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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사

삼국사기 신라 본기 (원문+한글) 권 제 1


三國史記 新羅本紀  卷第一 ~卷第十二


三國史記卷第一  삼국사기 권 제 1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集賢殿太學士監修國史上柱國致仕臣<金富軾>奉宣撰.
수충 정난 정국 찬화 동덕 공신, 개부 의동삼사, 검교 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 이례부사, 집현전 태학사, 감수국사, 상주국, 치사 신 김 부식이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편찬함.

新羅本紀第一  신라본기 제 1

始祖<赫居世>居西干·<南解>次次雄·<儒理>尼師今·<脫解>尼師今·<婆娑>尼師今·<祗摩>尼師今·<逸聖>尼師今.
시조 혁거세 거서간, 남해 차차웅, 유리 이사금,
탈해 이사금, 파사 이사금, 지마 이사금, 일성 이사금.

始祖<赫居世>居西干 (시조 박혁거세)

○始祖, 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 <五鳳>元年, 甲子, 四月丙辰[一曰正月十五日], 卽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國號<徐那伐>. 先是,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 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高墟村>, 三曰< 山><珍支村>[或云<干珍村>.], 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村{加里村}> , 六曰<明活山><高耶村>, 是爲<辰韓>六部. <高墟村>長<蘇伐公>望<楊山>麓, <蘿井>傍林間, 有馬 而嘶, 則往觀之, 忽不見馬, 只有大卵. 剖之, 有 兒出焉, 則收而養之. 及年十餘{三} 歲, 岐 然夙成. 六部人以其生神異, 推尊之, 至是立爲君焉. <辰>人謂瓠爲朴, 以初大卵如瓠, 故以朴爲姓. 居西干, <辰>言王.[或云呼貴人之稱.]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시조의 성은 박씨이며, 이름은 혁거세이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 4월 병진[정월 15일 이라고도 한다.]에 왕위에 올랐다. 왕호는 거서간이다. 이 때 나이는 열 세 살이었으며 나라 이름은 서라벌이었다.
이보다 앞서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에 분산되어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의 양산촌이라 하고, 둘째는 돌산의 고허촌이라 하고, 셋째는 취산의 진지촌[혹은 간진촌이라고도 한다.]이라 하고, 넷째는 무산의 대수촌이라 하고, 다섯째는 금산의 가리촌이라 하고, 여섯째는 명활산의 고야촌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옆의 숲 사이에 말이 꿇어 앉아 울고 있었다. 그가 즉시 가서 보니 말은 갑자기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이 있었다. 이것을 쪼개자 그 속에서 어린아이가 나왔다. 그는 이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아이의 나이 10여 세가 되자 지각이 들고 영리하며 행동이 조신하였다. 6부 사람들이 그의 출생을 기이하게 여겨 높이 받들다가, 이 때에 이르러 임금으로 삼은 것이다. 진한 사람들은 호(匏)를 "박"이라고 하였는데, 처음의 큰 알이 박의 모양과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그의 성을 박이라고 하였다. 거서간을 진한에서는 왕이라고 하였다.[혹은 귀인을 칭하는 말이라고도 한다.]

○四年, 夏四月辛丑朔, 日有食之.

4년 여름 4월 초하루 신축일에 일식이 있었다.

○五年, 春正月, 龍見於<閼英井>, 右脇誕生女兒. 老 見而異之, 收養之, 以井名, 名之. 及長有德容. 始祖聞之, 納以爲妃, 有賢行, 能內輔, 時人謂之二聖.

5년 봄 정월, 용이 알영 우물에 나타나서 오른 쪽 옆구리로 여자아이를 낳았다. 한 노파가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 데려다 길렀다. 우물 이름으로 그녀의 이름을 지었다. 그녀는 자라면서 덕스러운 용모를 갖추었다. 시조가 이를 듣고 그녀를 왕비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행실이 어질고 내조가 훌륭하여 당시 사람들이 두 사람의 성인이라고 불렀다.

○八年, <倭>人行兵, 欲犯邊, 聞始祖有神德, 乃還.

8년, 왜인이 군사를 동원하여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시조에게 하늘에서 내려준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돌아갔다.

○九年, 春三月, 有星 于王良.

9년 봄 3월, 왕량 성좌에 혜성이 나타났다.

○十四年, 夏四月, 有星 于參.

14년 여름 4월, 삼성 성좌에 혜성이 나타났다.

○十七年, 王巡撫六部, 妃<閼英>從焉. 勸督農桑, 以盡地利.

17년, 왕이 6부를 순행하며 위문하는 길에, 왕비 알영도 수행하였다. 백성들에게 농사와 양잠을 권하고, 농토를 충분히 이용하도록 하였다.

○十九年, 春正月, <卞韓>以國來降.

19년 봄 정월, 변한이 나라를 바치고 항복해왔다.

○二十一年, 築京城, 號曰<金城>. 是歲, <高句麗>始祖<東明>立.

21년, 서울에 성을 쌓고 금성이라고 불렀다. 이 해에 고구려 시조 동명이 왕위에 올랐다.

○二十四年, 夏六月壬申晦, 日有食之.

24년 여름 6월 그믐 임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二十六年, 春正月, 營宮室於<金城>.

26년 봄 정월,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

○三十年, 夏四月己亥晦, 日有食之. <樂浪>人, 將兵來侵, 見邊人夜戶不 , 露積被野, 相謂曰: "此方民, 不相盜, 可謂有道之國. 吾 潛師而襲之, 無異於盜, 得不愧乎?" 乃引還.

30년 여름 4월 그믐 기해일에 일식이 있었다.
낙랑 사람들이 군사를 동원하여 침범하려다가, 국경 부근 사람들이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으며, 노적가리가 들에 가득 쌓인 것을 보고 서로 말했다.
"이 지방 사람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도덕이 있는 나라라고 할만하다. 우리가 이러한 사람들을 군대로 몰래 기습한다는 것은 도적과 다름없으니 이는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그들은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三十二年, 秋八月乙卯晦, 日有食之.

32년 가을 8월 그믐 을묘일에 일식이 있었다.

○三十八年, 春二月, 遣<瓠公>聘於<馬韓>. <馬韓>王讓<瓠公>曰: "<辰>·<卞>二<韓>爲我屬國, 比年不輸職貢, 事大之禮, 其若是乎?" 對曰: "我國自二聖肇興, 人事修, 天時和, 倉庾充, 人民敬讓.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而吾王謙虛, 遣下臣, 修聘, 可謂過於禮矣, 而大王赫怒, 劫之以兵, 是何意耶?" 王憤欲殺之, 左右諫止, 乃許歸. 前此, <中國>之人, 苦<秦>亂, 東來者衆, 多處<馬韓>東, 與<辰韓>雜居, 至是 {寢} 盛. 故<馬韓>忌之, 有責焉. <瓠公>者, 未詳其族姓. 本<倭>人, 初以瓠繫腰, 渡海而來, 故稱<瓠公>.

趙炳舜. 『三國史節要』.
38년 봄 2월에 호공을 보내 마한을 예방하였다.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으며 말했다.
"진한과 변한은 우리 나라의 속국인데, 근년에는 공물을 보내오지 않았소. 대국을 섬기는 예절이 이와 같은가요?"
호공이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에 두 분의 성인이 출현하면서, 사회가 안정되고 천시가 조화를 이루어, 창고가 가득 차고, 백성들은 공경과 겸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진한의 유민들로부터 변한,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두려워하고 심복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임금이 겸손하여 저를 보내 귀국을 예방하게 하였으니, 이는 오히려 지나친 예절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왕께서 크게 성을 내고 무력으로 위협하시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측근들이 간하여 이를 말리자 그의 귀국을 허락하였다. 이보다 앞서 중국 사람들 중에 진(秦)나라가 일으킨 난리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다가, 동쪽으로 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 가운데의 대부분은 마한 동쪽에서 진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었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 점점 번성하자 마한이 이를 싫어하여 이와 같이 책망했던 것이다.
호공이란 사람은 그 집안과 성씨가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본래 왜인이었는데, 처음에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 왔기 때문에 호공(匏公)이라고 불렀다.

○三十九年, <馬韓>王薨. 或說上曰: "<西韓>王前辱我使, 今當其喪, 征之其國, 不足平也?" 上曰: "幸人之災, 不仁也." 不從, 乃遣使弔慰.

39년, 마한왕이 별세하였다. 어떤 사람이 왕에게 말했다.
"서한왕이 이전에 우리 사신을 모욕했습니다. 이제 그 국왕이 죽은 기회를 이용하여 공격하면, 그 나라를 충분히 평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다른 사람의 재난을 우리의 행복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행위이다."
왕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곧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四十年, <百濟>始祖<溫祚>立.

40년, 백제 시조 온조가 왕위에 올랐다.

○四十三年, 春二月乙酉晦, 日有食之.

43년, 봄 2월 그믐 을유일에 일식이 있었다.

○五十三年, <東沃沮>使者來, 獻良馬二十{百} 匹, 曰: "寡君問{聞} <南韓>有聖人出, 故遣臣來享."

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
53년, 동옥저의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치며 "우리 임금이 남한에 성인이 났다는 말을 들었기에 저를 보내 이를 바칩니다"라고 말했다.

○五十四年, 春二月己酉, 星 于河鼓.

54년, 봄 2월 기유에 혜성이 하고 성좌에 나타났다.

○五十六年, 春正月辛丑朔, 日有食之.

56년, 봄 정월 초하루 신축일에 일식이 있었다.

○五十九年, 秋九月戊申晦, 日有食之.

59년, 가을 9월 그믐 무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六十年, 秋九月, 二龍見於<金城>井中, 暴雷雨, 震城南門.

60년, 가을 9월, 두 마리의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났다. 우레와 비가 심하고 성의 남문에 벼락이 쳤다.

○六十一年, 春三月, 居西干升遐, 葬<蛇陵>, 在<□巖寺{曇巖寺}> 北.

趙炳舜. 『三國史節要』.
61년, 봄 3월, 거서간이 별세하였다. 사릉에 장사지냈다. 사릉은 담암사 북쪽에 있다.

2대 남해 차차웅 (南解 次次雄)

○<南解>次次雄立,[次次雄或云慈充. <金大問>云: "方言謂巫也. 世人以巫事鬼神尙祭祀, 故畏敬之, 遂稱尊長者, 爲慈充."] <赫居世>嫡子也. 身長大, 性沈厚, 多智略. 母<閼英>夫人, 妃<雲帝>夫人.[一云<阿婁>夫人.]繼父卽位稱元.
○論曰: 人君卽位, 踰年稱元, 其法詳於『春秋』, 此先王不 {刊} 之典也. 『伊訓』曰: "<成湯>旣沒, <大甲{太甲} >元年." 『正義』曰: "<成湯>旣沒, 其歲卽<大甲{太甲} >元年." 然『孟子』曰: "<湯>崩, <大丁{太丁} >未立, <外丙>二年, <仲壬>四年." 則疑若『尙書』之脫簡, 而『正義』之誤說也, 或曰: "古者, 人君卽位, 或踰月稱元年, 或踰年而稱元年." 踰月而稱元年者, <成湯>旣沒<大甲{太甲} >元年, 是也. 『孟子』云: "<大丁{太丁} >未立"者, 謂<大丁{太丁} >未立而死也. "<外丙>二年, <仲壬>四年"者, 皆謂<大丁{太丁}> 之子<大甲{太甲}> 二兄, 或生二年, 或生四年而死, <太甲>所以得繼<湯>耳. 『史記』便謂此<仲壬>·<外丙>爲二君, 誤也. 由前, 則以先君終年, 卽位稱元, 非是. 由後, 則可謂得<商>人之禮者矣.

.趙炳舜. 『三國史節要』.
  x]남해 차차웅[차차웅을 자충이라고도 한다. 김대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충은 방언으로는 무당이라는 뜻이다.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주관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무당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다가, 마침내 존경받는 어른을 자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혁거세의 적자이다. 그는 체격이 장대하고 성품이 침착하였으며 지략이 많았다. 어머니는 알영부인이며, 왕비는 운제부인[아루 부인이라고도 한다.]이다. 그는 아버지를 뒤이어 왕위에 올랐다. 이 해를 원년으로 하였다.
저자의 견해  : 왕이 왕위에 오른 다음 해를 원년이라고 하는 법도는 [춘추]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는 절대적인 선왕의 법도이다. [이훈]에는 "성탕이 죽으니 태갑 원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정의]에는 "성탕이 죽은 그 해가 곧 태갑 원년이다"라는 기록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맹자]에는 "탕이 죽고, 태정이 아직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외병이 2년이요, 중임이 4년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상서]에는 이 기록이 빠져 있고, [정의]에는 이 부분에 대한 해설이 잘못되어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옛날에는 임금이 즉위하면 그 달을 넘긴 다음 달을 즉위 원년이라고 일컫기도 했고, 혹은 그 해를 넘긴 다음 해를 즉위 원년이라고 했다"라고 말한다. 즉위한 달을 넘기고 나서 원년이라고 부른 경우로는 "성탕이 죽으니 태갑 원년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맹자]에서 말한 "태정이 아직 왕위에 오르지 못하였다"라고 한 것은 태정이 아직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죽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외병이 2년, 중임이 4년이라"고 한 것은 태정의 아들인 태갑의 두 형이 태어난지 2년 혹은 4년 만에 죽은 것을 말한다. 이리하여 태갑이 탕의 뒤를 이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기]에서 이를 중임과 외병의 두 임금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전자에 의하면 선왕이 죽은 해를 즉위 원년이라 불렀으니 이는 옳지 않으며, 후자에 의하면 상 나라 백성의 예절에 맞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 부식은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마다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이 부분을 이 번역서에서는 '저자의 견해'라고 표시하여 번역하기로 한다.

○元年, 秋七月, <樂浪>兵至國{圍} <金城>數重. 王謂左右曰: "二聖棄國, 孤以國人推戴, 謬居於位, 危懼若涉川水, 今隣國來侵, 是孤之不德也, 爲之若何?" 左右對曰: "賊幸我有喪, 妾{妄} 以兵來, 天必不祐, 不足畏也." 賊俄而退歸{果退} .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원년 가을 7월, 낙랑 군사가 금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왕이 측근에게 "두 분의 성인이 세상을 떠나시고 내가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나 이는 잘못된 일이다. 조심스럽고 위태롭기가 물을 건너는 것과 같다. 지금 이웃 나라가 침범해오니, 이는 나에게 덕이 없는 탓이다. 이를 어찌 하면 좋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측근들이 "적은 우리 나라에 국상이 난 것을 요행으로 여기고 함부로 침범해왔으니, 하늘은 절대 그들을 돕지 않을 것입니다.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얼마 후에 그들이 물러갔다.

○三年, 春正月, 立始祖廟. 冬十月丙辰朔, 日有食之.

3년, 봄 정월, 시조묘를 건립하였다.
겨울 10월 초하루 병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五年, 春正月, 王聞<脫解>之賢, 以長女妻之.

5년, 봄 정월, 왕이 탈해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장녀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七年, 秋七月, 以<脫解>爲大輔, 委以軍國政事.

7년 가을 7월, 탈해를 대보로 임명하고 군사와 정치에 대한 사무를 맡겼다.

○八年, 春夏旱.

8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十一年, <倭>人遣兵船百餘 , 掠海邊民戶, 發六部勁兵, 以禦之. <樂浪>謂內虛, 求{來} 攻<金城>, 甚急. 夜有流星, 墜於賊營, 衆懼而退, 屯於<閼川>之上, 造石堆二十而去. 六部兵一千人追之, 自<吐含山>東, 至<閼川>, 見石堆, 知賊衆, 乃止.

趙炳舜. 『顯宗實錄字本』.
11년, 왜인이 병선 100여 척을 보내 해변의 민가를 약탈하였다. 6부의 정병을 보내 이를 방어하였다.
낙랑이 우리 나라의 내부에 빈틈이 있다고 보고, 금성을 공격하여오니 상황이 위급하였다. 밤에 유성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자 적병이 두려워 하며 퇴각하다가 알천가에 주둔하면서, 돌무더기 20개를 쌓아놓고 물러갔다. 6부 군사 1천 명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토함산 동쪽으로부터 알천에 이르러 이 돌무더기를 보고는 적병이 많은 것으로 알고 추격을 멈추었다.

○十三年, 秋七月戊子晦, 日有食之.

13년, 가을 7월 그믐 무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五年, 京城旱. 秋七月, 蝗, 民饑, 發倉 救之.

15년, 서울에 가뭄이 들었다.
가을 7월에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백성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十六年, 春二月, <北溟>人耕田, 得<濊>王印, 獻之.

16년 봄 2월, 북명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의 도장을 주워서 이를 왕에게 바쳤다.

○十九年, 大疫, 人多死. 冬十一月, 無氷.

19년, 전염병이 크게 돌아 사람이 많이 죽었다.
겨울 11월, 얼음이 얼지 않았다.

○二十年秋, 大白{太白} 入太微.

趙炳舜. 『三國史節要』.
20년, 가을, 금성이 태미 성좌에 들어 갔다.

○二十一年, 秋九月, 蝗. 王薨, 葬<蛇陵園>內.

21년, 가을 9월,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왕이 별세하였다. 사릉원에 장사지냈다.

○<儒理>尼師今立, <南解>太子也. 母, <雲帝>夫人;  妃, <日知>葛文王之女也.[或云妃姓<朴>, <許婁王>之女.] 初<南解>薨, <儒理>當立, 以大輔<脫解>, 素有德望, 推讓其位, <脫解>曰: "神器大寶, 非庸人所堪. 吾聞聖智人, 多齒." 試以餠 之, <儒理>齒理多. 乃與左右奉立之, 號尼師今. 古傳如此. <金大問>則云: "尼師今, 方言也." 謂齒理. 昔<南解>將死, 謂男<儒理>·壻<脫解>曰: "吾死後, 汝<朴>·<昔>二姓, 以年長而嗣位焉." 其後, <金>姓亦興, 三姓以齒長相嗣, 故稱尼師今.

유리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남해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운제부인이며, 왕비는 일지 갈문왕의 딸이다.[혹은 왕비의 성은 박씨이며, 허루왕의 딸이라고도 한다.] 애초에 남해가 사망했을 때, 유리가 당연히 왕위에 올라야 하는데, 유리는 대보 탈해가 본래 덕망이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왕위를 그에게 사양하였다. 탈해는 "임금이라는 자리는 보통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가 많다고 들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시험삼아 떡을 깨물어 보았다. 그 결과 유리의 이 자국이 많았으므로 즉시 측근들과 함께 그를 받들어 왕위에 오르게 하고, 왕호를 이사금이라 하였으니, 옛부터 전해오는 말이 이와 같았다. 김 대문은 "이사금은 방언이다"라고 말했다. '이사금'은 곧 '이의 자국'이란 말이다. 이전에 남해가 죽음을 앞두고, 아들 유리와 사위 탈해에게 "내가 죽은 뒤에는 너희들 '박'과 '석' 두 성을 가진 사람 중에 나이 많은 자가 왕위를 이으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후에 김씨 성이 또한 흥기하였으므로, 세 성씨들 중에 나이많은 자를 선택하여 왕위를 잇도록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왕을 이사금이라고 불렀다.

○二年, 春二月, 親祀始祖廟, 大赦.

2년, 봄 2월, 왕이 직접 시조묘에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五年, 冬十一月, 王巡行國內, 見一老 飢凍將死曰: "予以 身{躬} 居上, 不能養民, 吏{使} 老幼, 至於此極, 是予之罪也." 解衣以覆之, 推食以食之. 仍命有司, 在處存問, 鰥寡孤獨, 老病不能自活者, 給養之. 於是, 隣國百姓, 聞而來者衆矣. 是年, 民俗歡康, 始製兜率歌. 此, 歌樂之始也.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5년, 겨울 11월, 왕이 국내를 순행하다가 어떤 노파가 굶주림과 추위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 "내가 세상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몸으로 왕위에 앉았으나, 백성을 먹여 살릴 수 없고, 노인과 어린이로 하여금 이토록 극한 상황에 이르게 하였으니, 이는 나의 죄이다"라고 말하고, 옷을 벗어 덮어 주고 밥을 주어 먹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에게 명하여 현지에서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으로서을 위문하게 하고, 늙고 병들어 혼자의 힘으로 살아 갈 수 없는 자들을 부양하게 하였다. 이렇게 되자 이웃 나라의 백성들이 이 소식을 듣고 오는 자들이 많았다. 이 해에 백성들의 생활이 즐겁고 편안하여 처음으로 도솔가를 지었다. 이것이 노래 가사의 시작이었다.

○九年春, 改六部之名, 仍賜姓. <楊山部>爲<梁部>, 姓李; <高墟部>爲<沙梁部>, 姓<崔>; <大樹部>爲<漸梁部>[一云<牟梁>.], 姓<孫>; <于珍部{干珍部}> 爲<本彼部>, 姓<鄭>; <加利部>爲<漢祇部>, 姓<裴>; <明活部>爲<習比部>, 姓<薛>. 又設官有十七等: 一(+曰) 伊伐 , 二(+曰) 伊尺 , 三(+曰)   , 四(+曰) 波珍 , 五(+曰) 大阿 , 六(+曰) 阿 , 七(+曰) 一吉 , 八(+曰) 沙 , 九(+曰) 級伐 , 十(+曰) 大奈麻, 十一(+曰) 奈麻, 十二(+曰) 大舍, 十三(+曰) 小舍, 十四(+曰) 吉士, 十五(+曰) 大烏, 十六(+曰) 小烏, 十七(+曰) 造位. 王旣定六部, 中分爲二, 使王女二人, 各率部內女子, 分朋造黨. 自秋七月旣望, 每日早集大{六} 部之庭績麻, 乙夜而罷. 至八月十五日, 考其功之多小, 負者置酒食, 以謝勝者. 於是歌舞百戱皆作, 謂之嘉俳. 是時, 負家一女子, 起舞嘆曰: "會蘇, 會蘇!" 其音哀雅, 後人因其聲而作歌, 名<會蘇曲>.

李丙燾. 新本.
[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
9년 봄,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을 하사하였다. 양산부는 양부로 고쳤으며 성은 이씨이고, 고허부는 사량부로 고쳤으며 성은 최씨, 대수부는 점량부[모량이라고도 한다.]로 고쳤으며 성은 손씨, 간진부는 본피부로 고쳤으며 성은 정씨, 가리부는 한기부로 고쳤으며 성은 배씨, 명활부는 습비부로 고쳤으며 성은 설씨로 정하였다. 또한 관직에 다음과 같은 17등급을 두었다.
1.이벌찬 2.이척찬 3.잡찬 4.파진찬 5.대아찬 6.아찬 7.일길찬 8.사찬 9.급벌찬 10.대나마 11.나마 12.대사 13.소사 14.길사 15.대오 16.소오 17.조위
왕은 6부를 정하고 나서 이를 두 편으로 나누고, 두 왕녀로 하여금 각각 부내의 여자들을 거느려 편을 짜게 하였다. 이들 두 편은 가을 7월 16일부터, 매일 새벽에 큰 부의 뜰에 모여 길쌈을 시작하여, 밤 열시 경에 끝냈다. 그들은 8월 15일이 되면 길쌈을 얼마나 했는지를 심사하였으며, 길쌈을 적게 한 편에서 술과 음식을 차려 길쌈을 많이 한 편에 사례하였다. 이 때 노래와 춤과 여러 가지의 오락을 하였다. 이 행사를 가배라고 하였다. 이 행사를 할 때, 진 편에서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면서 탄식하는 소리로 "회소, 회소!"라고 하였다. 그 소리가 슬프고도 우아하여, 뒷날 사람들이 이 곡에 노래말을 붙이고, 회소곡이라고 하였다.

○十一年, 京都, 地裂泉湧. 夏六月, 大水.

11년, 서울에서 땅이 갈라지고 샘이 솟았다.
여름 6월, 홍수가 났다.

○十三年, 秋八月, <樂浪>犯北邊, 攻陷<朶山城>.

13년, 가을 8월,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을 점령하였다.

○十四年, <高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14년, 고구려왕 무휼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키자, 그 백성 5천 명이 투항해왔다. 그들을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十七年, 秋九月, <華麗>·<不耐>二縣人連謀, 率騎兵犯北境. <貊>國渠帥, 以兵要<曲河>西敗之. 王喜, 與<貊>國結好.

17년, 가을 9월, 화려현·불내현의 두 현 사람들이 공모하여 기병을 거느리고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다. 맥국의 우두머리가 병사를 동원하여 곡하 서쪽에서 요격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친교를 맺었다.

○十九年, 秋八月, <貊>帥獵得禽獸, 獻之.

19년, 가을 8월, 맥국의 우두머리가 사냥을 하여 새와 짐승을 잡아 바쳤다.

○三十一年, 春二月, 星 于紫宮.

31년, 봄 2월, 자미 성좌에 혜성이 나타났다.

○三十三年, 夏四月, 龍見<金城>井, 有頃暴雨自西北來. 五月, 大風拔木.

33년, 여름 4월, 금성 우물에서 용이 나타났는데 얼마 후에 소나기가 서북쪽에서 몰려왔다. 5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三十四年, 秋九月, 王不豫, 謂臣寮曰: "<脫解>身聯國戚, 位處輔臣, 屢著功名. 朕之二子, 其才不及遠矣. 吾死之後,  卽大位, 以無忘我遺訓." 冬十月, 王薨. 葬<蛇陵園>內.

34년, 가을 9월, 왕이 병환이 나자 신하들에게 말했다.
"탈해는 신분이 국척이요,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고, 공을 여러 번 세웠다. 나의 두 아들은 재능이 그를 따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죽은 뒤에는 탈해를 왕위에 오르게 하라. 나의 유언을 잊지 말라."
겨울 10월에 왕이 별세하였다. 사릉원에 장사지냈다.

○<脫解>尼師今立.[一云<吐解>.] 時年六十二. 姓<昔>, 妃<阿孝>夫人. <脫解>本<多婆那國>所生也, 其國在<倭>國東北一千里. 初, 其國王, 娶<女國>王女爲妻, 有娠七年, 乃生大卵. 王曰: "人而生卵, 不祥也, 宜棄之." 其女不忍, 以帛 卵幷寶物, 置於 中, 浮於海, 任其所往. 初至<金官國>海邊, <金官>人怪之, 不取. 又至<辰韓><阿珍浦>口, 是始祖<赫居世>, 在位三十九年也. 時, 海邊老母, 以繩引繫海岸, 開 見之, 有一小兒在焉. 其母取養之. 及壯身, 長九尺, 風神秀朗, 知識過人. 或曰: "此兒不知姓氏, 初 來時, 有一鵲飛鳴而隨之, 宜省鵲字, 以<昔>爲氏. 又解  而出, 宜名<脫解>." <脫解>始以漁釣爲業, 供養其母, 未嘗有懈色. 母謂曰: "汝非常人, 骨相殊異, 宜從學, 以立功名." 於是, 專精學問, 兼知地理. 望<楊山>下<瓠公>宅, 以爲吉地, 設詭計, 以取而居之. 其地後爲<月城>. 至<南解>王五年, 聞其賢, 以其女妻之. 至七年, 登庸爲大輔, 委以政事. <儒理>將死曰: "先王顧命曰: '吾死後, 無論子壻, 以年長且賢者, 繼位.' 是以寡人先立, 今也宜傳其位焉."

탈해 이사금[토해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다. 이 때 나이가 62세였다. 성은 석이며, 왕비는 아효부인이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에서 태어났다. 이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으로 천 리 밖에 있다. 본래 그 나라 왕은 여국의 왕녀를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은 "사람이 알을 낳았으니 이는 상서로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리라"라고 말하였다. 그 여인이 알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과 보물을 함께 싸서 상자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그 상자는 처음에 금관국 해변에 닿았다. 금관 사람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 그 상자는 다시 진한 아진포 어구에 닿았다. 이 때가 곧 시조 혁거세 39년이었다. 그 때 해변에 사는 할머니가 상자를 줄로 끌어올려 해안에 매어 놓고 열어보니, 한 어린아이가 있었다. 그 노인은 이 아이를 데려다 길렀다. 이 아이가 어른이 되자 키가 9척이 되었으며, 기풍과 정신이 훌륭하였고, 지식이 남보다 뛰어났다. 어떤 사람이 "이 아이는 성씨를 알 수 없으나 처음 상자가 도착하였을 때, 까치 한 마리가 울면서 날아 따라 왔으니, 까치 작(鵲)자를 줄여 '석(昔)'으로 성을 삼는 것이 좋겠고, 또한 상자를 풀고 나왔으니, '벗을 탈(脫)'과 '풀 해(解)'로 이름을 짓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탈해는 처음에는 고기잡이를 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그는 한번도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골격과 관상이 특이하니 마땅히 학문에 종사하여 공명을 세우라"라고 말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학문에 전념하였고 동시에 지리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양산 아래에 있는 호공의 집을 보고 그 곳이 좋은 집터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꾀를 써서 이 터를 얻어 그 곳에서 살았다. 이 땅은 뒷날 월성터가 되었다. 남해왕 5년에 이르러 그가 어질다는 소문이 나자 왕은 자기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7년에 그를 등용하여 대보로 임명하고 정사를 맡겼다.
유리가 죽음을 눈 앞에 두고 말했다. "선왕은 '내가 죽은 후에 아들과 사위를 막론하고 나이가 많고 현명한 자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라'고 유언하였다. 이리하여 내가 먼저 왕위에 올랐다. 이제는 마땅히 왕위를 탈해에게 전해야 할 것이다."

○二年春正月, 拜<瓠公>爲大輔. 二月, 親祀始祖廟.

2년, 봄 정월, 호공을 대보로 임명하였다.
2월, 왕이 직접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三年春三月, 王登<吐含山>, 有玄雲如蓋, 浮王頭上, 良久而散. 夏五月, 與<倭>國結好交聘. 六月, 有星 于天船.

3년, 봄 3월, 왕이 토함산에 올라가니, 우산 모양의 검은 구름이 왕의 머리 위에 피어 났다가 한참 후에 흩어졌다.
여름 5월, 왜국과 친교를 맺고 사신을 교환하였다. 6월에 천선 성좌에 혜성이 나타났다.

○五年秋八月, <馬韓>將<孟召>, 以<覆巖城>降.

5년, 가을 8월, 마한 장수 맹소가 복암성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七年冬十月, <百濟>王拓地, 至<娘子谷城>, 遣使請會, 王不行.

7년, 겨울 10월, 백제왕이 국토를 개척하여, 낭자곡성까지 넓히고 사신을 보내 왕을 만나기를 요청했으나, 왕은 가지 않았다.

○八年秋八月, <百濟>遣兵, 攻<蛙山城>. 冬十月, 又攻<狗壤城>. 王遣騎二千, (+逆) 擊走之. 十二月, 地震. 無雪.

趙炳舜. 『三國史節要』.
8년 가을 8월, 백제가 군사를 보내 와산성을 공격하였다.
겨울 10월, 백제가 다시 구양성을 공격하자 왕은 기병 2천 명을 보내 그들을 공격하여 물리쳤다.
12월, 지진이 있었다. 눈이 내리지 않았다.

○九年春三月, 王夜聞<金城>西<始林>樹間, 有鷄鳴聲. 黎明遣<瓠公>視之, 有金色小 , 掛樹枝, 白鷄鳴於其下. <瓠公>還告. 王使人取 開之, 有小男兒在其中, 姿容奇偉. 上喜謂左右曰: "此豈非天遺我以 胤{令胤} 乎!" 乃收養之. 及長, 聰明多智略, 乃名<閼智>. 以其出於金 , 姓<金>氏. 改<始林>名< 林>, 因以爲國號.

趙炳舜. 『顯宗實錄字本』.
9년 봄 3월 왕이 밤에, 금성 서쪽 시림의 나무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날이 샐 무렵에 호공을 보내 어찌된 일인지를 알아보도록 하였다. 호공이 가보니 그 곳에는 나무 가지에 금빛나는 작은 상자가 걸려 있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이를 보고하였다. 왕은 사람을 보내 그 상자를 가져와 열게 하였다. 그 속에는 어린 사내 아이가 들어 있었고, 그 아이는 자태와 용모가 뛰어났다. 왕이 기뻐하며 측근들에게 "이 아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로 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고, 그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아이는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그의 이름을 알지라고 하였다. 그는 금빛이 나는 상자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씨라고 하였다. 시림을 고쳐 계림이라 부르고, 이를 국호로 하였다.

○十年, <百濟>攻取<蛙山城>, 留二百人居守, 尋取之.

10년, 백제가 와산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2백 명을 그 곳에 남겨 거주시키며 수비하게 하였으나, 얼마되지 않아서 우리가 이 땅을 다시 빼앗았다.

○十一年春正月, 以<朴>氏貴戚, 分理國內州郡, 號爲州主·郡主. 二月, 以<順貞>爲伊伐 , 委以政事.

11년 봄 정월, 박씨의 귀척으로 하여금 국내의 주와 군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다. 그 직위를 각각 주주와 군주라고 불렀다.
2월, 순정을 이벌찬으로 임명하여 정사를 맡겼다.

○十四年, <百濟>來侵.

14년, 백제가 침범하였다.

○十一{七} 年, <倭>人侵<木出島>. 王遣角干<羽烏>禦之, 不克, <羽烏> {死} 之.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17년, 왜인이 목출도를 침범하였다. 왕이 각간 우오를 보내 방어토록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우오가 전사하였다.

○十八年, 秋八月, <百濟>寇邊, 遣兵拒之.

18년 가을 8월, 백제가 변경을 약탈하므로 군사를 보내 이를 방어하였다.

○十九年, 大旱. 民饑, 發倉賑給. 冬十月, <百濟>攻西鄙<蛙山城>, 拔之.

19년, 큰 가뭄이 들었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겨울 10월, 백제가 서쪽 변경의 와산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二十年, 秋九月, 遣兵伐<百濟>, 復取<蛙山城>. 自<百濟>來居者二百餘人, 盡殺之.

20년 가을 9월,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하여 와산성을 다시 찾았다. 백제에서 와서 살고 있던 2백여 명을 모두 죽였다.

○二十一年, 秋八月, 阿 <吉門>, 與<加耶>兵, 戰於<黃山津>口, 獲一千餘級. 以<吉門>爲波珍 , 賞功也.

21년 가을 8월, 아찬 길문이 가야 군사를 상대로 황산진 입구에서 싸워 1천여 명을 죽였다. 길문을 파진찬으로 임명하여 그 전공에 해당하는 상을 주었다.

○二十三年, 春二月, 彗星見東方, 又見北方, 二十日乃滅.

23년 봄 2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가 다시 북쪽에 나타나더니 20일 만에 사라졌다.

○二十四年, 夏四月, 京都大風, <金城>東門自壞. 秋八月, 王薨. 葬城北<壤井>丘.

24년 여름 4월, 서울에 큰 바람이 불어 금성 동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가을 8월, 왕이 별세하였다. 성의 북쪽 양정 언덕에 장사지냈다.

○<婆娑>尼師今立, <儒理>王第二子也.[或云, <儒理>第{弟} <柰老>之子也.] 妃, <金>氏<史省>夫人, <許 {許婁}> 葛文王之女也. 初, <脫解>薨, 臣僚欲立<儒理>太子<逸聖>. 或謂: "<逸聖>雖嫡嗣, 而威明不及<婆娑>." 遂立之. <婆娑>節儉省用, 而愛民, 國人嘉之.

『북한본』.趙炳舜. 『顯宗實錄字本』.
파사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유리왕의 둘째 아들이다.[혹은 유리의 아우 나로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왕비는 김씨 사성부인이다. 그녀는 갈문왕 허루의 딸이다. 애초에 탈해가 죽었을 때 신하들은 유리의 태자 일성을 왕위에 오르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누군가가 말하기를 "일성이 적자이기는 하지만 사람됨과 총명함이 파사만 못하다"고 하여, 마침내 파사를 왕위에 오르도록 한 것이다. 파사는 절도있고 검소하며 물자를 아끼는 생활을 하였고, 또한 백성을 사랑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칭송하였다.

○二年, 春二月, 親祀始祖廟. 三月, 巡撫州郡, 發倉賑給, 慮獄囚, 非二罪, 悉原之.

2년 봄 2월, 왕이 직접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3월, 왕이 주와 군을 순행하여 창고를 풀어 백성들을 구제하고, 옥에 갇힌 죄수를 조사하여 두 가지의 사형죄에 해당하는 자가 아니면 모두 석방토록 하였다.

○三年, 春正月, 下令曰: "今倉 空 , 戎器頑鈍,  有水旱之災, 邊鄙之警, 其何以禦之? 宜令有司, 勸農桑, 練兵 {革} , 以備不虞."

趙炳舜. 『三國史節要』.
3년 봄 정월,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지금 나라 창고가 비었고 병기는 무디어 졌다. 혹시라도 홍수나 가뭄 또는 변방에 변고가 생기면 이에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마땅히 유사로 하여금 농사와 양잠을 장려하고 군사를 훈련시켜 의외의 상황에 대비토록 하라."

○五年, 春二月, 以<明宣>爲伊 , <允良>爲波珍 . 夏五月, <古 >郡主, 獻靑牛. <南新縣> {麥} 連 , 大有年, 行者不齎糧.

趙炳舜. 『三國史節要』.
5년 봄 2월, 명선을 이찬으로, 윤량을 파진찬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5월, 고타 군주가 푸른 색의 소를 바쳤다. 남신현에서는 하나의 보리 이삭에 여러 가닥이 생겨나 크게 풍년이 들었기 때문에 여행하는 사람들이 식량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六年, 春正月, <百濟>犯邊. 二月, 以<吉元>爲阿 . 夏四月, 客星入紫微.

6년 봄 정월,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였다.
2월, 길원을 아찬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 객성이 자미 성좌에 들어 갔다.

○八年, 秋七月, 下令曰: "朕以不德, 有此國家. 西隣<百濟>, 南接<加耶>, 德不能綏, 威不足畏, 宜繕葺城壘, 以待侵 ." 是月, 築<加召>·<馬頭>二城.

8년 가을 7월, 왕이 "내가 부덕함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맡았다. 우리 나라는 서쪽으로 백제를 이웃하고 남쪽으로 가야에 접하였으나, 나의 덕망은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지 못하고, 위엄은 외국을 두렵도록 하기에 부족하였으니, 마땅히 성과 보루를 수리하여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달에 두 곳, 즉 가소성과 마두성을 쌓았다.

○十一年, 秋七月, 分遣使十人, 廉察州郡主, 不勤公事, 致田野多荒者, 貶黜之.

11년 가을 7월, 열 명의 사신을 파견하여 주주와 군주들을 조사하고, 공무에 성실하지 않거나 농토를 많이 황폐하게 한 자가 있으면 직급을 내리거나 사직토록 하였다.

○十四年, 春正月, 拜< 良{允良}> 爲伊 , <啓其>爲波珍 . 二月, 巡幸<古所夫里>郡, 親問高年, 賜穀. 冬十月, 京都地震.

趙炳舜. 『三國史節要』.
14년 봄 정월, 윤량을 이찬으로 임명하고, 계기를 파진찬으로 임명하였다.
2월, 왕이 고소부리군에 행차하여 나이 많은 백성을 직접 위문하고 곡식을 주었다.
겨울 10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十五年, 春二月, <加耶>賊圍<馬頭城>. 遣阿 <吉元>, 將騎一千, 擊走之. 秋八月, 閱兵於<閼川>.

15년 봄 2월, 가야의 적군이 마두성을 포위하자 아찬 길원을 보냈다. 길원은 기병 1천을 거느리고 그들을 격퇴하였다.
가을 8월, 알천에서 군대를 사열하였다.

○十七年, 秋七月, 暴風自南, 拔<金城>南大樹. 九月, <加耶>人襲南鄙. 遣加城主<長世>拒之, 爲賊所殺. 王怒, 率勇士五千出戰, 敗之, 虜獲甚多.

17년 가을 7월, 남쪽에서 폭풍이 불어와 금성 남쪽에 있는 큰 나무가 뽑혔다.
9월, 가야 사람들이 남쪽 변경을 습격하였다. 성주 장세를 보내 방어토록 하였으나, 그가 전사하였다. 왕이 노하여 정예병 5천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그들을 물리쳤다. 노획한 물자가 매우 많았다.

○十八年, 春正月, 擧兵欲伐<加耶>, 其國主, 遣使請{謝} 罪, 乃止.

趙炳舜. 『三國史節要』.
18년 봄 정월, 군사를 동원하여 가야를 치려 하였으나, 그 임금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으므로 이를 중지하였다.

○十九年, 夏四月, 京都旱.

19년 여름 4월, 서울에 가뭄이 들었다.

○二十一年, 秋七月, 雨雹, 飛鳥死. 冬十月, 京都地震, 倒民屋, 有死者.

21년 가을 7월, 우박이 내려 날던 새가 죽었다.
겨울 10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민가가 쓰러지고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二十二年, 春二月, 築城, 名<月城>. 秋七月, 王移居<月城>.

22년 봄 2월, 성을 쌓고, 이를 월성이라 이름지었다.
가을 7월, 왕이 월성으로 옮겨 거주하였다.

○二十三年, 秋八月, <音汁伐國>與<悉直谷國>爭疆,  {詣} 王請 {決} . 王難之, 謂<金官國><首露王>, 年老多智識, 召問之. <首露>立議, 以所爭之地, 屬<音汁伐國>. 於是, 王命六部, 會饗<首露王>. 五部皆以伊 爲主, 唯<漢祇部>, 以位卑者主之. <首露>怒, 命奴<耽下里{ 下里}> , 殺<漢祇部>主<保齊>而歸. 奴逃, 依<音汁伐>主< 鄒干>家. 王使人索其奴, < 鄒>不送. 王怒, 以兵伐<音汁伐國>, 其主與衆自降. <悉直>·<押督>二國王來降. 冬十月,  {桃} 李華.

趙炳舜. 『三國史節要』.
23년 가을 8월, 음집벌국과 실직곡국이 국경 문제로 다투다가 왕에게 와서 결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왕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여기고, 금관국 수로왕이 나이가 많고 아는 것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불러와 물었다. 수로가 의견을 내어, 다투던 땅을 음집벌국에 주도록 하였다. 이에 왕은 6부로 하여금 수로왕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도록 하였다.
5부는 모두 이찬으로 우두머리를 삼았는데, 오직 한기부만은 직위가 낮은 자를 우두머리로 삼았다. 수로가 노하여 그의 종 탐하리를 시켜 한기부의 우두머리 보제를 죽이고 돌아갔다. 보제의 종이 도망하여 음집벌주 타추간의 집에 의탁하였다. 왕이 사람을 보내 그 종을 찾았으나 타추가 돌려 보내지 않았다. 왕이 노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음집벌국을 공격하니, 그 우두머리가 자기의 무리와 함께 스스로 항복하였다.
실직·압독 두 나라 왕이 항복해왔다.
겨울 10월, 복숭아와 오얏나무 꽃이 피었다.

○二十五年, 春正月, 衆星隕如雨, 不至地. 秋七月, <悉直>叛, 發兵討平之, 徙其餘衆於南鄙.

25년 봄 정월, 많은 별들이 비오듯 떨어졌으나, 땅에 이르지는 않았다.
가을 7월, 실직이 배반하자 군사를 보내 토벌 평정하고, 남은 무리를 남쪽 변경으로 옮겨 살도록 하였다.

○二十六年, 春正月, <百濟>遣使請和. 二月, 京都雪三尺.

26년 봄 정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해를 요청하였다.
2월, 서울에 석 자 깊이의 눈이 내렸다.

○二十七年, 春正月, 幸<押督>, 賑貧窮. 三月, 至自<押督>. 秋八月, 命<馬頭城>主, 伐<加耶>.

27년 봄 정월, 왕이 압독에 행차하여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3월에 압독으로부터 돌아왔다.
가을 8월, 마두성주에게 명령하여 가야를 정벌토록 하였다.

○二十九年, 夏五月, 大水. 民飢, 發使十道, 開食{倉} 賑給. 遣兵伐<比只國>·<多伐國>·<草八國>幷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29년 여름 5월에 홍수가 났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10도에 사신을 보내 창고를 열어 구제토록 하였다. 군사를 보내 비지국·다벌국·초팔국을 정벌하여 합병하였다.

○三十年, 秋七月, 蝗害穀. 王遍祭山川, 以 {祈} 禳之, 蝗滅, 有年.

趙炳舜. 『三國史節要』.
30년 가을 7월에 메뚜기 떼가 곡식을 해쳤다. 왕이 산천에 두루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올렸다. 메뚜기 떼가 없어지고 풍년이 들었다.

○三十二年, 夏四月, 城門自毁. 自五月, 至秋七月, 不雨.

32년 여름 4월에 성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5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三十三年, 冬十月, 王薨. 葬<蛇陵 {蛇陵園}> 內.

趙炳舜. 『三國史節要』.
33년 겨울 10월에 왕이 별세하였다. 사릉원에 장사지냈다.

○<祗摩>尼師今立,[或云<祇味>.] <婆娑王>嫡子. 母, <史省>夫人; 妃, <金>氏<愛禮>夫人, 葛文王<摩帝>之女也. 初, <婆娑王>獵於<楡 >之澤, 太子從焉. 獵後, 過<韓  {韓 部}> , 伊 <許婁>饗之. 酒 , <許婁>之妻,  {以 /携 }少女子出舞. <摩帝>伊 之妻, 亦(-引) 出其女, 太子見而悅之, <許婁>不悅. 王謂<許婁>曰: "此地名<大 >, 公於此, 置盛饌美 , 以宴 之, 宜位酒多, 在伊 之上." 以<摩帝>之女, 配太子焉. 酒多後云{稱} 角干.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는, 新舊唐書에는 '推'로 되어있으나, '携'가 옳다고 본다. 今西龍의 견해도 이와 같다.
지마 이사금[혹은 지미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파사왕의 적자이다. 어머니는 사성부인이다. 왕비는 김씨 애례부인인데, 그녀는 갈문왕 마제의 딸이었다. 애초에 파사왕이 유찬 못가에 가서 사냥할 때 태자도 동행하였다. 사냥을 한 뒤 한기부를 지날 때, 이찬 허루가 음식을 차려 대접하였다. 술 기운이 무르익자 허루의 아내가 젊은 딸을 데리고 나와 춤을 추었다. 그러자 이찬 마제의 부인도 역시 자기의 딸을 데리고 나왔다. 태자가 그녀를 보고 기뻐하였으나 허루는 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왕이 허루에게 말하기를 "이 곳 땅 이름이 대포(큰 부엌)인데, 공이 이 곳에서 훌륭한 음식과 좋은 술을 차려 잔치를 베풀어 즐겁게 하니, 직위를 주다(酒多:술이 많음)라고 하여 이찬 위에 두어야 마땅하겠다"라고 말하고, 마제의 딸을 태자의 배필로 삼았다. 주다는 뒤에 각간이라고 불리웠다.

○二年, 春二月, 親祀始祖廟. 拜<昌 {昌永}> 爲伊 , 以參政事, <玉權>爲波珍 , <申權>爲一吉 , <順宣>爲級 . 三月, <百濟>遣使來聘.

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봄 2월, 왕이 직접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창영을 이찬으로 임명하여 정사를 맡겼다. 옥권을 파진찬으로, 신권을 일길찬으로, 순선을 급찬으로 임명하였다.
3월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예방해왔다.

○三年, 春三月, 雨雹, 麥苗傷. 夏四月大水. 慮囚, 除死罪, 餘悉原之.

3년 봄 3월 우박이 내려 보리싹이 상하였다.
여름 4월에 홍수가 났다. 죄수들를 심사하여 사형수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다.

四年, 春二月, <加耶>寇南邊. 秋七月, 親征<加耶>. 帥步騎, 度<黃山河>, <加耶>人伏兵林, 薄以待之. 王不覺直前, 伏發圍數重, 王揮軍奮擊, 決圍而退.

4년 봄 2월, 가야가 남쪽 변경을 약탈하였다.
가을 7월, 왕이 가야를 직접 공격하였다.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황산하를 지나는데 가야인들이 숲 속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기다렸다. 왕은 이를 모르고 곧바로 전진하였는데, 복병이 나와 왕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왕은 군사를 지휘하여 맹렬히 싸워 포위를 뚫고 퇴각하였다.

○五年, 秋八月, 遣將侵<加耶>, 王帥精兵一萬以繼之, <加耶> 城固守. 會久雨, 乃還.

5년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가야를 공격하게 하고, 왕은 정병 1만을 거느려 뒤를 이었다. 가야는 성을 닫고 굳게 수비하였다. 그 때 마침 비가 오래 내렸으므로 왕은 되돌아 왔다.

○九年, 春二月, 大星墜<月城>西, 聲如雷. 三月, 京都大疫.

9년 봄 2월, 큰 별이 월성 서쪽에 떨어졌다.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3월, 서울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十年, 春正月, 以<翌宗>爲伊 , <昕連>爲波珍 , <林權>爲河 {阿 } . 二月, 築<大甑山城>. 夏四月, <倭>人侵東邊.

趙炳舜. 『三國史節要』.
10년 봄 정월, 익종을 이찬으로 임명하고, 흔련을 파진찬으로 임명하고, 임권을 아찬으로 임명하였다.
2월, 대증산성을 쌓았다.
여름 4월,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十一年, 夏四月, 大風東來, 折木飛瓦, 至夕而止. 都人訛言<倭>兵大來, 爭遁山谷. 王命伊 <翌宗>等諭止之. 秋七月, 飛蝗害穀, 年饑多盜.

11년 여름 4월, 큰 바람이 동쪽에서 불어와 나무를 꺾고 기와를 날렸다. 바람은 저녁이 되어서야 그쳤다.
서울 사람들이 왜병이 크게 몰려 온다는 헛 소문을 듣고 앞다투어 산골짜기로 피난하였다. 왕은 이찬 익종 등으로 하여금 그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돌아가도록 하였다.
가을 7월, 메뚜기 떼가 곡식을 해쳤으며, 흉년이 들어 도둑이 많았다.

○十二年, 春三月, 與<倭>國講和. 夏四月, 隕霜. 五月, <金城>東民屋, 陷爲他{池} , 芙 生.

趙炳舜. 『三國史節要』.
12년 봄 3월, 왜국과 강화하였다.
여름 4월, 서리가 내렸다.
5월, 금성 동쪽 민가가 내려 앉아 연못이 되었고, 그 곳에 연밥이 생겼다.

○十三年, 秋九月庚申晦, 日有食之.

13년 가을 9월 그믐 경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四年, 春正月, <靺鞨>大入北境, 殺掠吏民. 秋七月, 又襲<大嶺>柵, 過於<泥河>. 王移書<百濟>請救, <百濟>遣五將軍助之. 賊聞而退.

14년 봄 정월, 말갈이 북쪽 변경을 크게 공격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고 약탈했다. 가을 7월에 그들은 다시 대령 책을 습격하고 이하를 넘어왔다. 왕은 백제에 글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고, 백제는 다섯 명의 장군을 보내 돕게 하였다. 적은 이 소식을 듣고 물러갔다.

○十六年, 秋七月甲戌朔, 日有食之.

16년 가을 7월 초하루 갑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七年, 秋八月, 長星竟天. 冬十月, 國東地震. 十一月, 雷.

17년 가을 8월, 장성이 하늘 끝까지 뻗쳤다.
겨울 10월, 동쪽 지방에 지진이 있었다.
11월, 우레가 있었다.

○十八年, 秋, 伊 <昌永>卒. 以波珍 <玉權>爲伊 , 以參政事.

18년, 이찬 창영이 사망하자, 파진찬 옥권을 이찬으로 임명하여 정사에 참여시켰다.

○二十年, 夏五月, 大雨, 漂沒民戶.

20년 여름 5월, 큰 비가 내려 민가가 물에 잠겼다.

○二十一年, 春二月, 宮南門災.

21년 봄 2월, 궁궐 남문이 불탔다.

○二十三年, 春夏, 旱. 秋八月, 王薨, 無子.

23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가을 8월, 왕이 별세하였으나 아들이 없었다.

○<逸聖>尼師今立, <儒理王>長子.[或云<日知>葛文王之子.] 妃, <朴>氏, <支所禮王>之女.

일성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유리왕의 맏아들이다.[혹은 일지 갈문왕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왕비는 박씨인데, 그녀는 지소례왕의 딸이다.

○元年九月, 大赦.

원년 9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二年, 春正月, 親祀始祖廟.

2년 봄 정월, 왕이 직접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三年, 春正月, 拜<雄宣>爲伊 , 兼知內外兵馬事. <近宗>爲一吉 .

3년 봄 정월, 웅선을 이찬에 임명하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근종이 일길찬이 되었다.

○四年, 春二月, <靺鞨>入塞, 燒<長嶺>五柵.

4년 봄 2월, 말갈이 국경을 침범하여, 장령 지방의 다섯 곳의 책을 불태웠다.

○五年, 春二月, 置政事堂於<金城>. 秋七月, 大閱<閼川>西. 冬十月, 北巡, 親祀<大白山{太白山}> .

趙炳舜. 『三國史節要』.
5년 봄 2월, 금성에 정사당을 설치하였다.
가을 7월, 알천 서쪽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북쪽으로 순행하고, 태백산에서 직접 제사를 지냈다.

○六年, 秋七月, 隕霜殺菽. 八月, <靺鞨>襲<長嶺>, 虜掠民口. 冬十月, 又來, 雷{雪} 甚乃退.

趙炳舜. 『三國史節要』.
6년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콩이 죽었다.
8월, 말갈이 장령을 습격하여 약탈하고 주민들을 잡아갔다. 겨울 10월, 말갈이 다시 습격해왔으나, 우레가 심하게 울리자 물러갔다.

○七年, 春二月, 立柵<長嶺>, 以防<靺鞨>.

7년 봄 2월, 장령에 목책을 세워 말갈을 방어하였다.

○八年, 秋九月辛亥晦, 日有食之.

8년 가을 9월 그믐 신해일에 일식이 있었다.

○九年, 秋七月, 召群公議征<靺鞨>. 伊 <雄宣>上言: "不可." 乃止.

9년 가을 7월, 왕이 여러 대신들을 불러 말갈을 공격할 것을 논의하였으나, 이찬웅선이 "불가능하다"고 왕에게 말하자 이를 중지하였다.

○十年, 春二月, 修葺宮室. 夏六月乙丑, 熒惑犯鎭星. 冬十一月, 雷.

10년 봄 2월, 궁실을 수리하였다.
여름 6월 을축에 화성이 토성을 범했다.
겨울 11월, 우레가 있었다.

○十一年, 春二月, 下令: "農者政本, 食惟民天. 諸州郡修完堤坊, 廣闢田野." 又下令: "禁民間用金·銀·珠玉."

11년 봄 2월, 왕이 "농사는 정치의 근본이요, 먹는 것은 백성들에게 하늘처럼 귀중한 것이다. 모든 주와 군에서는 제방을 수리하고 밭과 들을 개간하여 넓히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한 "민간에서 금·은·주옥의 사용을 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十二年, 春夏旱, 南地最甚, 民飢, 移其粟賑給之.

12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남쪽 지방이 가장 심하여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식량을 운반하여 그들에게 공급하였다.

○十三年, 冬十月, <押督>叛, 發兵討平之. 徙其餘衆於南地.

13년 겨울 10월, 압독이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풀어 평정하고, 남은 무리들을 남쪽 지방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十四年, 秋七月, 命: 臣寮, 各擧智勇堪爲將帥者.

14년 가을 7월, 신하들에게 명하여 장수가 될만한 지혜와 용맹을 갖춘 자를 각각 천거하게 하였다.

○十五年, 封<朴阿道>爲葛文王.[<新羅>追封王, 皆稱葛文王, 其義未詳.]

15년, 박아도를 갈문왕에 봉했다.[신라에서는 추봉한 왕을 모두 갈문왕이라고 부르는데, 그 의미는 확실하지 않다.]

○十六年, 春正月, 以<得訓>爲沙 , <宣忠>爲奈麻. 秧{秋} 八月, 有星 于天市. 冬十一月, 雷. 京都大疫.

趙炳舜. 『三國史節要』.
16년 봄 정월, 득훈을 사찬, 선충을 내마로 삼았다.
가을 8월, 혜성이 천시 성좌에 나타났다.
겨울 11월, 우레가 있었고, 서울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十七年, 自夏四月不雨, 至秋七月, 乃雨.

17년, 여름 4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다가, 가을 7월이 되어서야 비가 내렸다.

○十八年, 春二月, 伊 <雄宣>卒. 以<大宣>爲伊 , 兼知內外兵馬事. 三月, 雨雹.

18년 봄 2월, 이찬 웅선이 사망하자, 대선을 이찬으로 임명하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3월, 우박이 내렸다.

○二十年, 冬十月, 宮門災. 彗星見東方, 又見東北方.

20년 겨울 10월, 궁궐 대문에 불이 났다.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가 다시 동북쪽에 나타났다.

○二十一年, 春二月, 王薨.
三國史記卷第一.

21년 봄 2월, 왕이 별세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1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