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삼국사기 49권 열전 제 9

포맨#신기 2012. 2. 18. 15:25

三國史記卷第四十九 삼국사기 권 제 49

列傳 第 9 <倉助利>·<淵蓋蘇文>.

열전 제 9  창 조리.  연개소문.


    
<倉助利 창조리>

○<倉助利>, <高句麗>人也, <烽上王>時, 爲國相. 時<慕容 >爲邊患. 王謂群臣曰: "<慕容>氏兵强, 屢犯我疆 , 爲之奈何?" <倉助利>對曰: "北部大兄<高奴子>, 賢且勇, 大王若欲禦寇安民, 非<高奴子>, 無可用者." 王以爲新城太守, <慕容 >不復來. 九年秋八月, 王發國內丁男年十五已上, 修理宮室. 民乏於食, 困於役, 因之以流亡. <倉助利>諫曰: "天災 至, 年穀不登, 黎民失所, 壯者流離四方, 老幼轉乎溝壑. 此誠畏天憂民, 恐懼修省之時也.

창 조리는 고구려인인데 봉상왕 때 국상이 되었다. 당시에는 모용 외가 변경의 걱정거리가 되어 있었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모용씨는 병력이 강력하여 누차 우리의 강역을 침범하니 이를 어찌 할 것인가?" 하니, 창 조리가 대답하기를 "북부 대형 고노자가 현명하고도 용감하니, 대왕께서 외적을 막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시려면 고노자가 아니고는 쓸 만한 자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고노자를 신성 태수로 삼으니, 모용 외가 다시는 오지 못했다. 9년 가을 8월에 왕이 15세 이상 되는 전국의 장정을 징발하여 궁실을 수리하자, 백성들이 식량이 부족하고 노역에 시달리게 되어 고향을 떠나 유랑 생활을 하였다. 창 조리가 간하여 말하기를 "천재가 거듭되고 곡식이 잘 익지 않아서, 백성들은 살 곳을 잃고, 장정들은 사방으로 유랑하고, 노인과 아이들은 구렁텅이에서 뒹굴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참으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걱정하며 두려움을 가지고 자신을 반성할 때입니다.

○大王曾是不思, 驅飢餓之人, 困木石之役, 甚乖爲民父母之意, 而況比隣有强梗之敵, 若乘吾弊以來, 其如社稷生民何? 願大王熟計之." 王 曰: "君者, 百姓之所瞻望也. 宮室不壯麗, 無以示威重. 今相國, 蓋欲謗寡人, 以干百姓之譽也." <助利>曰: "君不恤民, 非仁也, 臣不諫君, 非忠也. 臣旣承乏國相, 不敢不言, 豈敢干譽乎?" 王笑曰: "國相欲爲百姓死耶? 冀無後{復} 言." <助利>知王之不悛, 退與群臣謀廢之. 王知不免, 自縊.

李丙燾.
대왕께서는 이것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부려 토목공사에 시달리게 하시니, 이것은 백성의 부모된 사람이 할 일과는 크게 어긋나는 것입니다. 더구나 가까운 이웃에 강한 적이 있는데, 만약 우리가 피폐해진 틈을 타서 그들이 쳐들어 온다면 사직과 생민을 어떻게 하시렵니까?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생각하소서."
왕이 노하여 말했다. "임금이란 백성들이 우러러 보는 존재이다. 궁실이 장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 수 없다. 이제 상국은 과인을 비방함으로써 아마도 백성들의 칭송을 얻으려는 모양이구나." 조리가 말했다. "임금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 인한 것이 아니며, 신하가 임금에게 간언을 하지 않으면 충성이 아닙니다. 신은 이미 국상의 빈 자리를 이어받고 있으므로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 어찌 감히 백성의 칭송을 바라겠습니까?" 왕이 웃으며 말했다.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으려는가? 다시 말하지 말기를 바란다." 조리는 왕에게 개전의 정이 없음을 알고 물러나와 여러 신하들과 함께 폐위시킬 것을 모의했다. 왕은 사태를 모면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淵蓋蘇文 연개소문>

○<蓋蘇文>[或云<蓋金>.], 姓<泉>氏. 自云生氷{水} 中, 以惑衆. 儀表雄偉, 意氣豪逸. 其父東部[或云西部.]大人大對盧死, <蓋蘇文>當嗣, 而國人以性忍暴, 惡之不得立. <蘇文>頓首謝衆, 請攝職, 如有不可, 雖廢無悔. 衆哀之, 遂許. 嗣位而凶殘不道, 諸大人與王, 密議欲誅, 事洩. <蘇文>悉集部兵, 若將校閱者, 幷盛陳酒饌於城南, 召諸大臣共臨視. 賓至, 盡殺之, 凡百餘人. 馳入宮弑王, 斷爲數段, 棄之溝中. 立王弟之子<臧>爲王, 自爲莫離支, 其官如<唐>兵部尙書兼中書令職也.

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개소문[혹은 개금이라고 한다.]은 성이 천씨이다. 스스로 물 속에서 났다고 하여 사람들을 미혹시켰다. 그는 외양이 웅장하고 의기가 호방하였다. 그의 부친 동부[혹은 서부라고 한다.] 대인 대대로가 사망하자, 개소문이 마땅히 그 뒤를 이어야 할 것이지만, 나라 사람들이 그의 성품이 잔인하고 포악하다 하여 미워하였기 때문에 뒤를 잇지 못하게 되었다. 소문이 머리를 조아리며 여러 사람들에게 사죄하고 그 직위를 서리할 것을 간청하면서, 만약 옳지 않은 행위를 하면 폐하여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마침내 이를 허락하였다.
그가 직위를 계승하더니 흉포하고 잔인하여 무도한 행동을 하였다. 이에 따라 여러 대인들이 왕과 은밀하게 모의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이것이 그만 누설되고 말았다. 소문은 자기 부의 군사를 전부 모아 마치 사열하는 것 처럼 하고, 동시에 성 남쪽에 술과 음식을 성대히 차려 놓고 여러 대신들을 불러서 함께 사열하기를 권하였다. 손님들이 오자 그는 그들을 모조리 죽였으니, 사망자가 모두 백여 명에 이르렀다. 그는 궁중으로 달려 들어가 왕을 시해하여 몇 토막으로 잘라서 구덩이에 버렸다. 그리고는 왕의 동생의 아들 장을 왕으로 세우고 스스로 막리지가 되었다. 이 관직은 당 나라의 병부 상서 겸 중서령의 직위에 해당한다.

○於是, 號令遠近, 專制國事, 甚有威嚴. 身佩五刀, 左右莫敢仰視. 每上下馬, 常令貴人·武將伏地, 而履之. 出行, 必布隊伍, 前導者長呼, 則人皆奔 , 不避坑谷, 國人甚苦之. <唐><穆宗{太宗}> 聞<蓋蘇文>弑君而專國, 欲伐之. <長孫無忌>曰: "<蘇文>自知罪大, 畏大國之討, 設其守備. 陛下姑爲之隱忍, 彼得以自安, 愈肆其惡, 然後取之, 未晩也." 帝從之. <蘇文>告王曰: "聞中國三敎 行, 而國家道敎尙缺, 請遣使於<唐>求之." 王遂表請. <唐>遣道士<叔達>等八人, 兼賜『道德經』. 於是, 取浮屠寺館之. 會<新羅>入<唐>, 告<百濟>攻取我四十餘城, 復與<高句麗>連兵, 謀絶入朝之路. 小國不得已出師, 伏乞天兵救援.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이렇게 되자 그는 원근을 호령하고 국사를 전횡하여 위세가 대단하였다. 그는 몸에 칼을 다섯 자루나 차고 다녔으니,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도 그를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말에 오르내릴 때마다 항상 귀인과 무장을 땅에 엎드리게 하여 발판으로 삼았으며, 외출할 때는 반드시 대오를 벌려 세우고 갔는데, 앞에서 대오를 인도하는 사람이 길게 외치면 사람들이 모두 도망치면서 구덩이나 골짜기도 피하지 않았으니, 국인들이 이를 몹시 고통스럽게 여겼다.
당 태종은 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고 국사를 전횡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치려 하였다. 이 때 장손 무기가 말했다. "소문은 자신의 죄가 큰 줄을 스스로 알고, 또한 대국의 정벌을 두려워하여 수비 대책을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조금 참고 계시다가 그가 스스로 안심하여 나쁜 일을 더욱 마음대로 하고 난 뒤에 그를 공격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황제가 그의 말을 따랐다.
소문이 왕에게 말하기를 "듣건대 중국에는 삼교가 병행한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는 도교가 아직 없으니, 당에 사신을 보내 구해 오기를 바랍니다" 하니, 왕이 마침내 표문을 보내 이를 청하였다. 당에서는 도사 숙달 등 8명을 보내며 동시에 [도덕경]을 보내주었다. 이에 고구려에서는 그들을 사찰에 묵게 하였다. 그 때 마침 신라가 당에 가서 말하기를, 백제가 신라의 40여 성을 빼앗고, 또한 고구려와 군사를 연합하여, 신라가 당 나라로 들어오는 길을 차단하려하므로, 신라가 부득이 군사를 출동시킬 것이니, 이에 당병의 구원을 엎드려 빈다고 하였다.

○於是, <太宗>命司農丞<相里玄奬>賚璽書, 勅王曰: "<新羅>委眞{質} 國家, 朝貢不闕, 爾與<百濟>, 宜各 兵. 若更攻之, 明年, 發兵討爾國矣." 初<玄奬>入境, <蘇文>已將兵擊<新羅>, 王使召之乃還. <玄奬>宣勅, <蘇文>曰: "往者, 隋人侵我, <新羅>乘 , 奪我城邑五百里. 自此怨隙已久, 若非還我侵地, 兵不能已." <玄奬>曰: "旣往之事, 焉可追論? 今<遼東>, 本皆<中國>郡縣, <中國>尙不言, <句麗>豈得必求故地?" <蘇文>不從. <玄奬>還具言之, <太宗>曰: "<蓋蘇文>弑其君, 賊其大臣, 殘 {虐} 其民, 今又違我詔命, 不可以不討." 又遣使<蔣儼>諭旨, <蘇文>竟不奉詔, 乃以兵脅, 使者不屈, 遂囚之窟室中. 於是, <太宗>大擧兵, 親征之, 事具『句麗本紀』.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이에 태종이 사농승 상리 현장으로 하여금 새서를 가지고 고구려에 와서 왕에게 칙명을 내리기를 "신라는 우리의 맹방으로서 조공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그대와 백제는 각각 군사를 거두어야 하리라. 만일 다시 공격한다면 명년에는 군사를 출동시켜 그대의 나라를 토벌하겠노라" 하였다. 처음 현장이 국경에 들어왔을 때, 소문은 이미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쳤었는데 왕이 그를 소환하였다. 현장이 칙서를 선포하니 소문이 말하기를 "옛날 수 나라가 우리를 침략하였을 때, 신라가 이 틈을 타서 우리의 성읍 5백 리를 빼앗아 갔다. 이로부터 원한과 간극이 이미 오래되었으니, 만일 잃어버린 우리 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전쟁을 그만 둘 수가 없다"고 하였다. 현장이 말하기를 "기왕의 일을 어찌 추론하겠는가? 지금의 요동은 본래 모두 중국의 군현이었으나, 중국에서는 이를 오히려 따지지 않는데, 어찌 고구려가 반드시 옛 땅을 찾으려 하는가?" 하였으나 소문이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현장이 돌아가서 사실대로 모두 고하니 태종이 말했다. "개소문이 그의 임금을 시해하고 그의 대신들을 살해했으며, 백성들을 못 살게 하고 지금은 또한 나의 명령을 어기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태종은 다시 사신 장 엄을 보내 타일렀으나 소문은 끝내 조서를 받들지 않고 군사로써 위협하였다. 사자가 이에 굴하지 않자 소문은 마침내 그를 굴 속에 가두었다. 이에 태종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직접 정벌하였으니, 이 사실이 모두 [고구려본기]에 기재되어 있다.

○<蘇文>至<乾封>元年死. 子<男生>, 字<元德>. 九歲以父任爲先人, 遷中裏小兄, 猶<唐>謁者也. 又爲中裏大兄, 知國政, 凡辭令皆<男生>主之, 進中裏位頭大兄. 久之, 爲莫離支兼三軍大將軍, 加大莫離支. 出按諸部, 而弟<男建>·<男産>, 知國事. 或曰: "<男生>惡君等逼己, 將除之." <建>·<産>未之信. 又有謂<男生>: "將不納君." <男生>遣諜往, <男建>捕得. 卽矯王命召之, <男生>懼不敢入. <男建>殺其子<獻忠>, <男生>走保<國內城>, 率其衆, 與<契丹><靺鞨>兵附<唐>, 遣子<獻誠>訴之. <高宗>拜<獻誠>右武衛將軍, 賜乘輿馬·瑞錦寶刀, 使還報.

소문은 건봉 원년에 죽었다. 그의 아들 남생은 자가 원덕인데 9세에 아버지의 임명으로 선인이 되었다가 중리 소형으로 영전되었으니, 이는 당의 알자에 해당하는 벼슬이었다. 남생은 또한 중리 대형이 되어 국정을 보살피게 되었으니, 모든 사령을 그가 주관하게 되었고, 중리 위두 대형으로 승진되었다. 오랜 뒤에 그는 막리지 겸 3군 대장군이 되었고, 결국 대막리지가 되었다. 그가 여러 부에 나가서 안찰하게 됨에 따라 그의 아우 남건과 남산이 국사를 보살피게 되었다. 누군가 남건과 남산에게 말하기를 "남생은 그대들이 자신을 핍박해 오는 것을 싫어하여 없애버리려 한다"고 하였으나, 남건과 남산이 이를 믿지 않았다. 또한 어떤 자가 남생에게 남건과 남산이 그대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남생이 첩자를 보내 두 동생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남건이 그 첩자를 잡아 두었다. 그리고 즉시 왕명을 가장하여 남생을 소환하니, 남생이 두려워 하여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다. 남건이 남생의 아들 헌충을 죽였다. 남생은 도주하여 국내성을 지키며 무리를 거느리고 거란, 말갈병과 함께 당 나라에 투항하였다. 그는 아들 헌성을 보내 하소연하였다. 고종이 헌성에게 우무위 장군을 제수하고, 수레, 말,비단, 보검을 주어 돌아가 보고하게 하였다.

○詔<契苾何力>率兵援之, <男生>乃免. 授<平壤>道行軍大摠管, 兼持節安撫大使, 擧<哥勿>·<南蘇>·<倉巖>等城以降. 帝又命西臺舍人<李虔繹>, 就軍慰勞, 賜 {袍} 帶金 七事. 明年, 召入朝, 遷<遼東>大都督<玄 郡>公, 賜第京師. 因詔還軍, 與<李勣>攻<平壤>, 入禽王. 帝詔遣子, 卽<遼水>勞賜. 還, 進右衛大將軍<卞國公>. 年四十六卒. <男生>純厚有禮, 奏對敏辯, 善射藝. 其初至, 伏斧 待罪, 世以此稱焉.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고종이 설필하력에게 조서를 내려 군사를 거느리고 남생을 구원하게 하니 남생이 이에 화를 면하였다. 고종이 남생에게 평양도 행군 대총관 겸 지절 안무 대사를 제수하니, 그는 가물, 남소, 창암 등의 성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황제가 또한 서대 사인 이 건역에게 명하여 남생의 군중에 가서 위로하게 하고 포대 금구 일곱 가지를 하사하였다. 이듬해에 그를 불러 입조케 하여, 요동대도독현토군공의 직함으로 바꾸고 서울에 거처를 하사하였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 군중으로 돌아가 이 적과 함께 평양을 공격하고, 성 안으로 들어가 왕을 사로잡게 하였다. 황제는 자기의 아들에게 조서를 주어 요수로 가서 그들을 위로하고 상을 주게 하였다. 남생은 군중에서 돌아와 우위 대장군 변국공으로 승진하였다. 그는 46세에 죽었다. 남생은 순후하고 예의가 있었으며, 이치에 합당하게 상주를 올렸으며, 말을 잘 하였고, 또한 활을 잘 쏘았다. 그가 처음 당에 갔을 때 도끼에 엎드려 대죄하니 세상에서 이것으로 그를 칭찬하였다.

○<獻誠>, <天授>中以右衛大將軍兼羽林衛. <武后>嘗出金幣, 於文武官內, 擇善射者五人, 中者以賜之. 內史<張光輔>先讓<獻誠>, 爲第一, <獻誠>後讓右王鈐衛大將軍<薛吐摩支>, <摩支>又讓<獻誠>. 旣而, <獻誠>奏曰: "陛下擇善射者, 然多非華人, 臣恐<唐>官以射爲恥, 不如罷之." <后>嘉納. <來俊臣>嘗求貨, <獻誠>不答. 乃誣其謀叛, 縊殺之. <后>後知其寃, 贈右羽林衛大將軍, 以禮改葬.

헌성은 천수 연간에 우위 대장군으로 우림위를 겸하였다. 무후가 일찌기 금폐를 내놓고, 문무관 중에서 활 잘 쏘는 사람 다섯 명을 골라 이것을 상으로 주기로 하였다. 내사 장 광보가 먼저 헌성에게 양보하여 그가 제일이 되었고, 헌성은 다시 우왕 검위 대장군 설토마지에게 양보하니, 마지는 또한 헌성에게 양보하였다. 얼마 후에 헌성이 아뢰기를 "폐하께서 활 잘 쏘는 사람을 뽑으셨지만 대부분 중국 사람이 아닙니다. 신은 당의 관리들이 활 쏘는 일을 수치스럽게 여길까 두렵사오니 그만 두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니, 무후가 옳다고 여겨 받아들였다.
내 준신이 일찌기 헌성에게 재물을 요구했는데, 헌성이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내 준신이 헌성이 모반한다고 무고하여 목매어 죽였다. 무후가 나중에 헌성이 억울하게 죽은 것을 알고 우우림위 대장군을 추증하고 예를 갖추어 다시 장사지냈다.

○論曰: <宋><神宗>與<王介甫>論事曰: "<太宗>伐<高句麗>, 何以不克?" <介甫>曰: "<蓋蘇文>, 非常人也." 然則<蘇文>, 亦才士也, 而不能以直道奉國, 殘暴自肆, 以至大逆. <春秋>"君弑賊不討, 謂之國無人", 而<蘇文>保腰領, 以死於家, 可謂幸而免者. <男生>·<獻誠>, 雖有聞於唐室, 而以本國言之, 未免爲叛人者矣.
三國史記卷第四十九.

저자의 견해 : 송 신종이 왕 개보와 사적을 논하여 말했다. "태종이 고구려를 쳤을 때, 왜 승리하지 못하였는가?" 개보가 대답하였다. "개소문은 비상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즉 소문도 역시 재사였는데, 정도로써 나라를 받들지 못하고, 잔인 포악하여 제멋대로 행동하다가 대역에 이른 것이다. [춘추]에는 "임금이 시해되었는데도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면 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한다"라고 하였는데, 소문이 몸을 보전하여 집에서 죽은 것은 가히 요행으로 토벌을 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남생과 헌성은 비록 당 나라의 황실에 이름이 알려졌지만, 본국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반역자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삼국사기 권 제 49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