
저자의 견해 : 하, 은, 주 삼대에 정삭을 고치고, 후대에 와서 연호를 사용한 것은, 모두가 대통일을 이룬 왕조가 백성들의 이목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이유로 동일한 시기에 함께 일어나서 천하를 두고 양립하고 있는 경우이거나, 또는 간웅들이 기회를 이용하여 천하를 노리는 경우가 아닌 이상, 주변의 소국으로서 천자의 나라에 신하의 처지로 속한 나라라면 절대로 사사로이 연호를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신라의 경우에는 줄곧 중국을 섬겨 사신들이 탄 배와 공물 꾸러미가 길에 연이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법흥왕이 우리만의 연호를 사용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뒤에도 이러한 잘못을 답습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며, 태종의 견책을 듣고도 고치지 않다가 이 때에 이르러 당의 연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것이 비록 마지 못하여 한 일이기는 하지만 바꾸어 생각하면 '잘못하기는 했으나 이를 고칠 수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五年, 春正月朔, 王御<朝元殿>, 受百官正賀. 賀正之禮, 始於此. 二月, 改稟主爲執事部, 仍拜波珍 <竹旨>爲執事中侍, 以掌機密事務. □□{<新羅>} , □□□□{遣} 波珍 <金仁問>, 入<唐>朝貢, 仍留宿衛□□□□.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通鑑].
趙炳舜. [三國史節要].
5년 봄 정월 초하루에 왕이 조원전에 나아가 백관들의 신년 하례를 받았다. 신년 하례의 예식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2월, 품주를 집사부로 고치고, 파진찬 죽지를 집사중시로 임명하여 기밀 사무를 관장하게 하였다.(원문 3자 결자) 파진찬 김 인문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이어서 숙위로 머물러 있게 하였다.
○六年, 春正月, 以波珍 <天曉>, 爲左理方府令. 遣使大<唐>朝貢. 三月, 京都大雪. 王宮南門, 無故自毁.
6년 봄 정월에 파진찬 천효를 좌리 방부령으로 삼았다.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3월, 서울에 큰 눈이 내렸다. 왕궁의 남문이 이유없이 저절로 무너졌다.
○七年, 冬十一月, 遣使大唐, 獻金 {總} 布.
허성도.
7년 겨울 11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금총포를 바쳤다.
○八年, 春三月, 王薨. 諡曰<眞德>, 葬<沙梁部>. <唐><高宗>聞之, 爲擧哀於<永光門>, 使大常丞<張文收>持節吊祭之, 贈開府儀同三司, 賜綵段三百. 國人謂始祖<赫居世>至<眞德>二十八王, 謂之聖骨; 自<武烈>至永{末} 王, 謂之<眞骨>. <唐><令狐澄>『新羅記』曰: "其國, 王族謂之第一骨, 餘貴族第二骨."
李丙燾.
今西龍.
8년 봄 3월, 왕이 사망하였다. 시호를 진덕이라 하고, 사량부에 장사지냈다. 당 고종이 이를 듣고 영광문에서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대상승 장문수를 사절로 삼아, 황제의 신임표를 가지고 와서 조문케하였으며, 왕에게 개부의동삼사를 추증하고 비단 3백 필을 부의로 주었다.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왕까지 28대 왕을 성골이라고 불렀으며, 무열왕으로부터 마지막 임금까지를 진골이라고 불렀다. 당 나라 영호징의 [신라기]에는 "그 나라에서는 왕족을 제 1골이라 부르고, 나머지 귀족을 제 2골이라고 불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太宗武烈王>立. 諱<春秋>, <眞智王>子伊 <龍春>[一云<龍樹>]之子也.[『唐書』以爲<眞德>之弟, 誤也.] 母, <天明>夫人, <眞平王>女; 妃, <文明>夫人, <舒玄>角 女也. 王儀表英偉, 幼有濟世志. 事<眞德>, 位歷伊 , <唐>帝授以特進. 及<眞德>薨, 群臣請<閼川>伊 攝政. <閼川>固讓曰: "臣老矣, 無德行可稱. 今之德望崇重, 莫若<春秋>公, 實可謂濟世英傑矣." 遂奉爲王, <春秋>三讓, 不得已而就位.
태종 무열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춘추이며, 진지왕의 아들인 이찬 용춘[용수라고도 한다.]의 아들이다.[[당서]에는 진덕왕의 아우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어머니는 천명부인이니 진평왕의 딸이다. 왕비는 문명부인이며 각찬 서현의 딸이다. 왕은 풍모가 영명하고 당당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정치에 뜻을 두었다. 그는 진덕왕을 섬겨 이찬의 직위를 지냈으며, 당 나라 황제가 특진을 제수하였다. 진덕왕이 사망하자 여러 신하들이 이찬 알천에게 섭정할 것을 요청하였다. 알천은 굳이 사양하며 "나는 늙었고 이렇다 할만한 덕행도 없다. 지금 덕망이 두텁기로는 춘추공 만한 이가 없다. 그는 실로 세상을 다스릴 영걸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마침내 그를 받들어 왕으로 삼으려 하니 춘추가 세 번이나 사양하다가 마지 못하여 왕위에 올랐다.
○元年, 夏四月, 追封{尊} 王考爲<文興大王>, 母爲<文貞>太后. 大赦. 五月, 命理方府令<良首>等, 詳酌律令, 修定理方府格六十餘條. <唐>遣使持節備禮, 冊命爲開府儀同三司<新羅>王. 王遣使入<唐>表謝.
趙炳舜. 『三國史節要』.
원년 여름 4월, 작고한 왕의 부친을 문흥대왕, 어머니를 문정 태후로 추증하였다. 죄수들에게 대사령을 내렸다.
5월, 이방부령 양수 등으로 하여금 법령을 상세히 검토하게 하여 이방부의 법령 60여 조를 정리 보완하였다. 당 나라에서 지절사를 보내와 예절을 갖추어 왕을 "개부의동삼사 신라왕"으로 책봉하였다. 왕이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二年, 春正月, 拜伊 <金剛>爲上大等, 波珍 <文忠>爲中侍. <高句麗>與<百濟>·<靺鞨>連兵, 侵 我北境, 取三十三城. 王遣使入<唐>求援, 三月, <唐>遣<營州>都督<程名振>·左右衛中郞將<蘇定方>, 發兵擊<高句麗>. 立元子<法敏>爲太子, 庶子<文王{文汪}> 爲伊 , <老且{老旦}> 爲海 , <仁泰>爲角 , <智鏡>·<愷元>各爲伊 . 冬十月, <牛首州>獻白鹿. <屈弗郡>進白猪, 一首二身八足. 王女<智照>下嫁大角 <庾信>. 立鼓樓<月城>內.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三國遺事]. [通鑑].
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봄 정월, 이찬 금강을 상대등으로, 파진찬 문충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고구려가 백제 및 말갈과 군사를 연합하여, 우리 북쪽 국경을 침범하여 33개소의 성을 빼앗았다. 왕은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3월에 당 나라가 영주 도독 정명진과 좌우위 중랑장 소정방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맏아들 법민을 태자로 세우고, 서자인 문왕을 이찬, 노차를 해찬, 인태를 각찬, 지경과 개원을 각각 이찬으로 임명하였다.
겨울 10월, 우수주에서 흰 사슴을 바쳤다. 굴불군에서 흰 돼지를 진상하였다. 그 돼지의 머리는 하나, 몸체는 둘, 발이 여덟 개였다. 왕의 딸 지조가 대각찬 유신에게 시집갔다. 월성 안에 고루를 세웠다.
○三年, <金仁問>自<唐>歸, 遂任軍主, 監築<獐山城>. 秋七月, 遣子右{左} 武衛將軍<文王{文汪}> , 朝<唐>.
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
3년, 김 인문이 당 나라에서 돌아오자, 그를 군주로 임명하여 장산성의 축조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가을 7월, 왕의 아들 우무위 장군 문왕으로 하여금 당 나라에 조회하게 하였다.
○四年, 秋七月, <一善郡>大水, 溺死者三百餘人. 東<吐含山>地燃, 三年而滅. <興輪寺>門自壞. □□□北巖崩碎爲米, 食之如陳倉米.
4년 가을 7월, 일선군에 큰 홍수가 났다. 이 홍수로 3백여 명이 익사하였다. 동쪽 토함산에서 땅에 불이 났다. 그 불은 3년이 지난 후에야 꺼졌다. 흥륜사의 대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원문 3자 결자) 북쪽의 바위가 산산이 무너져 쌀로 변했다. 그 쌀을 먹어 보니 창고의 묵은 쌀과 같았다.
○五年, 春正月, 中侍<文忠>改爲伊 , <文王{文汪}> 爲中侍. 三月, 王以<何瑟羅>地連<靺鞨>, 人不能安, 罷京爲州, 置都督以鎭之. 又以<悉直>爲<北鎭>.
趙炳舜. 『三國史節要』.
5년 봄 정월, 중시 문충의 벼슬을 이찬으로 바꾸고, 문왕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3월, 왕이, 하슬라는 지역적으로 말갈과 연이어 있으므로 백성들이 편안히 지낼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경을 폐지하여 주로 만들고, 도독을 두어 그 곳을 수비하게 하였다. 또한 실직을 북진으로 만들었다.
○六年, 夏四月, <百濟>頻犯境, 王將伐之, 遣使入<唐>乞師. 秋八月, 以阿 <眞珠>爲兵部令. 九月, <何瑟羅>州進白鳥. <公州><基郡江>中大魚出死, 長百尺. 食者死. 冬十月, 王坐朝, 以請兵於<唐>, 不報, 憂形於色. 忽有人於王前, 若先臣<長春>·<罷郞>者. 言曰: "臣雖枯骨, 猶有報國之心, 昨到大<唐>. 認得皇帝命大將軍<蘇定方>等, 領兵以來年五月, 來伐<百濟>. 以大王勤佇如此, 故玆控告." 言畢而滅. 王大驚異之, 厚賞兩家子孫, 仍命所司, 創<漢山州><莊義寺>, 以資冥福.
6년 여름 4월, 백제가 자주 국경을 침범하므로, 왕이 백제를 공격하기 위하여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였다.
가을 8월, 아찬 진주를 병부령에 임명하였다.
9월, 하슬라주에서 흰 새를 진상하였다. 공주 기군강에서 큰 물고기가 육지로 올라와 죽었다. 그 고기의 길이가 1백 자였는데, 이를 먹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다.
겨울 10월, 왕이 조정에 앉아서, 당 나라에 파병을 요청한 데 대한 회보가 없음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한 사람이 왕 앞에 나타났다. 그는 선대의 신하 장춘과 파랑 같아 보였다. 그는 "제가 비록 몸은 백골로 변하였으나 나라에 보답할 마음이 있기에, 어제 당 나라에 갔었습니다. 그 곳에서 당 황제가 대장군 소정방 등에게 내년 5월에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백제를 치도록 명령한 것을 알았습니다. 대왕께서 이토록 애타게 기다리고 계시므로 미리 말씀드립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말을 마치자 사라졌다. 왕이 크게 놀라고 이상히 여겨, 두 집안 자손들에게 후하게 상을 주고, 곧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한산주에 장의사를 지어 그들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七年, 春正月, 上大等<金剛>卒. 拜伊 <金庾信>爲上大等. 三月, <唐><高宗>命左武衛大將軍<蘇定方>, 爲<神丘>道行軍大摠管, <金仁問>爲副大摠管, 帥左驍衛將軍<劉伯英>等水陸十三萬□{軍} , □□{以伐} □濟{百濟} >, 勅王爲 夷道行軍摠管, 何{使} 將兵, □□□□{爲之聲援} . 夏五月二十六日, 王與<庾信>·<眞珠>·<天存>等, 領兵出京, 六月十八日, 次<南川停>. <定方>發自<萊州>, 千里, 隨流東下. 二十一日, 王遣太子<法敏>, 領兵船一百 , 迎<定方>於<德物島>. <定方>謂<法敏>曰: "吾欲以七月十日至<百濟>南, 與大王兵會, 屠破<義慈>都城." <法敏>曰: "大王立待大軍, 如聞大將軍來, 必 食而至." 方喜, 還遣<法敏>徵<新羅>兵馬. <法敏>至, 言<定方>軍勢甚盛, 王喜不自勝. 又命太子與大將軍<庾信>·將軍<品日>·<欽春>[春或作純]等, 率精兵五萬, 應之, 王次<今突城>. 七月九日, <庾信>等, 進軍於<黃山>之原, <百濟>將軍< 伯{階伯}> , 擁兵而至, 先據 , 設三營以待. <庾信>等, 分軍爲三道, 四戰不利, 士卒力竭. 將軍<欽純{欽春}> 謂子<盤屈>曰: "爲臣莫若忠, 爲子莫若孝, 見危致命, 忠孝兩全." <盤屈>曰: "謹聞命矣." 乃入陣, 力戰死. 左將軍<品日>, 喚子<官狀>[一云<官昌>.], 立於馬前, 指諸將曰: "吾兒年 十六, 志氣頗勇, 今日之役, 能爲三軍標的乎?" □□{<官狀 /官昌 >}曰: "唯!" 以甲馬單槍, 徑赴敵陣, 爲賊所□{擒} , □□{生致} <□伯{階伯}> . < 伯{階伯}> 脫胄, 愛其少且勇, 不忍加害, 乃嘆曰: "<新羅>不可敵也, 少年尙如此, 況壯士乎!" 乃許生還. <官狀>告父曰: "吾入敵中, 不能斬將 旗者, 非畏死也." 言訖, 以手 井水飮之, 更向敵陣疾鬪. < 伯{階伯}> 擒斬首, 繫馬鞍以送之. <品日>執其首, 流血濕袂. 曰: "吾兒面目如生. 能死於王事, 幸矣!" 三軍見之, 慷慨有死志, 鼓 進擊, <百濟>衆大敗, < 伯{階伯} >死之, 虜佐平<忠常>·<常永>等二十餘人. 是日, <定方>與副摠管<金仁問>等, 到<伎伐浦>, 遇<百濟>兵, 逆擊大敗之. <庾信>等至<唐>營, <定方>以<庾信>等後期, 將斬<新羅>督軍<金文穎>[或作<永>.]於軍門. <庾信>言於衆曰: "大將軍不見<黃山>之役, 將以後期爲罪. 吾不能無罪而受辱, 必先與<唐>軍決戰, 然後破<百濟>." 乃杖鉞軍門, 怒髮如植, 其腰間寶劒, 自躍出 . <定方>右將<董寶亮> 足曰: "<新羅>兵將有變也." <定方>乃釋<文穎>之罪. <百濟>王子使佐平<覺伽>, 移書於<唐>將軍, 哀乞退兵. 十二日, <唐·羅>軍□□□□{圍} <義慈>都城, 進於<所夫里>之原. <定方>有所□□□{忌不能} 前, <庾信>說之, 二軍勇敢, 四道齊振. <百濟>王子又使上佐平致 豊 , <定方>却之. 王庶子<躬>與佐平六人謂{詣} 前乞罪, 又揮之. 十三日, <義慈>率左右, 夜遁走, 保<熊津城>, <義慈>子<隆>與大佐平<千福>等, 出降. <法敏> <隆>於馬前, 唾面罵曰: "向者, 汝父枉殺我妹, 埋之獄中, 使我二十年間, 痛心疾首, 今日汝命在吾手中!" <隆>伏地無言. 十八日, <義慈>率太子及<熊津方>領軍等, 自<熊津城>來降. 王聞<義慈>降, 二十九日, 自<今突城>至<所夫里城>, 遣弟監<天福>, 露布於大<唐>. 八月二日, 大置酒勞將土{士} , 王與<定方>及諸將, 坐於堂上, 坐<義慈>及子<隆>於堂下, 或使<義慈>行酒, <百濟>佐平等群臣莫不鳴咽流涕. 是日捕斬<毛尺>. <毛尺>本<新羅>人, 亡入<百濟>, 與<大耶城><黔日>同謀陷城, 故斬之. 又捉<黔日>, 數曰: "汝在<大耶城>, 與<毛尺>謀, 引<百濟>之兵, 燒亡倉庫, 令一城乏食致敗, 罪一也. 逼殺<品釋>夫妻, 罪二也. 與<百濟>來攻本國, 罪三也." 以□{四} 支解, 投其尸於江水. <百濟>□{餘} 賊□{據} <南岑>·<貞峴>□□□城, 又佐平<正武>聚衆庄<豆尸原>嶽, 抄掠<唐>·<羅>人. 二十六日, 攻<任存>大柵, 兵多地 , 不能克, 但攻破小柵. 九月三日, 郞將<劉仁願>, 以兵一萬人, 留鎭<泗 城>, 王子<仁泰>與沙 <日原>·級 <吉那>, 以兵七千副之. <定方>以<百濟>王及王族臣寮九十三人, 百姓一萬二千人, 自<泗 >乘船廻<唐>
. <金仁問>與沙 <儒敦>·大奈麻<中知>等偕行. 二十三日, <百濟>餘賊{兵} 入<泗 >, 謀掠生降人, 留守<仁願>出<唐>·<羅>人, 擊走之. 賊退上<泗 >南嶺, 竪四五柵, 屯聚伺隙, 抄掠城邑, <百濟>人叛而應者二十餘城. <唐>皇帝遣左衛中郞將<王文度>, 爲<熊津>都督. 二十八日, 至<三年山城>, 傳詔, <文度>面東立, 大王面西立. 錫命後, <文度>欲以宣物授王, 忽疾作便死. 從者攝位畢事. 十月九日, 王率太子及諸軍攻< 禮城>. 十八日, 取其城置官守, <百濟>二十餘城震懼, 皆降. 三十日, 攻<泗 >南嶺軍柵, 斬首一千五百人. 十一月一日, <高句麗>侵攻<七重城>, 軍□{軍主} <匹夫>死之. 五日, 王行渡< 灘>攻<王興寺><岑城>, 七日乃克, 斬首七百人. 二十二日, 王來自<百濟>, 論功, 以< 衿>卒<宣服>爲級 , 軍師<豆迭>爲高□{高干} . 戰死<儒史知>·<未知活>·<寶弘伊>·<屑儒>等四人, 許職有差. <百濟>人員幷量才任用, 佐平<忠常>·<常永>, 達率<自簡>授位一吉 , 充職摠管; 恩率<武守>授位大奈麻, 充職大監; 恩率<仁守>授位大奈麻, 充職弟監.
李丙燾. [通鑑].李丙燾. [通鑑].李丙燾. [通鑑].李丙燾.李丙燾. [通鑑].李丙燾. 列傳.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通鑑].[북한본].今西龍.今西龍.『북한본』.허성도.허성도.허성도.今西龍.李丙燾.
[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今西龍.今西龍.今西龍.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7년 봄 정월, 상대등 금강이 사망하였다. 이에 따라 이찬 김 유신을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3월, 당 고종이 좌무위 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김 인문을 부대총관으로 삼아, 좌효위 장군 유백영 등 수륙군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 이와 동시에 칙명을 내려 왕을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장병을 거느리고, 그들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여름 5월 26일, 왕이 유신, 진주, 천존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6월 18일 남천정에 머물렀다. 소정방은 내주에서 출발하였다. 그는 천리에 달하는 병선을 이끌고 수로를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 21일, 왕이 태자 법민으로 하여금 병선 1백 척을 거느리고 덕물도에 가서 소정방을 맞이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법민에게 "나는 7월 10일 백제 남쪽에 도착하여, 대왕의 군사와 만나 의자의 도성을 격파하려 한다."고 말했다. 법민은 "우리 대왕께서는 지금 대군이 오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만일 대장군의 도착 소식을 들으신다면, 틀림없이 잠자리에서 식사를 하시고라도 달려 오실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정방은 기뻐하며 법민을 돌려 보내 신라의 병마를 징발하게 하였다. 법민이 돌아와 정방의 군세가 매우 성대하다고 말했다. 왕은 기쁨을 금치 못하고,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 흠춘[춘을 순이라고도 한다.] 등으로 하여금 정병 5만을 거느리고 가서 응원하게 하였다. 왕은 금돌성에 머물렀다.
가을 7월 9일, 유신 등이 황산벌로 진군하였다. 백제 장군 계백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중요한 지형을 차지하고, 세 곳에 군영을 설치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유신 등은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네 번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했고, 병사들도 기진맥진하였다. 그러자 장군 흠순이 그의 아들 반굴에게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이 제일이요,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가 제일이니, 이러한 위기를 당하여 목숨을 바친다면 충성과 효도를 모두 다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반굴이 대답하기를 "삼가 분부 말씀을 알아 들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곧 적진으로 달려 들어 최선을 다하여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렇게 되자 좌장군 품일이 아들 관장[관창이라고도 한다.]을 불러 말 앞에 세우고 여러 장수들에게 보이며 말했다.
"내 아들이 나이 겨우 열 여섯이지만 기백이 자못 용감하다. 네가 오늘 전투에서 삼군의 모범이 될 수 있겠는가?"
관장은 "예!"라고 말하고는, 갑옷을 입고 말을 탄 채, 창 한 자루를 들고 적진에 달려 들었다. 그러나 그는 적군에게 생포되어 계백 앞에 서게 되었다. 계백이 갑옷을 벗겨보고, 그의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용감한 것을 가상하게 여겨 차마 죽이지 못하고 탄식하면서 말했다.
"신라와는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도 오히려 이런 정도이니, 황차 장정들은 어떻겠는가!"
계백은 그를 죽이지 않고 돌려 보냈다. 관장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제가 적진에 들어가서 장수의 목을 베지 못하고 깃빨을 뽑아 오지 못한 것은 죽음이 겁나서가 아닙니다."
관장은 말을 마치자 손으로 우물물을 떠 마시고, 다시 적진으로 나아가 힘차게 싸웠다. 계백은 그를 붙잡아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매어 보냈다. 품일이 그 머리를 쳐들자 피가 흘러 소매를 적셨다. 그는 "내 아들의 얼굴이 살아있는 것 같구나. 나라를 위하여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로다!"라고 말하였다. 삼군의 군사들이 이를 보고 비분강개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북을 치고 함성을 울리며 진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백제 군사들은 대패하였고, 계백도 전사하였으며, 좌평 충상, 상영 등 20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이 날 정방이 부총관 김 인문 등과 함께 기벌포에 도착하여 백제 군사와 마주쳤다. 그는 백제병과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유신 등이 당 나라 군영에 도착하니, 정방은 유신 등이 늦게 왔다는 이유로 군문에서 신라 독군 김 문영['潁'을 '永'으로도 쓴다.]의 목을 베고자 하였다. 유신은 군사들 앞에서 "대장군은 황산 전투를 보지도 않고, 늦게 온 것을 죄주려 하는구려. 나는 죄도 없이 치욕을 당할 수는 없으니, 결단코 먼저 당 나라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쳐부시겠소."라고 말하고, 곧 군문에서 도끼를 집어 들었다. 그의 노기 서린 머리털이 뻗뻗히 서고 허리에 찼던 보검이 칼집에서 저절로 튀어 나왔다. 정방의 우장 동보량은 발을 구르며 "신라 군사들의 마음이 장차 변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리되자 정방이 문영의 죄를 문제삼지 않았다.
백제 왕자가 좌평 각가로 하여금 글을 당 나라 장군에게 보내 철군할 것을 애걸하였다. 12일, 당과 신라 군사가 (원문 3자 결자) 의자의 도성을 포위하기 위하여 소부리 벌로 진격하였다. 정방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진격하지 않았다. 유신이 이를 달래어 신라와 당의 군사가 용감하게 네 방향에서 일제히 진격하였다. 백제 왕자가 다시 상좌평을 시켜 음식과 많은 선물을 보냈으나 정방은 이를 받지 않았다. 백제왕의 서자인 궁이 좌평 여섯 사람과 함께 정방의 앞에 나아가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정방은 이를 뿌리쳤다. 13일, 의자왕은 좌우의 측근들을 데리고 밤을 틈타 도주하여 웅진성을 지켰다. 의자왕의 아들 융은 대좌평 천복 등과 함께 나와서 항복하였다. 법민이 융을 말 앞에 꿇어 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어 말했다. "예전에 너의 아버지가 원통하게도 내 누이를 죽여 옥중에 파묻었다. 나는 이 일로 인하여 20년 동안 가슴이 아팠었다. 그런데 오늘은 네 목숨이 내 손에 달렸구나!" 융은 땅 바닥에 엎드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8일, 의자는 태자와 웅진방의 영군 등을 데리고 웅진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왕은 의자가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29일에 금돌성으로부터 소부리성에 도착하여, 제감 천복을 보내 당 나라에 전공을 보고하였다.
8월 2일, 주연을 크게 베풀어 장군과 병사들을 위로하였다. 왕은 정방 및 여러 장수들과 함께 대청에 앉고, 의자와 그 아들 융은 마루 아래에 앉게 하였다. 그리고 가끔 의자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였다. 이에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들이 목이 메어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 날 모척을 잡아 참수하였다. 모척은 본래 신라 사람이었으나 백제로 도망가서 대야성의 금일과 공모하여 신라의 성을 점령한 적이 있었으므로 참수한 것이다. 또한 금일을 잡아 죄를 일일이 따져가며 "네가 대야성에서 모척과 함께 공모하여, 백제 군사를 이끌고 와서 창고를 불질러 없앴다. 이로 말미암아 성 안에 식량이 떨어져 마침내 패배를 당하였다. 이것이 첫번 째 죄이다. 네가 품석의 부처를 협박하여 죽였으니, 이것이 두번 째 죄이다. 네가 백제와 함께 와서 본국을 공격했으니, 이것이 세번 째 죄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사지를 찟고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백제의 남은 적병이 남잠, 정현(원문 3자 결자)성에 웅거하였다. 좌평 정무는 무리를 모아 두시원 산에 진을 치고, 당과 신라 사람들을 약탈하였다.
26일, 임존의 대책을 공격했으나, 적병이 많고 지세가 험준하여 승리하지 못했다. 다만 소책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9월 3일, 낭장 유인원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사비성에 남아 진을 쳤다. 왕자 인태와 사찬 일원과 급찬 길나가 군사 7천명으로 그를 도왔다. 정방이 백제왕 및 왕족, 신하 93명과 백성 1만 2천 명을 배에 태우고 사비로부터 당 나라로 돌아갔다. 김 인문이 사찬 유 돈, 대내마 중지 등과 함께 동행하였다.
23일, 백제의 잔적들이 사비에 들어와 항복한 사람들을 약탈하려 했다. 유수 유인원이 당 나라와 신라 사람들을 출동시켜 이들을 격퇴하였다. 적들은 퇴각하여 사비의 남령에 올라가 너댓 군데에 목책을 세우고 주둔하면서 기회를 노려 성읍을 약탈하였다. 백제의 20여 성이 신라를 배반하고, 그들에게 호응하였다.
당 황제가 좌위중랑장 왕문도를 웅진 도독으로 임명하여 보냈다. 28일, 문도가 삼년산성에 도착하여 조서를 전하였다. 문도는 동쪽을 향하여 서고, 대왕은 서쪽을 향하여 섰다. 당 황제의 명령을 전달한 후, 문도가 황제의 선물을 왕에게 주려다가 갑자기 발병하여 사망하였다. 이에 따라 문도의 시종들이 대신하여 의식을 마무리 하였다.
10월 9일, 왕이 태자와 군사들을 거느리고 이례성을 공격하였다. 18일, 그 성을 점령하고 관리를 두어 수비하게 하자, 백제의 20여 성이 두려워 하여 모두 항복하였다.
30일, 사비 남령군의 목책을 공격하여 1천 5백 명의 머리를 베었다.
11월 1일, 고구려가 칠중성을 침공하였다. 군주 필부가 전사하였다.
5일, 왕이 계탄을 건너 왕흥사 잠성을 공격하였다. 왕은 7일 만에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 7백 명의 머리를 베었다.
22일, 왕이 백제에서 돌아와 전공을 논하여, 계금의 군졸 선복을 급찬, 군사 두질을 고간으로 삼았으며, 전사한 유사지, 미지활, 보홍이, 설유 등 네 사람에게는 공의 정도에 따라 관직을 주었다. 백제 사람도 재능에 따라 다음과 같이 임용하였다. 좌평 충상, 상영과 달솔 자간에게는 일길찬의 위품과 총관의 직위를 주었으며, 은솔 무수에게는 대내마의 위품과 대감의 관직을 주었고, 은솔 인수에게는 대내마의 위품과 제감의 관직을 주었다.
○八年春二月, <百濟>殘賊來攻<泗 城>. 王命伊 <品日>爲大幢將軍, <文王>·大阿 <良圖>·阿 <忠常>等副之. <文忠>爲<上州>將軍, 阿 <眞王>副之. 阿 <義服>爲<下州>將軍, <武 >·<旭川>等爲<南川>大監, <文品>爲誓幢將軍, <義光>爲郞幢將軍, 往救之. 三月五日, 至中路, <品日>分麾下軍, 先行往<豆良尹[一作伊.]城>南, 相營地. <百濟>人望陣不整, 猝出急擊不意, 我軍驚駭潰北. 十二日, 大軍來屯<古沙比城>外, 進攻<豆良尹城>, 一朔有六日, 不克. 夏四月十九日, 班師, 大幢·誓幢先行, <下州>軍殿後, 至<賓骨壤>, 遇<百濟>軍, 相鬪敗退. 死者雖少, 先{失} 亡兵械輜重甚多. <上州>郞幢遇賊於<角山>, 而進擊克之, 遂入<百濟>屯堡, 斬獲二千級. 王聞軍敗大驚, 遣將軍<金純>·<眞 {眞欽}> ·<天存>·<竹旨>·<濟師>救援. 至<加尸兮津>, 聞軍退至<加召川>, 乃還. 王以諸將敗績, 論罰有差. 五月九日[一云十一日.], <高句麗>將軍< 音信{惱音信}> 與<靺鞨>將軍<生偕>合軍, 來攻<述川城>, 不克. 移攻<北漢山城>, 列抛車飛石, 所當 屋輒壞. 城主大舍<冬 川>使人擲鐵 藜於城外, 人馬不能行, 又破<安養寺> , 輸其材, 隨城壞處, 卽構爲樓櫓, 結 網, 懸牛馬皮綿衣, 內設弩砲以守. 時, 城內只有男女二千八百人, 城主<冬 川>能激勵少弱, 以敵强大之賊, 凡二十餘日. 然糧盡力疲, 至誠告天, 忽有大星, 落於賊營, 又雷雨以震, 賊疑懼解圍而去. 王嘉奬<冬 川>, 擢位大奈麻, 移<押督州>於<大耶>, 以阿 <宗貞>爲都督. 六月, <大官寺>井水爲血, <金馬郡>地流血廣五步. 王薨. 諡曰<武烈>, 葬<永敬寺>比{北} , 上號<太宗>. <高宗>聞訃, 擧哀於<洛城門>.
三國史記卷第五.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8년 봄 2월, 백제의 잔적이 사비성을 공격하였다. 왕은 이찬 품일을 대당 장군으로 임명하고, 잡찬 문왕과 대아찬 양도와 아찬 충상 등으로 하여금 그를 돕게 하였다. 또한 잡찬 문충을 상주 장군으로 임명하고, 아찬 진왕으로 하여금 그를 돕게 하였으며, 아찬 의복을 하주 장군, 무훌 욱천 등을 남천 대감, 문품을 서당 장군, 의광을 낭당 장군으로 임명하여 사비성을 구원하게 하였다. 3월 5일, 중도에 이르자 품일이 자기 군사의 일부를 나누어 두량윤['윤'을 '이'라고도 한다.]성 남쪽에 먼저 가서 진지를 만들 곳을 살펴 보도록 하였다. 백제 사람들은 우리 진영이 정리되지 않은 것을 보고,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급습을 해왔다. 우리 군사들이 놀라 패주하였다. 12일, 대군이 고사비성 밖에 와서 진을 치고 있다가 두량윤성을 공격하였으나, 한 달 엿새가 되도록 승리하지 못하였다. 여름 4월 19일에 군사를 철수하면서 대당과 서당을 먼저 보내고, 하주의 군사를 뒤따라 오게 하였다. 그들이 빈골양에 이르렀을 때, 백제 군사를 만나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사망자는 비록 적었으나 병기와 군수품을 상당히 많이 잃었다. 상주 낭당은 각산에서 적을 만나 공격하여 승리하고, 마침내 백제의 진중으로 들어가 2천 명을 참살하였다. 왕은 군사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서 장군 김순, 진흠, 천존, 죽지, 제사를 보내 구원하게 하였다. 그들이 가시혜진에 도착했을 때, 적군이 가소천까지 퇴각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 왔다. 왕이 여러 장수들의 패전 책임을 물어 정도에 따라 벌을 주었다.
5월 9일[11일이라는 설도 있다.], 고구려 장군 뇌음신이 말갈 장군 생해와 군사를 합쳐 술천성을 공격했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그들은 방향을 바꾸어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그들은 포차를 벌려놓고 돌을 날려 보냈다. 그 돌에 맞은 담장과 집은 번번히 무너졌다. 성주인 대사 동타천은 성 밖에 마름쇠를 던져 놓아 사람과 말이 다니지 못하게 하고, 또한 안양사 창고를 헐어 그 재목을 가져다가 성 안의 무너진 곳마다 망루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곳에 굵은 밧줄로 그물을 얽고, 마소의 가죽과 솜옷을 걸어매고, 그 안 쪽에 노포를 설치하여 성을 지켰다. 이 당시 성안의 남녀가 2천 8백 명 뿐이었는데 성주 동타천이 어린이와 힘 못 쓰는 자들까지도 격려하여 20여 일 동안이나 강한 적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식량이 떨어지고 힘이 다했다. 그는 정성을 다하여 하늘에 기도하였다. 그 때 돌연 큰 별이 적진에 떨어지고 우레가 울리고 비가 오면서 천지가 진동하였다. 적들은 겁이 나서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왕은 동타천을 가상하게 여기고 대내마로 발탁하였다.
압독주를 대야로 옮기고, 아찬 종정을 도독으로 임명하였다.
6월, 대관사의 우물물이 피로 변하고, 금마군에서는 땅에 피가 5보 넓이로 흘렀다.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무열이라 하고, 영경사 북쪽에 장사지냈으며, 태종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당 고종이 부음을 듣고 낙성문에서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5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