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史記卷第四十四.
삼국사기 권 제 44
列傳第四.
<乙支文德>·<居柒夫>·<居道>·<異斯夫>·<金仁問>·<金陽>
<黑齒常之>·<張保皐>·(+<鄭年>) ·<斯多含>.
趙炳舜.
열전 제 4
을지문덕. 거칠부. 거도. 이사부. 김 인문. 김 양.
흑치상지. 장 보고. 사다함.
<乙支文德 을지문덕>
未詳其世系. 資沈 有智數, 兼解屬文. <隋><開皇{大業} >中, <煬帝>下詔征<高句麗>. 於是, 左翊衛大將軍<宇文述>, 出<扶餘>道, 右翊衛大將軍<于仲文>, 出<樂浪>道, 與九軍至<鴨 水>. <文德>受王命, 詣其營詐降, 實欲觀其虛實. <述>與<仲文>, 先奉密旨, 若遇王及<文德>來, 則執之, <仲文>等, 將留之, 尙書右丞<劉士龍>, 爲慰撫使, 固止之, 遂聽<文德>歸, 深悔之, 遣人 <文德>曰: "更欲有議{言} , 可復來." <文德>不顧, 遂濟<鴨 >而歸. <述>與<仲文>, 旣失<文德>, 內自不安. <述>以粮盡欲還, <仲文>謂{議} 以精銳追<文德>, 可以有功, <述>止之. <仲文>怒曰: "將軍仗十萬兵, 不能破小賊, 何顔以見帝." <述>等不得已而從之, 度<鴨 水>追之. <文德>見<隋>軍士有饑色, 欲疲之, 每戰輒北{走} , <述>等一日之中, 七戰皆捷. 旣恃驟勝, 又逼群議, 遂進東, 濟<薩水>, 去<平壤城>三十里, 因山爲營.
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 『三國史記』 高句麗本紀.趙炳舜. 『三國史節要』. 『三國史記』 高句麗本紀.趙炳舜. 『三國史節要』.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을지문덕은 가문의 내력이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자질이 침착하고 용맹스러우며 지모가 있었고 동시에 글도 지을 줄 알았다.
수 나라 개황 연간에 양제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공격하자, 좌익위 대장군 우문술은 부여도로 나오고 우익위 대장군 우 중문은 낙랑도로 나와서 9군과 함께 압록강에 이르렀다. 문덕이 왕의 명을 받들고 적진으로 가서 항복하는 체하였으나, 이는 사실 그들의 허실을 보려는 것이었다. 술과 중문은 이 보다 앞서 황제의 비밀 교지를 받았었다. 이에는 고구려의 왕이나 문덕을 만나거든 체포하라고 쓰여 있었다. 이에 따라 중문 등은 문덕을 억류하려 하였는데, 위무사로 있던 상서 우승 유 사룡이 굳이 말리는 바람에 결국 문덕이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 뒤에 이를 깊이 후회하여 사람을 보내 문덕을 속여서 말하기를 "재차 의논할 일이 있으니 다시 오라"고 하였으나, 문덕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압록강을 건너왔다. 술과 중문은 문덕을 놓친 뒤에 마음 속으로 불안하게 생각하였다. 술은 군량이 떨어졌다 하여 돌아가려 하는데, 중문은 정예부대로 문덕을 추격하면 공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술이 이를 말렸다. 중문이 화를 내어 말했다. "장군이 10만의 병력을 가지고 와서 조그마한 적을 격파하지 못하고 무슨 낯으로 황제를 뵈옵겠는가?" 술 등은 마지못하여 그 말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서 문덕을 추격하였다. 문덕은 수군에게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보고, 그들을 피로하게 하기 위하여 싸울 때마다 매번 패배한 척하며 도주하였다. 이렇게 하여 술은 하룻 동안에 일곱 번을 싸워 모두 승리하였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승리에 뱃심이 생기기도 하고, 또한 중의에 몰리기도 하여, 마침내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를 건너 평양성 30리 밖에서 산을 등지고 진을 쳤다.
○<文德>遺<仲文>詩曰: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仲文>答書諭之. <文德>又遣使詐降, 請於<述>曰: "若旋師者, 當奉王朝行在所." <述>見士卒疲弊, 不可復戰, 又<平壤城>險固, 難以猝拔, 遂因其詐而還, 爲方陣而行. <文德>出軍, 四面 擊之, <述>等且戰且行, (+秋七月) 至<薩水>, 軍半濟, <文德>進軍, 擊其後軍, 殺右屯衛將軍<辛世雄>. 於是, 諸君俱潰, 不可禁止, 九軍將士奔還, 一日一夜, 至<鴨 水>, 行四百五十里. 初, 度<遼>, 九{凡} 軍三十萬五千人, 及還至<遼東城>, 唯二千七百人.
趙炳舜. 『三國史節要』. 『三國史記』 高句麗本紀.趙炳舜. 『三國史節要』.
문덕이 중문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보냈다.
"신기한 계책은 천문에 통달했고,
묘한 계략은 땅의 이치를 알았도다.
전투마다 이겨 공이 이미 높았으니,
만족한 줄 알았으면 돌아가는 것이 어떠하리."
중문이 답서를 보내 효유하였다. 문덕이 또한 사자를 보내 항복을 가장하고 술에게 요청하였다. "만일 군사를 철수한다면 틀림없이 왕을 모시고 행재소로 가서 조견하겠다." 술은 군사들이 피곤하고 기운이 쇠진하여 더 이상 싸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평양성은 험하고 견고하여 갑자기 함락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하여, 거짓 항복이라도 받은 상태에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방어진을 만들며 행군하였다. 문덕이 군사를 출동시켜 사면으로 공격하니 술 등이 한편으로 싸우며 한편으로는 쫓겨 갔다. 그들이 살수에 이르러 군사가 절반쯤 강을 건너 갔을 때, 문덕이 군사를 몰아 그들의 후군을 맹공하여 우둔위장군 신 세웅을 죽였다. 이렇게 되자 모든 적군이 한꺼번에 허물어져 걷잡을 수가 없었다. 9군 장졸이 달려서 패주하였는데, 하루낮 하루밤 사이에 압록강에 이르니 그들은 4백 50리를 간 셈이다. 처음 요수를 건너 올 때 그들은 9군 30만 5천 명이었는데, 요동성에 돌아갔을 때는 다만 2천7백 명뿐이었다.
○論曰: <煬帝><遼東>之役, 出師之盛, 前古未之有也, <高句麗>一偏方小國, 而能拒之, 不唯自保而已, 滅其軍幾盡者, <文德>一人之力也. 『傳』曰: "不有君子, 其能國乎." 信哉.
저자의 견해 : 양제의 요동 전역은, 출동 병력이 전례가 없을 만큼 거대하였다. 고구려가 한 모퉁이에 있는 조그마한 나라로서 능히 이를 방어하고 스스로를 보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군사를 거의 섬멸해버릴 수 있었던 것은 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 전에 이르기를 "군자가 없으면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리오?"[[춘추좌전]]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옳은 말이다.
[或云<荒宗>.]姓金氏, <奈勿王>五世孫, 祖<仍宿>角干, 父<勿力>伊 , <居柒夫>少 弛有遠志. 祝髮爲僧, 遊觀四方, 便欲 <高句麗>, 入其境, 聞法師<惠亮>開堂說經, 遂詣聽講經. 一日, <惠亮>問曰: "沙{汝} 彌從何來?" 對曰: "某<新羅>人也." 其夕, 法師招來相見, 握手密言曰: "吾閱人多矣, 見汝容貌, 定非常流, 其殆有異心乎?" 答曰: "某生於偏方, 未聞道理, 聞師之德譽, 來伏{趨} 下風, 願師不拒, 以卒發蒙." 師曰: "老僧不敏, 亦能識子, 此國雖小, 不可謂無知人者, 恐子見執, 故密告之, 宜疾其歸." <居柒夫>欲還, 師又語曰: "相汝 鷹視, 將來必爲將師{將帥} . 若以兵行, 無貽我害." <居柒夫>曰: "若如師言, 所不與師同{相} 好者, 有如 日." 遂還國返本從仕, 職至大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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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부[혹은 황종이라고도 한다.]의 성은 김씨이고, 나물왕의 5세손이며, 조부는 잉숙 각간이요, 아버지는 물력 이찬이었다. 거칠부는 젊었을 때 사소한 일에 마음을 쓰지 않고 원대한 뜻을 품었다. 그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사방을 유람하였는데, 문득 고구려를 정탐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그 나라 경내로 들어 갔다가 법사 혜량이 강당을 열고 불경을 강설한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그곳으로 가서 불경 강의를 들었다.
하루는 혜량이 물었다. "사미는 어디서 왔는가?" 거칠부가 대답하였다. "저는 신라인입니다." 그 날 밤에 법사가 그를 불러 놓고 손을 잡으며 은밀히 말했다. "내가 사람을 많이 보았는데 너의 용모를 보니 분명 보통 사람이 아니다. 아마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을테지?" 거칠부가 대답하였다. "제가 외딴 지방에서 성장하여 참된 도리를 듣지 못하였는데, 스님의 높으신 덕망과 명성을 듣고 와서 말석에 참여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거절하지 마시고 끝까지 어리석음을 깨우치게 하여 주소서." 법사가 말했다. "노승이 불민하지만 그대가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네. 이 나라가 비록 작지만 그대가 하려는 일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야. 그대가 잡힐까 염려되어 일부러 은밀히 일러 주는 것이니, 그대는 빨리 돌아가는 것이 좋으리라." 거칠부가 돌아가려 하니 법사가 다시 말했다. "그대의 상을 보니 제비턱에 매눈이로다. 앞으로 반드시 장수가 될 것이다. 만일 군사를 거느리고 오거든 나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 거칠부가 말했다. "만일 스님의 말씀과 같은 일이 생긴다면, 이는 스님과 제가 모두 바라지 않는 일이니, 밝은 해를 두고 그런 일이 없도록 맹세하겠습니다." 그는 마침내 귀국하여 본심대로 벼슬길에 나아가 직위가 대아찬에 이르렀다.
○<眞興大王>六年乙丑, 承朝旨, 集諸文士, 修撰國史, 加官波珍 . 十二年辛未, 王命<居柒夫>及<仇珍>大角 ·<比台>角 ·<耽知> ·<非西> ·<奴夫>波珍 ·<西力夫>波珍 ·<比次夫>大阿 ·<未珍夫>阿 等八將軍, 與<百濟>侵<高句麗>. <百濟>人先攻破<平壤>, <居柒夫>等, 乘勝取<竹嶺>以外, <高峴>以內十郡. 至是, <惠亮>法師, 領其徒, 出路上, <居柒夫>下馬, 以軍禮揖拜, 進曰: "昔, 遊學之日, 蒙法師之恩, 得保性命, 今, 邂逅相遇, 不知何以爲報." 對曰: "今, 我國政亂, 滅亡無日, 願致之貴域." 於是, <居柒夫>同載以歸, 見之於王, 王以爲僧統, 始置百座講會及八關之法. <眞智王>元年丙申, <居柒夫>爲上大等, 以軍國事務自任, 至老終於家, 享年七十八.
진흥대왕 6년 을축에 그는 왕명을 받들어 여러 문사들을 소집하여 신라의 국사를 편찬하였고, 파진찬 벼슬을 더 받았다.
진흥왕 12년 신미에 왕이 거칠부와 구진 대각찬, 비태 각찬, 탐지 잡찬, 비서 잡찬, 노부 파진찬, 서력부 파진찬, 비차부 대아찬, 미진부 아찬 등 여덟 장군으로 하여금 백제와 협력하여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백제인들이 먼저 평양을 격파하고, 거칠부 등은 승세를 몰아 죽령 이북 고현 이내의 10개 군을 빼앗았다. 이 때 혜량 법사가 무리를 이끌고 길가에 나와 있었다. 거칠부가 말에서 내려 군례로써 읍배하고 앞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옛날 유학할 때 법사님의 은혜를 입어 성명을 보전하였는데, 오늘 우연히 만나게 되니 무엇으로 은혜를 갚아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법사가 대답하였다. "지금 우리 나라는 정사가 어지러워 멸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너의 나라로 데려가 주기를 바란다." 이에 거칠부가 그를 말에 태워 함께 돌아 와서 왕에게 배알시키니, 왕이 그를 승통으로 삼고 처음으로 백좌강회를 열고 팔관법을 실시하였다.
진지왕 원년 병신에 거칠부가 상대등이 되어 스스로 군국사무를 담당하다가 늙은 뒤에 자기 집에서 죽으니 향년 78세였다.
失其族姓, 不知何所人也, 仕<脫解>尼師今, 爲干. 時, <于尸山國>·<居柒山國>, 介居隣境, 頗爲國患. <居道>爲邊官, 潛懷幷呑之志, 每年一度, 集群馬於<張吐>之野, 使兵士騎之, 馳走以爲戱樂, 時人稱爲馬叔{技} . 兩國人, 習見之, 以爲<新羅>常事, 不以爲怪. 於是, 起兵馬, 擊其不意, 以滅二國.
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거도는 성이 전해지지 않고 어느 곳 사람인지도 알 수 없다. 탈해 이사금 때 벼슬을 하여 간이 되었는데, 이 때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이 이웃 국경에 끼어 있으면서 자못 나라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거도가 변경 관장으로서 은근히 그 나라들을 병합하려는 뜻을 품고 매년 한 차례씩 장토 들에 말 떼를 모아 놓고 군사들로 하여금 말을 타고 달리면서 즐기게 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마숙이라고 불렀다. 두 나라 사람들은 이를 항상 보아 왔으므로 신라인들의 일반적인 행사라고 여기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에 거도가 병마를 출동시켜 그들을 불의에 공격하여 멸하였다.
[或云<苔宗>.]姓金氏, <奈勿王>四世孫. <智度路王>時, 爲沿邊官, 襲<居道>權謀, 以馬戱, 誤<加耶[或云<加羅>.]國>取之. 至十三年壬辰, 爲<阿瑟羅州{何瑟羅州}> 軍主, 謀幷<于山國>. 謂其國人愚悍, 難以威降, 可以計服, 乃多造木偶師子{獅子} , 分載戰舡, 抵其國海岸, 詐告曰: "汝若不服, 則{卽} 放此猛獸, 踏殺之." 其人恐懼則{乃} 降. <眞興王>在位十一年, <太寶>元年, <百濟>拔<高句麗><道薩城>, <高句麗>陷<百濟><金峴城>. 主{王} 乘兩國兵疲, 命<異斯夫>, 出兵擊之, 取二城增築, 留申{甲} 士(+一千) 戍之. 時, <高句麗>遣兵來攻<金峴城>, 不克而還. <異斯夫>追擊之大勝.
『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이사부[혹은 태종이라고도 한다.]의 성은 김씨이고, 나물왕의 4세 손이다. 지도로왕 때 변경 관장이 되어 거도의 권모를 모방하여 마희로써 가야[혹은 가라라고도 한다.]국을 속여서 빼앗았다.
지증왕 13년 임진에 그는 하슬라주의 군주가 되어 우산국을 병합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는 그 나라 사람들이 미련하고 사나워서 힘으로 항복받기는 어려우나 전략으로 항복시킬 수는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나무로 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으로 가서 거짓으로 말했다. "너희들이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들을 풀어 놓아서 밟아 죽이겠다." 우산국 사람들이 두려워 하여 즉시 항복하였다.
진흥왕 재위 11년인 태보 원년에 백제는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고,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두 나라 군사가 피로한 틈을 이용하여 이사부에게 명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쳐서 두 개의 성을 빼앗은 다음 성을 증축하고 군사들을 남겨 두어 수비하게 하였다. 이 때 고구려가 군사를 보내 금현성을 치다가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가자 이사부가 이들을 추격하여 대승하였다.
字<仁壽>, <大宗大王{太宗大王}> 第二子也. 幼而就學, 多讀儒家之書, 兼涉<莊>·<老>·浮屠之說. 又善隸書射御鄕樂, 行藝純熟, 識量宏弘, 時人推許. <永徽>二年, <仁問>年二十三歲, 受主{王} 命, □{入} 大<唐>宿衛, <高宗>謂涉海來朝, 忠誠可尙, 特授左領軍衛將軍. 四年, 詔許歸國覲省, <太宗大王>授以<押督州>援管{摠管} . 於是, 築<獐山城>, 以設險, <太宗>錄其功, 授食邑三百戶. <新羅>屢爲<百濟>所侵, 願得<唐>兵爲援助, 以雪着{羞} 恥, 擬諭宿衛<仁問>乞師. 會, <高宗>, 以<蘇定方>爲<神丘>道大摠管, 率師討<百濟>. 帝徵<仁問>, 問道路險易, 去就便宜. <仁問>應對尤詳, 帝悅制授<神丘>道副大摠管, 赴軍中. 遂與<定方>濟海, 到<德物島>. 主{王} 命太子, 與將軍<庾信>·<眞珠>·<天存>等, 以巨艦一百 , 載兵迎延之. 至<熊津>口, 賊瀕江屯兵, 戰破之, 乘勝入其都城滅之. <定方> 王<義慈>及太子<孝>·王子<泰>等, 廻<唐>.
趙炳舜.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三國史節要』.
김 인문의 자는 인수이고, 태종대왕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하여 유가의 서적을 많이 읽었으며, 동시에 [장자], [노자] 및 불교 서적을 널리 섭렵하였다. 또한 예서를 잘 쓰고, 활쏘기, 말타기, 향악을 잘 하였는데, 이처럼 기예에 익숙하고 식견과 도량이 넓어 당시 사람들이 그를 추앙하였다.
영휘 2년 인문의 나이 23세 때, 왕명을 받들고 당 나라에 가서 숙위하였다. 고종은 그가 바다를 건너와 내조하자 충성이 가상하다 하여 특별히 좌령군위장군을 제수하였고, 4년에 조칙을 내려 본국으로 돌아가 부모를 만나게 하였다. 태종대왕이 그에게 압독주 총관을 제수하였다. 이에 그가 장산성을 쌓아 요새를 설치하였으므로 태종이 그의 공로를 기록하고 식읍 3백 호를 주었다. 신라가 여러 번 백제의 침공을 받게 되자, 태종은 당 나라 군대의 원조를 얻어 원수를 갚고자 하여, 숙위하러 가는 인문으로 하여금 당의 원군을 청하려 하였다. 때마침 고종이 소정방을 신구도 대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치도록 하였다.
황제가 인문을 불러 도로의 험난한 사정과 행군의 편의에 대하여 물었는데, 인문이 일일이 소상하게 대답하니 황제가 기뻐하여 인문에게 신구도 부대총관의 관직을 주어 정방의 병영으로 가라고 명령하였다. 인문은 마침내 정방과 함께 바다를 건너 덕물도에 이르렀다. 왕은 태자에게 명령하여 장군 유신, 진주, 천존 등을 데리고 큰 전함 1백 척에 군사를 싣고 당군을 맞이 하게 하였다. 웅진 어귀에 이르니 적이 강가에 집결하여 있었으므로 그들과 싸워서 격파하고, 승세를 몰아 백제의 서울에 들어가 그들을 격파하였다. 정방은 백제의 왕 의자와 태자 효, 왕자 태 등을 사로잡아 당 나라로 돌아갔다.
○大王嘉尙<仁問>功業, 授波珍 , 又加角千{角干} . 尋, 入<唐>宿衛如前. <龍朔>元年, <高宗>召謂曰: "朕旣滅<百濟>, 除爾國患, 今, <高句麗>負固, 與<穢貊>同惡, 違事大之禮, 棄善隣之義, 朕欲遣兵致討, 爾歸告國王, 出師同伐, 以殲垂亡之虜." <仁問>便歸國, 以致帝命, 國王使<仁問>與<庾信>等, 練兵以待. 皇帝命邢國公<蘇定方>, 爲<遼東>道行軍大摠管, 以六軍, 長驅萬里, <麗>人於<須江{浿江}> , 擊破之, 遂圍<平壤>, <麗>人固守, 故不能克. 士馬多死傷, 糧道不繼. <仁問>與留鎭<劉仁願>, 率兵兼輸米四千石·租二萬餘斛, 赴之, <唐>人得食, 以大雪, 解圍還.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대왕이 인문의 공적을 가상히 여겨 파진찬을 제수하고 또한 각간 벼슬을 더 주었다. 그는 얼마 후 당에 들어 가서 전과 같이 숙위하였다.
용삭 원년에 고종이 불러 말했다. "내가 이미 백제를 격멸하여 너희 나라의 근심을 제거하였으나, 지금 고구려가 견고한 요새를 믿고 예맥과 더불어 악한 짓을 하여 사대의 예를 어기고 선린의 의리를 저버리고 있다. 내가 군사를 파견하여 토벌코자 하니 너도 돌아가서 국왕에게 이 말을 고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우리와 함께 거의 망하게 된 적을 섬멸케 하라."
인문은 즉시 본국으로 돌아와 황제의 명령을 전달하였다. 왕은 인문으로 하여금 유신 등과 함께 군사를 정비하여 기다리게 하였다. 황제는 형국공 소정방을 요동도 행군 대총관으로 삼았다. 소정방은 6군을 거느리고 만리길을 달려 패강에서 고구려 군사와 조우하여 이를 격파하고, 그 길로 평양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군사가 굳게 수비하자 승리하지 못하고, 도리어 많은 병마가 부상당하거나 사망하였다. 그 뿐 아니라 군량미의 운송로도 확보하지 못하였다. 인문은 유진장 유 인원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쌀 4천 석과 벼 2만여 곡을 싣고 평양으로 갔다. 이에 따라 당군은 식량을 얻었으나 눈이 크게 내렸으므로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羅>人將歸, <高句麗>謀要擊於半塗, <仁問>與<庾信>, 詭謀夜遁. <麗>人翌日覺而追之, <仁問>等, 廻擊大敗之, 斬首一萬餘級, 獲人五千餘口而歸. <仁問>又入<唐>, 以<乾封>元年, 扈駕登封<泰山>, 加授右驍衛大將軍, 食邑四百戶. <摠章>元年戊辰, <高宗>皇帝遣英國公<李勣>, 帥師伐<高句麗>, 又遣<仁問>徵兵於我. <文武大王>與<仁問>, 出兵二十萬, 行至<北漢山城>, 王住此, 先遣<仁問>等, 領兵會<唐>兵, 擊<平壤>月餘, 執王<臧>, <仁問>使主{王} 於英公前, 數其罪, 王再拜, 英公禮答之, 卽以王及<男産>·<男律{男建}> ·<男生>等還. <文武大王>, 以<仁問>英略勇功, 特異常倫, 賜故大琢角干<朴紐>食邑五百戶. <高宗>亦聞<仁問>屢有戰功, 制曰: "爪牙良將, 文武英材, 制爵疏封, 尤宜嘉命." 仍加爵秩, 食邑二千戶. 自後, 侍衛宮禁, 多歷年所.
李丙燾.
今西龍.趙炳舜. 『三國史節要』.
신라군이 돌아가려 했을 때, 고구려군이 돌아오는 길목을 막고 공격하려 하자 인문은 유신과 함께 꾀를 내어 야음을 기하여 도망하였다. 고구려인이 다음날에야 이를 알고 추격해오자 인문 등이 반격하여 대파하고, 1만여 명의 목을 베고 5천여 명을 생포하여 돌아왔다. 인문은 다시 당에 갔다. 그가 건봉 원년에 거가를 따라 태산에 올라가 봉선의 의식을 행하였다 하여, 추가로 우효위 대장군을 제수하고 식읍 4백 호를 더 주었다.
총장 원년 무진에 고종 황제가 영국공 이 적에게 군사를 주어 고구려를 치게 하고, 또한 인문을 보내 우리에게도 군사의 징발을 요구하였다. 문무대왕은 군사 20만을 출동시켜 인문과 함께 북한산성으로 갔다. 왕은 그곳에 머무르며 먼저 인문 등에게 군사를 주어 당군과 회합하여 평양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한달 남짓 만에 보장왕을 생포하였다. 인문이 고구려왕을 영공 앞에 꿇어 앉히고 그의 죄를 따지니, 고구려왕이 재배하고 영공이 그에 답례를 하였다. 영공은 곧 왕과 남산, 남건, 남생 등을 데리고 돌아갔다. 문무대왕은 인문의 지략이 훌륭하고 공로가 뛰어나다 하여 대탁 각간 박유의 식읍 5백 호를 주었다. 고종도 인문이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는 말을 듣고 제서를 내려 "조아의 양장이요, 문무의 영재이다. 작위를 제정하여 새로운 봉읍을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 하고, 작위를 더하고 식읍 2천 호를 더 주었다. 그 뒤로 그는 궁궐에서 황제를 시위하며 많은 세월을 보냈다.
○<上元>元年, <文武王>納<高句麗>叛衆, 又據<百濟>故地. <唐>皇帝大怒, 以<劉仁軌>爲< 林>道大摠管, 發兵來討, 詔削王官爵. 時, <仁問>爲右驍衛員外大將軍<臨海郡>公, 在京師, 立以爲王, 令歸國, 以代其兄, 仍策爲< 林州>大都督開府儀同三司, <仁問>懇辭不得命, 遂上道. 會, 王遣使, 入貢且謝罪, 皇帝赦之, 復王官爵, <仁問>中路而還, 亦復前銜. <調露>元年, 轉鎭軍大將軍行右武威衛大將軍, <載初>元年, 授輔國大將軍上柱國<臨海郡>開國公左羽林[軍]將軍. <延載>元年四月二十九日, 寢疾薨於帝都, 享年六十六. 訃聞, 上震悼, 贈 加等, 命朝散大夫行司禮寺大醫署令<陸元景>·判官朝散郞直司禮寺某等, 押送靈柩{樞} . <孝昭大王{孝照大王}> 追贈太大角干, 命有司, 以<延載>二年十月二十七日, 于京<西原>. <仁問>七入大<唐>, 在朝宿衛, 計月日, 九{凡} 二十二年. 時, 亦有<良圖>海 , 六入唐, 死千{于} <西京>, 失其行事始末.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新羅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상원 원년에 문무왕은 고구려의 반군을 받아 들이고, 또한 백제의 고토를 차지하였다. 당 나라 황제는 크게 노하여 유 인궤를 계림도 대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를 공격케 하고, 조서로써 왕의 관작을 박탈하였다. 이 때 인문은 우효위 원외 대장군, 임해군공이 되어 당 나라 서울에 있었다. 황제는 그를 임금으로 삼아 본국으로 돌아가서 그의 형을 대신하게 하고, 계림주대도독개부의동삼사로 책봉하였다. 인문은 이를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황제의 허락을 얻지 못하여 길을 떠났다. 그 때 마침 왕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며 사죄하였므로 황제는 죄를 용서하고 왕의 관작을 회복시켰으며 인문은 중도에서 돌아가 역시 이전의 관직을 다시 맡게 되었다. 조로 원년에 진군 대장군 행우무위위 대장군에 전임되었고, 재초 원년에는 보국 대장군 상주국 임해군 개국공 좌우림 장군에 제수되었다.
연재 원년 4월 29일, 당 나라 서울에서 병으로 죽었다. 향년 66세였다.
부음을 듣고 황제가 놀라고 슬퍼하며 수의를 주고 관등을 더 높여 주었다. 그리고 조산대부행사례시대의서령 육 원경과 판관 조산랑, 직사례시 모 등에게 명하여 영구를 호송하게 하였다. 효소대왕은 그에게 태대 각간을 추증하고, 유사에게 명령하여 연재 2년 10월 27일 서울 서원에 장사지내게 하였다. 인문은 일곱 번이나 당에 들어갔으니, 당의 조정에서 숙위한 월일을 계산하면 22년이나 된다. 그 당시 양도 해찬도 역시 여섯 번 당에 들어갔다가 서경에서 죽었는데 그 행적의 시말은 전해지는 것이 없다.
<金陽 김양>
○<金陽>字<魏昕>, <太宗大王>九世孫也. 曾祖<周元>伊 , 祖<宗基>蘇判, 考<貞茹>波珍 , 皆以世家爲將相. <陽>生而英傑. <大和{太和}> 二年, <興德王>三年, 爲<固城郡>大武{太守} , 尋, 拜<中原>大尹, 俄, 轉<武州>都督, 所臨有政譽. <開成>元年丙辰, <興德王>薨, 無嫡嗣, 王之堂弟<均貞>, 堂弟之子<悌隆>, 爭嗣位. <陽>與<均貞>之子阿 <祐徵>·<均貞>妹 <禮徵>, 奉<均貞>爲王, 入<積板宮>, 以族兵宿衛. <悌隆>之黨<金明>·<利弘>等來圍, <陽>陳兵宮門, 以拒之曰: "新君在此, 爾等何敢兇逆如此." 遂引弓射殺十數人. <悌隆>下<裴萱伯>, 射<陽>中股. <均貞>曰: "彼衆我寡, 勢不可 , 公其佯退, 以爲後圖." <陽>, 於是, 突圍而出, 至<韓 >[一作<潢祇>.]市, <均眞{均貞}> 沒於亂兵, <陽>號泣旻天, 誓心白日, 潛藏山野, 以俟時來.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김 양의 자는 위흔이니, 태종대왕의 9세 손이다. 증조는 주원 이찬이오, 조부는 종기 소판이오, 부친은 정여 파진찬이니 대대로 모두가 장상이었다. 양은 태어날 때부터 영특하였다. 태화 2년, 흥덕왕 3년에 고성군 태수가 되었으며, 얼마 뒤에 중원 대윤으로 임명되었다가 곧 무주 도독으로 전직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정치를 잘한다는 칭송을 들었다.
개성 원년 병진에 흥덕왕이 죽고 그를 계승할 적장자가 없자 왕의 당제 균정과 당제의 아들 제륭 간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다. 이 때 양은 균정의 아들인 아찬 우징과 균정의 매부인 예징과 함께 균정을 왕으로 세워 적판궁에 들어가 사병으로 숙위케 하였다. 그 때 제륭의 도당인 김 명, 이 홍 등이 적판궁을 포위하였다. 양은 군사들을 궁문에 배치하여 그들을 막으면서 말했다. "새 임금이 여기 계시는데 너희들이 어찌 이토록 흉악하게 거역할 수 있느냐?" 그는 드디어 활을 당겨 10여 명을 쏘아 죽였는데, 제륭의 부하 배 훤백이 양을 쏘아 다리를 적중시켰다. 균정이 말했다. "저 쪽은 군사가 많고 우리는 군사가 적으므로 그 세력을 막을 수 없다. 공은 물러나는 체하여 후일을 도모하라!" 이에 양이 포위를 뚫고 나와서 한기(韓岐)[한기(漢祈)라고도 한다.]시에 이르렀고, 균정은 반란군에게 살해되었다. 양은 하늘을 향하여 통곡하면서 해를 두고 결심을 다진 다음, 아무도 모르게 산야에 숨어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至<開成>二年八月, 前侍中<祐徵>, 收殘兵, 入<淸海鎭>, 結大使<弓福>, 謀報不同天之讐. <陽>聞之, 募集謀士兵卒, 以三年二月, 入海, 見<枯徵{祐徵}> , 與謀擧事. 三月, 以勁卒五千人, 襲<武州>, 至城下, 州人悉降, 進次<南原>, <新羅>兵, 與戰克之. <祐徵>以士卒久勞, 且歸<海鎭>, 養兵 馬. 冬, 彗 見西方, 芒角指東, 衆賀曰: "此除舊布新, 報寃雪恥之祥也." <陽>號爲乎東將軍{平東將軍} , 十二月再出, <金亮詢>以<鵡洲>軍來, <祐徵>又遣驍勇<閻長>·<張弁>·<鄭年>·<駱金>·<張律榮{張建榮}> ·<李順行>六將統兵, 軍容甚盛, 鼓行至<武州><鐵冶縣>北州{川} . <新羅>大監<金敏周>, 以兵逆之, 將軍<駱金>·<李順行>, 以馬兵三千, 突入彼軍, 殺傷殆盡.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개성 2년 8월이 되자 전 시중 우징이 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청해진으로 가서 대사 궁복(장 보고)과 손을 잡고 불공대천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양은 이 말을 듣고 참모와 병졸들을 모집하여 3년 2월에 해중으로 들어가 우징을 만나 그와 함께 거사할 것을 모의하였다. 3월에 정예군 5천 명을 거느리고 무주를 습격하여 성 밑에 다다르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그들은 계속 진군하여 남원에 이르러 신라군과 싸워 승리했다. 우징은 군사들이 오랫 동안 싸워서 피로해졌다 하여 다시 해진으로 돌아가서 병마를 휴양시켰다. 겨울에 혜성이 서쪽에 나타났는데 광채나는 꼬리가 동쪽을 가리키니 여러 사람들이 서로 축하하며 말했다. "이는 낡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펴며,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을 좋은 징조이다." 양을 평동장군이라 하였다. 12월에 재차 출동하자 김 양순이 무주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며, 우징이 또한 용사들인 염 장, 장 변, 정 년, 낙 금, 장 건영, 이 순행 등 여섯 장수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오자 군사의 위풍이 막강하였다. 북을 치며 행군하여 무주 철야현 북쪽에 도착하니, 신라 대감 김 민주가 군사를 출동시켜 대항하였다. 장군 낙 금과 이 순행이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상대 군중으로 뛰어들어 그들을 모두 살상하였다.
○四年正月十九日, 軍至<太丘{大丘}> , 王以兵迎拒, 逆擊之, 王軍敗北, 生擒斬獲, 莫之能計. 時, 王顚沛逃人{入} 離宮, 兵士尋害之. <陽>於是命左右將軍領騎土{士} , 徇曰: "本爲報讐, 今, 渠魁就戮, 衣冠士女百姓, 宜各安居, 勿妄動." 遂牧{收} 復王城, 人民案堵. <陽>召<萱伯>曰: "犬各吠非其主, 爾以其主射我, 義士也, 我勿校, 爾安無恐." 衆聞之曰: "<萱伯>如此, 其他何憂." 無不感悅. 四月淸宮, 奉迎侍中<祐徵>卽位, 是爲<神武王>. 至七月二十三日, 大王薨, 太子嗣位, 是爲<文聖王>. 迫{追} 錄功, 授蘇判兼倉部令, 轉侍中兼兵部令, <唐>聘問, 兼授公檢校衛尉卿.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4년 정월 19일, 양의 군사가 대구에 도착하자 왕이 군사를 보내 항거하였다. 양의 군사가 이들을 역습하니 왕의 군사가 패배하여, 양에게 생포되거나 죽고 노획 당한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 때 왕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궁으로 도망쳐 갔으나 군사들이 곧 찾아서 살해하였다. 양이 이에 좌우 장군에게 명하여 기사를 인솔하게 하고 널리 알렸다. "이 싸움은 본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 그 괴수가 죽었으니 의관, 사녀, 백성 모두는 각자 안심하고 살 것이며 망동하지 말라!"
그가 드디어 서울을 수습 정돈하니, 백성들이 마음을 놓고 살게 되었다. 양이 훤백을 불러 말했다. "개는 저마다 제 주인이 아니면 짖는 법이다. 네가 네 주인을 위하여 나를 쏘았으니 의사로다. 내가 탓하지 않을 것이니 너는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여러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말했다. "훤백에게도 저렇게 하니 다른 사람이야 무엇을 근심하랴?" 그들은 감복하며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4월에 왕궁을 깨끗이 정리하고 시중 우징을 맞아 들여 왕위에 오르게 하니, 이가 신무왕인데, 신무왕이 7월 23일에 죽고 태자가 뒤를 이으니 이가 문성왕이다. 양의 공로를 추가로 기록하여 소판 겸 창부령을 제수하고, 다시 시중 겸 병부령으로 전임시켰다. 당에서 빙문하고 동시에 공에게 검교 위위경을 제수하였다.
○<大中>十一年八月十三日, 薨于私第, 享年五十. 訃聞, 大王哀慟, 追贈舒發翰, 其贈賻殮葬, 一依<金庾信>舊例. 以其年十二月八日, 陪葬于<太宗大王>之陵. 從父兄<昕>, 字<泰>, 父<璋如>, 仕至侍中波珍 . <昕>幼而聰悟, 好學問. <長慶>二年, <憲德王>將遣人入<唐>, 難其人, 或薦<昕><太宗>之裔, 精神朗秀, 器宇深沈, 可以當選. 遂令入朝宿衛. 歲餘請還, 皇帝詔授金紫光祿大夫試大常卿{太常卿} . 及歸, 國王以不辱命, {擢} 授<南原>大守{太守} , 累遷至<康州>大都督, 尋加伊 兼相國.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顯宗實錄字本』.
대중 11년 8월 13일에 양이 자기 집에서 죽으니 향년 50세였다. 부음이 알려지니 왕이 슬퍼하며 서발한을 추중하고, 부의와 염장을 모두 김 유신의 장례 때와 같게 하여, 그해 12월 8일에 태종대왕의 능에 배장하였다.
양의 종부형 흔은 자가 태이며 부친 장여는 벼슬이 시중 파진찬에 이르렀다. 흔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장경 2년에 헌덕왕이 당에 사신을 보내려 했으나 적당한 사람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김 흔을 추천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태종의 후예요, 두뇌가 총명하며, 도량이 깊고 침착하니 뽑아 보낼 만하다"고 하므로 드디어 그를 당에 보내 숙위하게 하였다. 그가 한 해 남짓 당에 있다가 귀국하기를 청하니 황제가 조서로써 금자 광록 대부 시태상경을 제수하였다.
그가 귀국하자 국왕이 그가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 하여 특별히 남원 태수를 제수하였고, 그 후 여러 번 자리를 옮겨 강주 대도독에 이르렀으며, 얼마 안 되어 이찬 겸 상국 벼슬을 더 주었다.
○<開成>已未{己未} 閏正月, 爲大將軍, 領軍十萬, 禦<淸海>兵於<大丘>, 敗績. 自以敗軍, 又不能死綏, 不復仕官. 入<小白山>, 葛衣蔬食, 與浮圖遊. 至<大中>三年八月二十七日, 感疾終於山齋, 享年四十七歲, 以其年九月十日, 葬於<奈靈郡>之南原. 無嗣子, 夫人主喪事, 後爲比丘尼.
趙炳舜.
그는 개성 기미 윤 정월에 대장군이 되어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대구에서 청해진의 군사를 방어하다가 패전하였다.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전쟁에서 패하였고 또한 전사하지도 못하였다 하여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소백산에 들어가 칡옷을 입고 나물밥을 먹으며 중들과 함께 지내다가 대중 3년 8월 27일에 병으로 인하여 산재에서 죽었다. 향년 47세였다. 그 해 9월 10일에 나령군 남쪽 언덕에 장사하였다. 아들이 없어서 그의 부인이 상사를 주관하였는데 그녀는 후에 비구니가 되었다.
<百濟>西部人, 長七尺餘, 驍毅有謀略, 爲<百濟>達率兼<風達郡>將, 猶<唐>刺史云. <蘇定方>平<百濟>, <常之>以所部降. 而<定方>囚老王, 縱兵大掠. <常之>懼, 與左右酋長十餘人遯去, 嘯合逋亡, 依<任存山>自固, 不旬日, 歸者三萬. <定方>勒兵攻之, 不克. 遂復二百餘城. <龍朔>中, <高宗>遣使招諭, 乃詣<劉仁軌>降, 入<唐>爲左領軍員外將軍< 州{洋州}> 刺史. 累從征伐積功, 授爵賞殊等. 久之, 爲<燕然道>大摠管, 與<李多祚>等, 擊<突厥>破之. 左監門衛中郞將<寶璧>, 欲窮追邀功, 詔與<常之>共討, <寶璧>獨進, 爲虜所覆, 擧軍沒. <寶璧>下吏誅, <常之>坐無功. 會, <周興>等誣其與鷹揚將軍<趙懷節>叛, 捕繫詔獄, 投 死. <常之>御下有恩, 所乘馬爲士所 , 或請罪之. 答曰: "何遽以私馬, 鞭官兵乎?" 前後賞賜分麾下, 無留 . 及死, 人皆哀其枉.
李丙燾. [唐書].
흑치상지는 백제의 서부 사람인데 신장이 7척여가 되었으며, 동작이 빠르고 힘이 강하였으며 지략이 훌륭하였다. 그는 백제의 달솔로서 풍달군의 장수를 겸하였는데, 이 직위는 당의 자사와 동일하다.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하였을 때, 그는 자기 부하와 함께 항복하였다. 정방은 늙은 왕을 가두고 군사를 풀어놓아 크게 노략질을 하였다. 상지가 겁을 내어 좌우 관장 10여 명과 함께 도주하여, 흩어져 도망한 사람들을 불러모아 임존성에 웅거하며 굳게 수비하니 열흘이 못되어 그에게 귀순한 자가 3만이나 되었다. 정방이 군사를 독려하여 그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상지는 마침내 2백여 성을 회복하였다. 용삭 연간에 고종이 사신을 파견하여 그를 불러 타이르자 그는 유 인궤에게 가서 항복하였다. 그는 당에 들어가서 좌령군 원외 장군 양주 자사가 되었으며, 수차례의 정벌에 종사하여 많은 공을 세우고 특별한 작위와 상을 받았다. 오랜 뒤에는 연연도 대총관이 되어 이 다조 등과 함께 돌궐을 격파하였다. 이 때 좌감문위 중랑장 보벽이 돌궐을 끝까지 추격하여 공을 세우려 하자 황제가 상지와 함께 공격하라고 명령하였으나, 보벽이 혼자 진공하다가 오랑캐에게 패하여 전군이 패배하였다. 보벽은 옥리에게 보내져 처형되고, 상지도 공을 세우지 못한 죄를 짓게 되었다. 그 때 마침 주 흥 등이 그가 응양 장군 조 회절과 함께 반란을 음모한다고 무고하였으므로, 상지는 조옥에 갇혔다가 교형을 당하였다. 상지는 아랫 사람들을 은덕으로 다스렸다. 병졸들이 그의 말을 때린 적이 있었다. 어떤 자가 그 병졸을 처벌하자고 하자 상지가 대답하였다. "어찌 사사로운 개인의 말에 대한 일로, 관병을 매로 때릴 수 있는가?" 그는 자기가 받은 상을 휘하의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어 남겨두는 것이 없었다. 그가 죽게 되자 사람들은 모두 그의 억울함을 슬퍼하였다.
[<羅紀>作<弓福>.]·<鄭年>[<年>或作<連>.], 皆<新羅>人, 但不知鄕邑父祖. 皆善鬪戰, <年>復能沒海底, 行五十里不 , 角其勇壯, <保 >差不及也, <年>以兄呼<保 >. <保 >以齒, <年>以藝, 常齟齬不相下. 二人如<唐>, 爲武寧軍小將, 騎而用槍, 無能敵者. 後, <保 >還國, 謁大王曰: "遍<中國>, 以吾人爲奴婢, 願得鎭<淸海>, 使賊不得掠人西去." <淸海>, <新羅>海路之要, 今謂之<莞島>. 大王與<保 >萬人, 此後, 海上無 鄕人者. <保 >旣貴, <年>去職饑寒, 在<泗>之<漣氷縣{漣水縣}> . 一日, 言於戍將<馮元規>曰: "我欲東歸, 乞食於<張保 >." <元規>曰: "若與<保 >所負如何, 奈何去取死其手?" <年>曰: "饑寒死, 不如兵死快, 況死故鄕耶." 遂去謁, <保 >飮之極歡. 飮未卒, 聞王弑國亂無主, <保 >分兵五千人與<年>, 持<年>手泣曰: "非子不能平禍難." <年>入國, 誅叛者立王, 王召<保 >爲相, 以<年>代守<淸海>.[此與<新羅>傳記頗異, 以<杜牧>言傳, 故兩存之.]
李丙燾.
[북한본].
장 보고[[신라 본기]에는 궁복으로 되어 있다]와 정 년[년(年)은 연(連)으로도 쓴다.]은 모두 신라인이다. 그들의 고향과 조상은 알 수 없다. 두 사람은 모두 전투를 잘하였으며, 정 년은 또한 바닷물 밑으로 들어가 50리를 잠수하여 다녀도 숨이 차지 않았다. 그 용맹과 씩씩함을 비교하면 보고가 연에게 약간 모자랐으나 연은 보고를 형으로 불렀다. 그러나 보고는 나이로, 연은 기예로 항상 맞수가 되어 서로 지려고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당 나라에 가서 무녕군 소장으로 있을 때, 말을 달리며 창을 쓰는 데 있어서 대적할 자가 없었다.
그 뒤에 보고가 귀국하여 대왕에게 말했다. "중국을 두루 돌아다녀 보니, 우리 나라 사람들을 노비로 삼고 있었습니다. 청해에 진영을 설치하여 해적들이 사람들을 약취하여 서쪽으로 데려가지 못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청해는 신라 해로의 요충지로서 지금은 완도라고 부른다. 대왕이 보고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어 청해에 진영을 설치케 하니, 이 뒤로는 바다에서 우리 나라 사람들을 노비로 파는 자가 없어졌다. 보고는 이미 귀한 자리에 올랐으나, 년은 직업을 잃고 굶주림 속에서 사수의 연수현에서 살았다. 하루는 수비하는 장수 풍 원규에게 말하기를 "내가 동쪽으로 돌아가서 장 보고에게 걸식하려 한다" 하니 원규가 말하기를 "그대와 장 보고의 사이가 어떠한가? 어찌하여 그곳에 가서 그의 손에 죽으려 하는가?"라고 하였다. 년이 말하기를 "배고픔으로 죽는 것은 싸우다가 죽는 것 만큼 통쾌하지 못하다. 더구나 고향에서 죽으니 좋은 일이 아닌가?"라 하고 드디어 그곳을 떠나 장 보고를 만났다.
그가 보고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마음껏 즐기는데 술자리가 끝나기 전에 왕이 시해되고 나라가 어지러워져서 임금이 없다는 소문이 들렸다. 보고가 군사 5천 명을 나누어 연에게 주면서 그의 손을 잡고 울면서 말했다. "그대가 아니면 나라의 화란을 평정할 수 없다." 연이 국도에 들어가 배반한 자를 죽이고 왕을 세웠다. 왕은 장 보고를 불러 재상으로 삼고, 연으로 하여금 보고를 대신하여 청해를 지키게 하였다.[이것은 신라의 전기와는 매우 다르지만, 두 목이 말하여 전해오는 것이므로 두 가지를 그대로 기록해둔다.]
○論曰: <杜牧>言: "<天寶><安祿山>亂, <朔方>節度使<安思順>, 以<祿山>從弟賜死, 詔<郭汾陽>代之. 後旬日, 復詔<李臨淮>, 持節分<朔方>半兵, 東出<趙>·<魏>. 當<思順>時, <汾陽>·<臨淮>俱爲牙門都將, 二人不相能, 雖同盤飮食, 常 相視, 不交一言. 及<汾陽>代<思順>, <臨淮>欲亡去, 計未決, 詔<臨淮>, 分<汾陽>半兵東討. <臨淮>入請曰: '一死固甘, 乞免妻子.' <汾陽> 下, 持手上堂, 偶坐曰: '今國亂主遷, 非公不能東伐, 豈懷私忿時耶.' 及別, 執手泣涕, 相勉以忠義, 訖平巨盜, 實二公之力. 知其心不叛, 知其材可任, 然後, 心不疑, 兵可分. 平生積憤, 知其心, 難也. 忿必見短, 知其材, 益難也. 此<保 >與<汾陽>之賢等耳. <年>投<保 >, 必曰: '彼貴我賤, 我降下之, 不宜以舊忿殺我.' <保 >果不殺, 人之常情也; <臨淮>請死於<汾陽>, 亦人之常情也. <保 >任<年>事, 出於己. <年>且饑寒, 易爲感動. <汾陽>·<臨淮>平生抗立, <臨淮>之命, 出於天子, 於<保 >, <汾陽>爲優, 此乃聖賢遲疑成敗之際也. 彼無他也, 仁義之心, 與雜情 植, 雜情勝則仁義滅, 仁義勝則雜情消. 彼二人, 仁義之心旣勝, 復資之以明, 故卒成功. 世稱<周>·<召>爲百代之師, <周公>擁孺子, 而<召公>疑之. 以<周公>之聖·<召公>之賢, 少事<文王>, 老佐<武王>, 能平天下, <周公>之心, <召公>亦且不知之. 苟有仁義之心, 不資以明, 雖<召公>尙爾, 況其下哉. 語曰: '國有一人, 其國不亡.' 夫亡國, 非無人也, 丁其亡時, 賢人不用. 苟能用之, 一人足矣." <宋祈> 曰: "嗟乎, 不以怨毒相甚{ } , 而先國家之憂, <晉>有<祁奚>, <唐>有<汾陽>, <保 >, 孰謂<夷>無人哉."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저자의 견해 : 두 목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보 연간의 안 녹산의 난 때, 삭방 절도사 안사순은 녹산의 종제라는 이유로 처형당하였다. 그리고 곽 분양에게 조서를 주어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열흘 후에는 다시 이 임회에게 조서를 내려 부절을 가지고 가서 삭방 군사의 절반을 나누어 동으로 조, 위 지방에 나가게 하였다. 사순 때는 분양과 임회가 모두 아문 도장으로 있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한 자리에서 음식을 먹으면서도 항상 서로 눈을 흘기고 한 마디 말도 주고 받지 않았었다. 분양이 사순의 직무를 대신하게 되자, 임회는 도망하려 하였으나 미처 결행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분양은 임회에게 병력의 절반을 나누어 주고 동쪽을 정벌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임회가 들어가 분양에게 청하였다. '이 한 몸이 죽는 것은 실로 달게 받겠으나 처자만은 죽음을 면하게 해 주시오.' 분양은 내려가서 임회의 손을 잡고 당상으로 올라와 마주 앉아 말했다. '지금 나라가 어지러워 임금이 파천하였는데, 그대가 아니면 동쪽의 적을 평정할 수 없네. 어찌 사사로운 원한을 생각할 때란 말인가?' 그들은 작별할 때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충성과 의리로써 서로 격려하였으니, 나라의 큰 도적을 평정하게 된 것은 실로 두 사람의 힘이었다. 배반할 마음이 없음을 알고, 재능이 일을 맡길 만한 인물임을 안 뒤에야 비로소 의심하지 않고 군사를 나누어 줄 수 있는 법이다. 평생토록 상대에 대하여 분한 심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상대의 마음을 알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분노를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상대의 단점이 먼저 보이게 되므로 상대의 재능을 알아보기가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으로 보면 장보고와 분양의 현명한 정도는 비슷하다. 정 년이 보고에게 갈 때 틀림없이 "저 사람은 귀하게 되었고 나는 천하니, 내가 자신을 낮춘다면 응당 옛날의 분노로 말미암아 나를 죽이지는 않으리라"라고 하였을 것이다. 보고는 과연 그를 죽이지 않았으니 이는 인지상정이오, 임회가 분양에게 죽기를 청한 것도 역시 인지상정이었다. 장 보고가 정 년에게 임무를 맡긴 것은 자기 자신에게서 우러나온 것이다. 정 년은 또한 굶주린 상황에 있었으므로 감동되기도 쉬운 일이었다. 분양과 임회는 평생 대립하였지만, 임회에게 내린 명령은 천자에게서 전권을 받은 분양에게서 나왔으니, 장 보고와 비교하자면 곽 분양이 더욱 훌륭한 편이다. 이것이 바로 성현들이 성패를 속단하지 못하는 대목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인의의 마음이 잡스런 감정과 함께 존재하여, 잡스런 감정이 이기면 인의가 사라지고, 인의가 이기면 잡스런 감정이 사라지는 이치이다. 장 보고와 곽 분양, 두 사람은 인의의 마음이 이긴 데다가 총명함이 바탕을 이루었기 때문에 마침내 성공하였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주공과 소공을 백 대의 스승으로 칭송하지만, 주공이 어린 임금을 보좌할 때 소공이 그를 의심했었다. 주공의 성스러움과 소공의 현명함으로 젊어서는 문왕을 섬겼고, 늙어서는 무왕을 보좌하여 천하를 평정할 수 있었지만, 주공의 마음을 소공도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만약 인의의 마음이 있다할지라도 바탕에 총명함이 없으면, 비록 소공일지라도 의심할 수 밖에 없었으니, 하물며 그보다 못한 사람들이야 어떠하겠는가? '나라에 군자 한 사람만 있으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대개 나라가 망하는 것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망할 때를 당하여 어진 사람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로 어진 사람을 쓸 줄 안다면 한 사람으로도 족한 것이다."
송 기는 말했다.
"아아! 개인적인 원망으로 상호 해치지 않고, 나라 일을 먼저 걱정한 사람으로는 진에 기 해가 있었고, 당에 분양과 장 보고가 있었으니, 누가 이족에 사람이 없다고 할 것인가?"
, 系出眞骨, <奈密王>七世孫也, 父<仇梨知>級 . 本高門華胄, 風標淸秀, 志氣方正, 時人請奉爲花郞, 不得已爲之. 其徒無慮一千人, 盡得其歡心. <眞興王>命伊 <異斯夫>, 襲<加羅[一作<加耶>.]國>. 時, <斯多含>年十五六, 請從軍, 王以幼少不許, 其請勤而志 {確} , 遂命爲貴幢裨將, 其徒從之者亦衆. 及抵其國界, 請於元帥, 領麾下兵, 先入< 檀梁>[< 檀梁>, 城門名. <加羅>語謂門爲梁云.]. 其國人, 不意兵猝至, 驚動不能禦, 大兵乘之, 遂滅其國. 師還, 王策功, 賜<加羅>人口三百, 受已皆放, 無一留者. 又賜田, 固辭, 王强之, 請賜<閼川>不毛之地而已. <含>始與<武官郞>, 約爲死友. 及<武官>病卒, 哭之慟甚, 七日亦卒, 時年十七歲.
三國史記卷第四十四.
今西龍.
사다함은 그 계통이 진골 출신으로 나밀왕의 7세 손이요, 부친은 구리지 급찬이다. 본래 높은 가문의 귀한 자손으로서 풍채가 청수하고 지기가 방정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를 화랑으로 받들기를 청하므로 마지 못하여 화랑이 되었다. 그를 따르는 무리가 무려 1천 명이나 되었는데 사다함은 그들 모두의 환심을 얻었다.
진흥왕이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가라[가야라고도 한다.]국을 습격하게 하였는데, 이 때 사다함은 나이가 십 오륙 세로서 종군하기를 청하였다. 왕은 나이가 어리다 하여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요청이 간절하고 의지가 확고하므로 마침내 그를 귀당비장으로 임명하니 그의 낭도로서 그를 따라 나서는 자가 많았다. 국경에 이르자 원수에게 청하여 그 휘하의 병사를 거느리고 먼저 전단량[전단량은 성문 이름이다. 가라의 말로 문을 양(돌)이라 하였다.]으로 들어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뜻밖에도 군사들이 갑자기 들어닥치자 놀란 나머지 방어를 하지 못했으므로, 대군이 이 틈을 이용하여 마침내 그 나라를 멸하였다. 군사가 돌아오자 왕은 그의 전공을 책정하여 가라 인구 3백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받는 즉시로 전부 석방하여 한 명도 남겨두지 않았다. 그에게 또한 토지를 주었으나 굳이 사양하므로 왕이 받을 것을 강권하니 알천에 있는 불모지만을 요청하였다. 사다함은 애초에 무관랑과 목숨을 같이하는 벗이 되기를 약속하였는데, 무관이 병들어 죽자 너무나 슬프게 울다가 7일 만에 자기도 죽으니 당시 나이가 17세였다.
삼국사기 권 제 44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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