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삼국유사 제 4권 전문

포맨#신기 2012. 2. 26. 13:55

탑상 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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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상(塔像) 제 4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

 

<옥룡집(玉龍集)>과 <자장전(慈藏傳)>, 그리고 여러 사람의 전기에는 모두 이렇게 말했다.  "신라 월성(月城) 동쪽, 용궁(龍宮) 남쪽에 가섭불(迦葉佛)의 연좌석(宴坐石)이 있으니, 이것은 곧 전불(前佛) 때의 절터이며, 지금 황룡사(皇龍寺) 터는 곧 일곱 절의 하나이다."

<국사(國史)>를 상고하면, 진흥왕 즉위 14년 개국(開國) 3년 계유(癸酉; 553) 2월에 동쪽에 신궁(新宮)을 세웠는데 여기에서 황룡(皇(黃)龍)이 나타났으므로 왕은 이것을 의심해서, 고쳐서 황룡사(皇(黃)龍寺)라 했다.  연좌석은 불전(佛殿) 후면(後面)에 있었다.  일찍이 한 번 본 일이 있는데 돌의 높이는 5, 6척이나 되었으나 그 둘레는 겨우 서 발밖에 되지 않았으며 우뚝하게 서 있고 그 위는 편편했다.  진흥왕(眞興王)이 절을 세운 이후로 두 번이나 화재를 겪었으므로 돌이 갈라진 곳이 있다.  그래서 절의 중이 여기에 쇠를 붙여서 보호하게 한다.

여기에 찬(讚)해 말한다.

 

불교가 침체함이 얼마인지 기억할 수 없는데,

오직 연좌석(宴坐石)만이 그대로 남아 있네.

상전(桑田)이 변해 몇 번이나 창해(滄海)가 되었는가

아깝게도 우뚝한 채 아무 데로도 옮기지 않았네.

 

이윽고 몽고(蒙古)의 큰 병란 이후에 불전(佛殿)과 탑은 모두 불타 버렸다.  그래서 이 돌도 역시 흙에 파묻혀서 겨우 지면(地面)과 같이 편편해진 것이다.

<아함경(阿含經)>을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가섭불(迦葉佛)은 바로 현겁(賢劫)의 세 번째 부처다.  그는 사람의 나이로 쳐서 2만 세 때에 세상에 태어났다고 한다.  여기에 의거해서 증감법(增減法)으로 계산한다면 언제나 성겁(成劫)의 시초에는 모두 무량세(無量歲)를 누렸다.  이것이 점점 감해져서 8만 세에 이르면 그때가 바로 주겁(住劫)의 시초가 된다.  이때부터 또 100년마다 1 세씩 감하여 10 세가 되면 일감(一減)이 되고 또 증가하여 사람의 나이 8만 세가 되면 일증(一增)이 된다.  이렇게 해서 20번 감하고 20번 더하면 한 주겁(住劫)이 된다.  이 한 주겁 동안에 1,000의 부처가 세상에 나타나는데, 지금 본사(本師)인 석가불(釋迦佛)은 네 번째의 부처이다.  이 네 번째의 부처는 모두 제9감(第九減) 중에 나타난다.  석가세존(釋迦世尊)이 100세 때부터 가섭불의 2만 세까지는 이미 200만여 세나 된다. 만일 현겁(現劫) 시초의 첫째 부처였던 구류손불(拘留孫佛) 때에 이르면 또 몇 만 세(歲)가 된다.  구류손불 때로부터 위로 올라가 겁초(劫初)의 무량세(無量歲)를 누리던 때 까지는 또 얼마나 될 것인가.  석가세존으로부터 아래로 지금의 지원(至元) 18년 신사(辛巳; 1281)까지는 이미 2,230년이고 보면 구류손불로부터 가섭불 때를 지나서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또 몇만 세나 되겠는가.

본조(本朝)의 명사(名士)의 오세문(五世文)이 역대가(歷代歌)를 지었는데 여기에 의하면, 대금(大金)의 정우(貞祐) 7년 기묘(己卯; 1219)에서 거슬러 따져서 4만 9,600여 세에 이르면 바로 반고씨(盤古氏)가 천지를 개벽한 무인년(戊寅年)이 된다고 했다.  또 연희궁(延禧宮) 녹사(錄事) 김희령(金希寧)이 지은 대일역법(大一曆法)에 의하면, 천지 개벽한 상원(上元) 갑자(甲子)로부터 원풍(元豊) 갑자(甲子; 1084)에 이르기까지 193만 7,641 세라고 했다.  또 <찬고도(纂古圖)>에서는, 천지가 개벽한 때로부터 획린(獲麟; 前 477)에 이르기까지가 276만 세라고 했다.  여러 경문(經文)을 상고해 보면 또 가섭불 때부터 지금까지가 바로 이 연좌석의 나이가 된다고 하였으니, 오히려 겁초(劫初)의 천지가 때와는 어린애 나이가 될 정도다.  이들 삼가(三家)의 말들이 오히려 이 어린 돌의 나이에도 미치지 못하니 그들은 천지개벽의 설(說)에 있어서는 몹시 소홀했던 것이다.

 

 

요동성(遼東城)의 육왕탑(育王塔)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에 이렇게 실려 있다.  고구려 요동성(遼東城) 곁에 있는 탑은 고로(古老)들의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러하다.  옛날 고구려 성왕(聖王)이 국경 지방을 순행하던 길에 이 성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오색 구름이 땅을 덮는 것을 보고는 그 구름 속을 찾아가 보았다.  거기엔 중 하나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다.  그 곁에는 세 겹으로 된 토탑(土塔)이 있는데 위는 솥을 덮은 것 같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이에 다시 가서 중을 찾아보았으나, 다만 거친 풀이 있을 뿐이다.  거기를 길 깊이나 되게 파보았더니 지팡이와 신이 나오고 더 파 보았더니 명(銘)이 나왔는데 명 위에 범서(梵書)가 있었다.  시신(侍臣)이 이 글을 알아보고 불탑(佛塔)이라고 말하였다.  왕이 자세한 것을 묻자 시신은 대답한다.  "이것은 한(漢)나라 때 있었던 것으로, 그 이름을 포도왕(蒲圖王; 본래는 휴도왕休屠王이라 했는데 하늘에 제사지내는 금인金人이다)이라 합니다."  성왕은 이로부터 불교를 믿을 마음이 생겨서 이내 칠중(七重)의 목탑(木塔)을 세웠고, 뒤에 불법(佛法)이 비로소 전해 오자 그 시말(始末)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지금 다시 그 탑의 높이를 줄이다가 본탑(本塔)이 썩어서 무너졌다.  아육왕(阿育王)이 통일했다는 염부재주(閻浮提州)에는 곳곳에 탑을 세웠으니 이는 괴상할 것이 없다.

또한 당(唐)나라 용삭(龍朔) 연간(661-662)에 요동에 전쟁이 벌어져서 행군(行軍) 설인귀(薛仁貴)는 수양제(隋煬帝)가 토벌한 요동의 옛 땅에 이르렀다가 여기에서 산에 있는 불상(佛像)을 보았는데 모두 텅 비어 있고 몹시 쓸쓸하여 사람의 왕래가 끊어져 있었다.  고로(古老)에게 물었더니 "이 불상은 선대(先代)에 나타난 것입니다."한다.  이에 이 불상을 그대로 그려 가지고 서울로 왔다(이 사실은 모두 약함若函에 실려 있다).

서한(西漢)과 삼국(三國)의 지리지(地理地)를 상고해 보면 요동성은 압록강밖에 있으며, 한(漢)나라 유주(幽州)에 소속되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때의 고구려 성왕이란 어느 임금인지 알 수가 없다.  혹 동명성제(東明聖帝)라고 하나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동명제는 전한(前漢)의 원제(元帝) 건소(建昭) 2년(前 37)에 즉위해서 성제(成帝) 홍가(鴻嘉) 임인(任寅; 前 19)에 승하했으니, 그때라면 한나라에서도 역시 패엽(貝葉)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해외(海外)의 배신(陪臣)으로서 범서(梵書)를 알아본단 말인가.  그러나 불(佛)을 포도왕(蒲圖王)이라고 했으니 서한(西漢) 때에도 필시 서역문자(西域文字)를 아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범서라고 했을 것이다.

고전(古傳)을 상고해 보건대, 아육왕(阿育王)이 귀신의 무리에게 명하여 인구 9억 명이 사는 곳마다 탑 하나씩을 세웠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염부계(閻浮界) 안에 8만 4,000개를 세워서 큰 돌 속에 감추어 두었다고 한다.  지금 여러 곳에서 그 상서로운 징조가 한두 번 나타난 것이 아니니 대개 진신(眞身)의 사리(舍利)란 그 감응(感應)되는 것을 헤아리기가 어려운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야육왕(阿育王)의 보탑(寶塔)은 속세 곳곳에 세워져,

비에 젖고 구름에 묻히고 이끼마저 아롱졌네.

생각건데 그때의 길손들의 보는 눈은,

몇 사람이나 제신(祭神)의 무덤을 가리켰을까.

 

 

금관성(金官城)의 파사석탑(婆娑石塔)

 

금관(金官)에 있는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婆娑石塔)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金官國)으로 있을 때 세조(世祖) 수로왕(首露王)의 비(妃)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갑신(甲申; 48)에 서역(西域) 아유타국(阿踰타國)에서 배에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두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향하려 하는데,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받게 되어서 가지 못하고 돌아와 부왕(父王)께 아뢰자 부왕은 이 탑을 배에 싣고 가라고 했다.  그리하여 편하게 바다를 건너 남쪽 언덕에 도착하여 배를 대었다.  이때 그 배에는 붉은 돛과 붉은 깃발을 달았고 아름다운 주옥(珠玉)을 실었기 때문에 지금 그곳을 주포(主浦)라고 한다.  그리고 맨 처음에 공주가 비단 바지를 벗던 바위를 능현(綾峴)이라 하고, 붉은 기(旗)가 처음으로 해안에 들어가던 곳을 기출변(旗出邊)이라 한다.

수로왕(首露王)이 황후(皇后)를 맞아서 같이 150여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해동(海東)에는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佛法)을 신봉(信奉)하는 일이 없었다.  대개 상교(像敎)가 전해 오지 않아서 이 지방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가락국본기(駕洛國本記)>에는 절을 세웠다는 글이 실려 있지 않다.  그러던 것이 제8대 질지왕(질知王) 2년 임진(壬辰; 452)에 이르러 그곳에 절을 세우고 왕후사(王后寺)를 세워(이것은 아도阿道와 눌지왕訥祗王의 시대에 해당된다.  법흥왕法興王 이전의 일이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복을 빌고 있다.  또 겸해서 남쪽 왜국(倭國)을 진압시켰으니, <가락국본기<駕洛國本記)>에 자세히 실려 있다.

탑은 모진 4면이 5층으로 되었고, 그 조각(彫刻)은 매우 기묘(奇妙)하다.  돌에는 희미한 붉은 무늬가 있고 품질이 매우 좋은데, 우리 나라에서 나는 종류가 아니다.  본초(本草)에 말한, "닭의 볏의 피를 찍어서 시험했다"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금관국을 또한 가락국이라고 하니, <가락국본기(駕洛國本記)>에 자세히 실려 있다.

찬(讚)해 말한다.

 

석탑을 실은 붉은 돛대 깃발도 가벼운데,

신령께 빌어서 험한 물결 헤치고 왔네.

어찌 황옥(黃玉)만을 도와서 이 언덕에 왔으랴.

천년 동안 왜국의 노경(怒鯨)을 막고자 함일세.

 

 

 

고(구)려(高(句)麗)의 영탑사(靈塔寺)

 

<고승전(高僧傳)>에 말하기를, "중 보덕(普德)의 자(字)는 지법(智法)이니, 전 고구려 용강현(龍岡縣) 사람이다" 했으니 이것은 아래에 있는 본전(本傳)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보덕은 항상 평양성(平壤城)에 살고 있었는데 산방(山方)의 늙은 중이 와서 불경(佛經) 강의해 주기를 청하므로 굳이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가서 열반경(涅槃經) 40여 권을 강의하였다.  강의를 마치고 성 서쪽 대보산(大寶山)의 바위로 된 굴 밑에 이르러서 선관(禪觀)했다.  이때 신인(神人)이 와서 청하기를, "이곳에 사는 것이 좋겠다"하고, 석장(錫杖)을 그의 앞에 놓고 땅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 속에 8면으로 된 7층의 석탑(石塔)이 있을 것이다"하므로 땅을 파니 과연 그러했다.  이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영탑사(靈塔寺)라 하고 그곳에서 살았다.

 

 

황룡사(皇龍寺) 장육(丈六)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이 즉위한 14년 계유(癸酉; 553) 2월에 장차 용궁(龍宮) 남쪽에 대궐을 지으려 하니, 황룡(黃龍)이 그곳에 나타났으므로 이것을 고쳐서 절을 삼고 이름을 황룡사(皇龍寺)라 하고, 기축년(己丑; 569)에 이르러 담을 쌓아 17년만에 완성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바다 남쪽에 큰 배 한 척이 나타나서 하곡현(河曲縣) 사포(絲浦; 지금의 울주蔚州 곡포谷浦)에 닿았다.  이 배를 검사해 보니 공문(公文)이 있는데 쓰기를, "서축(西竺) 아육왕(阿育王)이 누른 쇠 5만 7,000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별전別傳에는 쇠가 40만 7,000근, 금金이 1,000냥이라고 했으나 잘못인 듯싶다.  혹은 3만 7,000근이라고도 한다) 장차 석가(釋迦)의 존상(尊像) 셋을 부어 만들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해서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빌기를, 부디 인연있는 국토(國土)로 가서 장육존상(丈六尊像)을 이루어 주기 바란다"했고, 부처 하나와 보살상(菩薩像) 둘의 모형(模型)도 함께 실려 있었다.  현(縣)의 관리가 문서를 갖추어서 보고하자 왕은 사자를 시켜 그 고을 성 동쪽의 높고 깨끗한 땅을 골라서 동축사(東竺寺)를 세우고 세 불상(佛像)을 편안히 모시게 했다.  그리고 그 금(金)과 쇠는 서울로 보내서 태건(太建) 6년 갑오(甲午; 574) 3월(<사중기寺中記>엔 계미癸未년 10월 17일이라고 했다)에 장륙존상(丈六尊像)을 부어 만들었는데 공사는 금시에 이루어졌으며, 그 무게는 3만 5,007근으로 황금(黃金) 198푼이 들었고 두 보살상(菩薩像)은 쇠 1만 2,000근과 황금 1만 136푼이 들었다.  이 장륙존상을 황룡사에 모셨더니 그 이듬해 불상에서 눈물이 발꿈치까지 흘러내려 땅이 한 자나 젖었으니, 이것은 대왕(大王)이 승하할 조짐이었다.  혹은 불상이 진평왕(眞平王) 때에 이루어졌다고 하나 이것은 그릇된 말이다.

별본(別本)에는 이렇게 말했다.  아육왕은 서축 대향화국(大香華國)에서 부처님이 세상을 떠난 후 100년 만에 태어났다.  그는 부처님께 공양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금과 쇠 몇 근씩을 모아서 세 번이나 불상을 부어 만들었지만 성광공지 못했다.  이때 왕의 태자가 아뢰기를, "그 일은 혼자의 힘으로 성공하지 못할 것을 저는 벌써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겨 그것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웠더니, 그 배는 남염부제(南閻浮提)의 16개 큰 나라와 500 중국(中國), 10천의 소국(小國), 8만의 촌락(村落)을 두루 돌아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모두 불상을 부어 만드는 일에 성공하지 못했다.  최후로 신라국에 이르러 진흥왕이 문잉림(文仍林)에서 이것을 부어 만들어 불상을 이루니 좋은 모양이 다 이루어졌다.  아육왕은 이래서 근심이 없게 되었다.

뒤에 대덕(大德) 자장(慈藏)이 중국으로 유학하여 오대산(五臺山)에 이르렀더니 문수보살(文殊菩薩)이 현신(現身)해서 감응하여 비결(秘訣)을 주면서 그에게 부탁한다.  "너희 나라의 황룡사는 바로 석가와 가섭불(迦葉佛)이 강연하던 곳으로, 연좌석(宴坐石)이 아직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의 무우왕(無憂王)이 황철(黃鐵) 몇 근을 모아서 바다에 띄웠던 것인데, 1,300여 년이 지난 뒤에야 너희 나라에 이르러서 불상이 이루어지고 그 절에 모셔졌으니, 이는 대개 위덕(威德)의 인연이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이다(별기別記에 실려 있는 것과 같지 않다).

불상(佛像)이 이루어진 뒤에 동축사(東竺寺)의 삼존불(三尊佛)도 역시 황룡사로 옮겨져 안치(安置)했다.  <사기(史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진평왕 5(6)년 갑진년(甲辰; 584)에 이 절의 금당이 이루어지고, 선덕왕(善德王) 때에 이 절의 첫 번째 주지(住持)는 진골(眞骨) 환희사(歡喜師)였고, 제2대 주지는 자장국통(慈藏國統), 그 다음은 국통혜훈(國統惠訓), 그 다음은 상률사(廂律師)였다."  이제 병화(兵火)가 있은 이후로 대상(大像)과 두 보살상(菩薩像)은 모두 녹아 없어졌고, 작은 석가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찬(讚)해 말한다.

 

속세(俗世) 어느 곳인들 참 고향이 아니랴만,

향화(香火)의 인연은 우리 나라가 으뜸일세.

이것은 아육왕(阿育王)이 착수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월성(月城) 옛터를 찾느라고 그랬던 것일세.

 

 

황룡사(皇龍寺) 구층탑(九層塔)

 

신라 제27대 선덕왕이 즉위 5년인 정관(貞觀) 10년 병신(丙申; 636)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중국으로 유학하여 오대산(五臺山)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의 불법을 전해주는 것을 감응해서 얻었는데(자세한 것은 본전本傳에 실려있다), 문수보살은 또 말했다.  "너희 국왕은 바로 천축(天竺)의 찰리종(刹利種)의 왕으로, 이미 불기(佛記)를 받았기 때문에 따로 인연이 있어 동이공공(東夷共工)의 종족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산천(山川)이 험한 탓으로 사람의 성질이 거칠고 사나워서 간사한 말을 많이 믿는다.  그래서 때때로 혹 천신(天神)이 화를 내리기도 하지만 다문비구(多聞比丘)가 나라 안에 있기 때문에 군신(君臣)이 편안하고 만백성이 화평한 것이다."  말을 끝내더니 이내 보이지 않았다.  자장은 이것이 대성(大聖)의 변화인 줄 알고 슬피 울면서 물러갔다.  법사(法師)가 중국 대화지(太和池) 가를 지나는데 갑자기 신인(神人)이 나와서 묻는다.  "어찌하여 이곳에 오셨오?"  자장이 대답한다.  "보리(菩提)를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인은 그에게 절하고 나서 또 묻는다.  "그대의 나라에 무슨 어려운 일이 있소?"  "우리 나라는 북으로 말갈(靺鞨)에 연하고 남으로는 왜국(倭國)에 이어졌으며,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국경을 범하는 등 이웃 나라의 횡포가 자주 있사오니 이것이 백성들의 걱정입니다."  신인이 말한다.  "지금 그대의 나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아 덕은 있어도 위엄이 없기 때문에 이웃 나라에서 침략을 도모하는 것이니 그대는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시오"  자장이 물었다.  "고향에 돌아가면 무슨 유익한 일이 있겠습니까?"  신인이 말한다.  "황룡사(皇龍寺)의 호법룡(護法龍)은 바로 나의 큰아들이오.  범왕(梵王)의 명령을 받아, 그 절에 와서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거든 절 안에 구층탑(九層塔)을 세우시오.  그러면 이웃 나라들은 항복할 것이며,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租貢)하여 왕업(王業)이 길이 편안할 것이오.  탑을 세운 뒤에는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죄인을 용서하면 외적(外賊)이 해치지 못할 것이오.  다시 나를 위해서 경기(京畿) 남쪽 언덕에 절 한 채를 지어 함께 내 복을 빌어 주면 나도 또한 그 은덕(恩德)을 보답하겠소."  말을 하고 옥(玉)을 바친 후 이내 형체를 숨기고 나타나지 않았다(<사중기寺中記>에 말하기를, 종남산終南山 원향선사圓香禪師에게서 탑 세울 까닭을 들었다고 했다).

정관(貞觀) 17년 계묘(癸卯; 643) 16일에 자장법사는 당나라 황제가 준 불경(佛經)·불상(佛像)·가사(袈裟)·폐백(幣帛) 등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탑 세울 일을 임금에게 아뢰자 선덕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 일을 의논하니 신하들은 말하기를, "백제에서 공장이를 청해 데려와야 되겠습니다."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에 가서 청해 오게 했다. 이리하여 아비지(阿非知)라고 하는 공장이가 명을 받고 와서 나무와 돌을 재고, 이간(伊干) 용춘(龍春; 혹은 용수龍樹)이 그 역사를 주관하는데 거느리고 일한 소장(小匠)들은 200 명이나 되었다.

처음에 절의 기둥을 세우던 날에 공장이는 꿈에 본국인 백제가 멸망하는 모양을 보았다.  공장이는 마음 속에 의심이 나서 일을 멈추었더니,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며 어두워지는 가운데 노승(老僧) 한 사람과 장사(壯士) 한 사람이 금전문(金殿門)에서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는 중과 장사는 모두 없어지고 보이지 않았다.  공장이는 일을 멈춘 것을 후회하고 그 탑을 완성시켰다.  <찰주기(刹柱記)>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가 42척, 철반 이하는 183척이다."  자장이 오대산에서 받아 가져온 사리(舍利) 100알을 탑 기둥 속과, 통도사(通度寺) 계단(戒壇)과 또 대화사(大和寺) 탑에 나누어 모셨으니, 이것은 못에 있는 용의 청에 따른 것이다(대화사大和寺는 아곡현阿曲縣 남쪽에 있다.  지금의 울주蔚州이니 역시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세운 것이다).  탑을 세운 뒤에 천하가 형통하고 삼한(三韓)이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이 아니겠는가.  그 뒤에 고려왕이 신라를 칠 계획을 하다가 말했다.  "신라에는 세 가지 보배가 있어 침범할 수 없다고 하니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황룡사(皇龍寺) 장륙존상(丈六尊像)과 구층탑(九層塔), 그리고 진평왕(眞平王)의 천사옥대(天賜玉帶)입니다."  이 말을 듣고 고려왕은 그 침범할 계획을 그만두었다.  주(周)나라에 구정(九鼎)이 있어서 초(楚)나라 사람이 감히 주나라를 엿보지 못했다고 하니 이와 같은 따위일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귀신의 힘으로 한 듯이 제경(帝京)을 누르니,

휘황한 채색으로 처마가 움직이네.

여기에 올라 어찌 구한(九韓)의 항복만을 보랴,

건곤(乾坤)이 특별히 편안한 것 처음 깨달았네.

 

또 해동(海東)의 명현(名賢) 안홍(安弘)이 지은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는 이런 말이 있다.  "신라 제 27대에는 여자가 임금이 되니 비록 올바른 도리는 있어도 위엄이 없어서 구한(九韓)이 침범하는 것이다.  만일 대궐 남쪽 황룡사(皇龍寺)에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가 침범하는 재앙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다.  제1층은 일본(日本),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제4층은 탁라(托羅), 제5층은 응유(鷹遊), 제6층은 말갈(靺鞨), 제7층은 거란(契丹), 제8층은 여진(女眞), 제9층은 예맥(穢貊)을 진압시킨다."

또 <국사(國史)> 및 <사중고기(寺中古記)>를 상고하면, "진흥왕(眞興王) 14년 계유(癸酉; 553)에 황룡사(皇龍寺)를 처음 세운 후에 선덕왕(善德王) 때인 정관(貞觀) 19년 을사(乙巳; 645)에 탑이 처음 이루어졌다.  제32대 효소왕(孝昭王)이 즉위한 7년 성력(聖歷) 원년 무술(戊戌; 698) 6월에 절이 벼락을 맞았다(<사중고기寺中古記>에는 성덕왕善德王 때라 했으나 잘못이다.  성덕왕 때에는 무술년이 없다).  제33대 성덕왕 경신(庚申; 720)에 다시 이 절을 세웠으나 제 48대 경문왕(景文王) 무자(戊子; 868) 6월에 두 번째 벼락을 맞았으며, 같은 임금 때에 세 번째로 중수(重修)하였다.  본조  (本朝) 광종(光宗)의 즉위 5(4)년 계축(癸丑; 953) 10월에는 세 번째 벼락을 맞았고, 현종(顯宗) 13년 신유(辛酉; 1021)에 네 번째 중수(重修)했다.  또 정종(靖宗) 2(元)년 을해(乙亥; 1035)에 네 번째 벼락을 맞았는데 이것을 문종(文宗) 갑진(甲辰; 1064)에 다섯 번째 중수(重修)했더니 또 헌종(憲(獻)宗) 말년 을해(乙亥; 1095)에 다섯 번째 벼락을 맞았다.  숙종(肅宗) 원년 병자(丙子; 1096)에 여섯 번째로 중수했더니, 또 고종(高宗) 16년 무술(戊戌; 1238) 겨울에 몽고(蒙古)의 병화(兵火)로 탑과 장륙존상(丈六尊像)과 절의 전우(殿宇)가 모두 재앙을 입었다" 했다.

 

 

황룡사(皇龍寺)의 종, 분황사(芬皇寺)의 약사(藥師) 봉덕사(奉德寺)의 종

 

신라 35대 경덕대왕(景德大王)이 천보(天寶) 13년 갑오(甲午; 754)에 황룡사(皇龍寺)의 종을 주조했는데, 길이는 1장(丈) 3촌(寸), 두께는 9촌, 무게는 49만 7,581 근이었다.  시주(施主)는 효정이왕(孝貞伊王) 삼모부인(三毛夫人)이요, 공장이는 이상택(里上宅) 하전(下典)이었다.  숙종(肅宗) 때에 새 종을 만들었는데 길이가 6척 8촌이었다.

또 이듬해 을미(乙未; 755)에 분황사(芬皇寺)의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의 동상(銅像)을 만들었는데, 무게가 30만 6,700 근이요, 공장이는 본피부(本彼部) 강고내말(强古乃未)이었다.  또 경덕왕(景德王)은 황동(黃銅) 12만 근을 내놓아 그 아버지 성덕왕(聖德王)을 위하여 큰 종 하나를 만들려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죽으니, 그 아들 혜공대왕(惠恭大王) 건운(乾運)이 대력(大曆) 경술(庚戌; 770) 12월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공장이들을 모아서 기어이 완성시켜 봉덕사(奉德寺)에 안치(安置)했다.  이 봉덕사는 효성왕(孝成王)이 개원(開元) 26년 무인(戊寅; 738)에 그 아버지 성덕대왕(聖德大王)의 복을 빌기 위해서 세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종의 명(銘)에 "성덕대왕신종지명(聖德大王神鐘之銘)"이라 했다(성덕대왕은 경덕대왕의 아버지 전광대왕 典光大王이다.  종은 본래 경덕대왕이 그 아버지를 위해서 시주한 금金이었으므로 성덕왕의 종이라고 한 것이다).

조산대부(朝散大夫) 전태자사의랑(前太子司議郎) 한림랑(翰林郞) 금필월(해)金弼월(奚)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종의 명(銘)을 지었으니 글이 너무 길어서 여기에 싣지 못한다.

 

 

영묘사(靈妙寺) 장육(丈六)

 

선덕왕(善德王)이 절을 짓고 소상(塑像)을 만든 내력은 모두 <양지법사전(良志法師傳)>에 실려져 있다.  경덕왕(景德王) 즉위 23년(764)에 장육존상(丈六尊像)을 금으로 다시 칠했는데, 그 비용으로 조(租)가 2만 3,700석이었다(<양지전良志傳>에는, 불상佛像을 처음 만들 때의 비용이라고 써있다. 이 두 가지 설을 모두 싣는다).

 

 

 

사불산(四佛山), 굴불산(掘佛山), 만불산(萬佛山)

 

죽령(竹嶺) 동쪽 100리쯤 되는 곳에 우뚝 솟은 높은 산이 있는데, 진평왕(眞平王) 9년(587) 갑신(甲申)에 갑자기 사면이 한 길이나 되는 큰 돌이 나타났다.  거기에는 사방여래(四方如來)의 상(像)을 새기고 모두 붉은 비단으로 싸여 있었는데 하늘에서 그 산마루에 떨어진 것이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서 그 돌을 쳐다보고 나서 드디어 그 바위 곁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대승사(大乘寺)라고 했다.  여기에 이름은 전하지 않으나 연경(蓮經)을 외는 중을 청해다가 이 절을 맡겨 공석(供石)을 깨끗이 쓸고 향화(香火)를 끊이지 않았다.  그 산을 역덕산(亦德山)이라 하고 혹은 사불산(四佛山)이라고도 한다.  그 절의 중이 죽어 장사지냈더니 무덤 위에 연꽃이 피었다.

또 경덕왕(景德王)이 백률사(栢栗寺)에 거둥해서 산 밑에 이르렀더니 땅속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리므로 그곳을 파게 했더니, 큰 돌이 있는데 사면에 사방불(四方佛)이 새겨져 있었다.  여기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굴볼사(掘佛寺)라고 했으니 지금을 잘못 전해져서 굴석사(掘石寺)라 한다.

경덕왕(景德王)은 또 당(唐)나라 대종황제(代宗皇帝)가 불교를 숭상한다는 말을 듣고 공장이에게 명하여 오색(五色) 담요를 만들고 또 침단목(沈檀木)을 새겨서 명주와 아름다운 옥으로 꾸며서 높이 1장(丈) 남짓한 가산(假山)을 만들어 담요 위에 놓았다.  산에는 뾰족한 바위와 괴이한 돌과 동굴(洞窟)이 있어서 각 구역으로 나뉘었고, 그 각 구역 안에는 노래하고 춤추고 노는 모습과 온갖 나라들의 산천(山川)의 형상이 있다.  조금만 바람이 문 안으로 들어가면 벌과 나비가 훨훨 날고 제비와 참새가 츰을 추니, 얼핏 보아서는 참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그 속에는 만불(萬佛)을 모셔 놓았는데 큰 것은 사방 한 치가 넘고 작은 것은 8,9푼 쯤 된다.  그 머리는 혹은 큰 기장만 하고 혹은 콩 반쪽만 하다.  머리털과 백모(白毛), 눈썹과 눈이 또렷하여 모든 형상이 다 갖추어졌으니, 다만 비슷하게 비유할 수는 있어도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이 산을 만불산(萬佛山)이라고 했다.

다시 거기에 금과 옥을 새겨 유소번개(流蘇幡蓋)·암라(菴羅)·담복(담복)·화과(花果) 등 장엄한 것과, 백보(百步) 누각(樓閣)·대전(臺殿)·당사(堂사)를 만들었는데 모두가 비록 작기는 하지만 그 형용은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것과 같았다.  앞에는 돌아다니는 중의 형상 1,000여 개가 있고, 아래에는 자금종(紫金鐘) 셋을 벌여 놓았는데, 모두 종각(鐘閣)이 있고 포뢰(蒲牢)가 있으며 고래 모양으로 종치는 방망이를 만들었다.  바람이 불어 종이 울면 돌아 다니는 중들이 모두 엎드려 머리를 땅에 대고 절한다.  은은하게 염불하는 소리가 나는 듯하니, 이 까닭은 그 종에 있었다.  이것을 비록 만불(萬佛)이라고는 하지만 그 실상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만불산(萬佛山)이 이루어지자 사신을 당(唐)나라에 보내서 바치니 대종(代宗)은 이것은 보고 탄식한다.  "신라의 교묘한 기술은 하늘이 만든 것이지 사람의 기술이 아니다."  이에 구광선(九光扇)을 그 바위 사이에 두어 두고 이름을 불광(佛光)이라고 했다.  4월 8일에 대종은 두 거리의 승도(僧徒)들에게 명하여 내도량(內道場)에서 만불산에 예배하고, 삼장불공(三藏不空)에게 명하여 밀부(密部)의 진리(眞理)를 1,000번이나 외어서 경축(慶祝)하게 하니, 보는 사람들은 모두 그 교묘한 솜씨에 탄복했다.

 

찬(讚)해 말한다.

 

하늘은 만월(滿月)을 단장시켜 사방불(四方佛)을 마련했고,

땅은 명호(明毫)를 솟구어 하룻밤에 열렸도다.

교묘한 솜씨로 다시금 만불(萬佛)을 새겼으니,

부처님의 풍도를 삼재(三才)에 두루 퍼지게 하리.

 

 

생의사(生義寺) 석미륵(石彌勒)

 

선덕왕(善德王) 때에 중 생의(生義)는 항상 도중사(道中寺)에 살고 있었다.  어느날 꿈에 한 중이 그를 데리고 남산(南山)으로 올라가서 풀을 매어 표를 해 놓게 하고는 산 남쪽 골짜기에 와서 말한다.  "내가 이곳에 묻혀 있으니 스님은 이것을 파내다가 고개 위에 편하게 묻어 주시오."  꿈에서 깨자 그는 친구와 함께 표해 놓은 곳을 찾아 그 골짜기에 이르러 땅을 파자 거기에서 석미륵(石彌勒)이 나왔으므로 삼화령(三花嶺) 위로 옮겨 놓았다.  선덕왕 13년 갑신(甲申; 644)에 그곳에 절을 세우고 살았는데 뒤에 절 이름을 생의사(生義寺)라고 했다(지금은 잘못 전해져서 성의사性義寺라고 한다.  충담사忠談師가 해마다 3월 3일과 9월 9일이면 차를 달여서 공양한 것이 바로 이 부처다).

 

 

흥륜사(興輪寺)의 벽화(壁畵), 보현(普賢)

 

제54대 경명왕(景明王) 때 흥륜사의 남문과 좌우 낭무(廊무)가 불에 탔는데 이것을 수리하지 못하고 있어서, 정화(靖和)·홍계(弘繼) 두 중이 장차 시주를 받아 수리하려 했다.  정명(貞明) 7년 신사(辛巳; 921) 5월 15일에 제석신(帝釋神)이 이 절 왼쪽 경루(經樓)에 내려와 열흘 동안 머무르니 전탑(殿塔)과 풀·나무·흙·돌들이 모두 이상한 향기를 풍기고, 오색 구름이 절을 덮고 남쪽 연못의 어룡(魚龍)들도 기뻐서 뛰놀았다.  나라 사람들이 모여서 이것을 보고 전에는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경탄하여 옥과 비단과 곡식들을 시주하니 산더미처럼 쌓였다.  공장이들도 스스로 와서 하루가 안 되어 이루어졌다.  역사를 마치자 천제(天帝)가 장차 돌아가려 하니 이 두 중이 아뢴다.  "천제(天帝)께서 만일 궁중으로 돌아가려 하시거든 저희에게 천제의 얼굴을 그려 정성껏 공양해서 하늘의 은혜를 갚게 하시고 또한 이로 인해서 영상(影像)을 여기에 남겨 두어서 이 세상을 길이 보호하게 하시옵소서."  천제가 말한다.  "나의 힘은 저 보현보살(普賢菩薩)이 현화(玄化)를 두루 펴는 것만 못하니 이 보살의 화상을 그려서 공손히 공양하여 끊이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에 두 중은 천제의 가르침을  받들어 보현보살(普賢菩薩)의 상(像)을 벽에 공손히 그렸는데, 지금까지도 이 화상은 남아 있다.

 

 

 

삼소관음(三所觀音)과 중생사(衆生寺)

 

신라 고전(古傳)에 이렇게 말했다.  중국 천자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아름답기 짝이 없어 이에 천자가 말하기를, "고금(古今)에 있는 그림으로도 이같이 아름다운 것은 적을 것이다" 하고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시켜서 그 실지 모양을 그리도록 했다(그 화공畵工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데 혹은 장승요張僧繇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그는 오吳나라 사람으로, 양梁나라 천감天監 연간에 무릉왕국武陵王國의 시랑직비각지화사侍郎直秘閣知화事가 되었고, 우장군右將軍과 오흥태수吳興太守를 지냈다.  그러니 여기에 말한 천자天子는 중국 梁·陣 무렵의 천자일 것이다.  그런데 전傳에 당나라 황제라 한 것은 우리 조선 사람이 중국을 가리켜 모두 당唐이라 하는 까닭에서일 것이다.  실상은 어느 시대의 제왕帝王인지 알 수 없다.  여기에는 두 가지 말을 모두 적어 둔다).  그 화공(畵工)은 천자(天子)의 명을 받들어 그림을 다 그렸으나 붓을 잘못 떨어뜨려 배꼽 밑에 붉은 점을 찍어 놓았는데, 고쳐 보려 했으나 고쳐지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붉은 점은 반드시 날 때부터 있던 것인가 보다 하고 그림이 끝나자 황제에게 바쳤더니 황제는 그 그림을 보고 나서 말한다.  "모양은 실물과 독 같으나 배꼽 밑의 점은 속에 감추어진 것인데 어떻게 알고서 이것까지 그렸느냐."  황제는 크게 노해서 화공(畵工)을 옥에 가두고 장차 형벌을 주려고 하니, 승상(丞相)이 아뢰었다.  "저 사람은 마음이 아주 곧사오니 원컨대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황제가 말한다.  "만일 저 사람이 어질고 곧다면, 내가 어제 꿈에 본 사람의 형상을 그려서 바치게 하라.  그 그림이 꿈에 본 얼굴과 틀림없다면 용서해 줄 것이다." 그 사람이 이에 십일면관음보살(十一面觀音菩薩)의 상(像)을 그려 바치니 꿈과 맞는지라, 황제(皇帝)는 그제야 마음이 풀려 그를 용서해 주었다.  그 화공은 죄를 면하자, 박사(博士) 분절(芬節)과 약속했다.  "내가 들으니 신라국(新羅國)에서는 불법(佛法)을 존경하여 신봉(信奉)한다 하니 그대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그 곳에 가서 함께 불사(佛事)를 닦아 그 나라를 널리 이익되게 하는 것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소."  이들은 드디어 함께 신라국에 이르러 이 중생사(衆生寺)의 관음보살의 상을 만들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보고 기도하여 복을 얻었으니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신라 말년 천성(天成) 연간(926∼929)에 정보(正甫) 최은함(崔殷함)이 나이 많도록 아들이 없어, 이 절 관음보살 앞에 나가서 기도를 드렸더니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았다.  석 달이 되지 않았는데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이 서울을 침범해 와서 성 안이 크게 어지러웠다.  은함(殷함)은 그 아이를 안고 이 절에 와서 말하였다.  "이웃 군사가 갑자기 쳐들어와서 일이 급합니다.  이 어린 자식으로 해서 누(累)가 겹친다면 식구가 모두 화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대성(大聖)께서 이 아이를 주신 것이라면, 원컨대 큰 자비(慈悲)의 힘을 내려 길러 주시어 우리 부자(父子)가 다시 만나게 해 주십시오."  슬피 세 번 울면서 세 번 아뢰고 난 후에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관음상(觀音像)의 예좌(猊座) 밑에 감추고 못잊어 하면서 떠나갔다.  반 달을 지나 적병이 물러간 뒤에 와서 아이를 찾아보니 살결은 마치 새로 목욕한 것과 같고, 모양도 매우 예쁜데 젖냄새가 아직도 입에서 났다.  아이를 안고 돌아와 기르니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혜롭기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이 사람이 곧 승로(丞魯)로서 벼슬이 정광(正匡)에 이르렀다.  승로는 낭중(郎中) 최숙(崔肅)을 낳았고, 숙은 낭중 제안(齊顔)을 낳았는데 이로부터 자손이 계속되고 끊어지지 않았다.  은함은 경순왕(敬順王)을 따라 고려에 들어와서 대성(大姓)이 되었다.

또 통화(統和) 10년(992) 3월에 사주(寺主)인 중 성태(性泰)는 보살(菩薩) 앞에 꿇어앉아 말했다.  "저는 오랫동안 이 절에 살면서 정성껏 부지런히 향화(香火)를 받들어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하오나 절의 토지(土地)에서는 나는 것이 없어서 향사(香祀)를 계속할 수가 없으므로 장차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하옵기에 하직하는 터입니다."  이날 성태는 조금 졸다가 꿈을 꾸니 관음대성(觀音大聖)이 말한다.  "법사(法師)는 아직 여기에 머물러 있고 멀리 떠나지 말라. 내가 시주를 해서 제사에 쓸 비용을 충분히 마련해 주겠다."  중이 기뻐하여 꿈에서 깨어 오직 그 절에 머물러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다.  그런지 13일 만에 갑자기 두 사람이 말과 소에 물건을 싣고 문 앞에 이르렀다.  절에 있던 중이 나가서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우리들은 금주(金州) 지방 사람인데 지난번에 스님 하나가 우리를 찾아와서 나는 동경(東京) 중생사(衆生寺)에 오랫동안 있었는데 공양에 쓸 비용이 어려워서 시주를 얻으려고 여기에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웃 마을에 가서 시주를 모아다가 쌀 엿 섬과 소금 넉 섬을 싣고 온 것입니다."  스님이 말했다.

"이 절에는 시주를 구하러 나간 사람이 없는데, 그대들이 필경 잘못 들은 것 같소."  그 사람들이 또 말한다.  "그 스님이 우리들을 데리고 오다가 이 신견정(神見井) 가에 이르러서 말하기를, 절이 여기서 멀지 않으니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따라온 것입니다."  절의 스님이 그들을 데리고 법당(法堂) 앞으로 들어가니, 그 사람들은 관음대성(觀音大聖)을 쳐다보고 절하면서 저희끼리 서로 말한다.  "이 부처님이 바로 시주를 구하러 왔던 스님의 상(像)입니다."  말하면서 놀라고 감탄하기를 마지 않았다.  이로부터 여기에 바치는 쌀과 소금이 해마다 끊어지지 않았다.

또 어느날 저녁에 절 문에 화재가 나서 마을 사람들이 달려와 불을 껐다.  그런데 법당(法堂)에 올라가 보니 관음상이 없으므로 살펴보니 이미 뜰 가운데 서 있는 것이다.  누가 밖으로 내왔느냐고 물었으나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그제야 모두들 이것은 관음대성(觀音大聖)의 신령스러운 힘인 것을 알았다.

또 대정(大定) 13년 계사(癸巳; 1173) 연간에 중 점숭(占崇)이 이 절에 와서 살고 있었다.  그는 비록 글은 알지 못하지만 성질이 본래부터 순수하여 향화(香火)를 부지런히 받들었다.  어떤 중 하나가 그 절을 빼앗아 살려고 하여 친의천사(친衣天使)에게 호소했다.  "이 절은 국가에서 은혜를 빌고 복을 구하는 곳이오니 마땅히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을 뽑아서 그에게 맡겨야 할 것입니다."  천사는 그 말을 옳게 여겨 그 사람을 시험하려 하여 소문(疏文)을 거꾸로 주어 보았다.  그러나 점숭은 이것을 받는 즉시로 줄줄 읽는다.  천사는 이것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방 가운데로 물러앉아 다시 그에게 읽어보라고 했다.  그러나 점숭은 입을 다물고 한 마디도 읽지 못한다.  이것을 보고 천사가 말한다.

"스님은 참으로 관음대성이 보호하여 주시는 사람이로다."  이리하여 끝내 이 절을 빼앗지 않았다.  그 당시 점숭(占崇)과 같이 이 절에 살던 처사(處士) 김인부(金仁夫)가 이 이야기를 고을의 노인들에게 전해 주고 또 전기(傳記)로도 써 두었다.

 

 

 

백률사(栢栗寺)

 

계림(鷄林) 북쪽 산을 금강령(金剛嶺)이라 하고 산의 남쪽에는 백률사(栢栗寺)가 있다.  그 절에 부처의 상(像)이 하나 있는데 어느 때 만든 것인지 알 수가 없으나 영험이 자못 뚜렷했다.  혹은 말하기를, "이것은 중국의 신장(神匠)이 중생사(衆生寺)의 관음소상(觀音塑像)을 만들 때 함께 만든 것이다"하고, 또 속전(俗傳)에는 이렇게 말한다.

"이 부처님이 일찍이 도리천(도利天)에 올라갔다가 돌아와서 법당(法堂)에 들어갈 때에 밟았던 돌 위의 발자국이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이 부례랑(夫禮郞)을 구출하여 돌아올 때에 보였던 자취이다"한다.

천수(天授) 3년 임진(壬辰; 692) 9월 7일에 효소왕(孝昭王)은 대현(大玄) 살찬(薩찬)의 아들 부례랑을 국선(國仙)으로 삼았고, 주리(珠履)의 무리가 1,000명이나 되었는데 안상(安常)과는 무척 친했다.  천수(天授) 4년(장수長壽 2년) 계사(癸巳; 693) 3월에 부례랑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금란(金蘭)에 놀러 갔는데, 북명(北溟)의 경계에 이르렀다가 적적(狄賊)에게 사로잡혀 갔다.  문객(門客)들은 모두 어쩔 줄을 모르고 그대로 돌아왔으나 홀로 안상(安常)만이 그를 쫓아갔는데 이때는 3월 11일이었다.  대왕은 이 말을 듣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여 말했다.  "선왕(先王)께서 신적(神笛)을 얻어 나에게 전해 주셔서 지금 현금(玄琴)과 함께 내고(內庫)에 간수해 두었는데, 무슨 일로 해서 국선이 갑자기 적에게 잡혀갔단 말인가.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현금玄琴과 신적神笛의 일은 별전別傳에 자세히 적혀 있다).  이때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天尊庫)를 덮자 왕은 또 놀라고 두려워하여 조사하게 하니, 천존고 안에 있던 현금과 신적 두 보배가 없어졌다.  왕은 말했다. "내게 어찌 복이 없어 어제는 국선을 잃고 또 이제 현금과 신적까지 잃는단 말인가."  왕은 즉시 창고를 맡은 관리 김정고(金貞高) 등 5명을 가두었고 4월에 나라 안의 사람을 모집하여 말했다.  "현금(玄琴)과 신적(神笛)을 얻는 사람은 1년 조세(租稅)를 상으로 주겠다."  5월 15일에 부례랑의 부모가 백률사(栢栗寺) 불상 앞에 나가 여러 날 저녁 기도를 올리자, 갑자기 향탁(香卓) 위에 현금과 신적 두 보배가 놓여있고, 부례랑과 안상 두 사람도 불상 뒤에 와 있었다.  두 부모는 매우 기뻐하여 어찌된 일인지 물으니, 부례랑이 말한다.  "저는 적에게 잡혀간 뒤 적국의 대도구라(大都仇羅)의 집에서 말 치는 일을 맡아 대오라니(大烏羅尼)의 들에서(혹은 도구都仇의 집 종이 되어 대마大磨의 들에서 말을 먹였다고 했다) 말에게 풀을 뜯기고 있는데 갑자기 모양이 단정한 스님 한 분이 손에 거문고와 피리를 들고 와서 위로하기를, '고향 일을 생각하느냐?'하기에 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 앞에 꿇어앉아서 '임금과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어찌 다 말하겠습니까?'했습니다.  스님은 '그러면 나를 따라오너라'하고는 드디어 저를 데리고 바닷가까지 갔는데 거기에서 또 안상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스님은 신적을 둘로 쪼개어 우리 두 사람에게 주어서 각기 한 짝 씩을 타게 하고, 그는 현금(玄琴)을 타고 바다에 떠서 돌아오는데 잠깐 동안에 여기에 와 닿았습니다."  이 일을 자세히 왕에게 보고하자 왕은 크게 놀라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맞이하니 부례랑은 현금과 신적을 가지고 대궐 안으로 들어갔다.  왕은 50냥의 금은(金銀)으로 만든 그릇 다섯 개씩 두 벌과, 마납가사(摩衲袈裟) 다섯 벌, 대초(大초) 3,000필, 밭 1만 경(頃)을 백률사에 바쳐서 부처님의 은덕에 보답하고, 나라 안의 죄인들에게 대사령을 내리고, 관리들에게는 벼슬 3계급을 높여 주고, 백성들에게는 3년간의 조세(租稅)를 면제해 주었으며, 절의 주지(住持)를 봉성사(奉聖寺)로 옮겨 살게 했다.  부례랑을 봉하여 대각간(大角干; 신라의 재상 작명爵名)을 삼고, 아버지 대현아식(大玄阿식)은 태대각간(太大角干)을 삼고, 어머니 용보부인(龍寶夫人)은 사량부(沙梁部)의 경정궁주(鏡井宮主)를 삼았다.  안상은 대통(大統)을 삼고 창고를 맡았던 관리 다섯 사람은 모두 용서해 주고 각각 관작(官爵) 오급(五級)을 주었다.

6월 12일에 혜성(彗星)이 동쪽 하늘에 나타나더니 17일에 또 서쪽 하늘에 나타나자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이것은 현금과 신적을 벼슬에 봉하지 않아서 그러한 것입니다."  이에 신적을 책호(冊號)하여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고 했더니 혜성(彗星)은 이내 없어졌다.  그 뒤에도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많았지만 글이 번거로워 다 싣지 않는다.  세상에서는 안상을 준영랑(俊永郞)의 무리라고 했으나 이 일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영랑의 무리에는 오직 진재(眞材)·번완(繁完) 등만의 이름이 알려졌지만 이들도 역시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자세한 것은 별전別傳에 실려 있다).

 

 

민장사(敏藏寺)

 

우금리(우金里)에 사는 가난한 여자 보개(寶開)에게 장춘(長春)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바다의 장사꾼을 따라 나가더니 오래 되어도 소식이 없자 그의 어머니가 민장사(敏藏寺; 이 절은 곧 민장각간敏藏角干이 자기 집을 내놓아서 절을 만든 것이다) 관음보살 앞으로 가서 7일 동안 기도했더니 장춘이 금세 돌아왔다.  그 동안 어찌된 일이냐고 까닭을 묻자 장춘은 대답했다.  "바다 가운데에서 회오리바람을 만나 배는 부서지고 동료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지만, 저는 널판쪽을 타고 오(吳)나라 바닷가에 닿았는데 오나라 사람이 저를 데려다가 들에서 농사를 짓도록 마련해 주었습니다.  어느날 이상한 스님 하나가 마치 고향에서 온 것처럼 은근히 위로하더니 저를 데리고 같이 가는데, 앞에 깊은 도랑이 가로막히자 스님은 저를 겨드랑이에 끼고 도랑을 뛰어넘었습니다.  저는 정신이 가물가물하는데 우리 시골집 말 소리와 우는 소리가 들리므로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덧 여기에 와 있었습니다."  저녁때에 오나라를 떠났는데, 이곳에 도착한 것이 겨우 오후 7, 8시였다.  이때는 바로 천보(天寶) 4년 을유(乙酉; 745) 4월 8일이었다.  경덕왕(景德王)이 이 말을 듣고 민장사에 밭을 시주하고 또 재물도 바쳤다.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

 

<국사(國史)>에 이렇게 말했다.  "진흥왕(眞興王) 때인 태청(太淸) 3년 기사(己巳; 549)에 양(梁)나라에서 심호(沈湖)를 시켜 사리(舍利) 몇 알을 보내왔다.  선덕왕(善德王) 때인 정관(貞觀) 17년 계묘(癸卯; 643)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당(唐)나라에서 부처의 머리뼈와 어금니와 부처의 사리 100알과 부처가 입던 붉은 비단에 금색 점이 있는 가사(袈裟) 한 벌을 가지고 왔는데, 그 사리를 셋으로 나누어 하나는 황룡사(皇龍寺) 탑에 두고, 하나는 대화사(大和寺) 탑에 두고, 하나는 가사와 함께 통도사(通度寺) 계단(戒壇)에 두었으나, 그 나머지는 어디에 있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통도사 계단에는 두 층이 있는데 위층 가운데에는 돌 뚜껑을 덮어서 마치 가마솥을 엎어놓은 것과 같았다.

속설(俗說)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 본조(本朝)에서 전후로 염사(廉使) 두 사람이 와서 계단에 절을 하고 공손히 돌솥을 들어 보았는데, 처음에는 긴 구렁이가 돌 함(函) 속에 있는 것을 보았고, 다음 번에는 큰 두꺼비가 돌 밑에 쪼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으므로 이로부터는 감히 이 돌을 들어 보지 못했다 한다.  요새 상장군(上將軍) 김공(金公) 이생(利生)과 유시랑(庾侍郞) 석(碩)이 고종(高宗)의 명령을 받아 강동(江東)을 지휘할 때 부절(符節)을 가지고 절에 와서 돌을 들고 절하려고 하니 절의 중은 지난 일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난처하게 여겼다.  두 사람이 군사를 시켜 돌을 들게 하니 그 속에 작은 돌 함이 있고, 함 속에는 유리통(瑠璃筒)이 들어 있고, 통 속에는 사리(舍利)가 단지 네 알뿐이었다.  이것을 서로 돌려보면서 경례했는데 통에 조금 상한 곳이 있었다.  이에 유공(庾公)이 마침 가지고 있던 수정함 하나를 시주하여 함께 간수해 두게 하고, 그 사실을 기록해 두었다.  이때는 강화도(江華島)로 서울을 옮긴 지 4년이 되던 을미년(乙未年; 1235)이었다."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사리(舍利) 100개를 세 곳에 나누어 두었더니, 이제는 오직 네 개뿐이다.  그것은 숨겨지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하여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이니 수효가 많고 적은 것이 괴이할 것이 없다."  또 속설(俗說)에는 이렇게 말한다.  "황룡사(皇龍寺) 탑이 불타던 날에 돌솥 동쪽에 처음 큰 얼룩이 생겼는데 이것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그때는 바로 요(遼)의 응력(應曆) 3년 계축(癸丑; 953)이요, 본조(本朝) 광종(光宗) 5(4)년으로, 탑이 세 번째로 불타던 때였다.  조계(曹溪)의 무의자(無衣子)가 시를 남겨 말하기를, "들으니 황룡사탑이 불타던 날, 번져서 탄 한 쪽에도 틈이 없었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지원(至元) 갑자년(甲子年; 1264) 이후로 원(元)나라 사신과 본국 황화(皇華)들이 다투어 와서 이 돌함에 절했으며 사방의 운수(雲水)들도 몰려들어 참례했는데, 돌함을 들어보기도 하고 혹은 들지 않기도 했다. 진신(眞身)의 사리 네 알 외에 변신(變身) 사리가 모래알처럼 부셔져서 돌함 밖으로 나와 있었는데 이상한 향기를 강하게 풍겨 여러 날 동안 없어지지 않는 일이 이따금 있었으니, 이것은 말세에 있는 한 지방의 기이한 일인 것이다.

당(唐)나라 대중(大中) 5년 신미(辛未; 851)에 당나라로 갔던 사신 원홍(元弘)이 당에서 가지고 온 부처의 어금니(지금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신라 문성왕文聖王 때의 일이다)와 후당(後唐) 동광(同光) 원년 계미(癸未; 923) 곧 본조(本朝) 태조(太祖) 즉위 6년에 당(唐)나라로 보냈던 사신 윤질(尹質)이 가지고 온 오백나한(五百羅漢)의 상(像)은 지금 북숭산(北崇山) 신광사(神光寺)에있다.  송(宋)나라의 선화(宣和) 원년 기묘(己卯(亥); 예종睿宗 15(4), 1119)에 입공사(入貢使) 정극영(鄭克永)·이지미(李之美) 등이 가지고 온 부처의 어금니는 지금 내전(內殿)에 모셔 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서로 전해 내려오는 말은 이러하다.  옛날 의상법사(義湘法師)가 당나라에 들어가 종남산(終南山)의 지상사(至相寺) 지엄존자(智儼尊者)에게 가 있었는데, 이웃에 선율사(宣律師)가 있어서, 항상 하늘의 공양을 받고 재를 올릴 때마다 하늘 주방(廚房)에서 먹을 것을 보내 왔다.  어느날 선율사는 의상법사를 청하여 재를 올리는데 의상이 자리를 잡고 앉은 지 오랜데도 하늘에서 보내는 음식은 때가 지나도 오지 않는다.  의상이 빈 바리때만 가지고 돌아가자 비로소 천사(天使)가 내려왔다.  선율사가 "오늘은 어찌해서 늦으셨소"하고 묻자 천사는 대답한다.  "온 동네에 가득히 신병(神兵)이 막고 있어서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율사는 의상법사에게 신의 호위가 있는 것을 알고는 그의 도(道)의 힘이 자기보다 나은 것에 탄복하고는 하늘에서 보내 온 음식을 그대로 두었다가, 이튿날 또 지엄(智儼)과 의상(義湘) 두 대사를 재 올리는데 청해다가 그 사유를 자세히 말했다.  의상이 조용히 율사에게 말한다.  "율사는 이미 천제(天帝)의 존경을 받고 계신데, 일찍이 듣건대 제석궁(帝釋宮)에는 부처님의 이빨 40개 중에 어금니 하나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들을 위해서 천제께 청하여 그것을 인간에게 내려보내어 복이 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율사는 이 후에 천사와 함께 그 뜻을 천제에게 전하니 천제는 7일을 기한하여 이를 보내 주니 의상은 경례를 다한 뒤에 맞이하여 대궐에 안치했다.

그 후 송(宋)나라 휘종조(徽宗朝)에 이르러 좌도(左道)를 믿으니, 이때 나라 사람들은 도참(圖讖)을 전하여 퍼뜨리기를, "금인(金人)이 이 나라를 망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황건(黃巾)의 무리들이 일관(日官)을 충동하여 위에 아뢰기를, "금인이란 불교를 말하는 것이니 장차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입니다"하였다.  이리하여 조정에서는 장차 불교를 없애고 중들을 무찔러 죽이고, 경전(經典)을 불사르고, 따로 조그만 배를 만들어 부처의 어금니를 실어 큰 바다에 띄워 인연이 있는 곳으로 흘려 보내려 했다.  이때 마침 고려 사신이 송나라에 갔다가 그 사실을 듣고는 천화용(天花茸) 50령(領)과 저포(紵布) 300필을 배를 호송(護送)하는 관원에게 뇌물로 주고 남몰래 부처의 어금니를 받고 빈 배만 흘려 보내게 했다.  사신들이 부처의 어금니를 얻어 가지고 와서 왕에게 아뢰자 예종(睿宗)은 크게 기뻐하여 십원전(十員殿) 왼쪽에 있는 소전(小殿)에 모시고 항상 소전 문을 잠그고 밖에는 향과 등불을 설치하여 왕이 친히 거둥하는 날에만 대궐 문을 열고 경례를 했다.

임진년(壬辰年; 1232)에 서울을 강화(江華)로 옮길 때 내관(內官)들은 총망한 중에 잊어버리고 이를 거두어 챙기지 못했다.  병신년(丙申年) 4월에 왕의 원당(願堂)인 신효사(神孝寺) 중 온광(蘊光)이 불아(佛牙)에 경례하기를 청하므로 왕에게 아뢰니 왕은 내신(內臣)을 시켜서 두루 궁중(宮中)을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이때 백대(栢臺) 시어사(侍御史) 최충(崔沖)이 설신(薛伸)에게 명하여 급히 여러 알자(謁者)의 방을 다니면서 물었으나 모두 어쩔 줄을 모를 뿐이었다.  내신(內臣) 김승로(金承老)가 아뢰기를, "임진년(壬辰年)에 서울을 옮길 때의 <자문일기(紫門日記)>를 조사해 보십시오"하므로 그 말을 쫓아 조사해보니 일기(日記)에 이렇게 씌어 있었다.  "입내시대부경(入內侍大府卿) 이백전(李白全)이 불아함(佛牙函)을 받다."  이백전(李白全)을 불러 물으니 대답한다.  "청컨대 집에 돌아가서 다시 저의 사사 일기(日記)를 찾아보게 해 주십시오."  집에 가서 찾아보고 좌번알자(左番謁者) 김서룡(金瑞龍)이 불아함(佛牙函)을 받았다는 기록을 갖다가 바쳤다.  김서룡(金瑞龍)을 불러 물었으나 대답을 못한다.  또 김승로(金承老)가 아뢰는 대로 임진년(壬辰年)에서 지금 병신년(丙申年)까지 5년간의 어불당(御佛堂)과 경령전(景靈殿)에 수직한 자들을 잡아 가두고 심문했으나, 아무런 결말도 나지 않았다.  그런지 3일이 지난 날 밤중에 김서룡의 집 담 안으로 무엇을 던지는 소리가 나므로 불을 켜 조사해 보니 바로 불아함(佛牙函)이었다.  함은 본래 속 한 겹은 심향합(沈香合)이고 다음 겹은 순금합(純金合)이고 그 다음 바깥 겁은 백은함(白銀函)이고, 다음 바깥 겁은 유리함이고, 그 다음 겹은 나전함(螺鈿函)으로 각 함(各函)의 폭은 서로 꼭 맞게 되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만 유리함뿐이었다.  김서룡은 찾은 것이 기뻐서 대궐로 들어가 아뢰었다.  그러나 유사(有司)는 죄를 의논하여 김서룡과 어불당(御佛堂)과 경령전(景靈殿)의 수직하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려 하니 진양부(晉陽府)에서 아뢰었다.  "불사(佛事)로 인하여 사람을 많이 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모두 죽음을 면했다.  다시 십원전(十員殿) 안뜰에 특별히 불아전(佛牙殿)을 지어서 불아함(佛牙函)을 모시게 하고 장사(將士)들을 시켜 지키게 했다.  길일(吉日)을 가려서 신효사(神孝寺)의 상방(上房) 온광(蘊光)을 청해다가 승도(僧徒) 30명을 거느리고 궁중에 들어가 재를 올려 정성을 드리도록 했다.  그날 입직(入直)했던 승선(承宣) 최홍(崔弘)과 상장군(上將軍) 최공연(崔公衍)·이영장(李令長)과 내시(內侍)·다방(茶房) 관원들은 대궐 뜰에서 왕을 모시고 서서 차례로 불아함(佛牙函)을 머리에 이고 정성을 드렸는데 불아함 구멍 사이에 있는 사리는 그 수를 알지 못할 만큼 많았다.  진양부(晉陽府)에서는 백은(白銀) 상자에 그것을 담아 모셨다.  이때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내가 불아(佛牙)를 잃은 후로 스스로 네 가지 의심이 생겼었소.  첫째 의심은, 천궁(天宮)의 7일 기한이 차서 하늘로 올라갔을까 하는 것이고.  둘째 의심은 국난(國亂)이 이러하니, 불아는 신물(神物)이므로 인연이 있는 무사(無事)한 나라로 옮겨 간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오.  셋째 의심은, 재물을 탐낸 소인(小人)이 그 상자를 도둑질하고 불아는 구렁에 버렸으리라는 것이오.  넷째 의심은, 도둑이 보물을 훔쳐가기는 했으나 이것을 드러낼 수가 없어서 집 속에 감추어 두었으리라는 것이었는데 이제 네 번째 의심이 맞았소"하고 이내 소리를 내어 크게 우니 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헌수(獻壽)하는데, 심지어 이마와 팔을 불에 태우는 사람도 있어서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 실록(實錄)은 당시 내전(內殿)에서 향(香)을 피우며 기도하던, 전지림사(前祗林寺) 대선사(大禪師) 각유(覺猷)에게서 얻은 것이니, 그는 자기가 친히 본 것이라면서 날더러 기록하라고 했다.

또 경오년(庚午年; 1270)에 강화(江華)에서 환도(還都)할 때의 난리는 몹시 심하여 임진년(壬辰年)보다도 더했다.  십원전(十員殿)의 감주(監主)인 선사(禪師) 심감(心鑑)은 자기의 위태로움을 잊고 불아함을 가지고 나와 도둑의 난리에서 화를 면하게 하였다.  이 사실을 대궐에 알리니 왕은 그 공을 크게 칭찬하고 이름 있는 절로 옮겨 살게 하여 지금 빙산사(빙山寺)에 살고 있다.  이것도 역시 각유(覺猷)에게서 친히 들은 것이다.

진흥왕(眞興王) 때인 천가(天嘉) 6년 을유(乙酉; 565)에 진(陳)나라에서는 유사(劉思)와 중 명관(明觀)을 시켜 불경(佛經)·논(論) 1,700여 권을 보내왔으며, 정관(貞觀) 17년(643)에는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삼장(三藏) 400여 상자를 싣고 돌아와서 통도사(通度寺)에 안치했다.  흥덕왕(興德王) 때인 태화(太和) 원년 정미(丁未; 827)에는 당(唐)에 간 학승(學僧)인 고구려 중 구덕(丘德)이 불경(佛經) 몇 상자를 가지고 오니 왕은 여러 절의 승도(僧徒)들과 함께 나가서 흥륜사(興輪寺) 앞길에 가서 맞이했다.  대중(大中) 5년(851)에는 당나라에 보낸 사신 원홍(元弘)이 불경(佛經) 몇 축(軸)을 가지고 왔고, 나말(羅末)에 보요선사(普耀禪師)가 두 번이나 오월국(吳越國)에 가서 대장경(大藏經)을 싣고 왔으니, 그는 곧 해룡왕사(海龍王寺)의 개산조(開山祖)이다.

송(宋)나라 원우(元祐) 갑술년(甲戌年; 1094)에 어떤 사람이 선사(禪師)의 진영(眞影)을 찬(讚)해 말했다.

 

거룩도 해라, 개조(開祖) 스님이시여!  우뚝 빼어났구나 저 참 모습이.

두 번이나 오월(吳越)에 가, 대장경(大藏經)을 가지고 오는 데 성공했네.

보요(普耀)라는 직함을 하사하시고, 네 번이나 조서(詔書)를 내리셨으니,

만일 그의 덕을 묻거든, 밝은 달 맑은 바람과 같다 하겠네.

 

또 대정(大定) 연간(1161∼1189)에 한남 관기(漢南管記) 팽조적(彭祖적)이 시(詩)를 지어 남겼다.

 

물과 구름 조용한 절에 부처님 계신데,

더구나 신룡(神龍)이 한 지경을 보호하네.

마침내 이 좋은 절 어느 누가 이어받을까,

처음 불교는 남쪽에서 전해왔네.

 

발문(跋文)이 있는데 이러하다.

 

옛날 보요선사(普耀禪師)가 처음으로 남월(南越)에서 대장경(大藏經)을 구해 가지고 돌아오는데 바닷바람이 갑자기 일더니 조각배가 물결 사이에서 뒤집힐 것 같았다.  선사는 말하기를, "이것은 신룡(神龍)이 대장경을 여기에 머물러 두려는 것이 아닐까"하고 드디어 주문(呪文)으로 정성껏 축원하여 용(龍)까지 함께 받들고 돌아오니, 바람도 자고 물결도 가라앉았다.  본국에 돌아오자 산천(山川)을 두루 구경하면서 대장경을 안치할 곳을 구하다가 이 산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상서로운 구름이 산 위에서 일어나는 곳을 보고 이에 수제자(首弟子) 홍경(弘慶)과 함께 연사(蓮社)를 세웠으니, 불교가 동방으로 전해 온 것은 실로 이때에 시작된 것이었다.

 

한남 관기(漢南管記) 팽조적(彭祖적)은 제(題)한다.

 

이 해룡왕사(海龍王寺)에는 용왕당(龍王堂)이 있는데 자못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많았다.  당시 용왕은 대장경(大藏經)을 따라와서 여기에 머물러 있었는데, 용왕당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또 천성(天成) 3년 무자(戊子; 928)에 묵화상(默和尙)이 당에 들어가 역시 대장경을 가지고 왔으며, 본조(本朝) 예종(睿宗) 때에는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조서를 받들고 중국으로 유학가서 요본(遼本) 대장경 3부(部)를 사 가지고 왔는데, 그 한 본(本)은 지금 정혜사(定惠寺)에 있다(해인사海印寺에 한 본本이 있고 허참정許參政댁에 한 본本이 있다).

대안(大安) 2년(1086) 본조(本朝) 선종(宣宗) 때에는 우세승통(祐世僧統) 의천(義天)이 송(宋)나라에 들어가서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많이 가지고 왔으며, 이 밖에도 서적에 실리지 않은 고승(高僧)과 신사(信士)들이 왕래하면서 가지고 온 것은 이루 자세히 기록할 수가 없다.  대체로 불교가 동방으로 전해 오는 데는 그 앞길이 양양(洋洋)했으니 경사스러운 일이다.

찬(讚)해 말한다.

 

중국과 동방은 오히려 연기로 막혔고,

녹원(鹿苑)의 학수(鶴樹)는 2,000년이네.

이 땅에 전해 오니 참으로 하례할 일이라,

동진(東震)과 서건(西乾)이 한 세상 되었네.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의상전(義湘傳)을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의상은 영휘(永徽) 초년(650)에 당나라에 들어가 지엄선사(智儼禪師)를 뵈었다"한다.  그러나 부석사(浮石寺) 본비(本碑)에 의하면, "의상은 무덕(武德) 8년(625)에 태어나 어려서 중이 되었다.  영휘(永徽) 원년 경술(庚戌; 650)에 원효(元曉)와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려고 고구려에 갔다가 어려운 일이 있어서 그대로 돌아갔다.  용삭(龍朔) 원년 신유(辛酉; 661)에 당에 들어가 지엄법사에게 배웠다.  총장(總章) 원년(668)에 지엄법사가 죽자 함형(咸亨) 2년(671)에 의상은 신라로 돌아와 장안(長安) 2년 임인(壬寅; 702)에 죽으니 나이 78세였다"했다.  그렇다면 지엄과 함께 선율사(宣律師)가 있는 곳에서 재를 올리고, 천궁(天宮)의 불아(佛牙)를 청하던 일은 신유(辛酉; 661)에서 무진(戊辰; 668)까지의 7, 8년 사이가 될 것이다.  본조(本朝) 고종(高宗)이 강화(江華)로 옮기던 임진년(壬辰年; 1232)에 천궁의 7일 기한이 다 찼다고 의심한 것은 잘못된 것이니, 도리천(도利天)의 1주야는 인간(人間) 100세에 해당되는 것이다.

또 의상이 처음 당에 갔던 신유년(辛酉年; 661)에서부터 계산하여 본조(本朝) 고종(高宗) 임진(壬辰; 1232)까지는 693년이니 경자년(更子年; 1240)에 이르러야 비로서 700년이 차며, 7일 기한도 차는 것이다.  환도(還都)하던 지원(至元) 7년 경오(庚午; 1270)까지는 730년이니, 만일 천제(天帝)의 말과 같이 7일 후에 천궁(天宮)으로 돌아갔다고 하면 심감선사(心鑑禪師)가 환도(還都)할 때 가져다 바친 것은 필시 진짜 불아(佛牙)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해 봄 환도(還都)하기 전에 왕은 대궐 안 제종(諸宗)의 이름난 중들을 모아서 불아와 사리를 빌어 구하여 비록 정성과 부지런함을 다했지만 하나도 얻지 못했으니, 필경 7일 기한이 차서 하늘로 올라간 듯 싶다.  지원(至元) 21년 갑신(甲申; 1284)에 국청사(國淸寺)의 금탑(金塔)을 보수(補修)하고 충렬왕(忠烈王)은 장목왕후(莊穆王后)와 함께 묘각사(妙覺寺)에 거둥하여 신도(信徒)의 무리들을 모아 경하(慶賀)하고 찬미(讚美)했다.  이것이 끝나자 심감(心鑑)이 바친 불아와 낙산(落山)의 수정염주(水精念珠)와 여의주(如意珠)를 군신(君臣)과 여러 신도(信徒)들이 모두 쳐다보고 경배한 뒤에 함께 금탑(金塔) 안에 안치했다.

나도 역시 이 모임에 참석해서 이른바 불아라고 하는 것을 친히 보았는데 그 길이는 세 치 가량 되고 사리는 없었다.  무극(無極)은 쓴다.

 

 

미륵선화(彌勒仙花)·미시랑(未尸郎)·진자사(眞慈師)

 

신라 제 24대 진흥왕(眞興王)의 성(姓)은 김씨(金氏)요 이름은 삼맥종(삼麥宗)인데, 혹 심맥종(深麥宗)이라고도 한다.  양(梁)나라 대동(大同) 6년 경신(庚申; 540)에 즉위(卽位)했다.  백부(伯父) 법흥왕(法興王)의 뜻을 사모해서 한 마음으로 부처를 받들어 널리 절을 세우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중이 되기를 허락했다.  왕은 또 천성이 풍미(風味)가 있어서 크게 신선을 숭상하여 민가(民家)의 처녀들 중에 아름다운 자를 뽑아서 원화(原花)를 삼았으니, 이것은 무리를 모아서 사람을 뽑고 그들에게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을 가르치려 함이었으며, 이것은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대요(大要)이기도 했다.  이에 남모랑(南毛娘)과 교정랑(교貞娘)의 두 원화를 뽑았고, 여기에 모여든 사람이 3,4백 명이나 되었다.  교정(교貞)이 남모(南毛)를 질투하여 술자리를 마련하여 남모에게 취하도록 먹인 후에 남몰래 북천(北川)으로 데리고 가서 큰 돌을 들고 그 속에 묻어 죽였다.  이에 그 무리들은 남모가 간 곳을 알지 못해서 슬피 울다가 헤어졌다.  그러나 그 음모를 아는 자가 있어서, 노래를 지어 거리의 어린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니, 남모의 무리들은 듣고 그 시체를 북천(北川) 속에서 찾아내고 교정랑을 죽여 버리니 이에 대왕(大王)은 영을 내려 원화의 제도를 폐지했다.  그런 지 여러 해가 되자 왕은 또 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풍월도(風月道)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시 영을 내려 양가(良家)의 남자 중에 덕행(德行)이 있는 자를 뽑아 이름을 고쳐 화랑(花娘(郞))이라 하고, 비로서 설원랑(薛原郞)을 받들어 국선(國仙)을 삼으니, 이것이 화랑(花郞) 국선(國仙)의 시초이다.  그런 때문에 명주(溟洲)에 비(碑)를 세우고, 이로부터 사람들로 하여금 악한 것을 고쳐 착한 일을 하게 하고 웃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에게 유산하게 하니 오상(五常)·육예(六藝)와 삼사(三師)·육정(六正)이 왕의 시애에 널리 행해졌다(<국사國史>에 보면, 진지왕眞智王 대건大建 8년 경庚(병丙)신申에 처음으로 화랑花郞을 받들었다 했으나 이것은 사전史傳의 잘못일 것이다).

진지왕(眞智王) 때에 와서 흥륜사(興輪寺) 중 진자(眞慈; 혹은 정자貞慈라고 함)가 항상 이 당(堂)의 주인인 미륵상(彌勒像) 앞에 나가 발원(發願)하여 맹세해 말했다.  "우리 대성(大聖)께서는 화랑(花郞)으로 화(化)하시어 이 세상에 나타나 제가 항상 수용(수容)을 가까이 뵙고 받들어 시중을 들게 해 주십시오."  그 정성스럽고 간절하게 기원하는 마음이 날로 더욱 두터워지자, 어느날 밤 꿈에 중 하나가 말했다.  "내 웅천(熊天; 지금의 공주公州) 수원사(水源寺)에 가면 미륵선화(彌勒仙花)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진자(眞慈)는 꿈에서 깨자 놀라고 기뻐하여 그 절을 찾아 열흘길을 가는데 발자국마다 절을 하며 그 절에 이르렀다.  문 밖에 탐스럽고 곱게 생긴 한 소년이 있다가, 예쁜 눈매와 입맵시로 맞이하여 작은 문으로 데리고 들어가 객실로 안내하니, 진자는 올라가 읍(揖)하고 말한다.  "그대는 평소에 나를 모르는 터에 어찌하여 이렇듯 은근하게 대접하는가."  소년이 말한다.  "나도 또한 서울 사람입니다.  스님이 먼 곳에서 오시는 것을 보고 위로했을 뿐입니다."  이윽고 소년은 문 밖으로 나가더니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진자는 속으로 우연한 일일 것이라 생각하고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만 절의 중들에게 지난 밤의 꿈과 자기가 여기에 온 뜻만 얘기하고 또 말했다.  "잠시 저 아랫자리에서 미륵선화를 기다리고자 하는데 어떻겠소."  절에 있는 중들은 그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근실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천산(千山)이 있는데 옛부터 현인(賢人)과 철인(哲人)이 살고 있어서 명감(冥感)이 많다고 하오.  그곳으로 가 보는 것이 좋을 게요."  진자가 그 말을 쫓아 산 아래에 이르니, 산신령(山神靈)이 노인으로 변하여 나와 맞으면서 말한다.  "여기에 무엇 하러 왔는가."  진자가 대답한다.  "미륵선화를 보고자 합니다."  노인이 또 말한다.  "저번에 수원사(水源寺) 문 밖에서 이미 미륵선화를 보았는데 다시 무엇을 보려는 것인가."  진자는 이 말을 듣고 놀라 이내 달려서 본사(本寺)로 돌아왔다.  그런 지 한 달이 넘어 진지왕(眞智王)이 이 말을 듣고는 진지를 불러서 그 까닭을 묻고 말했다.  "그 소년이 스스로 서울 사람이라고 했으니 성인(聖人)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데 왜 성 안을 찾아보지 않았소."  진자는 왕의 뜻을 받들어 무리들을 모아 두루 마을을 돌면서 찾으니, 단장을 갖추어 얼굴 모양이 수려한 한 소년이 영묘사(靈妙寺) 동북쪽 길가 나무 밑에서 거닐며 놀고 있었다.  진자는 그를 만나보자 놀라서 말한다.  "이분이 미륵선화다."  그는 나가서 물었다.  "낭(郎)의 집은 어디에 있으며 성(姓)은 누구신지 듣고 싶습니다."  낭이 대답한다.  "내 이름은 미시(未尸)이고, 어렸을 때 부모를 모두 여의어 성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이에 진자는 그를 가마에 태워 가지고 들어가 왕께 뵈었다.  왕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여 받들어 국선(國仙)을 삼았다.  그는 화랑도(花郞徒) 무리들을 서로 화목하게 하고 예의(禮儀)와 풍교(風敎)가 보통사람과 달랐다.  그는 풍류(風流)를 세상에 빛내더니 7년이 되자 갑자기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진자는 몹시 슬퍼하고 그리워했다.  미시랑(未尸郎)의 자비스러운 혜택을 많이 입었고 맑은 덕화(德化)를 이어 스스로 뉘우치고 정성을 다하여 도(道)를 닦으니, 만년(晩年)에 그 역시 어디 가서 죽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해설하는 자가 말한다.  "미(未)는 미(彌)와 음(音)이 서로 같고 시(尸)는 역(力)과 글자 모양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그 가까운 것을 취해서 바꾸어 부르기도 한 것이다.  부처님이 유독 진자의 정성에 감동된 것만이 아니라 이 땅에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가끔 나타났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나라 사람들이 신선을 가리켜 미륵선화라 하고 중매하는 사람들을 미시(未尸)라고 하는 것은 모두 진자의 유풍(遺風)이다.  노방수(路傍樹)를 지금까지도 견량(見郎)[樹]이라 하고 또 우리말로 사여수(似如樹; 혹은 인여수印如樹)라고 한다.

 

찬(讚)해 말한다.

 

선화(仙花) 찾아 한 걸음 걸으며 그의 모습 생각하니,

곳곳마다 심은 것은 한결같은 공로일세.

졸지에 봄은 되돌아가고 찾을 곳 없으니,

누가 알았으리, 상림(上林)의 한 때의 봄을.

 

 

남백월이성(南白月二聖), 노힐부득(努힐夫得)과 달달박박(달달朴朴)

 

<백월산양성성도기(白月山兩聖成道記)>에 이렇게 말하였다.  "백월산(白月山)은 신라 구사군(仇史郡; 옛날의 굴자군屈自郡.  지금의 의안군義安郡)의 북쪽에 있었다.  산봉우리는 기이하고 빼어났는데 그 산줄기가 수백 리에 뻗쳐 있어 참으로 큰 진산(鎭山)이다."

옛 노인들이 서로 전해서 말한다.  "옛날에 당(唐)나라 황제(皇帝)가 어느 때에 못을 하나 팠는데, 달마다 보름 전이면 달빛이 밝고, 못 가운데에 산이 하나 있고 사자(獅子)처럼 생긴 바위가 꽃 사이로 은은히 비쳐서 못 가운데에 그림자를 나타냈다.  황제는 화공(畵工)을 시켜서 그 모양을 그리게 하여 사자(使者)를 보내서 온 천하를 돌면서 찾도록 했다.  사자가 해동(海東)에 이르러 보니 그 산에 큰 사자암(獅子巖)이 있고 산의 서남쪽 이보(二步)쯤 되는 곳에 삼산(三山)이 있는데 그 이름은 화산(花山; 그 산의 몸체는 하나인데 봉우리가 셋이어서 삼산三山이라고 했다)으로서 모양이 그림과 같았다.  그러나 아직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어서 신 한 짝을 사자암 꼭대기에 걸어 놓고 돌아와 아뢰었다.  그런데 신 그림자도 역시 못에 비치므로 황제는 이상히 여겨 그 산 이름을 백월산(白月山)이라고 했다(보름 전에는 백월白月의 그림자가 못에 나타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그러나 그 후로는 못 가운데에 산 그림자가 없어졌다."

이 산의 동남쪽 3,000보 쯤 되는 곳에 선천촌(仙川村)이 있고, 그 마을에는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 하나는 노힐부득(努힐夫得; 혹은 등等)이니 아버지는 이름을 월장(月藏)이라 했고, 어머니는 미승(味勝)이라 했다.  또 하나는 달달박박(달달朴朴)이니 그의 아버지는 이름을 수범(修梵)이라 했고, 어머니는 범마(梵摩)라 했다(향전鄕傳에는 치산촌雉山村이라 했으나 잘못이다.  두 선비의 이름은 방언方言이니 두 집에는 각각 두 선비의 마음과 행동이 등등騰騰하고 고절苦節하다는 두 가지 뜻에서 이렇게 이름지은 것이다).

이들은 모두 풍채와 골격(骨格)이 범상치 않았고, 속세를 떠난 마음이 있어 서로 좋은 친구였다.  20세가 되자 마을 동북쪽 고개 밖에 있는 법적방(法積房)에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서남쪽 치산촌(雉山村) 법종곡(法宗谷) 승도촌(僧道村)에 옛절이 있는데, 서진(栖眞)할 만하다는 말을 듣고, 함께 가서 대불전(大佛田)·소불전(小佛田)의 두 마을에 각각 살았다.  부득(夫得)은 회진암(懷眞巖)에 살았는데 혹은 이곳을 양사(壤寺; 지금 회진동懷眞洞에 옛 절터가 있으니 이것이다)라고도 했고, 박박(朴朴)은 유리광사(瑠璃光寺; 지금 이산梨山 위에 절터가 있는 것이 이것이다)에 살았다.  이들은 모두 처자(妻子)를 데리고 와서 살면서 산업(産業)을 경영하고 서로 왕래하면서 정신을 수양하고 편안히 마을을 길러 속세를 떠날 마음을 잠시도 폐하지 않았다.  그들은 몸과 세상의 무상(無常)함을 느껴 서로 말했다.  "기름진 밭과 풍년 든 해는 참으로 좋은 것이지만 의식(衣食)이 마음대로 생기고 자연히 배부르고 따뜻함을 얻는 것만 못하다.  또 부녀(婦女)와 집이 참으로 좋으나, 연지화장(蓮池花藏)에서 여러 부처가 앵무새나 공작새와 함께 놀면서 서로 즐기는 것만 못하다.  더구나 불도(佛道)를 배우면 응당 부처가 되고, 참된 것을 닦으면 반드시 참된 것을 얻는 데에 있어서랴.  지금 우리들은 이미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니 마땅히 몸에 얽매어 있는 것을 벗어 버리고 무상(無上)의 도(道)를 이루어야 할 것인데, 어찌 이 풍진(風塵) 속에 파묻혀 세속 무리들과 같이 지내서야 되겠는가."  이들은 드디어 인간 세상을 떠나서 장차 깊은 골짜기에 숨으려 했다.  어느날 밤 꿈에 백호(白毫)의 빛이 서쪽에서 오더니 빛 속에서 금빛 팔이 내려와서 두 사람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다.  꿈에서 깨어 그 얘기를 하니 두 사람의 말이 똑같으므로 이들은 모두 한참동안 감탄하다가 드디어 백월산(白月山) 무등곡(無等谷; 지금의 남수동南藪洞)으로 들어갔다.

박박사(朴朴師)는 북쪽 고개의 사자암(獅子巖)을 차지하여 판잣집 8척 방을 만들고 살았으므로 판방(板房)이라 하고, 부득사(夫得師)는 동쪽 고개의 무더기 돌 아래 물이 있는 곳을 차지하고 역시 방을 만들어 살았으므로 뇌방(磊房)이라고 했다(향전鄕傳에는, 부득夫得은 산 북쪽 유리동瑠璃洞에 살았으니 곧 지금의 판방板房이요, 박박朴朴은 산 남쪽 법정동法精洞 뇌방磊房에 살았다고 했으니 이 기록과는 서로 반대된다.  지금 와서 보면 향전鄕傳이 잘못되었다).  이들은 각각 암자에 살면서 부득(夫得)은 미륵불(彌勒佛)을 성심껏 구했고, 박박(朴朴)은 미타불(彌陀佛)을 경례하고 염송(念誦)했다.

3년이 못되어 경룡(景龍) 3년 기유(己酉; 709) 4월 8일은 성덕왕(聖德王) 즉위 8년이다.  해는 저물어가는데 나이 20이 가깝고 얼굴이 매우 아름다운 낭자(娘子)가 난초의 향기와 사향 냄새를 풍기면서 갑자기 북암(北庵; 향전鄕傳에는 남암南庵이라 했다)에 와서 자고 가기를 청하면서 글을 지어 바친다.

 

갈 길 더딘데 해는 떨어져 모든 산이 어둡고,

길은 막히고 성은 멀어 인가도 아득하네.

오늘은 이 암자에서 자려 하오니,

자비스러운 스님은 노하지 마오.

 

박박(朴朴)은 말했다.  "절은 깨끗해야 하는 것이니 그대가 가까이 올 곳이 아니오.  어서 다른 데로 가고 여기에서 지체하지 마시오."하고는 문을 닫고 들어갔다(기記에는 말하기를, "나는 모든 잡념雜念이 없으니 혈낭血囊을 가지고 시험하지 말라"고 했다).  낭자(娘子)는 남암(南庵; 향전鄕傳에는 북암北庵)으로 돌아가서 또 전과 같이 청하니 부득(夫得)은 말했다.  "그대는 이 밤중에 어디서 왔는가."  낭자가 대답한다.  "맑기가 태허(太虛)와 같은데 어찌 오고 가는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어진 선배의 바라는 뜻이 깊고 덕행(德行)이 높고 굳다는 말을 듣고 장차 도와서 보리(菩提)를 이루고자 해서일 뿐입니다."  그리고는 게(偈) 하나를 주었다.

 

해 저문 깊은 산길에,

가도 가도 인가는 보이지 않네.

대나무와 소나무 그늘은 그윽하기만 하고,

시내와 골짜기에 물소리 더욱 새로워라.

길 잃어 잘 곳 찾는 게 아니요,

존사(尊師)를 인도하려 함일세.

원컨대 내 청 들어만 주시고,

길손이 누구인지 묻지 마오.

 

 

부득사(夫得師)는 이 말을 듣고 몹시 놀라면서 말했다.  "이곳은 여자와 함께 있을 곳이 아니나, 중생(衆生)을 따르는 것도 역시 보살행(菩薩行)의 하나일 것이오.  더구나 깊은 산골짜기에 날이 어두웠으니 어찌 소홀히 대접할 수 있겠소."  이에 그를 맞아 읍(揖)하고 암자 안에 있게 했다.  밤이 되자 부득은 마음을 맑게 하고 지조를 닦아 희미한 등불이 비치는 벽 밑에서 고요히 염불했다.  밤이 새려 할 때 낭자는 부득을 불러 말했다.  "내가 불행히 마침 산고(産故)가 있으니 원컨대 스님께서는 짚 자리를 준비해 주십시오."  부득이 불쌍히 여겨 거절하지 못하고 은은히 촛불을 비치니 낭자는 이미 해산을 끝내고 또 다시 목욕하기를 청한다.  부득은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마음속에 얽혔으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그보다 더해서 마지못하여 또 목욕통을 준비해서 낭자를 통 안에 앉히고 물을 데워 목욕을 시키니 이미 통 속 물에서 향기가 강하게 풍기면서 금액(金液)으로 변한다.  부득이 크게 놀라자 낭자가 말했다.  "우리 스승께서도 이 물에 목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부득이 마지못하여 그 말에 좇았더니 갑자기 정신이 상쾌해지는 것을 깨닫고 살결이 금빛으로 되고, 그 옆을 보니 졸지에 연대(蓮帶) 하나가 생겼다.  낭자가 부득에게 앉기를 권하고 말한다.  "나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인데 여기 와서 대사를 도와 대보리(大菩提)를 이루도록 한 것이오."

말을 마치더니 이내 보이지 않았다.  한편 박박(朴朴)이 생각하기를, "부득이 오늘 밤에 반드시 계(戒)를 더럽혔을 것이니 비웃어 주리라"하고 가서 보니 부득은 연화대(蓮花臺)에 앉아 미륵존상(彌勒尊像)이 되어 광명(光明)을 내뿜는데 그 몸은 금빛으로 변해 있었다.  박박은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말한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습니까."  부득이 그 까닭을 자세히 말해 주니 박박은 탄식해 말한다.  "나는 마음 속에 가린 것이 있어서, 다행히 부처님을 만났으나 도리어 대우하지 못했으니, 큰 덕(德)이 있고 지극히 어진 그대가 나보다 먼저 이루었소.  부디 옛날의 교분(交分)을 잊지 마시고 일을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부득이 말한다.  "통 속에 금액이 남았으니 목욕함이 좋겠습니다."  박박이 목욕을 하여 부득과 같이 무량수(無量壽)를 이루니 두 부처가 서로 엄연히 대해 있었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다투어 와서 우러러보고 감탄하기를, "참으로 드문 일이로다."했다.  두 부처는 그들에게 불법(佛法)의 요지(要旨)를 설명하고 나서, 온몸으로 구름을 타고 가 버렸다.

천보(天寶) 14년 을미(乙未; 755)에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즉위(<고기古記>엔 천감天監 24년 을미乙未에 법흥왕法興王이 즉위했다고 했으나 그 선후가 뒤바뀐 것이 어찌 이렇게 심할까)하여 이 말을 듣고 정유(丁酉; 757)년에 사자(使者)를 보내서 큰 절을 세우고 이름을 백월산 남사(白月山 南寺)라 했다.  광덕(光德) 2년(<고기古記>에는 대력大曆 원년이라고 했으나 역시 잘못된 것이다) 갑진(甲辰; 764) 7월 15일에 절이 완성되자, 다시 미륵존상(彌勒尊像)을 만들어 금당(金堂)에 모시고 액자(額字)를 '현신성도미륵지전(現身成道彌勒之殿)'이라 했다.  또 아미타불상(阿彌陀佛像)을 만들어 강당(講堂)에 모셨는데, 남은 금액(金液)이 모자라 몸에 전부 바르지 못했기 때문에 아미타불상에는 역시 얼룩진 흔적이 있다.  그 액자는 '현신성도무량수전(現身成道無量壽殿)'이라 했다.

논평해 말한다.  "낭(娘)은 참으로 부녀의 몸으로서 섭화(攝化)했다 할 만하다.  <화엄경(華嚴經)>에 마야부인(摩耶夫人) 선지식(善知識)이 십일지(十一地)에 살면서 부처를 낳아 해탈문(解脫門)을 여환(如幻)한 것과 같다.  이제 낭자의 순산한 뜻이 여기에 있으며, 그가 준 글은 슬프고도 간곡하고 사랑스러워서 천선(天仙)의 지취(志趣)가 있다.  아, 낭자가 만일 중생을 따라서 다라니(陀羅尼)를 해득할 줄 몰랐더라면 과연 이같이 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 글 끝귀에는 마땅히, '맑은 바람이 한자리함을 꾸짖지 마오'했어야 할 것이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대개 세속의 말과 같이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푸른빛 떨어지는 바위 앞에 문 두드리는 소리,

어떤 사람이 해 저문데 구름 속 길을 찾는가.

남암(南庵)이 가까운데 그리로 갈 것이지,

푸른 이끼 밟고서 내 뜰을 더럽히지 마오.

 

위는 북암(北庵)을 찬(讚)한 글이다.

 

골짜기에 해 저문데 어디로 가리,

남창(南窓)에 자리 있으니 머물다 가오.

밤 깊어 백팔 염주(念珠) 세고 있으니,

이 소리 시끄러워 길손의 잠 깰까 두려워라.

 

위는 남암(南庵)을 찬(讚)한 글이다.

 

10리(里) 솔 그림자에 한 길을 헤매다가,

밤 초제(招提)로 중을 찾아 시험했네.

세 통에 목욕 끝나니 날도 장차 새는데,

두 아이 낳아 던져 두고 서쪽으로 갔네.

 

위는 성랑(聖娘)을 찬(讚)한 것이다.

 

 

분황사 천수대비(芬皇寺千手大悲) 맹아득안(盲兒得眼)

 

경덕왕(景德王) 때에 한기리(漢岐里)에 사는 희명(希明)이라는 여자의 아이가, 난 지 5년 만에 갑자기 눈이 멀었다.  어느날 어머니는 이 아이를 안고 분황사(芬皇寺) 좌전(左殿) 북쪽 벽에 그린 천수관음(千手觀音) 앞에 나가서 아이를 시켜 노래를 지어 빌게 했더니 멀었던 눈이 드디어 떠졌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무릎을 세우고 두 손바닥 모아,

천수관음(千手觀音) 앞에 비옵나이다.

1,000손과 1,000눈 하나를 내어 하나를 덜기를,

둘 다 없는 이몸이오니 하나만이라도 주시옵소서.

아아! 나에게 주시오면, 그 자비(慈悲) 얼마나 클 것인가.

 

 

찬(讚)해 말한다.

 

죽마(竹馬)·총생(총笙)의 벗 거리에서 놀더니,

하루아침에 두 눈 먼 사람 되었네.

대사(大士)가 자비로운 눈을 돌리지 않았다면,

몇 사춘(社春)이나 버들꽃 못 보고 지냈을까.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 관음(觀音)·정취(正趣), 조신(調信)

 

옛날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처음 당(唐)나라에서 돌아와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진신(眞身)이 이 해변 어느 굴 안에 산다는 말을 듣고, 이곳을 낙산(洛山)이라고 이름했으니, 대개 서역(西域)에 보타락가산(寶陀洛伽山)이 있는 때문이다.  이것을 소백화(小白華)라고도 했는데 백의대사(白衣大士)의 진신(眞身)이 머물러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것을 빌어다가 이름지은 것이다.

여기에서 의상이 재계(齋戒)한 후 7일 만에 좌구(座具)를 새벽 물 위에 띄웠더니 용천팔부(龍天八部)의 시종(侍從)들이 굴 속으로 안내해 들어가므로 공중을 향해 참례(參禮)하니 수정(水精)으로 만든 염주 한 꾸러미를 내준다.  의상이 받아 가지고 물러나오니, 동해의 용이 또한 여의보주(如意寶珠) 한 알을 바치므로 의상이 받들고 나와서 다시 7일 동안 재계(齋戒)하고 나서 비로소 관음(觀音)의 참 모습을 보았다.  관음이 말한다.  "좌상(座上)의 산마루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佛殿)을 짓는 것이 마땅하다."  법사(法師)가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대나무가 땅에서 솟아나왔다.  여기에 금당(金堂)을 짓고 관음상(觀音像)을 만들어 모시니, 그 둥근 얼굴과 고운 바탕이 마치 천연적으로 생긴 것 같았다.  대나무가 도로 없어지므로 그제야 비로소 관음의 진신(眞身)이 살고 있는 곳임을 알았다.  이 때문에 그 절 이름을 낙산사(洛山寺)라 하고, 법사는 자기가 받은 두 구슬을 성전(聖殿)에 봉안(奉安)하고 그곳을 떠났다.

그 후에 원효법사(元曉法師)가 뒤를 이어 와서 여기에 예(禮)를 올리려 하였다.  처음에 남쪽 교외(郊外)에 이르자 논 가운데에서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법사(法師)가 희롱삼아 그 벼를 달라고 청하니, 여인은 벼가 잘 영글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또 가다가 다리 밑에 이르니 한 여인이 월수백(月水帛)을 빨고 있다.  법사(法師)가 물을 달라고 청하자 여인은 그 더러운 물을 떠서 바친다.  법사(法師)는 그 물을 엎질러 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다.  이때 들 가운데 있는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그를 불러 말한다.  "제호(醍호)스님은 쉬십시오."  그리고는 갑자기 숨고 보이지 않는데 그 소나무 밑에는 신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법사(法師)가 절에 이르자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의 자리 밑에 또 전에 보던 신 한 짝이 벗겨져 있으므로 그제야 전에 만난 성녀(聖女)가 관음의 진신(眞身)임을 알았다.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 했다.  법사는 성굴(聖窟)로 들어가서 다시 관음의 진용(眞容)을 보려고 했으나 풍랑(風浪)이 크게 일어나 들어가지 못하고 그대로 떠났다.

그 뒤에 굴산조사(굴山祖師) 범일(梵日)이 태화(太和) 연간(827∼835)에 당나라에 들어가 명주(明州) 개국사(開國寺)에 이르니 한 중이 왼쪽 귀가 없어진 채 여러 중들의 끝자리에 앉아 있다가 조사에게 말한다.  "나도 또한 한 고향 사람으로, 내 집은 명주(溟州)의 경계인 익령현(翼嶺縣) 덕기방(德耆坊)에 있습니다.  조사께서 다음날 본국(本國)에 돌아가시거든 모름지기 내 집을 지어주셔야 합니다."  이윽고 조사(祖師)는 총석(叢席)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염관(鹽官)에게서 법을 얻고(이 일은 모두 본전本傳에 자세히 있다) 회창(會昌) 7년 정묘(丁卯; 847)에 본국으로 돌아오자 먼저 굴산사(굴山寺)를 세우고 불교를 전했다.

대중(大中) 12년 무인(戊寅; 858) 2월 보름 밤 꿈에, 전에 보았던 중이 창문 밑에 와서 말한다.  "옛날에 명주(明州) 개국사(開國寺)에서 조사와 함께 약속을 하여 이미 승낙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렇게 늦는 것입니까."  조사는 놀라 꿈에서 깨자 사람 수십 명을 데리고 익령(翼嶺) 경계에 가서 그가 사는 곳을 찾았다.  한 여인이 낙산(洛山) 아래 마을에 살고 있으므로 그 이름을 물으니 덕기(德耆)라고 한다.  그 여인에게 아들 하나가 있는데 나이 겨우 8세로 항상 마을 남쪽 돌다리 가에 나가 놀았다.  그는 어머니께 말한다.  "나와 같이 노는 아이들 중에 금빛이 나는 아이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이 사실을 조사에게 말했다.  조사는 놀라고 기뻐하여 그 아이와 함께 놀았다는 다리 밑에 가서 찾아보니 물 속에 돌부처 하나가 있는데 꺼내 보니 한쪽 귀가 없어진 것이 전에 보았던 중과 같았다.  이것은 곧 정취보살(正趣菩薩)의 불상(佛像)이었다.  이에 간자(簡子)를 만들어 절을 지을 곳을 점쳤더니 낙산(洛山) 위가 제일 좋다고 하므로 여기에 불전(佛殿) 3간을 지어 그 불상을 모셨다(고본古本에는 범일梵日의 일이 앞에 있고, 의상義湘과 원효元曉의 일은 뒤에 있다.  그러나 상고해 보건대, 의상義湘과 원효元曉 두 법사法師의 일은 당唐나라 고종高宗 때에 있었고, 범일梵日의 일은 회창會昌 후에 있었다.  그러니 연대年代가 서로 120여 년이나 차이가 난다.  그런 때문에 지금은 앞뒤를 바꾸어서 책을 꾸몄다.  혹은 범일梵日이 의상義湘의 문인門人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말이다).

그 뒤 100여 년이 지나 들에 불이 나서 이 산까지 번져 왔으나 오직 관음(觀音)·정취(正趣) 두 성인(聖人)을 모신 불전만은 그 화재를 면했고, 그 나머지는 모두 타 버렸다.  몽고(蒙古)의 병란이 있은 이후인 계축(癸丑)·갑인(甲寅) 연간(1253∼54)에 두 성인의 참 얼굴과 두 보주(寶珠)를 양주성(襄州城)으로 옮겼다.  몽고 군사가 몹시 급하게 공격하여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하므로 주지선사(住持禪師) 아행(阿行; 옛 이름은 희현希玄)이 은으로 만든 합(盒)에 두 구슬을 넣어 가지고 도망하려 하자 이것을 절에 있는 종 걸승(乞升)이 빼앗아 땅속에 깊이 묻고 맹세했다.  "내가 만일 병란(兵亂)에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면 두 구슬은 끝내 인간 세상에 나타나지 못해서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요, 내가 만일 죽지 않는다면 마땅히 이 두 보물을 받들어 나라에 바칠 것이다."  갑인(甲寅; 1254)년 10월 22일에 이 성이 함락되어 아행은 죽음을 면치 못했으나 걸승은 죽음을 면했다.  그는 적의 군사가 물러가자 이것을 파내어 명주도(溟州道) 감창사(監倉使)에게 바쳤다.  이때 낭중(郎中) 이녹수(李祿綏)가 감창사(監倉使)였는데, 이것을 받아 감창고(監倉庫) 안에 간직해두고 교대할 때마다 서로 전해서 이어받았다.

무오(戊午; 1258)년 11월에 이르러 본업(本業)의 늙은 중, 기림사(祇林寺) 주지 대선사(大禪師) 각유(覺猷)가 임금께 아뢰었다.  "낙산사의 두 보주(寶珠)는 국가의 신보(神寶)이온데 양주성(襄州城)이 함락될 때 절의 종 걸승이 성 안에 묻었다가 적병이 물러간 뒤에 파내서 감창사에게 바쳐서 명주영(溟州營)의 창고 안에 간직하여 왔습니다.  지금 명주성(溟州城)도 지킬 수가 없사온즉 마땅히 어부(御府)로 옮겨 모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임금은 이를 허락하고 야별초(夜別抄) 10명을 내어 걸승을 데리고 명주성에서 두 보주를 갖다가 내부(內府)에 안치해 두었다.  그때 사자로 간 10명에게는 각각 은 1근과 쌀 5석(石)씩을 주었다.

옛날 서라벌이 서울이었을 때 세규사(世逵寺; 지금의 興敎寺)의 장원(莊園)이 명주 날리군(捺李郡; <지리지地理志>를 상고해 보면, 명주溟州에는 날리군捺李郡이 없고 오직 날성군捺城郡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본래 날생군捺生郡이니 지금의 영월寧越이다.  또 우수주牛首州 영현領縣에 날령군捺靈郡이 있는데 본래는 날이군捺已郡이요 지금의 강주剛州이다.  우수주牛首州는 지금의 춘주春州이니 여기에 말한 날리군捺李郡은 어느 곳인지 알 수가 없다)에 있었는데, 본사(本寺)에서 중 조신(調信)을 보내서 장원(莊園)을 맡아 관리하게 했다.  조신이 장원에 와서 [태]수([太]守) 김흔공(金昕公)의 딸을 좋아해서 아주 반하게 되었다.  여러 번 낙산사 관음보살(觀音菩薩) 앞에 가서 남몰래 그 여인과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로부터 몇 해 동안에 그 여인에게는 이미 배필이 생겼다.  그는 또 불당 앞에 가서, 관음보살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생각하는 마음에 지쳐서 잠깐 잠이 들었다.  꿈 속에 갑자기 김씨(金氏) 낭자(娘子)가 기쁜 낯빛을 하고 문으로 들어와 활짝 웃으면서 말한다.  "저는 일찍부터 스님을 잠깐 뵙고 알게 되어 마음 속으로 사랑해서 잠시도 잊지 못했으나 부모의 명령에 못 이겨 억지로 딴 사람에게로 시집갔다가 이제 부부가 되기를 원해서 왔습니다."  이에 조신은 매우 기뻐하여 그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녀와 40여 년간 같이 살면서 자녀 다섯을 두었다.  집은 다만 네 벽뿐이고, 좋지 못한 음식마저도 계속할 수가 없어서 마침내 꼴이 말이 아니어서 식구들을 이끌고 사방으로 다니면서 얻어먹고 지냈다.  이렇게 10년 동안 초야(草野)로 두루 다니니 옷은 여러 조각으로 찢어져 몸도 가릴 수가 없었다.  마침 명주 해현령(蟹縣嶺)을 지나는데 15세 되는 큰아이가 갑자기 굶어죽자 통곡하면서 길가에 묻었다.  남은 네 식구를 데리고 그들 내외는 우곡현(羽曲縣; 지금의 羽縣)에 이르러 길가에 모옥(茅屋)을 짓고 살았다.  이제 내외는 늙고 병들었다.  게다가 굶주려서 일어나지도 못하니, 10세 된 계집아이가 밥을 빌어다 먹는데, 다니다가 마을 개에게 물렸다.  아픈 것을 부르짖으면서 앞에 와서 누웠으니 부모도 목이 메어 눈물을 흘렸다.  부인이 눈물을 씻더니 갑자기 말한다.  "내가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는 얼굴도 아름답고 나이도 젊었으며 입은 옷도 깨끗했었습니다.  한 가지 맛있는 음식도 그대와 나누어 먹었고, 옷 한 가지도 그대와 나누어 입어, 집을 나온 지 50년 동안에 정이 맺어져 친밀해졌고 사랑도 굳어졌으니 가위 두터운 인연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는 쇠약한 병이 날로 더해지고 굶주림과 추위도 날로 더해오는데 남의 집 곁방살이에 하찮은 음식조차도 빌어서 얻을 수가 없게 되어, 수많은 문전(門前)에 걸식하는 부끄러움이 산과도 같이 무겁습니다.  아이들이 추워하고 배고파해도 미처 돌봐 주지 못하는데 어느 겨를에 부부간의 애정을 즐길 수가 있겠습니까.  붉은 얼굴과 예쁜 웃음도 풀 위의 이슬이요, 지초(芝草)와 난초 같은 약속도 바람에 나부끼는 버들가지입니다.  이제 그대는 내가 있어서 더 누(累)가 되고 나는 그대 때문에 더 근심이 됩니다.  가만히 옛날 기쁘던 일을 생각해 보니, 그것이 바로 근심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대와 내가 어찌해서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뭇 새가 다 함께 굶어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짝잃은 난새[난조鸞鳥]가 거울을 향하여 짝을 부르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추우면 버리고 더우면 친하는 것은 인정(人情)에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나아가고 그치는 것은 인력(人力)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헤어지고 만나는 것도 운수가 있는 것입니다.  원컨대 이 말을 따라 헤어지기로 합시다."  조신이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각각 아이 둘씩 데리고 장차 떠나려 하는데 여인이 말한다.  "나는 고향으로 갈 테니 그대는 남쪽으로 가십시오."

이리하여 서로 작별하고 길을 떠나려 하다가 꿈에서 깨었다.  타다 남은 등잔불이 깜박거리고 밤도 이제 새려고 한다.  아침이 되었다.  수염과 머리털은 모두 희어졌고 망연(망然)히 세상 일에 뜻이 없다.  괴롭게 살아가는 것도 이미 싫어졌고 마치 한평생의 고생을 다 겪고 난 것과 같아 재물을 탐하는 마음도 얼음 녹듯이 깨끗이 없어졌다.  아예 관음보살의 상(像)을 대하기가 부끄러워지고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을 참을 길이 없다.  그는 돌아와서 꿈에 해현(蟹峴)에 묻은 아이를 파 보니 그것은 바로 석미륵(石彌勒)이다.  물로 씻어서 근처에 있는 절에 모시고 서울로 돌아가 장원(莊園)을 맡은 책임을 내놓고 사재(私財)를 내서 정토사(淨土寺)를 세워 부지런히 착한 일을 했다.  그 후에 어디서 세상을 마쳤는지 알 수가 없다.

논평해 말한다.  "이 전기(傳記)를 읽고 나서 책을 덮고 지나간 일을 생각해 보니, 어찌 조신사(調信師)의 꿈만이 그렇겠느냐.  지금 모두가 속세의 즐거운 것만 알아 기뻐하기도 하고 서두르기도 하지만 이것은 다만 깨닫지 못한 때문이다."

이에 사(詞)를 지어 경계한다.

 

잠시 쾌활한 일 마음에 맞아 한가롭더니, 근심 속에 남모르게 젊은 얼굴 늙어졌네.

모름지기 황량(黃粱)이 다 익기를 기다리지 말고, 인생이 한 꿈과 같음을 깨달을 것을.

몸 닦는 것 잘못됨은 먼저 성의에 달린 것, 홀아비는 미인 꿈꾸고 도둑은 재물 꿈꾸네.

어찌 가을날 하룻밤 꿈만으로, 때때로 눈을 감아 청량(淸凉)의 세상에 이르리.

 

 

어산불영(魚山佛影)

 

<고기(古記)>에 이렇게 말했다.  "만어산(萬魚山)은 옛날의 자성산(慈成山), 또는 아야사산(阿耶斯山; 이것은 마땅히 마야사摩耶斯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어魚를 말한 것이다)이니, 그 곁에 가라국(呵라國)이 있었다.  옛날 하늘에서 알이 바닷가로 내려와서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이가 바로 수로왕(首露王)이다.  이때 국경 안에 옥지(玉池)가 있었고 못 속에는 독룡(毒龍)이 살고 있었다.  만어산(萬魚山)에 나찰녀(羅刹女) 다섯이 있어서 독룡과 왕래하면서 사귀었다.  그런 때문에 때때로 번개가 치고 비가 내려 4년 동안 오곡(五穀)이 익지 못했다.  왕은 주문(呪文)을 외어 이것을 금하려 했으나 금하지 못하고 머리를 숙이고 부처를 청하여 설법(說法)한 뒤에 나찰녀(羅刹女)는 오계(五戒)를 받아 그 후로는 재앙이 없어졌다.  때문에 동해의 물고기와 용(龍)이 마침내 화(化)하여 골짜기 속에 가득 찬 돌이 되어서 각각 쇠북과 경쇠의 소리가 났다."(이상은 <고기古記>에 있다).

또 상고해 보면, 대정(大定) 12년 경자(庚子; 1180)는 곧 고려 명종(明宗) 11년인데 이때 비로소 만어사(萬魚寺)를 세웠다.  동량(棟梁) 보림(寶林)이 임금에게 글을 올렸는데 그 글에 말했다.  "이 산 속의 기이한 자취가 북천축(北天竺) 가라국(訶羅國) 부처의 영상(影像)과 서로 같은 것이 세 가지가 있다.  그 첫째는 산 가까운 곳이 양주(梁州) 경계의 옥지(玉池)인데 여기에도 역시 독룡(毒龍)이 살고 있다는 것이요, 둘째는 때때로 강가에서 구름 기운이 일어나서 산마루에까지 이르는데, 그 구름 속에서 음악소리가 나는 것이요, 셋째는 부처 영상(影像)의 서북쪽에 반석(盤石)이 있어 항상 물이 괴어 없어지지 않는데, 이것은 부처가 가사(袈裟)를 빨던 곳이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이상은 모두 보림(寶林)의 말인데, 지금 친히 와서 모두 참례(參禮)하고 보니 또한 분명히 공경하고 믿을 만한 일이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골짜기 속의 돌이 전체의 3분의 2는 모두 금과 옥의 소리를 내는 것이 그 하나요, 멀리서 보면 나타나고 가까이서 보면 보이지 않아서 혹은 보이기도 하고 혹은 보이지 않기도 하는 것이 그 하나이다.  북천축(北天竺)의 글은 뒤에 갖추어 기록되어 있다.

가자함(可字函)의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 제7권에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이 야건가라국(耶乾訶羅國) 고선산(古仙山), 담복화림(담복花林) 독룡(毒龍)의 옆이요 청련화천(靑蓮花泉)의 북쪽인, 나찰혈(羅刹穴) 가운데에 있는 아나사산(阿那斯山) 남쪽에 이르렀다.  이때 그 구멍에는 나찰(羅刹) 다섯이 있어 이것이 여룡(女龍)으로 화하여 독룡과 교접하는데, 독룡은 다시 우박을 내리고 나찰(羅刹)은 난폭한 행동을 하니 기근(飢饉)과 역질(疫疾)이 4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왕은 놀라고 두려워하여 신기(神祇)에게 빌고 제사지냈으나 아무런 도움도 없었다.  그때 총명하고 지혜가 많은 범지(梵志)가 대왕께 아뢰었다.  '가비라국(伽毗羅國) 정반왕(淨飯王)의 왕자(王子)가 지금 도(道)를 이루어 호(號)를 석가문(釋迦文)이라고 합니다.'  완은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크게 기뻐하여 부처를 향해서 예를 올리고 말한다.  '어찌해서 오늘날 불교가 이미 일어났다 하는데 이 나라에는 오지 않으십니까.'  그때 석가여래는 여러 비구(比丘)에게 영을 내려서 여섯 가지 신통력(神通力)을 얻은 자를 따르게 하고 나건가라왕(那乾訶羅王)의 불파부제(弗婆浮提)가 청하는 것을 받아 주기로 했다.  그때 세존(世尊)의 이마에서 광명(光明)이 나와서 1만이나 되는 여러 대화불(大化佛)을 만들어 그 나라로 갔다.  이때 용왕(龍王)과 나찰녀(羅刹女)는 온몸뚱이를 땅에 던져 부처에게 계(戒)를 받기를 청했다.  이에 부처는 곧 그들을 위하여 삼귀(三歸) 오계(五戒)를 설법(說法)하니 용왕은 이 설법을 다 듣고 나자 꿇어앉자 합장(合掌)하고 세존이 항상 여기에 머물러 있기를 청하여 '부처님께서 만일 이곳에 계시지 않으면 저에게 악한 마음이 생겨서 아누보리(阿누菩提)가 될 수 없습니다.'  이때 범천왕(梵天王)이 다시 와서 부처에게 예(禮)하고 청한다.  '파가파(婆伽婆)께서는 앞으로 올 세상의 모든 중생(衆生)들을 위할 것이요, 이 작은 한 용(龍)만을 위하지 마시옵소서.'  이에 백천(百千)의 범왕(梵王)들도 모두 이러한 청을 했다.

이때 용왕이 칠보대(七寶臺)를 내어 여래(如來)에게 바치니 부처는 용왕에게 말한다.  '이 대(臺)는 나에게 필요치 않으니 너는 지금 다만 나찰(羅刹)이 있는 석굴(石窟)을 가져다가 나에게 시주(施主)하도록 하라.'  용왕은 이 말을 듣고 기뻐했다 한다.  이때 여래가 용왕을 위로했다.  '내가 네 청을 받아들여 네 굴 속에 앉아서 1,500년을 지내겠다.'  말을 마치고 부처가 몸을 솟구쳐 굴 속으로 들어가니 이내 그 돌은 밝은 거울과 같아져서, 사람들이 그 얼굴 모습을 볼 수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모든 용들이 다 나타났다.  부처는 돌 속에 있으면서 빛을 밖으로 나타내니 모든 용들은 합장하고 기뻐하면서 그곳을 떠나지 않고서도 항상 부처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이때 세존(世尊)은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석벽(石壁) 속에 앉아 있었는데, 중생들이 볼 때에 멀리서 바라보면 나타나 있다가도 가까이서 보면 나타나지 않았다.  제천(諸天)이 부처의 영상(影像)에 공양하면 부처의 영상도 역시 설법(說法)했다."

또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이 바위 위를 발로 밟으니 문득 금옥(金玉)의 소리가 났다."

<고승전(高僧傳)>에는 또 이렇게 말했다.  "혜원(惠遠)이 들으니 천축국(天竺國)에 부처님의 영상이 있는데 그것은 옛날 용을 위해서 남겨 놓은 부처님의 영상으로, 북천축(北天竺) 월지국(月支國) 나갈가성(那竭呵城)의 남쪽 고선인(古仙人)의 석실(石室) 속에 있었다 한다."

또 법현(法現)의 <서역전(西域傳)>에는 이렇게 말했다.  "나갈국(那竭國)의 국경에 가면 나갈성(那竭城) 남쪽으로 반 유순(由旬)이 되는 곳에 석실(石室)이 있으니, 그곳은 박산(博山)의 서남쪽이며 그 속에 부처가 영상을 남겼다.  여기서 10여 보(步)를 가서 보면 부처의 진형(眞形)처럼 광명이 환하게 나타나지만 멀어질수록 점점 희미하게 보였다.  여러 나라 왕들이 화공(畵工)을 보내서 이것을 그리려 했지만 비슷하게도 그릴 수가 없었다.  나라 사람들에게 전해 오는 말로는 현겁(賢劫)의 천불(千佛)이 모두 마땅히 여기에 영상(影像)을 남길 것이니, 그 영상의 서쪽 100보쯤 되는 곳에, 부처가 이 세상에 있을 때 머리를 깎고 손톱을 깎던 곳이 있다고 한다."

 

성자함(星字函)의 <서역기(西域記)> 제2권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여래(如來)가 세상에 있을 때에 이 용이 소 치는 사람이 되어 왕에게 소의 젖을 올렸는데, 올리다가 잘못하여 꾸지람을 받자 속으로 분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어 돈을 주고 꽃을 사서 부처님에게 공양했다.  그리고 솔도파(솔堵婆)에게 수기(授記)하기를, '부디 악룡(惡龍)이 되어 나라를 깨뜨리고 왕을 해치게 해 주시오'하고는 석벽(石壁)에 가서 몸을 던져 죽자, 드디어 이 굴 속의 대룡왕(大龍王)이 되어 악한 마음을 일으켰다.  여래(如來)가 이것을 보고 몸을 변하여 신통력(神通力)을 가지고 여기에 오니 용은 부처를 보자 독한 마음이 드디어 그쳐져서 불살계(不殺戒)를 받고 청하기를, '부처님께서 항상 이 굴에 계시면서 저의 공양을 받아 주십시오'했다.  이에 부처가 말했다.  '나는 장차 적멸(寂滅)할 것이다.  그러나 너를 위해서 내 영상을 남겨 둘 것이니 네가 만일 독하고 분한 마음이 생기거든 항상 내 영상을 바라보면 독한 마음이 없어질 것이다.'  부처는 정신을 가다듬어 홀로 석실(石室)로 들어갔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이내 나타나고 가까이서 보면 나타나지 않았다.  또 돌 위를 발로 차서 칠보(七寶)로 삼았다 한다."  이상은 모두 경문(經文)이니 대략 이와 같다.

해동(海東) 사람들은 이 산을 이름하여 아나사(阿那斯)라고 했으나 마땅히 마나사(摩那斯)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마나사를 번역하면 어(魚)가 되니, 대개 저 북천(北天)에서 있었던 일을 취해다가 산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다.

 

 

대산(臺山) 오만진신(五萬眞身)

 

산중에 있는 고전(古傳)을 상고해 보면 이렇게 말했다.  "이 산을 진성(眞聖), 즉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살던 곳이라고 이름지은 것은 자장법사(慈藏法師)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 법사가 중국 오대산(五臺山) 문수보살의 진신(眞身)을 보고자 하여 신라 선덕왕(善德王) 대인 정관(貞觀) 10년 병신(丙申; 636, <당승전唐僧傳>에서는 12년이라고 했지만 여기에서는 <삼국본사三國本史>에 따른다)에 당(唐)나라로 들어갔다.  처음에 중국 태화지(太和池) 가의 돌부처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있는 곳에 이르러 공손히 7일 동안 기도했더니, 꿈에 갑자기 부처가 네 구(句)의 게(偈)를 주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서도 그 네 구의 글은 기억할 수가 있으나 모두가 범어(梵語)여서 그 뜻을 전혀 풀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중 하나가 붉은 비단에 금색(金色) 점이 있는 가사(袈裟) 한 벌과 부처의 바리때 하나와 부처의 머리뼈 한 조각을 가지고 법사(法師)의 곁으로 와서는, 어찌해서 수심에 싸여 있는가 하고 물으니 이에 법사는 대답한다.  "꿈에 네 구의 게(偈)를 받았으나 범어로 되어 있어서 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중은 그 글을 번역하여 말했다.  "가라파좌낭(呵라婆佐낭)이란 일체의 법을 깨달았다는 말이요, 달예치구야(達예치구야)란 본래의 성품은 가진 바 없다는 말이요, 낭가희가낭(낭伽희伽낭)이란 이와 같이 법성(法性)을 해석(解釋)한다는 말이요, 달예노사나(達예盧舍那)란 노사나불(盧舍那佛)을 곧 본다는 말입니다."  말을 마치자 자기가 가졌던 가사 등 물건을 법사에게 주면서 부탁했다.  "이것은 본사(本師) 석가세존(釋迦世尊)이 쓰시던 도구(道具)이니 그대가 잘 보호해 가지십시오."  그는 또 말했다.  "그대의 본국의 동북방 명주(溟州) 경계에 오대산(五臺山)이 있는데 1만의 문수보살이 항상 그곳에 머물러 있으니 그대는 가서 뵙도록 하시오."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  법사(法師)는 두루 보살(菩薩)의 유적(遺跡)을 찾아 보고 본국으로 돌아오려 하는데 태화지(太和池)의 용이 현신(現身)해서 재를 청하고 7일 동안 공양하고 나서 법사(法師)에게 말한다.  "전일에 게(偈)를 전하던 늙은 중이 바로 진짜 문수보살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또 절을 짓고 탑을 세울 것을 간곡하게 부탁한 일이 있었는데, 이 일은 별전(別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  법사는 정관(貞觀) 17년(643)에 이 강원도 오대산(五臺山)에 가서 문수보살의 진신(眞身)을 보려 했으나 3일 동안이나 날이 어둡고 그늘져서 보지 못하고 돌아갔다가 다시 원령사(元寧寺)에 살면서 비로소 문수보살을 뵈었다고 하였다.  뒤에 칡덩굴이 서려 있는 곳으로 갔는데, 지금의 정암사(淨岩寺)가 바로 이곳이다(이것도 역시 별전別傳에 실려 있다).

그 후 두타(頭陀) 신의(信義)는 범일대사(梵日大師)의 제자로서 이 산을 찾아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쉬던 곳에 암자를 짓고 살았다.  신의가 죽은 후에는 암자도 역시 오랫 동안 헐어져 있었는데, 수다사(水多寺)의 장로(長老) 유연(有緣)이 새로 암자를 짓고 살았으니 지금의 월정사(月精寺)가 바로 이것이다.

자장법사가 신라로 돌아왔을 때 정신대왕(淨神大王)의 태자(太子) 보천(寶川)·효명(孝明) 두 형제(<국사國史>를 살펴보면 신라에는 정신淨神·보천寶川·효명孝明의 세 부자父子에 대한 명문明文이 없다.  그러나 이 기록의 하문下文에, 신룡神龍 원년에 터를 닦고 절을 세웠다고 했으니 신룡神龍 원년은 곧 성덕왕聖德王 즉위 4년 을사乙巳다.  왕王가의 이름은 흥광興光이요, 본명本名은 융기隆基이니 신문왕神文王의 둘째아들이다.  성덕聖德의 형 효조孝照는 이름이 이공理恭이니 혹은 홍천洪川이라고 했다.  이는 또 신문왕神文王의 아들이다.  신문왕神文王의 이름은 정명政明이요, 자는 일조日照니 정신淨神은 아마 정명政明 신문神文이 잘못 전해진 것인 듯싶다.  효명孝明은 효조孝照, 혹은 소昭의 잘못 전해진 것인 듯하다.  이 기록에 효명孝明이 즉위한 것만 말하고 신룡神龍 연간에 터를 닦고 절을 세웠다고 하는 것은 또한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룡神龍 연간에 절을 세운 이는 바로 성덕聖德이다)가 하서부(河西府; 지금의 명주溟州에 또한 하서군河西郡이 있으니 이것이다.  또는 하곡현河曲縣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울주蔚州라 하나 잘못이다)에 와서 세헌각간(世獻角干)의 집에서 하룻밤을 쉬었다.  이튿날 큰 고개를 지나 각각 무리 1,000명을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에 닿아 여러 날 유람하는데, 갑자기 어느날 밤에 두 형제가 속세(俗世)를 벗어날 뜻을 남몰래 약속하여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도망하여 오대산(五臺山; <고기古記>에는, 태화太和 원년元年 무신戊申 8월 초에 왕王이 산속에 숨었다고 했으나 아마 이것은 잘못인 듯싶다.  상고해 보건대, 효조孝照를 효소孝昭라고도 했다.  천수天授 3년 임진壬辰에 즉위했는데 이때 나이 16세였고, 장안長安 2년 임인壬寅에 죽었으니 나이 26세였고, 성덕왕聖德王이 이 해에 즉위했으니 나이 22세였다.  만일 태화太和 원년이 무신戊申이라면 효조孝照가 즉위한 갑진甲辰년보다 이미 45년이나 지났으니 즉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때다.  이것으로 이 글이 잘못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이것을 취하지 않는다)에 들어가니 그를 시중들던 사람들은 갈 바를 알지 못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두 태자(太子)가 산 속에 이르자 푸른 연꽃이 갑자기 땅 위에 피므로 형 태자(太子)가 여기에 암자를 짓고 머물러 살았으니 이곳을 보천암(寶川庵)이라 했다.  여기에서 동북쪽으로 600여 보(步)를 가니 북쪽 대(臺)의 남쪽 기슭에 역시 푸른 연꽃이 핀 곳이 있으므로 아우 태자(太子) 효명(孝明)이 또 암자를 짓고 살면서 각각 부지런히 업(業)을 닦았다.

어느날 형제가 함께 다섯 봉우리에 예(禮)를 하러 올라가니 동쪽 대(臺) 만월산(滿月山)에는 1만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진신(眞身)이 나타나 있고, 남쪽 대(臺) 기린산(麒麟山)에는 팔대보살(八大菩薩)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나타나 있고, 서쪽 대(臺) 장령산(長嶺山)에는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를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나타나 있고, 북쪽 대(臺) 상왕산(象王山)에는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5백의 대아라한(大阿羅漢)이 나타나 있고, 중앙의 대(臺) 풍로산(風盧山)은 또 지령산(地靈山)이라고도 하는데,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문수보살이 나타나 있다.  그들은 이와 같은 5만 보살의 진신에게 일일이 예를 했다.  날마다 이른 아침에는 문수보살이 지금의 상원(上院)인 진여원(眞如院)에 이르러 서른 여섯 가지의 모양으로 변하여 나타났다.  혹은 부처의 얼굴 모양이 되고 어떤 때는 보주(寶珠) 모양이 되고, 또 혹은 부처의 눈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부처의 손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보탑(寶塔)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만불두(萬佛頭)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만등(萬燈)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교(金橋)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고(金鼓)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종(金鐘)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신통(神通)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루(金樓)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륜(金輪)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강저(金剛杵)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옹(金甕)의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비녀 모양으로도 된다.  또 혹은 오색 광명(五色 光明)의 모양으로, 혹은 오색 원광(圓光)의 모양으로, 혹은 길상초(吉祥草) 모양으로, 혹은 푸른 연꽃 모양으로도 되었다.  또 혹은 금전(金田)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은전(銀田)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부처의 밭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뇌전(雷電) 모양으로도 되었다.  혹은 여래(如來)가 솟아나오는 모양으로, 혹은 지신(地神)이 솟아나오는 모양으로, 혹은 금봉(金鳳)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오(金烏)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말이 사자(獅子)를 낳는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닭이 봉(鳳)을 낳는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청룡(靑龍)의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백상(白象)의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유저(遊猪) 모양으로도 변하고, 혹은 청사(靑蛇) 모양으로도 변해 보였다.  두 태자(太子)는 항상 골짜기 속의 물을 길어다가 차를 달여 공양하고, 밤이 되면 각각 자기 암자에서 도(道)를 닦았다.

이때 정신왕(淨神王)의 아우가 왕과 왕위(王位)를 다투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은 이를 폐하고, 네 사람의 장군을 보내서 산에 와서 이들 두 태자(太子)를 맞아오게 했다.  이들은 먼저 효명(孝明)의 암자 앞에 이르러 만세를 부르니 오색 구름이 7일 동안 그곳을 덮어 나라 사람들이 그 구름을 찾아 모두 모여 노부(鹵簿)를 벌여놓고 두 태자를 맞아가려 했다.  그러나 보천(寶川)은 울면서 이를 사양하므로 효명을 받들고 돌아가서 왕위에 오르게 했는데, 이가 나라를 여러 해 다스렸다(기記에는 말하기를, 왕위王位에 있은 지 20여 년이라 했다.  이는 대개 죽을 때의 나이가 26세라 한 것을 잘못 전한 것이다.  그가 왕위王位에 있었던 것은 다만 10여 년뿐이었다.  또 신문왕神文王의 아우가 왕위王位를 다투었다고 하였는데, <국사國史>에는 그런 글이 없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신룡(神龍) 원년(이것은 당唐나라 중종中宗의 복위復位한 해로서 신라 성덕왕聖德王 즉위 4년이다) 을사(乙巳) 3월 초나흘에 비로소 진여원(眞如院)을 고쳐 세웠는데 이때 성덕왕(聖德王)은 친히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산에 와서 전당(殿堂)을 세우고, 또 흙으로 문수보살의 소상(塑像)을 만들어서 당(堂)에 모셨다.  그리고 이름있는 중 영변(靈卞) 등 5명으로 하여금 <화엄경(華嚴經)>을 오래 돌려 가면서 읽게 하고 이어 화엄사(華嚴社)를 조직해 오랫동안의 공비(供費)로, 해마다 봄과 가을이면 이 산에서 가까운 주현(州縣)으로부터 창조(倉租) 100석(石)과 정유(淨油) 한 섬을 바치는 것을 정해 놓은 규칙으로 삼았으며, 진여원에서 서쪽으로 6,000보(步)쯤 되는 의니점(矣尼岾) 고이현(古伊峴) 밖에 이르기까지의 시지(柴地) 15결(結)과 밤나무밭 6결(結), 좌위(坐位) 2결(結)을 내어서 장사(莊舍)를 세웠다.

보천(寶川)은 항상 그 영동(靈洞)의 물을 길어다가 마시더니 만년(晩年)에는 육신(肉身)이 공중을 날아 유사강(流沙江) 밖 울진국(蔚珍國) 장천굴(掌天窟)에 이르러 쉬었으므로 여기에서 수구다라니경(隨求陀羅尼經)을 외는 것으로 밤낮의 과업(課業)으로 삼았다.  어느날 장천굴(掌天窟)의 굴신(窟神)이 현신(現身)하여 그에게 말했다.  "내가 이 굴의 신이 된 지가 이미 2,000년이나 되었지만 오늘에야 비로소 수구다라니경의 진리(眞理)를 들었습니다."  말을 마치자 신(神)은 보살계(菩薩戒)를 받기를 청했다.  그가 계(戒)를 받고 나자 그 이튿날 굴도 또한 형체가 없어져 버렸다.  보천(寶川)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그곳에 20일 동안이나 머물고 있다가 오대산 신성굴(五臺山神聖窟)로 돌아갔다.  여기에서 또 50년 동안 참 마음을 닦았더니 도리천(도利天)의 신(神)이 삼시(三時)로 설법(說法)을 듣고, 정거천(淨居天)의 무리들은 차를 달여 올렸으며, 40명의 성인(聖人)은 10척 높이 하늘을 날면서 항상 그를 호위해 주고 그가 가졌던 지팡이는 하루에 세 번씩 소리를 내면서 방을 세 바퀴씩 돌아다니므로 이것을 쇠북과 경쇠로 삼아 수시로 수업(修業)했다.  문수보살이 혹 보천(寶川)의 이마에 물을 붓고 성도기별(成道記별)을 주기도 했다.

보천이 죽던 날, 후일에 산 속에서 행할 국가를 이롭게 할 일을 기록해 두었는데 거기에 이렇게 말했다.  "이 산은 곧 백두산(白頭山)의 큰 산맥으로, 각 대(臺)는 진신이 항상 있는 곳이다.  푸른빛 방위인 동대(東臺) 북각(北角) 아래의 북대(北臺)의 남쪽 기슭 끝에는 마땅히 관음방(觀音房)을 두어서 원상(圓像)의 관음보살과 푸른 바탕에 그린 1만 관음보살상을 모시도록 하라.  그리고 복전승(福田僧) 5명은 낮에는 8권의 <금경(金經)>과 <인왕반야(仁王般若)>·천수주(千手呪)를 읽고, 밤엔 <관음경(觀音經)> 예참(禮懺)을 염송(念誦)하고, 그곳을 원통사(圓通社)라 하라.  붉은빛 방위인 남대(南臺) 남쪽 면에는 지장방(地藏房)을 두어 원상(圓像) 지장보살과 붉은 바탕에 그린 팔대보살(八大菩薩)을 우두머리로 한 1만 지장보살을 모시라.  복전승 5명으로 하여금 낮에는 <지장경(地藏經)>과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읽고, 밤엔 <점찰경(占察經)> 예참(禮懺)을 염송하고 이곳을 금강사(金剛社)라 일컬어라.  흰 빛 바위인 서대(西臺) 남쪽 면엔 미타방(彌陀房)을 두어 원상(圓像) 무량수불(無量壽佛)과 흰 바탕에 그린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를 우두머리로 한 1만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모시게 하라.  여기에는 복전승(福田僧) 5명으로 하여금 낮에는 8권의 <법화(法華)>를 읽고, 밤엔 아미타불(阿彌陀佛) 예참을 염송하고 수정사(水精社)라 일컬어라.  검은 빛 방위인 북대(北臺) 남쪽 면에는 나한당(羅漢堂)을 두어 원상(圓像) 석가불(釋迦佛)과 검은 바탕에 그린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오백나한(五百羅漢)을 모시라.  복전승 5명은 낮엔 <불보은경(佛報恩經)>과 <열반경(涅槃經)>을 읽게 하고 밤엔 <열반경(涅槃經)> 예참(禮懺)을 염송(念誦)케 하고 백련사(白蓮社)라 일컬어라.  누른 빛 방위인 중대(中臺)의 진여원(眞如院)에는 가운데에는 이상(泥像)으로 된 문수보살 부동상(不動像)을 모시고 뒷벽에는 누른 바탕에 그린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우두머리로 한 삼십륙 문수보살을 모시라.  복전승 5명은 낮에는 <화엄경>과 육백반야경(六百般若經)을 읽고, 밤에는 문수보살 예참을 염송하고 이곳을 화엄사(華嚴社)라 일컬어라.  보천암(寶川庵)을 고쳐 세워 화장사(華藏寺)라 하고 원상(圓像) 비로자나삼존(毗盧遮那三尊)과 대장경(大藏經)을 모시라.  복전승 5명은 낮에는 문장경(門藏經)을 읽고 밤에는 화엄신중(華嚴神衆)을 염송할 것이며, 매년 100일 동안 화엄회(華嚴會)를 베풀고 이곳을 법륜사(法輪社)라 일컬어라.  이 화장사(華藏寺)를 오대사(五臺社)의 본사(本寺)로 하여 굳게 지키도록 하라.  여기에는 정행 복전(淨行 福田)에게 명하여 길이 향화(香火)를 계속하게 하라.  그렇게 하면 국왕(國王)은 오래 사시고 백성은 편안할 것이며, 문무(文武)가 모두 화평하고 백곡이 풍성할 것이다.  또 하원(下院)에 문수갑사(文殊岬寺)를 배치하여 사(社)의 도회(都會)로 삼게 하라.  여기에는 복전승(福田僧) 7명으로 하여금 밤낮으로 화엄신중(華嚴神衆)의 예참(禮懺)을 행하고 위의 37명이 재(齋)에 쓰는 비용과 의복의 비용을 하서부(河西府) 도내(道內) 8주(州)의 조세(租稅)로써 공양하는 네 가지 물건의 자금에 충당할 것이다.  이렇게 대대(代代)의 임금이 잊지 않고 받들어 행한다면 다행한 일이겠다."

 

 

 

명주(溟州; 옛날의 해서부河西府) 오대산 보질도 태자전기(五臺山 寶叱徒 太子傳記)

 

신라의 정신태자(淨神太子) 보질도(寶叱徒)는 그 아우 효명태자(孝明太子)와 함께 하서부(河西府)의 세헌각간(世獻角干)의 집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큰 고개를 넘어 각각 1,000명을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에 가서 여러 날 놀다가 태화(太和) 원년 8월 5일에 형제가 함께 오대산(五臺山)으로 들어가 숨었다.  이때 그 무리 중의 시위하는 자들은 두 태자를 찾지 못하고 모두 서울로 돌아갔다.  형 되는 태자는 오대산 중대(中臺) 남쪽 밑에 있는 진여원(眞如院) 터 아래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 터에 풀로 암자를 지어 살고, 아우 태자 효명(孝明)은 북대(北臺)의 남쪽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곳에 역시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다.  형제 두 사람은 부처님에게 예배하고 염불하며 행실을 닦으면서 동·서·남·북·중앙의 다섯 대(臺)에 나가서 공손하게 예배했다.  푸른 빛 방위인 동쪽 대(臺)의 만월형(滿月形)으로 된 산에는 관음보살의 진신(眞身) 1만이 항상 있고, 붉은 빛 방위인 남쪽 대(臺)의 기린산(麒麟山)에는 팔대보살(八大菩薩)을 우두머리로 한 1만 지장보살(地藏菩薩)이 항상 있고, 흰 빛 방위인 서쪽 대(臺)의 장령산(長嶺山)에는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를 우두머리로 한 1만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항상 있고, 검은 빛 방위인 북쪽 대(臺)의 상왕산(相王山)에는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500 대아라한(大阿羅漢)이 항상 있고, 누른 빛 방위인 중앙 대(臺)의 풍로산(風盧山)은 또 지로산(地爐山)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는 비로자나(毗盧遮那)를 우두머리로 한 1만 문수보살(文殊菩薩)이 항상 있다.  또 진여원(眞如院)에는 문수보살이 매일 이른 아침이면 삼십륙형(三十六形; 대산오만진신전臺山五萬眞身傳에 나온다)으로 화하여 나타났다.  두 태자는 함께 예배하고, 날마다 이른 아침이면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가 차를 달여서 1만 진신(眞身)의 문수보살에 공양했다.

이때 정신태자(淨神太子)의 아우 부군(副君)이 신라에 있어 왕위(王位)를 다투다가 죽음을 당하니 나라 사람들이 장군 네 명을 보내서 오대산(五臺山)에 이르러 효명태자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바로 이때 오색 구름이 오대산에서부터 신라에까지 뻗쳐 7일 동안이나 밤낮으로 빛을 발했다.  나라 사람들은 그 빛을 찾아 오대산에 이르러 두 태자를 모시고 본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보질도태자(寶叱徒太子)는 울면서 돌아가지 않으려 하니 효명태자를 모시고 돌아가 왕위(王位)에 오르게 했다.  그가 왕위에 있은 지 20여 년인 신룡(神龍) 원년(705) 3월 8일에 진여원을 처음 세웠다 한다.

보질도태자는 항상 골짜기에 신령스러운 물을 마시더니 육신(肉身)이 공중을 떠서 유사강(流沙江)에 이르러 울진대국(蔚珍大國)의 장천굴(掌天窟)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다시 오대산 신성굴(神聖窟)로 돌아와 50년 동안이나 도를 닦았다고 한다.  오대산은 바로 백두산(白頭山)의 큰 줄기로서 각 대(臺)에는 진신이 항상 있다고 한다.

 

 

 

대산월정사(臺山月精寺) 오류성중(五類聖衆)

 

절 안에 전해 오는 고기(古記)를 상고하여 보면 이렇게 말했다.  자장법사(慈藏法師)는 오대산(五臺山)에 처음 이르러 진신(眞身)을 보려고 산기슭에 모옥(茅屋)을 짓고 살았으나, 7일 동안이나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묘범산(妙梵山)으로 가서 정암사(淨巖寺)를 세웠다.  그 뒤에 신효거사(信孝居士)라는 이가 있었는데 혹은 유동보살(幼童菩薩)의 화신(化身)이라고도 했는데 그의 집은 공주(公州)에 있고 효성을 다하여 어머니를 봉양했다.  어머니는 고기가 아니면 먹지 않으므로 거사는 고기를 구하려고 산과 들을 돌아다니다가  길에서 학(鶴) 다섯 마리를 보고 활로 쏘나, 학 한 마리가 날개의 깃 한 조각을 떨어뜨리고 갔다.  거사는 그것을 집어 그것으로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보았더니 사람이 모두 짐승으로 보였다.  이에 고기는 얻지 못하고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서 어머니께 바쳤다.

그 후에 그는 중이 되어 자기 집을 내놓아서 절을 만들었는데 지금의 효가원(孝家院)이다.  거사는 경주(慶州) 경계로부터 하솔(河率)에 이르러 깃으로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보니 사람들이 모두 사람의 모양으로 보이므로 그곳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길에서 늙은 부인을 보고, 살 만한 곳을 물었더니 그 부인이 말했다.  "서쪽 고개를 넘으면 북쪽으로 향한 골짜기가 있는데 거기가 살 만합니다."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

거사는 이것이 관음보살(觀音菩薩)의 가르침인 것을 알고, 곧 성오평(省烏坪)을 지나서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처음 모옥(茅屋)을 지은 곳으로 들어가 살았다.  이윽고 중 다섯 명이 오더니 말한다.  "그대가 가지고 온 가사(袈裟) 한 폭은 지금 어디 있는가."  거사가 영문을 몰라하자 중이 또 말한다.  "그대가 집어서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본 그 학의 깃이 바로 가사이다."  거사가 그 깃을 내주자, 중은 그 깃을 가사의 뚫어진 폭 속에 갖다 대니 서로 꼭 맞았는데, 그것은 깃이 아니고 베였다.  거사는 다섯 중과 작별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들이 다섯 성중(聖衆)의 화신(化身)임을 알았다.

이 월정사(月精寺)는 처음에 자장법사가 모옥을 지었으며, 그 다음에는 신효거사(信孝居士)가 와서 살았고, 그 다음에는 범일(梵日)의 제자인 신의두타(信義頭陀)가 와서 암자를 세우고 살았으며 뒤에 또 수다사(水多寺) 장로(長老) 유연(有緣)이 와서 살았다.  이로부터 점점 큰 절을 이루었다.  절의 다섯 성중(聖衆)과 9층으로 된 석탑(石塔)은 모두 성자(聖者)의 자취이다.

상지자(相地者)가 말했다.  "나라 안의 명산(名山) 중에서도 이곳이 가장 좋은 곳이니 불법(佛法)이 길이 번창할 곳이다."

 

 

남월산(南月山; 또는 감산사甘山寺라고도 한다)

 

이 절은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0리 가량 되는 곳에 있다.  금당주미륵존상화광(金堂主彌勒尊像火光) 후기(後記)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개원(開元) 7년 을미(乙未; 719) 2월 15일에 중아찬(重阿飡) 전망성(全忘誠)이 그의 죽은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과 죽은 어머니 관초리(觀肖里) 부인을 위해서 공손하게 감산사(甘山寺)와 석미륵(石彌勒) 하나를 만들고, 겸하여 개원(愷元) 이찬(伊飡)과 아우 간성(懇誠) 소사(小舍)·현도사(玄度師), 누이 고파리(古巴里), 전처(前妻) 고로리(古老里), 후처(後妻) 아호리(阿好里)와, 또 서형(庶兄) 급막(及漠) 일길찬(一吉찬), 일당(一幢) 살찬(薩찬), 총민(聰敏) 대사(大舍)와 누이동생 수힐매(首힐買) 등을 위하여 이러한 착한 일을 했다.  어머니 관초리 부인이 고인(故人)이 되자 동해유우 변산야(東海攸友 邊散也)라 했다."(고인성지古人成之 이하는 글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옛 글 그대로 적어둘 뿐이다.  이 아래도 마찬가지다)

미타불화광(彌陀佛火光) 후기(後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중아찬(重阿飡) 김지전(金侍全)은 일찍이 상의(尙衣)로서 임금을 모시고 또 집사시랑(執事侍郞)으로 있다가 67세에 벼슬을 도로 바치고 집에서 한가로이 지냈다.  이때 국주(國主) 대왕(大王)과 이찬(伊飡) 개원(愷元), 죽은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 죽은 어머니, 죽은 동생, 소사(小舍) 양성(梁誠), 사문(沙門) 현도(玄度), 죽은 아내 고로리(古老里), 죽은 누이동생 고파리(古巴里), 또 아내 아호리(阿好里) 등을 위해서 감산(甘山)의 장전(莊田)을 내놓아 절을 세웠다.  또 석미타(石彌陀) 하나를 만들어 죽은 아버지 인장 일길간을 위하여 모셨는데, 그가 고인이 되자 동해유우 변산야(東海攸友 邊散也)라 했다."(제계帝系를 상고해 보면, 김개원金愷元은 태종太宗 김춘추金春秋의 여섯째 아들 개원각간愷元角干이며, 문희文熙가 낳은 이다.  성지전誠志全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의 아들이다.  동해유우東海攸友는 필시 법민왕法敏王을 동해東海에 장사지낸 것을 말한 것인 듯싶다)

 

 

천룡사(天龍寺)

 

동도(東都)의 남산(南山) 남쪽에 봉우리 하나가 우뚝 솟아 있는데 세속(世俗)에서는 고위산(高位山)이라 한다.  산 남쪽에 절이 있는데 속칭(俗稱) 고사(高寺), 또는 천룡사(天龍寺)라고 한다.

<토론삼한집(討論三韓集)>에는 이렇게 말했다.  "계림(鷄林)에는 두 줄기의 객수(客水)와 한 줄기의 역수(逆水)가 있는데 그 역수와 객수의 두 근원이 천재(天災)를 진압하지 못하면 천룡사(天龍寺)가 뒤집혀 무너지는 재앙이 생긴다."

속전(俗傳)에는 이렇게 말한다.  "역수는 이 고을 남쪽 마등오촌(馬等烏村)의 남쪽을 흐르는 내가 이것이다.  또 이 물의 근원이 천룡사에서 시작되는데, 중국에서 온 사자(使者) 악붕귀(樂鵬龜)가 와서 보고 말하기를, '이 절을 파괴하면 이내 나라가 망할 것이다.'"

또 서로 전하는 말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 단월(檀越)에게 딸 둘이 있어서 이름을 천녀(天女)·용녀(龍女)라 하였는데, 부모가 두 딸을 위해서 절을 세우고 딸들의 이름의 첫 글자를 따서 천룡사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곳은 경지(境地)가 이상하고 불도(佛道)를 돕는 곳이었는데 신라 말년에 파괴되어 이미 오래되었다.  중생사(衆生寺)의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젖을 먹여 키운 최은함(崔殷함)의 아들 승로(承魯)가 숙(肅)을 낳고 숙(肅)이 시중(侍中) 제안(齊顔)을 낳았는데, 제안(齊顔)이 이 절을 중수(重修)하여 없어졌던 절을 일으켰다.  이에 석가만일도량(釋迦萬日道場)을 설치하고, 조정의 명을 받았으며, 다시 신서(信書)와 원문(願文)까지 절에 남겨 두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자 절을 지키는 신(神)이 되어 자못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을 많이 나타냈다.

그 신서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단월인 내사시랑 동내사문 하평장사주국(內史侍郞 同內史門 下平章事柱國) 최제안(崔齊顔)은 쓰노라.  경주(慶州) 고위산(高位山)의 천룡사가 파괴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이에 제자 최제안은 특별히 성수(聖壽)가 무강하시고 국가가 편안하고 태평하기를 원해서 전당(殿堂)·낭각(廊閣)과 방사(房舍)·주고(廚庫)를 모두 갖추어 이룩하고, 또 석조불(石造佛)과 이소불상(泥塑佛像) 몇 개를 만들어 석가만일도량을 열었다.  이미 국가를 위해서 수리하여 세웠으니 조정에서 절의 주지(住持)를 정해 보내는 것이 옳은 일이다.  하지만 이 주지를 교대할 때에는 도량(道場)의 중들이 안심하고 지낼 수가 없다.  희사(喜捨)한 토지를 가지고 사원(寺院)을 충족하게 하는 것을 보면, 팔공산(八公山)의 지장사(地藏寺)와 같은 절은 희사한 토지가 200결(結)이었고, 비슬산(毗瑟山)에 있는 도선사(道仙寺)는 20결이었고, 서경(西京) 사면에 있는 산사(山寺)들도 각기 20결씩이었으며, 이들은 모두 유직(有職)·무직(無職)을 물론하고 모름지기 계(戒)를 갖추고 재주가 높은 이를 뽑아서 절의 중망(衆望)에 의하여 여러 차례를 계속하여 주지로 삼아 분향(焚香)하고 도 닦는 것을 상례(常例)로 삼았다.  제자 제안(齊顔)은 이 풍습을 듣고 기뻐하여 우리 천룡사에서도 역시 절의 많은 중들 가운데서 재주와 덕이 함께 뛰어난 고승(高僧)으로 동량(棟樑)이 될 만한 사람을 뽑아서 주지로 삼아 길이 분향(焚香) 수도(修道)하게 하고자 한다.  이에 갖추어 글로 기록하여 강사(剛司)에게 맡겨 두는 것이니 이때부터 비로소 주지를 두게 되었다.  유수관(留守官)은 공문(公文)을 받아 도량의 여러 중들에게 보여 모두를 각각 알도록 할 것이다.  중희(重熙) 9년 6월 일에 관직(官職)을 갖추어 위와 같이 서명(署名)한다."

상고해 보면 중희(重熙)는 거란(契丹) 흥종(興宗)의 연호이며, 본조(本朝) 정종(靖宗) 7(6)년인 경신년(庚辰年; 1040)이다.

 

 

무장사(무藏寺) 미타전(彌陀殿)

 

서울 동북쪽 20리 쯤 되는 암곡촌(暗谷村) 북쪽에 무장사(무藏寺)가 있으니, 이것은 신라 제38대 원성대왕(元聖大王)의 아버지 대아간(大阿干) 효양(孝讓), 즉 추봉(追封)된 명덕대왕(明德大王)의 숙부 파진찬(波珍飡)을 추모(追慕)해서 세운 것이다.  그윽한 골짜기가 몹시 험준해서 마치 깎아세운 듯하다.  그곳은 깊고 어두워 저절로 허백(虛白)이 생길 것이니, 이야말로 마음을 쉬고 도(道)를 즐길 만한 신령스러운 곳이었다.  절의 위쪽에 아미타(阿彌陀)의 고전(古殿)이 있다.  곧 소성대왕(昭成大王; 혹은 昭聖大王)의 비(妃) 계화왕후(桂花王后)가, 대왕(大王)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왕후는 근심에 차서 황황하여 어찌할 줄 모르고 지극히 슬퍼하여 피눈물을 흘리고 괴로워했다.  이에 그는 밝고 아름다운 일을 돕고 명복을 빌 것을 생각했다.  이때 서방(西方)에 아미타(阿彌陀)라는 대성(大聖)이 있어 지성으로 그를 믿으면 잘 구원하여 맞아 준다는 말을 듣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찌 나를 속이겠느냐."하고는 이에 육의(六衣)의 화려한 옷을 희사하고 구부(九府)에 저장해 두었던 재물을 다 내어 이름난 공인(工人)들을 불러서 아미타불상(阿彌陀佛像) 하나를 만들게 하고, 아울러 신중(神衆)도 만들어 모셨다.

이보다 앞서 이 절에는 늙은 중 하나가 있었는데 어느 날 꿈에, 진인(眞人)이 석탑(石塔) 동남쪽 언덕 위에 앉아서 서쪽을 향하여 대중을 위해서 설법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이곳은 반드시 불법이 머무를 곳이다."라고 생각하고 마음속에 숨겨 두고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곳은 원래 바위가 험하고 시냇물이 급하게 흐르므로 공인(工人)들은 돌아다보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좋지 못한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터를 닦을 때에는 평탄한 곳을 얻어서 집을 세울 만하여 확실히 신령스러운 터와 같으니 보는 이들은 깜짝 놀라 좋다고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근고(近古)에 와서 미타전(彌陀殿)은 허물어지고 절만 홀로 남아 있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태종(太宗)이 삼국(三國)을 통일한 뒤에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 속에 감추어 두었기 때문에 무장사(무藏寺)라고 한다"고 한다.

 

 

백엄사(伯嚴寺) 석탑사리(石塔舍利)

 

개운(開運) 3년 병오(丙午; 946) 10월 29일 강주계(康州界) 임도대감주첩(任道大監柱貼)에 이렇게 말했다.  "선종(禪宗)의 백엄사(伯嚴寺)는 초팔현(草八縣; 지금의 초계草溪)에 있고, 절의 중 간유상좌(侃遊上座)는 나이 39세라 했고, 절을 처음 세운 시기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고전(古傳)에는 이렇게 말했다.  전대(前代)인 신라 때에 북택청(北宅廳) 터를 희사해서 이 절을 세웠는데, 중간에 오래 폐지되었다가 지난 병인년(丙寅年; 1026)에 사목곡(沙木谷) 양부(陽孚) 스님이 고쳐 짓고 그 주지가 되었다가 정축년(丁丑年; 1037)에 죽었다.  을유년(乙酉年; 1045)에 희양산(曦陽山)의 긍양(兢讓) 스님이 와서 10년 동안 살다가 을미년(乙未年; 1055)에 다시 희양으로 돌아갔다.  그때 신탁(神卓) 스님이 남원(南原) 백암수(白암藪)에서 이 절에 와서 전에 있던 법대로 주지(住持)가 되었다.  또 함옹(咸雍) 원년(1065) 11월에 와서 이 절의 주지인 득오미정대사(得奧微定大師) 석수립(釋秀立)이 절의 상규(常規) 10조(條)를 정했다.  또한 새로 5층 석탑을 세우고 진신(眞身) 불사리(佛舍利) 42알을 가져다 모셨다.  또 사재(私財)로 계를 모아서, '해마다 여기에 공양할 일, 특히 이 절의 법을 지키던 경승(敬僧)이었던 엄흔(嚴欣)·백흔(伯欣)의 두 명신(明神)과 근악(近嶽) 등 3위(位) 앞에 계를 모아 공양할 일(세속에 전하기는 엄흔嚴欣·백흔伯欣 두 사람이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었기 때문에 절 이름을 백엄사伯嚴寺라 했으며, 이에 호법신護法神을 삼았다고 했다), 금당(金堂) 앞의 나무주발에 매달 초하룻날 공양미(供養米)를 갈아놓을 일' 등을 정했다.  이하 조목은 기록하지 않았다.

 

 

영취사(靈鷲寺)

 

절의 고기(古記)에 이렇게 말했다.  "신라 진골(眞骨) 제31대왕 신문왕(神文王) 때인 영순(永淳) 2년(683; 본문本文에는 원년이라고 했으나 잘못이다)에 재상 충원공(忠元公)이 장산국(장山國; 곧 동래현東萊縣이니 또한 내산국萊山國이라고도 한다) 온천에서 목욕하고 성으로 돌아올 때 굴정역(屈井驛) 동지야(桐旨野)에 이르러서 쉬었다.  여기에서 문득 보니 한 사람이 매를 놓아서 꿩을 쫓게 하자 꿩은 날아서 금악(金嶽)을 지나 어디로 갔는지 종적이 없다.  방울소리를 듣고 찾아 굴정현(屈井縣) 관청 북쪽 우물가에 이르니 매는 나무 위에 앉아 있고 꿩은 우물 속에 있는데 물이 마치 핏빛 같았다.  여기에서 꿩은 두 날개를 벌려 새끼 두 마리를 안고 있고, 매도 역시 그것을 측은하게 여겨서인지 감히 꿩을 잡지 않고 있다.  공(公)이 이것을 보고 측은히 여기고 감동하여 그 땅을 점쳐 보니 가히 절을 세울 만하다고 한다.

서울로 돌아와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어 그 현청(縣廳)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곳에 절을 세워 이름을 영취사(靈鷲寺)라고 했다."

 

 

유덕사(有德寺)

 

신라 대부각간(大夫角干) 최유덕(崔有德)이 자기 사삿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고 이름을 유덕사(有德寺)라고 했다.  그의 먼 자손 삼한공신(三韓功臣) 최언위(崔彦휘)가 유덕(有德)의 진영(眞影)을 여기에 걸어 모시고 또 비도 세웠다고 한다.

 

 

오대산문수사(五臺山文殊寺) 석탑기(石塔記)

 

뜰 가에 있는 석탑(石塔)은 대개 신라 사람이 세운 것이다.  만든 제도가 비록 순박하여 교묘하지는 못하지만 자못 영험이 있어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그 중에서 한 가지 사실을 여러 옛 노인에게서 들었는데 이러하다.  "옛날에 연곡현(連谷縣) 사람이 배를 타고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탑 하나가 배를 따라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 그림자를 보자 물속 고기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난다.  이 때문에 어부(漁夫)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해서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여 그림자를 따라서 찾아가니 이 탑이었다.  이에 도끼를 들어 그 탑을 쳐부수고 갔는데, 지금 이 탑의 네 귀퉁이가 모두 떨어진 것은 이 까닭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놀라서 탄식해 마지않았다.  하지만 그 탑의 위치가 조금 동쪽으로 당겨져서 중앙에 있지 않은 것을 괴상히 여겨서 현판 하나를 쳐다보니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비구(比丘) 처현(處玄)이 일찍이 이 절에 있으면서 탑을 뜰 가운데로 옮겼더니 그 후 30여 년 동안 잠잠히 아무 영험도 없었다.  일자(日者)가 터를 구하려고 여기에 와서 탄식하기를 '이 뜰 가운데는 탑을 세울 곳이 아닌데 어찌해서 동쪽으로 옮기지 않는가'했다.  이에 여러 중들이 깨닫고 다시 옛 자리로 옮겼으니 지금 서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나는 괴이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부처의 위신(威神)이 그 자취를 나타내어 만물을 이롭게 하는 것이 이같이 빠른 것을 보고서 어찌 불자(佛子)가 된 사람으로서 잠자코 말하지 않을 수 있으랴.  정풍(正豊) 원년 병자(丙子; 1156) 10월 일에 백운자(白雲子)는 쓰노라.

 

 

제 4권

 

 

삼국유사 제 4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