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선 제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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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선(孝善) 제9
진정사(眞定師) 효선쌍미(孝善雙美)
법사(法師) 진정(眞定)은 신라 사람이다. 속인(俗人)으로 있을 때 군대에 예속되어 있었는데 집이 가난해서 장가를 들지 못했다. 군대 복역의 여가에는 품을 팔아 곡식을 얻어서 홀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집안의 재산이라고는 오지 다리 부러진 솥 하나뿐이었다. 어느날 중이 문간에 와서 절을 지을 쇠붙이를 구하므로 어머니가 솥을 시주했는데 이윽고 진정이 밖에서 돌아오자 어머니는 그 사실을 말하고 또한 아들의 생각이 어떤가를 살피니, 진정이 기쁜 안색을 나타내며 말했다.
"불사(佛事)에 시주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비록 솥이 없더라도 무엇이 걱정이 되겠습니까." 이에 와분(瓦盆)을 솥으로 삼아 음식을 익혀 어머니를 봉양했다.
일찍이 군대에 있을 때 사람들이 의상법사(義湘法師)가 태백산맥에서 설법(說法)을 하여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말을 듣고 금시에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 어머니께 고했다. "효도를 마친 뒤에는 의상법사에게 가서 머리 깍고 도를 배우겠습니다." 어머니는 말했다. "불법(佛法)은 만나기 어렵고, 인생(人生)은 너무나 빠른 것이니, 효도를 마친 후라면 또한 늦지 않겠느냐. 그러니 어찌 내 죽기 전에 네가 불도(佛道)를 아는 것만 하겠느냐. 주저하지 말고 빨리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진정은, "어머님 만년에 오직 제가 옆에 있을 뿐이온데 어찌 버리고 출가할 수 있겠습니까"했다. 어머니는 "아! 나를 위해서 출가를 하지 못한다면 나를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비록 생전에 삼뢰칠정(三牢七鼎)으로 나를 봉양하더라도 어찌 가히 효도가 되겠느냐. 나는 의식(衣食)을 남의 문간에서 얻더라도 또한 가히 천수(天壽)를 누릴 것이니 꼭 내게 효도를 하고자 하면 네 말을 말라"고 하였다. 진정은 오랫동안 깊이 생각하는데 어머니가 즉시 일어나서 쌀자루를 모두 털어 보니 쌀 일곱 되가 있었다. 그날 이 쌀로 밥을 짓고서 어머니는 말했다. "네가 밥을 지어 먹으면서 가자면 더딜까 두려우니 마땅히 내 눈앞에서 그 한 되 밥을 먹고 엿 되 밥은 싸 가지고 빨리 떠나거라." 진정은 흐느껴 울면서 굳이 사양하며 말했다. "어머님을 버리고 출가함이 그 또한 자식된 자로 차마 하기 어려운 일이거늘, 하물며 며칠 동안의 미음거리까지 모두 싸 가지고 떠난다면 천지가 저를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세 번 사양했으나 어머니는 세 번 권했다. 진정은 그 뜻을 어기기 어려워서 길을 떠나 밤낮으로 3일 만에 태백산에 이르러 의상에게 의탁하여 머리 깍고 제자가 되어 이름을 진정이라 했다. 3년 후 어머니의 부고가 오자 진정(眞定)은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선정(禪定)에 들어가 7일 만에 나왔다.
설명하는 이는 말하기를 "추모와 슬픔이 지극하여 거의 견딜 수 없었으므로 정수(定水)로써 슬픔을 씻은 것이다"했다. 혹은 "선정(禪定)으로써 어머니께서 사시는 곳을 관찰하였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이것은 실리(實理)와 같이 해서 명복을 빈 것이다"하였다.
선정(禪定)을 하고 나온 뒤에 그 일을 의상(義湘)에게 고하니 의상은 문도(門徒)를 거느리고 소백산 추동(錐洞)에 가서 초가를 짓고 제자의 무리 3천 명을 모아 약 90일 동안 화엄대전(華嚴大典)을 강론했다. 강론하는 데 따라 문인(門人) 지통(智通)이 그 요지를 뽑아 책 두 권을 만들고 이름을 <추동기(錐洞記)>라 하여 세상에 널리 폈다. 강론을 다 마치고 나니 그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 "나는 이미 하늘에 환생하였다."
대성(大城) 효2세부모(孝二世父母) 신문왕대(神文王代)
모량리(牟梁里; 혹은 정운촌淨雲村이라고도 쓴다)의 가난한 여인 경조(慶祖)에게 아이가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정수리가 평평하여 성(城)과 같았으므로 이름을 대성(大城)이라 했다. 집이 군색하여 살아갈 수가 없어 부자 복안(福安)의 집에 가서 품팔이를 하고, 그 집에서 약간의 밭을 얻어 의식의 자료로 삼았다. 이때 개사(開士) 점개(漸開)가 육륜회(六輪會)를 흥륜사(興輪寺)에서 배풀고자하여 복안의 집에 가서 보시(布施)할 것을 권하니, 복안은 베 50필을 보시하므로 점개는 주문(呪文)을 읽어 축원했다. "단월(檀越)이 보시(布施)하기를 좋아하니 천신(天神)이 항상 지켜 주실 것이며, 한 가지를 보시하면 1만 배를 얻게 되는 것이니 안락하고 수명 장수하게 될 것입니다." 대성이 듣고 뛰어 들어가 그 어미에게 말했다. "제가 문간에 온 스님이 외는 소리를 들었는데 한 가지를 보시하면 1만 배를 얻는다고 합니다. 생각건대 저는 숙선(宿善)이 없어 지금 와서 곤궁한 것이니 이제 또 보시하지 않는다면 내세(來世)에는 더욱 구차할 것입니다. 제가 고용살이로 얻은 밭을 법회(法會)에 보시해서 뒷날의 응보(應報)를 도모하면 어떻겠습니까." 어머니도 좋다고 하므로, 이에 밭을 점개에게 보시했다.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대성은 세상을 떠났는데 이날 밤 국상(國相)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하늘의 외침이 있었다. "모량리 대성이란 아이가 지금 네 집에 태어날 것이다." 집 사람들이 매우 놀라 사람을 시켜 모량리를 조사하게 하니, 대성(大城)이 과연 죽었는데 그날 하늘에서 외치던 때와 같았다. 김문량의 아내는 임신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왼손을 꼭 쥐고 있다가 7일 만에야 폈는데 대성(大城) 두 자를 새긴 금간자(金簡子)가 있었으므로 다시 이름을 대성이라 하고, 그 어미를 집에 모셔 와서 함께 봉양했다.
이미 장성하자 사냥하기를 좋아하더니 어느날 토함산(吐含山)에 올라가 곰 한 마리를 잡고 산 밑 마을에서 잤다. 꿈에 곰이 변해서 귀신이 되어 시비를 걸며 말했다. "네 어찌하여 나를 죽였느냐. 내가 환생하여 너를 잡아먹겠다." 대성이 두려워서 용서해 달라고 청하니 귀신은, "네가 나를 위하여 절을 세워 주겠느냐"하고 말했다. 대성은 그러마고 약속했는데 꿈을 깨자 땀이 흘러 자리를 적셨다.
그 후로는 들에서 사냥하는 것을 금하고 곰을 잡은 자리에 곰을 위해서 장수사(長壽寺)를 세웠다. 그로 인해 마음에 감동되는 바 있어 자비의 원(願)이 더욱 더해 갔다. 이에 이승의 양친을 위해 불국사(佛國寺)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石佛寺)를 세우고, 신림(神琳)ㆍ표훈(表訓) 두 성사(聖師)를 청하여 각각 살게 했다. 아름답고 큰 불상을 설치하여 부모의 양육한 수고를 갚았으니 한몸으로 전세와 현세의 두 부모에게 효도한 것은 옛적에도 또한 드문 일이었다. 그러니 착한 보시의 영험을 가히 믿지 않겠는가.
장차 석불(石佛)을 조각하고자 하여 큰 돌 하나를 다듬어 감개(龕蓋)를 만드는데 돌이 갑자기 세 조각으로 갈라졌다. 대성이 분하게 여기다가 어렴풋이 졸았는데 밤중에 천신(天神)이 내려와 다 만들어 놓고 돌아갔으므로 대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남쪽 고개로 급히 달려가 향나무를 태워 천신을 공양했다. 그래서 그 곳의 이름을 향령(香嶺)이라고 했다. 불국사의 운제(雲梯)와 석탑은 돌과 나무에 조각한 기공(技工)이 동도(東都)의 여러 절 가운데서도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
옛 향전(鄕傳)에 실려 있는 것은 이상과 같다. 그러나 절 안의 기록에는 이렇다. "경덕왕(景德王) 때에 대상(大相) 대성(大城)이 천보(天寶) 10년 신묘(辛卯)에 불국사를 짓기 시작했다. 혜공왕(惠恭王) 때를 거쳐 대력(大歷) 9년 갑인(甲寅) 12월 2일에 대성이 죽자, 나라에서 이를 완성시켰다. 처음에 유가교(瑜跏敎)의 고승(高僧) 항마(降魔)를 청해다가 이 절에 거주하게 했고 이를 계승해서 지금에 이르렀다." 이렇게 고전(古傳)과 같지 않으니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찬(讚)해 말한다.
모량(牟梁)에 봄이 지니 삼무(三畝)의 밭을 보시하고,
향령(香嶺)에 가을이 오니 만금(萬金)을 거두었다.
어머니는 백 년 사이 가난과 부귀(富貴)를 겪었는데,
귀정(槐庭)은 한 꿈 사이에 이세(二世)를 오갔구나.
향득사지(向得舍知) 할고공친(割股供親) 경덕왕대(景德王代)
웅천주(熊川州)에 향득(向得)이란 사지(舍知)가 있었다. 흉년이 들어 그 아버지가 거의 굶어 죽게 되자 항득은 다리의 살을 베어 봉양했다. 고을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자세히 상주(上奏)하자 경덕왕(景德王)은 곡식 500석을 상으로 하사했다.
손순매아(孫順埋兒) 흥덕왕대(興德王代)
손순(孫順; 고본古本에는 손순孫舜이라고 했다)은 모량리(牟梁里) 사림이니 아버지는 학산(鶴山)이다. 아버지가 죽자 아내와 함께 남의 집에 품을 팔아 양식을 얻어 늙은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어머니의 이름은 운오(運烏)였다. 손순에게는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항상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니, 손순은 민망히 여겨 그 아내에게 말했다. "아이는 다시 얻을 수가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구하기 어렵소. 그런데 아이가 어머님의 음식을 빼앗아 먹어서 어머님은 굶주림이 심하시니 이 아이를 땅에 묻어서 어머님 배를 부르게 해드려야 겠소." 이에 아이를 업고 취산(醉山; 이산은 모량리牟梁里 서북쪽에 있다) 북쪽 들에 가서 땅을 파다가 이상한 석종(石鐘)을 얻었다. 부부는 놀라고 괴이히 여겨 잠깐 나무 위에 걸어 놓고 시험삼아 두드렸더니 그 소리가 은은해서 들을 만하다.
아내가 말했다. "이상한 물건을 얻은 것은 필경 이 아이의 복인 듯싶습니다. 그러니 이 아이를 묻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남편도 이 말을 옳게 여겨 아이와 석종(石鐘)을 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종을 들보에 매달고 두드렸더니 그 소리가 대궐까지 들렸다.
흥덕왕(興德王)이 이 소리를 듣고 좌우를 보고 말했다. "서쪽 들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나는데 맑고도 멀리 들리는 것이 보통 종소리가 아니니 빨리 가서 조사해 보라." 왕의 사자(使者)가 그 집에 가서 조사해 보고 그 사실을 자세히 아뢰니 왕은 말했다. "옛날 곽거(郭巨)가 아들을 땅에 묻자 하늘에서 금솥을 내렸더니, 이번에는 손순이 그 아이를 묻자 땅 속에서 석종이 솟아나왔으니 전세(前世)의 효도와 후세의 효도를 천지가 함께 보시는 것이로구나." 이에 집 한 채를 내리고 해마다 벼 50석을 주어 순후한 효성을 숭상했다. 이에 손순은 예전에 살던 집을 희사해서 절로 삼아 홍효사(弘孝寺)라 하고 석종을 모셔 두었다.
진성왕(眞聖王) 때에 후백제의 횡포한 도둑이 그 마을에 쳐들어와서 종은 없어지고 절만 남아 있다. 그 종은 얻은 땅을 완호평(完乎坪)이라 했는데 지금은 잘못 전하여 지량평(枝良坪)이라고 한다.
빈녀양모(貧女養母)
효종랑(孝宗郞)이 남산(南山) 포석정(포石亭; 혹은 삼화술三花述이라고도 했다)에서 놀고자 하자 문객(門客)들이 모두 급히 달려왔으나, 오직 두 사람만이 뒤늦게 오므로 효종랑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들이 대답했다. "분황사(芬皇寺) 동쪽 마을에 여인이 있는데 나이는 20세 안팎이었습니다. 그는 눈이 먼 어머니를 껴안고 서로 통곡하므로 같은 마을 사람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말하기를 '이 여자는 집이 가난해서 빌어다가 어머니를 봉양한 지가 이제 여러 해가 되었는데 마침 흉년이 들어 걸식해다가 살리기도 어렵게 되어 이에 남의 집에 가서 품을 팔아 곡식 30석을 얻어서 주인집에 맡겨 놓고 일을 해왔습니다. 날이 저물면 쌀을 가지고 집에 와서 밥을 지어 먹고 어머니와 같이 잠을 자고, 새벽이면 주인 집에 가서 일을 했습니다. 이렇게 한 지 며칠이 되었는데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전일에 강비(糠粃)를 먹을 때는 마음이 편하더니 요새 쌀밥을 먹으니 창자를 찌르는 것 같아 마음이 편안치 못하니 어찌된 일이냐고 했습니다. 그 여인이 사실대로 말했더니 어머니는 통곡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여인은 자기가 다만 어머니의 구복(口腹)의 봉양만을 하고 색난(色難)을 하지 못함을 탄식하여 서로 껴안고 울고 있는 것이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구경하느라고 이렇게 늦었습니다." 효종랑은 이 말을 듣고 측은해하여 곡식 100석을 보냈다. 낭의 부모도 또한 옷 한 벌을 보냈으며, 수많은 낭(郎)의 무리들도 곡식 1,000석을 거두어 보내주었다.
이 일이 왕에게 알려지자 그 때 진성왕(眞聖王)은 곡식 500석과 집 한 채를 내려 주고 또 군사들을 보내서 그 집을 호위해서 도둑을 막도록 했다. 또 그 마을을 표창해서 효양리(孝養里)라 했다. 그 뒤에 그 집을 희사해서 절을 삼고 양존사(兩尊寺)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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