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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조선상고사

              조선 상고사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著

 
              
단재 신 채 호(丹齋 申采浩, 1880-1936)
                                   
숙명여대 한국사학과 교수   이만열

최근 백여년의 역사를 돌이켜 볼때, 우리나라에는 참으로 위대한 많은 선조들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런 분들 중에는 나라가 어려운 지경에 빠졌을 때 자신의 한 몸을 던져 나라와 민족을 구하려 한 독립운동가도 있고, 사상가로, 학자로 혹은 예술가로 활동한 분들도 있다. 그런 분들 중에서도, 우리나라의 역사를 연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그 자신이 독립운동에 직접 뛰어들어 조국의 광복을 위해 희생된 분이 있으니 신채호 선생이 바로 그분이다.

신채호는 근대 우리나라가 낳은 위대한 선각자의 한 분이다. 그는 한말 민족적으로 대단히 불안한 시기에 태어나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교육 언론 역사연구 활동에 종사하였고, 나라의 주권이 일본에 빼앗긴 일제하에서는 해외로 망명하여 민족사 연구와 상해임시정부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결국에는 감옥에서 일생을 마친 분이다.

신채호는 1928년 4월에 한국인을 중심으로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북경회의'를 조직하는 데에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회의에서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의 선전기관을 설립하고 일제의 관공서를 폭파하기 위해 폭탄제조소를 설립하기로 결의하였다. 신채호는 잡지발행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려고 북경우무(郵務)관리국 외국위체계(外國爲替係)에 근무하는 대만 사람 임병문과 협의하고 외국위체(換)를 위조하여 그것을 찾으려고 5월 8일경 대만 기륭항(基隆港)에 상륙하려다가 수상서원(水上署員)에게 체포되었다.

대련(大連)으로 호송된 그는 7개월간 미결감에서 많은 고통을 받은 후에 재판에 회부되었다. 신채호는 위체를 위조한 '사기행각'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우리 동포가 나라를 찾기 위하여 취하는 수단은 모두 정당한 것이니 사기가 아니며 민족을 위하여 도둑질을 할지라도 부끄럼이나 거리낌이 없다"고 답변하였다고 한다. 여기서도 그의 무정부주의운동이 민족독립운동의 한 방편임을 알 수 있다.

그는 1929년 5월 9일 10년형의 언도를 받고 중사상범으로 다루어져 여순(旅順)감옥의 독방에 수감되어 복역하였다. 1935년 그의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형무소 당국에서는 보호해 줄 사람이 있으면 출감시키겠다고 통고하였다. 친지들은 그의 친구이자 일가벌되는 친일파 부호의 보증으로 가출옥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옥중에 있던 그는 친일파에게 몸을 맡길 수 없다는 대의를 내세워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의 절의를 마지막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일화 한토막이다.

신채호가 수감 중에 있을 때, 그의 친구들은 그의 국사연구 업적을 세상에 알리려고 노력하였다. 홍명희 등은 1924-25년에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여러 논문들을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라는 이름으로 1930년 6월 15일에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출간하였다. 그리고 일찍부터 신채호의 학문과 절의를 흠모하고 있던 안재홍은 <조선사(朝鮮史, 뒷날 '조선상고사'라는 이름으로 알려짐)>를 1931년 6월 10일부터 10월 14일까지 103회에 걸쳐 당시 자신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이어서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를 1931년 10월 15일부터 12월 30일까지, 그리고 1932년 5월 27일에서 31일까지 모두 40회에 걸쳐 역시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다.

1936년 2월 18일, 그는 홀로 있던 감방에서 뇌일혈로 쓰러졌다. 사흘 뒤인 2월 21일(음 1월 28일) 오후 4시 20분, 당대의 가장 위대한 근대민족주의 역사가요 행동적인 독립운동가였던 신채호는 이국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서 아무도 지켜보지 못한 채 외롭게 그의 평생을 순국의 제물로 거룩하게 바치니, 향년이 57세였다. - - -신채호 그는 누구인가? 계속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