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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삼국유사 1권 전문

                                      삼국유사 (三國遺事)

                                                                                             출처:직지 프로젝트


삼국유사 해제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함께 현존하는 우리 고대(古代) 사적(史籍)의 쌍벽으로 일컬어져 온다.

<삼국사기>는 왕명(王命)에 의하여 사관(史官)이 저술한 정사(正史)로서, 체재(體裁)가 정연하고 문사(文辭)가 유창하고 화려하다.  이에 비하여 <삼국유사>는 선사(禪師) 한 개인의 손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야사(野史)로서, 체재가 짜여지지 못했고 문사 또한 박잡(駁雜)하다 하겠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많은 값어치를 지니고 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신라·백제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史書)이지만, 그 밖에 고조선·기자 및 위만조선을 비롯하여 가락 등의 역사가 포함되어 있다.  특히 고조선에 관한 서술은 오늘날 우리들로 하여금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할 수 있고, 단군을 국조(國祖)로 받드는 배달 민족의 긍지를 갖게 해 주었다.  만약 이 기록이 없었던들 우리는 삼국 시대 이전에 우리 역사를 중국의 사료(史料)인 <삼국지(三國志)>의 동이전(東夷傳)에 겨우 의존하는 초라함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삼국유사>는 당시의 사서 찬술이 규범에는 벗어나는 체재의 부정연(不整然)과 내용의 탄괴(誕怪)·잡다(雜多)함이 오히려 오늘날 이 책을 더욱 귀한 재보(財寶)로 여기지 않을 수 없는 소이(所以)가 되고 있다.

우선 <삼국유사>에는 단군 신화를 비롯한 많은 신화와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실로 <삼국유사>는 우리의 신화와 원형적 옛 전설의 모습을 알게 하는 유일한 책으로 가위 설화 문학(說話文學)의 보고라 할 만하다.  게다가 이 땅 최고(最古)의 정형 시가(定型詩歌)인 향가(鄕歌) 14수가 실려 있어 <균여전(均與傳)>에 전하는 11수와 함께 주옥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으니 국문학 관계로는 사서 이상의 귀한 보전(寶典)이 되고 있다.  수록한 향가의 수는 비록 많은 것이 못 되지만 향가를 집대성한 책으로 알려진 <삼대목(三代目)>이 전하지 않는 지금, <삼국유사>의 문학사적 가치는 실로 절대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밖에도 <삼국사기>에는 빠졌거나 또는 고의로 빼 버린 많은 사실들이 수록되어 있다.  불교에 관한 풍부한 자료와 신앙 사상·민속·일화 등 다방면에 걸친 내용은 모두가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물론 저자가 사관이 아닌 승려의 신분으로서 이 같은 책을 저술함에 있어, 더러는 인용서와 그 내용이 같지 않은 것도 있고, 잘못 전해져 오는 것을 그대로 수집·수록한 것도 없지 않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 책 자체가 그 서명(書名)이 말하듯이 일사 유문적(逸事遺聞的)인 것이기 때문에 따르는 불가피한 것이라 하겠다.

이 책의 저자 일연(一然)은 고려 희종(熙宗) 2년(1206)에 경산(慶山)에서 출생했다.  속성(俗姓)은 김씨요, 이름은 경명(景明), 자는 회연(晦然)이다.  9세 때 출가하여 남해(南海)의 무량사(無量寺)에 들어가 수도 생활을 했다.  22세 때에 선과(禪科)에 급제하고 54세 때에 대선사가 되었다.  78세 때 충렬왕(忠烈王)이 승지(承旨)를 보내어 왕명으로 국사의 예를 갖추고자 하였으나, 굳이 이를 사양하므로 다시 근친의 장군을 보내어 국존(國尊)으로 책봉하고 궁내로 맞이해 들였다.  그러나 그는 궁성에 있기를 싫어하여 노모의 병을 빙자하고 구산(舊山)으로 내려갔다.  84세 되던 1289년 7월 8일 제자로 하여금 북을 치게 하고 자기는 의자에 앉아 여러 승려와 더불어 담소자약(談笑自若)하게 선문답을 하다가 갑자기 손으로 금강인(金剛印)을 맺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높은 덕과 깊은 학문으로 왕의 극진한 존경을 받았으며 많은 사람들의 추상의 대상이었다 한다.

비문에 의하면 그의 저·편저로는, 어록 2권, 게송 잡서(偈頌雜書) 3권, 조동 오위(曹洞五位) 2권, 조도(祖圖) 2권,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3권, 제승 법수(諸乘法數) 7권, 조정 사원(祖庭事苑) 30권, 선문 점송 사원(禪門拈頌事苑) 30권 등 불서(佛書) 80권이 넘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는 것이 거의 없고, 어찌 보면 그로서는 희작(戱作)이라 할 수 있어 비문에도 적혀 있지 않은 <삼국유사>만이 유저(遺著)로 전해지고 있다.

 

<삼국유사>는 모두 5권으로 다음과 같은 체재로 되어 있다.

 

제 1권: 왕력 제 1(신라·고구려·백제·가락 및 후삼국의 연대표), 기이 제 1(고조선 이하 삼한·부여·고구려와 통일 삼국 이전의 신라의 유사)

제 2권: 기이 제 2(신라 문무왕 이후 통일 신라 시대를 비롯하여 백제·후백제 등에 관한 약간의 유사와 가락국에 관한 유사)

제 3권: 흥법 제 3(불교 전래의 유래 및 고승의 행적), 탑상 제 4(사기와 탑·불상 등에얽힌 승전과 사탑의 유레에 관한 기록)

제 4권: 의해 제 5(고승들의 행적)

제 5권: 신주 제 6(이승들의 전기), 감통 제 7(영험·감응의 영이한 기록), 피은 제 8(은둔한 일승들의 기록, 효선 제 9(효행·선행·미담의 기록)

 

<삼국유사>의 간행 연대는 확실히 알 길이 없으나 대체로 충렬왕 8년 전후, 즉 서기 1281∼1283년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삼국유사>의 고판본으로는 중종 정덕본과 그 이전에 된 듯한 판각의 영본이 있고, 시간본으로는 일본 토교 대학본, 조선 사학회본, 계명 구락부에서 간행한 육당의 교감본과 또 육당의 증보본이 있다.  그 밖에 안순암 수택의 정덕본을 영인한 일본 교토 대학본과 고전 간행회본이 있다.

이 책의 번역은 중종 임신본(壬申本)을 원본으로 했다.  때문에 흔히 유행되는 육당 증보본과는 간혹 틀리는 곳이 있을 것이다.  원문이 너무도 난해한 구절이 많아 역자로서는 힘에 겨운 작업이었다. 특히 향가의 번역은 더구나 완벽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내 딴에는 충실히 다루려고 애썼다.  이번에 판을 바꾸어 내면서 먼저 판 번역에서 잘못된 부분이나 문맥이 매끄럽지 않은 부분은 바로잡아 독자의 이해를 돕도록 하였다.  삼가 제언(諸彦)의 질정(叱正)이 있으시길 빈다.

 

                                                                                             이 민 수 씀


 

 

삼국유사(三國遺事) 차례

제 1권

기이(紀異) 제 1

고조선(古朝鮮) 왕검조선(王儉朝鮮)

위만조선(魏(衛)滿朝鮮)

마한(馬韓)

이부(二府)

칠십이국(七十二國)

낙랑국(樂浪國)

북대방(北帶方)

남대방(南帶方)

말갈(靺鞨)과 발해(渤海)

이서국(伊西國)

오가야(五伽倻)

북부여(北夫餘)

동부여(東夫餘)

고구려(高句麗)

변한(卞韓)과 백제(百濟)

진한(辰韓)

우사절유택(又四節遊宅)

신라시조(新羅始祖) 혁거세왕(赫居世王)

제2대 남해왕(南解王)

제3대 노례왕(弩禮王)

제4대 탈해왕(脫解王)

김알지(金閼智), 탈해왕대(脫解王代)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미추왕(未鄒王)과 죽엽군(竹葉軍)

내물왕(奈勿王)과 김제상(金(朴)堤上)

제18대 실성왕(實聖王)

사금갑(射琴匣)

지철로왕(智哲老王)

진흥왕(眞興王)

도화녀(桃花女)와 비형랑(鼻荊郞)

천사옥대(天賜玉帶)

선덕왕(善德王)의 지기삼사(知幾三事)

진덕왕(眞德王)

김유신(金庾信)

태종(太宗) 춘추공(春秋公)

장춘랑(長春郞)과 파랑(罷郞)

제 2권

기이(紀異) 제 2

문호왕(文虎(武)王) 법민(法敏)

만파식적(萬波息笛)

효소왕대(孝昭王代)의 죽지랑(竹旨郞)

성덕왕(聖德王)

수로부인(水路夫人)

효성왕(孝成王)

경덕왕(景德王)·충담사(忠談師)·표훈대덕(表訓大德)

혜공왕(惠恭王)

원성대왕(元聖大王)

조설(早雪)

흥덕왕(興德王)과 앵무새

신무대왕(神武大王)과 염장(閻長)과 궁파(弓巴)

제48대 경문대왕(景文大王)

처용랑(處容郞)과 망해사(望海寺)

진성여대왕(眞聖女大王)과 거타지(居타知)

효공왕(孝恭王)

경명왕(景明王)

경애왕(景哀王)

김부대왕(金傅大王)

남부여(南扶餘)와 전백제(前百濟)와 북부여(北扶餘)

무왕(武王)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

가락국기(駕洛國記) 

 

제 3권

흥법(興法) 제 3

순도조려(順道肇麗)

난타벽제(難타闢濟)

아도기라(阿道基羅

원종흥법(原宗興法)과 염촉멸신(염촉滅身)

법왕금살(法王禁殺)

보장봉로(寶藏奉老) 보덕이암(普德移庵)

동경흥륜사(東京興輪寺) 금당십성(金堂十聖)

 

 

탑상(塔像) 제 4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

요동성(遼東城)의 육왕탑(育王塔)

금관성(金官城)의 파사석탑(婆娑石塔)

고(구)려(高(句)麗)의 영탑사(靈塔寺)

황룡사(皇龍寺) 장육(丈六)

황룡사(皇龍寺) 구층탑(九層塔)

황룡사(皇龍寺)의 종, 분황사(芬皇寺)의 약사(藥師) 봉덕사(奉德寺)의 종

영묘사(靈妙寺) 장육(丈六)

사불산(四佛山), 굴불산(掘佛山), 만불산(萬佛山)

생의사(生義寺) 석미륵(石彌勒)

흥륜사(興輪寺)의 벽화(壁畵), 보현(普賢)

삼소관음(三所觀音)과 중생사(衆生寺)

백률사(栢栗寺)

민장사(敏藏寺)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

미륵선화(彌勒仙花)·미시랑(未尸郎)·진자사(眞慈師)

남백월이성(南白月二聖), 노힐부득(努힐夫得)과 달달박박(달달朴朴)

분황사 천수대비(芬皇寺千手大悲) 맹아득안(盲兒得眼)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 관음(觀音)·정취(正趣), 조신(調信)

어산불영(魚山佛影)

대산(臺山) 오만진신(五萬眞身)

명주(溟州) 오대산 보질도 태자전기(五臺山 寶叱徒 太子傳記)

대산월정사(臺山月精寺) 오류성중(五類聖衆)

남월산(南月山

천룡사(天龍寺)

무장사(무藏寺) 미타전(彌陀殿)

백엄사(伯嚴寺) 석탑사리(石塔舍利)

영취사(靈鷲寺)

유덕사(有德寺)

오대산문수사(五臺山文殊寺) 석탑기(石塔記)

 


 제 4권

의해(意解) 제5

원광서학(圓光西學)

보양이목(寶壤梨木)

양지사석(良志使錫)

귀축제사(歸竺諸師)

이혜동진(二惠同塵)

자장정률(慈藏定律)

원효불기(元曉不羈)

의상전교(義湘傳敎)

사복불언(蛇福不言)

진표전간(眞表傳簡)

관동풍악(關東楓岳) 발연수석기(鉢淵藪石記)

승전촉루(勝詮촉루)

심지계조(心地繼祖)

현유가(賢瑜가), 해화엄(海華嚴)

 

 

제 5권

신주(神呪) 제 6

밀본최사(密本최邪)

혜통황룡(惠通降龍)

명랑신인(明朗神印)

 

감통(感通) 제7

선도성모(仙桃聖母) 수희불사(隨喜佛事)

욱면비 염불 서승(郁面婢 念佛 西昇)

광덕(廣德)과 엄장(嚴莊)

경흥우성(憬興遇聖)

진신수공(眞身受供)

월명사(月明師) 도솔가(兜率歌)

선율환생(善律還生)

김현감호(金現感虎)

융천사(融天寺) 혜성가(慧星歌) 진평왕대(眞平王代)

정수사(正秀師) 구빙녀(九氷女)

 

 

피은(避隱) 제 8

낭지승운(朗智乘雲), 보현수(普賢樹)

연회도명(緣會逃名), 문수점(文殊岾)

혜현구정(惠現求靜)

신충괘관(信忠掛冠)

포산이성(包山二聖)

영재우적(永才遇賊)

물계자(勿稽子).

영여사(迎如師)

포천산(布川山) 5비구(五比丘) 경덕왕대(景德王代)

염불사(念佛師)

 

효선(孝善) 제9

진정사(眞定師) 효선쌍미(孝善雙美)

대성(大城) 효2세부모(孝二世父母) 신문왕대(神文王代)

향득사지(向得舍知) 할고공친(割股供親) 경덕왕대(景德王代)

손순매아(孫順埋兒) 흥덕왕대(興德王代)

빈녀양모(貧女養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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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三國遺事)  

 

제 1권 

 

기이(紀異) 제1

 

첫 머리에 말한다.

대체로 옛날 성인(聖人)은 예절과 음악을 가지고 나라를 세웠고, 인(仁)과 의(義)를 가지고 백성들을 가르쳤다.  때문에 괴상한 일이나 힘이나 어지러운 일, 귀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왕(帝王)이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부명(符命)을 얻고 도록(圖록)을 받게 된다.  때문에 보통 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뒤에라야 큰 변의 틈을 타서 대기(大器)를 잡아 대업을 이룩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하수(河水)에서 그림이 나왔고, 낙수(洛水)에서 글이 나와서 이로써 성인(聖人)이 일어났던 것이다.  무지개가 신모(神母)의 몸을 두르더니 복희(伏羲)를 낳고, 용이 여등(女登)에게 교접하더니 염제(炎帝)를 낳았다.  황아(皇娥)가 궁상(窮桑)이라는 들판에서 노는데 자칭 백제(白帝)의 아들이라고 하는 신동(神童)이 와서 황아와 교접하여 소호(少昊)를 낳았다.  간적(簡狄)은 알[卵] 하나를 삼키더니 설[契]를 낳고 강원(姜嫄)은 한 거인(巨人)의 발자취를 밟고서 기(充)를 낳았다.  요(堯)의 어머니는 잉태한 지 14개월이 된 뒤에 요(堯)를 낳았고, 패공(沛公)의 어머니는 용(龍)과 큰 연못에서 교접해 패공을 낳았다.  이 뒤로도 이런 일이 많지만 여기에선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이렇게 볼 때 삼국(三國)의 시조가 모두 신비스러운 데서 나왔다고 하는 것이 어찌 괴이할 것이 있으랴.  이 기이편을 이 책의 첫머리에 싣는 것은 그 뜻이 실로 여기에 있다. 

 

고조선(古朝鮮) 왕검조선(王儉朝鮮)

 

<위서(魏書)>에 이렇게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 왕검이 있었다.  그는 아사달(阿斯達; 경經에는 무엽산無葉山이라 하고 또는 백악白岳이라고도 하는데 백주白州에 있었다.  혹은 또 개성開城 동쪽에 있다고도 한다.  이는 바로 지금의 백악궁白岳宮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고 불렀으니 이것은 고(高)와 같은 시기였다."

또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환인(桓因; 제석帝釋을말함)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란 이가 있었는데 자주 천하를 차지할 뜻을 두어 사람이 사는 세상을 탐내고 있었다.  그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산(三位太伯山)을 내려다보니 인간들을 널리 이롭게 해 줄 만했다.  이에 환인은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환웅(桓雄)에게 주어 인간(人間)의 세계를 다스리게 했다.  환웅(桓雄)은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마루턱(곧 태백산太白山은 지금의 묘향산妙香山)에 있는 신단수(神檀樹) 밑에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고, 이 분을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고 이른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수명(壽命)·질병(疾病)·형벌(刑罰)·선악(善惡) 등을 주관하고, 모든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敎化)했다.  이때 범 한 마리와 곰 한 마리가 같은 굴 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항상 신웅(神雄), 즉 환웅에게 빌어 사람이 되어지기를 원했다.  이때 신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줌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했다.

이에 곰과 범이 이것을 받아서 먹고 삼칠일(21일) 동안 조심했더니 곰은 여자의 몸으로 변했으나 범은 조심을 잘못해서 사람의 몸으로 변하지 못했다.  웅녀(熊女)는 혼인해서 같이 살 사람이 없으므로 날마다 단수(壇樹) 밑에서 아기 배기를 축원했다.  환웅이 잠시 거짓 변하여 그와 혼인했더니 이내 잉태해서 아들을 낳았다.  그 아기의 이름을 단군 왕검(檀君王儉)이라 한 것이다.  단군 왕검은 당고(唐高)가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庚寅年; 요堯가 즉위한 원년元年은 무진戊辰년이다.  그러니 50년은 정사丁巳요, 경인庚寅은 아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닌지 의심스럽다)에 평양성(平壤城; 지금의 서경西京)에 도읍하여 비로소 조선(朝鮮)이라고 불렀다.  또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옮기더니 궁홀산(弓忽山; 일명 방홀산方忽山)이라고도 하고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그는 1,500년 동안 여기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나라 호왕(虎王)이 즉위한 기묘(己卯)년에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했다.  이에 단군(檀君)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서 아사달(阿斯達)에 숨어서 산신(山神)이 되니, 나이는 1908세였다고 한다."

당나라 <배구전(裴矩傳)>에는 이렇게 전한다.  "고려(高麗)는 원래 고죽국(孤竹國; 지금의 해주海州)이었다.  주(周)나라에서 기자(箕子)를 봉해 줌으로 해서 조선(朝鮮)이라 했다.  한(漢)나라에서는 세 군(郡)으로 나누어 설치하였으니 이것은 곧 현토(玄토)·낙랑(樂浪)·대방(帶方;북대방北帶方)이다."

<통전(通典)>에도 역시 이 말과 같다(한서漢書에는 진번眞蕃·임둔臨屯·낙랑樂浪·현토玄토의 네 군郡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세 군郡으로 되어 있고, 그 이름도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일까?). 

 

위만조선(魏(衛)滿朝鮮)

 

<전한서(前漢書)>의 조선전(朝鮮傳)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다.  "맨 처음 연(燕)나라 때부터 진번(眞蕃)·조선(朝鮮; 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전국戰國 시대에 연燕나라가 처음으로 이 땅을 침략해서 차지했다고 한다)을 침략해서 이를 차지하고, 관리들을 두어 변방(邊方)의 요새(要塞)를 쌓았다.  그 뒤에 진(秦)이 연(燕)을 멸망시키자 이 땅을 요동군(遼東郡) 변방에 소속시켰다.  한(漢)나라가 일어나자 이 땅이 너무 멀어 지킬 수 없다 하여 다시 요동의 옛날 요새(要塞)를 수리해서 쌓고 패수(浿水)로 경계를 삼아(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패수浿水는 낙랑군樂浪郡에 있다고 했다) 연(燕)나라에 소속시켰다.

연(燕)나라 왕 노관(盧관)이 한(漢)나라를 배반하고 흉노(匈奴)에게로 들어가니,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은 망명(亡命)해서 무리 1,000여 명을 모아 요동(遼東)의 요새지를 넘어 도망하여 패수(浿水)를 건넜다.  여기에서 진(秦)나라의 옛 빈 터전인 상하(上下)의 변방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차츰 진번(眞蕃)·조선(朝鮮)의 오랑캐들과 또 옛날에 연(燕)과 제(齊)에서 망명(亡命)해 온 자들을 자기에게 소속시켜 왕이 되어 왕검(王儉; 이기李寄는 땅이름이라 했고, 신찬臣瓚은 말하기를 왕검성王儉城은 낙랑군樂浪郡의 패수浿水 동쪽에 있다고 했다)에 도읍했다.  위만(衛滿)은 군사의 위력(威力)으로 그 이웃의 조그만 읍(邑)들을 침략하여 항복시켰다.  이에 진번(眞蕃)과 임둔(臨屯)이 모두 복종해 와서 그에게 예속되니 사방이 수천 리나 되었다.  위만은 아들에게 왕위를 전하고 손자 우거(右渠; 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위만의 손자 이름이 우거右渠라고 했다)에게 이르렀다.

진번과 진국(辰國)이 한나라에 글을 올려 천자(天子)를 뵙고자 했으나 우거(右渠)는 길을 가로막고 지나지 못하게 했다(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진국辰國은 진한辰韓이라고 했다).  원봉(元封) 2년에 한나라에서는 섭하(涉何)를 보내어 우거를 타일렀지만 우거는 끝내 명령을 듣지 않았다.  섭하(涉何)는 그곳을 떠나 국경에 이르러 패수에 당도하자 말을 모으는 구종(驅從)을 시켜서 자기를 호송(護送)하러 온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 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장長은 섭하涉何를 호송護送하는 자의 이름이라고 했다)을 찔러 죽였다.  그리고는 곧 패수를 건너 달려서 변경 요새를 넘어 자기 나라에 돌아가 이 사실을 보고했다.

한나라 천자는 섭하를 임명하여 요동의 동부(東部) 도위(都尉)를 삼았다.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여 불의에 그를 쳐 죽였다.  천자는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보내서 제(齊)에서 배를 타고 발해(渤海)로 건너가 조선을 치게 하니 병력은 5만이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체)는 요동으로 나와서 우거(右渠)를 쳤다.  우거는 지세가 험한 곳에 군사를 내어 그를 막았다.  누선장군(樓船將軍)은 제(齊)의 군사 7,000명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성(王儉城)에 이르렀다.  이때 우거는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누선(樓船)의 군사가 얼마 되지 않는 것을 정탐해서 알고 곧 나가서 누선을 공격하니 누선이 패해 달아났다.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은 군사들을 잃고 산 속으로 도망해서 죽음을 면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체)도 조선의 패수 서쪽을 쳤지만 깨뜨리지 못했다.

천자는 누선장군과 좌장군의 형세가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이에 위산(胃散)을 시켜 군병(軍兵)의 위력을 가지고 가서 우거를 타이르게 했다.  우거는 항복하기를 청하고 태자(太子)를 보내어 말[馬]을 바치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1만여 명이나 되는 병력을 거느리고 바야흐로 패수를 건너려 하는데 사자(使者)인 위산과 좌장군은 혹시 변을 일으킬까 의심하여 태자에게 일렀다.  '이미 항복한 터이니 병기(兵器)는 가지고 오지 마시오.'  태자도 사자인 위산이 혹 자기를 속여 해치지 않을까 의심하여 마침내는 패수를 건너지 않고 군사를 데리고 돌아갔다.  이 사실을 천자에게 보고하자 천자는 위산을 목베었다.  좌장군(左將軍)은 패수 상류에 있는 조선 군사를 깨뜨리고 바로 전진하여 왕검성 밑에까지 이르러 성의 서북쪽을 포위했다.  누선장군도 역시 왕검성 밑으로 와서 군사를 합쳐 성 남쪽에 주둔했다.  우거가 굳게 성을 지켜 몇 달이 지나도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천자는 이 싸움이 오래 되어도 끝이 나지 않자 옛날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시켜서 치게 하고, 모든 일을 편의에 의해서 처리하게 했다.  공손수는 우선 누선장군을 묶어 놓고 그 군사를 합쳐서 좌장군과 함께 급히 조선을 공격했다.  이때 조선의 상(相) 노인(路人)과 상(相) 한도(韓陶)와 또 이계(尼谿)의 상(相) 삼(參)과 장군(將軍) 왕겹(王겹; 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이계尼谿는 지명地名으로 이들은 모두 네 명名이라고 했다)은 서로 의논하여 항복하려 했으나 왕은 이 말을 좇으려 하지 않았다.  이에 한도(韓陶; 음陰)와 왕겹(王겹)은 모두 도망해서 한나라에 항복했고 노인은 도중에서 죽었다.  원봉(元封) 3년 여름에 이계(尼谿)의 상(相) 삼(參)은 사람들을 시켜서 왕 우거를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했다.  하지만, 왕검성은 아직도 함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거의 대신(大臣)인 성기(成己)가 또 자기 나라를 배반했다.  좌장군(左將軍)은 우거의 아들 장(長)과 노인(路人)의 아들 최(最)로 하여금 자기들의 백성을 타이르고 성기를 죽이도록 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임둔·낙랑·현토(玄토)의 네 군(郡)으로 삼았다.

 

마한(馬韓)

 

위지(魏志)에 이렇게 말했다.  "위만(魏滿)이 조선(朝鮮)을 공격하자 조선왕(朝鮮王) 준(準)은 궁인(宮人)과 좌우 사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서쪽 한(漢)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이라고 했다."

또 견훤(甄萱)이 고려(高麗) 태조(太祖)에게 올린 글에, "옛적에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뒤를 이어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났으며, 백제(百濟)는 금마산(金馬山)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했다.

최치원(崔致遠)은 이렇게 말했다.  "마한은 고구려(高句麗)이고, 진한(辰韓)은 신라(新羅)다."(<삼국사기三國史記> 본기本紀에 의하면 신라新羅는 먼저 갑자甲子년에 일어났고, 고구려高句麗는 그 뒤 갑신甲申년에 일어났다고 했다.  여기에 말한 것은 조선왕朝鮮王 준準을 가리킨 것이다.  이것으로 본다면 동명왕東明王이 일어날 때에 마한馬韓까지 차지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고구려高句麗를 마한馬韓이라고 부른다.  지금 사람들은 혹 금마산金馬山이 있다고 해서 마한馬韓을 백제百濟라고 하지만 이것은 대개 잘못된 말이다.  고구려高句麗 땅에는 본래 읍산邑山이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마한馬韓이라 한 것이다)

사이(四夷)·구이(九夷)·구한(九韓)·예맥(穢貊)이 있는데, <주례(周禮)>에 직방씨(職方氏)가 사이(四夷)와 구맥(九貊)을 관장(管掌)했다고 한 것은 동이(東夷)의 종족이니 곧 구이(九夷)를 말한 것이다.

<삼국사(三國史)>에는 이렇게 씌었다.  "명주(溟州)는 옛날의 예국(穢國)이었다.  야인(野人)이 밭을 갈다가 예왕(穢王)의 도장을 얻어서 바쳤다.  또 춘주(春州)는 옛날의 우수주(牛首州)인데 곧 옛날의 맥국(麥麴)이다.  또 혹은 지금의 삭주(朔州)가 바로 맥국(貊國)이다.  혹은 평양성(平壤城)이 맥국이다."

<회남자(淮南子)> 주(注)에는, "동방(東方)의 오랑캐는 아홉 종류나 된다"고 했다.

<논어정의(論語正義)>에는 "구이(九夷)란, 1은 현토(玄토), 2는 낙랑(樂浪), 3은 고려(高麗), 4는 만식(萬飾), 5는 부유(鳧臾), 6은 소가(嘯歌), 7은 동도(同屠), 8은 왜인(倭人), 9는 천비(天鄙)이다"라고 했다.

<해동안홍기(海東安弘紀)>에는, "구한(九韓)이란, 1은 일본(日本), 2는 중화(中華), 3은 오월(吳越), 4는 탁라(탁羅), 5는 응유(鷹遊), 6은 말갈(靺鞨), 7은 단국(丹國), 8은 여진(如眞), 9는 예맥(穢貊)이다"라고 했다. 
 

이부(二府)

 

<전한서(前漢書)>에 이렇게 말했다.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 기해(己亥)년 두 외부(外府)를 두었다.  이것은 조선(朝鮮)의 옛 땅인 평나(平那)와 현토군(玄토郡) 등을 평주도독부(平州都督府)로 삼고, 임둔(臨屯) ·낙랑(樂浪) 등 두 군(郡)의 땅에 동부도위부(東部都尉府)를 둔 것을 말함이다."(내가 생각하기에 조선전朝鮮傳에는 진번眞蕃·현토玄토·임둔臨屯·낙랑樂浪 등 네 군郡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이 글에는 평나平那가 있고 진번眞蕃이 없으니 대개 한 지방을 두 이름으로 불렀던 것 같다) 

 

칠십이국(七十二國)

 

<통전(通典)>에 이렇게 말했다.  "조선의 유민(遺民)은 모두 70여 나라로 나뉘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땅이 사방(四方) 백 리(百里)이다."

또 <후한서(後漢書)>에는 "서한(西漢)이 조선의 옛 땅에 처음으로 네 군(郡)을 두었다가 뒤에 두 부(府)를 두었다.  법령(法令)이 차츰 번거로워지자 이것을 78개의 나라로 나누니, 이들은 각각 만호(萬戶)였다"했다(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어 54개의 조그만 읍邑을 가지고 있었는데 모두 나라라고 불렀다.  진한辰韓은 동쪽에 있고 12개의 작은 읍邑을 차지했는데 모두 나라라고 했다.  변한卞韓은 남쪽에 있어 역시 12개의 작은 읍邑을 차지했는데 이들도 저마다 나라라고 일컬었다). 

 

낙랑국(樂浪國)

 

전한(前漢) 때 처음으로 낙랑군(樂浪郡)을 두었다.  응소(應邵)는 말하기를 이것을 "고조선국(古朝鮮國)"이라 했다.

<신당서(新唐書)> 주(注)에, "평양성(平壤城)은 옛 한(漢)나라의 낙랑군(樂浪郡)이다"했다.

<국사(國史)>에는 이런 말이 있다.  "혁거세(赫居世) 30년에 낙랑(樂浪) 사람들이 신라(新羅)에 항복했다.  또 제3대 노례왕(弩禮王) 4년에 고구려(高句麗)의 제3대 무휼왕(無恤王)이 낙랑(樂浪)을 멸망시키니 그 나라 사람들은 대방(帶方; 북대방北帶方)과 함께 신라에 투항해 왔다.  또 무휼왕(無恤王) 27년에 광호제(光虎帝)가 사자(使者)를 보내어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郡縣)을 삼으니, 살수(薩水) 이남의 땅은 한(漢)나라에 소속되었다."(이상의 여러 글에 의하면 낙랑樂浪이 곧 평양성平壤城이란 것이 마땅하다.  혹은 말하기를, 낙랑樂浪의 중두산中頭山 밑이 말갈靺鞨과의 경계이고, 살수薩水는 지금의 대동강大洞江이라고 한다.  어느 말이 옳은 지 알 수가 없다)

또한 백제(百濟) 온조왕(溫祚王)의 말에는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靺鞨)이 있다"고 했다.

이는 아마도 옛날 한(漢)나라 때 낙랑군에 소속되었던 현(縣)일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역시 이곳을 낙랑(樂浪)이라고 했기 때문에 지금 고려(高麗)에서도 또한 여기에 따라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이라 불렀다.  또 태조(太祖)가 그 딸을 김부(金傅)에게 시집보내면서 역시 낙랑공주(樂浪公主)라 불렀다. 

 

북대방(北帶方)

 

북대방(北帶方)은 본래 죽담성(竹覃城)이다.  신라 노례왕(弩禮王) 4년에 대방(帶方) 사람들이 낙랑(樂浪) 사람들과 함께 신라에 항복해 왔다(이것은 모두 전한前漢 때에 설치한 두 군郡의 이름이다.  그 후에 참람되이 나라라고 불러 오다가 이때에 와서 항복한 것이다). 

 

남대방(南帶方)

 

조위(曹魏) 때 비로소 남대방군(南帶方郡; 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이라 한 것이다.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 리(千里)나 되는데 한해(澣海)라고 했다(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年間에 마한馬韓 남쪽의 황무지를 대방군帶方郡으로 삼았다.  왜倭와 한漢이 드디어 여기에 속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말갈(靺鞨; 혹은 물길勿吉)과 발해(渤海)

 

<통전(通典)>에 이렇게 말했다.  "발해(渤海)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이다.  그 추장(酋長) 조영(祚榮)에 이르러서 나라를 세우고 국호(國號)를 스스로 진단(震旦)이라고 했다.  선천(先天) 연간(年間; 현종玄宗의 임자년壬子年)에 비로소 말갈(靺鞨)이라는 명칭을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고 일컬었다.  개원(開元) 7년(己未)에 조영(祚榮)이 죽자, 그 시호(諡號)를 고왕(高王)이라 했다.  세자(世子)가 대(代)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명황(明皇)은 그를 책봉하여 왕위를 잇게 했다.  사사로이 연호를 고치고 드디어 해동(海東)의 큰 나라가 되었다.  그 땅에는 오경(五京)·십오부(十五府)·육십이주(六十二州)가 있었다.  후당(後唐) 천성(天成) 초년에 거란(契丹)이 이것을 쳐서 깨쳤다.  그 뒤로는 마침내 거란에게 지배를 받게 되었다."(<삼국사三國史>에는 이렇게 말했다.  "의봉儀鳳 3年, 고종高宗 무인년戊寅年에 고구려의 남은 무리가 그 여당餘黨을 모아 북으로 태백산太伯山 밑에 의지해서 국호를 발해渤海라고 했다.  개원開元 20年 경에 당唐의 명황明皇이 장수를 보내서 발해渤海를 토벌했다.  또 성덕왕聖德王 32年, 현종玄宗 갑술甲戌년에 발해渤海·말갈靺鞨이 바다를 건너 당唐나라 등주登州를 침범하자 현종玄宗은 이를 쳤다."  또 <신라고기新羅古記>에 이런 말이 있다.  "고구려高句麗의 구장舊將 조영祚榮의 성姓은 대씨大氏이다.  그는 남은 군사를 모아 태백산太伯山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발해渤海라고 했다."  위의 여러 글을 상고하건대 발해渤海는 바로 말갈靺鞨의 별종別種이다.  다만 그 갈라지고 합한 것이 서로 같지 않을 뿐이다.  또 <지장도指掌圖>를 상고해 보면 발해渤海는 만리장성萬里長城 동북東北 모퉁이 밖에 있었다)

가탐(賈眈)의 <군국지(郡國志)>에는, "발해국(渤海國)의 압록(鴨綠) ·남해(南海) ·부여(扶餘) ·추성(추城) 등 사부(四府)는 모두 고구려(高句麗)의 옛땅이었다.  신라(新羅) 천장군(泉井郡; <지리지地理志>에는 삭주朔州의 영현領縣에 천정군泉井郡이 있었으니 지금의 용주湧州이다)에서 추성부(추城府)에 이르기까지 도합 39역(三十九驛)이 있다"고 하였다.  또 <삼국사(三國史)>에는 "백제(百濟)의 말년에 발해·말갈·신라가 백제의 땅을 나누어 가졌다"고 했다(이 말에 의하면 발해는 또 나뉘어서 두 나라가 된 것이다).

신라 사람들은, "북쪽에는 말갈이 있고 남쪽에는 왜인(倭人)이 있고, 서쪽에는 백제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나라의 해가 된다"고 했고, 또 "말갈은 땅이 아슬라주(阿瑟羅州)에 연접되어 있다"고 했다.

<동명기(東明記)>에는, "졸본성(卒本城)은 땅이 말갈(혹은 지금의 동진東眞이라 함)에 연접되어 있다.  신라의 제6대 지마왕(祗摩王) 14년(丑乙)에, 말갈의 군사가 북쪽 국경으로 크게 들어와 대령(大嶺)의 성책(城柵)을 습격하고 이하(泥河)로 지나갔다"고 했다.

<후위서(後魏書)>에는, "말갈은 바로 물길(勿吉)이다"고 했고, <지장도(指掌圖)>에는, "읍루(읍婁)와 물길(勿吉)은 다 숙신(肅愼)이다"했다.

흑수(黑水)와 옥저(沃沮)에 대해서는 동파(東坡)의 <지장도(指掌圖)>를 보면 "진한(辰韓) 북쪽에 남북의 흑수(黑水)가 있다"고 했다.  상고하건대, 동명제(東明帝)는 왕위(王位)에 선 지 10년만에 북옥저(北沃沮)를 멸망시켰고, 온조왕(溫祚王) 42년에 남옥저(南沃沮)의 20여 집이 신라(新羅)에 투항(投降)했다.  또 혁거세(赫居世) 52년에 동옥저(東沃沮)가 신라에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고 했다.  그러니 동옥저(東沃沮)란 땅도 있었던 것이다.

<지장도(指掌圖)>에, "흑수(黑水)는 만리장성(萬里長城) 북쪽에 있고, 옥저는 만리장성 남쪽에 있다"고 했다. 

 

이서국(伊西國)

 

노례왕(弩禮王) 14년에 이서국 사람이 와서 금성(金城)을 공격했다.  운문사(雲門寺)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제사납전기(諸寺納田記)에 보면, "정관(貞觀) 6년 임진(壬辰)에 이서군(伊西郡)의 금오촌(今오村) 영미사(零味寺)에서 밭을 바쳤다"고 했다.  금오촌은 지금 청도(淸道) 땅이니 청도군(淸道郡)이 바로 옛날의 이서군인 것이다. 

 

오가야(五伽耶)
 

<가락국기駕洛國記>의 찬贊을 상고해 보면, 자줏빛 끈 하나가 내려와 둥근 알[난卵] 여섯 개를 내려 주었다.  이 중 다섯 개 알은 각 읍邑으로 돌아가고 한 개는 이 성城에 있어서 수로왕首露王이 되었고, 각 邑으로 돌아간 다섯 개는 각각 다섯 가야伽耶의 주인이 되었다 한다.  그러므로 금관국金官國이 이 다섯 개의 수에 들지 않은 것은 마땅하다.  그런데 <본조사략本朝史略>에는 금관金官까지 그 수에 넣고 창녕昌寧까지 더 기록했으니 잘못이다)

 

아라(阿羅; 야耶라고도 했다)·가야(伽耶; 지금의 함안咸安)·고령가야(古寧伽倻; 지금의 함녕咸寧)·대가야(大伽耶; 지금의 고령高靈)·성산가야(星山伽耶; 지금의 경산京山 혹은 벽진碧珍)·소가야(小伽耶; 지금의 고성固城)이다.

또 본조사략(本朝史略)에는, "태조(太祖)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에 오가야(五伽耶)의 이름을 고쳤다.  즉 1은 금관(金官; 김해부金海府로 됨), 2는 고령(古寧; 지금의 가리현加利縣이 됨), 3은 비화(非火; 지금의 창녕昌寧이니, 고령高靈의 잘못인 듯 싶다)요, 나머지 둘은 아라(阿羅)와 성산(星山)이다"했다(위 주注와 같다.  성산星山은 혹 벽진가야碧珍伽耶라고도 한다). 

 

북부여(北扶餘)

 

<고기(古記)>에 이렇게 말했다.  "전한(前漢)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壬戌; 전 58) 4월 8일에 천제(天帝)가 흘승골성(訖升骨城; 대요大遼 의주醫州 지경에 있음)에 내려왔다.  오룡차(五龍車)를 타고 도읍을 정하여 왕이라 일컫고 국호를 북부여(北扶餘)라고 하고, 스스로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고 했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扶婁)라 하고 해(解)로 씨(氏)를 삼았다.  왕은 뒤에 상제(上帝)의 명령으로 도읍을 동부여(東扶餘)로 옮겼다.  동명제(東明帝)는 북부여(北扶餘)를 계승하여 일어나서 졸본(卒本州)에 도읍을 정하고 졸본부여(卒本扶餘)가 되었으니, 이것이 곧 고구려(高句麗)의 시조(始祖)이다(아래에 보인다).

 

동부여(東扶餘)

 

북부여(北扶餘)의 왕인 해부루(解夫婁)의 대신(大臣) 아란불(阿蘭弗)의 꿈에, 천제(天帝)가 내려와서 말했다.  "장차 내 자손을 시켜서 이곳에 나라를 세울 터이니 너는 다른 곳으로 피해 가도록 하라(이것은 동명왕東明王이 장차 일어날 조짐을 말함이다).  동해(東海) 가에 가섭원(迦葉原)이라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지니 왕도(王都)를 세울만 할 것이다."  이에 아란불(阿蘭弗)은 왕을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東扶餘)라 했다.

부루(夫婁)는 늙도록 자식이 없었다.  어느 날 산천(山川)에 제사를 지내어 후사(後嗣)를 구했는데, 이때 타고 가던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는 서로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상히 여기고 사람을 시켜 그 돌을 들추어 보니 거기에 어린애가 하나 있는데 모양이 금빛 개구리와 같았다.  왕은 기뻐하여 말했다.  "이것은 필경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시는 것이로구나."

그 아이를 거두어 기르면서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했다.  차츰 자라자 태자(太子)로 삼았고 부루(夫婁)가 죽자 금와가 위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의 위를 태자 대소(帶素)에게 전했다.

지황(地皇) 3년 임오(壬午)에 이르러서 고구려왕(高句麗王) 무휼(無恤)이 이를 쳐서 대소를 죽이니 이것으로 나라가 없어졌다.

 

 

고구려(高句麗)

 

고구려(高句麗)는 곧 졸본부여(卒本扶餘)다.  혹은 말하기를 지금의 화주(和州), 또는 성주(成州)라고 하지만 이것은 모두 잘못이다.  졸본주(卒本州)는 요동(遼東)의 경계에 있었다.

<국사(國史)> 고려본기(高麗本紀)에 이렇게 말했다.  "시조(始祖) 동명성제(東明聖帝)의 성(姓)은 고씨(高氏)요, 이름은 주몽(朱蒙)이다.  이보다 앞서 북부여(北扶餘)의 왕 해부루(解夫婁)가 이미 동부여(東扶餘)로 피해 가고, 부루가 죽자 금와(金蛙)가 왕위를 이었다.  이때 금와는 태백산(太伯山)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여자 하나를 만나서 물으니 그 여자는 말하기를, '나는 하백(河伯)의 딸로서 이름을 유화(柳化)라고 합니다.  여러 동생들과 함께 물밖으로 나와서 노는데, 남자 하나가 오더니 자기는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고 하면서 나를 웅신산(熊神山) 밑 압록강(鴨綠江) 가의 집 속에 유인하여 남몰래 정을 통하고 가더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혼인한 것을 꾸짖어서, 드디어 이곳으로 귀양보냈습니다'" 했다. (<단군기檀君記>에는 "단군檀君이 서하西河의 하백河伯의 딸과 친하여 아들을 낳아서 부루夫婁라고 이름했다"고 했다.  지금 이 기록을 상고해 보면 해모수解慕漱가 하백河伯의 딸과 사사로이 통해서 주몽朱蒙을 낳았다고 했다.  <단군기檀君記>에는,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夫婁라고 했다" 했으니 그렇다면, 부루夫婁와 주몽朱蒙은 배다른 형제일 것이다)  

금와(金蛙)가 이상히 여겨 그녀를 방 속에 가두어 두었더니 햇빛이 방 속으로 비쳐 오는데, 그녀가 몸을 피하면 햇빛은 다시 쫓아와서 비쳤다.  이로 해서 태기가 있어 알[卵] 하나를 낳으니, 크기가 닷 되[五升]들이 만했다.  왕은 그것을 버려서 개와 돼지에게 주게 했으나 모두 먹지 않는다.  다시 길에 내다 버렸더니 소와 말이 그 알을 피해서 가고 들에 내다 버리니 새와 짐승들이 알을 덮어 주었다.  왕이 이것을 쪼개 보려고 했으나 아무리 해도 쪼개지지 않아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었다.  어머니가 이 알을 천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놓아 두었더니 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골격과 외모가 영특하고 기이했다.  나이 겨우 일곱 살에 기골이 뛰어나서 범인과 달랐다.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는데 백 번 쏘면 백 번 다 맞히었다.  나라 풍속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朱蒙)이라고 하므로 그 아이를 주몽이라 이름했다.

금왕에게는 아들 일곱이 있는데 항상 주몽과 함께 놀았으니 재주가 주몽을 따르지 못했다.  장자(長子) 대소(帶素)가 왕에게 말했다.  '주몽은 사람이 낳은 자식이 아닙니다.  만일 일찍 없애지 않는다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왕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주몽을 시켜 말을 기르게 하니 주몽은 좋은 말을 알아보아 적게 먹여서 여위게 기르고, 둔한 말을 잘 먹여서 살찌게 했다.  이에 왕은,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왕의 여러 아들과 신하들이 주몽을 장차 죽일 계획을 하니 주몽의 어머니가 이 기미를 알고 말했다.  '지금 나라 안 사람들이 너를 해치려고 하는데, 네 재주와 지략(智略)을 가지고 어디를 가면 못 살겠느냐.  빨리 이곳을 떠나도록 해라.'  이에 주몽은 오이(烏伊) 등 세 사람을 벗으로 삼아 엄수(淹水)에 이르러 물을 보고 말했다.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河伯)의 손자이다.  오늘 도망해 가는데 뒤쫓는 자들이 거의 따라오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느냐.'  말을 마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주어 건너게 하고, 모두 건너자 이내 풀어 버려 뒤쫓아오던 기병(騎兵)은 건너지 못했다.  이에 주몽은 졸본주(현토군玄토郡과의 경계)에 이르러 도읍을 정했다.  그러나 미처 궁실(宮室)을 세울 겨를이 없어서 비류수(沸流水) 위에 집을 짓고 살면서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고(高)로 씨(氏)를 삼았다(본성本姓은 해解였다.  그러나 지금 천제天帝의 아들을 햇빛을 받아 낳았다 하여 스스로 고高로 씨氏를 삼은 것이다).  이때의 나이 12세로서, 한(漢)나라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 갑신(甲申)에 즉위하여 왕이라 일컬었다.  고구려(高句麗)가 제일 융성하던 때는 21만 508호나 되었다."

주림전(珠琳傳) 제21권에 이렇게 실려 있다.  "옛날 영품리왕(寧稟離王)의 시비(侍婢)가 임신했는데, 상(相) 보는 자가 점을 쳐 말하기를, '귀하게 되어 왕이 될 것입니다'고 하자 왕은 '내 아들이 아니니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했다.  시비(侍婢)가 말하기를 '무슨 이상한 기운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더니 임신한 것입니다'했다.  드디어 아이를 낳자 왕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하여 돼지우리에 내다 버리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 보호해 주고, 마구간에 내다 버리니 말이 젖을 먹여서 죽지 않게 해 주었다.  이 아이가 자라서 마침내 부여(扶餘)의 왕이 되었다."(이것은 동명제東明帝가 졸본부여卒本扶餘의 왕이 된 것을 말한 것이다.  이 졸본부여卒本扶餘는 역시 북부여北扶餘의 딴 도읍이다.  때문에 부여왕扶餘王이라 이른 것이다.  영품리寧稟離는 부루왕夫婁王의 다른 칭호이다)

 

 

변한(卞韓)과 백제(百濟; 또는 南扶餘라고도 하는데 곧 泗차(비)城이다)

 

신라(新羅)의 시조(始祖) 혁거세(赫居世)가 즉위한 19년 임오(壬午; 前 39)에 변한(卞韓) 사람이 나라를 가지고 항복해 왔다.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에는 모두 "변한(卞韓)의 후손들이 낙랑(樂浪) 땅에 있었다"했고, <후한서(後漢書)>에는, "변한(卞韓)은 남쪽에 있고,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고, 진한(辰韓)은 동쪽에 있다"고 했다.

최치원(崔致遠)은 "변한은 바로 백제(百濟)"라고 했다.

본기(本紀)를 상고해 본다면, 온조왕(溫祚王)이 일어나서 나라를 세운 것은 홍가(鴻嘉) 4년 갑진(甲辰; 前 17)의 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혁거세(赫居世)나 동명왕(東明王) 시대보다 40여 년이나 뒷 일이 된다.  그런데 <당서(唐書)>에, 변한(卞韓)의 후손들이 낙랑(樂浪) 땅에 살았다고 한 것은 온조왕(溫祚王)의 계통이 동명왕(東明王)에게서 나온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혹시 어떤 사람이 낙랑에서 나서 변한(卞韓)에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 등과 대치한 일이 온조왕 이전에 있었던 모양이며, 그 도읍한 곳이 낙랑 북쪽에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구룡산(九龍山)을 잘못 알고 역시 변나산(卞那山)이라고 불렀던 까닭에 고구려(高句麗)를 가지고 변한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대개 잘못일 것이다.  마땅히 옛날 현인(賢人)의 말을 좇는 것이 옳을 것이다.  백제 땅에도 변산(卞山)이 있었기 때문에 변한이라 하는 것이다.  백제가 전성(全盛)했을 때는 호수가 15만 2,300이나 되었다.

 

 

진한(辰韓; 진한秦韓이라고도 했다)

 

<후한서(後漢書)>에 이렇게 말했다.  "진한(辰韓)의 늙은이가 말하기를 진(秦)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한국(韓國)에 오자 마한(馬韓)이 동쪽 경계의 땅을 베어 주었다.  그리고 서로 부르기를 도(徒)라고 하여, 마치 진(秦)나라 말에 가까웠다.  그런 때문에 혹은 이곳을 진한(秦韓)이라고 했다.  여기에는 12개의 조그마한 나라들이 있어 각각 1만호(萬戶)나 되는데 저마다 나라라고 일컬었다."

또 최치원(崔致遠)은 이렇게 말했다.  "진한은 본래 연(燕)나라 사람이 피난해 와 있던 곳이다.  그런 때문에 탁수(탁水)의 이름을 따서 그들이 사는 읍(邑)과 마을을 사탁(沙탁)·점탁(漸탁)이라고 불렀다."(신라新羅 사람의 방언方言에 탁탁의 음音을 도道라고 했다.  때문에 지금도 혹 사량沙梁이라 하는데, 양梁을 도道라고도 읽는다)

신라(新羅) 전성기(全盛期)에는 서울에 17만 8,936호(戶), 1,369방(坊), 55리(里), 35개의 금입택(金入宅; 부윤富潤한 큰집을 말함)이 있었다.  이것은 남택(南宅)·북택(北宅)·우비소택(우比所宅)·본피택(本彼宅)·양택(梁宅)·지상택(池上宅; 본피부本彼部)·재매정택(財買井宅; 유신공庾信公의 조종祖宗)·북유택(北維宅)·남유택(南維宅; 반향사하방反香寺下坊)·대택(隊宅)·빈지택(賓支宅; 반향사反香寺 북쪽)·장사택(長沙宅)·상앵택(上櫻宅)·하앵택(下櫻宅)·수망택(水望宅)·천택(泉宅)·양상택(楊上宅; 양부梁部 남쪽)·한기택(漢岐宅; 법류사法流寺 남쪽)·비혈택(鼻穴宅; 위와 같음)·판적택(板積宅; 분황사상방芬皇寺上坊)·별교택(別敎宅; 내의 북쪽)·아남택(衙南宅)·금양종택(金梁宗宅; 양관사梁官寺 남쪽)·곡수택(曲水宅; 내의 북쪽)·유야택(柳也宅)·사하택(寺下宅)·사량택(沙梁宅)·정상택(井上宅)·이남택(里南宅; 우소택우所宅)·사내곡택(思內曲宅)·지택(池宅)·사상택(寺上宅; 대숙택大宿宅)·임상택(林上宅; 청룡사靑龍寺의 동쪽으로 못이 있음)·교남택(橋南宅)·항질택(巷叱宅; 본피부本彼部)·누상택(樓上宅)·이상택(里上宅)·명남택(椧南宅)·정하택(井下宅)이 있었다.

 

 

 

우사절유택(又四節遊宅)

 

봄에는 동야택(東野宅), 여름에는 곡량택(谷良宅), 가을에는 구지택(仇知宅), 겨울에는 가이택(加伊宅)에서 놀았다.

제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때에는 성 안에 초가집은 하나도 없고, 집의 처마와 담이 이웃집과 서로 연해 있었다.  또 노랫소리와 피리 부는 소리가 길거리에 가득 차서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신라시조(新羅始祖) 혁거세왕(赫居世王)

 

진한(辰韓) 땅에는 옛날에 여섯 촌(村)이 있었다.  1은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이니 그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촌장(村長)은 알평(謁平)이니 처음에 하늘에서 표암봉(瓢암峰)에 내려왔으니 이가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노례왕弩禮王 9년에 부部를 두어 급량부及梁部라고 했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940)에 중흥부中興部라고 이름을 고쳤다.  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의 동촌東村이 여기에 소속된다).  

2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이니, 촌장(村長)은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처음에 형산(兄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량부(沙梁部; 양梁은 도道라고 읽고 혹 탁탁으로도 쓴다.  그러나 역시 도道라고 읽는다)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 하여 구량벌(仇梁伐)·마등오(麻等烏)·도북(道北)·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여기에 소속된다(지금이라고 한 것은 고려태조高麗太祖 때에 설치한 것이다.  아래도 이와 같다).

3은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이다.  촌장(村長)은 구(俱; 구仇라고도 씀) 예마(禮馬)이다.  처음에 이산(伊山; 개비산皆比山이라고도 함)에 내려왔으니 이가 점량부(漸梁(혹은 탁)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한다.  여기에는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소속된다.

4는 취산(자山) 진지촌(珍支村; 빈지賓之·빙지빙之라고도 한다)이다.  촌장(村長)은 지백호(智伯虎)로 처음에 화산(花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본피부 최씨(本彼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 한다.  시파(柴杷) 등 동남촌(東南村)이 여기에 소속된다.  최치원(崔致遠)은 바로 본피부(本彼部) 사람이다.  지금은 황룡사(黃龍寺) 남쪽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옛 터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최후(崔侯)의 옛집임이 분명하다.

5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지금의 금강산金剛山 백율사栢栗寺 북쪽 산)이다.  촌장(村長)은 지타(祗타; 혹은 지타只他)이다.  처음에 명활산(明活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다.  지금은 임천부(臨川部)라고 하는데 물이촌(勿伊村)·잉구미촌(仍仇미村)·궐곡(闕谷) 등 동북촌(東北村)이 여기에 소속되었다.

위의 글을 상고해 보건대, 이 여섯 부(部)의 조상들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다.  노례왕(弩禮王; 윤리왕倫理王) 9년(32)에야 비로소 여섯 부(部)의 명칭을 고치고, 또 그들에게 여섯 성(姓)을 주었다.  지금 풍속에는 중흥부(中興部)를 어머니로 삼고, 장복부(長福部)를 아버지, 임천부(臨川部)를 아들, 가덕군(加德郡)을 딸로 삼고 있다.  하지만 그 실상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元年) 임자(壬子; 前 69, 고본古本에는 건호建虎 원년元年이라 했고, 건원建元 3년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잘못이다) 3월 초하루에 상부(上部)의 조상들은 저마다 자제(子弟)를 거느리고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 의논했다.  "우리들은 위로 임금이 없어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모두 방자하여 저 하고자 하는 대로 하고 있다.  그러니 어찌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서 임금을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에 그들이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가에 번갯빛처럼 이상한 기운이 땅에 닿도록 비치고 있다.  그리고 흰 말 한 마리가 땅에 굻어 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곳을 찾아가 조사해 보았더니 거기에는 자줏빛 알 한 개(혹은 푸른 큰 알이라고도 함)가 있다.  그러나 말은 사람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알을 깨고서 어린 사내아이를 얻으니, 그는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두 놀라 이상하게 여겨 그 아이를 동천(東泉; 동천사東泉寺는 사뇌야詞腦野 북쪽에 있다)에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따라서 춤을 췄다.  이내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해졌다.  이에 그 아이를 혁거세왕(赫居世王)이라고 이름하고(이 혁거세赫居世는 필경 향언鄕言일 것이다.  혹은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니 밝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해설하는 자는 말하기를, "이는 서술성모西述聖母가 낳을 때의 일이다.  그런 때문에 중국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양한 말에, 어진 이를 낳아서 나라를 세웠다는 말이 있으니 바로 이 까닭이다"한다.  또 계룡계龍이 상서祥瑞를 나타내어 알영閼英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어찌 서술성모西述聖母의 현신現身을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위호(位號)를 거슬감(居瑟邯)이라고 했다(혹은 거居西干이라고도 하니 그가 처음 입을 열 때에 스스로 말하기를, "알영거서간閼英居西干이 한번 일어났다"한 그 말로 인해서 일컬은 것이다.  이 뒤부터 모든 왕자王者의 존칭이 거서간居西干으로 되었다).

이에 당시 사람들은 다투어 치하하기를, "이제 천자(天子)가 이미 내려왔으니 마땅히 덕 있는 왕후(王后)를 찾아 배필을 삼아야 합니다"했다.

이날 사량리(沙梁里)에 있는 알영정(閼英井; 아리영정娥利英井이라고 함) 가에 계룡(鷄龍)이 나타나서 왼쪽 갈비에서 어린 계집애를 낳았다(혹은 용龍이 나타났다가 죽었는데 그 배를 가르고 계집애를 얻었다고 했다).  얼굴과 모습이 매우 고왔으나 입술이 마치 닭의 입부리와 같았다.  이에 월성(月城) 북쪽에 있는 냇물에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떨어졌다.  이 일 대문에 그 내를 발천(撥川)이라고 한다.

남산(南山)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昌林寺)에 궁실(宮室)을 세우고 이들 두 성스러운 어린이를 모셔다가 길렀다.  남자아이는 알에서 낳았고, 그 알의 모양이 박[匏]과 같았는데, 향인(鄕人)들은 박을 '박(朴)'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성(姓)을 박(朴)이라고 했다.  또 여자아이는 그가 나온 우물 이름으로 이름을 삼았다.  두 성인(聖人)은 13세가 되자 오봉(五鳳) 원년(元年) 갑자(甲子; 전 57)에, 남자는 왕이 되어 이내 그 여자로 왕후(王后)를 삼았다.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 지금 풍속에 경京을 서벌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이라 하고, 혹은 사라(斯羅)·사로(斯盧)라고도 했다.  처음에 왕이 계정(鷄井)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혹 나라 이름을 계림국(鷄林國)이라고도 했다.  이것은 계룡(鷄龍)이 상서(祥瑞)를 나타냈기 때문이다.  일설(一說)에는 탈해왕(脫解王) 때 김알지(金閼智)를 얻는데 닭이 숲속에서 울었다 해서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이라 했다고도 한다.  후세에 와서 드디어 신라(新羅)라는 국호로 정했던 것이다.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되던 어느 날 왕은 하늘로 올라갔는데 7일 뒤에 그 죽은 몸뚱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그러더니 왕후(王后)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한다.  나라 사람들은 이들을 합해서 장사지내려 했으나 큰 뱀이 나타나더니 쫓아다니면서 이를 방해하므로 오체(五體)를 각각 장사지내어 오릉(五陵)을 만들고, 또한 능의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 했다.  담엄사(曇嚴寺) 북릉(北陵)이 바로 이것이다.  태자(太子) 남해왕(南解王)이 왕위를 계승했다.

 

 

제2대 남해왕(南解王)

 

남해거서간(南解居西干)을 차차웅(次次雄)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존장(尊長)에 대한 칭호인데 오직 남해왕(南解王)만을 차차웅(次次雄)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혁거세(赫居世)요, 어머니는 알영부인(閼英夫人)이며, 비(妃)는 운제부인(雲帝夫人; 운제雲梯라고도 한다.  지금 영일현迎日縣 서쪽에 운제산雲梯山 성모聖母가 있는데 가뭄 때 여기에 기도를 드리면 감응感應이 있다)이다.  전한(前漢) 평제(平帝) 원시(元始) 4년 갑자(甲子; 4)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 만인 지황(地皇) 4년 갑신(甲申; 24)에 죽었다.  이 왕이 삼황(三皇)의 첫째라 한다.

<삼국사(三國史)>를 상고해 보면, "신라에서는 왕을 거서간(居西干)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진한(辰韓)의 말로 왕이란 말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는 귀인(貴人)을 부르는 칭호라고 하며, 차차웅(次次雄) 혹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고 했다.

김대문(金大問)은 말하기를, "차차웅(次次雄)이란 무당을 이르는 방언(方言)이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고 공경한다.  그래서 드디어 존장(尊長)되는 이를 자충(慈充)이라 한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사금(尼師金)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잇금[齒理]을 이르는 말이다"라고 했다.

처음에 남해왕(南解王)이 죽자 그 아들 노례(弩禮)가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물려 주려 했다.  이에 탈해(脫解)가 말하기를, "나는 들으니 성스럽고 지혜 있는 사람은 이가 많다고 한다"하고 떡을 입으로 물어 시험해 보았다.

고전(古典)에는 이와 같이 전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임금을 마립간(麻立干)이라고도 했다.  이것을 김대문(金大問)은 해석하기를, "마립간(麻立干)이란 서열을 뜻하는 방언(方言)이다.  서열(序列)은 위(位)를 따라 정하기 때문에 임금의 서열은 주(主)가 되고 신하의 서열은 아래에 위치한다.  그래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라고 했다.

사론(史論)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왕(新羅王)으로서 거서간(居西干)과 차차웅(次次雄)이란 이름을 쓴 이가 각기 하나요, 이사금(尼師金)이라고 한 이가 열 여섯이며, 마립간(麻立干)이라 한 이가 넷이다.  신라 말기의 명유(名儒) 최치원(崔致遠)이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을 지을 적에는 모두 모왕(某王)이라고만 하고 거서간(居西干) 등이라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혹시 그 말이 야비해서 부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서인가.  그러나 지금 신라의 일을 기록하는 데 방언(方言)을 모두 그대로 두는 것도 또한 마땅한 일일 것이다."

신라 사람들은 추봉(追封)된 이들을 갈문왕(葛文王)이라고 불렀는데, 이 일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남해왕(南解王) 때에 낙랑국(樂浪國)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침범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갔다.  또 천봉(天鳳) 5년 무인(戊寅; 18)에 고구려(高句麗)의 속국인 일곱 나라가 와서 항복했다.

 

 

제3대 노례왕(弩禮王)

 

박노례이질금(朴弩禮尼叱今; 유례왕儒禮王이라고도 함)이 처음에 매부(妹夫)인 탈해(脫解)에게 왕위(王位)를 물려 주자 탈해는 말했다.  "대개 덕이 있는 사람은 이[齒]가 많은 법이오.  그러니 잇금을 가지고 시험해 봅시다."  이리하여 떡을 물어 시험해 보니 왕의 이가 많았기 때문에 먼저 왕위에 올랐다.  이런 일로 인하여 왕은 잇금[尼叱今]이라고 한 것이다.  이질금(尼叱今)이란 칭호는 이 왕 때부터 시작했다.

유성공(劉聖公) 갱시(更始) 원년(元年) 계미(癸未; 23)에 즉위하여(연표年表에는 갑신甲申년에 즉위했다고 함) 육부(六部)의 이름을 고쳐서 정하고 여섯 성(姓)을 하사했다.

이 때 비로소 도솔가(兜率歌)를 지었으니 차사(嗟辭)와 사뇌격(詞腦格)이 있었다.  또 비로소 보습과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와 수레를 만들었다.  건호(建虎) 18년(42)에 이서국(伊西國)을 쳐서 멸망시켰다.  이 해에 고구려(高句麗) 군사가 침범해 왔다.

 

 

제4대 탈해왕(脫解王)

 

탈해치질금(脫解齒叱今; 토해니사금吐解尼師今이라고도 함)은 남해왕(南解王) 때(고본古本에는 임인壬寅년이라고 했으나 이것은 잘못이다.  가까운 일이라면 노례왕弩禮王의 즉위 초년보다 뒤의 일일 것이니 양위讓位를 다투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또 먼저의 일이라면 혁거세왕赫居世王 때의 일일 것이다.  그러니 이 일은 임인壬寅년이 아닌 것임을 알겠다)에 가락국(駕洛國) 바다 가운데에 배 한 척이 와서 닿았다.  이것을 보고 그 나라 수로왕(首露王)이 백성들과 함께 북을 치고 법석이면서 그들을 맞아 머물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배는 나는 듯이 계림(鷄林)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의 아진포(阿珍浦)로 달아났다(지금도 상서지촌上西知村·하서지촌下西知村의 이름이 있다).  이때 마침 포구에 한 늙은 할멈이 있어 이름을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고 하였는데 이가 바로 혁거세왕(赫居世王)의 고기잡이 할멈이었다.

그는 이 배를 바라보고 말했다.  "이 바다 가운데에는 본래 바위가 없는데 무슨 까닭으로 까치들이 모여들어서 우는가."

배를 끌어당겨 찾아 보니 까치들이 배 위에 모여들었다.  그 배 안에는 궤 하나가 있었다.  길이는 20척(尺)이오.  너비는 13척이나 된다.  그 배를 끌어다가 나무 숲 밑에 매어 두었다.  그러나 이것이 흉(凶)한 것인지 길(吉)한 것인지 몰라서 하늘을 향해 고했다.

이윽고 궤를 열어 보니 단정히 생긴 사내아이가 하나 있고 아울러 칠보(七寶)의 노비(奴婢)가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을 7일 동안 잘 대접했더니 사내아이는 그제야 말을 했다.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이오(정명국正明國 혹은 완하국琓夏國이라고도 한다.  완하琓夏는 또 화하국花厦國이라고도 하니, 용성龍城은 왜국倭國 동북쪽 1천리 떨어진 곳에 있다).  우리 나라에는 원래 28 용왕(龍王)이 있어서 그들은 모두 사람의 태(胎)에서 났으며 나이 5, 6세부터 왕위(王位)에 올라 만민(萬民)을 가르쳐 성명(性命)을 바르게 했소.  팔품(八品)의 성골(姓骨)이 있는데 그들은 고르는 일이 없이 모두 왕위에 올랐소.  그때 부왕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積女國)의 왕녀(王女)를 맞아 왕비(王妃)로 삼았소.  오래 되어도 아들이 없자 기도를 드려 아들 낳기를 구하여 7년 만에 커다란 알[卵] 한 개를 낳았소.  이에 대왕은 모든 신하들을 모아 묻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았으니 고금(古今)에 없는 일이다.  이것은 아마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하고, 궤를 만들어 나를 그 속에 넣고 칠보와 노비들을 함께 배 안에 실은 뒤 바다에 띄우면서 빌기를, '아무쪼록 인연 있는 곳에 닿아 나라를 세우고 한 길을 이루도록 해 주시오'했소.  빌기를 마치자 갑자기 붉은 용이 나타나더니 배를 호위해서 지금 여기에 도착한 것이오."

말을 끝내자 그 아이는 지팡이를 끌고 두 종을 데리고 토함산(吐含山) 위에 올라가더니 돌집을 지어 7일 동안을 머무르면서 성(城)안에 살 만한 곳이 있는가 바라보았다.  산봉우리 하나가 마치 초사흘달 모양으로 보이는데 오래 살 만한 곳 같았다.  이내 그곳을 찾아가니 바로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아이는 이에 속임수를 썼다.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 곁에 묻어 놓고, 이튿날 아침에 문 앞에 가서 말했다.  "이 집은 우리 조상들이 살던 집이오."  호공은 그렇지 않다 하여 서로 다투었다.  시비(是非)가 판결되지 않으므로 이들은 관청에 고발하였다.  관청에서 묻기를, "무엇으로 네 집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느냐"하자, 어린이는 말했다.  "우리 조상은 본래 대장장이었소.  잠시 이웃 고을에 간 동안에 다른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는 터요.  그러니 그 집 땅을 파서 조사해 보면 알 수가 있을 것이오."  이 말에 따라 땅을 파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다.  이리하여 그 집을 빼앗아 살게 되었다.

이때 남해왕(南解王)은 그 어린이, 즉 탈해(脫解)가 지혜가 있는 사람임을 알고 맏 공주(公主)로 그의 아내를 삼게 하니 이가 아니부인(阿尼夫人)이다.

어느 날 토해(吐解)는 동악(東岳)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백의(白衣)를 시켜 물을 떠 오게 했다.  백의(白衣)는 물을 떠 가지고 오다가 중로에서 먼저 마시고는 탈해에게 드리려 했다.  그러나 물그릇 한 쪽이 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가 꾸짖자 백의는 맹세하였다.  "이 뒤로는 가까운 곳이거나 먼 곳이거나 감히 먼저 마시지 않겠습니다."  그제야 물그릇이 입에서 떨어졌다.  이로부터 백의는 두려워하고 복종하여 감히 속이지 못했다.

지금 동악(東岳) 속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세상에서 요내정(遙乃井)이라고 부르는 우물이 바로 이것이다.

노례왕(弩禮王)이 죽자 광호제(光虎帝) 중원(中元) 6년 정사(丁巳; 57) 6월에 탈해(脫解)는 왕위에 올랐다.  옛날에 남의 집을 내 집이라 하여 빼앗았다 해서 석씨(昔氏)라고 했다.  혹 또 까치로 해서 궤를 열게 되었기 때문에 까치[鵲]라는 글자에서 조자(鳥字)를 떼고 석씨(昔氏)로 성(姓)을 삼았다고도 한다.  또 궤를 열고 알을 벗기고 나왔다 해서 이름을 탈해(脫解)로 했다고 한다.

그는 재위(在位) 23년 만인 건초(建初) 4년 기묘(己卯; 29)에 죽어서 소천구(疏川丘) 속에 장사지냈다.  그런데 뒤에 신(神)이 명령하기를, "조심해서 내 뼈를 묻으라"고 했다.

그 두골(頭骨)의 둘레는 석 자 두 치, 신골(身骨)의 길이는 아홉 자 일곱 치나 된다.  이[齒]는 서로 엉기어 하나가 된 듯도 하고 뼈마디는 연결되어 있었다.  이것은 이른바 천하에 짝이 없는 역사(力士)의 골격(骨格)이었다.  이것을 부수고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 안에 모셔 두었다.  그랬더니 신(神)이 또 말하기를, "내 뼈를 동악(東岳)에 안치해 두어라"했다.  그래서 거기에 봉안케 했던 것이었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탈해脫解가 죽은 뒤 27世 문호왕文虎王 때 조로調露 2년 경진庚辰(680) 3월 15일 신유辛酉 밤 태종太宗의 꿈에, 몹시 사나운 모습을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였다.  "내가 탈해脫解이다.  내 뼈를 소천구疏川丘에서 파내다가 소상塑像을 만들어 토함산吐含山에 안치하도록 하라."  王은 그 말을 좇았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지금까지 제사를 끊이지 않고 지내니 이를 동악신東岳神이라고 한다).  

 

 

 

김알지(金閼智), 탈해왕대(脫解王代)

 

영평(永平) 3년 경신(庚申; 60, 중원中元 6년이라고도 하나 잘못이다.  중원中元은 모두 2년 뿐이다) 8월 4일에 호공(瓠公)이 밤에 월성(月城) 서리(西里)를 걸어가는데, 크고 밝은 빛이 시림(始林; 구림鳩林이라고도 함) 속에서 비치는 것이 보였다.  자줏빛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에 뻗쳤는데 그 구름 속에 황금(黃金)의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그 빛은 궤 속에서 나오고 있었다.  또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이 모양을 호공(瓠公)은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그 숲에 가서 궤를 열어보니 동남(童男)이 있는데 누웠다가 곧 일어났다.  이것은 마치 혁거세(赫居世)의 고사(故事)와도 같았으므로 그 말에 따라 그 아이를 알지(閼知)라고 이름지었다.  알지(閼知)란 곧 우리말로 소아(小兒)를 일컫는 것이다.  그 아이를 안고 대궐로 돌아오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르면서 기뻐하여 뛰놀고 춤을 춘다.

왕은 길일(吉日)을 가려 그를 태자(太子)로 책봉했다.  그는 뒤에 태자의 자리를 파사왕(破娑王)에게 물려 주고 왕위(王位)에 오르지 않았다.  금궤(金櫃)에서 나왔다 하여 성(姓)을 김씨(金氏)라 했다.

알지는 열한(熱漢)을 낳고 열한은 아도(阿都)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는 구도(俱道; 혹은 구도仇刀)를 낳고, 구도는 미추(未(味)鄒)를 낳으니 미추(未鄒)가 왕위에 올랐다.  이리하여 신라의 김씨(金氏)는 알지에서 시작된 것이다.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이 즉위한 4년 정유(丁酉; 157)에 동해(東海) 바닷가에는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날 연오랑이 바다에 나가 해조(海藻)를 따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 하나(물고기 한 마리라고도 한다)가 나타나더니 연오랑을 등에 업고 일본(日本)으로 가 버렸다.  이것을 본 나라 사람들은, "이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하고 세워서 왕을 삼았다(<일본제기日本帝紀>를 상고해 보면 전후前後에 신라 사람으로 왕이 된 사람은 없다.  그러니 이는 변읍邊邑의 조그만 왕王이고 참말 王은 아닐 것이다).

세오녀(細烏女)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이상해서 바닷가에 나가서 찾아 보니 남편이 벗어 놓은 신이 있었다.  바위 위에 올라갔더니 그 바위는 또한 세오녀를 업고 마치 연오랑 때와 같이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왕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다.  이리하여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어 그녀로 귀비(貴妃)를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에 광채(光彩)가 없었다.  일자(日者)가 왕께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기(精氣)가 우리 나라에 내려 있었는데 이제 일본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변이 생기는 것입니다"했다.  왕이 사자(使者)를 보내서 두 사람을 찾으니 연오랑은 말한다.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인데 어찌 돌아갈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나의 비(妃)가 짠 고운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면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비단을 주니 사자가 돌아와서 사실을 보고하고 그의 말대로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  그런 뒤에 해와 달의 정기가 전과 같았다.  이에 그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간수하고 국보(國寶)로 삼으니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한다.  또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한다.

 

 

미추왕(未鄒王)과 죽엽군(竹葉軍)

 

제13대 미추니질금(未鄒尼叱今; 미조未祖 또는 미고未古라고 함)은 김알지(金閼智)의 7대손(七代孫)이다.  대대로 현달(顯達)하고, 또 성스러운 덕이 있었다.  첨해왕(沾解王)의 뒤를 이어서 비로소 왕위(王位)에 올랐다(지금 세상에서 미추왕未鄒王의 능陵을 시조당始祖堂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대개 김씨金氏로서 처음 왕위王位에 오른 때문이며, 후대後代의 모든 김씨왕金氏王들이 미추未鄒를 시조始祖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왕위에 있은 지 23년 만에 죽었으며 능(陵)은 흥륜사(興輪寺) 동쪽에 있다.

제14대 유리왕(儒理(禮)王) 때 이서국(伊西國)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공격해 왔다.  신라에서도 크게 군사를 동원했으나 오랫동안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때 갑자기 이상한 군사가 와서 신라군을 도왔는데 그들은 모두 댓잎을 귀에 꽂고 있었다.  이들은 신라 군사와 힘을 합해서 적을 격파했다.  그러나 적군이 물러간 뒤에는 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댓잎만이 미추왕의 능 앞에 쌓여 있을 뿐이었다.  그제야 선왕(先王)이 음(陰)으로 도와 나라에 공을 세웠다는 것을 알았다.  이리하여 그 능을 죽현능(竹現陵)이라고 불렀다.

제37대 혜공왕(惠恭王) 대력(大曆) 14년 기미(己未; 779) 4월에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유신공(庾信公)의 무덤에서 일어나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준마(駿馬)를 탔는데 그 모양이 장군(將軍)과 같았다.  또 갑옷을 입고 무기(武器)를 든 40명 가량의 군사가 그 뒤를 따라 죽현능(竹現陵)으로 들어간다.  이윽고 능 속에서 무엇인가 진동(振動)하고 우는 듯한 소리가 나고, 혹은 하소연하는 듯한 소리도 들려왔다.  그 호소하는 말에, "신(臣)은 평생 동안 어려운 시국을 구제하고 삼국(三國)을 통일한 공이 있었습니다.  이제 혼백이 되어서도 나라를 보호하여 재앙을 제거하고 환난을 구제하는 마음은 잠시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온데 지난 경술(庚戌)년에 신의 자손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음을 당하였으니, 이것은 임금이나 신하들이 나의 공렬(功烈)을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신은 차라리 먼 곳으로 옮겨가서 다시는 나라를 위해서 힘쓰지 않을까 합니다.  바라옵건대 왕께서는 허락해 주십시오"한다.  왕은 대답한다.  "나의 공(公)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공(公)은 전과 같이 힘쓰도록 하오."  세 번이나 청해도 세 번 다 듣지 않는다.  이에 회오리바람은 돌아가고 말았다.

혜공왕(惠恭王)은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이내 대신(大臣) 김경신(金敬信)을 보내서 김유신공(金庾信公)의 능에 가서 잘못을 사과하고 김공(金公)을 위해서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結)을 취선사(鷲仙寺)에 내려서 공(公)의 명복(冥福)을 빌게 했다.  이 절은 김공이 평양(平壤)을 토벌(討伐)한 뒤에 복을 빌기 위하여 세웠던 절이기 때문이다.

이때 미추왕(未鄒王)의 혼령(魂靈)이 아니었던들 김공의 노여움을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미추왕의 나라를 수호한 힘은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그 덕을 생각하여 삼산(三山)과 함께 제사지내어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으며, 그 서열(序列)을 오릉(五陵)의 위에 두어 대묘(大廟)라 일컫는다 한다.

 

 

 

내물왕(奈勿王; 나밀왕那密王이라고도 함)과 김제상(金(朴)堤上)

 

제17대 나밀왕(那密王)이 즉위한 36년 경인(庚寅; 390)에 왜왕(倭王)이 보낸 사신이 와서 말했다.  "우리 임금이 대왕(大王)이 신성(神聖)하다는 말을 듣고 신(臣) 등으로 하여금 백제(百濟)가 지은 죄를 대왕에게 아뢰게 하는 것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왕자(王子) 한 분을 보내서 우리 임금에게 신의를 표하게 하십시오."  이에 왕은 셋째아들 미해(美海; 미토희未吐喜라고도 함)를 왜국에 보냈다.  이때 미해는 열 살이었다.  말하는 것이나 행동이 아직 익숙하지 못했으므로 내신(內臣) 박사람(朴娑覽)을 부사(副使)로 삼아 딸려 보냈다.  왜왕은 이들을 30년 동안이나 억류(抑留)하여 돌려 보내지 않았다.

눌지왕(訥祗王)이 즉위한 3년 기미(己未; 419)에 고구려(高句麗) 장수왕(長壽王)의 사신이 와서 말했다.  "우리 임금은 대왕의 아우 보해(寶海)가 지혜와 재주가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서로 친하게 지내기를 원하여 특히 소신(小臣)을 보내어 간청하는 바입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매우 다행스럽게 여겼다.  이 일로 해서 화친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아우 보해에게 명하여 고구려로 가게 했다.  그리고 내신(內臣) 김무알(金武謁)을 보좌(補佐)로 함께 보냈더니 장수왕도 그들을 억류(抑留)해 두고 돌려 보내지 않았다.

눌지왕 10년 을축(乙丑; 425)에 왕은 여러 신하들과 나라 안의 호협(豪俠)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친히 잔치를 베풀었다.  술이 세 순배 돌고 모든 음악이 울려퍼지자 왕은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 신하들에게 말했다.  "옛날 우리 아버님께서는 성심껏 백성의 일을 생각하신 까닭에 사랑하는 아들을 동쪽 멀리 왜국(倭國)까지 보내셨다가 마침내 다시 만나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또 내가 왕위(王位)에 오른 뒤로 이웃 나라의 군사가 몹시 강성(强盛)하여 전쟁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  그런데 유독 고구려만이 화친하자는 말이 있어서 나는 그 말을 믿고 아우를 고구려에 보냈던 바, 고구려에서도 또한 억류해 두고 돌려 보내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내 아무리 부귀(富貴)를 누린다 해도 일찍이 하루라도 이 일을 잊고 울지 않는 날이 없었다.  만일 이 두 아우를 만나 보고 함께 아버님 사당에 뵙게 된다면 온 나라 사람에게 은혜를 갚겠다.  누가 능히 이 계교를 이룰 수 있겠는가."

이 말을 듣자 백관(百官)이 입을 모아 아뢰었다.  "이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지혜와 용맹이 겸한 사람이라야만 될 것입니다.  신 등의 생각으로는 삽라군(삽羅郡) 태수(太守) 제상(堤上)이 가할까 합니다."

이에 왕은 제상을 불러 물었다.  제상은 두 번 절하고 대답했다.  "신이 듣기로는,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가 욕을 당하며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다고 합니다.  만일 일의 어렵고 쉬운 것을 따져서 행한다면 이는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옵고 또 죽고 사는 것을 생각한 뒤에 움직인다면 이는 용맹이 없는 것입니다.  신이 비록 불초(不肖)하오나 왕의 명령을 받아 행하기를 원합니다."

왕은 매우 가상히 여겨 술잔을 나누어 마시고 손을 잡아 작별해 보냈다.  제상은 왕의 앞에서 명령을 받고 바로 북해(北海)길로 향하여 변복(變服)하고 고구려에 들어가 보해가 있는 곳으로 가서 함께 도망할 일자(日字)를 약속해 놓았다.  제상은 먼저 5월 15일에 고성(高城) 수구(水口)에 와서 배를 대고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한 날짜가 가까워지자 보해는 병을 핑계하고 며칠 동안 조회(朝會)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밤중에 도망하여 고성(高城) 바닷가에 이르렀다.  고구려 왕은 이를 알고 수십 명 군사를 시켜 쫓게 하니 고성에 이르러 따라가게 되었다.  그러나 보해는 고구려에 있을 때에 늘 좌우에 잇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왔기 때문에 쫓아온 군사들은 그를 불쌍히 여겨 모두 화살의 촉을 뽑고 쏘아서 몸이 상하지 않고 돌아올 수가 있었다.

눌지왕은 보해를 만나 보자 미해(美海)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한편으로는 기뻐하고 한편으로는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좌우 사람들에게 말한다.  "마치 한 몸에 팔뚝이 하나만 있고, 한 얼굴에 한 쪽 눈만 있는 것 같구나.  비록 하나는 얻었으나 하나는 잃은 대로이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느냐."

이때 제상은 이 말을 듣고 말을 탄 채 두 번 절하여 임금에게 하직하고 집에도 들르지 않고 바로 율포(栗浦) 갯가에 이르렀다.  그 아내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율포까지 쫓아갔으나 남편은 이미 배에 오른 뒤였다.  아내는 간곡하게 남편을 불렀다.  하지만 제상은 다만 손을 흔들어 보일 뿐 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왜국(倭國)에 도착해서 거짓말을 했다.

"계림왕(鷄林王)이 아무 죄도 없는 우리 부형(父兄)을 죽였기로 도망해서 여기 온 것입니다."  왜왕(倭王)은 이 말을 믿고 제상에게 집을 주어 편히 거처하게 했다.  이때 제상은 늘 미해를 모시고 해변(海邊)에 나가 놀면서 물고기와 새를 잡아다 왜왕에게 바치니 왜왕은 매우 기뻐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어느 날 새벽 마침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는데 제상이 미해에게 말했다.  "지금 빨리 떠나십시오."  미해는 "그러면 같이 떠나십시다"했으나 제상은 말한다.  "신이 만일 같이 떠난다면 왜인(倭人)들이 알고 뒤를 쫓을 것입니다.  원컨대 신은 여기에 남아 뒤쫓는 것을 막겠습니다."  미해가 다시 말한다.  "지금 나는 그대를 부형(父兄)처럼 여기고 있는데 어찌 그대를 버려 두고 혼자서만 돌아간단 말이오."  제상은 말한다.  "신은 공의 목숨을 구하는 것으로, 대왕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면 그것으로 만족할 뿐입니다.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리고는 술을 부어 미해에게 드렸다.  이때 계림(鷄林) 사람 강구려(康仇麗)가 왜국(倭國)에 와 있었는데 그를 딸려 호송(護送)하게 했다.

미해를 떠나보내고, 제상은 미해의 방에 들어가서 이튿날 아침까지 있었다.  미해를 모시는 좌우 사람들이 방에 들어가 보려 하므로 제상이 나와서 말리면서 말했다.  "미해공은 어제 사냥하는 데 따라다니느라 몹시 피로해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녁때가 되자 좌우 사람들은 이상히 여겨 다시 물었다.  이때 제상은 대답했다.  "미해공은 떠난 지 이미 오래 되었소."

좌우 사람들이 급히 달려가 왜왕에게 고하자 왕은 기병을 시켜 뒤를 쫓게 했으나 따르지 못했다.  이에 왕은 제상을 가두고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너의 나라 왕자를 몰래 돌려 보냈느냐."  제상이 대답한다.  "나는 계림 신하이지 왜국 신하가 아니오.  이제 우리 임금의 소원을 이루어 드렸을 뿐인데, 어찌 이 일을 그대에게 말하겠소."  왜왕은 노했다.  "이제 너는 이미 내 신하가 되었는데도 계림 신하라고 말하느냐.  그렇다면  반드시 오형(五刑)을 갖추어 너에게 쓸 것이다.  만일 왜국 신하라고만 말한다면 후한 녹(祿)을 상으로 주리라."  제상은 대답한다.  "차라리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  차라리 계림의 형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작록을 받지 않겠다."

왜왕은 노했다.  제상의 발 가죽을 벗기고 갈대[겸가]를 벤 위를 걸어가게 했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 신하냐."  "계림의 신하다."  왜왕은 또 쇠를 달구어 그 위에 세워 놓고 다시 물었다.  "어느 나라 신하냐."  "계림의 신하다."  왜왕은 그를 굴복시키지 못할 것을 알고 목도(木島)라는 섬 속에서 불태워 죽였다.

미해는 바다를 건너 돌아왔다.  그는 먼저 강구려(康仇麗)를 시켜 나라 안에 사실을 알렸다.  눌지왕은 놀라고 기뻐하여 백관들에게 명하여 미해를 굴헐역(屈歇驛)에 나가서 맞게 했다.  왕은 아우 보해와 함께 남교(南郊)에 나가서 친히 미해를 맞아 대궐로 들어갔다.  잔치를 베풀고 국내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려 죄수를 풀어 주었다.  또 제상의 아내를 국대부인(國大夫人)에 봉하고, 그의 딸은 미해공의 부인을 삼았다.

이때 의론하는 사람들은 말했다.  "옛날에 한나라 신하 주가(周苛)가 형양(滎陽) 땅에 있다가 초(楚)나라 군사에게 포로로 잡힌 일이 있었다.  이때 항우(項羽)는 주가를 보고 말하기를, '네가 만일 내 신하 노릇을 한다면 만호후(萬戶侯)를 주겠다'했다.  그러나 주가는 항우를 꾸짖고 굴복하지 않으므로 그에게 죽음을 당했다.  그런데 이번 제상의 죽음은 주가만 못하지 않다."

처음에 제상이 신라를 떠날 때 부인이 듣고 남편의 뒤를 쫓아갔으나 따르지 못했었다.  이에 망덕사(望德寺) 문 남쪽 사장(沙場) 위에 이르러 주저앉아 길게 부르짖었는데, 이런 일이 있었다 하여 그 사장을 장사(長沙)라고 불렀다.  친척 두 사람이 부인을 부축하여 돌아오려 하자 부인은 다리를 뻗은 채 앉아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곳을 벌지지(伐知旨)라고 이름지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오래 된 뒤에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치述嶺)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고 통곡하다가 죽고 말았다.  그래서 그를 치술신모(치述神母)라고 하는데, 지금도 그를 제사지내는 사당(祠堂)이 있다.

 

 

제18대 실성왕(實聖王)

 

의희(義熙) 9년 계축(癸丑; 413)에 평양주(平壤州)의 대교(大橋)가 완성되었다.  왕은 전왕(前王)의 태자(太子) 눌지(訥祗)가 덕망이 있는 것을 꺼려서 이를 죽이고자 했다.  이에 고구려의 군사를 청하여 거짓 눌지에게 맞도록 했다.  그러나 고구려 사람들은 눌지에게 어진 행실이 있음을 알고는 창끝을 뒤로 돌려 실성왕(實聖王)을 죽이고 눌지를 세워 왕을 삼고 돌아갔다.

 

 

사금갑(射琴匣)

 

제21대 비처왕(毗處王; 소지왕炤智王이라고도 한다)이 즉위한 10년 무진(戊辰; 488)에 천천정(天泉亭)에 거동했다.  이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 보시오"한다(혹은 말하기를, 신덕왕神德王이 흥륜사興輪寺에 가서 행향行香하려 하는데 길에서 보니 여러 마리 쥐가 꼬리를 물고 있었다.  괴상히 여겨 돌아와 점을 쳐 보니 "내일 제일 먼저 우는 까마귀를 따라가 찾아 보라"고 했다 한다.  하지만 이 설說은 잘못이다).  

왕은 기사(騎士)에게 명하여 까마귀를 따르게 했다.  남쪽 피촌(避村; 지금의 양피사壤避寺村이니 남산南山 동쪽 기슭에 있다)에 이르러 보니 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다.  이것을 한참 쳐다보고 있다가 문득 까마귀가 날아간 곳을 잊어버리고 길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때 한 늙은이가 못 속에서 나와 글을 올렸는데, 그 글 겉봉에는, "이 글을 떼어 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떼어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입니다"했다.  기사(騎士)가 돌아와 비처왕(毗處王)에게 바치니 왕은 말한다.  "두 사람을 죽게 하느니보다는 차라리 떼어 보지 않아 한 사람만 죽게 하는 것이 낫겠다."  이때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두 사람이라 한 것은 서민(庶民)을 말한 것이요, 한 사람이란 바로 왕을 말한 것입니다."  왕이 그 말을 옳게 여겨 글을 떼어 보니 "금갑(琴匣)을 쏘라[射琴匣]"고 했을 뿐이다.  왕은 곧 궁중으로 들어가 거문고 갑(匣)을 쏘았다.  그 거문고 갑 속에는 내전(內殿)에서 분향수도(焚香修道)하고 있던 중이 궁주(宮主)와 은밀히 간통(奸通)하고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을 사형(死刑)에 처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그 나라 풍속에 해마다 정월 상해(上亥)·상자(上子)·상오일(上午日)에는 모든 일을 조심하여 하고, 감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16(5)일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을 지어 제사지냈으나 이런 일은 지금까지도 계속 행해지고 있다.  이언(俚言)에 이것을 달도(달도)라고 한다.  슬퍼하고 조심하며 모든 일을 금하고 꺼린다는 뜻이다.  또 노인이 나온 못을 이름하여 서출지(書出池)라고 했다.

 

 

지철로왕(智哲老王)

 

제22대 지철로왕(智哲老王)의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지대로(智大路), 또는 지도로(智度路)이며 시호(諡號)는 지증(智證)이다.  시호를 쓰는 법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또 우리말에 왕을 마립간(麻立干)이라 한 것도 이 왕 때부터 시작되었다.  왕은 영원(永元) 2년 경진(庚辰; 500)에 왕위(王位)에 올랐다(신사辛巳라고도 하는데, 그렇다면 영원永元 3년이다).

왕은 음경(陰莖)의 길이가 한 자 다섯 치가 돼 배필을 얻기 어려웠다.  그래서 사자(使者)를 삼도(三道)에 보내서 배필을 구했다.  사자(使者)가 모량부(牟梁部) 동노수(冬老樹) 밑에 이르니 개 두 마리가 북만큼 큰 똥덩어리의 양쪽 끝을 물고 싸우고 있다.  사자는 그 마을 사람을 찾아 보고 누가 눈 똥인가를 물었다.  한 소녀가 말하였다.  "이것은 모량부 상공(牟梁部相公)의 딸이 여기서 빨래를 하다가 숲속에 숨어서 눈 것입니다."  그 집을 찾아가 살펴보니 그 여자는 키가 7척 5촌이나 된다.  이 사실을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수레를 보내서 그 여자를 궁중으로 맞아 황후(皇后)를 봉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하례했다.

또 아슬라주(阿瑟羅州; 지금의 명주溟州) 동쪽 바다에 순풍(順風)으로 이틀 걸리는 곳에 우릉도(于陵島; 지금의 우릉羽陵)가 있다.  이 섬은 둘레 2만 6,730보(步)이다.  이 섬 속에 사는 오랑캐들은 그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몹시 교만하여 조공(朝貢)을 바쳐 오지 않았다.  이에 왕은 아찬(伊飡) 박이종(朴伊宗)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게 했다.  이때 이종은 나무로 사자(獅子)를 만들어 큰 배에 싣고 위협했다.  "너희가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놓아 버리겠다."  이에 오랑캐들은 두려워하여 항복했다.  이에 이종을 상주어 주백(州伯)을 삼았다.

 

 

진흥왕(眞興王)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은 즉위할 때 나이 15세이므로 태후(太后)가 섭정(攝政)했다.  태후는 곧 법흥왕(法興王)의 딸로서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비(妃)이다.  진흥왕이 임종(臨終)할 때에 머리를 깎고 법의(法衣)를 입고 돌아갔다.

승성(承聖) 3년(554) 9월에 백제(百濟) 군사가 진성(珍城)을 침범하여 남녀 3만 9,000명과 말 8,000필을 빼앗아갔다.  이보다 먼저 백제가 신라와 군사를 합쳐서 고구려(高句麗)를 치려고 했었다.  이때 진흥왕은 말하기를,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하늘에 매여 있다.  만일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감히 고구려가 망하기를 바랄 수 있겠느냐"했다.  그리고 이 말을 고구려에 전하게 하니 고구려는 이 말에 감동되어 신라와 평화롭게 지냈다.  이런 때문에 백제가 신라를 원망하여 침범한 것이다.

 

 

도화녀(桃花女)와 비형랑(鼻荊郞)

 

제25대 사륜왕(四輪王)의 시호(諡號)는 진지대왕(眞智大王)으로, 성(姓)은 김씨(金氏), 왕비(王妃)는 기오공(起烏公)의 딸 지도부인(知刀夫人)이다.  대건(大建) 8년 병신(丙申; 576, 고본古本에는 11년 기해己亥라고 했는데 이는 잘못이다)에 왕위(王位)에 올랐다.  나라를 다스린 지 4년에 주색에 빠져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럽자 나랏사람들은 그를 폐위시켰다.

이보다 먼저 사량부(沙梁部)의 어떤 민가(民家)의 여자 하나가 얼굴이 곱고 아름다워 당시 사람들은 도화랑(桃花郞)이라 불렀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들여 욕심을 채우고자 하니 여인은 말한다.  "여자가 지켜야 하는 것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있는데도 남에게 시집가는 일은 비록 만승(萬乘)의 위엄을 가지고도 맘대로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왕이 말한다.  "너를 죽인다면 어찌하겠느냐."  여인이 대답한다.  "차라리 거리에서 베임을 당하더라도 딴 데로 가는 일은 원치 않습니다."  왕은 희롱으로 말했다.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  "되겠습니다."  왕은 그를 놓아 보냈다.

이 해에 왕은 폐위되고 죽었는데 그 후 2년 만에 도화랑(桃花郞)의 남편도 또한 죽었다.  10일이 지난 어느 날 밤중에 갑자기 왕은 평시(平時)와 같이 여인의 방에 들어와 말한다.  "네가 옛날에 허락한 말이 있지 않느냐.  지금은 네 남편이 없으니 되겠느냐."  여인이 쉽게 허락하지 않고 부모에게 고하니 부모는 말하기를, "임금의 말씀인데 어떻게 피할 수가 있겠느냐"하고 딸을 왕이 있는 방에 들어가게 했다.  왕은 7일 동안 머물렀는데 머무는 동안 오색(五色) 구름이 집을 덮었고 향기는 방안에 가득하였다.  7일 뒤에 왕이 갑자기 사라졌으나 여인은 이내 태기가 있었다.  달이 차서 해산하려 하는데 천지가 진동하더니 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이름을 비형(鼻荊)이라고 했다.

진평대왕(眞平大王)이 그 이상한 소문을 듣고 아이를 궁중에 데려다가 길렀다.  15세가 되어 집사(執事)라는 벼슬을 주었다.  그러나 비형(鼻荊)은 밤마다 멀리 도망가서 놀곤 하였다.  왕은 용사(勇士) 50명을 시켜서 지키도록 했으나 그는 언제나 월성(月城)을 날아 넘어가서 서쪽 황천(荒天) 언덕 위에 가서는 귀신들을 데리고 노는 것이었다.  용사(勇士)들이 숲 속에 엎드려서 엿보았더니 귀신의 무리들이 여러 절에서 들려 오는 새벽 종소리를 듣고 각각 흩어져 가 버리면 비형랑(鼻荊郞)도 또한 집으로 돌아왔다.  용사들은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했다.  왕은 비형을 불러서 말했다.  "네가 귀신들을 데리고 논다니 그게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그 귀신의 무리들을 데리고 신원사(神元寺) 북쪽 개천(신중사神衆寺라고도 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이것을 황천荒天 동쪽 심거深渠라고도 한다)에 다리를 놓도록 해라."  비형은 명을 받아 귀신의 무리들을 시켜서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다.  그래서 다리를 귀교(鬼橋)라고 했다.  왕은 또 물었다.  "그들 귀신들 중에서 사람으로 출현(出現)해서 조정 정사를 도울 만한 자가 있느냐."  "길달(吉達)이란 자가 있사온데 가히 정사를 도울 만합니다."  "그러면 데리고 오도록 하라."  이튿날 그를 데리고 와서 왕께 뵈니 집사(執事) 벼슬을 주었다.  그는 과연 충성스럽고 정직하기가 비할 데 없었다.  이때 각간(角干) 임종(林宗)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은 명령하여 길달(吉達)을 그 아들로 삼게 했다.  임종은 길달(吉達)을 시켜 흥륜사(興輪寺) 남쪽에 문루(門樓)를 세우게 했다.  그리고 밤마다 그 문루(門樓) 위에 가서 자도록 했다.  그리하여 그 문루를 길달문(吉達門)이라고 했다.  어느 날 길달(吉達)이 여우로 변하여 도망해 갔다.  이에 비형은 귀신을 무리를 시켜서 잡아 죽였다.  이 때문에 귀신을 무리들은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하여 달아났다.

당시 사람들은 글을 지어 말했다.

 

성제(聖帝)의 넋이 아들을 낳았으니, 비형랑(鼻荊郞)의 집이 바로 그곳일세.

날고 뛰는 모든 귀신의 무리, 이곳에는 아예 머물지 말라.

 

향속(鄕俗)에 이 글을 써붙여 귀신을 물리친다.

 

 

천사옥대(天賜玉帶; 청진淸秦 4년 정유丁酉(937) 5월에 정승正承 김부金傅가 금으로 새기고 옥玉으로 장식한 허리띠 하나를 바쳤다.  길이는 10위圍요.  전과鐫과가 62개나 되었다.  이것을 진평왕眞平王의 천사대天賜帶라고 한다.  고려高麗 태조太祖는 이것을 받아 내고內庫에 간직했다)

 

제26대 백정왕(白淨王)의 시호(諡號)는 진평대왕(眞平大王), 성(姓)은 김씨(金氏)다.  대건(大建) 11년 기해(己亥; 579) 8월에 즉위했다.  신장(身長)이 11척이나 되었다.  내제석궁(內帝釋宮; 천주사天柱寺라고도 하는데 왕王이 창건創建한 것이다)에 거동하여 섬돌을 밟자 두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왕이 좌우 사람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 돌을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었다가 뒷 세상 사람들이 보도록 하라.”  이것이 바로 성 안에 있는 다섯 개의 움직이지 않는 돌의 하나다.  왕이 즉위한 원년(元年) 천사(天使)가 대궐 뜰에 내려와 왕에게 말한다.  "상제(上帝)께서 내게 명하여 이 옥대(玉帶)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왕이 꿇어앉아 친히 이것을 받으니 하늘로 올라갔다.  교사(郊社)나 종묘(宗廟)의 큰 제사 때에는 언제나 이것을 띠었다.

그 후에 고려왕(高麗王)이 신라를 치려 하여 말했다.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서 침범하지 못한다고 하니 그게 무엇 무엇이냐."  좌우가 대답한다.  "황룡사(皇龍寺)의 장육존상(丈六尊像)이 그 첫째요, 그 절에 있는 구층탑(九層塔)이 그 둘째요, 진평왕(眞平王)의 천사옥대(天賜玉帶)가 그 셋째입니다."  이 말을 듣고 신라를 공격할 계획을 중지하고 찬(讚)하여 말했다.

 

구름밖에 하늘이 주신 긴 옥대(玉帶)는, 임금의 곤룡포(袞龍袍)에 알맞게 둘려 있네.

우리 임금 이제부터 몸 더욱 무거우니, 이 다음날엔 쇠로 섬돌을 만들 것이네.

 

 

선덕왕(善德王)의 지기삼사(知幾三事)

 

제27대 덕만(德曼; 만曼은 만萬으로도 씀)의 시호(諡號)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 성(姓)은 김씨(金氏), 아버지는 진평왕(眞平王)이다.  정관(貞觀) 6년 임진(壬辰; 632)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 지 16년 동안에 미리 안 일이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붉은빛·자줏빛·흰빛의 세 가지 빛으로 그린 모란[牧丹]과 그 씨 서 되[升]를 보내 온 일이 있었다.  왕은 그림의 꽃을 보더니 말하기를, "이 꽃은 필경 향기가 없을 것이다"하고 씨를 뜰에 심도록 했다.  거기에서 꽃이 피어 떨어질 때까지 과연 왕의 말과 같았다.

둘째는,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인데도 개구리들이 많이 모여들어 3, 4일 동안 울어 댄 일이 있었다.  나라 사람들이 괴상히 여겨 왕에게 물었다.  그러자 왕은 급히 각간(角干) 알천(閼川)·필탄(弼呑) 등에게 명하여 정병(精兵) 2,000명을 뽑아 가지고 속히 서교(西郊)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이 어딘지 찾아 가면 반드시 적병(賊兵)이 있을 것이니 엄습해서 모두 죽이라고 했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 각각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서교(西郊)에 가 보니 부산(富山) 아래 과연 여근곡(女根谷)이 있고 백제(百濟) 군사 500명이 와서 거기에 숨어 있었으므로 이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백제의 장군(將軍) 우소(우召)란 자가 남산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었으므로 포위하고 활을 쏘아 죽였다.  또 뒤에 군사 1,200명이 따라오고 있었는데, 모두 쳐서 죽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다.

셋째는, 왕이 아무 병도 없을 때 여러 신하들에게 일렀다.  "나는 아무 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도利天) 속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여러 신하들이 그게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해서 물으니 왕이 말하였다.  "낭산(狼山) 남쪽이니라."  그 날이 이르니 왕은 과연 죽었고, 여러 신하들은 낭산 양지에 장사지냈다.  10여 년이 지난 뒤 문호대왕(文虎(武)大王)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는데 불경(佛經)에 말하기를,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도利天)이 있다"고 했으니 그제야 대왕(大王)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가 있었다.

왕이 죽기 전에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아뢰었다.  "어떻게 해서 모란꽃에 향기가 없고, 개구리 우는 것으로 변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까."  왕이 대답했다.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므로 그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것은 당나라 임금이 나에게 짝이 없는 것을 희롱한 것이다.  또 개구리가 성난 모양을 하는 것은 병사(兵士)의 형상이요.  옥문(玉門)이란 곧 여자의 음부(陰部)이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흰데 흰빛은 서쪽을 뜻하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남근(男根)은 여근(女根)이 들어가면 죽는 법이니 그래서 잡기가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은 모두 왕의 성스럽고 슬기로움에 탄복했다.  꽃은 세 빛으로 그려 보낸 것은 대개 신라에는 세 여왕(女王)이 있을 것을 알고 한 일이었던가.  세 여왕이란 선덕(善德)·진덕(眞德)·진성(眞聖)이니 당나라 임금도 짐작하여 아는 밝은 지혜가 있었던 것이다.

선덕왕(善德王)이 영묘사(靈廟寺)를 세운 일은 <양지사전(良志師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  <별기(別記)>에 말하기를, "이 임금 때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瞻星臺)를 쌓았다"고 했다.

 

 

 

진덕왕(眞德王)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은 왕위에 오르자 친히 태평가(太平歌)를 지어 비단을 짜서 그 가사로 무늬를 놓아 사신을 시켜서 당(唐)나라에 바치게 했다(다른 책에는, 춘추공春秋公을 사신으로 보내서 군사를 청하게 했더니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기뻐하여 소정방蘇定方을 보냈다고 했으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현경現慶 이전에 춘추공春秋公은 이미 왕위王位에 올랐다.  그리고 현경懸磬 경신庚申은 태종太宗 때가 아니라 고종高宗 때이다.  정방定方이 온 것은 현경現慶 경신庚申년이니 비단을 짜서 무늬를 놓아 보냈다는 것은 청병請兵한 때의 일이 아니고 진덕왕眞德王 때의 일이라야 옳다.  대개 이때는 김흠순金欽純을 석방해 달라고 청할 때의 일일 것이다).

당(唐)나라 황제(皇帝)는 이것을 아름답게 여겨 칭찬하고 진덕여왕(眞德女王)을 계림국왕(鷄林國王)으로 고쳐 봉했다.  태평가(太平歌)의 가사(歌詞)는 이러했다.

 

큰 당(唐)나라 왕업(王業)을 세우니, 높고 높은 임금의 계획 장하여라.

전쟁 끝나니 천하를 평정하고, 문치(文治)를 닦으니 백왕(百王)이 뒤를 이었네.

하늘을 거느리니 좋은 비 내리고, 만물을 다스리니 모든 것이 광채가 나네.

깊은 인덕(人德)은 해와 달에 비기겠고, 돌아오는 운수는 요순(堯舜)보다 앞서네.

깃발은 어찌 그리 번쩍이는가, 징소리 북소리는 웅장도 하여라.

외이(外夷)로서 황제의 명령 거역하는 자는 칼 앞에 자빠져 천벌을 받으리.

순후(淳厚)한 풍속 곳곳에 퍼지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상서(祥瑞)를 바치네.

사시(四時)의 기후는 옥촉(玉燭)처럼 고르고, 칠요(七曜)의 광명은 만방에 두루 비치네.

산악(山嶽)의 정기는 보필할 재상을 낳고, 황제(皇帝)는 충량(忠良)한 신하에게 일을 맡겼네.

오제(五帝) 삼황(三皇)의 덕(德)이 하나로 이룩되니, 우리 당(唐)나라 황제(皇帝)를 밝게 해 주리.

 

왕의 대(代)에 알천공(閼川公)·임종공(林宗公)·술종공(述宗公)·호림공(虎林公; 자장慈藏의 아버지)·염장공(廉長公)·유신공(庾信公)이 있었다.  이들은 남산(南山) 우지암(우知巖)에 모여서 나랏일을 의논했다.  이때 큰 범 한 마리가 좌중에 뛰어들었다.  여러 사람들은 놀라 일어났지만 알천공(閼川公)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하면서 범의 꼬리를 잡아 땅에 메쳐 죽였다.  알천공의 완력이 이처럼 세었으므로 그를 수석(首席)에 앉혔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유신공(庾信公)의 위엄에 심복(心腹)했다.

신라에는 네 곳의 신령스러운 땅이 있어서 나라의 큰 일을 의논할 때면 대신(大臣)들은 반드시 그곳에 모여서 일을 의논했다.  그러면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이 네 곳의 첫째는 동쪽의 청송산(靑松山)이요, 둘쩨는 남쪽의 우지산(우知山)이요, 셋째는 서쪽의 피전(皮田)이요, 넷째는 북쪽의 금강산(金剛山)이다.  이 왕 때에 비로소 정월 초하룻날 아침의 조례(朝禮)를 행했고, 또 시랑(侍郞)이라는 칭호도 이때에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김유신(金庾信)

 

호력(虎力) 이간(伊干)의 아들 서현각간(舒玄角干) 김(金)씨의 맏아들이 유신(庾信)이고 그 아우는 흠순(欽純)이다.  맏누이는 보희(寶姬)로서 소명(小名)은 아해(阿海)이며, 누이동생은 문희(文姬)로서 소명(小名)이 아지(阿之)이다.  유신공(庾信公)은 진평왕(眞平王) 17년 을묘(乙卯; 595)에 났는데, 칠요(七曜)의 정기를 타고났기 때문에 등에 일곱 별의 무늬가 있었다.  그에게는 신기하고 이상한 일이 많았다.

나이 18세가 되는 임신(壬申)년에 검술(劍術)을 익혀 국선(國仙)이 되었다.  이때 백석(白石)이란 자가 있었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여러 해 동안 낭도(郎徒)의 무리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때 유신은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의 두 나라를 치려고 밤낮으로 깊은 의논을 하고 있었는데 백석이 그 계획을 알고 유신에게 고한다.  "내가 공과 함께 먼저 저들 적국에 가서 그들의 실정(實情)을 정탐한 뒤에 일을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유신은 기뻐하여 친히 백석을 데리고 밤에 떠났다.  고개 위에서 쉬고 있노라니 두 여인이 그를 따라와서 골화천(骨火川)에 이르러 자게 되었는데 또 한 여자가 갑자기 이르렀다.  공이 세 여인과 함께 기쁘게 이야기하고 있노라니 여인들은 맛있는 과자를 그에게 주었다.  유신은 그것을 받아 먹으면서 마음으로 그들을 믿게 되어 자기의 실정(實情)을 말하였다.  여인들이 말한다.  "공의 말씀은 알겠습니다.  원컨대 공께서는 백석을 떼어 놓고 우리들과 함께 저 숲속으로 들어가면 실정을 다시 말씀하겠습니다."  이에 그들과 함께 들어가니 여인들은 문득 신(神)으로 변하더니 말한다.  "우리들은 나림(奈林)·혈례(穴禮)·골화(骨火) 등 세 곳의 호국신(護國神)이오.  지금 적국 사람이 낭(郎)을 우인해 가는데도 낭은 알지 못하고 따라가므로, 우리는 낭을 말리려고 여기까지 온 것이었소."  말을 마치고 자취를 감추었다.  공은 말을 듣고 놀라 쓰러졌다가 두 번 절하고 나와서는 골화관(骨火館)에 묵으면서 백석에게 말했다.  "나는 지금 다른 나라에 가면서 중요한 문서를 잊고 왔다.  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 가지고 오도록 하자."  드디어 함께 집에 돌아오자 백석을 결박해 놓고 그 실정을 물으니 백석이 말한다.

"나는 본래 고구려 사람이오(고본古本에 백제 사람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추남楸南은 고구려 사람이요, 도한 음양陰陽을 역행逆行한 일도 보장왕寶藏王 때의 일이다).  우리 나라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신라의 유신은 우리 나라 점쟁이 추남(楸南; 고본古本에 춘남春南이라 한 것은 잘못임)이었는데, 국경 지방에 역류수(逆流水; 웅자雄雌라고도 하는데, 엎치락 뒤치락 하는 일)가 있어서 그에게 점을 치게 했었소.  이에 추남(楸南)이 아뢰기를, '대왕(大王)의 부인(夫人)이 음양(陰陽)의 도(道)를 역행(逆行)한 때문에 이러한 표징(表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했소.  이에 대왕은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고 왕비는 몹시 노했소.  이것은 필경 요망한 여우의 말이라 하여 왕에게 고하여 다른 일을 가지고 시험해서 물어 보아 맞지 않으면 중형(重刑)에 처하라고 했소.  이리하여 쥐 한 마리를 함 속에 감추어 두고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물었더니 그 사람은, 이것이 반드시 쥐일 것인데 그 수가 여덟입니다 했소.  이에 그의 말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죽이려 하자 그 사람은 맹세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는 꼭 대장이 되어 반드시 고구려를 멸망시킬 것이라 했소.  곧 그를 죽이고 쥐의 배를 갈라 보니 새끼 일곱 마리가 있었소.  그제야 그의 말이 맞는 것을 알았지요.  그날 밤 대왕의 꿈에 추남(楸南)이 신라 서현공(舒玄公) 부인의 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더니 모두 '추남이 맹세하고 죽더니 과연 맞았습니다' 했소.  그런 때문에 고구려에서는 나를 보내서 그대를 유인하게 한 것이오."  공은 곧 백석을 죽이고 음식을 갖추어 삼신(三神)에게 제사지내니 이들은 모두 나타나서 제물을 흠향했다.

김유신의 집안 재매부인(財買夫人)이 죽자 청연(靑淵) 상곡(上谷)에 장사지내고 재매곡(財買谷)이라 불렀다.  해마다 봄이 되면 온 집안의 남녀들이 그 골짜기 남쪽 시냇가에 모여서 잔치를 열었다.  이럴 때엔 백 가지 꽃이 화려하게 피고 송화(松花)가 골짜기 안 숲속에 가득했다.  골짜기 어귀에 암자를 짓고 이름을 송화방(松花房)이라 하여 전해 오다가 원찰(願刹)로 삼았다.  54대 경명왕(景明王) 때에 공(公)을 봉해서 흥호대왕(興虎(武)大王)이라 했다.  능은 서산(西山) 모지사(毛只寺) 북쪽 동으로 향해 뻗은 봉우리에 있다.

 

 

태종(太宗) 춘추공(春秋公)

 

제29대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이름은 춘추(春秋), 성(姓)은 김씨(金氏)이다.  용수(龍樹; 혹은 용춘龍春) 각간(角干)으로 추봉(追封)된 문흥대왕(文興大王)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진평대왕(眞平大王)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며 비(妃)는 문명황후(文明皇后) 문희(文姬)이니 곧 유신공(庾信公)의 끝누이였다.

처음에는 문희의 언니 보희가 꿈에 서악(西岳)에 올라가서 오줌을 누는데 오줌이 서울 안에 가득 찼다.  이튿날 아침에 문희에게 꿈이야기를 하자 문희는 이 말을 듣고 "내가 그 꿈을 사겠어요"하고 말하니, 언니는 "무슨 물건으로 사려 하느냐"하고 물었다.  "비단치마를 주면 되겠지요."  언니가 "그렇게 하자"하여, 동생이 옷깃을 벌리고 받으려 하자 언니는 "어젯밤 꿈을 네게 준다"했고, 동생은 비단치마로 값을 치렀다.  그런 지 10일이 지났다.  정월(正月) 오기일(午忌日; 위의 사금갑射琴匣에 보였으니 최치원崔致遠의 설說이다)에 유신(庾信)이 춘추공과 함께 유신의 집 앞에서 공을 찼다(신라 사람은 공 차는 것을 농주弄珠의 희롱이라 한다).  이때 유신은 일부러 춘추의 옷을 밟아서 옷끈을 떨어뜨리게 하고 말하기를 "내 집에 들어가서 옷끈을 달도록 합시다"하매 춘추공은 그 말을 따랐다.  유신이 아해(阿海)를 보고 옷을 꿰매 드리라 하니 아해는 말한다.  "어찌 그런 사소한 일로 해서 가벼이 귀공자(貴公子)와 가까이한단 말입니까"하고 사양했다(고본古本에는 병 때문에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이에 유신은 아지(阿之)에게 이것을 명했다.  춘추공은 유신의 뜻을 알고 드디어 아지와 관계하고 이로부터 자주 왕래했다.  유신은 그 누이가 임신한 것을 알고 꾸짖었다.  "너는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아이를 배었으니 그게 무슨 일이냐."  그리고는 온 나라 안에 말을 퍼뜨려 그 누이를 불태워 죽인다고 했다.  어느 날 선덕왕(善德王)이 남산(南山)에 거동한 틈을 타서 유신은 마당 가운데 나무를 쌓아 놓고 불을 질렀다.  연기가 일어나자 왕이 바라보고 무슨 연기냐고 물으니, 좌우에서 아뢰기를, "유신이 누이동생을 불태워 죽이는 것인가 봅니다"했다.  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 누이동생이 남편도 없이 임신한 때문이라고 했다.  왕이 "그게 누구의 소행이냐"고 물었다.  이때 춘추공은 왕을 모시고 앞에 있다가 얼굴빛이 몹시 변했다.  왕은 말한다.  "그것은 네가 한 짓이니 빨리 가서 구하도록 하라."  춘추공은 명령을 받고 말을 달려 왕명(王命)을 전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고 그 후에 버젓이 혼례를 올렸다.

진덕왕(眞德王)이 죽자 영휘(永徽) 5년 갑인(甲寅; 654)에 춘추공은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린 지 8년 만인 용삭(龍朔) 원년(元年) 신유(辛酉; 661)에 죽으니 나이 59세였다.  애공사(哀公寺) 동쪽에 장사지내고 비석을 세웠다.

왕은 유신과 함께 신비스러운 꾀와 힘을 다해서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런 때문에 묘호(廟號)를 태종(太宗)이라고 했다.  태자 법민(法敏)과 각간(角干) 인문(仁問)·각간 문왕(文王)·각간 노차(老且)·각간 지경(智鏡)·각간 개원(愷元) 등은 모두 문희가 낳은 아들들이었으니 전날에 꿈을 샀던 징조가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서자(庶子)는 개지문(皆知文) 급간(級干)과 거득(車得) 영공(令公)·마득(馬得) 아간(俄間)이다.  딸까지 합치면 모두 다섯 명이다.

왕은 하루에 쌀 서 말(三斗) 밥과 꿩 아홉 마리를 먹었다.  그러나 경신(庚申; 660)에 백제(百濟)를 멸한 뒤로는 점심을 먹지 않고 다만 아침 저녁뿐이었다.  그래도 하루에 쌀 여섯 말, 술 여섯 말, 꿩 열 마리를 먹었다.

성안 물건값은 포목(布木) 한 필에 벼가 서른 섬 혹은 쉰 섬이어서 백성들은 성대(聖代)라고 불렀다.

왕이 태자로 있을 때 고구려를 치고자 군사를 청하려고 당(唐)나라에 간 일이 있었다.  이때 당나라 임금이 그의 풍채(風彩)를 보고 칭찬하여 신성(神聖)한 사람이라 하고 당나라에 머물러 두고 시위(侍衛)로 삼으려 했지만 굳이 청해서 돌아오고 말았다.

이때 백제 마지막 왕 의자(義慈)는 곧 호왕(虎(武)王)의 맏아들로서 영웅(英雄)스럽고 용맹하고 담력(膽力)이 있었다.  부모를 효성스럽게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 당시 사람들은 그를 해동증자(海東曾子)라 했다.  정관(貞觀) 15년 신축(辛丑; 641)에 왕위에 오르자 주색(酒色)에 빠져서 정사는 어지럽고 나라는 위태로웠다.  좌평(佐平; 백제百濟의 벼슬 이름) 성충(成忠)이 애써 간했지만 듣지 않고 도리어 옥에 가두니 몸이 파리해지고 피곤해서 거의 죽게 되었으나 성충은 글을 올려 말했다.  "충신(忠臣)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습니다.  원컨대 한 마디 말만 여쭙고 죽겠습니다.  신(臣)이 일찍이 시국의 변화를 살펴보오니 반드시 병란(兵亂)이 있을 것입니다.  대체로 용병(用兵)은 그 지세(地勢)를 잘 가려야 하는 것이니 상류(上流)에 진을 치고 적을 맞아 싸우면 반드시 보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오거든 육로(陸路)로는 탄현(炭峴; 침현沈峴이라고도 하니 백제의 요새지要塞地임)을 넘지 말 것이옵고, 수군(水軍)은 기벌포(伎伐浦; 곧 장암長암이니 손량孫梁이라고도 하고 지화포只火浦 또는 백강白江이라고도 함)에 적군이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험한 곳에 의지하여 적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그 말을 깨닫지 못했다.  현경(現慶) 4년 기미(己未; 659)에 백제 오회사(烏會寺; 오합사烏合寺라고도 함)에 크고 붉은 말 한 마리가 나타나 밤낮으로 여섯 번이나 절을 돌아다녔다.  2월에는 여우 여러 마리가 의자왕(義慈王)의 궁중으로 들어왔는데 그 중 한 마리는 좌평(佐平)의 책상 위에 올라앉았다.  4월에는 태자궁(太子宮) 안에서 암탉과 작은 참새가 교미했다.  5월에는 사자수(泗차水; 부여扶餘에 있는 강 이름) 언덕 위에 큰 물고기가 나와서 죽어 있었는데 길이가 세 길이나 되었으며 이것을 먹은 사람은 모두 죽었다.  9월에는 궁중에 있는 홰나무가 마치 사람이 우는 것처럼 울었으며, 밤에는 귀신이 대궐 남쪽 길에서 울었다.  5년 경신(庚申; 660) 봄 1월엔 서울의 우물물이 핏빛이 되었다.  서쪽 바닷가에 작은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이것을 백성들이 다 먹을 수가 없었다.  또 사자수의 물이 핏빛이 되었다.  4월에는 청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였다.  서울 시정인(市井人)들이 까닭없이 놀라 달아나는 것이 마치 누가 잡으러 오는 것 같았다.  이래서 놀라 자빠져 죽은 자가 100여 명이나 되었고 재물을 잃은 자는 그 수효를 모를 만큼 많았다.  6월에는 왕흥사(王興寺)의 중들이 보니 배가 큰 물결을 따라 절문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또 마치 들사슴과 같은 큰 개가 서쪽에서 사자수 언덕에 와서 대궐을 바라보고 짖더니 이윽고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으며, 성안에 있는 여러 개들이 길 위에 모여들어 혹은 짖기도 하고 울기도 하다가 얼마 후에야 흩어졌다.  또 귀신 하나가 궁중으로 들어오더니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하다가 이내 땅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땅을 파게 하니 석 자 깊이에 거북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등에 글이 씌어 있었다.

 

"백제는 둥근 달 같고, 신라는 새 달과 같네."

 

이 글뜻을 무당에게 물으니 무당은, "둥근 달이라는 것은 가득 찬 것이니 차면 기우는 것입니다.  새 달은 차지 않은 것이니 차지 않으면 점점 차게 되는 것입니다"하자 왕은 노해서 무당을 죽여 버렸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둥근 달은 성(盛)한 것이옵고, 새 달은 미약(微弱)한 것이오니, 생각건데 우리 나라는 점점 성하고 신라는 점점 약해진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왕은 이 말을 듣고 기뻐했다.

태종(太宗)은 백제에 괴상한 변고가 많다는 소식을 듣고 5년 경신(庚申; 660)에 김인문(金仁問)을 사신으로 당나라에 보내서 군사를 청했다.  당 고종(高宗)은 좌호위장군(左虎(武)衛將軍) 형국공(荊國公) 소정방(蘇定方)으로 신구도 행군총관(神丘道 行軍摠管)을 삼아 좌위장군(左衛將軍) 유백영(劉伯英)과 좌호위장군(左虎衛將軍) 빙사귀(馮士貴)·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농효공(龐孝公) 등을 거느리고 13만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치게 했다.  또 신라 왕 춘추(春秋)로 우이도 행군총관(우夷道 行軍摠管)을 삼아 신라의 군사를 가지고 합세하도록 했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신라 서쪽 덕물도(德勿島)에 이르자 신라 왕은 장군 김유신(金庾信)을 보내서 정병(精兵) 5만을 거느리고 싸움에 나가게 했다.  의자왕은 이 소식을 듣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 싸우고 지킬 계책을 물으니 좌평(佐平) 의직(義直)이 나와 아뢴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 큰 바다를 건너왔고 또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못하여, 또 신라 군사는 큰 나라가 원조해 주는 것만 믿고 적을 가볍게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만일 당나라 군사가 싸움에 이롭지 못한 것을 보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진격해 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決戰)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달솔(達率) 상영(常永) 등은 말한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서 왔기 때문에 속히 싸우려고 서두르고 있으니 그 예봉(銳鋒)을 당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한편 신라 군사는 여러 번 우리에게 패한 때문에 이제 우리 군사의 기세를 바라만 보아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오니 오늘날의 계교는 마땅히 당나라 군사의 길을 막고 그 군사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일부 조그만 군사로 신라를 쳐서 그 예기(銳氣)를 꺾은 연후에 편의를 보아서 싸운다면 군사를 하나도 죽이지 않고서 나라를 보전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왕은 망설이고 어느 말을 따를지 모르고 있었다.  이때 좌평(佐平) 흥수(興首)가 죄짓고 고마며지현(古馬며知縣)에 귀양가 있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물었다.  "일이 급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흥수는 말한다.  "대체로 좌평 성충(成忠)의 말과 같사옵니다."  대신들은 이 말을 믿지 않고 말하기를, "흥수는 죄인의 몸이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오니 그 말은 쓸 것이 되지 못합니다.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白江; 기벌포伎伐浦)에 들어가서 강물을 따라 내려오되 배를 나란히 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또 신라군은 탄현(炭峴)에 올라와서 소로(小路)를 따라 내려오되 말[馬]을 나란히 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 놓고 군사를 놓아 친다면 마치 닭장에 든 닭과 그물에 걸린 물고기와 같을 것입니다" 했다.  왕은 "그 말이 옳다" 했다.

또 들으니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 한다.  의자왕은 장군 계백(階(偕)伯)을 보내 결사대(決死隊) 5,000명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으로 나가 신라 군사와 싸우게 했더니 계백은 네 번 싸워 네 번 다 이겼다.  하지만 군사는 적고 힘이 다하여 마침내 패하고 계백은 전사했다.  이에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는 합세해서 전진하여 진구(津口)까지 나가서 강가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때 갑자기 새가 소정방의 진영(陣營) 위에서 맴돌므로 사람을 시켜서 점을 치게 했더니 "반드시 원수(元帥)가 상할 것입니다" 한다.  정방이 두려워하여 군사를 물리고 싸움을 중지하려 하므로 김유신이 소정방에게 이르기를, "어찌 나는 새의 괴이한 일을 가지고 천시(天時)를 어긴단 말이오.  하늘에 응하고 민심에 순종해서 지극히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데 어찌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겠소"하고 신검(神劍)을 뽑아 그 새를 겨누니 새는 몸뚱이가 찢어져 그들의 자리 앞에 떨어진다.  이에 정방은 백강 왼쪽 언덕으로 나와서 산을 등지고 진을 치고 싸우니 백제군이 크게 패했다.  당나라 군사는 조수(潮水)를 타고 전선(戰船)이 꼬리를 물어 북을 치면서 전진했다.  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바로 백제의 도성(都城)으로 쳐들어가 30리쯤 되는 곳에 머물렀다.  이때 백제에서는 군사를 다 내어 막았지만 패해서 죽은 자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이리하여 당나라 군사는 이긴 기세(氣勢)를 타고서 성으로 들이닥쳤다.

의자왕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한다.  "내가 성충의 말을 듣지 않고 있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의자왕은 드디어 태자 융(隆; 효孝라고도 했지만 잘못이다)과 함께 북비(北鄙)로 도망했다.  정방이 그 성을 포위하자 왕의 둘째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무리를 거느리고 성을 굳게 지켰다.  이때 태장의 아들 문사(文思)가 태(泰)에게 말한다.  "왕이 태자와 함께 성에서 나가 달아났는데 숙부(叔父)가 맘대로 왕이 되었으니, 만일 당나라 군사가 포위한 것을 풀고 물러간다면 그때에는 우리들이 어떻게 온전할 수가 있겠습니까"하고는 좌우 사람들을 거느리고 성을 넘어 나아가자 백성들은 모두 그를 따르니 태(泰)는 이것을 말릴 수가 없었다.  소정방이 군사를 시켜 성첩(城堞)을 세우고 당나라 깃발을 꽂으니 태(泰)는 일이 매우 급해서 문을 열고 항복하기를 청했다.  이에 왕과 태자 융(隆), 왕자 태(泰), 대신 정복(貞福)과 여러 성이 모두 항복했다.  소정방은 왕 의자와 태자 융, 왕자 태, 왕자 연(演) 및 대신·장사(將士) 88명과 백성 1만 2,807명을 당나라 서울로 보냈다.

 

백제에는 원래 5부(部), 76군(郡), 200성(城), 36만 호(戶)가 있었는데 이때 당나라에서는 이곳에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蓮)·덕안(德安) 등 다섯 도독부(都督府)를 두고 우두머리를 뽑아서 도독(都督)·자사(刺史)를 삼아 다스리게 했다.  낭장(郎將) 유인원(劉仁願)에게 명하여 사자성(泗차城)을 지키게 하고, 도 좌위낭장(左衛郎將) 왕문도(王文度)로 웅진도독(熊津都督)을 삼아 백제에 남아 있는 백성들을 무마하게 했다.  소정방은 포로들을 이끌고 당나라 임금에게 뵈니, 임금은 이들을 책망만 하고 용서해 주었다.

의자왕이 그곳에서 병으로 죽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위위경(衛尉卿)을 증직(贈職)하고 그의 옛 신하들이 가서 조상하는 것을 허락했다.  또 명하여 손호(孫皓)와 진숙보(陳叔寶)의 무덤 옆에 장사지내게 하고 모두 비를 세워 주었다.

7년 임술(壬戌; 662)에 당에서는 소정방을 명하여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을 삼았다가 다시 평양도(平壤道)로 고쳐 고구려군을 패강(浿江)에서 깨뜨리고 마읍산(馬邑山)을 빼앗아 진영(陣營)을 세우고 드디어 평양성(平壤城)을 포위했으나 때마침 큰 눈이 내려서 포위를 풀고 돌아가니, 양주안집대사(凉州安集大使)를 삼아 토번(吐藩)을 평정했다.

건봉(乾封) 2년(667)에 소정방이 죽자 당나라 황제는 슬퍼하여 좌효기대장군(左驍騎大將軍) 유주도독(幽州都督)을 증직하고 시호(諡號)를 장(莊)이라 했다(이상은 <당사唐史>에 있는 글이다).

<신라별기(新羅別記)>에 의하면, 문호(文虎(武))왕이 즉위한 5년 을축(乙丑; 665) 8월 경자(庚子)에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웅진성(熊津城)에 가서 가왕(假王) 부여(扶餘) 융(隆)과 만나 단(壇)을 만들고 백마(白馬)를 잡아 맹세하는데, 먼저 천신(天神)과 산천(山川)의 영(靈)에 제사를 지낸 뒤에 말의 피를 뿌리고 글을 지어 맹세했다.

"저번에 백제의 선왕(先王)이 순종(順從)하는 것과 반역하는 이치에 어두워 이웃 나라와 평화를 두텁게 하지 않고 인친(姻親)과 화목하지 않으며, 고구려와 결탁해서 왜국(倭國)과 서로 통하여, 그들과 함께 잔포(殘暴)한 짓을 했다.  신라를 침략하여 성읍(城邑)을 파괴하고 백성을 짓밟아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다.  중국의 천자(天子)는 한 물건이라도 제가 살 곳을 잃는 것을 민망히 여기고 백성들이 해독을 입는 것을 불쌍히 여겨, 자주 사신을 보내서 사이좋게 지내기를 타일렀었다.  그러나 백제는 지리(地理)의 험하고 먼 것을 믿고 천경(天經)을 업신여기니 황제(皇帝)는 크게 노하여 삼가 정벌(征伐)을 행하니 깃발이 가리키는 곳 한 번 싸움에 이 땅을 평정했다.  마땅히 궁실(宮室)과 주택(住宅)을 무너뜨려 못을 만들어서 자손들을 경계하고 그 폐단의 근원을 아주 뽑아 없애어 뒷 세상에 교훈을 보이려 한다.  귀순(歸順)해 오는 자는 회유하고 반역하는 자를 정벌하는 것은 선왕의 아름다운 법이요, 망한 나라를 흥하게 하고 끊어진 대(代)를 잇게 하는 것은 전철(前哲)의 공통된 법칙이다.  일은 반드시 옛것을 본받아야 하는 것은 전의 사책(史冊)에 전해 오는 것이기 때문에, 전백제왕(前百濟王) 사가정경(司稼正卿) 부여(扶餘) 융(隆)을 세워 웅진도독(熊津都督)을 삼아 그 선조(先祖)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상재(桑梓)를 보전케 하는 것이다.  신라에 의지하여 길이 우방(友邦)이 되어 각각 묵은 감정을 없애고 좋은 의(誼)를 맺어 화친하게 지낼 것이며 삼가 조명(詔命)을 받들어 영원히 번국(藩國)이 될 것이다.  이에 사자(使者)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노성현공(魯城縣公) 유인원(劉仁願)을 보내서 친히 권유하여 나의 뜻을 자세히 선포(宣布)하는 것이다.  혼인할 것을 약속하고 맹세를 소중히 여겨 희생(犧牲)을 잡아 피를 뿌리고 함께 시종(始終)을 두텁게 할 것이다.  재앙을 나누고 환란(患亂)을 서로 구원하여 은의(恩誼)를 형제처럼 할 것이다.  삼가 윤언(綸言)을 받들어 감히 버리지 말 것이며, 이미 맹세를 정한 뒤에는 함께 변하지 말도록 힘쓸 것이다.  만일 어기고 배반하여 그 덕을 변하여 군사를 일으켜 변방을 침범하는 때에는 신명(神明)이 이를 살펴서 백 가지 재앙을 내리시어 자손들도 키우지 못하고 사직(社稷)도 지키지 못하여 제사는 끊어져서 남는 씨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런 때문에 여기에 금서철계(金書鐵契)를 만들어 종묘(宗廟)에 간직해 두는 것이니 자손은 만대(萬代)가 되도록 감히 어기지 말 것이다.  신(神)은 이를 듣고 이에 흠향하고 복을 주시옵소서."

맹세가 끝나자 폐백(幣帛)을 단 북쪽에 묻고 맹세한 글은 신라의 대묘(大廟)에 간직해 두었다.  이 맹세하는 글은 대방도독(帶方都督) 유인궤(劉仁軌)가 지은 것이다(위에 있는 <당사唐史>의 글을 상고해 보면, 소정방蘇定方이 의자왕義慈王과 태자太子 융隆 들을 당唐나라 서울에 보냈다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부여왕扶餘王 융隆을 만났다고 했으니, 당唐나라 황제皇帝가 융隆의 죄를 용서하고 돌려보내서 웅진도독熊津都督을 삼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때문에 맹문盟文에도 분명히 말했으니 이것으로 증거가 된다).

또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총장(總章) 원년(元年) 무진(戊辰; 668, 총장總章 무진戊辰이라면 이적李勣의 일이니 하문下文에 소정방蘇定方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만일 정방定方의 일이라면 연호는 용삭龍朔 2년 임술壬戌에 해당하며 평양平壤을 포위했을 때의 일이다)에 신라에서 청한 당나라 군사가 평양 교외에 주둔하면서 글을 보내 말하기를, '급히 군자(軍資)를 보내 달라'고 했다.  이에 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묻기를, '고구려에 들어가서 당나라 군사가 주둔한 곳으로 간다는 것은 그 형세가 몹시 위험하다.  그러나 우리가 청한 당나라 군사가 양식이 떨어졌는데 군량을 보내 주지 않는다는 것도 옳지 못하니 어찌 하면 좋겠는가' 했다.  이에 김유신이 아뢰었다.  '신 등이 군자(軍資)를 수송하겠사오니 대왕께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했다.  이에 유신(庾信)·인문(仁問) 등이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국경 안에 들어가 곡식 2만 곡(斛)을 갖다주고 돌아오니 왕이 크게 기뻐했다.  또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 군사와 합하고자 할 때 유신이 먼저 연기(然起)·병천(兵川) 두 사람을 보내서 그 합세할 시기를 물었다.  이때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종이에 난새[鸞]와 송아지[犢]의 두 그림을 그려 보냈다.  신라 사람들은 그 뜻을 알지 못하여 사람을 보내서 원효법사(元曉法師)에게 물었다.  원효는 해석하기를, '속히 군사를 돌이키라는 뜻이니 송아지와 난새를 그린 것은 두 물건이 끊어지는 것을 뜻한 것입니다' 했다.  이에 유신은 군사를 돌려 패수(浿水)를 건너려 할 때 명(命)을 내려 '뒤떨어지는 자는 베이리라' 했다.  이리하여 군사들이 앞을 다투어 강을 건너는데 반쯤 건너자 고구려 군사가 쫓아와서 아직 건너지 못한 자를 잡아 죽였다.  그러나 이튿날 유신은 고구려 군사를 반격하여 수만명을 잡아 죽였다."

<백제고기(百濟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부여성(扶餘城)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는데 아래로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다.  옛날부터 전해 오는 말에 의자왕과 여러 후궁(後宮)들은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서로 이르기를, '차라리 자살해 죽을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하고 서로 이끌고 여기에 와서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했다.  때문에 이 바위를 타사암(墮死岩)이라고 하나 이것은 속설(俗說)이 잘못 전해진 것이다.  다만 궁녀(宮女)들만이 여기에 떨어져 죽은 것이오 의자왕이 당나라에서 죽었다는 것은 <당사(唐史)>에 명문(明文)이 있다.

<신라고전(新羅古傳)>에는 이러하다.  "소정방이 이미 고구려·백제 두 나라를 토벌하고 또 신라마저 치려고 머물러 있었다.  이때 유신이 그 뜻을 알아채고 당나라 군사를 초대하여 독약을 먹여 죽이고는 모두 쓸어 묻었다.  지금 상주(尙州) 지경에 당교(唐橋)가 있는데 이것이 그들을 묻은 곳이다."(<당사唐史>를 상고하건대 그 죽은 까닭은 말하지 않고 다만 죽었다고만 했으니 무슨 까닭일까?  감추기 위한 것인가.  향전鄕傳이 근거가 없는 것인가.  만일 임술壬戌년 고구려高句麗 싸움에 신라 사람이 정방定方의 군사를 죽였다면 그 후일後日인 총장總章 무진戊辰에 어찌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高句麗를 멸할 수가 있었겠는가.  이것으로 보면 향전鄕傳의 근거 없음을 알 수가 있다.  다만 무진戊辰에 고구려를 멸한 후에 唐나라에 신하로서 섬기지 않고 만대로 그 땅을 소유所有한 일은 있었으나 소정방蘇定方·이적李勣 두 공公을 죽이기까지 한 일은 없었다)

당나라 군사가 백제를 평정하고 돌아간 뒤에 신라 왕은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백제의 남은 군사를 쫓아서 잡게 하고 한산성(漢山城)에 주둔하니 고구려·말갈(靺鞨)의 두 나라 군사가 와서 포위하여 서로 싸웠으나 끝이 나지 않아 5월 11일에 시작해 6월 22일에 이르니 우리 군사는 몹시 위태로웠다.  왕이 듣고 여러 신하와 의논했으나 장차 어찌할 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유신이 달려와서 아뢴다.  "일이 급하여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가 없고, 오직 신술(神術)이라야 구원할 수가 있습니다"하고 성부산(星浮山)에 단(壇)을 모드고 신술을 쓰니 갑자기 큰 독만한 광채가 단 위에서 나오더니 별이 북쪽으로 날아갔다(이 일로 해서 성부산星浮山이라고 하나 산의 이름에 대해서는 다른 설說도 있다.  산山은 도림都林 남쪽에 있는데 솟은 한 봉우리가 이것이다.  서울에서 한 사람이 벼슬을 구하려고 그 아들을 시켜 큰 횃불을 바라보고 모두 말하기를, 그곳에 괴상한 별이 나타났다고 했다.  王이 이 말을 듣고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사람을 모아 기도하게 했더니 그 아버지가 거기에 응모應募하려 했다.  그러나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것은 별로 괴상한 일이 아니옵고 다만 한 집에 아들이 죽고 아비가 울 징조입니다" 했다.  그래서 드디어 기도를 그만두었다.  이날 밤 그 아들이 산에서 내려오다가 범에게 물려 죽었다).  한산성 안에 있던 군사들은 구원병이 오지 않는 것을 원망하여 서로 보고 울 뿐이었는데 이때 적병이 이를 급히 치고자 하자 갑자기 광채가 남쪽 하늘 끝으로부터 오더니 벼락이 되어 적의 포석(砲石) 30여 곳을 쳐부쉈다.  이리하여 적군의 활과 화살과 창이 부서지고 군사들은 모두 땅에 자빠졌다가 한참 만에야 깨어나서 모두 흩어져 달아나니 우리 군사는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이 처음 왕위에 오르자, 어떤 사람이 돼지를 바쳤는데 머리는 하나요 몸뚱이는 둘이요, 발은 여덟이었다.  의론하는 자가 이것을 보고 말했다.  "이것은 반드시 육합(六合)을 통일할 상서(祥瑞)입니다."  이 왕대(王代)에 비로소 중국의 의관(衣冠)과 아홀(牙笏)을 쓰게 되었는데 이것은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당나라 황제에게 청해서 가져온 것이었다.

신문왕(神文王) 때에 당나라 고종(高宗)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서 말했다.  "나의 성고(聖考) 당태종(唐太宗)은 어진 신하 위징(魏徵)·이순풍(李淳風)들을 얻어 마음을 합하고 덕을 같이하여 천하를 통일했다.  그런 때문에 이를 태종황제(太宗皇帝)라고 했다.  너의 신라는 바다 밖의 작은 나라로서 태종(太宗)이란 칭호(稱號)를 써서 천자(天子)의 이름을 참람되이 하고 있으니 그 뜻이 충성되지 못하다.  속히 그 칭호를 고치도록 하라."  이에 신라왕은 표(表)를 올려 말했다.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지만 성스러운 신하 김유신을 얻어 삼국을 통일했으므로 태종(太宗)이라 한 것입니다."  당나라 황제가 그 글을 보고 생각하니, 그가 태자로 있을 때에 하늘에서 허공에 대고 부르기를, "삼삼천(三三天)의 한 사람이 신라에 태어나서 김유신이 되었느니라" 한 일이 있어서 책에 기록해 둔 일이 있는데, 이것을 꺼내 보고는 놀라고 두려움을 참지 못했다.  다시 사신을 보내어 태종의 칭호를 고치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장춘랑(長春郞)과 파랑(罷郞)

 

처음에 백제 군사와 황산에서 싸울 때 장춘랑(長春郞)과 파랑(波浪)이 진중(陣中)에서 죽었다.  그 뒤 백제를 칠 때 그들은 태종(太宗)의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  "신 등이 옛날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쳤고, 이제 백골(白骨)이 되어서도 나라를 완전히 지키려고 종군(從軍)하여 게으르지 않습니다.  하오나 당(唐)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의 위엄에 눌려서 남의 뒤로만 쫓겨다니고 있습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우리에게 적은 군사를 주십시오."

대왕(大王)은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두 혼(魂)을 위하여 하룻동안 모산정(牟山亭)에서 불경(佛經)을 외고 또 한산주(漢山州)에 장의사(壯義寺)를 세워 그들의 명복(冥福)을 빌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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