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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47권 열전 제 7

포맨#신기 2012. 2. 18. 15:19

三國史記卷第四十七 삼국사기 권 제 47

列傳第七.
<奚論>·<素那>·<驟徒>·<訥催>·<薛계頭>·<金令胤>·<官昌>
<金部軍{金歆運}> ·<裂起>·<丕寧子>·<竹竹>·<匹夫>·<階伯>.

趙炳舜. 『顯宗實錄字本』.
열전 제 7
해론. 소나. 취도. 눌최. 설계두. 김영윤. 관창.
김흠운.열기. 비녕자. 죽죽. 필부. 계백.


  
  <奚論 해론>

○<奚論>, <牟梁>人也. 其父<讚德>, 有勇志英節, 名高一時. <建福>二十七年庚午{乙丑} , <眞平大王>選爲< 岑城>縣令. 明年辛未{丙寅} 冬十月, <百濟>大發兵, 來攻< 岑城>一百餘日. <眞平>王命將, 以<上州>·<下州>·<新州>之兵救之, 遂往與<百濟>人戰不克, 引還. <讚德>憤恨之, 謂士卒曰: "三州軍帥見敵强不進, 城危不救, 是無義也. 與其無義而生, 不若有義而死." 乃激昻奮勵, 且戰且守, 以至粮盡水竭, 而猶食屍飮尿, 力戰不怠. 至春正月, 人旣疲, 城將破, 勢不可復完, 乃仰天大呼曰: "吾王委我以一城, 而不能全, 爲敵所敗, 願死爲大 , 喫盡<百濟>人, 以復此城." 遂攘臂瞋目, 走觸槐樹而死. 於是, 城陷, 軍士皆降

『북한본』.『북한본』.
해론은 모량 사람이다. 그의 부친 찬덕은 용감한 뜻과 영특한 절개가 있어 한 때 명망이 높았다. 건복 27년 을축에 진평대왕이 그를 선발하여 가잠성 현령으로 삼았다. 이듬해인 병인년 겨울 10월에 백제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백여 일 동안 가잠성을 공격하자 진평왕이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상주, 하주, 신주의 군사로 하여금 그를 구원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이 가서 백제인과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한 채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찬덕이 그것을 분하게 여겨 사졸들에게 말했다. "세 주의 장수들이 적의 강함을 보고는 진격하지 않아 성이 위급한데도 구원하지 않았다. 이는 의리가 없는 행위이다. 의리없이 사는 것보다는 의리있게 죽는 것이 나으리라." 그는 곧 격앙되고 분발하여 한편으로 싸우고 한편으로 방어하면서 양식과 물이 떨어졌는데도 오히려 시체를 뜯어먹고 오줌을 마시며 힘써 싸우고 나태하지 않았다. 봄 정월에 이르자 사람들은 이미 지치고, 성은 곧 함락되려 하니 대세는 회복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는 하늘을 우러러 크게 외쳤다. "우리 왕이 나에게 이 성을 맡겼는데, 온전하게 지키지 못하고 적에게 패하니, 원컨대 죽어서도 커다란 악귀가 되어 백제인들을 모조리 잡아 먹고 이 성을 회복하리라." 그는 마침내 팔을 걷고 눈을 부릅뜨고 달려나가 홰나무에 부딪쳐 죽었다. 이에 성은 함락되고 군사들은 모두 항복하였다.

○<奚論>年二十餘歲, 以父功, 爲大奈麻. 至<建福>&三十五{四十} 年戊寅, 王命<奚論>, 爲<金山>幢主, 與<漢山州>都督<邊品>, 興師襲< 岑城>, 取之. <百濟>聞之, 擧兵來, <奚論>等逆之. 兵旣相交, <奚論>謂諸將曰: "昔吾父殞身於此, 我今亦與<百濟>人戰於此, 是我死日也." 遂以短兵赴敵, 殺數人而死. 王聞之, 爲流涕, 贈 其家甚厚. 時人無不哀悼, 爲作長歌弔之.

『북한본』.
해론이 나이 20여 세 되었을 때 부친의 공으로 대나마가 되었다. 건복 40년 무인에 왕이 해론을 금산 당주로 임명하여 한산주 도독 변품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가잠성을 습격하여 이를 빼앗도록 하였다. 백제가 이 말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공격해오자 해론 등이 이들과 싸웠다. 교전이 시작되었을 때 해론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옛날 우리 부친이 여기에서 전사하셨는데, 나도 지금 여기서 백제인과 싸우니 오늘이 내가 죽을 날이다." 그는 드디어 칼을 들고 적진으로 달려가 여러 사람을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그의 가족을 보살펴 주었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장가를 지어 그를 조문하였다.

   <素那 소나>

○<素那>[或云<金川>.], <白城郡><蛇山>人也. 其父<沈那>[或云<煌川>.], 旅{ } 力過人, 身輕且捷. <蛇山>境與<百濟>相錯, 故互相寇擊無虛月. <沈那>每出戰, 所向無堅陣. <仁平>中, <白城郡>出兵, 往抄<百濟>邊邑, <百濟>出精兵急擊之, 我士卒亂退. <沈那>獨立拔劒, 怒目大叱, 斬殺數十餘人, 賊懼不敢當, 遂引兵而走.

趙炳舜. 『三國史節要』.
소나[혹은 금천이라고 한다.]는 백성군 사산 사람이다. 그의 부친 심나[혹은 황천이라고 한다.]는 힘이 세고 몸이 가볍고 날래었다. 사산은 경계가 백제와 연이어 있있었기 때문에 상호 간에 노략질과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심나는 그 때마다 나가서 싸웠는데, 그가 가는 곳마다 견고한 적의 진지가 무너졌었다. 인평 연간에 백성군에서 군사를 내어 백제의 변경을 치자, 백제도 정예병을 보내 갑자기 공격해왔으므로 우리 사졸들이 혼란스럽게 퇴각하였다. 그러나 심나는 홀로 서서 칼을 뽑아 들고 성난 눈으로 크게 꾸짖으며 수십여 명을 베어 죽이니, 적이 두려워서 감히 덤벼들지 못하고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도주하였다.

○<百濟>人, 指<沈那>曰: "<新羅>飛將." 因相謂曰: "<沈那>尙生, 莫近白城." <素那>雄豪有父風. <百濟>滅後, <漢州>都督都儒&公請大王遷{白王遣} <素那>於<阿達城>,  禦北鄙. <上元>二年乙亥春, <阿達城>大守{太守} 級 <漢宣>, 敎民以某日齊出種麻, 不得違令. <靺鞨>諜者認之, 歸告其酋長. 至其日, 百姓皆出城在田, <靺鞨>潛師猝入城, 剽掠一城, 老幼狼狽, 不知所爲. <素那>奮刃向賊, 大呼曰: "爾等知<新羅>有<沈那>之子<素那>乎? 固不畏死以圖生, 欲鬪者曷不來耶?" 遂憤怒突賊, 賊不敢迫, 但向射之. <素那>亦射, 飛矢如蜂, 自辰至酉, <素那>身矢如 , 遂倒而死.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백제인들이 심나를 가리켜 '신라의 비장'이라 하고, 서로 말하기를 "심나가 아직 살았으니 백성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하였다. 소나는 영웅스럽고 호걸스러움이 아버지의 풍모를 지녔다. 백제가 멸망한 뒤에 한주 도독 유공이 대왕에게 청하여 소나를 아달성으로 보내 북쪽 변방을 방어하게 하였다. 상원 2년 을해년 봄에 아달성 태수 급찬 한선이 백성들로 하여금 아무 날 모두 나가 삼을 심게 하고는 이 명령을 어기지 못하도록 하였다. 말갈의 첩자가 이를 탐지하고 돌아가 자기 추장에게 보고하였다. 그 날이 되어 백성들이 모두 성에서 나와 밭에 있는데, 말갈이 몰래 군사를 거느리고 갑자기 성으로 들어가서 성 전체를 노략질하니 늙은이 어린이 할 것없이 모두 낭패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이 때 소나가 칼을 휘두르며 적진을 향하여 크게 외쳤다. "너희들은 신라에 심나의 아들 소나가 있는 줄을 아느냐? 나는 실로 죽기가 두려워 살기를 도모하지는 않는다. 싸우려는 자가 있으면 왜 나오지 않느냐?" 그가 곧 분격하여 적진으로 돌진하니, 적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다만 그를 향하여 활을 쏠 뿐이었다. 소나도 활을 쏘았는데 날아 오는 화살이 마치 벌떼와 같이 많았다. 진시로부터 유시에 이르자 소나의 몸에는 화살이 고슴도치의 털처럼 박혀 마침내 쓰러져 죽었다.

○<素那>妻, <加林郡>良家女子. 初<素那>以<阿達城>隣敵國, 獨行, 留其妻而在家. 郡人聞<素那>死, 弔之, 其妻哭而對曰: "吾夫常曰: '丈夫固當兵死, 豈可臥牀席, 死家人之手乎!' 其平昔之言如此, 今死如其志也." 大王聞之, 涕泣沾襟曰: "父子勇於國事, 可謂世濟忠義矣." 贈官  .

소나의 아내는 가림군의 양가 여자였다. 처음에 소나는 아달성이 적국에 인접하여 있기 때문에 혼자 가고 자기 아내는 집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 그 고을 사람들이 소나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조문하니 그의 아내가 울면서 대답하였다. "나의 남편이 항상 말하기를 '장부는 마땅히 싸우다가 죽어야 한다. 어찌 침상에 누워서 집안 사람의 손에 죽을 수 있으랴!'하였습니다. 그의 평소의 말이 이러하였으니 지금의 죽음은 자기의 뜻대로 된 것입니다." 대왕이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면서 말했다. "부자가 모두 국사에 용감하였으니, 가히 대대로 충의를 이루었다고 하겠다." 대왕은 그에게 잡찬을 추증하였다.

   <驟徒 취도>

○<驟徒>, <沙梁>人, 奈麻<聚福>之子, 史失其姓. 兄弟三人, 長<夫果>, 仲<驟徒>, 季<逼實>. <驟徒>嘗出家, 名<道玉>, 居<實際寺>. <大宗大王{太宗大王}> 時, <百濟>來伐<助川城>, 大王興師出戰, 未決. 於是, <道玉>語其徒曰: "吾聞: 爲僧者, 上則精術業, 以復性. 次則起道用, 以益他.' 我形似桑門而已, 無一善可取, 不如從軍殺身, 以報國." 脫法衣, 著戎服, 改名曰<驟徒>, 意謂馳驟而爲徒也. 乃詣兵部, 請屬三千幢, 遂隨軍赴敵場. 及旗鼓相當, 持槍劒, 突陣力鬪, 殺賊數人而死.

趙炳舜. 『三國史節要』.
취도는 사량 사람으로서 나마 취복의 아들이다. 그의 성씨는 역사기록에 전하지 않는다. 형제가 셋인데 맏이는 부과요, 가운데는 취도요, 막내는 핍실이다. 취도가 일찌기 출가하여 이름을 도옥이라 하고 실제사에 거주했다.
태종대왕 때 백제가 와서 조천성을 공격하자 왕은 군사를 일으켜 나가 싸웠으나 싸움이 결판나지 않았다. 이 때 도옥이 자기 무리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상등의 중은 술업에 정진하여 그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도의 효용을 일으켜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준다'고 하였는데, 나는 외형만 중과 같을 뿐이며, 한 가지도 취할 만한 선행이 없으니, 군대에 들어가 몸을 바쳐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만 못하다"라 하고, 법의를 벗고 군복을 입은 다음 이름을 취도로 고쳤다. 이 이름은 빨리 군대로 간다는 뜻이다. 그는 곧 병부로 가서 삼천당에 속하기를 청하고, 마침내 군대를 따라 적지로 갔다. 깃발과 북이 서로 어울리자 창과 칼을 잡고 적진으로 돌진하여 힘껏 싸우다가 적군 여러 명을 죽인 다음 자신도 죽었다.

○後<咸享>二年辛未, <文武大王>發兵, 使踐<百濟>邊地之禾. 遂與<百濟>人, 戰於<熊津>之南. 時<夫果>以幢主戰死, 論功第一. <文明>元年甲申, <高句麗>殘賊, 據<報德城>而叛, <神文大王>命將討之, 以<逼實>爲貴幢弟監{第監} . 臨行, 謂其婦曰: "吾二兄, 旣死於王事, 名垂不朽, 吾雖不肖, 何得畏死而苟存乎? 今日與爾生離, 終是死別也, 好住無傷." 及對陣, 獨出奮擊, 斬殺數十人而死. 大王聞之, 流涕嘆曰: "<驟徒>知死所, 而激昆弟之心. <未果>·<逼實>亦能勇於義, 不顧其身, 不其壯歟!" 皆追贈官沙 .

『북한본』.
그 후 함형 2년 신미에 문무대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백제 변경의 벼를 짓밟게 하자, 마침내 백제인들과 웅진 남쪽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 때 부과가 당주로서 전사하여 논공이 제일이었다. 문명 원년 갑신에 고구려의 잔적이 보덕성을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신문대왕이 장수에게 토벌을 명하였다. 그 때 핍실을 귀당 제감으로 삼았다. 그는 떠날 때 아내에게 말했다. "나의 두 형이 이미 나라 일로 죽어서 이름이 영원히 남아 있거늘, 내 비록 불초하나 어찌 죽기를 두려워하여 구차하게 살겠는가? 오늘 그대와의 생이별은 결국 사별이 될 것이니 상심하지 말고 잘사시오!" 그가 적과 대진하게 되자 단신으로 나가 공격하여 수십 명을 참살하고 자기도 죽었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탄식하였다. "취도가 죽을 자리를 알아서 형제의 마음을 격동시켰으며, 부과와 핍실도 정의 앞에 용감하여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았으니 장한 일이 아닌가?" 대왕은 모두에게 사찬 벼슬을 추증하였다.

   <訥催 눌최>

○<訥催>, <沙梁>人, 大奈麻<都非>之子也. <眞平王><建福>四十一年甲申{己卯} 冬十月, <百濟>大擧來侵, 分兵圍攻<速含>·<櫻岑>·<岐岑>·<烽岑>·<旗懸>·<冗柵{穴柵}> 等六城, 王命<上州>·<下州>·<貴幢>·<法幢>·<誓幢>五軍, 往救之. 旣到, 見<百濟>兵陣堂堂, 鋒不可當, 盤桓不進. 或立議曰: "大王以五軍委之諸將, 國之存亡, 在此一役. 兵家之言曰: '見可而進, 知難而退.' 今强敵在前, 不以好謀而直進, 萬一有不如意, 則悔不可追." 將佐皆以爲然, 而業已受命出師, 不得徒還. 先是, 國家欲築<奴珍>等六城而未遑, 遂於其地, 築畢而歸.

『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
눌최는 사량 사람인데 대나마 도비의 아들이다. 진평왕 건복 41년 기묘 겨울 10월에 백제가 대거 침입하면서 군사를 나누어 속함, 앵잠, 기잠, 봉잠, 기현, 용책 등 여섯 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왕은 상주·하주·귀당·법당·서당 등 5군에 명하여 이들을 구원하게 하였다. 그들은 전장에 이르러 백제의 군진이 당당하여 예봉을 당할 수가 없음을 보고는 머뭇거리며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어떤 자가 건의하여 말했다. "대왕이 5군을 여러 장수에게 맡겼으니, 국가의 존망이 이 한 번의 싸움에 달려 있다. 병가에 이르기를 '가능성을 보면 나아가고, 어려움을 알면 물러선다'고 하였는데, 지금 강력한 적이 눈 앞에 있는데 좋은 계책을 쓰지 않고 곧장 나아갔다가는, 만에 하나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 후회해도 때가 늦을 것이다." 장수와 보좌관들이 모두 그 생각이 옳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미 명령을 받고 군사를 출동시킨 이상 그냥 돌아갈 수가 없었다. 이에 앞서 나라에서는 노진 등의 여섯 성을 쌓으려다가 미처 겨를이 없었는데, 그들은 드디어 그곳에서 성쌓기를 마치고 돌아왔다.

○於是, <百濟>侵攻愈急, <速含>·<岐岑>·<冗柵{穴柵}> 三城, 或滅或降, <訥催>以三城固守, 及聞五軍不救而還, 慷慨流涕, 謂士卒曰: "陽春和氣, 草木皆華, 至於歲寒, 獨松栢後彫. 今孤城無援, 日益 危, 此誠志士義夫, 盡節揚名之秋, 汝等將若之何?" 士卒揮淚曰: "不敢惜死, 唯命是從." 及城將 , 軍士死亡無幾, 人皆殊死戰, 無苟免之心. <訥催>有一奴, 强力善射. 或嘗語曰: "小人而有異才, 鮮不爲害, 此奴宜遠之." <訥催>不聽. 至是城陷賊入, 奴張弓挾矢, 在<訥催>前, 射不虛發, 賊懼不能前. 有一賊出後, 以斧擊<訥催>, 乃 , 奴反與鬪俱死. 王聞之, 悲慟, 追贈<訥催>職級 .

趙炳舜. 『三國史節要』.
이 때 백제가 더욱 급공하여 속함, 기잠, 용책 등 세 성이 함락되거나 항복하였다. 눌최는 나머지 세 성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5군이 구원하지 않고 돌아갔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군사들에게 말했다. "봄철의 온화한 기운에는 초목이 모두 번성하지만, 겨울이 되면 유독 송백만이 남는다. 이제 우리의 외로운 성이 구원하는 군사는 없고 날로 위급하여지니, 이제는 실로 지조있는 사나이와 의리있는 사나이가 절개를 다하고 이름을 날릴 때이다. 너희들은 장차 어떻게 하려는가?" 사졸들은 모두 눈물을 뿌리면서 말했다. "감히 죽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지 않고, 오직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성이 함락될 무렵, 군사들이 거의 모두 죽어 몇 명 남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모두 결사적으로 싸웠으며 구차하게 죽음을 모면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눌최에게는 종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다. 어떤 자가 전에 "소인배가 특이한 재주를 가지고 있으면 해를 끼치지 않는 경우가 드문 법이니, 이 사람을 멀리해야 한다"고 말하였으나, 눌최는 이를 듣지 않았다. 그 때 성이 함락되고 적이 들어오자 그 종이 활을 당겨 화살을 끼운 채 눌최의 앞에 버티고 서서 활을 쏘았다. 그 화살은 하나도 빗나가는 것이 없었다. 적들이 이를 무서워 하여 앞으로 접근하지 못하였다. 한 적병이 뒤로 돌아가 눌최를 도끼로 쳐서 쓰러뜨리자 그 종은 돌아서서 그와 싸우다가 함께 죽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비통해 하며 눌최에게 급찬 벼슬을 추증하였다.

   <설 계두>

○<薛[一本作薛{ } ] 頭>, 亦<新羅>衣冠子孫也. 嘗與親友四人, 同會燕飮, 各言其志. < 頭>曰: "<新羅>用人論骨品, 苟非其族, 雖有鴻才傑功, 不能踰越. 我願西遊<中華國>, 奮不世之略, 立非常之功, 自致榮路, 備簪紳劒佩, 出入天子之側, 足矣." <武德>四年辛巳, 潛隨海舶入唐. 會<大宗{太宗}> <文皇帝>親征<高句麗>, 自薦爲左武衛果毅. 至<遼東>, 與麗人戰<駐 山>下, 深入疾鬪而死, 功一等. 皇帝問: "是何許人?" 左右奏<新羅>人<薛 頭>也. 皇帝泫然曰: "吾人尙畏死, 顧望不前, 而外國人, 爲吾死事, 何以報其功乎?" 問從者聞其平生之願, 脫御衣覆之, 授職爲大將軍, 以禮葬之.

李丙燾.趙炳舜.
설 계두도 역시 신라의 사대부집 자손이다. 그는 일찌기 친구 네 사람과 술을 마신 적이 있는데, 그 자리에서 그들은 각각 자신의 뜻을 말하였다. 계두가 말했다. "신라에서는 사람을 등용하는데에도 골품을 따지니, 만일 그 해당하는 골품이 아니면 큰 재능과 훌륭한 공로가 있다고 해도 일정한 계급 이상 진급할 수가 없다. 나는 서쪽으로 중화국에 유학하여 불세출의 지략을 발휘하고 비상한 공을 세워서 스스로 영화의 길을 열고, 고관의 복장에다 검패를 차고 천자의 곁을 드나들어야 만족하겠다." 그는 무덕 4년 신사에 남몰래 배를 타고 당에 갔다. 그 때 마침 태종 문황제가 직접 고구려를 정벌하였므로, 그는 자천하여 좌무위과의가 되었다. 그가 요동에 이르러 주필산 밑에서 고구려인과 싸우는데, 적진 깊이 들어가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으니 공이 1등이었다. 황제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니, 측근자들이 신라인 설 계두라고 대답하였다. 황제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우리 나라 사람도 죽음이 두려워 이리저리 돌아보며 전진하지 않는데, 외국인이 우리를 위하여 국사에 죽었으니 무엇으로 그의 공을 갚으랴?" 황제는 종자에게 그의 평생 소원을 듣고, 어의를 벗어 덮어 주었으며, 대장군의 관직을 제수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金令胤 김영윤>

○<金令胤>, <沙梁>人, 級 <盤屈>之子. 相{祖} <欽春>[或云<欽純>.]角干, <眞平王>時爲花郞, 仁深信厚, 能得衆心. 及壯, <文武大王>陟爲 宰, 事上以忠, 臨民以恕, 國人翕然稱爲賢相. <大宗大王{太宗大王}> 七年庚申, <唐><高宗>命大將軍<蘇定方>, 伐<百濟>, <欽春>受王命, 與將軍<庾信>等, 率精兵五萬以應之. 秋七月, 至<黃山>之原, 値<百濟>將軍<階伯>戰, 不利. <欽春>召子<盤屈>曰: "爲臣莫若忠, 爲子莫若孝, 見危致命, 忠孝兩全." <盤屈>曰: "唯." 乃入賊陣, 力戰死. <令胤>生長世家, 以名節自許.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日本書陵部本』.趙炳舜. 『顯宗實錄字本』.
김 영윤은 사량 사람으로서 급찬 반굴의 아들이다. 조부는 흠춘[혹은 흠순이라고도 한다.] 각간이니 진평왕 때 화랑이 되었다. 그 때, 그는 인덕이 많고 신의가 두터워 인심을 크게 얻을 수 있었다. 그가 장성하자 문무대왕이 재상으로 올려주었는데, 임금을 충심으로 섬기고, 인자한 자세로 백성을 대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어진 재상이라고 일컬었다. 태종대왕 7년 경신에 당 고종이 대장군 소정방에게 명하여 백제를 공격하게 했을 때, 흠춘은 왕명을 받들어 장군 유신 등과 함께 정예병 5만을 거느리고 이에 호응하였다. 가을 7월에 황산벌에 이르러 백제 장군 계백과 마주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흠춘은 아들 반굴을 불러 말했다.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이 으뜸이요, 아들이 되어서는 효성이 으뜸이니, 위급함을 보면 목숨을 바쳐야만 충성과 효성이 모두 온전해진다." 반굴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적진으로 돌입하여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영윤은 명문세가 출신답게 명예와 절개를 지켰다.

○<神文大王>時, <高句麗>殘賊<悉伏>, 以<報德城>叛. 王命討之, 以<令胤>爲黃衿誓幢步騎監. 將行, 謂人曰: "吾此行也, 不使宗族朋友, 聞其惡聲." 及見<悉伏>, 出< 岑城>南七里, 結陣以待之. 或告曰: "今此凶黨, 譬如 巢幕上, 魚戱鼎中. 出萬死以爭一日之命耳. 語曰: '窮寇勿迫.' 宜左次以待疲極而擊之, 可不血刃而擒也." 諸將然其言, 暫退, 獨<令胤>不肯之而欲戰. 從者告曰: "今諸將豈盡偸生之人, 惜死之輩哉? 而以向者之言爲然者, 將俟其隙而得其便者也. 而子獨直前, 其不可乎!" <令胤>曰: "臨陣無勇, 禮經之所識{誡} , 有進無退, 士卒之常分也. 丈夫臨事自決, 何必從衆?" 遂赴敵陣, 格鬪而死. 王聞之, 悽慟流涕曰: "無是父, 無是子, 其義烈可嘉者也." 追贈爵賞尤厚.

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日本書陵部本』.
신문대왕 때, 고구려의 잔적 실복이 보덕성에서 모반하자 왕이 그의 토벌을 명령하고, 영윤을 황금서당 보기감으로 삼았다. 그가 떠날 때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이번에 가면 가족이나 친구들로 하여금 악명을 듣지 않도록 하겠다." 그가 출정하여 실복을 보니, 그는 가잠성 남쪽 7리 지점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이제 이 흉악한 무리들은 제비가 장막 위에 집을 짓고, 물고기가 솥 안에서 노는 것 같은 형세로서, 만 번 죽을 힘을 다하여 싸워야 하루 사는 목숨 밖에 안된다. 옛 말에 이르기를 '궁지에 몰린 도둑은 쫓지 말라'고 하였으니, 약간 후퇴하여 적이 극도로 피로해진 틈을 타서 공격하면 칼날에 피도 묻히지 않고 사로잡을 수 있다." 모든 장수들이 그 말을 옳게 여겨 잠시 후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유독 영윤만은 이를 수긍하지 않고 싸우려 하였다. 그의 종자가 말했다. "지금 모든 장수들이 구차하게 살 길을 찾는 것이 아니며, 죽기를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전의 의견이 옳다고 여긴 것은, 기회를 보아 이익을 얻고자 함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만이 혼자 앞으로 나가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영윤이 말했다. "적진에 임하여 용기가 없는 것은 예경에서 경계한 것이니, 전진이 있을 뿐 후퇴가 없는 것이 사졸로서 지켜야 할 당당한 본분이다. 대장부가 일을 당하면 스스로 결정할 것이지, 어찌 꼭 여러 사람의 의견만을 따르겠는가?" 그는 말을 마치고 드디어 적진으로 달려가서 싸우다가 죽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몹시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로다. 그의 의롭고 장렬함은 가상히 여길 만하다." 왕은 후하게 상을 주고, 작위를 추증하였다.

   <官昌 관창>

○<官昌>[一云<官狀>.], <新羅>將軍<品日>之子. 儀表都雅, 少而爲花郞, 善與人交. 年十六, 能騎馬彎弓. 大監某薦之<大宗大王{太宗大王}>. 至<唐><顯慶>五年庚申, 王出師, 與<唐>將軍侵<百濟>, 以<官昌>爲副將. 至<黃山>之野, 兩兵相對. 父<品日>謂曰: "爾雖幼年, 有志氣, 今日是立功名取富貴之時, 其可無勇乎?" <官昌>曰: "唯." 卽上馬橫槍, 直 敵陣, 馳殺數人. 而彼衆我寡, 爲賊所虜, 生致<百濟>元帥<階伯>前. <階伯> 脫胄, 愛其少且勇, 不忍加害. 乃嘆曰: "<新羅>多奇士, 少年尙如此, 況壯士乎?" 乃許生還. <官昌>曰: "向吾入賊中, 不能斬將 旗, 深所恨也. 再入必能成功." 以手 井水, 飮訖, 再突賊陣疾鬪. <階伯>擒斬首, 繫馬鞍送之. <品日>執其首, 袖拭血曰: "吾兒面目如生, 能死於王事, 無所悔矣." 三軍見之, 慷慨有立志, 鼓 進擊, <百濟>大敗. 大王贈位級 , 以禮葬之, 賻其家唐絹三十匹·二十升布三十匹·穀一百石.

관창[관장이라고도 한다.]은 신라 장군 품일의 아들이다. 그는 용모가 우아하여 젊어서 화랑이 되었는데 다른 사람과 곧잘 사귀었다. 16세에 기마와 활쏘기에 능숙하여 어느 대감이 그를 태종대왕에게 천거하였다. 당 나라 현경 5년 경신에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당 나라 장군과 함께 백제를 침공하는데 관창을 부장으로 삼았다. 황산벌에 이르러 양쪽 군사가 대치하게 되었는데 그의 부친 품일이 관창에게 말했다. "네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의기가 있다. 오늘이야말로 공을 세워 부귀를 얻을 때이니 어찌 용기를 내지 않겠느냐?" 관창은 "그렇습니다"라 하고, 곧 말에 올라 창을 비껴 들고 바로 적진으로 달려들어가 말을 달리면서 여러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었기 때문에 적에게 사로잡혀 산 채로 백제 원수 계백의 앞으로 보내졌다. 계백이 그의 투구를 벗게하니, 그가 어리고 용감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계백은 이를 아깝게 여겨 차마 해치지 못하고 탄식하여 말했다. "신라에는 기특한 사람이 많구나. 소년도 이렇거늘 하물며 장사들이야 어떻겠는가?" 계백은 곧 그를 살려 보낼 것을 허락하였다. 관창이 돌아와서 말했다. "아까 내가 적진에 들어가서 장수를 베고 깃발을 빼앗지 못한 것이 심히 한스럽다. 다시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하리라." 관창은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시고는 다시 적진에 돌입하여 용감히 싸웠다. 계백이 그를 사로잡아 머리를 베고는 그의 말 안장에 매어 돌려 보냈다. 품일은 아들의 머리를 잡고 소매로 피를 씻으며 말했다. "내 아들의 면목이 살아있는 것 같구나. 능히 나라를 위하여 죽을 줄을 알았으니 후회할 것이 없다." 3군이 그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의지를 다진 다음, 북을 울리고 고함을 치면서 공격하니 백제가 크게 패하였다. 대왕이 급찬의 직위를 추증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으며, 그 가족들에게 당견 30필과 이십승포 30필과 곡식 1백 섬을 부의로 주었다.

   <金歆運 김흠운>

○<金歆運>, <奈密王>八世孫也. 父<達福>  . <歆運>少遊花郞<文努>之門時, 徒衆言及某戰死留名至今, <歆運>慨然流涕, 有激勵思齊之貌. 同門僧<轉密>曰: "此人若赴敵, 必不還也." <永徽>六年, <大宗大王{太宗大王}> 憤<百濟>與<高句麗>梗邊, 謀伐之. 及出師, 以<歆運>爲郞幢大監. 於是, 不宿於家, 風梳雨沐, 與士卒同甘苦. 抵<百濟>之地, 營<陽山>下, 欲進攻<助川城>. <百濟>人乘夜疾驅, 黎明緣壘而入, 我軍驚 {駿} 顚沛, 不能定. 賊因亂急擊, 飛矢雨集. <歆運>橫馬握 待敵, 大舍<詮知>說曰: "今賊起暗中, 咫尺不相辨, 公雖死, 人無識者. 況公<新羅>之貴骨, 大王之半子, 若死賊人手, 則<百濟>所誇 , 而吾人之所深羞者矣." <歆運>曰: "大丈夫旣以身許國, 人知之與不知一也, 豈敢求名乎?" 强立不動. 從者, 握 勸還, <歆運>拔劒揮之, 與賊鬪殺數人而死. 於是, 大監<穢破>·少監<狄得>相與戰死. 步騎幢主<寶用那>聞<歆運>死曰: "彼骨貴而勢榮, 人所愛惜, 而猶守節以死, 況<寶用那>生而無益, 死而無損乎?" 遂赴敵, 殺三數人而死. 大王聞之傷慟, 贈<歆運>·<穢破>位一吉 , <寶用那>·<狄得>位大奈麻. 時人聞之, 作<陽山歌>, 以傷之.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김 흠운은 나밀왕의 8세 손으로 아버지는 달복 잡찬이다. 흠운이 소년 시절에 화랑 문노의 문하에 있을 때, 낭도들이 아무개가 전사하여 지금까지 이름을 남기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 흠운은 개연히 눈물을 흘리고 감동되어 자기도 그와 같이 되려는 의지를 보였다.
같은 문하에 있던 중 전밀이 말했다. "이 사람이 만일 전쟁에 나가면 틀림없이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영휘 6년에 태종대왕이 백제와 고구려가 변경을 막고 있음을 분하게 여겨 정벌할 것을 계획하고 군사를 동원할 때, 흠운을 낭당 대감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흠운은 집에서 자지 않고 비바람을 맞으며 사졸들과 함께 동고동락하였다. 그가 백제 지역에 도달하여 양산 밑에 진을 치고 조천성을 진공하려 하였는데, 백제인들이 야음을 기하여 급히 달려와 이른 새벽에 성루로 올라왔다. 우리 군사가 이를 보고 크게 놀라 엎어지고 자빠져서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적군이 이러한 혼란을 이용하여 급히 공격해오니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왔다. 흠운이 말을 비껴 탄 채 창을 잡고 적을 기다리고 있는데, 대사 전지가 달래며 말했다. "지금 적이 어둠 속에서 움직이니 지척에서도 분간할 수 없고, 따라서 공이 비록 죽더라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공은 신라의 진골이며 대왕의 사위이므로, 만약 적의 손에 죽는다면 백제의 자랑거리요, 우리의 대단한 수치가 될 것입니다." 흠운이 말했다. "대장부가 이미 몸을 나라에 바친 이상 남이 알든 모르든 마찬가지다. 어찌 감히 명예를 추구하겠느냐?" 그는 꼿꼿이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종자가 말 고삐를 잡고 돌아가기를 권하였다. 흠운은 칼을 뽑아 휘두르며 적과 싸워 여러 명을 죽이고 자기도 죽었다. 이 때 대감 예파와 소감 적득도 함께 전사하였다. 보기당주 보용나는 흠운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말했다. "그는 골품이 고귀하고 권세가 영화로와 사람들이 사랑하고 아끼는데도 오히려 절개를 지켜 죽었다. 황차 나 보용나는 살아도 이익될 것이 없고 죽어도 손실될 것 없다." 그는 곧 적진으로 달려가 적병 몇 명을 죽이고 자기도 죽었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흠운과 예파에게 일길찬의 직위를 주고, 보용나와 적득에게 대나마의 직위를 주었다. 당시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슬퍼하며 양산가를 지었다.

○論曰: <羅>人患無以知人, 欲使類聚群遊, 以觀其行義, 然後, 擧用之. 遂取美貌男子,  飾之, 名花郞以奉之. 徒衆雲集, 或相磨以道義, 或相悅以歌樂, 遊娛山水, 無遠不至. 因此知其邪正, 擇而薦之於朝. 故<大問>曰: "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者." 此也. 三代花郞, 無慮二百餘人, 而芳名美事, 具如傳記. 若<歆運>者, 亦郞徒也. 能致命於王事, 可謂不辱其名者也.

저자의 견해 : 신라인은 사람을 알아 볼 방법이 없음을 걱정하여, 같은 부류의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무리를 지어서 놀게 해놓고, 그 행실과 의리를 살펴서 등용하였다. 그리고 용모가 뛰어난 남자를 뽑아 단장시켜서 화랑이라 부르며 받들었다. 이에 낭도의 무리가 운집하여 혹은 도의로 서로 절차탁마하고, 혹은 음악으로 서로 즐기며 산수를 찾아 노니는데, 멀다고 하여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들의 사악함과 정직함을 살폈으며, 이에 따라 사람을 선발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 김 대문이 "어진 보좌와 충신이 여기에서 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군사가 여기에서 생긴다"고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3대의 화랑이 무려 2백여 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의 꽃다운 이름과 아름다운 사적은 전기에 기재된 바와 같다. 흠운과 같은 사람도 역시 낭도였는데, 나라 일에 목숨을 바칠 수 있었으니 그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

   <裂起 열기>

○<裂起>, 史失族姓. <文武王>元年, <唐>皇帝遣<蘇定方>, 討<高句麗>, 圍<平壤城>. <含資道>摠管<劉德敏>傳宣國王, 送軍資<平壤>. 王命大角干<金庾信>, 輸米四千石·租二萬二千二百五十石, 到<獐塞>, 風雪 { } 寒, 人馬多凍死. <麗>人知兵疲, 欲要擊之. 距<唐>營三萬餘步而不能前, 欲移書而難其人. 時<裂起>以步騎監輔行, 進而言曰: "某雖駑蹇, 願備行人之數." 遂與軍師<仇近>等十五人, 持弓劒走馬, <麗>人望之, 不能遮閼. 凡兩日致命於<蘇>將軍, <唐>人聞之, 喜慰廻書. <裂起>又兩日廻, <庾信>嘉其勇, 與級 位. 及軍還, <庾信>告王曰: "<裂起>·<仇近>, 天下之勇士也. 臣以便宜許位級 , 而未副功勞, 願加位沙 ." 王曰: "沙 之秩, 不亦過乎?" <庾信>再拜曰: "爵祿公器, 所以酬功, 何謂過乎?" 王允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열기는 역사기록에 집안 내력과 성씨가 전하여지지 않는다. 문무왕 원년에 당 황제가 소정방을 보내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평양을 포위하였다. 그 때, 함자도 총관 유 덕민이 국왕에게 국서를 전하여 군수물자를 평양으로 보내게 하였다. 왕이 대각간 김 유신에게 명하여 쌀 4천 석과 벼 2만 2천2백5십 석을 수송하게 하였는데, 유신이 장새에 이르렀을 때 풍설이 몹시 사나워서 사람과 말이 많이 얼어 죽었다. 고구려인들은 우리 군사가 지쳐있음을 알고 요격하려 하였다. 당 진영까지의 거리가 3만여 보였는데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편지를 보내려 해도 적당한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이 때 열기가 보기감보행으로서 나아가 말하기를 "제가 비록 노둔하나 가는 사람의 수를 채우고 싶습니다"라 하고, 마침내 군사 구근 등 15명과 함께 활과 칼을 가지고 말을 달려 나가니, 고구려인들이 바라만 보고 막지 못하였다. 이틀 만에 그들이 소장군에게 사명을 전하니 당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위로하고 회신를 보냈다. 열기가 다시 이틀이 지나서 돌아오니, 유신이 그의 용맹을 가상히 여겨 급찬의 벼슬을 주었다. 군사가 돌아오자 유신이 왕에게 말하기를 "열기와 구근은 천하의 용사입니다. 신이 편의에 따라 급찬의 벼슬을 허락하였으나 공로에 맞지 않사오니 사찬의 벼슬을 더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사찬의 벼슬은 너무 과분하지 않은가?"라고 대답하였다. 유신이 재배하고 말했다. "작록은 공기로서 공로에 대한 보수로 주는 것이온데 어찌 과분하다 하겠습니까?"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後<庾信>之子<三光>執政, <裂起>就求郡守, 不許. <裂起>與<祗園寺>僧<順憬>曰: "我之功大, 請郡不得, <三光>殆以父死而忘我乎?" <順憬>說<三光>, <三光>授以<三年山>郡大守{太守} . <仇近>從<元貞公>, 築<西原述城>, <元貞公>聞人言, 謂怠於事, 杖之. <仇近>曰: "僕嘗與<裂起>入不測之地, 不辱大角干之命, 大角干不以僕爲無能, 待以國士, 今以浮言罪之, 平生之辱, 無大此焉." <元貞>聞之, 終身羞悔.

趙炳舜. 『三國史節要』.
뒤에 유신의 아들 삼광이 정권을 잡았을 때, 열기가 찾아가서 군수 자리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열기가 지원사의 중 순경에게 말했다. "나의 공로가 큰 데도 군수의 자리를 청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삼광은 아버지가 죽었다 하여 아마도 나를 잊어버린 것이리라." 순경이 삼광에게 이를 말하였더니 삼광이 삼년산군 태수직을 주었다.
구근이 원정공을 따라가 서원술성을 쌓았다. 그 때 원정공이, 구근이 일을 태만히 하였다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그에게 곤장을 쳤다. 구근이 말하기를 "내가 일찌기 열기와 함께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지역에 들어가 대각간의 명을 욕되지 않게 하였으며, 대각간도 나를 무능하다고 여기지 않고 국사로 대우하였는데, 지금 허황된 말을 믿고 나에게 죄를 주니 평생의 치욕 중에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원정공이 이 말을 듣고 죽는 날까지 부끄러워하며 회개하였다.

   <丕寧子 비녕자>

○<丕寧子>, 不知鄕邑族姓. <眞德王>元年丁未, <百濟>以大兵, 來攻<茂山>·<甘勿>·<桐岑>等(+三) 城, <庾信>率步騎一萬, 拒之. <百濟>兵甚銳, 苦戰不能克, 士氣索而力憊. <庾信>知<丕寧子>有力戰深入之志, 召謂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彫. 今日之事, 急矣, 非子誰能奮勵出奇, 以激衆心乎?" 因與之飮酒, 以示殷勤. <丕寧子>再拜云: "今於稠人廣衆之中, 獨以事屬我, 可謂知己矣, 固當以死報之." 出謂奴<合節>曰: "吾今日上爲國家, 下爲知己, 死之. 吾子<擧眞>, 雖幼年, 有壯志, 必欲與之俱死, 若父子倂命, 則家人其將疇依? 汝其與<擧眞>好收吾骸骨, 歸以慰母心."

趙炳舜. 『三國史節要』.
비녕자는 고향과 집안의 성씨를 알 수 없다. 진덕왕 원년 정미에 백제가 대군을 거느리고 무산, 감물, 동잠 등의 성을 공격하므로 유신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대항하였다. 그러나 백제군은 정예군이었기 때문에 유신이 고전하고 승리하지 못하여 사기는 꺾이고 힘이 빠졌다. 유신은 비녕자가 힘껏 싸워 적진 깊이 들어갈 뜻이 있음을 알고 그를 불러 말했다. "추운 겨울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는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법이다. 오늘의 사태가 위급하게 되었으니 그대가 아니면 누가 용감히 싸우며 기묘한 계책을 내어 여러 사람의 마음을 격려하겠는가?" 유신이 이어서 그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은근한 마음을 표시하니 비녕자가 재배하고 말했다. "지금 많은 사람 가운데 유독 저에게 일을 부탁하시니 가히 지기라 할 만합니다. 진실로 죽음으로써 보답하여야 마땅하겠습니다." 그가 나와서 종 합절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 위로는 나라를 위하고 아래로는 지기를 위하여 죽을 것이다. 나의 아들 거진이 나이 비록 어리나 장한 뜻이 있어서 틀림없이 나를 따라 함께 죽으려 할 것인데, 만일 부자가 함께 죽는다면 집안 사람이 장차 누구에게 의지하랴? 너는 거진과 함께 나의 해골을 잘 수습하여 돌아가 그 어미의 마음을 위로하라" 하였다.

○言畢, 卽鞭馬橫 ,  {突} 賊陣, 格殺數人而死. <擧眞>望之欲去, <合節>請曰: "大人有言, 令<合節>與阿郞還家, 安慰夫人. 今子負父命棄母慈, 可謂孝乎?" 執馬 不放. <擧眞>曰: "見父死而苟存, 豈所謂孝子乎?" 卽以劒擊折<合節>臂, 奔入敵中戰死. <合節>曰: "私天崩矣, 不死何爲?" 亦交鋒而死. 軍士見三人之死, 感激爭進, 所向挫鋒陷陣, 大敗賊兵, 斬首三千餘級. <庾信>收三屍, 脫衣覆之, 哭甚哀. 大王聞之涕淚, 以禮合葬於<反知山>, 恩賞妻子·九族尤渥.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말이 끝나자 그는 곧 말에 채찍질을 하며 창을 비껴 들고 적진으로 돌입하여 여러 사람을 죽이고 자기도 전사하였다. 거진이 바라보다가 나가려고 하니 합절이 말했다. "대인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도련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서 부인마님을 위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아들이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고 어머님의 자애를 저버린다면 효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합절은 말 고삐를 잡고 놓치 않았다. 거진이 말하기를 "아버지가 죽는 것을 보고도 구차하게 산다면 이것이 어찌 이른바 효자이겠느냐?" 하고 곧 칼로 합절의 팔을 치고 말을 달려 적진으로 달려들어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합절이 "상전이 모두 죽었는데 내가 죽지 않으면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말하고 그도 역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군사들이 이 세 사람의 죽음을 보고 감격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진격하니 향하는 곳마다 적의 예봉을 꺾고 진지를 함락시켰으며 적군을 대파하여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유신이 세 사람의 시체를 거두어서 자기의 옷을 벗어 덮어 주고 슬프게 울었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예로써 반지산에 합장하고, 그들의 처자와 9족에게 은혜로운 상을 특별히 후하게 주었다.

   <竹竹 죽죽>

○<竹竹>, <大耶州>人也, 父< 熱{ 勢}> 爲撰干. <善德王>時爲舍知, 佐<大耶城>都督<金品釋>幢下. <王>十一年壬寅秋八月, <百濟>將軍<允忠>領兵, 來攻其城. 先是, 都督<品釋>, 見幕客舍知<黔日>之妻有色, 奪之, <黔日>恨之. 至是爲內應, 燒其倉庫, 故城中兇懼, 恐不能固守. <品釋>之佐阿 <西川>[一云  {沙 } <祗之那{祗 那}> .], 登城謂<允忠>曰: "若將軍不殺我, 願以城降." <允忠>曰: "若如是, 所不與公同好者, 有如白日." <西川>勸<品釋>及諸將士欲出城, <竹竹>止之曰: "<百濟>反覆之國, 不可信也. 而<允忠>之言甘, 必誘我也. 若出城, 必爲賊之所虜. 與其竄伏而求生, 不若虎鬪而至死." <品釋>不聽開門. 士卒先出, <百濟>發伏兵, 盡殺之. <品釋>將出, 聞將士死, 先殺妻子而自刎. <竹竹>收殘卒, 閉城門自拒, 舍知<龍石>謂<竹竹>曰: "今兵勢如此, 必不得全, 不若生降以圖後效." 答曰: "君言當矣, 而吾父名我以<竹竹>者, 使我歲寒不凋, 可折而不可屈, 豈可畏死而生降乎?" 遂力戰, 至城陷, 與<龍石>同死. 王聞之, 哀傷, 贈<<竹竹>以級 , <龍石>以大奈麻{太奈麻} , 賞其妻子, 遷之王都.

趙炳舜. 『三國史節要』에는 '勢'로 되어 있고,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에는 '熱'로 되어 있다.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
죽죽은 대야주 사람이고, 부친 학열은 찬간이었다. 선덕왕 때 죽죽이 사지가 되어 대야성 도독 김 품석 당하에서 그를 보좌하고 있었다. 선덕왕 11년 임인 가을 8월에 백제 장군 윤충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그 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앞서 도독 품석이 자기의 막객인 사지 검일의 아내가 아름다와 그녀를 빼앗은 일이 있었다. 검일은 이를 한스럽게 여기고 있던 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가 이 때 적과 내응하여 창고에 불을 지르니, 성 안의 민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여 성을 고수하지 못할 것 같았다. 품석의 보좌관인 아찬 서천[혹은 사찬 지지나라고도 한다.]이 성에 올라 윤충에게 말했다. "만약 장군이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면 성을 바치고 항복하겠습니다." 윤충이 대답했다. "만약 그렇게 하고도 공과 내가 함께 만족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면, 그 때는 밝은 태양이 있으니 태양을 두고 맹세합시다." 서천이 품석과 여러 장병들에게 권고하여 성 밖으로 나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죽죽이 이들을 제지하면서 말했다. "백제는 말을 번복하는 나라이므로 믿을 수 없다. 윤충의 말이 달콤한 것은 필시 우리를 유인하려는 것이다. 만약 성 밖으로 나간다면 틀림없이 적의 포로가 될 것이다. 쥐새끼처럼 숨어서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호랑이처럼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는 편이 더 낫다." 그러나 품석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성문을 열었다. 사졸들이 먼저 나가자 백제가 복병을 출동시켜 모조리 죽여 버렸다. 품석이 나가려다가 장병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자기의 처자를 죽인 다음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하였다. 죽죽이 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성문을 닫은 채 방위하고 있는데 사지 용석이 죽죽에게 말했다. "지금 전세가 이러하니 틀림없이 성을 보전할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항복하고 살아서 후일의 공적을 도모하는 것이 낫겠다." 죽죽이 대답하기를 "그대의 말도 당연하지만, 나의 아버지가 나를 죽죽이라고 이름지은 것은 나로 하여금 날씨가 추워도 시들지 말며, 꺾일지언정 굽히지 말라는 것이니, 어찌 죽기가 두렵다 하여 항복하여 살겠는가?"라 하고, 드디어 힘껏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용석과 함께 전사하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죽죽에게는 급찬을 추증하고, 용석에게는 대나마를 추증하였으며, 그들의 처자에게 상을 주어 왕도로 옮겨 살게 했다.

    <匹夫 필부>

○<匹夫>, <沙梁>人也, 父<尊臺>阿 . <大宗大王{太宗大王}> 以<百濟>·<高句麗>·<靺鞨>轉相親比, 爲脣齒, 同謀侵奪, 求忠勇材堪綏禦者, 以<匹夫>爲<七重城>下縣令. 其明年庚申秋七月, 王與<唐>師滅<百濟>. 於是, <高句麗>疾我, 以冬十月, 發兵來圍<七重城>, <匹夫>守且戰二十餘日. 賊將見我士卒盡誠, 鬪不內顧, 謂不可猝拔, 便欲引還. 逆臣大奈麻<比 >密遣人告賊, 以城內食盡力窮, 若攻之必降, 賊遂復戰. <匹夫>知之, 拔劒斬<比 >首, 投之城外. 乃告軍士曰: "忠臣義士, 死且不屈, 勉哉努力! 城之存亡, 在此一戰." 乃奮拳一呼, 病者皆起, 爭先登, 而士氣疲乏, 死傷過半. 賊乘風縱火, 攻城突入. <匹夫>與上干<本宿>·<謀支>·<美齊>等, 向賊對射. 飛矢如雨, 支體穿破, 血流至踵, 乃 而死. 大王聞之, 哭甚痛, 追贈級 .

趙炳舜. 『三國史節要』.
필부는 사량 사람이며 아버지는 존대 아찬이다. 백제, 고구려, 말갈 등이 점점 친해지다가 아주 밀접한 사이가 되어 그들이 함께 신라 침탈을 도모하자, 태종대왕이 충성스럽고 용감한 인재로서 능히 적을 방어할 만한 사람을 구하여 필부를 칠중성 하의 현령으로 삼았다. 그 이듬해인 경신 가을 7월에 왕이 당 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를 격멸하였다. 이에 고구려가 우리를 미워하여 겨울 10월에 군사를 동원하여 칠중성을 포위하였므로, 필부가 이를 수비하면서 20여 일 동안 계속하여 싸웠다. 적장은 우리 사졸이 성의를 다하여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싸우는 것을 보고, 이들을 쉽게 함락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여 곧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려 하였다. 이 때 역신 대나마 비삽이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적에게 고하기를, 성 안에는 양식이 떨어지고 힘이 다하였으니 만약 이를 친다면 반드시 항복할 것이라고 알리는 바람에 적은 다시 공격해왔다. 필부가 이 사실을 알고 칼을 뽑아 비삽의 머리를 베어 성밖으로 던지고 군사들에게 말했다. "충신과 의사는 죽을지언정 굽히지 않는 것이니 힘써 노력하라! 이 성의 존망이 이번 싸움에 달려 있다." 그가 주먹을 휘두르며 한바탕 호통을 치니 병 든 자들도 모두 일어나 앞을 다투어 성에 올랐으나, 곧 사기가 사라져 사상자가 반이 넘었다. 그 때 적이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지르고 성안으로 공격해왔다. 필부는 상간 본숙, 모지, 미제 등과 함께 적을 향하여 활을 쏘았다. 그러나 빗발같이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온 몸에 상처를 입어, 피가 발꿈치까지 흘러 내리자 땅에 쓰러져 전사하였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슬프게 울며 그에게 급찬을 추증하였다.

   <階伯 계백>

○<階伯>, <百濟>人, 仕爲達率. <唐><顯慶>五年庚申, <高宗>以<蘇定方>爲<神丘道>大摠管, 率師濟海, 與<新羅>伐<百濟>. <階伯>爲將軍, 簡死士五千人拒之, 曰: "以一國之人, 當<唐>·<羅>之大兵, 國之存亡, 未可知也. 恐吾妻 , 沒爲奴婢, 與其生辱, 不如死快." 遂盡殺之. 至<黃山>之野, 設三營, 遇<新羅>兵將戰, 誓衆曰: "昔<句踐>以五千人, 破兵七十萬衆, 今之日, 宜各奮勵決勝, 以報國恩." 遂 戰, 無不以一當千, <羅>兵乃却. 如是進退, 至四合, 力屈以死.
三國史記卷第四十七.

계백은 백제인으로 관직이 달솔이었다. 당 현경 5년 경신에 고종이 소정방을 신구도 대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신라와 함께 백제를 치게 했다. 계백은 장군이 되어 결사대 5천 명을 선발하여 이를 방어하며 말했다. "한 나라의 인력으로 당과 신라의 대군을 당하자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도다. 나의 처자가 붙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통쾌하게 죽는 것이 낫겠다." 그는 말을 마치고 마침내 자기의 처자를 모두 죽였다. 그가 황산벌에 이르러 세 개의 진영을 치고 있다가 신라 군사를 만나 곧 전투를 시작하려 할 때 여러 사람에게 맹세하였다. "옛날 월왕 구천은 5천 명의 군사로 오 나라의 70만 대군을 격파하였으니, 오늘 우리는 마땅히 각자 분발하여 싸우고, 반드시 승리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그들이 드디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사람마다 일당천의 전과를 올리자 신라 군사가 퇴각하였다. 이렇게 그는 진퇴를 네 번이나 거듭하다가 마침내 힘이 부족하여 전사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47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