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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단고기

한단고기 태백일사 마한세가

  <태백일사>

                   마 한 세 가  (상)

곰무리와 범무리가 서로 다투던 옛날 한웅천왕께서 아직 군림하시기 전 묘한은 구황의 하나였다. 옛적 우리 한족(桓族)이 유목 농경하던 때에 신시의 가르침이 열렸다. 땅으로써 다스리기 위하여 적을 하나로 하고 ,음은 십거를 세우고 양은 무궤를 만들고 충(衷)은 여기에서 생했다. 봉황(성스런 왕이 출현할때 나타난다는 성스런 새로서,봉은 수컷이고, 황은 암컷을 뜻한다.옛부터 동양의 상징적 동물 가운데 봉황은 동방족인 동이족을 상징하는 동물이고, 용은 서반족 즉 중국민족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중국 또한 왕들중에 봉황으로 상징되는 왕들은 동이족이라한다. 여기서 특이할 만한 사항은 중국의 왕들중 거의가 용을 상징하는데 삼황오제는 봉황을 상징한다는 점이다.)은 날아 모여들어 백아강에 살고 선인은 법수교로 오고 갔으니 법수는 선인의 이름이다.

사람과 문물이 어느덧 풍숙하였으니 때마침 이때에 자부선생께서 칠회제신의 책력(칠회는 오행<金,木,水,火,土>에 음양<月,日>을 보태 오늘날의 일주일을 뜻하는 것으로 추측)을 만드시고 삼황내문을 천폐(궁전의 층계)에 진상하니, 천왕께서 이를 칭찬하였다. 삼청궁을 세우사 그곳에 거하시니, 공공,헌원,창힐,대요의 무리가 모두 여기 와 여기서 배웠다. 이에 윷놀이를 만들어 이로써 환역을 강연하니 대저 신지 혁덕(대저 신지는 고대의 문자를 주관 하는 벼슬이름, 혁덕은 그관리의 이름)이 적은 바로 천부의 유의 였다. 옛날 한웅천왕께서는 천하가 크다함을 아시고 한 사람이 능히 교화할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하시며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리사 곡식을 주관하게 하고, 생명을 주관하고 형벌을 주관하며 병마와 선악을 주관하게하고, 무릇 인간 세상의 360여사를 주관케 하시더라, 책력을 만드사 365일 5시간 48분 46초를 일년으로 하니 이것이 바로 삼신일체의 윗어른이 남긴 법이다.

고로 삼신으로써 가르침을 세워 뜻을 펴는 기치로 삼았다. 그 글에 가로대 '일신은 충에 내리고 성은 광명으로 통하니 세상에 있으면서 이치에 따라 교화하여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고 했다. 이때 부터 소도가 세워지는 곳마다 산의 평상의 웅상(옛글에 의하면 지나족은 암컷을 뜻하고 동이족은 수컷을 뜻한다한다. 그래서 중국은 고대에 자신들의 왕을 동이족으로 하였다한다. 하지만 중국이 이를 수치스러워하여 이것의 해석에 대한 논쟁이 아직까지 일고 있다고 한다.)을 보게 되었다. 산꼭대기에는 어디나 사방에서 온 백성들이 있었는데 동그랗게 둘러 부락을 이루었으니 네 집이 한 우물을 썼으며, 20분의 1세를 냈다. 해마다 풍년이 드니 언덕과 산에는 곡식이 쌓이고 이를 즐겨 춤추며 태백환무의 노래를 지어 이를 전했다.

계속하여 치우씨(bc 2707- )가 있었는데 구야를 만들어서, 광석을 캐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들고, 또 돌을 날리는 기계도 만들었다. 이에 천하는 감히 그에게 대적하는 자가 없었다. 때에 헌구가 굴복치 않으니 치우는 몸소 군대를 이끌고 출동하여 이를 크게 징벌코자 탁록에서 싸웠다. 탁록은 지금 산서성의 대동부이다. 싸움이 있기전에 탁록이 격문을 만들어 82종당의 대인을 소환했다. 먼저 치우의 형상을 그려 분포하더니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게 하고는 가로대 ,

'그대 헌구야! 짐의 고함을 밝히 들으렸다. 해의 아들이라 함은 오직 짐 한사람뿐으로 만세를 위하고 공동생활의 옳음을 위해 인간의 마음을 닦는 맹세를 짓노라. 그대 헌구여! 우리의 삼신일체의 원리를 모독하고 삼윤구서의 행을 게을리 하였으니 삼신은 오래도록 그 더러운 것을 싫어하고 짐 한사람에게 명하여 삼신의 토벌을 행하도록 하였으니 그대 일찌감치 마음을 잡아서 행동을 고칠 것이다. 자성은 너에게서 찾을 것이니 그대의 머리 속에 있음이로다. 만약 명령에 순응치 않는다면 하늘과 사람이 함께 진노하여 그 목숨이 제 목숨이 아닐 것이다.

네 어찌 두렵지 않은가?' 라고 했다. 이에 헌구가 평정되어 복종하니 천하는 우리를 기둥처럼 여기더라. 때에 유위자가 묘향산에 숨어 살았으니 그의 학문은 자부선생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지나가다가 웅씨군을 알현하니 웅씨군은 '나를 위해서 도를 말하라'고 청했다.대답해 가로대

'도의 대원은 삼신에서 나오나니 도란 도라고 할 것도 없으며 그 나타나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도라고 할 것이 있다면 나타날 수가 없는 것이며 나타남이 있다면 역시 도는 아닌 것이지요. 도는 항상 같은 것이 없고 때에 따르는 것이니 이에 도의 귀함이 있는 것일라, 나타남도 항상 똑같은 모양으로 나타나지 않아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나니 이에 나타남의 귀함이 있는 것이요, 그 겉모양이 크지도 않으며 그 속이 작지도 않는 것이 도니 이에 감싸지 못함이 없는 것입니다. 하늘에는 기틀이 있으니 내 마음의 기틀에서 볼 수가 있고, 땅에는 모양이 있으니 내 몸이 모양에서 볼 수가 있으며 , 사물에는 주관함이 있으니 내 기의 주관함에서 알 수가 있음이라.

이에 하나를 잡아도 셋을 포함함이며 셋을 모으면 하나도 돌아감인 것입니다. 일신이 내려옴은 사물을 다스림이니 바로 천일이 물을 낳은 이치요, 성품이 광명에 통함은 삶의 다스림이니 바로 지이가 붓을 낳은 이치요, 세상에 교화를 폄은 마음을 다스림이니 바로 인삼이 나무를 낳은 이치인 것입니다. 대개 대시에 삼신님은 삼계를 만드셨으니, 물은 하늘을 본뜨고 불은 땅을 본 떴으며 나무는 사람을 본 뜬 것입니다. 무릇 나무라는 것은 뿌리를 땅에 두고 하늘을 향하였으니 역시 사람도 땅을 밟고 서서 능히 하늘을 대신함이라'하니 임금께서는 '옳을시고 그 말씀이여!' 하시더라.

단군왕검은 천하를 평정하시더니 삼한으로 나누어 관경을 만드시고 곧 웅백다를 봉하여 마한이라고 하였다. 달지국에 도읍하였으니 역시 백아강이라 고도 불렀다. 마한산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하니 천왕께서 조서를 내려 가로대,

'사람이 거울을 보면 그 곱고 미운 것이 저절로 나타난다. 백성들이 임금을 보면 그 치란은 정치에 나타난다. 거울을 보면 반드시 먼저 형체를 보고 임금을 보면 반드시 먼저 정치를 보느니라.' 라고 하니 마한은 글을 올려 가로대

'거룩할 손 그 말씀이시여! 성주는 능히 대중의 뜻에 따르는 고로 길이 넓고, 무능한 임금은 즐겨 독선을 쓰는 고로 길이 좁사오니, 속으로 반성하여 게으름이 없을 것입니다.' 고 하였다.

단군왕검 51년 천왕은 운사인 배달신에게 명하여 삼랑성을 혈구에 쌓고 제천의 단을 마리산에 만들었으니, 강남의 장정 8000인을 선발하여 이들에게 일을 하도록 하였다. 신유 3월 천왕은 몸소 마리산으로 행차하여 하늘에 제사지냈다. 웅백다가 재위 55년에 죽으니 아들 노덕리가 즉위하였다. 노덕리가 죽으니 그의 아들 불여래가 즉위하였다. 이 때가 단군부루 12년 임자 가을 10월이다. 명을 내려 칠회의 책력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듬해 봄 3월 처음으로 백성들을 가르치고 버들을 백아강에 심고 도정을 지었다. 병진년에 삼일신고의 비를 새겨 남산에 세우게 하다. 경신년에 도전을 일구고 기해년에 소도를 세우고 삼윤구서의 가르침을 폈다. 이에 치화가 크게 행해졌다.

단군가륵 제 3년 불여래가 죽고 아들 두라문이 즉위했다. 을사년 9월 천왕께서 칙서를 내려 이렇게 말하였다.

'천하의 대본은 우리 마음의 중일에 있나니 사람이 중일을 잃으면 일은 성취되지 않는다. 물건으로 서 중일을 잃으면 물체는 곧 뒤죽박죽이 되나니 임금의 마음은 오직 위태롭고 뭇중생의 마음은 오직 어두울 뿐이다.전인은 통찰하여 골고루 한 가운데에 서서 잃는 일 없게 할 지며, 그런 후에라야 마침내 하나도 평정되나니라. 유중유일의 도는 아비가 되어서는 마땅히 자애롭고, 자식이 되어서는 마땅히 효성스럽고, 임금된 자로서는 마땅히 의로워야 하고, 신하된 자로서는 마땅히 충성스러워야 하며, 부부된 자로서는 마땅히 서로 공경해야 할지며, 형제된 자는 마땅히 서로 사랑해야 할지며, 노소는 마땅히 순서가 있어야 할지며, 친구된자는 반드시 신의가 있어야 할 지니라. 식신,공검,수학,연업,계지,발능,홍익에 서로 힘쓰며 성기,자유,개물, 평등하면 천하는 절로 맡겨도 된다. 마땅히 국가의 대통을 존중하여 나라 법을 지키고 각자가 맡은 바 직책에 힘써서 부지런히 산업에 힘쓸 것이다. 나라에 일이 생겼을 때는 몸을 던져 옳음을 따르며 힘껏 앞으로 나아간다면 만세의 무강한 나라를 이룸에 큰 힘이 되는 것이다. 이는 짐이 그대들 국인과 더불어 절절하게 행하여 바꾸는 일 없을 것이라. 성현 모두의 지극한 뜻이나니 다 받들어 공경할 것인저' 라하였다.

두라문이 죽었다. 아들 을불리가 즉위하였다. 을불리가 죽으니, 아들 근위지가 즉위하였다. 이때가 단군 오사구의 을유년이다. 경인년에 정정 30인 을 파견하여 선박을 살수에서 건조케 하였다. 곧 진한의 남해안이다. 임자년에 한은 명령을 받고 상춘에 들어가 구월산에서 삼신님께 제사지내는 것을 도왔다. 10월에 이궁을 모란봉의 중턱에 세워 천왕이 순수하다가 머무르는 장소로 삼다. 3월이 될 때마다 마한에 명하여 열병하도록하고 사냥하게 했다. 16일에 기린굴에 제천하고 조의를 하사하여 가관의 예를 행하였으며 가무백회 끝에 파하였다.

갑인년에 근우지가 죽자 아들 을우지가 즉위하였고, 을우지가 죽으니 동생 궁호가 즉위하였다. 궁호가 죽었는데 후사가 없으니 두라문의 동생인 두라시의 증손 막연이 명을 받아 마한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무신년에 단군 우서한은 백아강에 머무르면서 명하여 밭을 나누어 땅을 주어 네 가문을 한구로 만들게 하시고, 각 구는 일승을 내서 향토를 지키도록 하였다. 단군 노을제의 임인년에 막연이 죽었으니 동생 아화가 즉위하였다. 때에 단군 도해가 바햐흐로 개화할 것을 결심하고 평등하게 다스렸다. 명을 내려 대시전을 대성산에 세우고 큰다리를 대동강에 세웠다. 삼홀로 전을 삼아 경당을 설하여 칠회제신의 의식을 정하고 삼윤구서의 훈을 강론하게 하니, 환도의 문명이 번성함은 먼 나라까지 들려서 하나라의 왕 근이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 정사년 아화가 죽으니 아들 사리가 즉위하였다. 단군 아한의 을묘년에 사리가 죽으니 동생 아리가 즉위하였다. 단군 고불제의 을유년에 아리가 죽고 아들 갈지가 즉위하였다. 갈지가 죽으니 단군 대음제의 무신년에 갈지의 아들 을아가 즉위하였다. 기유년에 탐모라 사람이 말 30필을 바쳐왔다.

을아가 죽고 단군 여을제의 신미년에 아들 두막해가 즉위하였다. 임신년 3월16일 몸소 마리산에 행차하여 삼신을 참성단에서 제사하였으니, 하나라 왕 외임이 사신을 파견해 제사를 도왔다.

두막해가 죽으니 기축년에 아들 독로가 즉위하였다. 독로가 죽고 단군 고흘제의 경오년에 아들 아루가 즉위하였다. 아루가 죽고 무오년에 동생 아라사가 즉위하였다. 이 해에 고등이 모반을 일으켜 개성에 웅거하면서 천왕에게 항거했다. 마한이 드디어 군대를 일으켜 이를 토벌코자 하여 홍석령의 경계지점에 이르렀을 때 천왕께서 고등을 용서하고 우현황으로 삼았다는 소문을 듣고 곧 토벌을 멈추다.

을미년에 천왕은 해성에서 욕살 서우여에게 선양하시고자 하니 마한은 이의 불가함을 주장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우현왕의 아들 색불루가 즉위하니 마한은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끌고 나아가 해성에서 싸웠는데 싸움에 지고는 돌아오지 못하였다. (bc 1285 년)

                                         마한세가 (하)

단군 색불루가 아버지께서 이루어 놓으신 힘을 계승하여 대병을 장악하니, 진한은 스스로 무너졌고 나머지 두 한도 역시 이길 수 없어서 패해 버렸다. 전제는 사람을 시켜 옥책과 국보를 전하여 제의 자리를 물려 주었다. 새임금이 백악산에 도읍을 골라 세우니 여러 욕살들이 아무도 승복하지 않았으나. 여원흥과 개천령등이 명을 받아 저들을 설득했다. 이에 모든 욕살들이 빠짐없이 따르게 되었다.

병신원년 정월 마침내 녹산에서 죽위하니 이곳을 백악산 아사달이라고 한다. 3월에 조서를 내렸다.

' 그대들 아사달에 사람을 보내 옥책과 국보를 전함으로써 전제의 왕위를 선양케 하였느니라. 이제 이름을 세습하여 존귀함을 칭한다 하더라도 나라의 산천은 이미 그 이름이 장부에 실렸고, 제천의 예는 마땅히 나라의 법에 정한바니, 남용할 일이 아니다. 반드시 옛 실례를 따를 지니라. 이에 성실하게 공경을 다하고자 하는 자는 이제 마땅히 제사를 환영하여 이전의 제물들을 골라 삼가 신의 영역을 깨끗이 하고 정결히 한 후, 생폐를 갖추어 이를 가지고 삼신에 보답할지어다. ' 이에 단제는 날을 택해 7일 동안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에 향과 축문을 여원흥에게 내려 주었다. 16일 이른 아침에 경건하게 삼한의 대백두산의 천단에서 제사를 행하고, 단제가 몸소 백악산 아사달에 제사를 올렸다.

그 백두산의 서고문에 이르기를 ' 짐 소자 단군 색불루는 손을 모아 머리를 땅에 대고 절하옵니다. 친히 천제의 아들로서 스스로를 닦고 이로써 백성에 미치게 하여 바드시 제천하고 공경하도록 하겠습니다. 황상은 삼신의 밝은 명을 받으사 큰 덕으로 은혜를 베풀어서 이미 삼한 5만리의 땅을 주시고, 더하여 사람들에게 널리 이로움을 베풀어 누리도록 하셨으므로, 마한 여원흥을 보내어 삼신일체인 상제의 단에 제사 올리게 하였읍니다. 신은 밝고도 밝으신지라 물건에 근본이 되시어 버리심 없나니, 맑고 깨끗한 재물로써 정성드려 바쳐올리오니 내리시어 드시옵고 말 없이 도우시옵소서, 반드시 새 임금의 기틀을 도우시옵소서, 세세토록 삼한의 천만년 무강한 왕업을 보전하고 해마다 곡식이 풍성하여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풍족하게 하소서, 바라노니 밝으신 우리의 성제시여, 나를 비워서 만물이 있기를 염원하옵니다.' 라고 하였다.

5월 제도를 개정하여 삼한을 삼조선이라 하다. 조선이란 관경을 말한다. 진조선은 천왕이 몸소 다스리고 땅은 곧 옛날의 진한대로 하고 저이는 천왕이 친히 다스리도록 하니, 삼한이 모두 하나같이 명령에 복종하였다. 여원흥에게 명하여 마한이 되어 막조선을 통치케하고 서우여로 하여금 번한을 삼아 번조선을 통치케 하였다. 이를 통틀어 이름하여 단군의 관경이라 한다. 이것이 곧 진국으로 역사에서 단군조선이라 함은 이것이다.

여원흥이 이미 대명을 받아 대동강을 장악하니 역시 왕검성이라 한다. 천왕도 역시 매년 봄에는 반드시 마한에 머무르시며 백성의 근면하기를 정치로써 장려하였으니 이에 자공후렴의 폐단이 마침내 사라졌다. 이보다 앞서 조서를 내려 가로대 ' 생각컨대 짐 한 사람을 공양키 위하여 백성들을 들볶아 공물을 내게 함은 곧 정치가 없다는 말이니, 정치 없고서야 왕이 무슨 필요가 있으리오' 하시고는 엄하게 명하여 이를 철폐하였다.

무자년 마한은 명을 받고 도읍에 들어와 간하기를 도읍을 영고탑으로 옮기라고 하였다. 그러나 불가하다고 하시며 이에 따르지 않았다. 여원흥이 죽으니 기축년에 아들 아실이 즉위하였고, 아실이 죽으니, 동생 아도 가 즉위했다. 기묘년에는 은나라가 망했다. 3년 뒤의 신사년 아들 서여가 거처를 태행산맥의 서북의 땅으로 피하여 가니 막조선은 이를 듣고 모든 주와 군을 샅샅이 조사하더니 열병을 하고 돌아왔다.

아도가 죽자 경술년에 아들 아화가 즉위하였고 아화가 죽자 병술년에 동생 아사지가 즉위했다. 아사지가 죽자 단군 마휴의 정해년에 형의 아들 아리손이 즉위하였다. 아리손이 죽으니 아들 소이가 즉위했고 소이가 죽으니 정해년에 아들 사우가 즉위했다. 무자년에 주나라왕 의구가 사신을 보내 신년을 축하 했다. 사우가 죽으니 갑진년에 아들 궁흘이 즉위하더니 갑인년에 협야후에게 명하여 전선 500척을 이끌고 가서 해도를 쳐서 왜인의 반란을 평정하도록 했다. 궁흘이 죽으니 아들 동기가 즉위하였고 동기가 죽자 단군 다물의 계유년에 아들 다도 가 즉위했다. 다도가 죽자 임진년에 아들 사라가 즉위하였고, 사라가 죽자 아들 가섭라가 즉위했다. 가섭라가 죽으니 아들 가리가 즉위하였는데, 을묘년에 융안의 사냥족들 수만이 모반을 일으켰다. 관병이 싸울 때마다 패하여 적이 마침내 심히 급하게 도성에 쳐들어오니 가리도 역시 출전하였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병진년에 상장구물이 마침내 사냥꾼들의 두목 우화충을 죽여버리고 도성을 장당경으로 옮겼다. 이보다 먼저 가리의 손자라는 이유로 전나가 들어가 막조선을 계승하니 이때부터 정치가 날로 쇠퇴하였다.

전나가 죽으니, 아들 진을례가 즉위했다. 진을례가 죽으니 을묘년에 아들 맹남이 즉위하였다. 무술년에 수유의 사람 기후가 병력을 이끌고 번한에 들어가 웅거하고, 자립하여 번조선왕이라 칭하였다. 연나라는 사신을 보내 우리와 함께 기후를 치자고 했으나 막조선은 따르지 않았다.

계해년 단군 고열가가 마침내 왕위를 버리고 아사달에 들어가셨다. 진조선은 오가와 함께 (진시황)정에게 복종하게 되더니 끝내 미처 회복하지 못한 채 종말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