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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삼국사기 잡지 32권 제 1

삼국사기 잡지 (三國史記 雜志)

                                             (삼국사기 32권~40권 )       

 

三國史記卷第三十二
                                           

雜志第一.

祭祀·樂.

잡지 제 1.

제사. 음악.

祭祀.

제사.

○按<新羅>宗廟之制, 第二代<南解王>三年春, 始立始祖<赫居世>廟, 四時祭之, 以親妹<阿老>主祭. 第二十二代<智證主{智證王}>?, 於始祖誕降之地<奈乙>, 創立神宮, 以享之. 至第三十六代<惠恭王>, 始定五廟. 以<味鄒王>爲<金>姓始祖, 以<太宗大王>·<文武大王>, 平<百濟>·<高句麗>, 有大功德, ?爲世世不毁之宗, 兼親廟二爲五廟. 至第三十七代<宣德王>, 立社稷壇. 又見於祀典, 皆(+祭)?境內山川, 而不及天地者, 蓋以『王制』曰: "天子七廟, 諸侯五廟, 二昭·二穆與太祖之廟而五." 又曰: "天子祭天地·天下名山大川, 諸侯祭社稷·名山大川之在其地者." 是故, 不敢越禮而行之者歟. 然其壇堂之高下·?門之內外·次位之尊卑·陳設登降之節·尊爵·?豆·牲牢·冊祝之禮, 不可得而推也, 但粗記其大略云爾.

今西龍.『북한본』.

신라의 종묘 제도에 의하면, 제 2대 남해왕 3년 봄에 처음으로 시조 혁거세의 사당을 세우고 사계절 제사를 지냈는데, 친 누이동생 아로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제 22대 지증왕 때에 이르러 시조의 탄생지인 나을에 신궁을 창립하여 제사를 지냈다. 제 36대 혜공왕 때에 이르러 비로소 5묘를 제정하였는데, 미추왕은 김씨의 시조가 된다고 하여, 그리고 태종대왕과 문무대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한 큰 공덕이 있었다 하여 모두 대대로 제사를 지내는 조상으로 삼고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사당 둘을 합하여 5묘를 만들었다. 제 37대 선덕왕 때에 이르러 사직단을 세웠다. 또한 제사 예전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국내의 명산대천에는 제사를 지내면서 천지신명에까지 지내지 않은 것은 아마 [왕제]에 "천자는 7묘이며, 제후는 5묘이니, 두 소(昭) 두 목(穆)과 태조의 사당을 합하여 5묘이다"라고 한 것과 또한 [왕제]에 "천자는 천지신명과 천하의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내며, 제후는 사직과 그의 땅에 있는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낸다"라고 하였으므로 함부로 예에 벗어나지 않고 행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사직단 및 사당 높이, 사직단 주위의 담과 사당 문의 안팎 위치, 신위 순서의 높고 낮은 것, 제물 진설과 오르내리는 절차, 술잔, 제기, 제육, 축문 등에 대한 예법은 추측이 불가능하므로 그 대략의 내용만을 기록할 뿐이다.

○一年, 六祭五廟, 謂正月二日·五日, 五月五日, 七月上旬, 八月一日·十五日. 十二月寅日, <新城>北門, 祭八旨{八?/八?}?, ?年用大牢, 凶年用小牢. 立春後亥日, <明活城>南<熊殺谷>, 祭<先農>; 立夏後亥日, <新城>北門, 祭<中農>; 立秋後亥日, <?園>祭<後農>; 立春後丑日, <犬首谷>門, 祭<風伯>; 立夏後申日, <卓渚>祭<雨師>; 立秋後辰日, <本彼遊村>祭<靈星>.[檢諸禮典, 只祭<先農>, 無<中農>·<後農>.]

趙炳舜. 『三國史節要』에서는 '八?'로 교감하였고, 『북한본』에서는 '八?'로 교감하였다.

1년에 여섯 번씩 5묘에 제사를 지냈다. 그 날짜는, 정월 2일과 5일, 5월 5일, 7월 상순, 8월 1일과 15일이었다. 12월 인(寅)일에는 신성 북문에서 팔자(八?)에 제사를 지내는데 풍년에는 큰 소를 잡았으며, 흉년에는 작은 소를 잡았다.

입춘 후 해(亥)일에 명활성 남쪽 웅살곡에서 선농에 제사 지내고, 입하 후 해(亥)일에 신성 북문에서 중농에 제사 지내고, 입추 후 해(亥)일에 산원에서 후농에 제사 지내고, 입춘 후 축(丑)일에 견수곡 어구에서 풍백(風佰)에게 제사 지내고, 입하 후 신(申)일에 탁저에서 우사(雨師)에게 제사 지내고, 입추 후 진(辰)일에 본피유촌에서 영성(靈星)에 제사를 지냈었다.[여러 예전들을 상고하건대 선농에만 제사를 지냈고, 중농과 후농에 제사를 지냈다는 말은 없다.]

○三山五岳已下名山大川, 分爲大·中·小祀.

3산 5악 이하 명산 대천에 지내는 제사는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구분된다.

○大祀, 三山: 一<奈歷{柰歷}>?[<習比>部], 二<骨火>[<切也火郡>], 三<穴禮>[<大城郡>].

趙炳舜. 『三國史節要』.

대사는 세 산에 지냈는데, 첫째 나력산[습비부], 둘째 골화산[절야화군], 셋째 혈례산[대성군]이었다.

○中祀, 五岳: 東<吐含山>[<大城郡>], 南<地理山>[<菁州>], 西<鷄龍山>[<熊川州>], 北<太伯山>[<奈已郡>], 中<父岳>[一云<公山>, <押督郡>.]. 四鎭: 東<溫沫懃>[<牙谷停>], 南<海恥也里>[一云<悉帝>, <推大郡{推火郡}>?.], 西<加耶岬岳>[<馬尸山郡>], 北<熊谷岳>[<比烈忽郡>]. 四海: 東<阿等邊>[一云<斤鳥兄邊{近烏兄邊?/近烏只邊?}>, <退火郡>.], 南<兄邊>[<居柒山郡>], 西<未陵邊>[<屎山郡>], 北<非禮山>[<悉直郡>]. 四瀆: 東<吐只河>[一云<璉浦>, <退火郡>.], 南<黃山河>[<?良州>], 西<熊川河>[<熊川州>], 北<漢山河>[<漢山州>], <俗離岳>[<三年山郡>], <推心>[<火加耶郡{大加耶郡}>?], <上助音居西>[<西林郡>], <烏西岳>[<結已郡>], <北兄山城>[<大城郡>], <淸海鎭>[<助音島>].

今西龍.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

중사는 오악(五岳)과 사진(四鎭)과 사해(四海)와 사독(四瀆)에 제사지내는 것을 말한다. 오악(五岳)은 동쪽의 토함산[대성군], 남쪽의 지리산[청주], 서쪽의 계룡산[웅천주], 북쪽의 태백산[나이군], 중앙의 부악[공산이라고도 한다. 압독군]이다. 사진(四鎭)은 동쪽의 온말근[아곡정], 남쪽의 해치야리[실제라고도 한다. 추화군], 서쪽의 가야압악[마시산군], 북쪽의 웅곡악[비열홀군]이다. 사해(四海)는 동쪽의 아등변[근오형변이라고도 한다. 퇴화군], 남쪽의 형변[거칠산군], 서쪽의 미릉변[시산군], 북쪽의 비례산[실직군]이다. 사독(四瀆)은 동쪽의 토지하[참포라고도 한다. 퇴화군], 남쪽의 황산하[삽량주], 서쪽의 웅천하[웅천주], 북쪽의 한산하[한산주]이다. 이 이외에 속리악[삼년산군], 추심[대가야군], 상조음거서[서림군], 오서악[결이군], 북형산성[대성군], 청해진[조음도]에도 중사를 지냈다.

○小杞{小祀}?: <霜岳>[<高城郡>], <雪岳>[<?城郡>], <花岳>[<斤平郡>], <鉗岳>[<七重城>], <負兒岳>[<北漢山州>], <月奈岳>[<月奈郡>], <武珍岳>[<武珍州>], <西多山>[<伯海郡><難知可縣>], <月兄山>[<奈吐郡><沙熱伊縣{沙勳伊島}>?], <道西城>[<萬弩郡>], <冬老岳>[<進禮郡><丹川縣>], <竹旨>[<及伐山郡>], <熊只>[<屈自郡><熊只縣>], <岳髮>[一云<髮岳>, <于珍也郡>], <于火>[<生西良郡><于大縣{于火縣}>?], <三岐>[<大城郡>], <卉黃>[<牟梁>], <高墟>[<沙梁>], <嘉阿岳>[<三年山郡>], <波只谷原岳>[<阿支縣>], <非藥岳>[<退火郡>], <加林城>[<加林縣>, 一本有<靈椎山><虞風山>, 無<加林城>.], <加良岳>[<菁州>], <西述>[<牟梁>].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소사를 지낸 곳은 다음과 같다. 상악[고성군], 설악[수성군], 화악[근평군], 감악[칠중성], 부아악[북한산주], 월나악[월나군], 무진악[무진주], 서다산[백해군 난지가현], 월형산[나토군 사열이현], 도서성[만노군], 동로악[진례군 단천현], 죽지[급벌산군], 웅지[굴자군 웅지현], 악발[발악이라고도 한다. 우진야군], 우화[생서량군 우대현], 삼기[대성군], 훼황[모량], 고허[사량], 가아악[삼년신군], 파지곡원악[아지현], 비약악[퇴화군], 가림성[가림현. 어떤 기록에는 영암산 우풍산은 있으나 가림성은 없다.], 가량악[청주], 서술[모량].

○四城門祭: 一<大井門>, 二<吐山良門>, 三<習比門>, 四<王后梯門>. 部庭祭, 梁部四川上祭: 一<犬首>, 二<文熱林>, 三<靑淵>, 四<樸樹>. <文熱林>行, 日月祭; <靈廟寺>南, 行五星祭; <惠樹>, 行祈雨祭. 四大道祭: 東<古里>, 南<畯幷樹>, 西<渚樹>, 北<活倂岐>. 壓丘祭, 抗氣祭. 上件, 或因別制, 或因水旱, 而行之者也.

사성문제는 첫째 대정문, 둘째 토산량문, 셋째 습비문, 넷째 왕후제문에서 지냈으며, 부정제는 양부에서 지냈다. 사천상제는 첫째 견수, 둘째 문열림, 셋째 청연, 넷째 박수에서 지냈다. 문열림에서는 일월제를 지냈고, 영묘사 남쪽에서는 오성제를 지냈고, 혜수에서는 기우제를 지냈으며, 사대도제는 동쪽은 고리, 남쪽은 첨병수, 서쪽은 저수, 북쪽은 활병기에서 지냈다. 구릉의 귀신을 진압하는 제사와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제사도 지냈다. 이상과 같은 제사는 특별한 제도에 의하여 지내기도 하였고, 홍수와 가뭄이 발생하였을 때 지내기도 하였다.

○<高句麗>·<百濟>祀禮不明, 但考古記及<中國>史書所載者, 以記云爾.

고구려와 백제의 제사 예전은 명확하지 않으므로 다만 고기와 중국 역사에 실린 내용을 상고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後漢書』云: "<高句麗>, 好祀鬼神·社稷·<靈星>. 以十月祭天大會, 名曰東盟. 其國東有大穴, 號杻神{隧神}?, 亦以十月迎而祭之."

李丙燾. [魏志].

[북한본].

[후한서]에는 "고구려는, 귀신과 사직과 영성에 제사 지내기를 좋아하였다. 10월에는 하늘에 제사 지내기 위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였는데 이를 동맹이라 한다. 그 나라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이를 수신이라 부른다. 역시 10월에 그 신을 맞이하는 제사를 지낸다."고 기록되어 있다.

○『北史』云: "<高句麗>常以十月祭天, 多淫祠. 有神廟二所: 一曰夫餘神, 刻木作婦人像; 二曰高登神, 云是始祖夫餘神之子. 竝置官司, 遣人守護, 蓋<河伯>女·<朱蒙>云."

[북사]에는 "고구려는 항상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음사(淫祠)가 많았다. 신묘가 두 곳 있는데, 하나는 부여신이라 하여 나무를 조각하여 부인상을 만들었고, 다른 하나는 고등신인데, 이 사람이 시조로서 부여신의 아들이라고 한다. 이 두 곳에 모두 관서를 설치하고 사람을 보내 지키게 하였다. 부인상은 하백녀이며 고등신은 주몽을 말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梁書』云: "<高句麗>, 於所居之左, 立大屋, 祭鬼神, 冬{又}?祠<零星>·社稷."

李丙燾.

[양서]에는 "고구려는 왕궁 왼편에 큰 집을 세우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겨울에는 영성과 사직에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唐書』云: "<高句麗>俗多淫祠, 祀<靈星>及日·<箕子>·<可汗>等神. 國左有大穴, 曰神隧, 每十月, 王皆自祭."

[당서]에는 "고구려 풍속에는 음사(淫祠)가 많았으니, 영성과 해, 기자가한 등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나라의 왼쪽 지방에 큰 굴이 있는데 그것을 신수라 하여 매년 10월에 항상 왕이 직접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古記云: "<東明王>十四年, 秋八月, 王母<柳花>薨於<東扶餘>, 其王<金蛙>以大后{太后}?禮葬之, 遂立神廟. <大祖{太祖}?王>六十九年, 冬十月, 幸<扶餘>, 祀大后{太后}?廟; <新大王>四{三}?年, 秋九月, 如<卒本>, 祀始祖廟; <故國川王>元年, 秋九月, <東川王>二年, 春二月, <中川王>十三年, 秋九月, <故國原王>二年, 春二月, <安臧王>三年, 夏四月, <平原王>二年, 春二月, <建武王>二年, 夏四月, ?如上行. <故國壤王>九年, 春三月, 立國社." 又云: "<高句麗>, 常以三月三日, 會獵<樂浪>之丘, 獲猪鹿, 祭天及山川."

『북한본』.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고기에는 "동명왕 14년 가을 8월에 왕의 어머니 유화가 동부여에서 죽었다. 그 나라의 왕 금와가 태후의 예절을 갖추어 장사지내고 신묘를 세웠다. 태조왕 69년 겨울 10월에 왕이 부여에 가서 태후 사당에 제사를 지냈으며, 신대왕 4년 가을 9월에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 사당에 제사를 지냈으며, 고국천왕 원년 가을 9월과 동천왕 2년 봄 2월과 중천왕 13년 가을 9월과 고국원왕 2년 봄 2월과 안장왕 3년 여름 4월과 평원왕 2년 봄 2월과 건무왕 2년 여름 4월에 모두 위와 같이 제사를 지냈다. 고국양왕 9년 봄 3월에 국사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고구려는 항상 3월 3일에 낙랑의 언덕에 모여 사냥을 하여 돼지와 사슴을 잡아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冊府元龜』云: "<百濟>每以四仲之月, 王祭天及五帝之神, 立其始祖<仇台>廟於國城, 歲四祠之."[按『海東古記』或云始祖<東明>, 或云始祖<優台>. 『北史』及『隋書』皆云: "<東明>之後, 有<仇台>, 立國於<帶方>, 此云始祖<仇台>. 然<東明>爲始祖, 事迹明白, 其餘不可信也.]

[책부원구]에는 "백제는 사계절의 가운데 달마다 왕이 하늘과 5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서울에 시조 구태의 사당을 세우고 해마다 네 번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해동고기]에 의하면 시조 동명왕이라고 하기도 하고, 시조 우태라 하기도 한다. [북사]와 [수서]에는 모두 "동명의 후예에 구태라는 이가 있어 대방에서 나라를 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시조 구태라 하였다. 그러나 동명이 시조인 것은 사적에 명백하므로 다른 주장은 믿을 수 없다.]

○古記云: "<溫祚王>二十年, 春二月, 設壇祠天地. 三十八年, 冬十月, <多婁王>二年, 春二月, <古?王>五年, 春正月, 十年, 春正月, 十四年, 春正月, <近肖古王>二年, 春正月, <阿莘王>二年, 春正月, <?支王>二年, 春正月, <牟大王>十一年, 冬十月, ?如上行. <多婁王>二年, 春正月, 謁始祖<東明>廟. <責稽王>二年, 春正月, <汾西王>二年, 春正月, <契王>二年, 夏四月, <阿莘王>二年, 春正月, <?支王>二年, 春正月, ?如上行."

고기에는 "온조왕 20년 봄 2월에 단을 설치하여 천지신명에 제사를 지냈으며, 온조왕 38년 겨울 10월, 다루왕 2년 봄 2월, 고이왕 5년 봄 정월과 10년 봄 정월, 14년 봄 정월, 근초고왕 2년 봄 정월, 아신왕 2년 봄 정월, 전지왕 2년 봄 정월, 모대왕 11년 겨울 10월에 모두 위와 같이 제사지냈다. 다루왕 2년 봄 정월에 시조 동명왕 사당에 배알하였으며, 책계왕 2년 봄 정월, 분서왕 2년 봄 정월, 설왕 2년 여름 4월, 아신왕 2년 봄 정월, 전지왕 2년 봄 정월에 모두 시조 동명왕 사당에 배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樂.

음악

○<新羅>樂: 三竹·三絃·拍板·大鼓. 歌舞. 舞: 二人, 放角按頭·紫大袖公?·紅?鍍金?腰帶·烏皮靴. 三絃: 一玄琴, 二加耶琴, 三琵琶. 三竹: 一大太, 二中太, 三小太.

신라의 음악은 세 가지 관악기와 세 가지 현악기와 박판과 대고와 가무로 구성되었다. 춤에는 두 사람이 있는데, 방각복두를 쓰며 자대수공란을 입고, 홍정도금과요대를 띠고, 오피화를 신는다. 세 가지 현악기는 첫째 현금, 둘째 가야금, 셋째는 비파이다. 세 가지 관악기는 첫째 대함, 둘째 중함, 셋째 소함이다.

○玄琴, 衆{象}?<中國>樂部琴, 而爲之. 按『琴操』曰: "<伏犧>作琴, 以修身理性, 反其天眞也." 又曰: "琴長三尺六寸六分, 象三百六十六日; 廣六寸, 象六合. 文上曰池[池者水也, 言其平.]; 下曰濱[濱者服也.]. 前廣後狹, 象尊卑也; 上圓下方, 法天地也. 五絃, 象五行. 大賢{絃}?爲君, 十(+二)?絃(+琴以象十二月)?爲臣, <文王>·<武王>加二絃." 又『風俗通』曰: "琴長四尺五寸者, 法四時五行, 七絃, 法七星."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현금은 중국 악부의 금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금조]에는 "복희가 금을 만들어 수신 수양하여, 하늘이 내려준 천성을 회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금의 길이는 석 자 여섯 치 여섯 푼이니 366일을 상징하고, 넓이는 여섯 치이니 육합을 상징하였으며, 판 위를 지(池)[지는 연못이니 공평함을 의미한다.]라 하고, 판 밑을 빈(濱)[빈은 복종을 의미한다.]이라 하였으며, 앞이 넓고 뒤가 좁은 것은 사람의 존비를 표시함이오, 위가 둥글고 아래가 모난 것은 하늘과 땅을 모방한 것이며, 다섯 줄은 오행을 상징한 것이오, 큰 줄은 임금, 10줄은 신하를 나타내는데, 문왕과 무왕이 두 줄을 더 첨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풍속통]에는 "금의 길이는 넉 자 다섯 치이니 이는 사시와 오행을 모방한 것이오, 일곱 줄은 칠성을 모방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玄琴之作也. <新羅>古記云: "初, 晋人以七絃琴, 送<高句麗>. <麗>人雖知其爲樂器, 而不知其聲音及鼓之之法, 購國人能識其音而鼓之者, 厚賞. 時, 第二相<王山岳>, 存其本樣, 頗改易其法制而造之, 兼製一百餘曲, 以奏之. 於時, 玄鶴來舞, 遂名玄鶴琴, 後但云玄琴."

현금의 제작과 관련하여 신라 고기에는 "처음에 진(晉)나라 사람이 칠현금을 고구려에 보냈다. 고구려 사람들이 비록 그것이 악기인 줄은 알았으나 그 음률과 연주법을 알지 못하여 나라 사람들 중에 그 음률을 알아서 연주할 수 있는 자를 구하여 후한 상을 주겠다고 하였다. 이 때 둘째 재상인 왕 산악이 칠현금의 원형태를 그대로 두고, 만드는 방법을 약간 고쳐서 이를 다시 만들었다. 동시에 1백여 곡을 지어 그것을 연주하였다. 이 때 검은 학이 와서 춤을 추었으므로 마침내 현학금(玄鶴琴)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그 뒤로는 다만 현금이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羅>人沙瑗<?永>子<玉寶高>, 入<地理山><雲上院>, 學琴五十年, 自製新調三十曲, 傳之<續命得>, <得>傳之<貴金>先生. 先生亦入<地理山>, 不出. <羅>王恐琴道斷絶, 謂伊瑗<允興>, 方便傳得其音, 遂委<南原>公事. <允興>到官, 簡聰明少年二人, 曰<安長>·<淸長>, 使詣山中傳學. 先生敎之, 而其隱微不以傳. <允興>與婦偕進曰: "吾王遣我<南原>者, 無他, 欲傳先生之技, 于今三年矣, 先生有所秘而不傳, 吾無以復命." <允興>捧酒, 其婦執盞膝行, 致禮盡誠. 然後, 傳其所秘飄風等三曲. <安長>傳其子<克相>·<克宗>, <克宗>制七曲, <克宗>之後, 以琴自業者, 非一二, 所製音曲有二調, 一平調, 二羽調, 共一百八十七曲. 其餘聲遺曲流傳, 可記者無幾, 餘悉散逸, 不得具載.

신라 사람 사찬 공영의 아들 옥 보고가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서 50년 동안 금을 연구하였다. 그는 스스로 30곡을 새로 지어 이것을 속명득에게 전하였고, 속명득은 이것을 귀금 선생에게 전하였다. 귀금 선생이 역시 지리산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으니 신라왕이 금의 연주법이 없어질까 염려하여 이찬 윤흥에게 명령하여 어떻게 해서라도 그 법을 배워 오게 하고, 마침내 그에게 남원의 공사를 맡겼다. 윤흥이 임지에 도착하여 총명한 소년 두 명, 즉 안장과 청장을 선발하여 지리산에 가서 금의 연주법을 배워오게 하였다. 귀금 선생이 그들에게 금의 연주법을 가르쳐 주었으나 그 미묘한 부분은 알려 주지 않았다. 윤흥이 자기 처와 함께 가서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나를 남원으로 보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선생의 기술을 이으려는 것인데, 지금까지 3년이 되었으나 선생이 숨기면서 알려 주지 않는 것이 있으니, 내가 왕에게 복명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윤흥은 술을 들고 그의 처는 잔을 잡고 무릎으로 기어 예의와 정성을 다하니, 그렇게 한 뒤에야 그가 숨겼던 표풍(飄風) 등의 세 곡을 알려 주었다. 그리하여 안장은 그의 아들 극상과 극종에게 전하여 극종이 일곱 곡을 지었으며, 극종의 뒤에는 금으로써 자기의 업을 삼은 자가 한 둘이 아니었다. 그들이 지은 음률에는 두 가지 조가 있었는데 첫째는 평조(平調)요 둘째는 우조(羽調)이며 전부가 187곡이었다. 그 나머지의 곡이 세상에 유행하였으나 기록할만한 것이 거의 없었으며, 기타의 것은 모두 흩어져 없어졌으므로 여기에 모두 등재하지 못한다.

○<玉寶高>所制三十曲: 上院曲一, 中院曲一, 下院曲一, 南海曲二, 倚椎曲一, 老人曲七, 竹庵曲二, 玄合曲一, 春朝曲一, 秋夕曲一, 吾沙息曲一, 鴛鴦曲一, 遠岵曲六, 比目曲一, 入實相曲一, 幽谷淸聲曲一, 降天聲曲一. 克宗所製七曲, 今亡.

옥 보고가 지은 30곡은 상원곡 1, 중원곡 1, 하원곡 1, 남해곡 2, 의암곡 1, 노인곡 7, 죽암곡 2, 현합곡 1, 춘조곡 1, 추석곡 1, 오사식곡 1, 원앙곡 1, 원호곡 6, 비목곡 1, 입실상곡 1, 유곡 청성곡 1, 강천성곡 1이었으며, 극종이 지은 7곡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加耶琴, 亦法<中國>樂部箏而爲之. 『風俗通』曰: "爭, 秦聲也." 『釋名』曰: "箏施絃高, 箏箏然, <幷>·<梁>二州, 箏形如瑟." 『傅玄』曰: "上圓象天, 下平象地, 中空准六合, 絃·柱擬十二月, 斯乃仁智之器." <阮瑀>曰: "箏長六尺, 以應律數; 絃有十二, 象四時; 柱高三寸, 象三才." 加耶琴, 雖與箏制度小異, 而大槪似之.

가야금도 중국 악부의 쟁(箏)을 모방하여 만들었다. [풍속통]에는 "쟁은 진(秦)나라 악기"라 하였고, [석명]에는 "쟁은 줄을 높이 걸었기 때문에 소리가 쟁쟁하며, 병(幷) 양(梁) 두 주의 쟁은 모양이 비파와 같다"고 하였다. 부 현은 "위가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한 것이고, 아래가 평평한 것은 땅을 상징한 것이며, 가운데가 빈 것은 육합을 모방한 것이고, 줄과 괘는 12달을 모방한 것인 바, 이야말로 어질고 슬기로움을 상징하는 기구이다"라고 말하였다. 완 우는 "쟁의 길이는 6자이니, 이는 율의 수에 맞춘 것이고, 현은 12줄이니, 이는 사시를 상징한 것이며, 괘의 높이는 3치이니, 이는 삼재를 상징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가야금이 비록 쟁의 제도와 조금 다르기는 하나 거의 그것과 유사하다.

○<羅>古記云: "<加耶國><嘉實王>, 見<唐>之樂器, 而造之. 王以謂諸國方言各異聲音, 豈可一哉, 乃命樂師<省熱縣>人<于勒>, 造十二曲. 後, <于勒>以其國將亂, 携樂器, 投<新羅><眞興王>. 王受之, 安置<國原>, 乃遣大奈麻<注知>·<階古>·大舍<萬德>, 傳其業. 三人旣傳十一{二}?曲, 相謂曰: '此繁且淫, 不可以爲雅正.' 遂約爲五曲. <于勒>始聞焉而怒, 及聽其五種之音, 流淚歎曰: '樂而不流, 哀而不悲, 可謂正也, 爾其奏之王前.' 王聞之大悅. 諫臣獻議: <加耶>亡國之音, 不足取也. 王曰: '<加耶>王, 淫亂自滅, 樂何罪乎. 蓋聖人制樂, 緣人情以爲?節, 國之理亂, 不由音調.' 遂行之, 以爲大樂." 加耶琴有二調, 一河臨調, 二嫩竹調, 共一百八十五曲.

趙炳舜. 『三國史節要』.

신라 고기에는 "가야국 가실왕이 당 나라 악기를 보고 만든 것인데, 가실왕이 스스로 이에 대하여 '모든 나라의 방언은 각각 그 성음이 다른 것인데 어찌 당나라의 노래만 부를 수 있으랴?'라고 말하고, 악사인 성열현 사람 우륵에게 명령하여 12곡을 창작하게 하였다. 그 후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우륵이 악기를 가지고 신라 진흥왕에게 귀순하였다. 왕이 그를 받아 들여 국원에 정착시키고, 곧 대나마 주지, 계고와 대사 만덕 등을 보내 그에게서 수업하게 하였다. 세 사람이 11곡을 배우고 나서 서로 말하기를 '이 음악이 번잡하고 음탕하여 우아한 음악이 될 수 없다'라 하고, 마침내 그것을 줄여 다섯 곡으로 만들었다. 우륵이 처음 이 말을 듣고 성을 내었으나 그 다섯 가지 음률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감탄하여 '즐겁고도 방탕하지 않으며, 애절하면서도 슬프지 않으니 바르다고 할 만하다. 너희들이 왕의 앞에서 이를 연주하여라'라고 말하였다. 진흥왕이 그 곡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간관들이 건의하기를 '가야에서 나라를 망친 음악을 취할 것이 없다'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가야왕이 음탕하고 난잡하여 자멸한 것이지 음악에 무슨 죄가 있으랴? 대체로 성인이 음악을 제정함에 있어서는 사람의 정서에 따라 이를 조절하도록 한 것이므로, 나라의 태평과 혼란이 음률 곡조와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라 하고, 마침내 이를 펼쳐 주된 음악을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야금에는 두 조(調)가 있었는데 첫째는 하림조(河臨調)요, 둘째는 눈죽조(嫩竹調)이니 모두 185곡이었다.

○<于勒>所製十二曲: 一曰下加羅都, 二曰上加羅都, 三曰寶伎, 四曰達己, 五曰思勿, 六曰勿慧, 七曰下奇物, 八曰師子伎, 九曰居烈, 十曰沙八兮, 十一曰爾赦, 十二曰上奇物. <泥文{尼文}>?所製三曲: 一曰烏, 二曰鼠, 三曰?.[赦字未詳.]

趙炳舜. 『三國史節要』.

우륵이 지은 12곡은 첫째는 하가라도, 둘째는 상가라도, 셋째는 보기, 넷째는 달기, 다섯째는 사물, 여섯째는 물혜, 일곱째는 하기물, 여덟째는 사자기, 아홉째는 거열, 열째는 사팔혜, 열 한째는 이사, 열 두째는 상기물이었다. 니문이 지은 3곡은 첫째는 까마귀, 둘째는 쥐, 셋째는 메추라기였다.['사(赦)'자의 뜻은 분명치 않다]

○琵琶, 『風俗通』曰: "近代樂家所作, 不知所起. 長三尺五寸, 法天地人與五行. 四絃, 象四時也." 『釋名』曰: "琵琶, 本胡中馬上所鼓, 推手前曰琵, 引手却曰琶, 因以爲名." 鄕琵琶, 與<唐>制度, 大同而少異, 亦始於<新羅>, 但不知何人所造. 其音有三調: 一宮調, 二七賢調, 三鳳皇調, 共二百一十二曲.

비파는, [풍속통]에 "근대 음악가들이 만든 것으로서 그 시초는 알 수 없다. 비파 길이의 석 자 다섯 치는 하늘, 땅, 사람과 오행을 모방한 것이오, 네 줄은 사시를 상징한 것이다"라 고 기록되어 있고, [석명]에는 "비파는 원래 호족들이 말 위에서 연주하던 것인데, 손을 앞으로 내미는 것을 비(琵)라 하고, 손을 끌어 당기는 것을 파(琶)라고 하기 때문에 이를 악기의 이름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향비파(鄕琵琶)는 당 나라의 비파와 대체로 같으나 약간 다르며, 그것도 신라에서 시작되었는데 다만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음악에는 세 가지 조가 있는 바, 첫째는 궁조, 둘째는 칠현조, 셋째는 봉황조이니 모두 212곡이었다.

○三竹, 亦模倣<唐>笛, 而爲之者也. 『風俗通』曰: "笛, <漢><武帝>時, <丘仲>所作也." 又按: <宋玉>有『笛賦』, <玉>在<漢>前, 恐此說非也. <馬融>云: "近代雙笛, 從<羌>起. 又笛, 滌也, 所以滌邪穢, 而納之於雅正也. 長一尺, 四十七孔." 鄕三竹, 此亦起於<新羅>, 不知何人所作. 古記云: "<神女王{神文王}>?時, 東海中忽有一小山, 形如龜頭, 其上有一竿竹, 晝分爲二, 夜合爲一. 王使斫之作笛, 名萬波息." 雖有此說, 怪不可信. 三竹笛有七調: 一平調, 二黃鐘調, 三二雅調, 四越調, 五般涉調, 六出調, 七俊調. 大太三百二十四曲, 中太二百四十五曲, 小太二百九十八曲.

李丙燾. [三國遺事].

[북한본].

삼죽은 역시 당 나라의 저를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풍속통]에는 "저는 한 무제 때 구중이 만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다시 고찰하여 보면 송옥의 작품에 [적부]가 있는데 송옥은 한 나라 이전 사람이니, 이 설은 옳지 않은 듯하다. 마융은 "근대의 쌍저는 강(羌)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또한 적(笛)은 척(滌)의 뜻이니, 간사하고 더러운 것을 씻어 버리고, 맑고 바른 데로 인도하자는 것이다. 길이는 한 자이며, 47개의 구멍이 있다"고 말하였다. 향삼죽(鄕三竹)은 역시 신라에서 시작되었는데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고기에는 "신문왕 때 동해 가운데에 갑자기 작은 산이 생겼는데, 모양이 거북의 머리와 같고 그 위에 한 포기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갈라져 두 개가 되고, 밤에는 합쳐져 하나가 되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 대나무를 쪼개어 저를 만들게 하고, 이름을 만파식(萬波息)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 말이 괴이하여 믿을 수는 없다. 삼죽저에는 일곱 조가 있는바 첫째는 평조, 둘째는 황종조, 셋째는 이아조, 넷째는 월조, 다섯째는 반섭조, 여섯째는 출조, 일곱째는 준조이다. 대함은 324곡이오, 중함은 245곡이오, 소함은 298곡이다.

○會樂及辛熱樂, <儒理王>時作也; 突阿樂, <脫解王>時作也; 枝兒樂, <婆娑王>時作也; 思內[一作詩惱.]樂, <奈解王>時作也; ?舞, <奈密王>時作也; 憂息樂, <訥祗王>時作也; ?樂, <慈悲王>時人<百結>先生作也; 竿引, <智大路王>時人<川上><郁皆子>作也; 美知樂, <法興王>時作也; 徒領歌, <眞興王>時作也; 捺絃引, <眞平王>時人<淡水>作也; 思內奇物樂, <原郞徒>作也; 內知, <日上郡>樂也; 白實, <坤梁郡{押梁郡}>?樂也; 德思內, <河西郡>樂也; 石南思內道, <同伐郡>樂也; 祀中, <北?郡>樂也. 此皆鄕人喜樂之所由作也, 而聲器之數·歌舞之容, 不傳於後世. 但古記云: "<政明王{神文王}>?九年, 幸<新村>, 設?奏樂. ?舞: 監六人, ?尺二人, 舞尺一人. 下辛熱舞: 監四人, 琴尺一人, 舞尺二人, 歌尺三人. 思內舞: 監三人, 琴尺一人, 舞尺二人, 歌尺二人. 韓岐舞: 監三人, 琴尺一人, 舞尺二人. 上辛熱舞: 監三人, 琴尺一人, 舞尺二人, 歌尺二人. 小京舞: 監三人, 琴尺一人, 舞尺一人, 歌尺三人. 美知舞: 監四人, 琴尺一人, 舞尺二人. <哀莊王>八年, 奏樂, 始奏思內琴, 舞尺四{三}?人靑衣, 琴尺一人赤衣, 歌尺五人彩衣·繡扇?金鏤帶. 次奏?{砧}?琴(-舞)?, 舞尺赤衣, 琴尺靑衣." 如此而已, 則不可言其詳也. <羅>時樂工皆謂之尺. <崔致遠>詩, 有鄕樂雜詠五首, 今錄于此.

金丸: 廻身掉臂弄金丸, 月轉星浮滿眼看. 縱有<宜僚>那勝此, 定知鯨海息波瀾.

月顚: 肩高項縮髮崔嵬, 攘臂群儒鬪酒盃. 聽得歌聲人盡笑, 夜頭旗幟曉頭催.

大面: 黃金面色是其人, 手抱珠鞭役鬼神. 疾步徐?呈雅舞, 宛如<丹>鳳舞堯春.

束毒: 蓮頭藍面異人間, 押隊來庭學舞鸞. 打鼓冬冬風瑟瑟, 南奔北躍也無端.

?猊: 遠涉流沙萬里來, 毛衣破盡着塵埃.搖頭掉尾馴仁德, 椎{雄}?氣寧同百獸才.

『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顯宗實錄字本』.

회악과 신열악은 유리왕 때 만들었으며, 돌아악은 탈해왕, 지아악은 파사왕, 사내[시뇌라고도 한다.]악은 나해왕, 가무는 나밀왕, 우식악은 눌지왕 때 만든 것이다. 대악은 자비왕 때 사람인 백결 선생이 만들었으며, 간인은 지대로왕 때 사람인 천상 욱개자가 만든 것이다. 미지악은 법흥왕 때 만든 것이며, 도령가는 진흥왕 때 만든 것이다. 날현인은 진평왕 때 사람인 담수가 만들었으며, 사내 기물악은 원랑도가 만든 것이오, 내지는 일상군의 음악이오, 백실은 압량군의 음악이오, 덕사내는 하서군의 음악이오, 석남사내도는 동벌군의 음악이오, 사중은 북외군의 음악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우리 나라 사람들이 기쁘고 즐거웠을 때 만들었다. 그러나 곡조와 악기의 수 및 가무의 형태는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고기에는 "정명왕(신문왕) 9년에 왕이 신촌에 거동하여 큰 술잔치를 베풀고 음악을 연주하였는데, 가무(?舞)에는 감(監)이 6명, 가척(?尺)이 2명, 무척이 1명; 하신열무에는 감이 4명, 금(琴)척이 1명, 무척이 2명, 가척이 3명; 사내무에는 감이 3명, 금척이 1명, 무척이 2명, 가척이 2명; 한기무에는 감이 3명, 금척이 1명, 무척이 2명; 상신열무에는 감이 3명, 금척이 1명, 무척이 2명, 가척이 2명; 소경무에는 감이 3명, 금척이 1명, 무척이 1명, 가척이 3명; 미지무에는 감이 4명, 금척이 1명, 무척이 2명이었다. 애장왕 8년에 음악을 연주하는데 처음으로 사내금을 연주하였다. 무척 4명은 푸른 옷을 입었으며, 금척 1명은 붉은 옷을 입었고, 가척 5명은 채색 옷을 입고 수놓은 부채를 들고 금을 새겨 넣은 띠를 띠었다. 다음으로 대금무를 연주하는데 무척은 붉은 옷을 입었으며 금척은 푸른 옷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록이 이러할 뿐이니 자세한 것을 말할 수가 없다. 신라 시대에 악공은 모두 척(尺)이라고 불렀다. 최치원의 시에 향악잡영 5수가 있으므로 이제 다음에 기록한다.

금환(金丸): 몸을 돌리고 팔 휘두르며 금구슬을 희롱하니

달 흐르고 별 떠올라 눈에 가득 차누나.

의좋은 친구있다한들 어찌 이보다 더 좋으랴?

넓은 세상 태평한 것 이제야 알겠구나.

월전(月顚): 높은 어깨 움추린 목, 머리털 높이 세우고

팔을 걷은 뭇 선비들 술잔 시비 한창이네.

노래 소리 듣고서 사람 모두 웃는데

밤에 세운 깃발이 새벽을 재촉하누나.

대면(大面): 황금빛 얼굴 그 사람이

구슬 채찍 들고 귀신 부리네.

빠른 걸음 조용한 모습으로 운치있게 춤추니

붉은 봉새가 요시대 봄철에 춤추는 것 같구나.

속독(束毒): 엉킨 머리 쪽빛 얼굴, 사람 같지 않은데

떼를 지어 뜰에 나와 난새 춤을 배우네.

북은 둥둥 울리고, 바람 솔솔 부는데

이리 저리 뛰어 놀아 끝이 없구나.

산예(?猊): 머나먼 길 걷고 걸어 사막을 지나오니

털 가죽은 헤어지고 먼지가 쌓였는데

흔드는 머리, 흔드는 꼬리에 어진 모습 배었구나.

웅장한 그의 기상, 모든 짐승이 못미치리.

○<高句麗>樂, 『通典』云: "樂工人紫羅帽, 飾以鳥羽, 黃大袖, 紫羅帶, 大口袴, 赤皮?, 五色緇繩. 舞者四人, 椎?於後, 以絳抹額, 飾以金?, 二人黃裙?·赤黃袴, 二人赤黃裙?·袴, 極長其袖, 烏皮?, 雙雙倂立而舞. 樂用: 彈箏一, 堯箏一, 臥?糊一, 竪?糊一, 琵琶一, 五絃一, 義?笛一, 笙一, 橫笛一, 簫一, 小禑?一, 大禑?一, 桃皮禑?一, 腰鼓一, 齋鼓一, ?鼓一, 唄一. 大<唐><武太后>時, 尙二十五曲, 今唯能習一曲, 衣服亦?{睍}?衰敗, 失其本風." 『冊府元龜』云: "樂有: 五絃琴·箏·禑?·橫吹·簫·鼓之屬, 吹蘆以和曲."

趙炳舜

고구려 음악에 대해서는 [통전]에 "악공들은 자색 비단 모자에 새 깃을 장식하고, 황색의 큰 소매옷에 자색 비단 띠를 띠었으며, 통이 넓은 바지에 붉은 가죽신을 신고, 오색 물을 들인 끈으로 장식하였다. 춤추는 자는 네 명인데, 복상투를 뒤에 늘이고, 붉은 수건을 이마에 매고, 금고리로 장식하였다. 두 명은 황색 치마 저고리에 적황색 바지를 입고, 두 명은 적황색 치마 저고리에 바지를 입었는데, 소매를 매우 길게 하였으며, 검은 가죽신을 신고, 두 명씩 나란히 서서 춤을 춘다. 악기로는 탄쟁 하나, 국쟁 하나, 와공후 하나, 수공후 하나, 비파 하나, 오현금 하나, 의취저 하나, 생(笙) 하나, 횡저 하나, 퉁소 하나, 소필률 하나, 대필률 하나, 도피필률 하나, 요고 하나, 재고 하나, 첨고 하나, 패 하나를 사용하였다. 당 무태후 때도 25곡이 있었는데 지금은 한 곡만을 익힐 수 있고, 의상마저 점점 낡고 없어져서 그 원래 풍습을 상실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책부원구]에는 "악기에 오현금, 쟁, 피리, 횡저, 퉁소, 북 등이 있고 갈대를 불어서 곡조를 조화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百濟>樂, 『通典』云: "<百濟>樂, <中宗>之代, 工人死散, <開元>中, <岐王範>爲大常卿{太常卿}?, 復奏置之, 是以音伎多闕. 舞者二人, 紫大袖·裙?, 章甫冠, 皮履. 樂之存者, 箏·笛·桃皮禑?·?糊, 樂器之屬, 多同於內地." 『北史』云: "有鼓角·??·箏·?·?·笛之樂."

三國史記卷第三十二.

趙炳舜

백제의 음악에 대하여 [통전]에는 "백제 음악은 당 나라 중종 시대에 악공들이 죽고 흩어졌는데, 개원 연간에 기왕범이 태상경이 되어서야 다시 백제 음악을 설치하도록 건의하였기 때문에 전해지지 않은 음곡이 많다. 춤추는 자 두 명은 자색 큰 소매 치마 저고리와 장보관(章甫冠)에 가죽신을 신었다. 악기로서 남아 있는 것은 쟁, 저, 도피필률, 공후인데, 악기류는 중국과 같은 것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북사]에는 "고, 각, 공후, 쟁, 간, 저, 저와 같은 악기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권 제 3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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