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 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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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神呪) 제 6
밀본최사(密本최邪)
선덕왕(善德王) 덕만(德慢)이 병이 들어 오랫동안 낫지 않자, 흥륜사(興輪寺)의 승려 법척(法척)이 임금의 부름을 받아 병을 치료했으나 오래 되어도 효력이 없었다. 이때 밀본법사(密本法師)의 덕행(德行)이 나라 안에 소문이 퍼져서 좌우 신하들이 바꾸기를 청했다. 왕은 그를 궁중으로 불러들이니 밀본은 신장(宸仗) 밖에서 약사경(藥師經)을 읽었다. 경을 다 읽고 나자 가졌던 육환장(六環杖)이 침실 안으로 날아 들어가더니 늙은 여우 한 마리와 중 법척(法척)을 찔러서 뜰 아래에 거꾸로 내던지니 왕의 병은 이내 나았다. 이때 밀본의 이마 위에 오색의 신비스러운 빛이 비쳐 보는 사람이 모두 놀랐다.
또 승상(丞相) 김양도(金良圖)가 어렸을 때 갑자기 입이 붙고 몸이 굳어져서 말도 못하고 수족도 놀리지 못했다. 항상 보면, 큰 귀신 하나가 작은 귀신을 데리고 와서 집 안에 있는 음식을 모조리 맛보는 것이었다. 혹 무당이 와서 제사를 지내면 귀신들의 무리가 서로 다투어가며 욕했다. 양도가 귀신들에게 물러가라고 명하고 싶었지만 입이 붙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이름은 전하지 않는 법류사(法流寺)의 중을 청해다가 불경을 외게 했더니, 큰 귀신이 작은 귀신에게 명하여 쇠망치로 승려의 머리를 때려 땅에 넘어뜨리니 피를 토하고 죽었다. 며칠 후에 사자(使者)를 보내서 밀본을 맞아오도록 하니 사자가 돌아와서 말한다. "밀본법사가 우리 청을 받아들여 장차 오신다고 했습니다." 여러 귀신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얼굴빛이 변하니 작은 귀신이 말한다. "법사가 오면 이롭지 못할 것이니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큰 귀신은 거만을 부리고 태연스럽게 말한다. "무슨 해로운 일이 있겠느냐." 이윽고 사방에서 대력신(大力神)이 온 몸에 쇠갑옷과 긴 창으로 무장하고 나타나더니 모든 귀신들을 잡아 묶어 가지고 갔다. 다음에 무수한 천신(天神)들이 둘러서서 기다렸다. 조금 있더니 밀본이 도착하여, 경문(經文)을 펴기도 전에 양도의 병은 나아서 말도 하고 몸도 움직였다. 그리하여 지나간 사실을 자세히 말했다. 양도는 이 일로 해서 불교를 독실히 믿어 한평생 게을리하지 않았다. 흥륜사(興輪寺) 오당(吳堂)의 주불(主佛)인 미타존상(彌타尊像)과 좌우 보살(菩薩)을 소상(塑像)으로 만들고, 또 그 당(堂)에 금으로 벽화를 그렸다.
밀본은 일찍이 금곡사(金谷寺)에서 살았었다. 또 김유신(金庾信)은 일찍이 늙은 거사(居士) 한 사람과 교분(交分)이 두터웠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 때 유신공(庾信公)의 친척인 수천(秀天)이 오랫동안 나쁜 병에 걸렸으므로 공이 거사를 보내서 진찰해 보도록 했다. 때마침 수천의 친구 인혜사(因惠師)라는 이가 중악(中岳)에서 찾아왔다가 거사를 보더니 업신여겨 말했다. "그대의 형상과 태도를 보니 간사하고 아첨하는 사람인데 어찌 남의 병을 고치겠는가." 이에 거사는 말했다.
"나는 김공(金公)의 명을 받고 마지못해서 왔을 뿐이오." 이에 인혜(因惠)가 말했다.
"그대는 내 신통력을 좀 보라" 하더니 향로를 받들어 향을 피우고는 주문을 외니, 이윽고 오색 구름이 이미 위를 두르고 천화(天花)가 흩어져 떨어졌다. 거사가 말한다. "스님의 신통력은 불가사의합니다. 저에게도 역시 변변치 못한 기술이 있어서 시험해 보고 싶으니, 청컨대 스님께서는 잠깐 동안 제 앞에 서 계십시오." 인혜는 하라는 대로 했다. 거사가 손가락을 한번 튀기자 인혜는 공중으로 거꾸로 올라가는데 그 높이가 한 길이나 된다. 한참 만에야 서서히 거꾸로 내려와 머리가 땅에 박힌 채 말뚝과 같이 우뚝 섰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밀고 잡아당겨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거사가 그곳에서 나가 버리니, 인혜는 거꾸로 박힌 채 밤을 새웠다. 이틑날 수천이 사람을 시켜 이 사실을 김공(金公)에게 알리니, 김공은 거사에게 가서 인혜를 풀어주게 했다. 그 뒤로 인혜는 다시는 재주를 부리는 체하지 않았다.
찬(讚)해 말한다.
붉은빛 자줏빛이 분분해 몇 번이나 주색(朱色)을 어지럽히니,
슬프다, 어목(漁目)도 어리석은 사람 속였네.
거사가 손가락 가볍게 튀기지 않았더면,
건상(巾箱)속에 무부(무부)를 얼마나 담았을까.
혜통황룡(惠通降龍)
중 혜통(惠通)은 그 씨족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백의(白衣)로 있을 때 그의 집은 남산 서쪽 기슭인 은천동(銀川洞) 어귀(지금의 남간사南澗寺 동리東里)에 있었다. 어느날 집 동쪽 시내에서 놀다가 수달[獺] 한 마리를 잡아 죽이고 그 뼈를 동산 안에 버렸다. 그런데 이튿날 새벽에 그 뼈가 없어졌으므로 핏자국을 따라 찾아가니 뼈는 전에 살던 굴로 되돌아가서 새끼 다섯 마리를 안고 쭈그리고 있다. 혜통이 바라보고 한참이나 놀라고 이상히 여겨 감탄하고 망설이다가, 마침내 속세를 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혜통으로 바꿨다.
당나라에 가서 무외삼장(無畏三藏)을 뵙고 배우기를 청하니 삼장이, "우이(우夷)의 사람이 어떻게 법기(法器)가 될 수 있겠는가" 하고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러나 혜통은 쉽게 물러가지 않고 3년 동안이나 부지런히 섬겼다. 그래도 무외(無畏)가 허락하지 않자 혜통은 이에 분하고 애가 타서 뜰에 서서 불동이를 머리에 이고 있었다. 조금 후에 정수리가 터지는데 소리가 천둥과 같았다. 삼장(三藏)이 이 소리를 듣고 와서 보더니 물동이를 치우고 손가락으로 터진 곳을 만지면서 신주(神呪)를 외니 상처는 이내 아물어서 전과 같이 되었다. 그러나 흉터가 생겨 왕자(王字) 무늬와 같으므로 왕화상(王和尙)이라고 하여 그의 인품을 깊이 인정하여 인결(印訣)을 전했다.
이때 당나라 황실에서는 공주가 병이 있어 고종(高宗)은 삼장에게 치료해 달라고 청하자 삼장은 자기 대신 혜통을 천거했다. 혜통이 가르침을 받고 딴 곳에 거처하면서 횐 콩 한 말을 은그릇 속에 넣고 주문을 외니, 그 콩이 변해서 횐 갑옷을 입은 신병(新兵)이 되어 병마(病魔)들을 쫓았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에 다시 검은 콩 한 말을 금그릇에 넣고 주문을 외니, 콩이 변해서 검은 갑옷 입은 신병(新兵)이 되었다. 두 빛의 신병이 함께 병마를 쫓으니 갑자기 교룡(蛟龍)이 나와 달아나고 공주의 병이 나았다. 용은 혜통이 자기를 쫓은 것을 원망하여 신라 문잉림(文仍林)에 와서 인명을 몹시 해쳤다 당시 정공(鄭恭)이 당에 사신으로 갔다가 혜통에게 말했다. "스님이 쫓아낸 독룡(毒龍)이 본국에 와서 해(害)가 심하니 빨리 가서 없애 주십시오." 혜통은 이에 정공과 함께 인덕(麟德) 2년 을축(乙丑; 665)에 본국에 돌아와 용을 쫓아 버렸다. 용은 또 정공을 원망하여 이번에는 버드나무로 변해서 정씨의 문밖에 우뚝 섰다. 정공은 알지 못하고 다만 그 무성한 것만 좋아하여 무척 사랑했다. 신문왕(神文王)이 죽고 효소왕(孝昭王)이 즉위하여 산릉(山陵)을 닦고 장사지내는 길을 만드는데, 정씨 집 버드나무가 길을 가로막고 있어 유사(有司)가 베어 버리려 하자 정공이 노해서 말했다. "차라리 내 머리를 벨지언정 이 나무는 베지 못한다." 유사가 이 말을 왕에게 아뢰니 왕은 몹시 노해서 법관(法官)에게 명령했다. "정공이 왕화상의 신술(神術)만 믿고 장차 불손(不遜)한 일을 도모하려 하여 왕명을 업신여기고 거역하여, 차라리 제 머리를 베라고 하니 마땅히 제가 좋아하는 대로 할 것이다." 이리하여 그를 베어 죽이고 그 집을 흙으로 묻어 버리고 나서 조정에서 의론했다. "왕화상이 정공과 매우 친하여 반드시 연루(連累)된 혐의가 있을 것이니 마땅히 먼저 없애야 할 것입니다." 이에 갑옷 입은 병사를 시켜 그를 잡게 했다.
혜통이 왕망사(王望寺)에 있다가 갑옷 입은 병사가 오는 것을 보고 지붕에 올라가서 사기 병과 붉은 먹을 찍은 붓을 가지고 그들에게 소리쳤다. "내가 하는 것을 보라"하고 병의 목에다 한 획을 그으면서 말한다." 너희들은 모두 너희들의 목을 보라." 목을 보니 모두 붉은 획이 그어져 있으므로 서로 보면서 놀랐다. 혜통은 또 소리친다. "내가 만일 이 병의 목을 자르면 너희들의 목도 잘려질 것이다. 어찌 하려느냐." 병사들이 달려와서 붉은 획이 그어진 자기네 목을 왕에게 보이니 왕이 말하기를, "화상의 신통력을 어찌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겠느냐" 하고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왕녀(王女)가 갑자기 병이 나자 왕은 혜통을 불러서 치료하게 했더니 병이 나았으므로 왕은 크게 기뻐했다. 혜통은 이것을 보고 말했다. "정공은 독룡의 해를 입어서 죄없이 국가의 형벌을 받았습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마음 속으로 후회했다. 이에 정공의 처자에게는 죄를 면하게 하고 혜통을 국사(國師)로 삼았다. 용은 이미 정공에게 원수를 갚자 기장산(機張山)에 가서 웅신(熊神)이 되어 해독을 끼치는 것이 더욱 심하여 백성들이 몹시 괴로워했다. 혜통은 산속에 이르러 용을 달래어 불살계(不殺戒)를 주니 그제야 웅신의 해독이 그쳤다.
처음에 신문왕이 등창이 나서 혜통에게 치료해 주기를 청하므로 혜통이 와서 주문을 외니, 그 자리에서 병이 나았다. 이에 혜통이 말했다. "폐하께서 전생에 재상의 몸으로 장인(臧人) 신충(信忠)이란 사람을 잘못 판결하여 종으로 삼으셨으므로 신충이 원한을 품고 윤회환생(輪廻還生)할 때마다 보복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등창도 역시 신충의 탈이오니 마땅히 신충을 위해서 절을 세워 그 명복을 빌어서 원한을 풀게 하십시오." 왕이 옳다고 생각하여 절을 세워 이름을 신충봉성사(信忠奉聖寺)라고 했다. 절이 다 이루어지자 공중에서 노래하는 소리가 났다. "왕이 절을 지어 주셨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나 하늘에 태어났으니, 원한은 이미 풀렸습니다."(어떤 책에는 이 사실이 진표眞表의 전기傳記에 실려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또 노래부른 곳에 절원당(折怨堂)을 지었는데 그 당(堂)과 절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보다 앞서 밀본 법사(密本法師)의 뒤에 고승(高僧) 명랑(明郞)이 있었다. 용궁(龍宮)에 들어가서 신인(神人; 범서梵書엔 문두루文豆蔞라고 했는데, 여기에는 신인神人이라고 했다)을 얻어 신유림(神遊林; 지금의 천왕사天王寺)를 처음 세우고, 여러 번 이웃 나라가 침입해 온 것을 기도로 물리쳤다. 이에 화상은 무외삼장(無畏三藏)의 골자(骨子)를 전하고, 속세를 두루 다니면서 사람을 구제하고 만물을 감화(感化)시켰다, 또 숙명(宿明)의 밝은 지혜로 절을 세워 원망을 풀게 하니 밀교(密敎)의 풍도가 이에 크게 떨쳤다. 천마산(天磨山) 총지암(總持암)과 무악(毋岳)의 주석원(呪錫院) 등은 모두 그 지류(支流)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혜통의 세속 이름은 존승각간(尊勝角干)이라고 하는데 각간은 곧 신라의 재상과 같은 높은 벼슬이니, 혜통이 벼슬을 지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또 어떤 사람은 시랑(豺狼)을 쏘아 잡았다고 하지만 모두 자세히 알 수 없다.
찬(讚)해 말한다.
산도(山桃)와 계행(溪杏)이 울타리에 비쳤는데,
한 지경 봄이 깊어 두 언덕 꽃이 피었네.
혜통이 수달을 한가로이 잡은 때문에,
마귀(魔鬼)와 외도(外道)를 모두 서울에서 멀리했네.
명랑신인(明朗神印)
〈금광사(金光寺) 본기(本記)〉를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법사 명랑(明朗)이 신라에 태어나서 당나라도 건너가 도를 배우고 돌아오는데 바다의 용의 청에 의해, 용궁(龍宮)에 들어가 비법(秘法)을 전하고, 황금 1,000냥(혹은 1,000근 이라고도 함)을 보시(布施)받아 가지고 땅 밑을 잠행(潛行)하여 자기 집 우물 밑에서 솟아나왔다. 이에 자기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고 용왕(龍王)이 보시한 황금으로 탑과 불상(佛像)을 장식하니 유난히 광채가 났다. 그런 때문에 절 이름을 금광사(金光寺)라고 했다."(〈승전僧傳〉에는 금우사金羽寺라고 했지만 잘못이다)
법사의 이름은 명랑이요, 자는 국육(國育)이며, 신라 사간(沙干) 재량(才良)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남간부인(南澗夫人)으로서 혹 법승랑(法乘娘)이라고도 하는데, 소판(蘇判) 무림(戊林)의 딸 김씨(金氏)로서 즉 자장(慈藏)의 누이 동생이다. 재량(才良)에게 세 아들이 있는데, 맏이는 국교대덕(國敎大德)이요, 다음은 의안대덕(義安大德)이며, 법사는 막내다. 처음에 그 어머니가 꿈에 푸른빛이 나는 구슬을 입에 삼기고 태기가 있었다.
신라 선덕왕(善德王) 원년(632)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정관(貞觀) 9년 을미(乙未; 635)에 돌아왔다. 총장(總章) 원년 무신(戊辰; 668)에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대병을 거느리고 신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 남은 군사를 백제(百濟)에 머물러 두고 장차 신라를 쳐서 멸망시키려 했다. 신라 사람들이 이것을 알고 군사를 내어 이를 막았다. 당나라 고종(高宗)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설방(薛邦)에게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장차 신라를 치려 했다. 문무왕(文武王)이 이것을 듣고 두려워하여 법사를 청해다가 비법을 써서 빌어서 이를 물리치게 했다(이 사실은 문무왕전文武王傳속에 있다). 이 때문에 그는 신인종(神印宗)의 시조가 되었다.
우리 태조(太祖)가 나라를 세울 때 또한 해적이 와서 침범하니, 이에 안혜(安惠)ㆍ낭융(朗融)의 후예인 광학(廣學)ㆍ대연(大緣) 등 두 고승(高僧)을 청해다가 법을 만들어 해적을 물리쳐 진압했으니, 모두 명랑의 계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법사를 합하여 위로 용수(龍樹)에 이르기까지를 구조(九祖)로 삼았다. (본사기本寺記에는 삼사三師가 율조律祖가 되었다고 했으나 자세히 알 수 없다) 또 태조가 글들을 위해 현성사(現聖寺)를 세워 한 종파(宗派)의 근본을 삼았다.
또 신라 서울 동남쪽 20여 리 되는 곳에 원원사(遠原寺)가 있으니 세상에서는 이렇게 전한다. "이 절은 안혜 등 네 대덕(大德)이 김유신(金庾信)ㆍ김의원(金義元)ㆍ김술종(金述宗) 등과 함께 발원하여 세운 것이며, 네 대덕의 유골이 모두 절의 동쪽 봉우리에 묻혔으므로 사령산(四靈山) 조사암(祖師岩)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네 고승은 모두 신라 때의 유명한 중이라 하겠다.
돌백사(돌白寺) 주첩주각(柱貼注脚)에 씌어 있는 것을 상고하여 보면 이러하다. 경주(慶州) 호장(戶長) 거천(巨川)의 어머니는 하지녀(河之女)이고, 이 하지녀의 어머니는 명주녀(明珠女)이다. 명주녀의 어머니인 적리녀(積利女)의 아들은 광학대덕(廣學大德)과 대연삼중(大緣三重; 예전의 이름은 선회善會)이다. 이들 형제 두 사람이 모두 신인종(神印宗)에 귀의했다. 장흥(長興) 2년 신묘(辛卯; 931)에 태조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서 임금의 행차를 따라다니며 분향하고 수도(修道)하니, 그 수고로움을 상 주어 두 사람의 부모의 기일보(忌日寶)로 전답 몇 결(結)을 돌백사에 주었다 한다. 이렇게 보면 광학ㆍ대연 두 사람은 성조(聖祖)를 따라 서울로 들어왔으며 안사(安師) 등은 김유신 등과 함께 원원사를 세운 사람이라 하겠다. 광학 등 두 사람의 뼈가 또 여기에 와서 안치(安置)되었을 뿐이고, 네 고승이 모두 원원사를 세웠다는 것은 아니며, 또 성조(聖祖)를 따라온 것도 아니다. 이것은 좀더 자세히 알아야 할 것이다.
삼국유사 제 5권
감통 제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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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통(感通) 제7
선도성모(仙桃聖母) 수희불사(隨喜佛事)
진평왕(眞平王) 때 지혜(智惠)라는 비구니(比丘尼)가 있어 어진 행실이 많았다. 안흥사(安興寺)에 살았는데 새로 불전(佛殿)을 수리하려 했지만 힘이 모자랐다. 어느날 꿈에 모양이 아름답고 구슬로 머리를 장식한 한 선녀가 와서 그를 위로해 말했다. "나는 바로 선도산(仙桃山) 신모(神母)인데 네게 불전을 수리하려 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여 금 10근을 주어 돕고자 한다. 내가 있는 자리 밑에서 금을 꺼내서 주존(主尊) 삼상(三像)을 장식하고 벽 위에는 오삼불(五三佛) 육류성중(六類聖衆) 및 모든 천신(天神)과 오악(五岳)의 신군(神君; 신라 때의 오악五岳은 東의 토함산吐含山, 南의 지리산智異山, 西의 계룡산鷄龍山, 北의 태백산太伯山, 중앙中央의 부악父岳, 또는 공산公山이다)을 그리고, 해마다 봄과 가을의 10일에 남녀 신도들을 많이 모아 널리 모든 함령(含靈)을 위해서 점찰법회(占擦法會)를 베푸는 것으로써 일정한 규정을 삼도록 하라(본조本朝 굴암지屈弗池의 용이 황제皇帝의 꿈에 나타나 영취산靈鷲山에 낙사도장樂師道場을 영구히 열어 바닷길이 편안할 것을 청한 일이 있는데 그 일도 역시 이와 같다).
지혜가 놀라 꿈에서 깨어 무리들을 데리고 신사(神祀) 자리 밑에 가서, 황금 160냥을 파내어 불전 수리하는 일을 완성했으니, 이는 모두 신모(神母)가 시키는 대로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 사적은 남아 있지만 법사(法事)는 폐지되었다. 신모는 본래 중국 제실(帝室)의 딸이며, 이름은 사소(娑蘇)였다. 일찍이 신선의 술법(術法)을 배워 해동(海東)에 와서 머물러 오랫동안 돌아 가지 않았다. 이에 부황(父皇)이 소리개 발에 매달아 그에게 보낸 편지에 말했다. "소리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지으라." 사소는 편지를 보고 소리개를 놓아 보내니, 이 선도산(仙桃山)으로 날아와서 멈추므로 드디어 거기에 살아 지선(地仙)이 되었다. 때문에 산 이름은 서연산(西鳶山)이라고 했다. 신모는 오랫동안 이 산에서 살면서 나라를 진호(鎭護)하니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매우 많았다. 때문에 나라가 세워진 뒤로 항상 삼사(三祀)의 하나로 삼았고, 그 차례도 여러 망(望)의 위에 있었다.
제 54대 경명왕(景明王)이 매사냥을 좋아하여 일찍이 여기에 올라가서 매를 놓았다가 잃어버렸다. 이 일로 해서 신모에게 기도했다. "만일 매를 찾게 된다면 마땅히 성모(聖母)께 작(爵)을 봉해 드리겠습니다." 이윽고 매가 날아와서 책상 위에 앉으므로 성모를 대왕(大王)에 봉작(封爵)하였다. 그가 처음 신한(辰韓)에 와서 성자(聖子)를 낳아 동국(東國)의 처음 임금이 되었으니 필경 혁거세(赫居世)와 알영(閼英)의 두 성군(聖君)을 낳았을 것이다. 때문에 계룡(鷄龍)ㆍ계림(鷄林)ㆍ백마(白馬) 등으로 일컬으니 이는 닭이 서쪽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성모는 일찍이 제천(諸天)의 선녀에게 비단을 짜게 해서 붉은빛으로 물들여 조복(朝服)을 만들어 남편에게 주었으니, 나라 사람들은 이 때문에 비로소 신비스러운 영험을 알게 되었다.
또 <국사(國史)>에 보면, 사신(史臣)이 말했다. "김부식(金富軾)이 정화(政和) 연간에 일찍이 사신으로 송나라에 들어가 우신관(佑神館)에 나갔더니 한 당(堂)에 여선(女仙)의 상(像)이 모셔져 있었다. 관반학사(館伴學士) 왕보(王보)가 말하기를, '이것은 귀국의 신인데 공은 알고 있습니까' 했다. 그리고 이어 말하기를, '옛날에 어떤 중국 제실(帝室)의 딸이 바다를 건너 진한(辰韓)으로 가서 아들을 낳았더니 그가 해동의 시조가 되었고, 또 그 여인은 지선(地仙)이 되어 길이 선도산(仙桃山)에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여인의 상입니다.' 했다."
또 송나라 사신 왕양(王襄)이 우리 조정에 와서 동신성모(東神聖母)를 제사지낼 때에 그 제문에, "어진 사람을 낳아 비로소 나라를 세웠다."는 글귀가 있었다. 성모가 이제 황금을 주어 부처를 받들게 하고, 중생을 위해서 향화법회(香火法會)를 열어 진량(津梁)을 만들었으니 어찌 다만 오래 사는 술법(術法)만 배워서 저 아득한 속에만 사로잡힐 것이랴.
찬(讚)해 말한다.
서연산(西鳶山)에 와서 몇십 년이나 지냈는가.
천제(天帝)의 여인 불러 예상(霓裳)을 짰었네.
길이 사는 법도 이상한 일 없지 않았는데,
금선(金仙) 뵙고 옥황(玉皇)이 되었네.
욱면비 염불 서승(郁面婢 念佛 西昇)
경덕왕(景德王) 때 강주(康州; 지금의 진주晉州, 또는 강주康州라고도 하는데, 그렇다면 지금의 순안順安이다)의 남자 신도 수십 명이 뜻을 서방(西方)에 구해서 고을의 경계에 미타사(彌陀寺)를 세우고 만일을 기약하여 계(契)를 만들었다. 이때 아간(阿干) 귀진(貴珍)의 집에 계집종 하나가 있었는데 이름을 욱면(郁面)이라 했다. 그 주인을 따라 절에 가서 마당에 서서 중을 따라 염불(念佛)했다. 그 주인은 그녀가 그 직분에 맞지 않는 짓을 하는 것을 미워하여 매양 곡식 두 섬을 주어 하룻밤 동안에 다 찧으라 했더니, 계집종은 초저녁에 다 찧어 놓고 절에 가서 염불하여(속담에 말하기를, "내 일이 바빠서 주인 집 방아 바삐 찧는다" 한 것은 대개 여기에서 나온 말인 듯싶다)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녀는 뜰 좌우에 길다란 말뚝을 세워 두 손바닥을 뚫어 노끈으로 꿰어 말뚝 위에 메고는 합장(合掌) 하면서 좌우로 흔들어 자기를 격려했다. 그 때 하늘에서 부르는데, "욱면랑(郁面娘)은 당(堂)에 들어가 염불하라" 하였다. 절의 중들이 듣고 계집종을 권해서 당에 들어가 전처럼 정진(精進)하게 했다. 얼마 안 되어 하늘의 음악소리가 서쪽에서 들려 오더니 욱면은 몸을 솟구쳐 집 대들보를 뚫고 올라가 서쪽으로 교외(郊外)에 가더니 해골(骸骨)을 버리고 부처의 몸으로 변하여 연화대(蓮化臺)에 앉으서 큰 광명을 발사하면서 서서히 가버리니, 음악소리는 한참 동안 하늘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 당(堂)에는 지금도 구멍이 뚫어진 곳이 있다고 한다(이상은 향전鄕傳에 있는 말이다).
<승전(僧傳)>을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중 팔진(八珍)은 관음보살(觀音菩薩)의 현신(現身)으로서 무리들을 모으니 1,000명이나 되었는데, 두 패로 나누어 한 패는 노력을 다했고, 한 패는 정성껏 도를 닦았다. 그 노력하는 무리들 중에 일을 맡아 보던 이가 계(戒)를 얻지 못해서 축생도(畜生道)에 떨어져서 부석사(浮石寺)의 소가 되었다. 그 소가 어느날 불경을 등에 싣고 가다가 불경의 힘을 입어 아간(阿干) 귀진(貴珍)의 집 계집종으로 태어나서 이름을 욱면(郁面)이라고 했다. 욱면이 일이 있어 하가산(下柯山)에 갔다가 꿈에 감응해서 드디어 불도를 닦을 마음이 생겼다. 아간의 집은 혜숙법사(惠宿法師)가 세운 미타사(彌陀寺)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다. 아간이 항상 그 절에 가서 염불하는데 욱면도 따라 뜰에서 염불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기를 9년, 을미년(乙未年) 정월 21일에 부처에게 예배하다가 집의 대들보를 뚫고 올라가 소백산(小伯山)에 이르러 신 한 짝을 떨어뜨려 그곳에 보리사(菩提寺)를 짓고 산 밑에 이르러 그 육신(肉身)을 버렸으므로 그곳에 제2 보리사를 짓고 그 전당(殿堂)에 방(榜)을 써붙여, '욱면(욱面) 등천지전(登天之殿)'이라 했다. 집 마루에 뚫린 구멍이 열 아름이나 되었는데 아무리 폭우(暴雨)나 세찬 눈이 내려도 집 안은 젖지 않았다. 그 뒤에 호사자(好事者)들이 금탑(金塔) 하나를 만들어 그 구멍에 맞추어서 승진(承塵) 위에 모셔 그 이상한 사적을 기록했으니, 지금도 그 방(榜)과 탑(塔)이 아직 남아 있다. 욱면(욱面)이 간 뒤에 귀진도 또한 그 집이 신이(神異)한 사람이 의탁해 살던 곳이라 해서,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어 법왕사(法王寺)라 하고 토지를 바쳤는데 오랜 뒤에 절은 없어지고 빈 터만 남았다.
대사(大師) 회경(懷鏡)이 승선(承宣) 유석(劉碩), 소경(小卿) 이원장(李元長)과 함께 발원(發願)하여 절을 중건(重建)했는데, 회경이 친히 토목 일을 맡았다. 재목을 처음 운반할 때, 노부(老父)가 삼으로 삼은 신과 칡으로 삼은 신을 각각 한 켤레씩 주었다. 또 옛 신사(神社)에 가서 불교의 이치를 개유(開諭)하였으므로 신사 옆 재목을 베어다가 5년 만에 공사를 마쳤다. 또 노비들을 더 주니 매우 융성하여 동남 지방에 있어서의 이름있는 절이 되었다. 사람들은 회경을 귀진의 후신(後身)이라 했다.
의론해 말한다. 고을 안의 고전(古傳)을 살펴보면, 욱면은 바로 경덕왕 때의 일이다. 징(徵; 필경 진珍인 듯싶다. 아래도 역시 같다)의 본전(本傳)에 의하면 이는 원화(元和) 3년 무자(戊子; 808) 애장왕(哀莊王) 때의 일이라 했다. 경덕왕 이후에 혜공왕(惠恭王)ㆍ선덕왕(宣德王)ㆍ원성왕(元聖王)ㆍ소성왕(昭聖王)ㆍ애장왕(哀莊王) 등 5대까지는 도합 60여 년이나 된다. 귀징(貴徵; 珍)이 먼저이고 욱면이 뒤이기 때문에 그 선후가 향전(鄕傳)과 어긋난다. 여기에는 이 두 가지를 다 실어서 의심이 없게 한다.
찬(讚)해 말한다.
서쪽 이웃 옛 절에 불등(佛燈)이 밝았는데,
방아 찧고 절에 오니 이경(二更)이네.
한 마디 염불마다 부처가 되려하여,
손바닥 뚫어 노끈 꿰니 그 몸도 잊었네.
광덕(廣德)과 엄장(嚴莊)
문무왕(文武王) 때에 중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 사이가 좋아 밤낮으로 약속했다. "먼저 안양(安養)으로 돌아가는 자는 모름지기 서로 알리도록 하지." 광덕은 분황(芬皇) 서리(西里; 혹은 황룡사皇龍寺에 서거방西去方이 있다고 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에 숨어 살면서 신 삼은 것으로 업을 삼아, 처자를 데리고 살았다. 엄장은 남악(南岳)에 암자를 짓고 살면서 나무를 베어 불태우고 농사를 지었다.
어느날 해 그림자가 붉은빛을 띠고 소나무 그늘이 고요히 저물었는데, 창밖에서 소리가 났다. "나는 이미 서쪽으로 가니 그대는 잘 살다가 속히 나를 따라오라." 엄장이 문을 밀치고 나가 보니 구름 밖에 천악(天樂) 소리가 들리고 밝은 빛이 땅에 드리웠다. 이튿날 광덕이 사는 곳을 찾아갔더니 광덕은 과연 죽어 있다. 이에 그의 아내와 함께 유해를 거두어 호리(蒿里)를 마치고 부인에게 말했다. "남편이 죽었으니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어떻겠소." 광덕의 아내도 좋다고 하고 드디어 그 집에 머물렀다. 밤에 자는데 관계하려 하자 부인은 이를 거절한다. "스님께서 서방정토(西方淨土)를 구하는 것은 마치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엄장이 놀라고 괴이히 여겨 물었다. "광덕도 이미 그러했거니 내 또한 어찌 안 되겠는가." 부인은 말했다. "남편은 나와 함께 십여 년을 같이 살았지만 일찍이 하룻밤도 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거늘, 더구나 어찌 몸을 더럽히겠습니까. 다만 밤마다 단정히 앉아서 한결같은 목소리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불렀습니다. 또 혹은 십륙관(十六觀)을 만들어 미혹(迷惑)을 깨치고 달관(達觀)하여 밝은 달이 창에 비치면 때때로 그 빛에 올라 가부좌(跏趺坐)하였습니다. 정성을 기울임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서방정토(西方淨土)로 가지 않으려고 한들 어디로 가겠습니까. 대체로 천릿길을 가는 사람은 그 첫걸음부터 알 수가 있는 것이니, 지금 스님의 하는 일은 동방으로 가는 것이지 서방으로 간다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엄장은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워 물러나 그 길로 원효법사(元曉法師)의 처소로 가서 진요(津要)를 간곡하게 구했다. 원효는 삽관법(삽觀法)을 만들어 그를 지도했다. 엄장은 이에 몸을 깨끗이 하고 잘못을 뉘우쳐 스스로 꾸짖고, 한 마음으로 도를 닦으니 역시 서방정토로 가게되었다. 삽관법은 원효법사의 본전(本傳)과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속에 있다.
그 부인은 바로 분황사의 계집종이니, 대개 관음보살 십구응신(十九應身)의 하나였다. 광덕에게는 일찍이 노래가 있었다.
달아, 서방까지 가시나이까,
무량수불(無量壽佛) 앞에 말씀(우리말로 보언報言을 말함) 아뢰소서.
다짐 깊은 부처님께 두손모아,
원왕생(願往生) 그리워하는 사람 있다고 아뢰소서.
아아, 이 몸 남겨 두고 사십팔원(四十八願)이 이루어질까.
경흥우성(憬興遇聖)
신문왕(神文王) 때의 고승(高僧) 경흥(景興)의 성은 수씨(水氏)로서 웅천주(熊川州) 사람이다. 18세에 중이 되어 삼장(三藏)에 통달하니 명망(名望)이 한 시대에 높았다. 개요(開耀) 원년(681), 문무왕(文武王)이 장차 세상을 떠나려 할 때 신문왕에게 부탁했다. "경흥법사는 국사가 될 만하니 내 명을 잊지 말라." 신문왕이 즉위하여 국로(國老)로 책봉하고 삼낭사(三郎寺)에 살게 했는데 갑자기 병이 들어 한 달이나 되었다. 이때 여승 하나가 와서 그에게 문안하고 <화엄경(華嚴經)> 속의 '착한 벗이 병을 고쳐 준다'는 말을 얘기하고 말했다. "지금 스님의 병은 근심으로 해서 생긴 것이니, 기쁘게 웃으면 나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열한 가지 모습을 지어 저마다 각각 우스운 춤을 추게 하니, 그 모습은 뾰족하기도 하고 깍은 듯도 하여 그 변하는 형용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어 모두들 우스워서 턱이 빠질 지경이었다. 이에 법사의 병은 자기도 모르게 씻은 듯이 나았다. 여승은 드디어 문을 나가 남항사(南巷寺; 이 절은 삼랑사三郎寺 남쪽에 있다)에 들어가서 숨었고, 그가 가졌던 지팡이는 새로 꾸민 불화(佛畵) 십일면원통상(十一面圓通像) 앞에 있었다.
경흥이 어느날 대궐에 들어가려 하자 시종하는 이들이 동문(東門) 밖에서 먼저 채비를 차리니 말과 안장은 매우 화려하고 신과 갓도 제대로 갖추었으므로 길 가던 사람들은 길을 비켰다. 그 때 거사(居士; 혹은 사문沙門이라고도 했다) 한 사람이 모습은 몹시 엉성한데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등에는 광주리를 지고 와서 하마대(下馬臺) 위에서 쉬고 있는데, 광주리 속을 보니 마른 물고기가 있었다. 시종하는 이가 그를 꾸짖었다. "너는 중의 옷을 입고 어찌 깨끗하지 못한 물건을 지고 있느냐." 중이 말했다. "산 고기(馬)를 두 다리 사이에 끼고 있는 것보다 삼시(三市)의 마른 고기를 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 나쁘단 말인가." 말을 마치자 일어나 가 버렸다. 경흥은 문을 나오다가 그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그를 쫓게 하니 남산(南山) 문수사(文殊寺) 문밖에 이르러 광주리를 버리고 숨었는데 짚었던 지팡이는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 앞에 있고, 마른 고기는 바로 소나무 껍질이었다. 사자가 와서 고하자 경흥은 이를 듣고 탄식했다.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와서 내가 말타고 다니는 것은 경계한 것이구나." 그 뒤로 경흥은 몸이 마치도록 말을 타지 않았다.
경흥이 뿌린 덕의 향기와 남긴 맛은 중 현본(玄本)이 엮은 삼랑사 비문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일찍이 보현장경(普賢章經)을 보니 미륵보살이 말했다. "나는 내세에는 염부제(閻浮提)에 나서 먼저 석가의 말법(末法) 제자들을 먼저 제도(濟度)할 것이다. 그런데 다만 말탄 비구승(比丘僧)만은 제외시켜서 그들에게는 부처를 보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러니 어찌 경계하지 않겠는가.
찬(讚)해 말한다.
옛 어진 이가 모범은 보인 것은 뜻한 바 많았는데,
어찌하여 자손들은 절차(切磋) 하지 않는가.
마른 고기 등에 진 건 오히려 옳은 일이나,
다음날 용화(龍華) 저버릴 일 어찌 견딜까.
진신수공(眞身受供)
장수(長壽) 원년 임진(壬辰; 692)에 효소왕(孝昭王)이 즉위하여 처음으로 망덕사(望德寺)를 세워 당나라 제실(帝室)의 복을 받들려 했다. 그 후 경덕왕(景德王) 14년(755)에 망덕사 탑이 흔들리더니 이 해에 안사(安史)의 난(亂)이 일어났다. 신라 사람들은 말했다. "당나라 제실을 위하여 이 절을 세웠으니 마땅히 그 영험이 있을 것이다."
8년 정유(丁酉)에 낙성회(落成會)를 열고 효소왕이 친히 가서 공양하는데, 한 비구(比丘)가 몹시 허술한 모양을 하고 몸을 움츠리고 뜰에 서서 청했다. "빈도(頻度)도 또한 이 재(齋)에 참석하기를 바랍니다." 왕은 이를 허락하여 말석(末席)에 참여하게 했다. 재가 끝나자 왕은 그를 희롱하여 말했다. "그대는 어디 사는가." 비구승이 대답한다. "비파암(琵琶암)에 있습니다." 왕이 말했다.
"이제 가거든 다른 사람들에게 국왕이 친히 불공하는 재에 참석했다고 말하지 말라." 중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폐하께서도 역시 다른 사람에게 진신(眞身) 석가(釋迦)를 공양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말을 마치자 몸을 솟구쳐 하늘로 올라가 남쪽을 향하여 갔다. 왕이 놀랍고 부끄러워 동쪽 언덕에 달려 올라가서 그가 간 곳을 향해 멀리 절하고 사람을 시켜 찾게 하니 남산(南山) 삼성곡(參星谷), 혹은 대적천원(大적川源)이라고 하는 돌 위에 이르러 지팡이와 바리때를 놓고 숨어 버렸다. 사자가 와서 복명(復命)하자 왕은 드디어 석가사(釋迦寺)를 비파암 밑에 세우고, 또 그 자취가 없어진 곳에 불무사(佛無寺)를 세워 지팡이와 바리때를 두 곳에 나누어 두었다. 두 절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으나 지팡이와 바리때는 없어졌다.
<지론(智論)> 제4에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계빈(계賓) 삼장법사(三藏法師)가 아란야법(阿蘭若法)을 행하여 일왕사(一王寺)에 이르니 절에서는 큰 모임이 열리고 있었다. 문지기는 그의 옷이 추솔한 것을 보고 문을 막고 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여러 번 들어가려 했건만 옷이 추하다 해서 번번이 들어가지 못했다. 그는 문득 방편(方便)을 써서 좋은 옷을 빌어 입고 가니 문지기가 보고 들어가게 하고 막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그 자리에 나아가, 여러 가지 좋은 음식을 얻어 옷에게 먼저 주니 여러 사람들이 물었다. "어찌해서 그렇게 하는가." 그는 대답했다.
"내가 여러 번 왔으나 매번 들어올 수가 없었는데 이번에 옷 때문에 이 자리에 오게 되어 여러 가지 음식을 얻었으니 마땅히 이 옷에게 음식을 주어야 할 것이다." 아마 이것도 같은 사례인가 한다.
찬(讚)해 말한다.
향을 사르고 부처님을 가려 새 그림을 보았고,
음식 만들어 중을 대접하고 옛 친구 불렀네.
이제부터 비파암 위의 달은,
때때로 구름에 가려 못에 더디게 비치리.
월명사(月明師) 도솔가(兜率歌)
경덕왕(景德王) 19년 경자(庚子; 790) 4월 초하루에 해가 둘이 나란히 나타나서 열흘 동안 없어지지 않으니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인연 있는 중을 청하여 산화공덕(散花功德)을 지으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조원전(朝元殿)에 단을 정결히 모으고 임금이 청양루(靑陽樓)에 거둥하여 인연 있는 중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월명사(月明師)가 긴 밭두둑 길을 가고 있었다. 왕이 사람을 보내서 그를 불러 단을 열고 기도하는 글을 짓게 하니 월명사가 아뢴다. "저는 다만 국선(國仙)의 무리에 속해 있기 때문에 겨우 향가(鄕歌)만 알 뿐이고 성범(聲梵)에는 서투릅니다." 왕이 말했다. "이미 인연이 있는 중으로 뽑혔으니 향가라도 좋소." 이에 월명이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바쳤는데 가사는 이러하다.
오늘 여기 산화가(散花歌)를 불러, 뿌린 꽃아 너는
곧은 마음의 명령을 부림이니, 미륵좌주(彌勒座主)를 모시게 하라.
이것을 풀이하면 이렇다.
용루(龍樓)에서 오늘 산화가(散花歌)를 불러, 청운(靑雲)에 한 송이 꽃을 뿌려 보내네,
은근하고 정중한 곧은 마음이 시키는 것이어니, 멀리 도솔대선(兜率大僊)을 맞으라.
지금 민간에서는 이것은 산화가(散花歌)라고 하지만 잘못이다. 마땅히 도솔가(兜率歌)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산화가(散花歌)는 따로 있는데 그 글이 많아서 실을 수 없다. 그런 후에 이내 해의 변괴가 사라졌다. 왕이 이것을 가상히 여겨 품다(品茶) 한 봉과 수정염주(水晶念珠) 108개를 하사했다. 이때 갑자기 동자(童子) 하나가 나타났는데 모양이 곱고 깨끗했다. 그는 공손히 다(茶)와 염주(念珠)를 받들고 대궐 서쪽 작은 문으로 나갔다. 월명(月明)은 이것을 내궁(內宮)의 사자(使者)로 알고, 왕은 스님의 종자(從子)로 알았다. 그러나 자세히 알고 보니 모두 틀린 추측이었다. 왕은 몹시 이상히 여겨 사람은 시켜 쫓게 하니, 동자는 내원(內院) 탑속으로 숨고 다와 염주는 남쪽의 벽화(壁畵) 미륵상(彌勒像) 앞에 있었다. 월명의 지극한 덕과 지극한 정성이 미륵보살을 소가(昭假) 시킴이 이와 같은 것을 알고 조정이나 민간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왕은 더욱 공경하여 다시 비단 100필을 주어 큰 정성을 표시했다.
월명은 또 일찍이 죽은 누이동생을 위해서 재를 올렸는데 향가를 지어 제사지냈었다. 이때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일어나더니 지전(紙錢)을 불어서 서쪽으로 날려 없어지게 했다. 향가는 이러하다.
죽고 사는 길이, 여기 있으니 두려워지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 다하고 가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과 같이,
한 가지에 나서 가는 곳은 모르는구나.
아, 미타찰(彌타刹)에서 너를 만나볼 나는,
도를 닦아 기다리련다.
월명은 항상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있으면서 피리를 잘 불었다. 어느날 달밤에 피리를 불면서 문 앞 큰길을 지나가니 달이 그를 위해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 이 때문에 그곳을 월명리(月明里)라고 했다. 월명사(月明師)도 또한 이 일 때문에 이름을 나타냈다.
월명사는 곧 능준대사(能俊大師)의 제자인데 신라 사람들도 향가를 숭상한 자가 많았으니 이것은 대개 시(詩)ㆍ송(頌) 같은 것이다. 때문에 이따금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찬(讚)해 말한다.
바람은 종이돈 날려 죽은 누이동생의 노자를 삼게 하고,
피리는 밝은 달을 일깨워 항아(姮娥)가 그 자리에 멈추었네.
도솔천(兜率天)이 하늘처럼 멀다고 말하지 말라,
만덕화(萬德花) 그 한 곡조로 즐겨 맞았네.
선율환생(善律還生)
망덕사(望德寺) 중 선율(善律)은 시주받은 돈으로 <육백반야경(六百般若經)>을 이루고자 했다. 공사가 아직 끝나기 전에 갑자기 음부(陰府)의 사자에게 쫓겨서 명부(冥府)에 이르니 명사(冥司)가 물었다. "너는 인간 세계에 있을 때에 무슨 일을 했느냐." 선율이 말한다. "저는 만년에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을 만들려 하다가 공사를 마치지 못하고 왔습니다." 명사는 "너희 수록(壽록)에 의하면 네 수는 이미 끝났지만 가장 좋은 소원을 마치지 못했다니 다시 인간 세상에 돌아가서 보전(寶典)을 끝내어 이루도록 하라." 하고 놓아 보냈다. 돌아오는 도중에 여자 하나가 울면서 그의 앞에 와 절을 하며 말했다. "나도 역시 남염주(南閻州)의 신라 사람이온데 부모가 금강사(金剛寺)의 논 1무(畝)를 몰래 빼앗은 일에 연루되어 명부(冥府)에 잡혀 와서 오랫동안 몹시 괴로움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법사께서 고향으로 돌아가시거든 이 일을 우리 부모에게 알려서 속히 그 논을 돌려 주도록 해 주십시오. 또 제가 세상에 있을 때에 참기름을 상 밑에 묻어 두었고, 곱게 짠 베도 이불 틈에 감추어 둔 것이 있습니다. 법사께서 부디 그 기름을 가져다가 불등(佛燈)에 불을 켜고, 그 베는 팔아 경폭(經幅)으로 써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황천에서도 또한 은혜를 입어 제 고뇌(苦惱)를 벗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선율이 말했다. "그대의 집은 어디 있는가." "사량부(沙梁部) 구원사(久遠寺) 서남쪽 마을입니다." 선율이 이 말을 듣고 곧 떠나서 도로 살아났다.
그 때는 선율이 죽은 지 이미 열흘이 되어 남산 동쪽 기슭에 장사 지냈으므로 무덤 속에서 사흘 동안이나 외치니, 지나가던 목동(牧童)이 이 소리를 듣고 절에 가서 알렸다. 절의 중이 와서 무덤을 파고 그를 꺼내니 선율은 그 동안의 일을 자세히 말하고, 또 그 여자의 집을 찾아갔는데 여자는 죽은 지가 15년이나 되었으나 참기름과 베는 완연히 그 자리에 있었다. 선율이 여자가 말한 대로 명복을 빌어 주니 여자의 영혼이 찾아와서 말한다. "법사의 은혜를 입어 저는 이미 고뇌를 벗어났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놀라고 감동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리하여 <반야경(般若經)>을 서로 도와서 완성시켰다. 그 책은 지금 동도(東都) 승사서고(僧史書庫) 안에 있는데 매년 봄과 가을에는 그것을 펴서 전독(轉讀)하여 재앙을 물리쳤다.
찬(讚)해 말한다.
부럽도다. 우리 스님 좋은 인연 따라,
영혼이 돌아와서 옛 고향에서 노니시네.
부모님이 나의 안부(安否) 물으시거든,
나 위해서 빨리 그 논을 돌려 주라 하시오.
김현감호(金現感虎)
신라 풍속에 해마다 2월이 되면 초파일(初八日)에서 15일까지 서울의 남녀가 다투어 흥륜사(興輪寺)의 전탑(殿塔)을 도는 복회(福會)를 행했다.
원성왕(元聖王) 때에 김현(金現)이라는 낭군(郞君)이 있어서 밤이 깊도록 혼자서 탑을 돌기를 쉬지 않았다. 그때 한 처녀가 염불을 하면서 따라 돌다가 서로 마음이 맞아 눈을 주더니 돌기를 마치자 으슥한 곳으로 이끌고 가서 정을 통하였다. 처녀가 돌아가려 하자 김현이 따라가니 처녀는 사양하고 거절했지만 김현은 억지로 따라갔다. 길을 가다가 서산(西山) 기슭에 이르러 한 초가집으로 들어가니 늙은 할머니가 처녀에게 물었다. "함께 온 자는 누구냐." 처녀가 사실대로 말하자 늙은 할머니는 말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없는 것만 못하다. 그러나 이미 저지른 일이어서 나무랄 수도 없으니 은밀한 곳에 숨겨 두거라. 네 형제들이 나쁜 짓을 할까 두렵다." 하고 김현을 이끌어 구석진 곳에 숨겼다. 조금 뒤에 세 마리 범이 으르렁 거리며 들어와 사람의 말로 말했다. "집에서 비린내가 나니 요깃거리가 어찌 다행하지 않으랴." 늙은 할머니와 처녀가 꾸짖었다.
"너희 코가 잘못이다. 무슨 미친 소리냐." 이때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너희들이 즐겨 생명을 해치는 것이 너무 많으니, 마땅히 한 놈을 죽여 악을 징계하겠노라." 세 짐승은 이 소리를 듣자 모두 근심하는 기색이었다. 처녀가 "세 분 오빠께서 만약 멀리 피해 가서 스스로 징계하신다면 내가 그 벌을 대신 받겠습니다." 하고 말하니, 모두 기뻐하여 고개를 숙이고 꼬리를 치며 달아나 버렸다. 처녀가 들어와 김현에게 말했다. "처음에 저는 낭군이 우리 집에 오시는 것이 부끄러워 짐짓 사양하고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숨김없이 감히 진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또 저와 낭군은 비록 종족은 다르지만 하루저녁의 즐거움을 얻어 중한 부부의 의를 맺었습니다. 세 오빠의 악함은 하늘이 이미 미워하시니 한 집안의 재앙을 제가 당하려 하오나, 보통 사람의 손에 죽는 것이 어찌 낭군의 칼날에 죽어서 은덕을 갚는 것만 하겠습니까. 제가 내일 시가(市街)에 들어가 몹시 사람들을 해치면 나라 사람들은 저를 어찌 할 수 없어서, 임금께서 반드시 높은 벼슬로써 사람을 모집하여 저를 잡게 할 것입니다. 그 때 낭군은 겁내지 말고 저를 쫓아 성 북 쪽의 숲속까지 오시면 제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김현은 말했다. "사람이 사람과 사귐은 인륜의 도리지만 다른 유(類)와 사귐은 대개 떳떳한 일이 아니오. 그러나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진실로 하늘이 준 다행인데 어찌 차마 배필의 죽음을 팔아 한 세상의 벼슬을 바라겠소." 처녀가 말했다. "낭군은 그 같은 말을 하지 마십시오. 이제 제가 일찍 죽는 것은 대개 하늘의 명령이며, 또한 저의 소원이요 낭군의 경사이며, 우리 일족의 복이요 나라 사람들의 기쁨입니다. 한 번 죽어 다섯 가지 이로움을 얻을 수 있는 터에 어찌 그것을 마다하겠습니까. 다만 저를 위하여 절을 짓고 불경(佛經)을 강론하여 좋은 과보(果報)를 얻는데 도움이 되게 해 주신다면 낭군의 은혜, 이보다 더 큼이 없겠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서로 울면서 작별했다. 다음날 과연 사나운 범이 성안에 들어와서 사람들을 몹시 해치니 감히 당해 낼 수 없었다. 원성왕(元聖王)이 듣고 영을 내려, "범을 잡는 사람에게 2급의 벼슬을 주겠다."고 하였다. 김현이 대궐에 나아가 아뢰었다. "소신이 잡겠습니다." 왕은 먼저 벼슬을 주고 격려하였다. 김현이 칼을 쥐고 숲속으로 들어가니 범은 변하여 낭자(娘子)가 되어 반갑게 웃으면서, "어젯밤에 낭군과 마음속 깊이 정을 맺던 일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 내 발톱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모두 흥륜사의 간장을 바르고 그 절의 나발(螺鉢) 소리를 들으면 나을 것입니다."하고는, 이어 김현이 찬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찔러 고꾸라졌다. 김현이 숲속에서 나와서, "범은 쉽게 잡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연유는 숨기고, 다만 범에게 입은 상처를 그 범이 시킨 대로 치료하니 모두 나았다. 지금도 민가에서는 범에게 입은 상처에는 역시 그 방법을 쓴다.
김현은 벼슬에 오르자, 서천(西川) 가에 절을 지어 호원사(虎願寺)라 하고 항상 범망경(梵網經)을 강론하여 범의 저승길을 인도하고 또한 범이 제 몸을 죽여 자기를 성공하게 해 준 은혜에 보답했다. 김현은 죽을 때에 지나간 일의 기이함에 깊이 감동하여 이에 붓으로 적어 전하였으므로 세상에서 비로소 듣고 알게 되었으며, 그래서 이름은 논호림(論虎林)이라 했는데 지금까지도 그렇게 일컬어 온다.
정원(貞元) 9년에 신도징(申屠澄)이 야인(野人)으로서 한주(漢州) 십방현위(十방縣尉)에 임명되어 진부현(眞符縣)의 동쪽 10리 가량 되는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 눈보라와 심한 추위를 만나 말이 앞으로 나가지 못하므로 길 옆의 초가집으로 들어가니 그 안에 불이 피워 있어 매우 따뜻했다. 등불 밑에 나가 보니 늙은 부모와 처녀가 화롯가에 둘러앉았는데, 그 처녀의 나이는 바야흐로 14, 5세쯤 되어 보였다. 비롯 머리는 헝클어지고 때묻은 옷을 입었으나 눈처럼 흰 살결과 꽃같은 얼굴이며 동작이 아름다웠다. 그 부모는 신도징이 온 것을 보고 급히 일어나서 말했다. "손님은 심한 한설(寒雪)을 만났으니 앞으로 오셔서 불을 쬐시오." 신도징이 한참 앉아 있으니 날은 이미 저물었는데 눈보라는 그치지 않았다. 신도징은 "서쪽으로 현(縣)에 가려면 길이 아직 머니 여기서 좀 재워 주십시오" 하고 청했다. 부모는 말했다. "누추한 집안이라도 관계치 않으신다면 감히 명을 받겠습니다." 신도징이 마침내 말안장을 풀고 침구를 폈다. 그 처녀는 손님이 묵는 것을 보자 얼굴을 닦고 곱게 단장을 하고는 장막 사이에서 나오는데 그 한아(閑雅)한 태도는 처음 볼 때보다 훨씬 나았다. 신도징이 말했다. "소낭자(小娘子)는 총명하고 슬기로움이 남보다 뛰어났습니다. 아직 미혼이면 감히 혼인하기를 청하니 어떠하오." 그 아버지는 말했다. "기약치 않는 귀한 손님께서 거두어 주신다면 어찌 연분이 아니겠습니까." 신도징은 마침내 사위의 예를 행하고 타고 온 말에 여자를 태워 가지고 길을 나섰다. 임지(任地)에 이르러 보니 봉록(俸祿)이 매우 적었으나 아내는 힘써 집안 살림을 돌보았으므로 모두 마음에 즐거운 일 뿐이었다. 그 후 임기가 끝나 돌아가려 할 때는 이미 1남1녀를 두었는데 또한 총명하고 슬기로워 그는 아내를 더욱 공경하고 사랑했다.
일찍이 아내에게 주는 시를 지었는데 이러했다.
한 번 벼슬하니 매복(梅福)이 부끄럽고,
3년이 지나니 맹광(孟光)이 부끄럽구나.
이 정을 어디다 비길까,
냇물 위에 원앙새 떠 있구나.
그의 아내는 종일 이 시를 읊어 속으로 화답하는 것 같았으나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신도징이 벼슬을 그만두고 가족을 데리고 본가로 돌아가려 하자, 아내는 문득 슬퍼하면서 말했다. "요전에 주신 시 한 편에 화답한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읊었다.
금슬(琴瑟)의 정이 비록 중하나,
산림(山林)에 뜻이 스스로 깊도다.
시절이 변할까 항상 걱정하며,
백년해로 저버릴까 허물하도다.
드디어 함께 그 여자의 집에 갔더니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아내는 사모하는 마음이 지나쳐 종일토록 울었다. 문득 벽 모퉁이에 한 장의 호피(虎皮)가 있는 것을 보고 아내는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 물건이 아직도 여기에 있는 것을 몰랐구나." 마침내 그것을 뒤집어쓰니 곧 변하여 범이 되었는데, 어흥거리며 할퀴다가 문을 박차고 나갔다. 신도징이 놀라서 피했다가 두 아이를 데리고 간 길을 찾아 산림을 바라보며 며칠을 크게 울었으나 끝내 간 곳을 알지 못했다.
아! 신도징(申屠澄)과 김현(金現) 두 사람이 짐승과 접했을 때 그것이 변하여 사람의 아내가 된 것은 똑같다. 그러나 신도징의 범은 사람을 배반하는 시를 주고 으르렁거리고 할퀴면서 달아난 것이 김현의 범과 다르다. 김현의 범은 부득이 사람을 상하게 했지만 좋은 약방문을 가르쳐 줌으로써 사람들을 구했다. 짐승도 어질기가 그와 같은데, 지금 사람으로서도 짐승만 못한 자가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이 사적의 처음과 끝을 자세히 살펴보면 절을 돌 때 사람을 감동시켰고, 하늘에서 외쳐 악을 징계하려 하자 스스로 이를 대신했으며, 신효한 약방문을 전함으로써 사람을 구하고 절을 지어 불계(佛戒)를 강론하게 했던 것이다. 이것은 다만 짐승의 본성이 어질기 때문만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대개 부처가 사물에 감응함이 여러 방면이었던 까닭에 김현공(金現公)이 능히 탑을 돌기에 정성을 다한 것에 감응하여 명익(冥益)을 갚고자 했을 뿐이다. 그 때에 복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찬(讚)해 말한다.
산가(山家)의 세 오라비 죄악이 많아,
고운 입에 한 번 승낙 어떻게 할까.
의리의 중함 몇 가지니 죽음은 가벼운데,
숲속에서 맡긴 몸 낙화(落花)처럼 져 갔도다.
융천사(融天寺) 혜성가(慧星歌) 진평왕대(眞平王代)
제5 거열랑(居烈郞), 제6 설처랑(實處郞; 혹은 돌처랑突處郞이라고도 씀), 제7 보동랑(寶同郞) 등 세 화랑의 무리가 풍악(風岳)에 놀러 가려고 하는데 혜성(慧星)이 심대성(心大星)을 범하였다. 낭도(郎徒)들은 이를 의아스럽게 생각하고 그 여행을 중지하려고 했다. 이때에 융천사(融天寺)가 노래를 지어 부르자 별의 괴변은 즉시 사라지고 일본(日本) 군사가 제 나라로 돌아가니 도리어 경사가 되었다. 임금이 기뻐하여 낭도(郎徒)들을 보내어 풍악에서 놀게 했으니, 노래는 이렇다.
옛날 동해(東海)가에 건달파(乾達婆)가 놀던 성을 버리고,
'왜군(倭軍)이 왔다'고 봉화를 든 변방이 있어라.
세 화랑은 산 구경 오심을 듣고 달도 부지런히 등불을 켜는데,
길 쓰는 별을 바라보고 '혜성(慧星)이여' 하고 말한 사람 있구나.
아아, 달은 저 아래로 떠갔거니, 보아라, 무슨 혜성(慧星)이 있으랴.
정수사(正秀師) 구빙녀(九氷女)
제 40대 애장왕(哀莊王) 때, 중 정수(正秀)는 황룡사(皇龍寺)에 머물러 있었다. 겨울날 눈은 많이 쌓이고 날은 이미 저물었는데, 삼랑사(三郞寺)에서 돌아오다가 천엄사(天嚴寺) 문밖을 지나게 되었다. 그 때 한 여자 거지가 아이를 낳고 누워서 얼어 죽게 되었는데, 스님이 보고 불쌍히 여겨 그를 안아 주었더니 한참 후에 깨어났다. 이에 옷을 벗어 덮어 주고 벌거벗은 채 본사(本寺)에 달려와서 거적 풀로 몸을 덮고 밤을 세웠다. 한밤중에 하늘에서 궁정 뜰로 외치는 소리가 났다. "황룡사(皇龍寺)의 중 정수(正秀)를 마땅히 임금의 스승에 봉할지니라." 급히 사람을 시켜 조사하게 하니, 그 사실이 모두 왕에게 알려졌다. 왕은 위의를 갖추고 그를 대궐 안으로 맞아들여 국사(國師)를 삼았다.
삼국유사 제 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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