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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삼국유사 제 7권 전문

 

 

삼국유사 제 5권

피은 제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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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은(避隱) 제 8

 

 

낭지승운(朗智乘雲), 보현수(普賢樹)

 

삽량주(삽良州) 아곡현(阿曲縣)의 영취산(靈鷲山; 삽량삽良은 지금의 양주梁州. 아곡阿曲의 곡曲은 서西로도 쓰며 혹은 구불球佛 또는 굴불屈佛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울주蔚州에 굴불역屈佛驛을 두었으나 지금도 그 이름이 남아있다)에 이상한 중이 있었다. 암자에 살기 수십 년이 되었어도 고을에서 모두 그를 알지 못하였고, 스님도 또한 성명을 말하지 않았다. 항상 <법화경(法華經)>을 강론하여 신통력이 있었다.

용삭(龍朔) 초년에 지통(智通)이란 중이 있었는데, 그는 본래 이량공(伊亮公)의 집 종이었다. 일곱 살에 출가했는데, 그 때 까마귀가 와서 울면서 말했다. "영취산(靈鷲山)에 가서 낭지(朗智)의 제자가 되어라." 지통이 그 말을 듣고 이 산을 찾아가서 골짜기 안 나무 밑에서 쉬는데 문득 이상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보현보살(普賢菩薩)인데 너에게 계품(戒品)을 주려고 왔다."하고는 계를 베풀고 사라졌다. 이때 지통은 정신이 활달해지고 지증(智證)이 문득 두루 통해졌다. 그는 다시 길을 가다가 한 중을 만났다. 그가 낭지 스님은 어디 계시냐고 물으니 중이 말했다. "어째서 낭지(郎智)를 묻느냐." 지통이 신기한 까마귀의 일을 자세히 말하자 중은 빙그레 웃으면서 "내가 바로 낭지다. 지금 집 앞에 또한 까마귀가 와서 알리기를, 거룩한 아이가 장차 스님에게로 올 것이니 마땅히 나가서 영접하라 하므로 와서 맞이하는 것이다."하고 손을 잡고 감탄하여 말했다. "신령스런 까마귀가 너를 깨우쳐 내게 오게 하고, 내게 알려서 너를 맞게 하니 이 무슨 상서로운 일인가. 아마 산신령의 은밀한 도움인 듯하다. 전하는 말에, 산의 주인인 변제천녀(辯才天女)라고 한다." 지통이 이 말을 듣고 울면서 감사하고 스님에게 귀의했다. 이윽고 계를 주려 하니 지통이 말했다. "저는 동구 나무 밑에서 이미 보현보살에게 정계(正戒)를 받았습니다." 낭지는 감탄해서 말했다. "잘했구나. 네가 이미 친히 보살의 만분지계(滿分之戒)를 받았으니 내 너에게 아득히 미치지 못하는구나." 말을 마치고 도리어 지통에게 예했다. 이로 인해서 그 나무를 이름하여 보현수(普賢樹)라 했다. 지통이 "법사께서 여기에 거주하신 지가 오래된 듯합니다."하고 말하자 낭지는, "법흥왕(法興王) 정미년(丁未年; 572)에 처음으로 여기에 와서 살았는데 지금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지통이 이 산에 온 것이 문무왕(文武王) 즉위 원년(661)이니, 계산해 보면 135년이 된다.

지통은 후에 의상(義湘)의 처소에 가서 고명하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아 불교의 교화에 이바지하였다. 이가 곧 <추동기(錐洞記)>의 작자(作者)이다.

원효(元曉)가 반고사(磻高寺)에 있을 때에는 항상 낭지(郎智)에게 가서 뵈니 그는 원효에게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저술하게 했다. 원효가 짓기를 마친 후에 은사(隱士) 문선(文善)을 시켜 책을 받들어 보내면서 그 편미(篇尾)에 게구(偈句)를 적었으니, 이러하다.

 

 

서쪽 골에 중의 머리 조아려, 동쪽 봉우리 상덕(上德) 고암(高巖) 앞에 예하노라(반고사磻高寺는 영취산靈鷲山의 서북西北쪽에 있으므로 서쪽 골짜기의 중은 바로 자신을 일컫는 것이다).

가는 티끌 불어 보내 영취산(靈鷲山)에 보태고, 잔 물방울 날려 용연(龍淵)에 던지도다.

 

산 동쪽에 대화강(大和江)이 있는데 이는 곧 중국 대화지(大和池)의 용의 복을 빌기 위해 만들었기 때문에 용연(龍淵)이라 한 것이다. 지통과 원효는 모두 큰 성인(聖人) 이었다. 두 성인이 스승으로 섬겼으니 낭지 스님의 도(道)가 고매함을 알 수 있다.

스님은 일찍이 구름을 타고 중국 청량산(淸凉山)으로 가서 신도들과 함께 강의를 듣고 조금 후에 돌아오곤 했다. 그곳 중들은 그를 이웃에 사는 사람이라고 여겼으나 사는 곳을 알지 못했다.

어느날 여러 중들에게 명령했다. "항상 이 절에 사는 자를 제외하고 다른 절에서 온 중은 각기 사는 곳의 이름난 꽃과 기이한 식물을 가져다가 도량(道場)에 바쳐라." 낭지는 그 이튿날 산중의 기이한 나무 한 가지를 꺽어 가지고 돌아와 바쳤다. 그 곳의 중이 그것을 보고 말했다. "이 나무는 범명(梵名)으로 달리가라 하고 여기서는 혁(赫)이라 한다. 오직 서천축(西天竺)과 해동(海東)의 두 영취산(靈鷲山)에만 있는데 이 두 산은 모두 제 10 법운지(法雲地)로서 보살(菩薩)이 사는 곳이니, 이 사람은 반드시 성자(聖者)일 것이다." 마침내 행색을 살펴 그제야 해동 영취산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스님을 다시 보게 되었고 이름이 안팎에 드러났다. 나라 사람들이 그 암자를 혁목암(赫木庵)이라 불렀는데 지금 혁목사(赫木寺)의 북쭉 산등성이에 옛 절터가 있으니 그 절이 있던 자리이다.

<영취사기(靈鷲寺記)>에 "낭지가 일찍이 말하기를, '이 암자자리는 가섭불(迦葉佛) 때의 절터로서 땅을 파서 등항(燈缸) 두 개를 얻었다'고 하였다. 원성왕(元聖王) 때에는 고승(高僧) 연회(緣會)가 이 산속에 와서 살면서 낭지 스님의 전기(傳記)를 지었다. 이것이 세상에 유행했다."고 기록 되어 있다.

<화엄경(華嚴經)>을 살펴보면 제10 법운지(法雲池)라 했다. 지금 스님이 구름을 탄 것은 대개 부처가 삼지(三指)로 꼽고, 원효가 100몸으로 분신되는 따위인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생각하니 산속에서 수도(修道)한지 100년 동안에,

고매한 이름 일찍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산새의 한가로운 지저귐 막을 길 없어,

구름 타고 오가는 것 속절없이 누설되었네.

 

 

연회도명(緣會逃名), 문수점(文殊岾)

 

고승(高僧) 연회(緣會)는 일찍이 영취산(靈鷲山)에 숨어 살면서 언제나 <연경(蓮經)>을 읽어 보현보살(普賢菩薩)의 관행법(觀行法)을 닦았다. 정원의 연못에는 언제나 연꽃 두 세 떨기가 있어 사시에 시들지 않았다(지금의 영취사靈鷲寺 용장전龍藏殿이 바로 연회緣會의 옛 거처임).

 

국왕 원성왕(元聖王)이 그 상서롭고 기이함을 듣고 그를 불러 국사(國師)를 삼으려 하니 스님이 그 소식을 듣자 암자를 버리고 도망했다. 서쪽 고개 바위 사이를 넘는데 한 노인이 밭을 갈고 있다가 스님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므로 스님이 말했다. "내 들으니 나라에서 잘못 듣고 나를 벼슬로써 얽매려 하므로 피해 가는 것입니다." 노인은 듣고 말했다. "여기에서도 가히 팔 수가 있을 텐데 어째서 수고로이 멀리 팔려고 하십니까. 스님이야말로 이름 팔기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하겠습니다." 연회(緣會)는 그가 자기를 업신여기는 것이라 생각하고, 듣지 않고 마침내 몇 리쯤을 더 갔다. 시냇가에서 한 노파를 만났는데, 스님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므로 연회는 먼저처럼 대답하니, 노파가 말했다. "앞에서 사람을 만났습니까." 연회가 말했다. "한 노인이 있는데 나를 업신여김이 심하기에 불쾌해서 또 오는 것입니다." 노파는 말했다.

"그분이 문수보살이신데, 그분 말을 듣지 않았으니 어찌 하겠습니까." 연회(緣會)는 이 말을 듣자 곧 놀라고 송구스러워 급히 노인에게 되돌아가 머리를 숙여 사과했다. "성인의 말씀을 감히 듣지 않겠습니까. 이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하온데 그 시냇가의 노파는 어떤 사람입니까." 노인이 말했다. "그는 변재천녀(辯才天女)이니라." 말을 마치자 마침내 사라져 버렸다. 연회(緣會)가 이에 암자로 돌아오자, 조금 후에 왕의 사자가 명을 받들고 와서 부르니 연회는 진작 받아야 될 것임을 알고 임금의 명을 받아 대궐로 가니 왕은 그를 국사(國師)로 봉했다.(<승전(僧傳)>에는 헌안왕(憲安王)이 이조왕사(二朝王師)로 삼아 희(熙)라 호(號)하고 감통(感通) 4년에 죽었다고 했으니 원성왕(元聖王)의 연대(年代)와 서로 다르다.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스님이 노인에게 감명받은 곳을 이름하여 문수점(文殊岾)이라 하고, 여인을 만나본 곳을 아니점(阿尼岾)이라 했다.

 

찬(讚)해 말한다.

 

도시에선 어진 이가 오래 숨지 못하는 것,

주머니 속 송곳 끝을 감추기가 어렵네.

뜰 아래 연꽃으로 세상에 나갔지,

운산(雲山)이 깊지 않은 탓은 아닐세.

 

 

혜현구정(惠現求靜)

 

중 혜현(惠現)은 백제 사람이다. 어려서 중이 되어 애써 '뚯을 모아 <법화경(法華經)>을 외는 것으로 업을 삼았으며 부처께 기도하여 복을 청해서 영험한 감응이 실로 많았다. 삼론(三論)을 배우고 도를 닦아서 신명(神明)에 통하였다.

처음에 북부 수덕사(修德寺)에 살았는데 신도가 있으면 불경을 강론하고 없으면 불경을 외었으므로 사방의 먼 곳에서도 그 풍격을 흠모하여 문밖에 신이 가득했다. 차츰 번거로운 것이 싫어서 마침내 강남(江南) 달라산(達拏山)에 가서 살았는데 산이 매우 험준해서 내왕이 힘들고 드물었다.

 

혜현(惠現)은 고요히 앉아 생각을 잊고 산속에서 인생을 마치니 동학(同學)들이 그 시체를 운반하여 석실(石室) 속에 모셔 두었더니 범이 그 유해를 다 먹어 버리고 다만 해골과 혀만 남겨 두었다. 추위와 더위가 세 번 돌아와도 혀는 오히려 붉고 연하였다. 그 후 변해서 자줏빛이 나고 단단하기가 돌과 같았다. 중이나 속인들이 공경하여 이를 석탑(石塔)에 간직했다. 이때 나이 58세였으니 즉 정관(貞觀) 초년이었다. 혜현(惠現)은 중국으로 가서 배운 일이 없고 고요히 물러나 일생을 마쳤으나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지고 전기(傳記)가 씌어져 당나라에서도 그 명성이 높았다.

또 고구려의 중 파약(波若)은 중국 천태산(天太山)에 들어가 지자(智者)의 교관(敎觀)을 받았는데 신이(神異)한 사람으로 산중에 알려졌다가 죽었다. <당승전(唐僧傳)>에도 또한 실려 있는데 자못 영험한 가르침이 많다.

찬(讚)해 말한다.

 

주미(주尾)로 설법(說法)함도 한바탕 수고를 느껴,

지난날 불경 외던 소리 구름 속에 숨었어라.

세간(世間)의 청사(靑史)에 길이 이름을 남겨,

사후(死後)엔 연꽃처럼 혀가 꽃다웠네.

 

 

신충괘관(信忠掛冠)

 

효성왕(曉成王)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어진 선비 신충(信忠)과 더불어 궁정(宮庭)의 잣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면서 일찍이 말하기를 "훗날 만약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거가 될 것이다."라고 하니 신충이 일어나서 절했다. 몇 달 뒤에 효성왕이 왕위에 올라 공신(功臣)들에게 상을 주면서 신충을 잊고 차례에 넣지 않았다. 신충이 원망하여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였더니 나무가 갑자기 말라 버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보내 살펴보게 했더니 노래를 얻어다 바쳤다. 왕은 크게 놀라서 말했다. "정무(政務)가 복잡하고 바빠 각궁(角弓)을 거의 잊을 뻔했구나." 이에 신충을 불러 벼슬을 주니 잣나무가 그제야 다시 살아났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뜰의 잣나무가 가을에 시들지 않았는데 너를 어찌 잊으랴' 하시던 우러러 뵙던 얼굴 계시온데,

달 그림자가 옛 못의 가는 물결 원망하듯이,

얼굴사 바라보니, 누리도 싫은지고.

 

후구(後句)는 없어졌다. 이로써 신충에 대한 총애는 양조(兩朝)에 두터웠었다.

경덕왕(景德王; 왕은 곧 효성왕曉成王의 아우임) 22년 계묘(癸卯)에 신충은 두 친구와 서로 약속하고 벼슬을 버리고 남악(南岳)에 들어갔다. 두 번을 불렀으나 나오지 아니하고 머리 깍고 중이 되었다. 그는 왕을 위하여 단속사(斷俗寺)를 세우고 거기에 살았는데, 평생을 구학(丘壑)에서 마치면서 대왕의 복을 빌기를 원했으므로 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임금의 진영(眞影)을 모셔두었는데 금당 뒷벽에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남쪽에 속휴(俗休)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지금은 와전되어 소화리(小花里)라고 한다(<삼화상전三和尙傳>을 살펴보면 신충봉성사信忠奉聖寺가 있는데 이것과 서로 혼동된다. 따져보면 신문왕神文王 때는 경덕왕景德王과 100여 년이나 되는데, 하물며 신문왕神文王과 신충信忠이 숙세宿世의 인연이 있다는 사실은 이 신충信忠이 아님이 분명하다. 자세히 살펴야 할 일이다).

또 별기(別記)에는 이러하다. 경덕왕 때에 직장(直長) 이준(李俊; <고승전高僧傳>에는 이순李純이라고 하였다)이 일찍이 소원을 빌었더니 나이 50이 되면 중이 되어 절을 세우게 되리라 했다. 천보(天寶) 7년 무자(戊子)에 50세가 되자 조연소사(槽淵小寺)를 고쳐지어 큰 절을 만들고 단속사(斷俗寺)라 하고, 자신도 삭발하고 법명(法名)을 공굉장로(孔宏長老)라 했다. 이준은 절에 거주한 지 20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는 앞의 <삼국사(三國史)>에 실린 것과 같지 않으나 두 가지 설(說)을 다 실어 의심나는 점을 덜고자 한다.

찬(讚)해 말한다.

 

공명(功名)은 다하지 못했는데 귀밑 털이 먼저 세고,

임금의 총애 비록 많으나 한평생이 바쁘도다.

언덕 저 편 산이 자주 꿈 속에 드니,

가서 향화(香火)를 피워 왕의 복을 비오리.

 

 

포산이성(包山二聖)

 

신라 때에 관기(觀機)와 도성(道成) 두 성사(聖師)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함께 포산(包山; 나라 사람들이 소슬산所瑟山이라 함은 범음梵音이니 이는 포包를 이름이다)에 숨어 살았는데, 관기는 남쪽 고개에 암자를 지었고, 도성은 북쪽 굴에 살았다. 서로 10여 리쯤 떨어졌으나, 구름을 헤치고 달을 노래하며 항상 서로 왕래했다. 도성이 관기를 부르고자 하면 산 속의 수목이 모두 남쪽을 향해서 굽혀 서로 영접하는 것 같으므로 관기는 이것을 보고 도성(道成)에게로 갔다. 또 관기가 도성을 맞이하고자 하면 역시 이와 반대로 나무가 모두 북쪽으로 구부러지므로 도성도 관기에게로 가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기를 여러 해를 지났다. 도성은 그가 살고 있는 뒷산 높은 바위 위에 늘 좌선(坐禪)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바위 사이로 몸을 빼쳐 나와서는 온몸을 허공에 날리면서 떠나갔는데,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혹 수창군(壽昌郡; 지금의 수성군壽城郡)에 가서 죽었다는 말도 있다. 관기도 또한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지금 두 성사(聖師)의 이름으로써 그 터를 명명(命名)했는데 모두 유지(遺址)가 있다. 도성암(道成암)은 높이가 두어 길이나 되는데, 후인들이 그 굴 아래에 절을 지었다.

태평흥국(太平興國) 7년 임오(壬午)에 중 성범이 처음으로 이 절에 와서 살았다. 만일미타도랑(萬日彌陀道場)을 열어 50여 년을 부지런히 힘썼는데 여러 번 특이한 상서(祥瑞)가 있었다. 이때 현풍(玄風)의 신도 20여 명이 해마다 결사(結社)하여 향나무를 주워 절에 바쳤는데, 언제나 산에 들어가 향나무를 채취해서 쪼개어 씻어서 발[箔] 위에 펼쳐 두면 그 향나무가 밤에 촛불처럼 빛을 발하였다. 이로부터 고을 사람이 그 향나무에게 보시(布施)하고 빛을 얻은 해라 하여 하례하였다. 이는 두 성사의 영감(靈感)이요 혹은 산신(山神)의 도움이었다. 산신의 이름은 정성천왕(靜聖天王)으로 일찍이 가섭불(迦葉佛) 때에 부처님의 부탁을 받았으니 그 본서(本誓)에 말하기를, 산중에서 1,000명의 출세(出世)를 기다려 남은 과보(果報)를 받겠다고 했다.

지금 산중에 9성(聖)의 유사(遺事)를 기록한 것이 있는데 자세하지는 않으나 9성(聖)은 관기(觀機)ㆍ도성(道成)ㆍ반사(반師)ㆍ첩사(첩師)ㆍ도의(道義; 백암사栢岩寺 터가 있음)ㆍ자양(子陽)ㆍ성범(成梵)ㆍ금물녀(今勿女)ㆍ백우사(白牛師) 들이다.

찬(讚)해 말한다.

 

서로 지나가다 달빛을 밟고 운천(雲泉)을 희롱하던,

두 노인의 풍류(風流) 몇 백 년이 지났는고.

연하(烟霞) 가득한 구령엔 고목(古木)만이 남았는데,

어긋버긋 찬 그림자 서로 맞는 모양일레.

 

반(반)은 음이 반(般)인데 우리말로는 피나무라 하고, 첩(첩)은 음이 첩(牒)인데 우리말로는 갈나무(떡갈나무)라 한다.

이 두 성사(聖師)는 오랫동안 산골에 숨어 지내면서 인간 세상과 사귀지 않고 모두 나뭇잎을 엮어 옷으로 입고 추위와 더위를 겪었으며 습기를 막고 하체를 가릴 뿐이었다. 그래서 반사(반師)ㆍ첩사(첩師)로 호를 삼았던 것인데, 일찍이 들으니 풍악(風岳)에도 이런 이름이 있었다고 한다. 이로써 옛 은자(隱者)들의 운치가 이와 같은 것이 많았음을 알겠으나 다만 답습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내가 일찍이 포산(包山)에 살 때에 두 스님이 남긴 미덕(美德)을 쓴 것이 있기에 이제 여기 아울러 기록한다.

자모(紫茅)와 황정(黃精)으로 배를 채웠고, 입은 옷은 나뭇잎, 누에 치고 베짠 것 아닐세.

찬바람 쏴 쏴 불고 돌은 험한데, 해 저문 숲속으로 나무 해 돌아오네.

밤 깊고 달 밝은데 그 아래 앉았으면, 반신(半身)은 시원히 바람따라 나는 듯.

떨어진 포단(蒲團)에 가로 누워 잠이 들면 꿈 속에도 속세에는 가지 않노라.

운유(雲遊)는 가 버리고 두 암자만 묵었는데, 산사슴만 뛰놀뿐 인적은 드물도다.

 

 

영재우적(永才遇賊)

 

중 영재(永才)는 성품이 익살스럽고 재물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향가(鄕歌)를 잘했다. 만년에 장차 남악(南岳)에 은거하려고 대현령(大峴嶺)에 이르렀을 때 도둑 60여 명을 만났다. 도둑들이 그를 해치려 했으나 영재는 칼날 앞에 섰어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화기롭게 대하였다. 도둑들이 이상히 여겨 그 이름을 물으니 영재라고 대답했다. 도둑들이 평소에 그 이름을 들었으므로 이에 노래를 짓게 했다. 그 가사는 이러하다.

 

제 마음에 형상(形相)을 모르려 하던 날,

멀리 ??[원문에 없는 글자] 지나치고 이제는 숨어서 가고 있네,

오직 그릇된 파계주(破戒主)를 두려워할 짓에 다시 또 돌아가리.

이 칼날이 지나고 나면 좋을 날이 오리니,

아아, 오직 요만한 선(善)은 새 집이 되지 않으리.

 

 

 

도둑들은 그 노래에 감동되어 비단 2필을 그에게 주니 영재는 웃으면서 사양하여 말했다. "재물이 지옥에 가는 근본임을 알고 장차 궁벽한 산중으로 피해 가서 일생을 보내려 하는데 어찌 감히 이것을 받겠는가." 이에 땅에 던지니 도둑들은 다시 그 말에 감동되어 가졌던 칼과 창을 버리고 머리를 깍고 영재의 제자가 되어 함께 지리산(智異山)에 숨어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영재의 나이 거의 90살이었으니 원성대왕(元聖大王)의 시대이다.

찬(讚)해 말한다.

 

지팡이 짚고 산으로 돌아가니 뜻이 한결 깊은데,

비단의 구슬인들 어찌 마음 다스리랴.

녹림(綠林)의 군자(君子)들아 그런 것 주지 말라.

지옥은 다름아닌 재물이 근원이네.

 

 

물계자(勿稽子).

 

제 10대 내해왕(柰解王)이 즉위한 지 17년(임진壬辰)에 보라국(保羅國)ㆍ고자국(古自國; 지금의 고성固城)ㆍ사물국(史勿國; 지금의 사주泗州) 등 여덟 나라가 합세해서 변경을 침범해 왔다. 왕은 태자 나음(내音)과 장군 일벌(一伐)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막게 하니 여덟 나라가 모두 항복했는데 이때 물계자(勿稽子)의 군공(軍功)이 제일이었다. 그러나 태자에게 미움을 받아 그 상을 받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물계자에게, "이번 싸움의 공은 오직 당신뿐인데, 상은 당신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태자가 그대를 미워함을 그대는 원망하는가"하고 묻자, 물계자는 대답하기를, "나라의 임금이 위에 계신데 인신(人臣)인 태자를 어찌 원망하겠소"하니 그 사람이 "그렇다면 이 일을 왕에게 아뢰는 것이 옳지 않겠소"하니, 그는 말하기를, "공을 자랑하고 이름을 다투며 자기를 나타내고 남을 가리는 것은 지사(志士)의 할 바가 아니오. 힘써 때를 기다릴 뿐이오"하였다.

20년 을미(乙未)에 골포국(骨浦國; 지금의 합포合浦) 등 세 나라 왕이 각기 군사를 이끌고 와서 갈화(竭火; 굴불屈弗인 듯하니 지금의 울주蔚州)를 침범하자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려 이를 막으니 세 나라가 모두 패했다. 물계자가 죽인 적병이 수십 급이었으나 사람들은 그의 공을 말하지 않았다. 물계자는 그 아내에게 말했다. "내 들으니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환란을 당해서는 몸을 잊어버리며, 절의(節義)를 지켜 사생(死生)을 돌보지 않는 것을 충이라 하였소. 보라(保羅; 발나發羅인 듯 하니 지금의 나주羅州)와 갈화(竭火)의 싸움은 진실로 나라의 환란이었고 임금의 위태로움이었소. 그러나 나는 일찍이 자기 몸을 잊고 목숨을 바치는 용맹이 없었으니 이것은 불충(不忠)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오. 이미 불충으로써 임금을 섬겨 그 누(累)가 아버님께 미쳤으니 어찌 효라 할 수 있겠소." 이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문고를 메고서 사체산(師체山; 미양未洋)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대나무의 곧은 성벽(性癖)을 슬퍼하고 그것에 비유하여 노래를 짓고,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비겨서 거문고를 타고 곡조를 짓고 하였다. 그 곳에 숨어 살면서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영여사(迎如師)

 

실제사(實際寺)의 중 영여(迎如)는 그 족속과 성씨가 자세치 못하나 덕(德)과 행실(行實)이 모두 높았다. 경덕왕(景德王)이 그를 맞아 공양을 드리려고 사자를 보내서 부르니, 영여는 대궐 안에 들어가 재를 마치고는 돌아가려 했다. 왕은 사자를 시켜 그를 절에까지 모시고 가도록 했다. 그는 절 문에 들어서자 즉시 숨어 버려 있는 곳을 알 수가 없었다. 사자가 와서 아뢰니 왕은 이상히 생각하고 그를 국사(國師)에 추봉(追封)했다. 그 뒤로 또한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는데 지금도 그 절을 국사방(國師房)이라고 부른다.

 

 

포천산(布川山) 5비구(五比丘) 경덕왕대(景德王代)

 

삽량주(삽良州)의 동북쪽 20리 가량 되는 곳에 포천산(布川山)이 있는데 석굴(石窟)이 기이하고 빼어나 마치 사람이 깍아 만든 것 같았다. 성명이 자세치 않은 다섯 비구(比丘)가 있었는데 여기에 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외면서 서방정토(西方淨土)를 구하기 몇십 년에 홀연히 성중(聖衆)이 서쪽으로부터 와서 그들을 맞이했다. 이에 다섯 비구가 각기 연화대에 앉아 하늘로 날아 올라가다가 통도사(通度寺) 문밖에 이르러 머물러 있는데 하늘의 음악이 간간이 들려 왔다. 절의 중이 나와 보니 다섯 비구는 무상고공(無常苦空)의 이치를 설명하고 유해를 벗어 버리더니 큰 광명을 내비치면서 서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들이 유해를 버린 곳에 절의 중이 정자(亭子)를 짓고 이름을 치루(置樓)라 했으니, 지금도 남아있다.

 

 

염불사(念佛師)

 

남산(南山) 동쪽 산기슭에 피리촌(避里村)이 있고, 그 마을에 절이 있는데 피리사(避里寺)라 했다. 그 절에 이상한 중이 있었는데 성명은 말하지 않았다. 항상 아미타불을 외어 그 소리가 성(城) 안에까지 들려서 360방(坊) 17만호(萬戶)에서 그 소리를 듣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소리는 높고 낮음이 없이 낭랑하기 한결같았다. 이로써 그를 이상히 여겨 공경치 않는 이가 없었고, 모두 그를 염불사(念佛師)라 불렀다. 그가 죽은 뒤에 소상(塑像)을 만들어 민장사(敏藏寺) 안에 모시고 그가 본래 살던 피리사를 염불사로 이름을 고쳤다.

이 절 옆에 또 절이 있는데 이름을 양피사(讓避寺)라 했으니 마을 이름을 따서 얻은 이름이다.

 

 

 

 

 

 

삼국유사 제 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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