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해 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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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해(意解) 제5
원광서학(圓光西學)
<당속고승전(唐續高僧傳)> 제13권에 실려 있는 말이다. 신라 황륭사(皇隆寺)의 중 원광(圓光)의 속성(俗姓)은 박씨(朴氏)이다. 본래 삼한(三韓), 즉 변한(卞韓)·진한(辰韓)·마한(馬韓)에 살았으니, 원광은 곧 진한 사람이다. 대대로 해동(海東)에 살아 조상의 풍습(風習)이 멀리 계승되었다. 그는 도량(道量)이 넓고 컸으며, 글을 즐겨 읽어 현유(玄儒)를 두루 공부하고 자사(子史)도 연구하여 글 잘한다는 이름을 삼한(三韓)에 떨쳤다. 그러나 넓고 풍부한 지식은 오히려 중국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여 드디어 친척과 벗들을 작별하고 중국으로 가기로 작정하고, 나이 25세에 배를 타고 금릉(金陵)으로 가니, 당시는 진(陳)나라 때로서 문명(文明)의 나라라는 이름이 있었다. 거기에서 전에 의심나던 일을 묻고 도(道)를 들어서 뜻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 그는 장엄(莊嚴) 민공(旻公)의 제자의 강의를 들었다. 그는 본래 세상의 모든 전적(典籍)을 읽었기 때문에 이치를 연구하는 데는 신(神)이라고 했는데 불교(佛敎)의 뜻을 듣고 보니 지금까지 읽고 있던 것은 마치 썩은 지푸라기와 같았다. 명교(名敎)를 헛되이 찾은 것이 생애(生涯)에 있어 실로 두려운 일이었다. 이에 진(陳)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도법(道法)에 돌아갈 것을 청하니 칙령(勅令)을 내려 이를 허락했다. 이리하여 처음으로 중이 되어 이내 계(戒)를 갖추어 받고 두루 강의하는 곳을 찾아서 좋은 도리를 다 배웠으며, 미묘(微妙)한 말을 터득하여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성실(成實)>의 열반(涅槃)을 얻어 마음 속에 간직해 두고 삼장(三藏)과 석론(釋論)을 두루 연구해 찾았다. 끝으로 또 오(吳)나라 호구산(虎丘山)에 올라가 염정(念定)을 서로 따르고, 각관(覺觀)을 잊지 않으니 중의 무리들이 구름처럼 임천(林泉)에 모여들었다. 또 <사함(四含)>을 종합해 읽어 그 공효(功效)가 팔정(八定)에 흐르니 명선(明善)을 쉽게 익혔고 통직(筒直)에 어그러진 것이 없었다.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던 마음과 몹시도 맞았기 때문에 드디어 이곳에서 일생을 마치려는 생각이 있었다. 이에 밖의 인사(人事)를 아주 끊고 성인(聖人)의 자취를 두루 유람하며 생각을 청소(靑소)에 두고 길이 속세(俗世)를 하직했다.
이때 한 신사(信士)가 있어 산 밑에 살고 있더니, 원광(圓光)에게 나와서 강의해 주기를 청했지만 이를 굳이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끝내 맞아가려 하므로 드디어 그 뜻을 따라 처음에는 <성실론(成實論)>을 말하고 끝에는 <반야경(般若經)>을 강의했는데, 모두 해석이 뛰어나고 통철하며 가문(嘉問)을 전해 옮겨서 아름다운 말과 뜻으로 엮어 나가니, 듣는 자가 매우 기뻐하여 모든 것이 마음에 흡족했다.
이로부터 예전의 법에 따라 남을 인도하고 교화(敎化)하는 것을 임무로 삼으니, 매양 법륜(法輪)이 한번 움직일 때마다 문득 세상 사람들을 불법(佛法)으로 기울어지게 했다. 이는 비록 다른 나라에서의 통전(通傳)이지만 도에 젖어서 싫어하고 꺼리는 것이 없기 때문에, 명망(名望)이 널리 흘러서 영표(嶺表)에까지 전파되니, 가시밭을 헤치고 바랑을 지고 오는 자가 마치 고기 비늘처럼 잇달았다. 이때는 마침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천하를 다스릴 때여서 그 위엄이 남쪽 나라에까지 미쳤다.
진(陳)나라의 운수가 다해서 수(隋)나라 군사가 양도(揚都)에까지 들어가니 원광은 드디어 난병(亂兵)에게 잡혀서 장차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수의 대장(大將)이 절과 탑이 불타는 것을 바라보고 달려가 구하려 하였으니 불타는 모습은 전혀 없고 다만 원광이 탑 앞에 결박되어 장차 죽음을 당하려 하고 있다. 대장은 그 이상한 것을 보고 괴이하게 여겨 즉시 결박을 풀어 놓아 보냈으니, 그 위태로운 때를 당해서 영험을 나타냄이 이와 같았다.
원광은 학문이 오월(吳越)을 통달했기 때문에 문득 중국 북쪽 지방인 주(周)와 진(秦)의 문화를 보고자 하여 개황(開皇) 9년(589)에 수나라 서울에 유학(遊學)했다. 마침 불법의 초회(初會)를 당해서 섭론(攝論)이 비로소 일어나니 문언(文言)을 받들어 간직하여 미서(微緖)를 떨치고 또 혜해(慧解)를 달려 이름을 중국 서울에까지 드날렸다. 공업(功業)이 이미 이루어지자 신라로 돌아가서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본국(本國)인 신라에서는 멀리 이 소식을 듣고 수나라 임금에게 아뢰어 돌려보내 달라고 자주 청했다. 수나라 임금은 칙명을 내려 그를 후하게 대접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원광이 여러 해 만에 돌아오니 노소(老少)가 서로 기뻐하고 신라의 왕 김씨(金氏)는 그를 만나보고는 공경하면서 성인(聖人)처럼 우러렀다.
원광은 성질이 한가롭고 다정박애(多情博愛)하였으며, 말할 때는 항상 웃음을 머금고 노여운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전표(전表)나 계서(啓書) 등 왕래하는 국명(國命)이 모두 그의 머리 속에서 나왔다. 온 나라가 받들어 나라 다스리는 방법을 모두 그에게 맡기고 도(道)로 교화(敎化)하는 일을 물으니, 처지는 비록 금의환향(錦衣還鄕)한 것과는 달랐지만 실지로는 중국의 모든 것을 보고 온 것 같아서 기회를 보아 교훈을 펴서 지금까지도 그 모범(模範)을 보였다. 나아가 이미 높아지자 수레를 타고 대궐에 출입했으며, 의복(衣服)과 약(藥)과 음식은 모두 왕이 손수 마련하여 좌우의 다른 사람이 돕는 것을 허락지 않고 왕이 혼자서 복을 받으려 했으니, 그 감복하고 공경한 모습이 대개 이와 같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왕은 친히 그의 손을 잡고 위문하면서 법을 남겨 백성을 구제할 일을 물으니, 그는 상서로운 것을 말하여 그 공덕(功德)이 바다 구석에까지 미쳤다.
신라 건복(建福) 58년(640)에 그는 몸이 조금 불편한 것을 느끼더니 7일을 지나 간곡한 계(誡)를 남기고는 그가 있던 황륭사(皇隆寺) 안에 단정히 앉아서 세상을 마치니, 나이는 99세요, 때는 당(唐)나라 정관(貞觀) 4년이었다(마땅히 14년이라야 옳을 것이다). 임종(臨終)할 때 동북쪽 공중에서 음악소리가 들리고 이상한 향기가 절 안에 가득 차니 모든 중들과 속인(俗人)들은 슬퍼하면서도 한편 경사로 여기면서 그의 영감(靈感)임을 알았다. 드디어 교외(郊外)에 장사지내는데 국가에서 우의(羽儀)와 장구(葬具)를 내려 임금의 장례와 같이 했다.
그 뒤에 속인이 사태(死胎)를 낳은 일이 있었는데, 지방 속담에 말하기를, "복 있는 사람의 무덤에 묻으면 후손(後孫)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므로 남몰래 원광의 무덤 옆에 묻었다. 그러나 바로 그날 벼락이 사태를 쳐서 무덤 밖으로 내던졌다.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평소에 그를 존경하지 않던 자도 모두 우러러 숭배하게 되었다.
그의 제자 원안(圓安)은 정신이 지혜롭고 바탕이 총명하며, 천성이 두루 유람하는 것을 좋아하여 그윽한 곳에서 도(道)를 구하면서 스승을 우러러 사모했다. 그는 드디어 북쪽으로 구도(九都)에 가고, 동쪽으로 불내(不耐)를 보고, 또 서쪽으로 북쪽 중국인 연(燕)과 위(魏)에 가고, 뒤에는 장안(長安)에까지 이르렀으니, 이리하여 각 지방의 풍속에 자세히 통하고 여려 가지 경륜(經綸)을 구해서 중요한 줄거리를 널리 익히고 자세한 뜻도 밝게 알았다. 그는 늦게 심학(心學)에 돌아갔는데 세속 사람보다 자취가 높았다. 처음 장안의 절에 있을 때 도(道)가 높다는 소문이 나자 특진(特進) 소우(蕭瑀)가 임금에게 청하여 남전(藍田) 땅에 지은 진량사(津梁寺)에 살게 하고 사사(四事)의 공급이 온종일 변함이 없었다.
원안이 일찍이 원광의 일을 기록했는데 이렇게 말했다. "본국(本國)의 임금이 병이 나서 의원이 치료해도 차도가 없으므로 원광을 청해 궁중에 들여 별성(別省)에 모셔 있게 하면서 매일 밤 두 시간씩 깊은 법을 말하여 참회의 계(戒)를 받으니 왕이 크게 신봉했다. 어느 날 초저녁에 왕이 원광의 머리를 보니 금빛이 찬란하고 일륜(日輪)의 상(像)이 그의 몸을 따라다니니 왕후(王后)와 궁녀(宮女)들도 모두 이것을 보았다. 이로부터 거듭 승심(勝心)을 내어 원광을 병실(病室)에 머물러 있게 했더니 오래지 않아 병이 나았다. 원광은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에 정법(正法)을 널리 펴고 해마다 두 번씩 강론하여 후학(後學)을 양성하고 보시(布施)로 받은 재물은 모두 절 짓는 데 쓰게 하니, 남은 것은 다만 가사(袈裟)와 바리때뿐이었다."
또 동경(東京)의 안일호장(安逸戶長) 정효(貞孝)의 집에 있는 고본(古本) <수이전(殊異傳)>에 원광법사전(圓光法師傳)이 실려 있는데 이렇게 말했다. 법사의 속성은 설씨(薛氏)로 왕경(王京) 사람이다. 처음에 중이 되어 불법(佛法)을 배웠는데 나이 30세에 한가히 지내면서도 도를 닦으려고 생각하여 삼기산(三岐山)에 홀로 살기를 4년, 이때 중 하나가 와서 멀지 않은 곳에 따로 절을 짓고 2년 동안 살았다. 그는 사람됨이 강하고 용맹스러우며 주술(呪術)을 배우기도 좋아했다. 법사가 밤에 홀로 앉아서 불경을 외는데 갑자기 신(神)이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말했다. "그대의 수행(修行)은 참 장하기도 하오. 대체로 수행하는 자가 아무리 많아도 법대로 하는 이는 드무오. 지금 이웃에 있는 중을 보니 주술을 빨리 익히려 하지만 얻는 것이 없을 것이며, 시끄러운 소리가 오히려 남의 정념(情念)을 괴롭히기만 하오. 그가 살고 있는 곳은 내가 다니는 길을 방해하여 매양 지나다닐 때마다 미운 생각이 날 지경이오. 그러니 법사는 나를 위해서 그 사람에게 말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 가도록 하오. 만일 오랫동안 거기에 머무른다면 내가 갑자기 죄를 저지를지도 모르오."
이튿날 법사가 가서 말했다. "내가 어젯밤 신의 말을 들으니 스님은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을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재앙이 있을 것이오." 그러나 그 중은 대답한다. "수행이 지극한 사람도 마귀(魔鬼)의 현혹을 받습니까. 법사는 어찌 호귀(狐鬼)의 말을 근심하시오." 그날 밤에 신이 또 와서 말했다. "전에 내가 한 말에 대해서 중이 무어라 대답합디까." 법사는 신이 노여워할까 두려워서 대답했다. "아직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말을 한다면 어찌 감히 듣지 않겠습니까." 신은 말한다. "내가 이미 다 들었는데 법사는 어찌해서 말을 보태서 하시오. 그대는 잠자코 내가 하는 것만 보오." 말을 마치고 가더니 밤중에 벼락과 같은 소리가 났다. 이튿날 가서 보니 산이 무너져서 중이 있던 절을 묻어 버렸다. 신이 또 와서 말한다. "법사가 보기에 어떠하오." 법사가 대답했다. "보고서 몹시 놀라고 두려웠습니다." 신이 또 말한다. "내 나이가 거의 3,000세가 되고 신술(神術)도 가장 훌륭하니 이런 일이야 조그만 일인데 무슨 놀랄 것이 있겠소. 나는 장래의 일도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온 천하의 일도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소. 이제 생각하니 법사가 오직 이곳에만 있으면 비록 자기 몸을 이롭게 하는 행동은 있을지 모르나 남을 이롭게 하는 공로는 없을 것이오. 지금 높은 이름을 드날리지 않는다면 미래에 승과(勝果)를 얻지 못할 것이오. 그러니 어찌 해서 불법을 중국에서 취하여 이 나라의 모든 혼미(昏迷)한 무리를 지도하지 않으시오." 법사가 대답했다. "중국에 가서 도를 배우는 것은 본래 나의 소원이지만 바다와 육지가 멀리 막혀 있기 때문에 스스로 가지 못할 뿐입니다." 이에 신은 중국 가는 데 필요한 일을 자세히 일러 주었다. 법사는 그 말에 의해서 중국에 갔으며, 11년을 머무르면서 삼장(三藏)에 널리 통달하고 유교(儒敎)의 학술(學術)까지도 겸해서 배웠다.
진평왕(眞平王) 22년 경신(庚申; 600, <삼국사三國史>에는 다음해인 신유년辛酉年에 왔다고 했다)에 법사는 중국에 왔던 조빙사(朝聘使)를 따라서 본국에 돌아왔다. 법사는 신에게 감사를 드리고자 하여 전에 살던 삼기산의 절에 갔다. 밤중에 신이 역시 와서 법사의 이름을 부르고 말했다. "바다와 육지의 먼 길을 어떻게 왕복하였소." "신의 큰 은혜를 입어 편안히 다녀왔습니다." "내 또한 그대에게 계(戒)를 드리겠소." 말하고는 이에 생생상제(生生相濟)의 약속을 맺었다. 법사가 또 청했다. "신의 참 얼굴을 볼 수가 있습니까." "법사가 만일 내 모양을 보고자 하거든 내일 아침에 동쪽 하늘 가를 바라보시오." 법사가 이튿날 아침에 하늘을 바라보니 큰 팔뚝이 구름을 뚫고 하늘 가에 닿아 있었다. 그날 밤에 신이 또 와서 말한다. "법사는 내 팔뚝을 보았소." "보았는데 매우 기이하고 이상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속칭(俗稱) 비장산(臂長山)이라고 했다. 신이 말했다. "비록 이 몸이 있다 하더라도 무상(無常)의 해(害)는 면할 수 없을 것이니, 나는 앞으로 얼마 가지 않아서 그 고개에 사신(捨身)할 것이니 법사는 거기에 와서 영원히 가 버리는 내 영혼을 보내 주오." 법사가 약속한 날을 기다려서 가 보니, 늙은 여우 한 마리가 있는데, 검기가 옻칠한 것과 같고 숨조차 쉬지 못하고 헐떡거리기만 하다가 마침내 죽었다.
법사가 처음 중국에서 돌아왔을 때 신라에서는 임금과 신하들이 그를 존경하여 스승으로 삼으니 법사는 항상 대승경전(大乘經典)을 강의했다. 이때 고구려와 백제가 항상 변방을 침범하니 왕은 몹시 이를 걱정하여 수(隋)나라(마땅히 당唐나라라고 해야 할 것이다)에 군사를 청하고자 법사를 청하여 걸병표(乞兵表)를 짓게 했다. 수나라 황제가 그 글을 보더니 30만 군사를 내어 친히 고구려를 쳤다. 이로부터 법사가 유술(儒術)까지도 두루 통달한 것을 세상 사람은 알았다. 나이 84세에 세상을 떠나니 명활성(明活城) 서쪽에 장사지냈다.
또 <삼국사(三國史)> 열전(列傳)에 이런 기록이 있다. 어진 선비 귀산(貴山)이란 자는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마을의 추항(추項)과 친구가 되어 두 사람은 서로 말했다. "우리들이 사군자(士君子)들과 함께 사귀려면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여 처신하지 않는다면, 필경 욕 당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니 어찌 어진 사람을 찾아가서 도를 묻지 않겠는가." 이때 원광법사가 수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 가슬갑(嘉瑟岬; 혹은 가서加西, 또는 가서嘉栖라고 하는데, 모두 방언方言이다. 갑岬은 속언俗言으로 고시古尸(곳)이라고 한다. 때문에 이것을 고시사古尸寺(곳절)라고 하니 갑사岬寺라는 것과 같다. 지금 운문사雲門寺 동쪽 9,000보步쯤 되는 곳에 가서현加西峴이 있는데, 혹은 가슬현嘉瑟峴이라고 하며, 고개의 북쪽 골짜기에 절터가 있으니 바로 이것이다)에 잠시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은 그에게 나아가 아뢰었다. "저희들 시속 선비는 어리석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한 말씀을 주시어 평생의 경계가 되게 해 주십시오." 원광이 말했다. "불교에는 보살계(菩薩戒)가 있으니, 1은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는 일이요, 2는 부모를 효도로 섬기는 일이요, 3은 벗을 신의(信義)로 사귀는 일이요, 4는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서지 않는 일이요, 5는 산 물건을 죽이는 데 가려서 한다는 일이다. 너희들은 이 일을 실행하여 소홀히 하지 말라." 귀산 등이 말했다. "다른 일은 모두 알아듣겠습니다마는, 말씀하신 바 '산 물건을 죽이는 데 가려서 한다'는 것은 아직 터득할 수가 없습니다." 원광이 말했다. "6재일(齋日)과 봄·여름에는 죽이지 않는 것이니 이것은 시기를 가리는 것이다. 말·소·개 등 가축을 죽이지 않고 고기가 한 점도 되지 못하는 세물(細物)을 죽이지 않는 것이니 이것은 물건을 가리는 것이다. 또한 죽일 수 있는 것도 또한 쓸 만큼만 하고 많이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속의 좋은 경계인 것이다." 귀산 등이 말했다. "지금부터 이 말을 받들어 실천하여 감히 어기지 않겠습니다." 그 후에 두 사람은 전쟁에 나가서 모두 국가에 큰 공을 세웠다.
또 건복(建福) 30년 계유(癸酉; 613, 즉 진평왕眞平王 즉위 35년) 가을에 수나라 사신 왕세의(王世儀)가 오자 황룡사(黃龍寺)에 백좌도량(百座道場)을 열고 여러 고승(高僧)들을 청해다가 불경을 강의하니 원광이 제일 윗자리에 있었다.
논평해 말했다. "원종(原宗)이 불법을 일으킨 후로 진량(津梁)이 비로소 설치되었으나 당오(堂奧)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때문에 마땅히 귀계멸참(歸戒滅懺)의 법으로 어리석고 어두운 중생들을 깨우쳐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 때문에 원광은 살던 가서갑(嘉西岬)에 점찰보(占察寶)를 두어 이것을 상규(常規)로 삼았다. 이때 시주(施主)하던 여승(女僧) 하나가 점찰보에 밭을 바쳤는데, 지금 동평군(東平郡)의 밭 100결(結)이 바로 이것이며, 옛날의 문서가 아직도 있다.
원광은 천성이 허정(虛靜)한 것을 좋아하여, 말할 때는 언제나 웃음을 머금었고 얼굴에 노여워하는 빛이 없었다. 나이가 이미 많아지자 수레를 타고 대궐에 출입했는데, 그 당시 덕의(德義)가 있는 여러 어진 선비들도 그의 위에 뛰어날 사람이 없었으며, 그의 풍부한 문장은 한 나라를 기울였다. 나이 80여 세로 정관(貞觀) 연간에 세상을 떠나니 부도(浮圖)가 삼기산(三岐山) 금곡사(金谷寺; 지금의 안강安康 서남쪽 골짜기 즉 명활성明活城 서쪽에 있다)에 있다.
당전(唐傳)에서는 황륭사(皇隆寺)에서 입적(入寂)하였다고 했는데 그 장소를 자세히 알 수가 없으나, 이것은 황룡사(黃龍寺)의 잘못인 듯 싶으니, 마치 분황사(芬皇寺)를 왕분사(王芬寺)라고 한 예와 같다. 위와 같이 당전과 향전(香奠)의 두 전기(傳記)에 있는 글에 따르면, 그의 성은 박(朴)과 설(薛)로 되었고, 출가(出家)한 것도 동쪽과 서쪽으로 되어 있어 마치 두 사람 같으니, 감히 자세하고 명확하게 결정지을 수가 없다. 그래서 여기에는 두 전기를 모두 적어 둔다. 그러나 그 두 전기에 모두 작갑(鵲岬)·이목(璃目)과 운문(雲門)의 사실이 없는데, 향인(鄕人) 김척명(金陟明)이 항간(巷間)의 말을 가지고 잘못 글을 윤색해서 <원광법사전(圓光法師傳)>을 지어 함부로 운문사(雲門寺)의 개조(開祖)인 보양(寶壤) 스님의 사적과 뒤섞어서 하나의 전기를 만들어 놓았다. 뒤에 <해동승전(海東僧傳)>을 편찬한 자도 잘못된 것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기록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많이 현혹되었다. 그래서 이것을 분별하고자 한 자(字)도 가감(加減)하지 않고 두 전기의 글을 자세히 적어 두는 것이다.
진(陳)·수(隋) 때에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바다를 건너가서 도를 배운 자는 드물었으며, 혹시 있다고 해도 그 이름을 크게 떨치지는 못했다. 원광 뒤로 계속해서 중국으로 배우러 간 사람이 끊이지 않았으니 원광이 길을 열었다 하겠다.
찬(讚)해 말한다.
바다 건너 한(漢)나라 땅을 처음으로 밟고,
몇 사람이나 오가면서 밝은 덕을 배웠던가.
옛날의 자취는 오직 푸른 산만이 남았지만,
금곡(金谷)과 가서(嘉西)의 일은 들을 수 있네.
보양이목(寶壤梨木)
중 보양전(寶壤傳)에는 그의 향리(鄕里)와 씨족(氏族)은 실려 있지 않으나 삼가 청도군청(淸道郡廳)의 문적(文籍)을 상고해 보면 이렇게 씌어 있다. "천복(天福) 8년 계유(癸酉; 943. 태조太祖 즉위 제26년) 정월 일의 청도군 계리(界里) 심사(審使) 순영(順英) 대내말수문(大乃末水文) 등의 주첩(柱貼) 문공(文公)을 보면, 운문산선원(雲門山禪院) 장생(長生)은 남쪽은 아니점(阿尼岾)이요, 동쪽은 가서현(嘉西峴)이라고 했다. 절의 삼강(三剛)의 전주인(典主人)은 보양화상(寶壤和尙)이요, 원주(院主)는 현회장로(玄會長老), 정좌(貞座)는 현량상좌(玄兩上座), 직세(直歲)는 신원선사(信元禪師; 위 공문公文은 청도군淸道郡의 도전장부都田帳簿에 의한 것)다."했다.
또 개운(開運) 3년 병진(丙辰(午); 946)의 운문산선원(雲門山禪院) 장생표탑(長生標塔)에 관계되는 공문(公文) 한 통에 보면, "장생(長生)이 11개이니 아니점·가서현·무현(畝峴)·서북매현(西北買峴; 혹은 면지촌面知村)·북저족문(北猪足門) 등이다."했다.
또 경인년(庚寅年)의 진양부첩(晉陽府貼)에는, "오도안찰사(五道按察使)가 각 도의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사원(寺院)이 처음 세워진 연월(年月)과 그 모양을 자세히 조사해서 장부를 만들 때, 차사원(差使員) 동경장서기(東京掌書記) 이선(李선)이 자세히 조사하여 적었다."고 했다.
정풍(正豊) 6년 신사(辛巳; 1161, 이것은 대금大金의 연호이니 본조本朝 의종毅宗 즉위 16년임) 9월의 군중고적비보기(郡中古籍裨補記)에 따르면 이렇다. 청도군 전부호장(前副戶長) 어모부위(禦侮副尉) 이칙정(李則禎)의 집에 있는 옛 사람들의 소식 및 우리말로 전해 오는 기록에는, 치사(致仕)한 상호장(上戶長) 김양신(金亮辛), 치사한 호장 민육(旻育), 호장 동정(同正) 윤응(尹應), 전기인(前其人) 진기(珍奇) 등과 당시 상호장 용성(用成) 등의 말이 적혀 있다. 그 때 태수(太守) 이사로(李思老)와 호장 김양신은 나이 89세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나이 70세 이상이었다. 다만 용성만이 나이 60세 이상(운운云云이라 쓴 것은 이 다음부터는 쓰지 않는다)이었다. 신라 시대 이래로 이 청도군의 절과 작갑사(鵲岬寺)와 그밖의 크고 작은 사원(寺院)인 대작갑(大鵲岬)·소작갑(小鵲岬)·소보갑(所寶岬)·천문갑(天門岬)·가서갑(嘉西岬) 등 다섯 갑사(岬寺)가 모두 후삼한(後三韓)의 난리에 없어져서 다섯 갑사(岬寺)의 기둥을 대작갑사(大鵲岬寺)에 모아 두었다.
조사(祖師) 지식(知識; 윗글에는 보양寶壤이라 했다)이 중국에서 불법을 전해 받아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서해 가운데에 이르니, 용이 그를 용궁으로 맞아들여 불경을 외게 하더니 금빛 비단의 가사(袈裟) 한 벌을 주고, 겸하여 아들 이목(璃目)을 그에게 주면서 조사를 모시고 가게 했다. 이때 용왕은 부탁한다. "지금 삼국(三國)이 시끄러워서 아직은 불법에 귀의(歸依)하는 군주(君主)가 없지만, 만일 내 아들과 함께 본국(本國)으로 돌아가서 작갑(鵲岬)에 절을 짓고 살면 능히 적병을 피할 수 있을 것이오. 또한 몇 해가 안 되어서 반드시 불법을 보호하는 어진 임금이 나와서 삼국을 평정할 것이오." 말을 마치자 서로 작별하고 돌아와서 이 골짜기에 이르니 갑자기 늙은 중이 스스로 원광(圓光)이라 하면서 도장이 든 궤를 안고 나와서 조사에게 주더니 이내 없어졌다(상고하건대 원광圓光은 진陳의 말년에 중국에 들어갔다가 수隋의 개황開皇 연간에 본국으로 돌아온 사람이다. 또 가서갑嘉西岬에 살다가 황륭사皇隆寺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햇수를 계산하면 청태淸泰 초년까지는 무려 300년이나 된다. 이제 여러 갑사岬寺가 모두 없어진 것을 슬퍼하고 보양寶壤이 와서 장차 절이 이룩될 것을 보고 기뻐하여 여기에 왔을 것이다).
이에 보양법사(寶壤法師)는 장차 허물어진 절을 일으키려 하여 북쪽 고개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뜰에 5층의 누런 탑이 있었다. 그러나 내려가서 찾아보면 아무런 자취도 없으므로 다시 올라가서 바라보니 까치가 땅을 쪼고 있다. 법사는 해룡(海龍)이 작갑(鵲岬)이라는 말이 생각나서 그 곳을 찾아가서 파보니 과연 예전 벽돌이 수없이 있었다. 이것을 모아 쌓아 올려 탑을 이루니 남은 벽돌이 하나도 없으므로 이곳이 전대(前代)의 절터임을 알았다. 여기에 절을 세우고 살면서 절 이름을 작갑사(鵲岬寺)라고 했다. 그런 지 얼마 안 되어 고려 태조(太祖)가 삼국을 통일하고 보양법사가 이곳에 절을 짓고 산다는 말을 듣고 다섯 갑(岬)의 밭 500결(結)을 합해서 이 절에 바쳤다. 또 청태(淸泰) 4년 정유(丁酉; 937)에는 절 이름을 운문선사(雲門禪寺)라 내리고, 가사(袈裟)의 신령스러운 음덕(蔭德)을 받들게 했다. 이때 이목(璃目)은 항상 절 곁에 있는 작은 못에 살면서 법화(法化)를 음으로 돕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에 몹시 가물어서 밭에 채소가 모두 타고 마르므로 보양(寶壤)이 이목을 시켜 비를 내리게 하니 온 고을이 흡족하였다. 이에 천제(天帝)가 그를 죽이려 하자 이목이 보양에게 위급함을 고하니 법사가 침상 밑에 숨겨 주었다. 이윽고 천사(天使)가 뜰에 와서 이목을 내놓으라고 청하자 법사는 뜰앞의 배나무[梨木]를 가리키니 천사는 거기에 벼락을 치고 하늘로 올라갔다. 배나무가 부러졌으므로 용이 쓰다듬으니 곧 되살아났다. 그 나무는 근년에 와서 땅에 쓰러졌는데 어떤 사람이 망치를 만들어서 선법당(善法堂)과 식당(食堂)에 안치(安置)하였다. 그 망치 자루에는 명(銘)이 있다.
처음 법사가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 먼저 추화군(推火郡) 봉성사(奉聖寺)에 머물렀는데, 이때 마침 고려 태조가 동쪽을 정벌해서 청도(淸道) 지경까지 이르렀는데, 산적들이 견성(犬城; 산봉우리가 물을 굽어보고 뾰족하게 섰는데 지금 민간民間에서 이것을 미워하여 이름을 견성犬城이라고 고쳤다 한다)에 모여서 교만을 부리고 항복하지 않았다. 태조가 산 밑에 이르러 법사에게 산적들을 쉽게 물리칠 방법을 물으니 법사는 대답했다. "대체로 개란 짐승은 밤만을 맡았고 낮은 맡지 않았으며, 앞만 지키고 그 뒤는 잊고 있습니다. 하오니 마땅히 대낮에 그 북쪽으로 쳐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태조가 그 말을 좇으니 적은 과연 패해서 항복했다. 태조는 법사의 그 신통한 꾀를 가상히 여겨 매년 가까운 고을의 조(租) 50석을 주어 향화(香火)를 받들게 했다. 이에 이 절에 이성(二聖)의 진용(眞容)을 모시고 절 이름을 봉성사(奉聖寺)라고 했다. 뒤에 법사는 진용을 작갑사(鵲岬寺)로 옮겨서 크게 절을 세우고 세상을 마쳤다.
법사의 행장은 고전(古傳)에는 실려 있지 않고 다만 민간에서 이렇게 말한다. "석굴사(石굴寺)의 비허사(備虛師; 혹은 비허毗虛)와 형제가 되어 봉성(奉聖)·석굴(石굴)·운문(雲門) 등 세 절이 연접된 산봉우리에 늘어서 있었기 때문에 서로 왕래했다."
후세 사람들이 <신라이전(新羅異傳)>을 고쳐 지으면서 작갑사의 탑과 이목(璃目)의 사실을 원광(圓光)의 전기 속에 잘못 기록해 넣었다. 또 견성(犬城)의 사실을 비허사(備虛師)의 전기에 넣은 것도 이미 잘못인 데다가 더구나 또 <해동승전(海東僧傳)>을 지은 자도 여기에 따라서 글을 윤색하고 보양(寶壤)의 전기가 없어 뒷사람들이 의심내고 잘못 알게 했으니 그 얼마나 무망(誣妄)한 짓인가.
양지사석(良志使錫)
중 양지(良志)는 그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고, 오직 신라 선덕왕(宣德王) 때에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 석장(錫杖) 끝에 포대(布帶) 하나를 걸어 두기만 하면 그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 시주(施主)의 집에 가서 흔들리면서 소리를 낸다. 그 집에서 이를 알고 재(齋)에 쓸 비용을 여기에 넣는데, 포대가 차면 날아서 돌아온다. 때문에 그가 있던 곳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했다.
양지의 신기하고 이상하여 남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그는 또 한편으로 여러 가지 기예(技藝)에도 통달해서 신묘함이 비길 데가 없었다. 또 필찰(筆札)에도 능하여 영묘사(靈廟寺) 장육삼존상(丈六三尊像)과 천왕상(天王像), 또 전탑(殿塔)의 기와와 천왕사(天王寺) 탑(塔) 밑의 팔부신장(八部神將), 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主佛三尊)과 좌우 금강신(金剛神) 등은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영묘사(靈廟寺)와 법림사(法林寺)의 현판을 썼고, 또 일찍이 벽돌을 새겨서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삼천불(三千佛)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모셔 두고 공경했다. 그가 영묘사(靈廟寺)의 장육상(丈六像)을 만들 때에는 입정(入定)해서 정수(正受)의 태도로 주물러서 만드니, 온 성 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운반해 주었다. 그때 부른 풍요(風謠)는 이러하다.
왔도다. 왔도다. 인생은 서러워라.
서러워라 우리들은, 공덕(功德) 닦으러 왔네.
지금까지도 시골 사람들이 방아를 찧을 때나 다른 일을 할 때에는 모두 이 노래를 부르는데 그것은 대개 이때 시작된 것이다. 장육상(丈六像)을 처음 만들 때에 든 비용은 곡식 2만 3,700석이었다(혹은 이 비용이 금빛을 칠할 때 든 것이라고도 한다).
논평해 말한다. "양지 스님은 가위 재주가 온전하고 덕이 충만(充滿)했다. 그는 여러 방면의 대가(大家)로서 하찮은 재주만 드러내고 자기 실력은 숨긴 것이라 할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재(齋)가 파하여 법당 앞에 석장(錫杖)은 한가한데,
향로에 손질하고 혼자서 단향(檀香) 피우네.
남은 불경 다 읽자 더 할 일 없으니
소상(塑像) 만들어 합장하고 쳐다보네.
귀축제사(歸竺諸師)
광함(廣函)의 <구법고승전(求法高僧傳)>에 이렇게 말했다. 중 아리나(阿離那; 나那는 혹은 야耶) 발마(跋摩; 마摩는 혹은 낭郞)는 신라 사람이다. 처음에 정교(正敎)를 구하려고 일찍이 중국에 들어갔는데, 성인(聖人)의 자취를 두루 찾아볼 마음이 더했다. 이에 정관(貞觀) 연간(627-649)에 당(唐)나라 서울인 장안(長安)을 떠나 오천(五天)에 갔다. 나란타사(那蘭타寺)에 머물러 율장(律藏)과 논장(論藏)을 많이 읽고 패협(貝莢)에 베껴 썼다. 고국(故國)에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홀연히 그 절에서 세상을 떠나니, 그의 나이 70여 세였다.
그의 뒤를 이어 혜업(惠業)·현태(玄泰)·구본(求本)·현각(玄恪)·혜륜(惠輪)·현유(玄遊)와 그 밖에 또 이름을 알지 못하는 두 법사가 있었는데, 모두 자기 자신을 잊고 불법(佛法)을 따라 관화(觀化)를 보기 위해서 중천축(中天竺)에 갔었다. 그러나 혹은 중도에서 일찍 죽고 혹은 살아남아서 그곳 절에 있는 이도 있으나 마침내는 다시 계귀(계貴)와 당나라에 돌아오지 못하고 그 중에 오직 현태 스님만이 당나라에 돌아왔으나 이도 역시 어디서 죽었는지 알 수 없다.
천축국(天竺國) 사람들이 해동(海東)을 불러 "구구타예설라(矩矩타예說羅)"라 하는데, 이 구구타란 닭[계]를 말함이요, 예설라는 귀(貴)를 말한 것이다. 그곳에서 이렇게 서로 전해 말했다. "그 나라에서는 계신(계神)을 받들어 존경하는 때문에 그 깃을 꽂아서 장식한다."
찬(讚)해 말한다.
천축(天竺)의 머나먼 길 만첩 산인데,
가련타, 힘써 올라가는 유사(遊士)들이여.
몇 번이나 저 달은 외로운 배를 보냈는가,
한 사람도 구름따라 돌아오는 것 보지 못했네.
이혜동진(二惠同塵)
중 혜숙(惠宿)이 화랑(花郞)인 호세랑(好世郞)의 무리 중에서 자취를 감추자 호세랑은 이미 황권(黃卷)에서 이름을 지워 버리니 혜숙은 적선촌(赤善村; 지금 안강현安康縣에 적곡촌赤谷村이 있다)에 숨어서 산 지가 20여 년이나 되었다. 그때 국선(國仙) 구참공(瞿참公)이 일찍이 적선촌 들에 가서 하루 동안 사냥을 하자 혜숙이 길가에 나가서 말고삐를 잡고 청했다. "용승(庸僧)도 또한 따라가기를 원하옵는데 어떻겠습니까." 공이 허락하자, 그는 이리저리 뛰고 달려서 옷을 벗어부치고 서로 앞을 다투니 공이 보고 기뻐했다. 앉아 쉬면서 피로를 풀고 고기를 굽고 삶아서 서로 먹기를 권하는데 혜숙도 같이 먹으면서 조금도 미워하는 빛이 없더니, 이윽고 공의 앞에 나가서 말했다. "지금 맛있고 싱싱한 고기가 여기 있으니 좀더 드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공이 좋다고 말하니, 혜숙이 사람을 물리치고 자기 다리 살을 베어서 소반에 올려 놓아 바치니 옷에 붉은 피가 줄줄 흘렀다. 공이 깜짝 놀라 말했다.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느냐." 혜숙이 말했다. "처음에 제가 생각하기에 공은 어진 사람이어서 능히 자기 몸을 미루어 물건에까지 미치리라 하여 따라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공이 좋아하는 것을 살펴보니, 오직 죽이는 것만을 몹시 즐겨해서 짐승을 죽여 자기 몸만 봉양할 뿐이니 어찌 어진 사람이나 군자가 할 일이겠습니까. 이는 우리의 무리가 아닙니다." 말하고 드디어 옷을 뿌리치고 가버렸다. 공이 크게 부끄러워하여 혜숙이 먹던 것을 보니 소반 위의 고기가 하나도 없어지지 않았다. 공이 몹시 이상히 여겨 돌아와 조정에 아뢰니 진평왕(眞平王)이 듣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그를 맞아오게 하니 혜숙이 여자의 침상에 누워서 자는 것을 보고 중사(中使)는 이것을 더럽게 여겨 그대로 돌아갔다. 그런데 7, 8리쯤 가다가 도중에서 혜숙을 만났다. 사자는 그가 어디서 오느냐고 물으니 혜숙이 대답한다. "성 안에 있는 시주(施主)집에 가서, 칠일재(七日齋)를 마치고 오는 길이오." 중사가 그 말을 왕에게 아뢰니 또 사람을 보내어서 그 시주집을 조사해 보니 그 일이 과연 사실이었다. 얼마 안 되어 혜숙이 갑자기 죽자 마을 사람들이 이현(耳峴; 혹은 형현형峴이라고도 함) 동쪽에 장사지냈는데, 그때 마을 사람으로서 이현 서쪽에서 오는 이가 있었다. 그는 도중에서 혜숙을 만나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이곳에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다른 지방으로 유람하러 간다"하여 서로 인사하고 헤어졌는데, 반 리(半里)쯤 가다가 구름을 타고 가 버렸다. 그 사람이 고개 동쪽에 이르러 장사지내던 사람들이 아직 흩어지지 않은 것을 보고 그 까닭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무덤을 헤쳐 보니 다만 짚신 한 짝이 있을 뿐이었다. 지금 안강현(安康縣) 북쪽에 혜숙사(惠宿寺)라는 절이 있으니 곧 그가 살던 곳이라 하며, 또한 부도(浮圖)도 있다.
중 혜공(惠空)은 천진공(天眞公)의 집에서 품팔이하던 노파의 아들로, 어릴 때의 이름은 우조(憂助; 이것은 대개 방언方言이다)였다. 공이 일찍이 종기를 앓아서 거의 죽게 되니 문병(問病)하는 사람이 거리를 메웠다. 이때 우조의 나이 7세였는데 그 어머니에게 말했다. "집에 무슨 일이 있기에 이렇게 손님이 많습니까." 그 어머니가 말했다. "가공(家公)이 나쁜 병이 있어서 장차 죽게 되었는데 너는 어찌해서 알지 못하느냐." 우조는 말했다. "제가 그 병을 고치겠습니다." 어머니가 그 말을 이상히 여겨 공에게 알리니 공은 그를 불러오게 했다. 그는 침상 밑에 앉아서 말 한 마디도 않았는데 얼마 안 되어 공의 종기가 터지게 되었다. 공은 우연한 일이라 하여 별로 이상히 여기지 않았다.
그가 자라자 공을 위해서 매를 길렀으니 이것이 공의 마음에 아주 들었다. 처음에 공의 아우로서 벼슬을 얻어 지방으로 부임하는 이가 있었는데 공이 골라 준 좋은 매를 얻어 가지고 임지(任地)로 갔다. 어느날 밤 공이 갑자기 그 매 생각이 나서 다음 날 새벽이면 우조를 보내어 그 매를 가져오게 하리라 했다. 우조는 미리 이것을 알고 금시에 그 매를 가져다가 새벽녘에 공에게 바쳤다. 공이 크게 놀라 깨닫고는 그제야 전일에 종기를 고치던 일이 모두 측량하기 어려운 일임을 알고 말했다. "나는 지극한 성인(聖人)이 내 집에 와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미친 말과 예의에 벗어난 짓으로 욕을 보였으니 그 죄를 어찌 씻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부터는 부디 도사(導師)가 되어 나를 인도해 주십시오." 공은 말을 마치자 내려가서 절을 했다.
우조는 신령스럽고 이상한 것이 이미 나타났기 때문에 드디어 중이 되어 이름을 바꾸어 혜공(惠空)이라 했다. 그는 항상 조그만 절에 살면서 매양 미친 듯이 크게 술에 취해서 삼태기를 지고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추니 부궤화상(負궤和尙)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가 있는 절을 부개사(夫蓋寺)라고 했는데, 이 말은 우리말로 삼태기이다. 매양 절의 우물 속에 들어가면 몇 달씩 나오지 않으므로 스님의 이름을 따서 우물 이름을 지었다. 또 우물 속에서 나올 때면 푸른 옷을 입은 신동(神童)이 먼저 솟아나왔기 때문에 절의 중들은 이것으로 조짐을 삼았으며, 우물에서 나와서 옷은 젖지 않았다. 만년에는 항사사(恒沙寺; 지금의 영일현迎日縣 오어사吾魚寺다. 세상에서는 항하사恒河沙처럼 많은 사람이 출세出世했기 때문에 항사동恒沙洞이라 한다고 했다)에 가 있었다. 이때 원효(元曉)가 여러 가지 불경(佛經)의 소(疏)를 찬술(撰述)하고 있었는데, 언제나 혜공 스님에게 가서 묻고 혹은 서로 희롱도 했다. 어느날 혜공과 원효가 시내를 따라 가면서 물고기와 새우를 잡아먹다가 돌 위에서 대변을 보았다. 혜공이 그를 가리키면서 희롱의 말을 했다. "그대가 눈 똥은 내가 잡은 물고기일 게요."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 절을 오어사(吾魚寺)라 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원효대사의 말이라 하지만 이는 잘못이다. 세상에서는 그 시내를 잘못 불러 모의천(芼矣川)이라고 한다.
구참공(瞿참公)이 어느날 산에 놀러 갔다가 혜공이 산길에 죽어 쓰러져서, 그 시체가 부어 터지고 살이 썩어 구더기가 난 것을 보고 오랫동안 슬피 탄식하고는 말고삐를 돌려 성으로 들어오니 혜공은 술에 몹시 취해서 시장 안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있는 것을 보았다. 또 어느날은 풀로 새끼를 꼬아 가지고 영묘사(靈廟寺)에 들어가서 금당(金堂)과 좌우에 있는 경루(經樓)와 남문(南門)의 낭무(廊무)를 묶어 놓고 강사(剛司)에게 말했다. "이 새끼를 3일 후에 풀도록 하라." 강사가 이상히 여겨 그 말에 좇으니, 과연 3일 만에 선덕왕(宣德王)이 행차하여 절에 왔는데, 지귀(志鬼)의 심화(心火)가 나와서 그 탑을 불태웠지만 오직 새끼로 맨 곳만은 화재를 면할 수 있었다. 또 신인(神印)의 조사(祖師) 명랑(明朗)이 새로 금강사(金剛寺)를 세우고 낙성회를 열었는데, 고승(高僧)들이 다 모였으나 오직 혜공만은 오지 않았다. 이에 명랑이 향을 피우고 정성껏 기도했더니 조금 후에 공이 왔다. 이때 큰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도 공의 옷은 젖지 않았고 발에 진흙도 묻지 않았다. 혜공이 명랑에게 말했다. "그대가 은근히 초청하기에 왔소이다." 이와 같이 그에게는 신령스러운 자취가 자못 많았다. 죽을 때는 공중(空中)에 떠서 세상을 마쳤는데 사리(舍利)는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는 일찍이 <조론(肇論)>을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옛날에 지은 글이다."하였으니 이것으로써 혜공(惠空)이 승조(僧肇)의 후신(後身)임을 알겠다.
찬(讚)해 말한다.
풀밭에서 사냥하고 침상 위에 누웠으며,
술집에서 미친 노래, 우물 속에서 잠을 잤네.
척리(隻履)와 부공(浮空)은 어디로 갔는가,
한 쌍의 보배로운 화중련(火中蓮)일세.
자장정률(慈藏定律)
대덕(大德) 자장(慈藏)은 김씨(金氏)이니 본래 진한(辰韓)의 진골(眞骨) 소판(蘇判; 삼급三級의 벼슬 이름) 무림(茂林)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맑은 요직을 지냈으나 뒤를 계승할 아들이 없으므로 삼보(三寶)에 마음을 돌려 천부관음(千部觀音)에게 아들 하나 낳기를 바라고 이렇게 빌었다. "만일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이를 내놓아서 법해(法海)의 진량(津梁)으로 삼겠습니다." 갑자기 그 어머니의 꿈에 별 하나가 떨어져서 품 안으로 들어오더니 이내 태기가 있어서 아이 하나를 낳았는데 석존(釋尊)과 같은 날이므로 이름을 선종랑(善宗郞)이라 했다. 그는 정신과 뜻이 맑고 슬기로웠으며 문사(文思)가 날로 풍부하고 속세의 취미에 물들지 않았다. 일찍이 두 부모를 여의고 속세의 시끄러움을 싫어해서 처자를 버리고, 자기의 전원(田園)을 내어 원녕사(元寧寺)를 삼았다. 혼자서 그윽하고 험한 곳에 거처하면서 이리나 범도 피하지 않았다. 고골관(枯骨觀)을 닦는데 조금 피곤한 일이 있으면 작은 집을 지어서 가시덤불로 둘러막고, 그 속에 발가벗고 앉아서 조금만 움직이면 가시에 찔리도록 했으며, 머리는 들보에 매달아 어두운 정신이 없어지게 했다.
때마침 조정에 재상 자리가 비어 있어서 자장이 문벌(門閥) 때문에 물망(物望)에 올라 여러 번 불렀지만 나가지 않으니 왕이 칙명(勅命)을 내렸다. "만일 나오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 자장이 듣고 말했다. "내가 차라리 하루 동안 계율(戒律)을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100년 동안 계율을 어기고 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 말을 들은 왕은 그가 중이 되는 것을 허락했다. 자장이 바위 사이에 깊이 숨어서 사니 양식 한 알 돌봐 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이상한 새가 과일을 물어다 바쳐서 이것을 손으로 받아 먹었더니 이윽고 꿈에 천인(天人)이 와서 오계(五戒)를 주었다. 이에 자장이 비로소 골짜기에서 나오니 향읍(鄕邑)의 남녀가 다투어 와서 계(戒)를 받았다.
자장은 변방 나라에 태어난 것을 스스로 탄식하고 중국으로 가서 대화(大化)를 구했다. 인평(仁平) 3년 병신(丙申; 636, 곧 정관貞觀 10년임)에 왕명(王命)을 받아 제자 실(實) 등 중 10여 명과 더불어 서쪽 당(唐)나라로 들어가서 청량산(淸凉山)에 가서 성인(聖人)을 뵈었다. 이 산에는 만수대성(曼殊大聖)의 소상(塑像)이 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이 서로 전해 말했다. "제석천(帝釋天)이 공인(工人)을 데리고 와서 조각해 만든 것이다." 자장은 소상 앞에서 기도하고 명상(冥想)하니, 꿈에 소상이 그의 이마를 만지면서 범어(梵語)로 된 게(偈)를 주었는데 깨어 생각하니 알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 이상한 중이 오더니 이것을 해석하여 주고(이 이야기는 이미 황룡사皇龍寺 탑편塔篇에 나와 있다) 또 말하기를, "비록 만 가지 가르침을 배운다 해도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하고는 가사(袈裟)와 사리(舍利) 등을 주고 사라졌다(자장은 처음에 이것을 숨기고 말하지 않았으므로 <당승전唐僧傳>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자장은 자기가 이미 성별(聖별)을 받은 것을 알고 북대(北臺)에서 내려와 태화지(太和池)에 이르러 당나라 서울에 들어가니 태종(太宗)이 칙사(勅使)를 보내어 그를 위무(慰撫)하고 승광별원(勝光別院)에 거처하도록 했다. 태종의 은총과 내린 물건이 매우 많았으나 자장은 그 번거로움을 꺼려서 표문(表文)을 올리고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 동쪽 절벽에 들어가서 바위에 나무를 걸쳐 방을 만들고 3년 동안을 살면서 사람과 신들이 계를 받아 영험이 날로 많았는데, 말이 번거로워서 여기에는 싣지 않는다. 이윽고 다시 서울로 들어오자 또 칙사를 보내 위무(慰撫)하고 비단 200필을 내려서 의복의 비용으로 쓰게 했다.
정관(貞觀) 17년 계유(癸酉; 643)에 신라 선덕왕(宣德王)이 표문을 올려 자장을 돌려보내 주기를 청하니 태종은 이를 허락하고 그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비단 1령(領)과 잡채(雜綵) 500필을 하사했으며, 또 동궁(東宮)도 비단 200필을 내려 주고 그 밖에 예물로 준 물건도 많았다. 자장은 본국에 아직 불경(佛經)과 불상(佛像)이 구비되지 못했으므로 대장경(大藏經) 1부(部)와 여러 가지 번당(幡幢)·화개(花蓋) 등 복리(福利)가 될 만한 것을 청해서 모두 싣고 돌아왔다. 그가 본국에 돌아오자 온 나라가 그를 환영하고 왕은 그를 분황사(芬皇寺; <당전唐傳>에서는 왕분사王芬寺라고 했다)에 있게 하니, 물건과 시위(侍衛)는 조밀하고도 넉넉했다. 어느 해 여름에 왕이 궁중으로 청하여 <대승론(大乘論)>을 강(講)하게 하고 또 황룡사(黃龍寺)에서 보살계본(菩薩戒本)을 7일 밤낮 동안 강연하게 하니, 하늘에서는 단비가 내리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강당을 덮었다. 이것을 보고 사중(四衆)이 모두 그의 신기함을 탄복했다. 이에 조정에서 의론하기를, "불교가 우리 동방에 번져서 비록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그 주지(住持)를 수봉(修奉)하는 규범(規範)이 없으니 이것을 통괄해서 다스리지 않고는 바로잡을 수가 없다."하고 왕이 자장을 대국통(大國統)으로 삼아 중들의 모든 규범을 승통(僧統)에게 위임하여 주장하도록 했다(상고해 보건대, 북제北齊의 천보天寶 연간에는 전국全國에 10통統을 두었는데, 유사有司가 아뢰기를, "마땅히 직위職位를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하여 이에 선문제宣文帝는 법상법사法上法師로 대통大統을 삼고 나머지는 통통通統을 삼았다. 또 양梁·진陳의 시대에는 국통國統·주통州統·국도國都·주도州都·승도僧都·승정僧正·도유내都維乃 등 이름이 있었으니 모두 소현조昭玄曺에 소속되었다. 소현조昭玄曺는 승니僧尼를 거느리는 관명官名이다. 당唐나라 초기에는 또 10대덕大德의 성盛함이 있었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11년 경오庚午에 안장법사安藏法師로 대서성大書省을 삼으니 이것은 한 사람뿐이고, 또 소서성小書省 두 사람이 있었다. 그 이듬해 신미辛未에는 고구려의 혜량법사惠亮法師를 국통國統으로 삼았으니 사주寺主라고도 한다. 보량법사寶良法師 한 사람을 대도유나大都維那로 삼고 주통州統 9인人과 도통都統 18인人을 두었다. 자장慈藏 때에 와서 다시 대국통大國統 한 사람을 두었으니 이것은 상직常職이 아니다. 이것은 또한 부예랑夫禮郞이 대각간大角干이 되고, 김유신金庾信이 태대각간太大角干이 된 것과 같다. 후에 원성대왕元聖大王 원년에 이르러 또 승관僧官을 두고 정법전政法典이라 하여 대사大舍 1인人과 사史 2인人을 사司로 삼아서 중들 중에서 재행才行이 있는 이를 뽑아서 그 일을 맡겼으며, 유고有故한 때에는 바꾸어서 연한年限은 정定하지 않았다. 때문에 지금 자의紫衣의 무리들은 역시 율종律宗과 다른 것이다. 향전鄕傳에 보면, 자장慈藏이 당唐나라에 갔더니 태종太宗이 식건전式乾殿에 맞아들여 <화엄경華嚴經>의 강의를 청하매, 하늘이 단 이슬을 내려 비로소 그를 국사國師로 삼았다고 했으나 이것은 잘못이다. 당전唐傳이나 <국사國史>에 모두 그런 글은 없다).
자장이 이와 같은 좋은 기회를 만나 용감히 나가서 불교를 널리 퍼뜨렸다. 그는 승니(僧尼)의 5부(部)에 각각 구학(舊學)을 더 증가시키고 15일마다 계율을 설명하였으며 겨울과 봄에는 시험해서 지범(持犯)을 알게 하고 관원을 두어서 이를 유지해 나가게 했다. 또 순사(巡使)를 보내어 서울 밖에 있는 절들을 조사하여 중들의 과실을 징계하고 불경과 불상을 엄중하게 신칙함을 일정한 법으로 삼으니, 한 시대에 불법을 보호하는 것이 이때에 가장 성했다. 이것은 공자(孔子)가 위(衛)나라에서 노(魯)나라로 돌아와 음악을 바로잡자 아(雅)와 송(頌)이 각각 그 마땅함을 얻었던 일과 같다. 이때를 당하여 나라 안 사람으로서 계(戒)를 받고 불법을 받든 이가 열 집에 여덟, 아홉은 되었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기를 청하는 이가 세월이 갈수록 더욱 많아지니 이에 통도사(通度寺)를 새로 세우고 계단(戒壇)을 쌓아 사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제도(濟度)했다. 또 자기가 난 집을 원녕사(元寧寺)로 고치고 낙성회(落成會)를 열어 잡화(雜花) 1만 게(偈)를 강의하니 오이녀(五二女)가 감동하여 현신(現身)해서 강의를 들었다. 문인(門人)들에게 그들의 수대로 나무를 심어 이상스러운 일들을 표하게 하고 그 나무를 지식수(知識樹)라고 이름지었다.
그는 일찍이 우리 나라의 복장(服章)이 제하(諸夏)와 같지 않다 하여 조정에 건의하니 조정에서는 허락하였다. 이에 진덕왕(眞德王) 3년 기유(己酉; 649)에 처음으로 중국의 의관(衣冠)을 입게 하고, 이듬해인 경술(庚戌)에 또 정삭(正朔)을 받들어 비로소 영휘(永徽)의 연호를 썼다. 이 뒤부터는 중국에 조근(朝覲)할 때마다 상번(上蕃)에 있었으니 자장의 공이었다.
만년(晩年)에는 서울을 하직하고 강릉군(江陵郡; 지금의 명주溟州)에 수다사(水多寺)를 세우고 거기에 살았더니 북대(北臺)에서 본 것과 같은 형상을 한 이상한 중이 다시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 "내일 대송정(大松汀)에서 그대를 만날 것이다." 자장이 놀라 일어나서 일찍 송정(松汀)에 가니 과연 문수보살(文殊菩薩)이 감응(感應)하여 와 있었다. 그에게 법요(法要)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태백산(太伯山) 갈반지(葛蟠地)에서 다시 만나자."하고 드디어 자취를 숨기고 나타나지 않았다. 자장이 태백산(太伯山)에 가서 찾다가 큰 구렁이가 나무 밑에 서리고 있는 것을 보고 시자(侍者)에게 말했다. "이곳이 바로 이른바 갈반지이다." 이에 석남원(石南院; 지금의 정암사淨岩寺)을 세우고 대성(大聖)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늙은 거사(居士) 하나가 남루한 도포를 입고 칡으로 만든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메고 와서 시자에게 말했다. "자장을 보려고 왔다." 문인(門人)이 말했다. "내가 건추(巾추)를 받든 이래 우리 스승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보지 못했다.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미친 말을 하는 게냐." 거사가 말한다. "너는 너의 스승에게 아뢰기만 하면 된다." 시자가 들어가서 고하자 자장도 깨닫지 못하고 말했다. "필연 미친 사람이겠지." 문인이 나가서 그를 꾸짖어 쫓으니, 거사가 다시 말했다.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아상(我相)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겠느냐." 말을 마치자 삼태기를 거꾸로 들고 터니 강아지가 변해서 사자보좌(獅子寶座)가 되고 그 위에 올라앉아서 빛을 내고는 가버렸다. 자장이 이 말을 듣고 그제야 위의(威儀)를 갖추고 빛을 찾아 재빨리 남쪽 고개에 올라갔으나 이미 아득해서 따라가지 못하고 드디어 몸을 던져 죽으니, 화장하여 유골(遺骨)을 석혈(石穴) 속에 모셨다.
대체로 자장이 세운 절과 탑이 10여 곳인데, 세울 때마다 반드시 이상스러운 상서(祥瑞)가 있었기 때문에 그를 받드는 포색(浦塞)들이 거리를 메울 만큼 많아서 며칠이 안 되어 완성했다. 자장이 쓰던 도구(道具)·옷감·버선과 태화지(太和池)의 용이 바친 목압침(木鴨枕)과 석존(釋尊)의 유의(由衣)들은 모두 통도사(通度寺)에 있다. 또 헌양현(헌陽縣; 지금의 언양彦陽)에 압유사(鴨遊寺)가 있는데, 침압(枕鴨)이 일찍이 이곳에서 이상한 일을 나타냈으므로 이름한 것이다.
또 원승(圓勝)이란 중이 있는데, 자장보다 먼저 중국에 유학갔다가 함께 고향에 돌아와서 자장을 도와 율부(律部)를 넓게 폈다고 한다.
찬(讚)해 말한다.
일찍이 청량산에 가서 꿈 깨고 돌아오니,
칠편삼취(七篇三聚)가 한꺼번에 열렸네.
치소(緇素)의 옷을 부끄럽게 여기어,
우리 나라 의관을 중국과 같이 만들었네.
원효불기(元曉不羈)
성사(聖師) 원효(元曉)의 속성(俗姓)은 설씨(薛氏)이다. 조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하는데 지금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다. 아버지는 담날내말(談捺乃末)이다. 원효는 처음에 압량군(押梁郡)의 남쪽(지금의 장산군章山郡) 불지촌(佛地村) 북쪽 율곡(栗谷)의 사라수(裟羅樹)밑에서 태어났다. 그 마을의 이름은 불지(佛地)인데 혹은 발지촌(發智村; 속언俗言에 불등을촌弗等乙村이라 한다)이라고도 한다. 사라수란 것을 속언에 이렇게 말한다. "스님의 집이 본래 이 골짜기 서남쪽에 있었다. 그 어머니가 태기가 있어 이미 만삭인데, 마침 이 골짜기에 있는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갑자기 해산하였으므로 몹시 급한 때문에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고 그 속에서 지냈기 때문에 이 나무를 사라수라 했다." 그 나무의 열매가 또한 이상하여 지금도 사라율(裟羅栗)이라 한다. 예로부터 전하기를, 옛적에 절을 주관하는 자가 절의 종 한 사람에게 하루 저녁 끼니로 밤 두 알씩을 주었다. 종이 적다고 관청에 호소하자 관리는 괴상히 여겨 그 밤을 가져다가 조사해 보았더니 한 알이 바리 하나에 가득 차므로 도리어 한 알씩만 주라고 판결했다. 이런 이유로 율곡(栗谷)이라고 했다.
스님은 이미 중이 되자 그 집을 희사(喜捨)해서 절로 삼고 이름을 초개사(初開寺)라고 했다. 또 사라수 곁에 절을 세우고 사라사(裟羅寺)라고 했다. 스님의 행장(行狀)에는 서울 사람이라고 했으나 이것은 조부가 살던 곳을 따른 것이고, <당승전(唐僧傳)>에는 본래 하상주(下湘州) 사람이라고 했다. 상고해 보건대, 인덕(麟德) 2년 사이에 문무왕(文武王)이 상주(上州)와 하주(下州)의 땅을 나누어 삽량주(삽良州)를 두었는데 하주는 곧 지금의 창령군(昌寧郡)이요, 압량군(押梁郡)은 본래 하주의 속현(屬縣)이다. 상주는 지금의 상주(尙州)이니 상주(湘州)라고도 한다. 불지촌은 지금 자인현(慈仁縣)에 속해 있으니, 바로 압량군에서 나뉜 곳이다. 스님의 아명(兒名)은 서당(誓幢)이요, 또 한 가지 이름은 신당(新幢; 당幢은 우리말로 모毛라고 한다)이다.
처음에 어머니 꿈에 유성(流星)이 품 속으로 들어오더니 이내 태기가 있었으며, 장차 해산하려 할 때는 오색 구름이 땅을 덮었으니, 진평왕(眞平王) 39년 대업(大業) 13년 정축(丁丑; 617)이었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남보다 뛰어나서 스승을 따라 배울 것이 없었다. 그의 유방(遊方)의 시말(始末)과 불교를 널리 편 큰 업적들은 <당승전(唐僧傳)>과 그의 행장에 자세히 실려있으므로 여기에는 모두 싣지 않고 오직 향전(鄕傳)에 있는 한두 가지 이상한 일만을 기록한다.
스님이 일찍이 어느날 풍전(風顚)을 하여 거리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렀다.
그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리겠는가.
나는 하늘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
사람들이 아무도 그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다. 이때 태종(太宗)이 이 노래를 듣고 말했다. "이 스님은 필경 귀부인(貴婦人)을 얻어서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賢人)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이때 요석궁(瑤石宮; 지금의 학원學院이 이것이다)에 과부 공주(公主)가 있었는데 왕이 궁리(宮吏)에게 명하여 원효(元曉)를 찾아 데려가라 했다. 궁리가 명령을 받들어 원효를 찾으니, 그는 이미 남산(南山)에서 내려와 문천교(蚊川橋; 사천沙川이니 사천沙川을 속담에는 모천牟川, 또는 문천蚊川이라 한다. 또 다리 이름을 유교楡橋라 한다)를 지나다가 만났다. 이때 원효는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 적셨다. 궁리가 원효를 궁에 데리고 가서 옷을 말리고 그곳에 쉬게 했다. 공주는 과연 태기가 있더니 설총(薛聰)을 낳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지혜롭고 민첩하여 경서(經書)와 역사에 널리 통달하니 신라 10현(賢) 중의 한 사람이다. 방언(方言)으로 중국과 외이(外夷)의 각 지방 풍속과 물건 이름 등에도 통달하여 육경(六經)과 문학(文學)을 훈해(訓解)했으니, 지금도 우리 나라에서 명경(明經)을 업(業)으로 하는 사람이 이를 전수(傳受)해서 끊이지 않는다.
원효는 이미 계(戒)를 잃어 총(聰)을 낳은 후로는 속인(俗人)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이름했다. 그는 우연히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상했다. 원효는 그 모양을 따라서 도구(道具)를 만들어 <화엄경(華嚴經)> 속에 말한, "일체의 무애인(無애人)은 한결같이 죽고 사는 것을 벗어난다"는 문구를 따서 이름을 무애(無애)라 하고 계속하여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어느날 이 도구를 가지고 수많은 마을에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교화(敎化)시키고 읊다가 돌아오니, 이 때문에 상추분유(桑樞분유) 확후(확候)의 무리들로 하여금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타佛)을 부르게 하였으니 원효(元曉)의 교화야말로 참으로 컸다 할 것이다. 그가 탄생한 마을 이름을 불지촌(佛地村)이라 하고, 절 이름을 초개사(初開寺)라 하였으며 스스로 원효라 한 것은 모두 불교를 처음 빛나게 했다는 뜻이다. 원효도 역시 방언이니, 당시 사람들은 모두 향언(鄕言)의 새벽이라고 했다.
그는 일찍이 분황사(芬皇寺)에 살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지었는데, 제4권 십회향품(十廻向品)에 이르러 마침내 붓을 그쳤다. 또 일찍이 송사(訟事)로 인해서 몸을 백송(百松)으로 나눴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이를 위계(位階)의 초지(初地)라고 말했다. 또한 바다 용의 권유로 해서 노상에서 조서(詔書)를 받아 <삼매경소(三昧經疏)>를 지었는데,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놓았으므로 각승(角乘)이라 했다. 이것은 또한 본시이각(本始二覺)이 숨어 있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대안법사(大安法師)가 이것을 헤치고 와서 종이를 붙였는데 이것은 또한 지음(知音)하여 서로 창화(唱和)한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총이 그 유해(遺骸)를 부수어 소상(塑像)으로 진용(眞容)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하고 사모하여 종천(終天)의 뜻을 표했다. 설총이 그때 곁에서 예배하자 소상이 갑자기 돌아다보았는데, 지금까지도 돌아다본 그대로 있다. 원효가 일찍이 살던 혈사(穴寺) 옆에 설총이 살던 집 터가 있다고 한다.
찬(讚)해 말한다.
각승(角乘)은 처음으로 <삼매경(三昧境)>의 축(軸)을 열었고,
무호(舞壺)는 마침내 1만 거리 바람에 걸었네.
달 밝은 요석궁(瑤石宮)에 봄 잠 깊더니,
문 닫힌 분황사(芬皇寺)엔 돌아다보는 소상(塑像)만 비었네.
의상전교(義湘傳敎)
법사(法師) 의상(義湘)의 아버지는 한신(韓信)이요, 성(姓)은 김씨(金氏)이다. 나이 29세에 서울 황복사(皇福寺)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얼마 안 되어 중국으로 가서 부처의 교화(敎化)를 보려 하여 드디어 원효(元曉)와 함께 요동(遼東) 변방으로 갔는데, 여기에서 변방의 순라군(巡邏軍)이 간첩(間諜)으로 잡아 가둔 지 수십일 만에 겨우 풀려 돌아왔다(이 사실은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의상본전義湘本傳>과 원효대사元曉大師의 행장行狀에 있다). 영휘(永徽) 초년에 마침 당나라 사신이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자가 있으므로 그 배를 타고 중국에 들어갔다. 처음 양주(揚州)에 머물렀는데 주장(州將) 유지인(劉至仁)이 의상을 청해다가 관청에 머무르게 하고 대접하는 것이 매우 성대했다. 그후 얼마 안 되어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 가서 지엄(智儼)을 뵈었는데 지엄은 그 전날 밤 꿈에, 큰 나무 하나가 해동(海東)에서 났는데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서 중국에까지 와서 덮였고, 가지 위에는 봉황새의 집이 있는데, 올라가서 보니 마니보주(摩尼寶珠) 하나가 있어 그 광명(光明)이 먼 곳에까지 비쳤다. 꿈에서 깨자 놀랍고 이상스러워서 집을 깨끗이 소제하고 기다리는데 의상이 오므로 지엄은 특별한 예로 그를 맞아 조용히 말했다. "내가 꾼 어젯밤 꿈은 그대가 내게 올 징조였구려." 이에 입실(入室)할 것을 허락하니 의상은 <화엄경(華嚴經)>의 깊은 뜻을 세밀한 곳까지 해석했다. 지엄은 영질(영質)을 만난 것을 기뻐하여 새로운 이치를 터득해 내니 이야말로 깊이 숨은 것을 찾아내서 남천(藍천)이 그 본색(本色)을 잃은 것이라 하겠다. 이때 이미 본국의 승상(丞相) 김흠순(金欽純; 혹은 인문仁問)·양도(良圖) 등이 당나라에 갇혀 있었는데 고종(高宗)이 장차 크게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 하자 흠순 등은 몰래 의상을 권하여 먼저 돌아가게 하여, 함형(咸亨) 원년 경오(庚午; 670)에 본국으로 돌아왔다. 이 일을 본국 조정에 알리자 신인종(神印宗)의 고승(高僧) 명랑(明朗)에게 명하여 밀단(密壇)을 가설(假說)하고 비법(秘法)으로 기도해서 국난(國難)을 면할 수 있었다.
의봉(儀鳳) 원년(676)에 의상은 태백산(太伯山)에 돌아가서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浮石寺)를 세우고 대승(大乘)을 폈더니 영험이 많이 나타났다. 종남문인(終南門人) 현수(賢首)가 <수현소(搜玄疏)>를 지어서 부본(副本)을 의상에게 보내고, 아울러 은근한 뜻이 담긴 편지를 올렸다.
서경(西京) 숭복사(崇福寺) 중 법장(法藏)은 해동(海東) 신라 화엄법사(華嚴法師)의 시자(侍者)에게 글을 올립니다. 한번 작별한 지 20여 년이 되니 사모하는 정성이 어찌 마음 속에서 떠나겠습니까. 게다가 연기와 구름이 1만 리나 되고 바다와 육지가 1,000겹이나 쌓였으니 이 몸이 다시 뵙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며, 회포와 그리움을 어찌 다 말하오리까. 전생(前生)에 인연을 같이 했고, 금세(今世)에 학업을 함께 닦았기 때문에 이 과보(果報)를 얻어서 함께 대경(大經)에 목욕하고, 선사(先師)의 특별한 은혜로 깊은 경전(經典)의 가르침을 입게 된 것입니다. 우러러 듣건대, 상인(上人)께서는 고향에 돌아가신 후로 <화엄경(華嚴經)>을 강연해서 법계(法界)의 무애(無애)한 연기(緣起)를 드날려, 겹겹의 제망(帝網)으로 불국(佛國)을 새롭게 하여 중생(衆生)에게 이익을 주심이 크고 넓다 하오니 기쁜 마음이 더해집니다. 이것으로써 여래(如來)가 돌아가신 후에 불교를 빛내고 법륜(法輪)을 다시 굴려 불법(佛法)을 오래 머물게 한 분은 오직 법사(法師)뿐임을 알겠습니다. 법장(法藏)은 앞으로 나가는 것이 하나도 이루는 것이 없고 주선하는 일이 더욱 적사오니, 우러러 이 경전(經典)을 생각하니 선사(先師)께 부끄러울 뿐입니다. 오직 분수에 따라 받은 바를 잠시도 놓칠 수 없으니 이 업(業)에 의지하여 내세(來世)의 인연을 맺기를 원할 뿐입니다. 다만 스님의 장소(章疏)는, 뜻은 풍부하지만 글이 간결하여 후세(後世)사람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스님의 깊은 말씀과 미묘한 뜻을 기록하여 <의기(義記)>를 이루었습니다. 요새 이것을 승전법사(勝詮法師)가 베껴 가지고 고향에 돌아가 그 지방에 전할 것입니다. 하오니 상인(上人)께서는 그 잘잘못을 자세히 검토하셔서 가르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마땅히 내세(來世)에서는 사신수신(捨身受身)하여 함께 노사나불(盧舍那佛)의 이와 같은 끝이 없는 묘법(妙法)을 듣고, 이와 같은 무량(無量)한 보현보살(普賢菩薩)의 원행(願行)을 수행(修行)한다면 나의 남은 악업(惡業)은 하루아침에 떨어질 것입니다. 바라건대 상인(上人)께서는 옛날의 일을 잊지 마시고 제취(諸趣) 중에서 정도(正道)로써 가르쳐 주시옵소서. 인편(人便)이 있으면 때때로 안부를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만 갖추지 못합니다.(이 글은 <대문류大文類>에 실려 있음)
의상은 이에 영(令)을 내려 열 곳 절에서 불교를 전하니 태백산의 부석사, 원주(原州)의 비마라사(毗摩羅寺), 가야산(伽倻山)의 해인사(海印寺), 비슬산(毗瑟山)의 옥천사(玉泉寺), 금정산(金井山)의 범어사(梵魚寺), 남악(南嶽)의 화엄사(華嚴寺) 등이 이것이다. 또 <법계도서인(法界圖書印)>과 <약소(略疏)>를 지어서 일승(一乘)의 요점을 모두 기록하여 천 년의 본보기가 되게 하였으니 이를 여러 사람이 다투어 소중히 지녔다. 이 밖에는 저술한 것이 없었으니 온 솥의 고기맛을 알려면 한 점의 살코기로도 족한 것이다.
<법계도(法界圖)>는 총장(總章) 원년 무진(戊辰; 668)에 완성되었으며, 이 해에 지엄(智儼)도 세상을 떠났으니 이것은 마치 공자(孔子)가 '기린을 잡았다'는 구절에서 붓을 끊은 것과 같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의상은 금산보개(金山寶蓋)의 화신(化身)이라 하는데 그의 제자에는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表勳)·진정(眞定)·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 10명의 고승들이 영수(領首)가 되었는데, 그들은 모두 아성(亞聖)들이며 각각 전기(傳記)가 있다.
오진은 일찍이 하가산(下柯山) 골암사(골암寺)에 살면서 밤마다 팔을 뻗쳐서 부석사 석등(石燈)에 불을 켰다. 지통은 <추동기(錐洞記)>를 지었는데, 그는 대개 친히 의상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묘한 말이 많다. 표훈은 일찍이 불국사(佛國寺)에 살았으며 항상 천궁(天宮)을 왕래했다. 의상이 황복사(皇福寺)에 있을 때 여러 무리들과 함께 탑을 돌았는데, 항상 허공을 밟고 올라가 층계는 밟지 않았으므로 그 탑에는 사리를 설치하지 않았다. 그 무리들도 층계에서 3척이나 떠나 허공을 밟고 돌았기 때문에 의상은 그 무리들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보면 반드시 괴이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가르치지 못한다." 이 나머지는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본전(本傳)과 같다.
찬(讚)해 말한다.
덤불을 헤치고 바다를 건너 연기와 티끌 무릅쓰니,
지상사(至相寺) 문이 열려 귀한 손님 접대했네.
화엄(華嚴)을 캐다가 고국(故國)에 심었으니,
종남산(終南山)과 태백산(太伯山)이 함께 봄 맞았네.
사복불언(蛇福不言)
서울 만선북리(萬善北里)에 있는 과부가 남편도 없이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12세가 되어도 말을 못하고 일어나지 못하므로 사동(蛇童; 아래에는 사복蛇卜이라도고 하고, 또 사파蛇巴·사복蛇伏이라고 썼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사동蛇童을 말한다)이라고 불렀다. 어느날 그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그때 원효(元曉)가 고선사(高仙寺)에 있었다. 원효는 그를 보고 맞아 예를 했으나 사복(蛇福)은 답례도 하지 않고 말한다. "그대와 내가 엣날에 경(經)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이제 죽었으니 나와 함께 장사지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원효는 "좋다"하고 함께 사복의 집으로 갔다. 여기에서 사복은 원효에게 포살(布薩)시켜 계(戒)를 주게 하니, 원효는 그 시체 앞에서 빌었다. "세상에 나지 말 것이니, 그 죽는 것이 괴로우니라. 죽지 말 것이니 세상에 나는 것이 괴로우니라." 사복은 그 말이 너무 번거롭다고 하니 원효는 고쳐서 말했다.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모두 괴로우니라." 이에 두 사람은 상여를 메고 활리산(活里山) 동쪽 기슭으로 갔다. 원효가 말한다. "지혜 있는 범을 지혜의 숲 속에 장사지내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사복은 이에 게(偈)를 지어 말했다.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사라수(裟羅樹) 사이에서 열반(涅槃)하셨네.
지금 또한 그같은 이가 있어,
연화장(蓮花藏) 세계로 들어가려 하네.
말을 마치고 띠풀의 줄기를 뽑으니, 그 밑에 명랑하고 청허(淸虛)한 세계가 있는데, 칠보(七寶)로 장식한 난간에 누각이 장엄하여 인간의 세계는 아닌 것 같다. 사복이 시체를 업고 속에 들어가니 갑자기 그 땅이 합쳐 버린다. 이것을 보고 원효는 그대로 돌아왔다.
후세 사람들이 그를 위해서 금강산(金剛山) 동남쪽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도량사(道場寺)라 하여, 해마다 3월 14일이면 점찰회(占察會)를 여는 것을 상례(常例)로 삼았다. 사복이 세상에 영험을 나타낸 것은 오직 이것 뿐이다. 그런데 민간에서는 황당한 얘기를 덧붙였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찬(讚)해 말한다.
잠자코 자는 용이 어찌 등한하리.
세상 떠나면서 읊은 한 곡조 간단도 해라.
고통스런 생사가 본래 고통이 아니어니,
연화장 세계 넓기도 해라.
진표전간(眞表傳簡)
중 진표(眞表)는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주목全州牧) 만경현(萬頃縣; 혹은 두내산현豆乃山縣, 또는 나산현那山縣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만경萬頃, 옛 이름은 두내산현豆乃山縣이다. <관녕전貫寧傳>에 중 [표表]의 향리鄕里로서 금산현金山縣 사람이라 한 것은 절 이름과 현縣 이름을 혼동한 것이다) 사람이다. 아버지는 진내말(眞乃末)이요, 어머니는 길보랑(吉寶娘)이며, 성(姓)은 정(井)씨이다. 나이 12세 때 금산사(金山寺)의 숭제법사(崇濟法師) 강석(講席)에 가서 중이 되어 배우기를 청했다. 그 스승이 일찍이 말했다. "나는 일찍이 당나라에 들어가 선도삼장(善道三藏)에게 배운 후에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문수보살(文殊菩薩)의 현신(現身)에게서 오계(五戒)를 받았다." 진표는 물었다. "부지런히 수행(修行)하면 얼마나 되어 계(戒)를 얻게 됩니까." 숭제(崇濟)가 말했다. "정성만 지극하다면 1년을 넘지 않을 것이다."
진표는 스승의 말을 듣고 명산(名山)을 두루 다니다가 선계산(仙溪山) 불사의암(不思議庵)에 머물면서 삼업(三業)을 닦아 망신참법(亡身懺法)으로 계(戒)를 얻었다. 그는 처음에 7일 밤을 기약하고 오륜(五輪)을 돌에 두들겨서, 무릎과 팔뚝이 모두 부서지고 바위 언덕에까지 피가 쏟아졌다. 그래도 아무런 부처의 감응이 없으므로 몸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다시 7일을 더 기약하여 14일이 되자 마침내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뵙고 정계(淨戒)를 받았으니 이때는 바로 개원(開元) 28년 경진(庚辰; 740) 3월 15일 진시(辰時)요, 진표의 나이 23세였다.
그러나 그의 뜻이 자씨(慈氏)에게 있었으므로 감히 중지하지 않고 영산사(靈山寺; 혹은 변산邊山, 또는 능가산楞伽山이라 한다)로 옮겨가서 또 처음과 같이 부지런하고 용감하게 수행(修行)했다. 과연 미륵보살(彌勒菩薩)이 감응해 나타나 <점찰경(占察經)> 2권(이 經은 진陳·수隋 시절에 외국에서 번역된 것이니 지금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다. 다만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이 경經을 진표眞表에게 주었을 뿐이다)과 증과(證果)의 간자(簡子) 189개를 주면서 일렀다. "이 가운데서 제8간자는 새로 얻은 묘계(妙戒)를 비유한 것이요, 제9간자는 구족(具足)의 계(戒)를 얻은 것에 비유한 것이다.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 뼈이며, 나머지는 모두 침향(沈香)과 단향(檀香)나무로 만든 것으로, 이것은 모두 번뇌(煩惱)에 비유한 것이다. 너는 이것으로써 세상에 법을 전하여 남을 구제하는 뗏목을 삼으라." 진표는 미륵보살의 기별(記별)을 받자 금산사(金山寺)에 가서 살면서 해마다 단석(壇席)을 열어 법시(法施)를 널리 베풀었는데, 그 단석의 정결하고 엄한 것이 이 말세(末世)에는 보지 못하던 일이었다. 풍교(風敎)의 법화(法化)가 두루 미치자 여러 곳을 다니다가 아슬라주(阿瑟羅州)에 이르니 섬 사이의 물고기와 자라들이 다리를 놓고 물 속으로 맞아들이므로 진표가 불법(佛法)을 강의하니 물고기와 자라들이 계(戒)를 받았다. 그때 바로 천보(天寶) 11년 임진(壬辰; 752) 2월 15일이었다. 어떤 책에는 원화(元和) 6년(811)이라 했지만 잘못이니 원화(元和)는 헌덕왕(憲德王) 때이다(이것은 성덕왕聖德王 대로부터 거의 70년쯤 된다). 경덕왕(景德王)이 이 말을 듣고 그를 궁중(宮中)으로 맞아들여 보살계(菩薩戒)를 받고 곡식 7만 7,000석을 내렸다. 초정(椒庭)과 열악(列岳)들도 모두 계품(戒品)을 받고, 비단 500필과 황금 50냥을 주었다. 그는 이것을 모두 받아서 여러 절에 나누어 주어 널리 불사(佛事)를 일으켰다. 그의 사리(舍利)는 지금의 발연사(鉢淵寺)에 있으니, 곧 바다의 물고기들을 위해서 계(戒)를 주던 땅이다.
그의 제자 중에서 불법을 얻은 영수(領袖)로는 영심(永深)·보종(寶宗)·신방(信芳)·체진(體珍)·진해(珍海)·진선(眞善)·석충(釋忠) 등이 있는데, 모두 산문(山門)의 개조(開祖)가 되었다. 영심은 진표가 간자를 전했으므로 속리산(俗離山)에 살았는데 이가 진표의 법통(法統)을 계승한 제자다. 그 단(壇)을 만드는 법은 점찰(占察) 육륜(六輪)과는 조금 다르지만 수행(修行)하는 법은 산 속에 전하는 본규(本規)와 같았다.
<당승전(唐僧傳)>을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개황(開皇) 13년(593)에 광주(廣州)에 참법(懺法)을 행하는 중이 있었다. 그는 가죽으로 점자(岾子) 두 장을 만들어 선(善)과 악(惡) 두 글자를 써서 사람에게 던지게 하여 선자(善字)를 얻은 자를 길(吉)하다고 했다. 또 그는 스스로 박참법(撲懺法)을 행해서 지은 죄를 없애게 한다고 하니 남녀가 한데 어울려서 함부러 받아들여 비밀히 행해서 청주(靑州)에까지 퍼졌다. 동행(同行) 관사(官司)가 이것을 조사해 보고 요망스러운 일이라 하니 이에 그들은 말했다. "이 탑참법(搭懺法)은 <점찰경(占察經)>에 의한 것이고, 박참법은 여러 경(經) 속의 내용에 따른 것으로, 온몸을 땅에 던져 마치 큰 산이 무너지는 것과 같이 한다." 이때 사실을 위해 아뢰자 황제(皇帝)는 내사시랑(內史侍郞) 이원찬(李元撰)을 시켜서 대흥사(大興寺)로 가서 여러 대덕(大德)들에게 물으니, 대사문(大沙門) 법경(法經)과 언종(彦琮)등이 대답했다. "<점찰경>은 두 권이 있는데, 책 머리에 보리등(菩提燈)이 외국에서 번역한 글이라고 하였으니 근대(近代)에 나온 것 같습니다. 또한 사본(寫本)으로 전하는 것이 있는데, 여러 기록을 검사해 보아도 아무데도 바른 이름과 번역한 사람과 시일(時日)이나 장소가 모두 없습니다. 탑참법(搭懺法)은 여러 가지 경(經)과는 다르기 때문에 여기에 의해서 시행할 수는 없습니다." 이리하여 칙령(勅令)을 내려 이것을 금지시켰다.
이제 이것을 시험삼아 의론한다. 청주거사(靑州居士) 등의 탑참(搭懺)의 일은 마치 큰 선비가 시서발총(詩書發塚)하는 것과 같아 '범을 그리다가 이루지 못하고 개를 그렸다'고 할 수 있으니, 불타(佛陀)가 미리 방비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만일 <점찰경(占察經)>을 번역한 사람이나 그 시일(時日)과 장소가 없다고 해서 의심스럽다고 한다면 이것도 또한 삼[麻]을 취하기 위해 금(金)을 버리는 격(格)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경문(經文)을 자세히 읽어 보면 실단(悉壇)이 깊고 조밀하여 더러운 것과 흠이 있는 것을 깨끗이 씻어 주고 게으른 사람을 충격시키는 것이 이 경전(經典)만한 것이 없다. 때문에 그 이름은 대승참(大乘懺)이라고 했다. 또 육근(六根)이 모인 가운데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개원(開元)·정원(貞元) 연간에 나온 두 <석교록(釋敎錄)> 속에는 정장(正藏)으로 편입되어 있으니, 비록 성종(性宗)은 아니지만 그 상교(相敎)의 대승(大乘)으로는 자못 넉넉한 셈이다. 어찌 탑참(搭懺)이나 박참(撲懺)의 두 참(懺)과 함께 말할 수 있으랴.
<사리불문경(舍利佛問經)>에 의하면 부처가 장자(長者)의 아들 빈야다라(빈若多羅)에게 말했다. "네가 7일 7야 동안에 너의 전죄(前罪)를 뉘우쳐서 모두 씻게 하라." 다라(多羅)가 이 가르침을 받들어 밤낮으로 정성껏 행하니, 제5일 저녁에 이르자 그 방 안에 여러 가지 물건이 비오듯이 내려 수건·복두(복頭)·총채·칼·송곳·도끼와 같은 물건들이 그의 눈앞에 떨어졌다. 다라(多羅)가 기뻐하여 부처에게 물었더니 부처는 대답한다. "이것은 네가 물욕(物慾)을 벗어날 징조이니, 이것은 모두 베고 터는 물건이다." 이 말에 의하면 <점찰경>에서 윤(輪)을 던져 상(相)을 얻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이것으로 진표공(眞表公)이 참회를 일츠켜서 간자(簡子)를 얻고 불법을 듣고 부처를 본 것이 허망된 일이 아님을 알 수가 있었다. 하물며 이 경(經)을 거짓되고 망령된 것이라고 한다면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어찌해서 진표스님에게 친히 전수(傳授)했겠는가. 또 이 경을 만일 금한다면 <사리불문경(舍利佛問經)>도 또한 금할 것인가. 언종(彦琮)의 무리야말로 금을 훔칠 때 사람을 못 보았으니, 글을 읽는 자들은 이것을 자세히 알아야 할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요계(요季)에 현신(現身)해서 용롱(용聾)을 깨우치니,
영악(靈嶽)과 선계(仙溪)에서 감응(感應)해 통했네.
정성 다해 탑참(搭懺) 전했다고 말하지 말라.
동해에 다리를 놓아 준 어룡(魚龍)도 감화되었네.
관동풍악(關東楓岳) 발연수석기(鉢淵藪石記; 이 기록은 사주寺主 영잠瑩岑이 지은 것으로 승안承安 4년 기미己未(1199)에 돌을 세웠다)
진표율사(眞表律師)는 전주(全州) 벽골군(碧骨郡) 도나산촌(都那山村) 대정리(大井里) 사람이다. 나이 12세에 중이 될 뜻을 가지니 아버지가 허락하므로 율사(律師)는 금산수(金山藪) 순제법사(順濟法師)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순제(順濟)가 <사미계법(沙彌戒法)>과 <전교공양차제비법(傳敎供養次第秘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2권을 주면서 말했다. "너는 이 계법(戒法)을 가지고 미륵(彌勒)·지장(地藏) 두 보살(菩薩) 앞으로 가서 간절히 법을 구하고 참회(懺悔)해서 친히 계법(戒法)을 받아 세상에 널리 전하도록 하라." 율사(律師)는 가르침을 받들고 작별하여 물러나와 두루 명산(名山)을 유람하니 나이 이미 27세가 되었다. 상원(上元) 원년 경자(庚子; 760)에 쌀 20말을 쪄서 말려 양식을 만들어 보안현(保安縣)에 가서 변산(邊山)에 있는 불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갔다. 쌀 5홉으로 하루의 양식을 삼았는데, 그 가운데서 한 홉을 덜어서 쥐를 길렀다. 율사는 미륵상(彌勒像) 앞에서 부지런히 계법(戒法)을 구했으나 3년이 되어도 수기(授記)를 얻지 못했다. 이에 발분(發憤)하여 바위 아래에 몸을 던지니, 갑자기 청의동자(靑衣童子)가 손으로 받들어 돌 위에 올려 놓았다. 율사는 다시 지원(志願)을 내어 21일을 기약하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수도(修道)하여 돌로 몸을 두드리면서 참회하니, 3일 만에 손과 팔뚝이 부러져 땅에 떨어진다. 7일이 되던 날 밤에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손에 금장(金杖)을 흔들면서 와서 그를 도와 주니 손과 팔뚝이 전과 같이 되었다. 보살이 그에게 가사(袈裟)와 바리때를 주니 율사는 그 영응(靈應)에 감동하여 더욱더 정진(精進)했다. 21일이 다 차니 곧 천안(天眼)을 얻어 도솔천중(兜率天衆)들이 오는 모양을 볼 수 있었다. 이에 자장보살과 미륵보살의 앞에 나타나니 미륵보살이 율사의 이마를 만지면서 말했다. "잘하는도다. 대장부여! 이와 같이 계(戒)를 구하여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간절히 구해서 참회하는도다." 지장이 <계본(戒本)>을 주고, 미륵(彌勒)이 또 목간자(木簡子) 두 개를 주었는데, 하나에는 아홉째 간자, 또 하나에는 여덟째 간자라고 씌어 있었다. 미륵보살이 율사에게 말한다.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 뼈이니, 이것은 곧 시(始)와 본(本)의 두 각(覺)을 이르는 것이다. 또 아홉번째 간자는 법(法)이고, 여덟 번째 간자는 신훈성불종자(新熏成佛種子)이니, 이것으로써 마땅히 과보(果報)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현세(現世)의 육신(肉身)을 버리고 대국왕(大國王)의 몸을 받아 이후에 도솔천(兜率天)에 가서 태어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을 마치고 두 보살은 곧 숨었다. 이 때가 임인(壬寅; 762)년 4월 27일이었다.
율사가 교법(敎法)을 받고 금산사(金山寺)를 세우고자 하여 산에서 내려와 대연진(大淵津)에 이르니, 갑자기 용왕(龍王)이 나와서 옥가사(玉袈裟)를 바치고 팔만권속(八萬眷屬)을 거느리고 그를 호위하여 금산수(金山藪)로 가니,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며칠 안에 절이 완성되었다. 또 미륵보살이 감동하여 도솔천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와 율사에게 계법(戒法)을 주니 이에 율사는 시주(施主)를 권하여 미륵장육상(彌勒丈六像)을 만들고, 또 미륵보살이 내려와서 계법을 주는 모양을 금당(金堂) 남쪽 벽에 그렸다. 상(像)은 갑진(甲辰; 764)년 6월 9일에 완성하여 병오(丙午; 766)년 5월 1일에 금당에 모셨으니, 이 해가 대력(大曆) 원년이었다.
율사가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으로 가는 도중에 우차(牛車)를 탄 사람을 만났는데 그 소들이 율사의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우니 수레에 탄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와 물었다. "무슨 까닭으로 이 소들이 스님을 보고 우는 것입니까. 그리고 스님은 어디서 오시는 분입니까." 율사가 말한다. "나는 금산수(金山藪)의 중 진표(眞表)요. 나는 일찍이 변산(邊山)의 불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가 미륵·지장의 두 보살 앞에서 친히 계법(戒法)과 진생(眞생)을 받았기 때문에 절을 지어 길이 수도(修道)할 곳을 찾아 오는 것입니다. 이 소들은 겉은 어리석은 듯하지만 속은 현명합니다. 내가 계법받는 것을 알고, 불법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무릎을 꿇고 우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이 말을 다 듣고 나더니 말한다. "짐승도 오히려 이러한 신심(信心)이 있는데 하물며 나는 사람으로서 어찌 무심하겠습니까." 그는 즉시 손으로 낫[렴]을 쥐고 스스로 자기 머리털을 잘라 버렸다. 율사는 자비한 마음으로 다시 그의 머리를 깎아 주고 계를 주었다. 이들은 속리산 골짜기 속에 이르러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을 보고 표를 해 두었다. 그들은 명주(溟州) 해변으로 돌아와 천천히 가는데, 물고기와 자라 등속이 바다에서 나와 율사의 앞에 오더니 몸을 맞대어 육지처럼 만들어 주므로 율사는 그것을 밟고 바다에 들어가서 계법을 외워 주고 다시 나가 고성군(高城郡)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금강산(金剛山)으로 들어가서 비로소 발연수(鉢淵藪)를 세우고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었다. 여기에서 7년 동안 살았는데, 명주(溟州) 지방에 흉년이 들어서 사람들이 모두 굶주렸다. 율사가 이들을 위해서 계법을 설(說)하니 사람마다 받들어 지켜서 삼보(三寶)에 공경을 다하여, 갑자기 고성(高城) 바닷가에 무수한 물고기들이 저절로 죽어서 나왔다. 사람들이 이것을 팔아 먹을 것을 장만하여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율사는 발연수(鉢淵藪)에서 나와 다시 불사의방(不思議房)에 이르렀는데 그 후에는 고향으로 가서 그 아버지를 뵙기도 하고 혹은 진문대덕(眞門大德)의 방에 가서 살기도 했다. 이때 속리산의 고승 영심(永深)이 대덕(大德) 융종(融宗) 불타(佛陀) 등과 함께 율사가 있는 곳에 와서 청했다. "우리들은 천릿길을 멀다 하지 않고 와서 계법을 구하오니 법문(法門)을 주시기 바랍니다." 율사가 잠자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니 세 사람은 복숭아나무 위에 올라가 거꾸로 땅에 떨어지면서 맹렬히 참회했다. 이에 율사가 교(敎)를 전하여 관정(灌頂)하고 드디어 가사와 바리때와 <공양차제비법(供養次第秘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2권과 간자(簡子) 189개를 주었다. 다시 미륵진생(彌勒眞생) 아홉째 간자와 여덟째 간자를 주면서 경계했다. "아홉번째 간자는 법이요, 여덟째 간자는 신훈성불종자(新熏成佛種子)다. 내가 이미 너희들에게 주었으니 가지고 속리산으로 돌아가라. 그 산에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이 있으니, 거기에 정사(精舍)를 세우고 이 교법에 의해서 널리 인간계(人間界)와 천상계(天上界)의 중생들을 건지고, 후세에까지 전하도록 하라." 영심 등이 가르침을 받들고 바로 속리산에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세우고 길상사(吉祥寺)라고 했다. 영심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점찰법회를 열었다. 율사는 그 아버지와 함께 다시 발연사에 가서 함께 도업(道業)을 닦아 효도를 다했다.
율사가 세상을 떠날 때 절의 동쪽 큰 바위 위에 올라가서 죽으니 제자들이 그 시체를 옮기지 않고 그대로 공양하다가 뼈가 흩어져 떨어지자 흙으로 덮어 묻어서 무덤을 만들었다. 그 무덤에 푸른 소나무가 바로 나더니 세월이 오래 되자 말라죽었다. 다시 나무 하나가 났는데 뿌리는 하나이더니 지금은 나무가 쌍으로 서 있다.
대개 그를 공경하는 자가 있어 소나무 밑에서 뼈를 찾는데, 혹은 얻기도 하고 혹은 얻지 못하기도 했다. 나는 율사의 뼈가 아주 없어질까 두려워하여 정사(丁巳; 1197)년 9월에 특히 소나무 밑에 가서 뼈를 주워 통에 담았는데 3홉 가량이나 되었다. 이에 큰 바위 위에 있는 쌍으로 난 나무 밑에 돌을 세워 뼈를 모셨다.
이 기록에 실린 진표의 사적은 발연석기(鉢淵石記)와는 서로 다른다. 때문에 영잠(瑩岑)이 기록한 것만 추려서 싣는 것이다. 후세의 어진 이들은 마땅히 상고할 것이다. 무극(無極)은 쓴다.
승전촉루(勝詮촉루)
중 승전(勝詮)은 그 내력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일찍이 배를 타고 중국에 가서 현수국사(賢首國師)의 강석(講席)에 나가 현언(玄言)을 받아 정미한 것을 연구하여 생각을 쌓고, 보는 것이 슬기롭고 뛰어나 깊은 것과 숨은 것을 찾아 그 묘함이 심오(深奧)함을 다하였다. 이에 그는 인연 있는 곳으로 가고자 하여 고국(故國)으로 돌아올 마음을 가졌다.
처음에 현수(賢首)는 의상(義湘)과 함께 배워 지엄화상(智儼和尙)의 사랑스런 가르침을 받았다. 현수는 스승의 말에 대하여 글뜻과 과목(科目)을 연술(演述)하여, 승전법사(勝詮法師)가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기회로 이 글을 보내니 의상도 역시 글을 보냈다 한다. 그 별폭(別幅)에는 이렇게 말했다. "<탐현기(探玄記)> 20권 중에서 두 권은 아직 완성되지 못했고, <교분기(敎分記)> 3권, <현의장등잡의(玄義章等雜義)> 1권, <화엄범어(華嚴梵語)> 1권, <기신소(起信疎)> 2권, <십이문소(十二門疎)> 1권, <법계무차별론소(法界無差別論疏)> 1권을 모두 옮겨 베꼈으니 승전법사 편에 보내드립니다. 저번에 신라의 중 효충(孝忠)이 금 9푼을 갖다 주면서 상인(上人)이 보낸 것이라고 하오니, 비록 편지는 받지 못했지만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지금 인도의 군지조관(軍持조灌) 한 개를 보내어 적은 정성을 표하오니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아룁니다." 승전법사가 돌아오자 이 현수의 글을 의상에게 전했다. 의상은 법장(法藏)의 이 글을 보니 마치 지엄(智儼)의 가르침을 친히 듣는 것과 같았다. 수십 일 동안 탐색(探索)하고 연구하여 제자들에게 주어 이 글을 널리 연술(演述)시켰으니, 이 말은 의상의 전기에 실려 있다.
상고해 보면 이렇다. 이 원만하고 융통(融通)하는 가르침이 청구(靑丘)에 널리 퍼진 것은 실로 승전법사의 공이다. 그 후에 중 범수(梵修)가 멀리 당나라에 가서 새로 번역한 <후분화엄경(後分華嚴經)>·<관사의소(觀師義疏)>를 구해 가지고 돌아와 연술했다고 하니, 이때는 정원(貞元) 기묘(己卯; 799)년이었다. 이도 역시 불법을 구해다가 널리 드날린 사람이라 하겠다.
승전은 상주(尙州) 영내(領內)의 개령군(開寧郡) 경계에 절을 새로 짓고 돌들로 관속(官屬)으로 삼아 <화엄경(華嚴經)>을 개강(開講)했다. 그 뒤에 신라 중 가귀(可歸)가 자못 총명하고 도리를 알아서 전등(傳燈)을 계속하여 이에 <심원장(心源章)>을 편찬하였으니, 그 대략에 보면 이러하다. 승전법사는 돌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불경을 논의(論議)하고 강연했다고 하니, 그곳은 지금의 갈항사(葛項寺)이다. 그 돌 80여 개는 지금까지 강사(綱司)가 전하고 있는데 자못 신령스럽고 이상한 것이 있다.
그 밖의 사적들은 모두 비문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대각국사실록(大覺國師實錄)> 속에 있는 것과 같다.
심지계조(心地繼祖)
중 심지(心地)는 진한(辰韓) 제41대 헌덕대왕(憲德大王) 김씨(金氏)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깊고 천성이 맑고 지혜가 있었다. 학문에 뜻을 두는 나이서 불도(佛道)에 부지런했다. 중악(中岳; 지금의 공산公山)에 가서 살고 있는데 마침 속리산(俗離山)의 심공(深公)이 진표율사(眞表律師)의 불골간자(佛骨簡子)를 전해 받아서 과정법회(果訂法會)를 연다는 말을 듣고, 뜻을 결정하여 찾아갔으나 이미 날짜가 지났기 때문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이에 땅에 앉아서 마당을 치면서 신도(信徒)들을 따라 예배하고 참회했다. 7일이 지나자 큰 눈이 내렸으나 심지(心地)가 서 있는 사방 10척 가량은 눈이 내리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그 신기하고 이상함을 보고 당(堂)에 들어오기를 허락했으나 심지는 사양하여 거짓 병을 칭탁하고 방 안에 물러앉아 당을 향해 조용히 예배했다. 그의 팔꿈치와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려 마치 진표공(眞表公)이 선계산(仙溪山)에서 피를 흘리던 일과 같았는데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매일 와서 위문했다. 법회가 끝나고 산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옷깃 사이에 간자(簡子) 두 개가 끼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가지고 돌아가서 심공(深公)에게 아뢰니 영심(永深)이 말하기를, "간자는 함 속에 들어 있는데 그럴 리가 있는가."하고 조사해 보니 함은 봉해 둔 대로 있는데 열고 보니 간자는 없었다. 심공이 매우 이상히 여겨 다시 간자를 겹겹이 싸서 간직해 두었다. 심지가 또 길을 가는데 간자가 먼저와 같았다. 다시 돌아와서 아뢰니 심공이 말하기를, "부처님 뜻이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는 받들어 행하도록 하라"하고 간자를 그에게 주었다. 심지가 머리에 이고 중악으로 돌아오니 중악의 신이 선자(仙子) 둘을 데리고 산꼭대기에서 심지를 맞아 그를 인도하여 바위 위에 앉히고는 바위 밑으로 돌아가 엎드려서 공손히 정계(正戒)를 받았다. 이때 심지가 말했다. "이제 땅을 가려서 부처님과 간자를 모시려 하는데, 이것은 우리들만이 정할 일이 못되니 그대들 셋과 함께 높은 곳에 올라가서 간지를 던져 자리를 점치도록 하자." 이에 신들과 함께 산마루로 올라가서 서쪽을 향하여 간자를 던지니, 간자는 바람에 날아간다. 이때 신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
막혔던 바위 멀리 물러가니 숫돌처럼 평평하고,
낙엽이 날아 흩어지니 앞길이 훤해지네.
불골(佛骨) 간자(簡子)를 찾아 얻어서,
깨끗한 곳 찾아 정성드리려네.
노래를 마치자 간자를 숲속 샘에서 찾아 곧 그 자리에 당(堂)을 짓고 간자를 모셨으니, 지금 동화사(桐華寺) 첨당(籤堂) 북쪽에 있는 작은 우물이 이것이다.
본조(本朝) 예종(睿宗)이 일찍이 부처의 간자를 맞아 대궐 안에서 예배했는데, 갑자기 아홉 번째 간자 하나를 잃어 아간(牙簡)으로 대신하여 본사(本寺)에 돌려보냈더니, 지금은 이것이 점점 변해서 같은 빛이 되어 새것과 옛것을 분별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 바탕은 상아도 옥도 아니다.
<점찰경(占察經)> 상권(上卷)을 상고해 보면 189개 간자(簡子)의 이름이 있는데 이러하다. 1은 상승(上乘)을 구해서 불퇴위(不退位)를 얻은 것이요, 2는 구하는 과(果)가 마땅한 증(證)을 나타내는 것이요, 제3과 제4는 중승(中乘)과 하승(下乘)을 구해서 불퇴위(不退位)를 얻은 것이요, 5는 신통력(神通力)을 구해서 성취함이요, 6은 사범(四梵)을 구해서 성취함이요, 7은 세선(世禪)을 닦아 성취함이요, 8은 받고 싶은 묘계(妙戒)를 얻음이요, 9는 일찍이 받은 구계(具戒)를 얻음이요(이 글을 가지고 고정考訂한다면, 미륵보살彌勒菩薩이 말한, '새로 얻은 계戒'는 금세今世에 처음 얻는 계戒를 말하는 것이요, '옛날 얻은 계戒'는 과거세過去世에 일찍이 받았다가 금세今世에 또 더 받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수생본유修生本有의 신구新舊를 말한 것이 아님을 알겠다), 10은 하승(下乘)을 구하며 아직 신심(信心)에 살지 않는 것이요, 다음은 중승(中乘)을 구하여 아직 신심에 살지 않음이다. 이와 같이 해서 제172까지는 모두 과거세(過去世)나 현세(現世) 사이에 혹 착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고, 혹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한 일들이다. 제173은 몸을 버려 이미 지옥에 들어감이요(이상은 모두 미래未來에의 과果이다), 제174는 죽은 후에 축생(畜生)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귀(餓鬼)·수라(修羅)·인(人)·인왕(人王)·천(天)·천왕(天王)에까지 미치고, 불법(佛法)을 들음, 출가(出家), 성승(聖僧)을 만남, 도솔천(兜率天)에 태어남, 정토(淨土)에 태어남, 부처를 찾아뵘, 하승(下乘)에 머무름, 중승에 머무름, 상승에 머무름, 해탈(解脫)을 얻음의 제189 등이 이것이다(위에서는 하승下乘에 머무름에서부터 상승上乘에서 불퇴전不退轉함을 얻음까지 말했고, 이제 상승上乘에서 해탈解脫을 얻음 등을 말함은 이것으로 분별된다). 이들은 모두 삼세(三世)의 선악과보(善惡果報)의 차별의 모습이다.
이것으로 점을 쳐 보면, 마음이 행하려고 한 일과 간자가 서로 맞으면 감응(感應)하고 그렇지 못하면 지극한 마음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이것을 허류(虛謬)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8과 9의 두 간자는 오직 189개 가운데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송전(宋傳)>에서는 다만 108 첨자(籤子)라고만 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필경 저 백팔번뇌(百八煩惱)의 명칭으로 알고 말한 것 같다. 그리고 또 경문(經文)을 상고해 보지도 않은 것 같다.
또 상고해 보면, 본조(本朝)의 문사(文士)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 2권에 신라 말년의 고승(高僧) 석충(釋沖)이 고려 태조(太祖)에게 진표율사(眞表律師)의 가사 한 벌과 계간자(戒簡子) 189개를 바쳤다고 써 있다. 이것이 지금 동화사(桐華寺)에 전해 오는 간자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알 수 없다.
찬(讚)해 말한다.
금규(金閨) 속에서 자랐건만 일찍 속박을 벗어났고,
부지런함과 총명함 하늘이 주었네.
뜰에 가득 쌓인 눈 속에서 간자를 뽑아,
동화산(桐華山) 높은 봉우리에 갖다 놓았네.
현유가(賢瑜가), 해화엄(海華嚴)
유가종(瑜伽宗)의 조사(祖師) 고승(高僧) 대현(大賢)은 남산(南山) 용장사(茸長寺)에 살았다. 그 절에는 미륵보살(彌勒菩薩)의 돌로 만든 장육상(丈六像)이 있었다. 대현이 항상 이 장육상을 돌면 장육상도 역시 대현을 따라 얼굴을 돌렸다. 대현은 슬기롭고 분명하고 정밀하고 민첩해서 판단하고 분별하는 것이 명백했다. 대개 법상종(法相宗)의 전량(銓量)은 그 뜻과 이치가 그윽하고 깊어서 해석하기가 매우 어렵다. 때문에 중국의 명사 백거이(白居易)도 일찍이 이것을 연구하다가 다 알지 못하고 말했다. "유식(唯識)은 뜻이 그윽하여 알기 어렵고, 인명(因明)은 분석해도 열리지 않는다." 그러니 학자들이 배우기 어려운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대현은 홀로 그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잠시 동안에 그윽하고 깊은 뜻을 터득하여 회회유인(恢恢游刃)하였다. 이리하여 동국(東國)의 후진(後進)들은 모두 그 가르침에 따랐고, 중국의 학사(學士)들도 간혹 이것을 얻어 안목(眼目)으로 삼았다.
경덕왕(景德王) 천보(天寶) 12년 계사(癸巳; 753) 여름에 가뭄이 심하니 대현을 대궐로 불러들여 <금광경(金光經)>을 강(講)하여 단비를 빌게 했다. 어느날 재를 올리는데 바라를 열어 놓고 한참 있었으나 공양하는 자가 정수(淨水)를 늦게 올리므로 감리(監吏)가 꾸짖었다. 이에 공양하는 자가 말했다. "대궐 안 우물이 말랐기 때문에 먼 곳에서 떠오느라고 늦었습니다." 대현은 그 말을 듣고 말했다. "왜 진작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가." 낮에 강론할 때 대현은 향로를 받들고 잠자코 있으니 잠깐 사이에 우물물이 솟아나와서 그 높이가 일곱 길이나 되어 찰당(刹幢)의 높이와 가지런하게 되니, 궁중(宮中)이 모두 놀라서 그 우물을 금광정(金光井)이라 했다. 대현은 일찍이 스스로 청구사문(靑丘沙門)이라 일컬었다.
찬(讚)해 말한다.
남산(南山)의 불상(佛像)을 도니 불상도 따라 얼굴 돌려,
청구(靑丘)의 불교가 다시 중천(中天)에 떠올랐네.
궁중 우물을 솟구치게 한 것이,
향로 한 줄기 연기에서 시작될 줄 누가 알리.
그 이듬해 갑오(甲午; 754)년 여름에 왕은 또 고승 법해(法海)를 황룡사(黃龍寺)로 청해 <화엄경(華嚴經)>을 강론하게 하고, 친히 가서 향을 피우고 조용히 말했다. "지난해 여름에 대현법사(大賢法師)는 <금광경(金光經)>을 강론하여 우물물을 일곱 길이나 솟아나오게 했소. 그대의 법도(法道)는 어떠하오." 법해가 말한다. "그것은 특히 조그만 일이어서 족히 칭찬할 것이 못됩니다. 이제 창해(滄海)를 기울여서 동악(東岳)을 잠기게 하고, 서울을 물에 떠내려가게 하는 것도 또한 어렵지 않습니다." 왕은 믿지 않고 농담으로만 여겼다. 오시(午時)에 강론하는데 향로를 안고 고요히 있노라니 잠깐 사이에 궁중에서 갑자기 우는 소리가 나고, 궁리(宮吏)가 달려와서 보고한다. "동쪽 연못이 이미 넘쳐서 내전(內殿) 50여 칸이 떠내려갔습니다." 왕이 멍하니 어쩔 줄을 몰라하니 법해가 웃으면서 말한다. "동해가 기울고자 수맥(水脈)을 먼저 불린 것뿐입니다." 왕은 자기도 모르게 일어나 절을 했다. 이튿날 감은사(感恩寺)에서 아뢰었다. "어제 오시(午時)에 바닷물이 넘쳐흘러서 불전(佛殿)의 뜰 앞까지 밀려 왔다가 저녁때에 물러갔습니다." 이 일로 해서 왕은 더욱 법해를 믿고 공경했다.
찬(讚)해 말한다.
법해(法海)의 물결 움직임을 보니 법계(法界)는 넓기도 해라,
사해(四海)를 늘이고 줄이는 것도 어려울 것 없네.
높은 수미(須彌)를 크다고만 말하지 말라,
모두 우리 스님의 한 손가락 끝에 있느니.(이것은 석해石海가 말한 것이다)
제 5 권
국존 조계종 가지산하 인각사 주지 원경충조대선사 일연찬
國尊 曹溪宗 迦智山下 麟角寺 住持 圓鏡沖照大禪師 一然撰
삼국유사 제 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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