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史記卷第四十五.
삼국사기 권 제 45
列傳第五.
<乙巴素>·<金后稷>·<祿眞>·<密友>·<紐由>·<明臨答夫>
<昔于者{昔于老}> ·<朴堤上>·<貴山>·<溫達>.
趙炳舜. 『顯宗實錄字本』.
열전 제 5
을파소. 김 후직. 녹진. 밀우. 유유. 명림답부. 석우로. 박 제상. 귀산. 온달.
<高句麗>人也. <國川王>時, 沛者<於 留{於卑留}> ·評者<左可慮>等, 皆以外戚擅權, 多行不義, 國人怨憤. 王怒欲誅之, <左可慮>等謀反, 王誅竄之. 遂下令曰: "近者, 官以寵授, 位非德進, 毒流百姓, 動我王家, 此寡人不明所致也. 今, 汝四部, 各擧賢良在下者." 於是, 四部共擧<東部><晏留>, 王徵之, 委以國政.
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을파소는 고구려인이다.
국천왕 때의 패자 어비류와 평자 좌가려 등이 모두 왕의 외척으로서 권세를 부리고 그릇된 행동을 많이 하자 백성들이 원망하고 분개하였다. 왕이 노하여 그들을 죽이려 하자 좌가려 등이 모반하므로 일부는 죽이고 일부는 귀양을 보냈다. 그리고 명을 내려 말했다. "근자에 벼슬이 측근에게 주어지고, 지위가 덕행에 따라 올라 가지 못하는 일이 많아 그 해독이 백성에게 미치고 왕실을 동요시켰다. 이는 과인이 총명치 못한 탓이었다. 이제 너희들 4부에서는 각기 재야에 있는 현량을 천거토록 하라!" 이에 4부에서 모두 동부의 안류를 천거하자 왕이 그를 불러서 국정을 맡기려 하였다.
○<晏留>言於王曰: "微臣庸愚, 固不足以參大政. 西<鴨 谷><左勿村><乙巴素>者, <琉璃王>大臣<乙素>之孫也. 性質剛毅, 智慮淵深, 不見用於世, 力田自給. 大王若欲理國, 非此人則不可." 王遣使以卑辭重禮聘之, 拜中畏大夫, 加爵爲于台. 謂曰: "孤 承先業, 處臣民之上, 德薄材短, 未濟於理. 先生藏用晦明, 窮處草澤者久矣, 今不我棄, 幡然而來, 非獨孤之喜幸, 社稷生民之福也. 請安承敎, 公其盡心."
안류가 왕에게 말했다. "미천한 저는 용렬하고 어리석어 실로 중대한 정사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서쪽 압록곡 좌물촌에 사는 을파소라는 사람은 유리왕의 대신이었던 을소의 후손입니다. 그는 의지가 강하고 지혜가 깊은데 세상에 쓰이지 못하여 농사를 지어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만일 나라를 다스리려면 이 사람이 아니면 안될 것입니다." 왕이 사신을 보내 겸손한 말과 정중한 예로 그를 초빙하여 중외 대부로 임명하고, 작위를 더하여 우태로 삼으며 말했다. "내가 외람되이 선대의 왕업을 계승하여 신민의 위에 처하게 되었으나, 덕과 자질이 부족하여 정치를 잘하지 못하고 있소. 선생이 자질을 감추고 현명함을 드러내지 않은 채 초야에 묻힌 지 오래였으나, 지금 나를 버리지 않고 마음을 고쳐 잡고 이렇게 와주었으니, 이는 비단 나에게 다행한 일일 뿐만 아니라 나라의 사직과 백성의 복이라오. 가르침을 받기를 청하는 바이니 공은 마음을 다하여 주기 바라오."
○<巴素>意雖許國, 謂所受職, 不足以濟事. 乃對曰: "臣之駑蹇, 不敢當嚴命, 願大王選賢良, 授高官, 以成大業." 王知其意, 乃除爲國相, 令知政事. 於是, 朝臣國戚, 謂<巴素>以新間舊, 疾之. 王有敎曰: "無貴賤, 苟不從國相者, 族之." <巴素>退而告人曰: "不逢時則隱, 逢時則仕, 士之常也. 今, 上待我以厚意, 其可復念舊隱乎." 乃以至誠奉國, 明政敎, 愼賞罰, 人民以安, 內外無事. 王謂<晏留>曰: "若無子之一言, 孤不能得<巴素>以共理. 今, 庶績之凝, 子之功也." 拜爲大使者. 至<山上王>七年秋八月, <巴素>卒, 國人哭之慟.
파소는 생각은 비록 몸을 나라에 바치고 싶었으나 맡은 바 직위가 일을 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말했다. "신의 노둔함으로 감히 존엄하신 명령을 감당할 수 없사오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현량한 사람을 선발하여 높은 관직을 줌으로써 위업을 달성케 하소서!" 왕이 그의 뜻을 알고 곧 국상을 제수하여 정사를 맡겼다. 이 때 조정의 신하들과 외척들은 파소가 새로 등용되어 이전의 대신들을 이간한다 하여 그를 미워하였다. 왕은 교서를 내려 말했다. "귀천을 막론하고 만약 국상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면 일족을 멸하리라." 파소가 물러 나와서 사람들에게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어살고, 때를 만나면 벼슬을 하는 것은 선비로서의 떳떳한 행동이다. 이제 임금께서 나를 후의로 대우하시니 어찌 다시 예전의 은거를 생각하랴?"라고 말하며, 곧 지성으로 나라에 봉사하여 정교를 밝히고 상벌을 신중하게 처리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고 내외가 무사하였다. 왕이 안류에게 "만일 그대의 한 마디 말이 없었다면 내가 을파소를 얻어서 그와 함께 다스리지 못하였을 것이다. 지금 모든 치적이 이루어진 것은 그대의 공로이다"라 말하고, 그를 대사자로 임명하였다. 산상왕 7년 가을 8월에 파소가 죽자 백성들이 통곡하였다.
<智證王>之曾孫. 事<眞平大王>, 爲伊 , 轉兵部令. 大王頗好日{田} 獵, <后稷>諫曰: "古之王者, 必一日萬機, 深思遠慮, 左右正士, 容受直諫, , 不敢逸豫, 然後, 德政醇美, 國家可保. 今, 殿下日與狂夫獵士, 放鷹犬, 逐雉兎, 奔馳山野, 不能自止. <老子>曰: '馳聘田獵, 令人心狂.' 『書』曰: '內作色荒, 外作禽荒, 有一于此, 未或不亡.' 由是觀之, 內則蕩心, 外則亡國, 不可不省也, 殿下其念之." 王不從, 又切諫, 不見聽.
趙炳舜. 『三國史節要』.
김 후직은 지증왕의 증손이다. 그는 진평대왕을 섬겨 이찬이 되었다가 병부령으로 전직하였다. 대왕이 사냥을 몹시 좋아하자 후직이 간하였다. "옛날 임금들은 하루에도 만 가지 정사를 보살피되 반드시 심사원려하여, 좌우에 바른 선비를 두고 그들의 바른 말을 받아 들였으며, 부지런하고 꾸준히 노력하여 감히 안일하고 편안할 생각을 품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뒤에야 덕정이 순미하여 국가를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매일 광부와 포수을 데리고 매와 사냥개를 놓아 꿩과 토끼를 잡기 위하여 산과 들로 뛰어 다니기를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자]는 '말달리며 사냥하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한다'고 하였으며, [서경]에는 '안으로 여색에 빠지거나 밖으로 사냥을 일삼는 것 가운데 한 가지만 저질러도 망하지 않는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보면 사냥은 안으로 마음을 방탕하게 하고, 밖으로 나라를 망치는 것이니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를 유념하소서." 그러나 왕이 말을 듣지 않아 다시 간절하게 충언하였으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後, 后稷疾病, 將死, 謂其三子曰: "吾爲人臣, 不能匡救君惡, 恐大王遊娛不已, 以至於亡敗, 是吾所憂也. 雖死, 必思有以悟君, 須 吾骨於大王遊 之路側." 子等皆從之. 他日, 王出行, 半路有遠聲, 若曰莫去. 王顧問: "聲何從來." 從者告云: "彼<后稷>伊 之墓也." 遂陳<后稷>臨死之言, 大王 然流涕曰: "夫子忠諫, 死而不忘, 其愛我也深矣. 若終不改, 其何顔於幽明之間耶." 遂終身不復獵.
그 후, 후직이 병들어 죽음을 앞두게 되었을 때 자기의 세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신하로서 임금의 단점을 바로잡아 주지 못하였다. 아마 대왕은 놀고 즐기는 일을 그만 두지 않아 패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근심하는 것이다. 죽어서라도 꼭 임금을 깨우쳐 주려 하니, 나의 시체를 대왕이 사냥다니는 길 옆에 묻어라." 세 아들은 그의 유언대로 실행하였다.
후일 왕이 사냥을 가다가 도중에 어렴풋한 소리가 들렸는데 마치 "가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았다. 왕이 돌아보며 "소리가 어디서 나느냐?"고 물었다. 종자가 말하기를 "저것은 후직 이찬의 무덤입니다" 하고는 이어서 후직이 죽을 때 남긴 말을 전해 주었다. 대왕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그대는 충성으로 간언하고 죽어서도 잊지 않으니, 나에 대한 사랑이 깊도다. 끝내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살아서나 죽어서나 무슨 낯으로 대하겠는가!" 왕은 마침내 다시는 사냥을 하지 않았다.
姓與字, 未詳. 父<秀奉>一吉 . <祿眞>二十三歲始仕, 屢經內外官, 至<憲德大王>十年戊戌, 爲執事侍郞. 十四年, 國王無嗣子, 以母弟<秀宗>, 爲儲貳, 入<月池宮>. 時, <忠恭>角干爲上大等, 坐政事堂, 注擬內外官, 退公感疾, 召國醫診脈, 曰: "病在心臟, 須服龍齒湯." 遂告暇三七日, 杜門不見賓客.
녹진의 성과 자는 자세하지 않다. 아버지는 수봉 일길찬이다. 녹진은 23세에 비로소 관직에 올라 여러 차례 내외의 직책을 역임하다가 헌덕대왕 10년 무술에 집사 시랑이 되었다. 14년에 국왕이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므로 왕의 아우 수종을 태자로 삼아 월지궁에 들게 하였다. 이 때 충공 각간이 상대등이 되어 정사당에 앉아서 내외의 관원을 전형했는데, 하루는 퇴근하여 집에 있다가 병이 들었다. 국의를 불러 진맥하니 그가 말했다. "병이 심장에 있으니 용치탕을 복용해야 합니다." 그는 곧 21일 간의 휴가를 얻어 문을 닫고 손님을 만나지 않았다.
○於是, <祿眞>造而請見, 門者拒焉. <祿眞>日{曰} : "下官非不知相公移疾謝客, 須獻一言於左右, 以開鬱 之慮, 故此來耳, 若不見, 則不敢退也." 門者再三復之, 於是, 引見. <祿眞>進曰: "伏聞寶體不調, 得非早朝晩罷, 蒙犯風露, 傷榮衛之和, 失支體之安乎?" 曰: "未至是也, 但昏昏默默, 精神不快耳." <祿眞>曰: "然則公之病, 不須藥石, 不須針 , 可以至言高論, 一攻而破之也, 公將聞之乎?" 曰: "吾子不我遐遺, 惠然光臨, 願聽玉音, 洗我胸臆."
『북한본』.
이 때 녹진이 가서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문지기가 이를 거절하였다. 녹진이 말했다. "나는 상공께서 병 때문에 빈객을 사절하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나, 꼭 한 마디 말씀을 좌우에 드려서 답답한 근심을 풀어드려야겠기에 이렇게 온 것이다. 만나지 않고는 물러갈 수 없다." 문지기가 두 세 번 이 뜻을 전하자 충공은 그를 불러들여 만나 주었다.
녹진이 들어가 말했다. "제가 듣건대 귀중한 몸이 편치 못하시다고 하니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 퇴근하느라 바람과 이슬을 맞아 혈기의 조화를 손상시켜 지체의 편안함을 잃은 것이 아닙니까?" 충공이 말했다.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았고 다만 머리가 멍하고 정신이 상쾌하지 못할 뿐이다." 녹진이 말했다. "그렇다면 공의 병은 약이나 침으로 고쳐지는 것이 아니라 지극한 말과 고상한 담론으로 단번에 고칠 수 있을 것이니 공께서 이를 들어주시겠습니까?" 충공이 말했다. "그대가 나를 멀리 여기지 않고 고맙게도 와주었으니 옥음을 들려주어 내 가슴 속을 씻어 주기 바란다."
○<祿眞>曰: "彼梓人之爲室也, 材大者爲梁柱, 小者爲椽 , 偃者植者各安所施, 然後, 大廈成焉. 古者, 賢宰相之爲政也, 又何異焉? 才巨者, 置之高位, 小者授之薄任. 內則六官·百執事, 外則方伯·連率·郡守·縣令, 朝無闕位, 位無非人, 上下定矣, 賢不肖分矣, 然後, 王政成焉. 今則不然, 徇私而滅公, 爲人而擇官, 愛之則雖不材, 擬送於雲 , 憎之則雖有能, 圖陷於溝壑. 取捨混其心, 是非亂其志, 則不獨國事 濁, 而爲之者, 亦勞且病矣. 若其當官淸白, 事恪恭, 杜貨賂之門, 遠請託之累, 黜陟只以幽明, 予奪不以愛憎, 如衡焉, 不可枉以輕重, 如繩焉, 不可欺以曲直. 如是, 則刑政允穆, 國家和平, 雖曰開<孫弘>之閤, 置<曹參>之酒, 與朋友故舊, 談笑自樂可也. 又何必區區於服餌之間, 徒自費日廢事爲哉?"
녹진이 말했다. "목수가 집을 지을 때, 큰 재목으로는 들보와 기둥을 만들고, 작은 재목으로는 서까래를 만들어 굽은 것과 바른 것이 각각 알맞게 자리잡은 뒤에야 큰 집이 지어집니다. 옛날에 어진 재상이 정치를 하는 법도도 무엇이 이와 달랐겠습니까? 재능이 많은 자는 높은 자리에 앉히고, 재능이 적은 자는 가벼운 소임을 맡기어, 안으로 6관 백집사와 밖으로 방백, 연솔, 군수, 현령에 이르기까지 조정에 빈 직위가 없고, 직위마다 부당한 자가 없어서 위아래가 정연하고, 현명함과 불초함이 구별되었습니다. 그렇게 한 뒤에야 왕정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고, 사사로운 감정에 이끌려 공적인 일을 그르치고, 사람을 위하여 관직을 고르기 때문에 그 사람이 마음에 들면 재능이 없어도 아주 높은 직을 주려하고, 그 사람을 미워하면 유능하더라도 구렁텅이에 빠뜨리려 합니다. 취하고 버림이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옳고 그름이 뜻을 어지럽게 하니, 나라 일이 혼탁해질 뿐 아니라, 그 일을 담당하는 사람도 괴롭고 병이 날 것입니다. 만일 관직에 있으면서 청렴결백하고, 일에 근신하며, 뇌물이 오가는 문을 막고, 청탁의 폐단을 멀리하며, 승진과 강등을 오직 그 사람의 총명에 따르고, 관직을 주고 빼앗는 것을 애증에 의하여 하지 않는다면, 마치 저울처럼 경중을 잘못 가릴리 없으며, 먹줄처럼 곡직을 속이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형정이 믿음직스럽고 국가가 화평하여, 비록 손 홍과 같이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조 참과 같이 잔치를 베풀어 친구들과 한담 오락을 하고 있어도 좋을 것입니다. 어찌 꼭 약을 먹기에 몰두하고 부질없이 시일을 소비하여 공사를 폐지하겠습니까?"
○角干, 於是, 謝遣醫官, 命駕朝王室. 王曰: "謂卿剋日服藥, 何以來朝?" 答曰: "臣聞<祿眞>之言, 同於藥石, 豈止飮龍齒湯而已哉?" 因爲王一一陳之. 王曰: "寡人爲君, 卿爲相, 而有人直言如此, 何喜如焉? 不可使儲君不知, 宜往<月池宮>." 儲君聞之. 入賀曰: "嘗聞君明則臣直, 此亦國家之美事也." 後, <熊川州>都督<憲昌>反叛, 王擧兵討之, <祿眞>從事有功, 王授位大阿 , 辭不受.
각간이 이 말을 듣자 의원을 사절하여 보내고 수레를 타고 왕궁으로 입조하였다. 왕이 말했다. "경은 날을 정해 놓고 복약한다더니 어찌하여 내조하는가?" 충공이 대답하였다. "신이 녹진의 말을 들으니 약석과 같았습니다. 어찌 용치탕을 마시는 것에 비교하겠습니까!" 그는 그 자리에서 왕에게 녹진의 말을 낱낱이 고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과인은 임금이 되고, 경은 재상이 되었는데, 이와 같이 바른 말 하는 사람이 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태자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으니 월지궁으로 가야 되겠다"고 하였다. 태자가 이 말을 듣고 들어와서 치하하기를 "일찌기 듣건대 임금이 명철하면 신하가 바르다고 하였습니다. 이 역시 나라의 아름다운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 웅천주 도독 헌창이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군사를 발동하여 이를 치는데, 녹진이 종군하여 공로가 있었으므로 왕이 대아찬 벼슬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사양하고 이를 받지 않았다.
<紐由>者, <高句麗>人也. <東川王>二十年, <魏><幽州>刺史< 丘儉>, 將兵來侵, 陷<丸都城>. 王出奔, 將軍<王 >追之. 王欲奔<南沃沮>, 至于<竹嶺>, 軍士奔散殆盡. 唯<東部><密友>, 獨在側, 謂王曰: "今追兵甚迫, 勢不可脫. 臣請決死而禦之, 王可遁矣." 遂募死士, 與之赴敵力戰, 王僅得脫而去, 依山谷, 聚散卒自衛. 謂曰: "若有能取<密友>者, 厚賞之." 下部<劉屋句>前對曰: "臣試往焉." 遂於戰地, 見<密友>伏地, 乃負而至, 王枕之以股, 久而乃蘇.
밀우와 유유는 모두 고구려인이다. 동천왕 20년에 위 나라 유주 자사 관 구검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환도성을 함락시키니 왕이 성에서 나와 도주하였다. 장군 왕 흔이 왕을 추격하였다. 왕이 남옥저로 달아나기 위하여 죽령에 이르렀을 때 군사들은 거의 모두 흩어지고 다만 동부의 밀우가 혼자 왕 옆에 있다가 왕에게 말했다. "이제 추격해 오는 군사가 매우 가까이 있으니 형세가 급박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결사적으로 막겠사오니 왕께서는 도망하소서." 밀 우는 드디어 결사대를 모집하여 함께 적진으로 달려가 힘껏 싸웠다. 왕은 이 틈을 타서 겨우 탈출하였다. 왕은 가다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흩어진 군사를 모아 방어하면서 말했다. "만일 밀우를 찾아올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후한 상을 주겠다." 하부의 유 옥구가 앞으로 나서면서 대답하였다. "신이 가보겠습니다." 그는 곧 싸움터로 가서 땅에 쓰러져 있는 밀우를 발견하고 즉시 업어 왔다. 그는 왕이 무릎을 베어주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소생했다.
○王間行轉輾, 至<南沃沮>, <魏>軍追不止. 王計窮勢屈, 不知所爲. <東部>人<紐由>進曰: "勢甚危迫, 不可徒死. 臣有愚計, 請以飮食, 往 <魏>軍, 因伺隙, 刺殺彼將, 若臣計得成, 則王可奮擊決勝." 王曰: "諾." <紐由>入<魏>軍, 詐降曰: "寡君獲罪於大國, 逃至海濱, 措躬無地矣. 將以請降於陣前, 歸死司寇, 先遣小臣, 致不 之物, 爲從者羞." <魏>將聞之, 將受其降, <紐由>隱刀食器, 進前拔刀, 刺<魏>將胸, 與之俱死, <魏>軍遂亂.
왕은 사잇길을 헤매다가 남옥저에 이르렀다. 그러나 위 나라 군사는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왕은 마땅한 방법도 없고 형세도 궁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 때, 동부 사람 유유가 말했다. "형세가 매우 위급하니 그냥 죽을 수는 없습니다. 신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있사온 바, 음식을 차려 가지고 위 나라 군사를 한턱 먹이는 체하다가 틈을 타서 저들의 장수를 찔러 죽이겠습니다. 만일 신의 계책이 이루어진다면 이 때 왕께서 공격하여 승부를 결판 내소서." 왕이 "좋다"고 말하였다. 유유가 위의 군중에 들어가서 거짓 항복하는 체하며 말했다. "우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짓고 도망하여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몸 둘 곳이 없다. 장차 진 앞에 나아가 항복을 청하고 형리의 처벌을 받으려 하는데, 먼저 소신을 보내 변변치 않은 음식으로 종자들에게 먹이려 한다." 위의 장수가 이 말을 듣고 항복을 받으려 하였다. 유유가 칼을 음식 그릇에 숨겼다가 앞으로 달려 들어 칼을 뽑아 위장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으니 위나라 군중이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 不能陳, 遂自<樂浪>而退. 王復國論功, 以<密友>·<紐由>, 爲第一. 賜<密友><巨谷>·<靑木谷>, 賜<屋句><鴨綠>·<豆訥河原>, 以爲食邑, 追贈<紐由>爲九使者. 又以其子<多優>爲大使者.
왕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갑자기 그들을 공격하였다. 위군이 혼란해져 진을 정비하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으로부터 물러 갔다.
왕이 서울로 돌아와서 전공을 평정하면서 밀우와 유유의 공로를 첫째로 삼아 밀우에게 거곡과 청목곡을 하사하고, 옥구에게 압록강의 두눌하원을 하사하여 그들의 식읍으로 하였으며, 유유에게는 벼슬을 추증하여 구사자로 하고, 또한 그의 아들 다우를 대사자로 삼았다.
<高句麗>人也. <新大王>時, 爲國相. <漢><玄 郡>大守{太守} <耿臨>, 發大兵欲攻我, 王問群臣戰守執{孰} 便. 衆議曰: "<漢>兵, 恃衆輕我, 若不出戰, 彼以我爲怯, 數來, 且我國山險而路隘, 此所謂一夫當關, 萬夫莫當者也. <漢>兵雖衆, 無如我何, 請出師禦之." < 夫>曰: "不然, <漢>國大民衆, 今以强兵遠鬪, 其鋒不可當也. 而又兵衆者宜戰, 兵小{少} 者宜守, 兵家之常也. 今, <漢>人千里轉糧, 不能持久, 若我深溝高壘, 淸野以待之, 彼必不過旬月, 饑困而歸. 我以勁卒迫之, 可以得志." 王然之, 城固守.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
명림답부는 고구려인이다. 신대왕 때 국상이 되었다. 한 나라 현토 태수 경림이 대군을 발동하여 우리를 침공하려 하자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공격과 방어에서 어느 것이 유리할 것인가를 물었다.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여 말했다. "한 나라 군사는 병사의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업신여기는데 만약 나아가 싸우지 않는다면 저들은 우리를 비겁하다 하여 자주 올 것이요, 반면에 우리 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으니 이야말로 한 명이 관문을 지켜도 만 명이 당하지 못하는 격입니다. 따라서 한군이 비록 많다고 하지만 우리를 어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청컨대 군사를 출동시켜 방어하소서." 답부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은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으며, 지금 정예병이 멀리 와서 싸우니 그 예봉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또한 군사가 많은 자는 마땅히 싸워야 하고, 군사가 적은 자는 지켜야 한다는 것이 병가의 상법입니다. 지금 한 나라 사람들은 천 리 길에 군량을 운반해 왔으므로 오랫 동안 버티지는 못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구덩이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으며, 들판을 비워 놓고 기다린다면, 저들은 틀림없이 한 달이 넘지 않아서 굶주리고 피곤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그 때 우리가 강병을 앞세워 추격한다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그렇게 여겨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漢>人攻之不克, 士卒饑餓引還. < 夫>帥師數千騎, 追之, 戰於<坐原>, <漢>軍大敗, 匹馬不反. 王大悅, 賜<答夫><坐原>及<質山>, 爲食邑. 十五年秋九月卒, 年百十三歲. 王自臨慟, 罷朝七日, 以禮葬於<質山>, 置守墓二十家.
한 나라 사람들이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장수와 졸병들이 굶주렸으므로 돌아갔다. 답부가 수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좌원에서 교전하였는데, 한 나라 군사가 대패하여 단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하사하여 그의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그가 15년 가을 9월에 죽으니 나이가 113세였다. 왕이 직접 가서 애통해 하며 7일 간 조회를 금하였으며, 예를 갖추어 질산에 장사하고 묘지기 20가를 두었다.
<奈解>尼師今之子.[或云, 角干<水老>之子也.] <助賁王>二年七月, 以伊 爲大將軍, 出討<甘文國>, 破之, 以其地爲郡縣. 四年七月, <倭>人來侵, <于老>逆戰於<沙道>, 乘風縱水{火} , 焚賊戰艦, 賊溺死且盡. 十五年正月, 進爲舒弗耶{舒弗邯} 兼知兵馬事. 十六年, (+冬十月) <高句麗>侵北邊, 出擊之, 不克, 退保<馬頭柵>. 至夜, 士卒寒苦, <于老>躬行勞問, 手燒薪 { } , 暖熱之, 群心感喜, 如夾 . <沽解王{沾解王}> 在位, <沙梁伐國>舊屬我, 忽背而歸<百濟>, <于老>將兵往討滅之.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
석 우로는 나해 이사금의 아들이다.[혹은 각간 수로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조분왕 2년 7월에 이찬으로서 대장군이 되어 감문국을 토벌하여 이를 격파하고 그 지역을 군현으로 만들었다. 4년 7월에 왜인이 침략해오자 우로가 사도에서 역습하였다. 그가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질러 적의 전함을 불태우자 적들은 물로 뛰어들어 모두 죽었다. 그는 15년 정월에 서불한으로 승급되고 동시에 병마사도 겸하였다. 16년,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므로 우로가 이를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퇴각하여 마두책을 지켰다. 밤에 군사들이 몹시 추워하므로 우로가 직접 다니면서 위로하고, 직접 불을 피워 따뜻하게 해주니 여러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기쁘게 느껴 마치 솜을 두르고 있는 것 같이 여겼다. 첨해왕이 왕위에 있을 때, 이전부터 우리에게 속해있던 사량벌국이 갑자기 배반하여 백제로 투항하므로, 우로가 군사를 거느리고 그를 토벌하여 멸해버렸다.
○七年癸酉, <倭國>使臣<葛那古{葛耶古}> 在館. <于老>主之, 與客戱言: "早晩, 以汝王爲鹽奴, 王妃爲 婦." <倭>王聞之怒, 遣將軍<于道朱君>, 討我, 大王出居于<柚村>. <于老>曰: "今玆之患, 由吾言之不愼, 我其當之." 遂抵<倭>軍, 謂曰: "前日之言, 戱之耳, 豈意興師至於此耶." <倭>人不答, 執之, 積柴置其上, 燒殺之乃去. <于老>子, 幼弱不能步, 人抱以騎而歸, 後爲<訖解>尼師今. <未鄒王{味鄒王}> 時, <倭>國大臣來聘, <于老>妻請於國王, 私饗<倭>使臣. 及其泥醉, 使壯士曳下庭焚之, 以報前怨. <倭>人忿, 來攻<金城>, 不克引歸.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記』 目錄, 新羅本紀.
7년 계유에 왜국 사신 갈나고가 사관에 와 있었다. 우로가 주인처럼 행세하며 손님에게 다음과 같은 농담을 건넸다. "조만간에 너의 국왕을 염전의 노비로 만들고, 너의 왕비는 취사부로 만들겠다." 왜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장군 우도주군을 보내 우리를 공격하자 대왕이 유촌에 나가 있었다. 우로가 말했다. "지금의 환란은 제가 말을 조심하지 않은 데에서 비롯된 것이니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우로는 마침내 왜군에게 가서 말하기를 "전일에 한 말은 농담일 뿐이었는데, 이렇게 군사를 일으킬 줄이야 어찌 뜻하였으랴?"라 하니 왜인이 대답을 하지 않고 그를 붙잡아 장작을 쌓아 그 위에 얹어 놓고 불태워 죽인 다음 가버렸다.
우로의 아들은 어려서 몸이 약한 탓에 걸음을 걷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항상 그를 안아다가 말에 태워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는 후에 흘해 이사금이 되었다. 미추왕 때 왜국 대신이 예방하여 왔었는데 우로의 처는 국왕에게 청하여 왜국 사신을 개인적으로 대접할 기회를 얻었다. 왜국의 사신이 흠뻑 술에 취하였을 때, 그녀는 장사로 하여금 그를 뜰에 내려놓고 불에 태워 전날의 원수를 갚았다. 왜인들이 분개하여 금성에 침공하여 왔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論曰: <于老>爲當時大臣, 掌軍國事, 戰必克, 雖不克, 亦不敗, 則其謀策必有過人者. 然以一言之悖, 以自取死, 又令兩國交兵, 其妻能報怨, 亦變而非正也. 若不爾者, 其功業, 亦可錄也.
저자의 견해 : 우로가 당시의 대신으로서, 군국의 사무를 맡아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또한 이기지 못하더라도 패하지는 않았으니, 그의 모책이 틀림없이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말 한 마디를 잘못함으로써 스스로 죽음의 길로 들어섰고, 또한 두 나라 사이에 싸움까지 일으켰다. 그의 아내가 원수를 갚을 수 있었으나 이것도 역시 변칙이요 올바른 길은 아니었다. 만약 이러하지 않았다면 그의 공적도 기록에 남길 만하였다.
[或云<毛末>.], 始祖<赫居世>之後, <婆娑>尼師今五世孫. 祖, <阿道>葛文王; 父, <勿品>波珍 . <堤上>仕爲< 良州>干. 先是, <實聖王>元年壬寅, 與<倭國>講和, <倭>王請以<奈勿王>之子<未斯欣>爲質. 王嘗恨<奈勿王>使己質於<高句麗>, 思有以釋憾於其子, 故不拒而遣之. 又十一年王子{壬子} , <高句麗>, 亦欲得<未斯欣>之兄<卜好>爲質, 大王又遣之. 及<訥祗王>卽位, 思得辯士, 往迎之. 聞<水酒村>千{干} <伐寶靺>·<一利村>干<仇里 >·<利伊村>干<波老>三人有賢智, 召問曰: "吾弟二人, 質於<倭>·<麗>二國, 多年不還. 兄弟之故, 思念不能自止, 願使生還, 若之何而可?" 三人同對曰: "臣等聞< 良州>千{干} <堤上>, 剛勇而有謀, 可得以解殿下之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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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제상[혹은 모말이라고도 한다.]은 시조 혁거세의 후손이요, 파사 이사금의 5세 손이고, 조부는 아도 갈문왕이었으며, 아버지는 물품 파진찬이었다. 제상은 벼슬길에 나아가 삽량주 간이 되었다.
이 보다 앞서 실성왕 원년 임인에 왜국과 화친을 맺을 때, 왜왕이 나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인질로 요구하였다. 실성왕은 일찌기 나물왕이 자기를 고구려에 인질로 가게 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여 그 아들에게 분풀이를 하고자 했기 때문에, 왜왕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고 그를 인질로 보내게 하였다. 또한 11년 임자에 고구려에서도 미사흔의 형 복호를 인질로 요구하여 대왕이 또한 그를 보냈다. 눌지왕이 즉위하자 변사를 구하여 그들을 데려 오기로 하였다. 대왕은 수주촌 간 벌보말과 일리촌 간 구리내와 이이촌 간 파로 등 세 사람이 어질고 지혜롭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불러 물었다. "나의 아우 두 사람이 왜국과 고구려 두 나라에 인질로 가서 수 년 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형제인 까닭에 보고 싶은 생각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는지라 그들이 살아서 돌아오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세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하였다. "신들이 듣건대 삽량주 간 제상은 사람이 굳세고 용감하며 지모가 있다 하니, 그가 족히 전하의 근심을 풀어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於是, 徵<堤上>使前, 告三臣之言, 而請行. <堤上>對曰: "臣雖愚不肖, 敢不唯命 {祗} 承." 遂以聘禮入<高句麗>, 語王曰: "臣聞交隣國之道, 誠信而已. 若交質子, 則不及五覇, 誠未{末} 世之事也. 今, 寡君之愛第{弟} 在此, 殆將十年. 寡君以 在原之意, 永懷不已. 若大王惠然歸之, 則若九牛之落一毛, 無所損也. 而寡君之德大王也, 不可量也, 王其念之." 王曰: "諾." 許與同歸. 及歸國, 大王喜慰曰: "我念二弟, 如左右臂, 今只得一臂, 奈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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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제상을 불러 앞으로 오게 하고 세 신하의 말을 전하며 고구려로 가주기를 요청하니 제상이 대답하였다. "신이 비록 어리석고 불초하나 어찌 감히 명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제상은 드디어 빙례를 갖추고 고구려로 들어가서 왕에게 말했다. "제가 듣건대 이웃 나라와 교제하는 도는 성실과 신의뿐이라고 합니다. 만일 인질을 서로 주고 받는다면 이는 오패만도 못한 것이니 실로 말세의 행위가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임금의 사랑하는 아우가 여기에 있은 지 거의 10년이 됩니다. 우리 임금은 척령이 들판에 있는 듯이 영영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대왕이 고맙게도 그를 돌려 보내 주신다면, 이는 마치 구우일모 격으로서 대왕에게는 손해될 것이 없으나, 우리 임금은 한없이 대왕의 유덕함을 칭송하게 될 것입니다. 왕께서는 이 점을 유념하여 주소서!" 왕은 "좋다"고 하면서 그들이 함께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들이 귀국하자 대왕은 기뻐하고 위로하면서 말했다. "나는 두 아우 생각하기를 좌우의 두 팔과 같이 하는데, 이제 다만 한 팔만 찾았으니 어찌 해야 하는가?"
○<堤上>報曰: "臣雖奴才, 旣以身許國, 終不辱命. 然, <高句麗>大國, 王亦賢君, 是故, 臣得以一言悟之. 若<倭>人, 不可以口舌諭, 當以詐謀, 可使王子歸來. 臣適彼, 則請以背國論使彼聞之." 乃以死自誓, 不見妻子, {祗} <粟浦>, 汎舟向<倭>. 其妻聞之, 奔至浦口, 望舟大哭曰: "好歸來." <堤上>回顧曰: "我將命入敵國, 爾莫作再見期." 遂徑入<倭國>, 若叛來者, <倭>王疑之. <百濟>人, 前入<倭>, 讒言: <新羅>與<高句麗>謀侵王國, <倭>遂遣兵, 邏戍<新羅>境外. 會<高句麗>來侵, 幷擒殺<倭>邏人, <倭>王乃以<百濟>人言爲實. 又聞<羅>王囚<未斯欣>·<堤上>之家人, 謂<堤上>實叛者.
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제상이 대답하였다. "신이 비록 재주가 노둔하오나 이미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끝까지 명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대국이고 왕도 역시 어진 임금이었기 때문에 신이 한 마디 말로써 그를 깨우칠 수 있었지만, 왜인들은 말로써 달랠 수 없으니 속임수로써 왕자를 돌아오게 해야합니다. 신이 저 곳에 가거든, 신이 반역하였다는 죄를 씌우고, 이 소식이 저들의 귀에 들어가게 하소서." 제상은 이에 죽기를 맹세하고 처자도 만나지 않은 채 율포로 가서 배를 타고 왜로 향하였다. 그의 아내가 이 소문을 듣고 포구로 달려가 배를 바라보면서 대성통곡하며 말했다. "잘 다녀 오시오!" 제상이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내가 명을 받들고 적국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그대는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지 마시오." 라 하고, 드디어 그 길로 곧장 왜국에 들어갔다. 그는 마치 모반하다가 그곳에 온 것처럼 행동하였으나 왜왕이 그를 의심하였다. 그런데 그보다 얼마 전에 백제인이 왜국에 가서 '신라와 고구려가 모의하여 왕의 나라를 침공하려 한다'고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왜국에서는 군사를 보내 신라 국경 밖에서 염탐하게 하였다. 그 때 마침 고구려가 침입하여 왜의 염탐꾼을 모두 잡아 죽였다.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왜왕은 백제인의 말을 사실로 여겼으며, 또한 신라왕이 미사흔과 제상의 가족을 가두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자, 제상이 정말 배반자라고 믿게 되었다.
○於是, 出師將, 襲<新羅>, 兼差<堤上>與<未斯欣>爲將, 兼使之鄕導. 行至海中山島, <倭>諸將密議, 滅<新羅>後, 執<堤上>·<未斯欣>妻 以還. <堤上>知之, 與<未斯欣>乘舟遊, 若捉魚鴨者, <倭>人見之, 以謂無心喜焉. 於是, <堤上>勸<未斯欣>潛歸本國. <未斯欣>曰: "僕奉將軍如父, 豈可獨歸." <堤上>曰: "若二人俱發, 則恐謀不成." <未斯欣>抱<堤上>項, 泣辭而歸. <堤上>獨眠室內, 晏起, 欲使<未斯欣>遠行. 諸人問: "將軍何起之晩?" 答曰: "前日, 行舟勞困, 不得夙興." 及出, 知<未斯欣>之逃, 遂縛<堤上>, 行舡追之. 適, 煙霧晦冥, 望不及焉.
이에 왜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를 습격하기로 하고, 제상과 미사흔을 장수 겸 향도로 삼았다. 행렬이 바다에 있는 산으로 된 섬에 이르자 왜의 여러 장수들이, 신라를 멸한 뒤에는 제상과 미사흔의 처자를 잡아 오자고 은밀히 의논하였다. 제상이 이를 알고 미사흔과 함께 배를 타고 놀면서 마치 물고기와 오리를 잡는 것 같이 행동하니, 왜인들은 이것을 보고 그들에게 다른 마음이 없다고 좋아하였다. 이 때 제상이 미사흔에게 슬며시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미사흔은 "내가 장군을 아버지처럼 받들고 있는데 어찌 나 혼자 돌아가겠는가?"라고 대답했다. 제상이 말했다. "만약 두 사람이 함께 떠난다면 일이 성사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미사흔은 제상의 목을 안고 울면서 하직하고 돌아왔다. 제상은 방안에서 혼자 자다가 늦게야 일어났다. 이는 미사흔으로 하여금 멀리 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장군은 왜 늦게 일어나느냐"고 물으니, 제상은 "전 날 배를 탔더니 피곤하여 일찍 일어날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그가 밖으로 나오자 왜인들은 마침내 미사흔이 도망간 것을 알고 제상을 결박해 놓은 채 배를 풀어 추격하였다. 때마침 안개가 대단히 짙게 끼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歸<堤上>於王所, 則流於<木島>, 未幾, 使人以薪火燒爛支體, 然後, 斬之. 大王聞之哀慟, 追贈大阿 , 厚賜其家, 使<未斯欣>, 娶其<堤上>之第二女爲妻, 以報之. 初, <未斯欣>之來也, 命六部遠迎之, 及見, 握手相泣. 會兄弟置酒極娛, 王自作歌舞, 以宣其意. 今, 鄕樂<憂息曲>, 是也.
왜인은 제상을 왕의 처소로 돌려보내고, 곧바로 목도로 유배시켰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장작불로 온 몸을 태운 뒤에 목을 베었다. 대왕은 이 소문을 듣고 애통해 하며 대아찬을 추층하고, 그의 가족들에게 후하게 물건을 하사하고, 미사흔으로 하여금 제상의 둘째 딸을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함으로써 은혜에 보답케 하였다. 처음 미사흔이 돌아올 때 대왕은 6부에 명령하여 멀리 나가서 그를 맞게 하였으며, 그를 만나게 되자 손을 잡고 서로 울었다. 형제들이 모여 술자리를 마련하고 마음껏 즐겼으며, 왕이 가무를 스스로 지어 자신의 뜻을 나타냈는데, 지금 향악 가운데의 우식곡이 그것이다.
<沙梁部>人也. 父, <武殷>阿干. <貴山>少與部人< 項>爲友. 二人相謂曰: "我等期與士君子遊, 而不先正心修身, 則恐不免於招辱, 聞道於賢者之側乎." 時, <圓光>法師, 入<隋>遊學, 還居<加悉寺>, 爲時人所尊禮.
귀산은 사량부 사람으로서 아버지는 무은 아간이다. 귀산은 젊어서 같은 부에 있는 사람 추항을 벗으로 삼았다. 두 사람은 서로 말했다. "우리가 선비나 군자와 함께 교유하기를 기대하면서도,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지 않는다면 아마도 욕을 당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어찌 어진 사람 옆에서 도를 배우지 않겠는가?" 당시에 원광 법사가 수 나라에 유학을 다녀와서 가실사에 있었는데 그 때 사람들이 그를 높이 예우하였다.
○<貴山>等詣門, 衣進告曰: "俗士 蒙, 無所知識, 願賜一言, 以爲終身之誡." 法師曰: "佛戒有菩薩戒, 其別有十, 若等爲人臣子, 恐不能堪. 今有世俗五戒, 一曰事君以忠, 二曰事親以孝, 三曰交友以信, 四曰臨戰無退, 五曰殺生有擇, 若等, 行之無忽!"
귀산 등이 그 거처에 가서 옷자락을 여미고 "속세의 선비가 어리석고 몽매하여 아는 것이 없사오니, 한 말씀 해주시어 평생의 계명으로 삼게 해주소서"라고 공손히 말하였다. 법사가 말했다. "불가의 계율에 보살계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열 가지로 구별되어 있으나 그대들이 남의 신하로서는 아마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세속오계가 있으니, 첫째는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는 것이요, 둘째는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는 것이요, 셋째는 벗을 신의로 사귀는 것이요, 넷째는 전쟁에 임하여 물러서지 않는 것이요, 다섯째는 살아있는 것을 죽일 때는 가려서 죽여야 한다는 것이니, 그대들은 이를 실행함에 소홀치 말라!"
○<貴山>等曰: "他則旣受命矣, 所謂殺生有擇, 獨未曉也." 師曰: "六齋日·春夏月不殺, 是擇時也. 不殺使畜, 謂馬牛 犬. 不殺細物, 謂肉不足一 , 是擇物也. 如此, 唯其所用, 不求多殺, 此可謂世俗之善戒也." <貴山>等曰: "自今已後, 奉以周旋, 不敢失墜."
귀산 등이 말했다. "다른 것은 말씀대로 하겠습니다만, 소위 살아있는 것을 죽일 때는 가려서 죽여야 한다는 말씀만은 잘 모르겠습니다." 법사가 대답했다. "육재일과 봄 여름에는 살생치 아니한다는 뜻이니, 이는 죽이는 시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가축은 죽이지 않는 법이니, 이는 말, 소, 닭, 개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말이며, 하찮은 것을 죽여서는 안되나니, 고기 한 점도 되지 못하는 것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죽이는 대상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오직 소용되는 경우에만 죽이고 그 이상은 죽이지 말 것이니, 이는 세속의 좋은 계율이라고 할 만하다." 귀산 등이 말했다. "지금부터는 이 가르침을 받들어 두루 실행하고, 감히 어기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眞平王>< 福{建福}> &十九{二十四} 年壬戌秋八月, <百濟>大發兵, 來圍<阿莫[一作莫{暮} .](+山) 城>. 王使將軍波珍干<乾品>·<武梨屈>·<伊梨伐>·級干<武殷>·<比梨耶>等, 領兵拒之, <貴山>·< 項>, 幷以少監赴焉. <百濟>敗, 退於<泉山>之澤, 伏兵以待之. 我軍進擊, 力困引還. 時, <武殷>爲殿, 立於軍尾, 伏猝出, 鉤而下之. <貴山>大言曰: "吾嘗聞之師曰: '士當軍無退', 豈敢奔北乎." 擊殺賊數十人, 以己馬出父, 與< 項>揮戈力鬪. 諸軍見之奮擊, 橫尸滿野, 匹馬隻輪, 無反者. <貴山>等金瘡滿身, 半路而卒. 王與群臣, 迎於<阿那>之野, 臨尸痛哭, 以禮殯葬, 追賜位<貴山>奈麻, < 項>大舍.
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三國史節要』.
진평왕 건복 24년 임술 가을 8월에 백제가 대대적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아막[막(莫)을 영(英)으로도 쓴다.]성을 포위했다. 왕은 장군 파진간 건품, 무리굴, 이리벌, 급간 무은, 비리야 등에게 군사를 주어 이를 방어하게 하였다. 이 때 귀산과 추항은 소감의 관직으로 함께 전선으로 나갔다. 그 때 백제가 패하여 천산의 연못으로 물러가 군사를 매복시킨 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군사는 진격하다가 힘이 다하여 돌아오고 있었다. 이 때 무은은 후군이 되어 군대의 맨 뒤에 오고 있었는데, 복병이 갑자기 튀어나와 갈고리로 그를 잡아당겨 떨어뜨렸다. 귀산이 "내 일찌기 스승에게 들으니 군사는 적군을 만나 물러서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찌 감히 패하여 달아날 수 있으랴?"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적을 쳐서 수십 명을 죽인 다음 자기 말에 아버지를 태워 보내고, 추항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힘껏 싸웠다. 여러 군사들이 이를 보고 분발하여 진격하니,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메우고 말 한 필, 수레 한 채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귀산 등은 온 몸이 창칼에 찔려 돌아오는 도중에 죽었다. 왕은 여러 신하들과 함께 아나의 들판에서 그들을 맞이하였다. 왕은 그들의 시체 앞으로 나아가 통곡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으며, 귀산에게는 나마를, 추항에게는 대사를 각각 추증하였다.
<溫達 온달>
○<溫達>, <高句麗><平岡王>時人也. 容貌龍鐘可笑, 中心則 {曉 / /曄 } {然} . 蒙{家} 甚貧, 常乞食以養母, 破衫弊履, 往來於市井間, 時人目之爲<愚溫達>. <平岡王>少女兒好啼, 王戱曰: "汝常啼 我耳, 長必不得爲士大夫妻, 當歸之<愚溫達>." 王每言之.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북한본』.李丙燾.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今西龍.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 때 사람이다. 얼굴이 험악하고 우스꽝스럽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밝았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하였으며, 떨어진 옷과 신발을 걸치고 시정간을 왕래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다. 평강왕의 어린 딸이 곧잘 울었으므로 왕이 농담으로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 틀림없이 사대부의 아내가 못되고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가야 되겠다"라고 하였다. 왕은 그녀가 울 때마다 이런 말을 하였다.
○及女年二八, 欲下嫁於<上部>高氏, 公主對曰: "大王常語, 汝必爲<溫達>之婦, 今何故改前言乎? 匹夫猶不欲食言, 況至尊乎. 故曰: '王者無戱言' 今大王之命, 謬矣, 妾不敢祗承." 王怒曰: "汝不從我敎, 則固不得爲吾女也, 安用同居? 宜從汝所適矣."
딸의 나이 16세가 되어 왕이 딸을 상부 고씨에게 시집보내려 하니 공주가 대답하기를 "대왕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되리라고 하셨는데, 오늘 무슨 까닭으로 전일의 말씀을 바꾸십니까? 필부도 거짓말을 하려 하지 않는데 하물며 지존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임금은 농담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대왕의 명령이 잘못되었으므로 소녀는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화를 내어 말했다. "네가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정말로 내 딸이 될 수 없다. 어찌 함께 살 수 있겠느냐? 너는 너 갈대로 가는 것이 좋겠다."
○於是, 公主以實{寶} 釧數十枚繫 後, 出宮獨行. 路遇一人, 問<溫達>之家, 乃行至其家, 見盲老母, 近前拜, 問其子所在. 老母對曰: "吾子貧具{且} 陋, 非貴人之所可近. 今聞子之臭, 芬馥異常, 接子之手, 柔滑如綿, 必天下之貴人也. 因誰之 , 以至於此乎? 惟我息, 不忍饑, 取楡皮於山林." 久而未還, 公主出行, 至山下, 見<溫達>負楡皮而來. 公主與之言懷, <溫達>悖然曰: "此非幼女子所宜行, 必非人也, 狐鬼也, 勿迫我也!" 遂行不顧. 公主獨歸, 宿柴門下, 明朝, 更入, 與母子備言之. <溫達>依違未決, 其母曰: "吾息至陋, 不足爲貴人匹, 吾家至 , 固不宜貴人居." 公主對曰: "古人言: '一斗粟猶可 , 一尺布猶可縫', 則苟爲同心, 何必富貴然後, 可共乎?" 乃賣金釗{釧} , 買得田宅·奴婢·牛馬·器物, 資用完具.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이에 공주는 보물 팔찌 수십 개를 팔꿈치에 걸고 궁궐을 나와 혼자 길을 떠났다.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나 온달의 집을 물어 그의 집까지 찾아갔다. 그리고 눈먼 노모를 보고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절을 하며 아들이 있는 곳을 물었다. 늙은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내 아들은 가난하고 보잘 것이 없으니, 귀인이 가까이 할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보통이 아니고, 그대의 손을 만지니 부드럽기가 솜과 같으니, 필시 천하의 귀인인 듯합니다. 누구의 속임수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다 못하여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려고 산 속으로 간 지 오래인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공주가 그 집을 나와 산 밑에 이르렀을 때,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것을 보았다. 공주가 그에게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하니 온달이 불끈 화를 내며 말했다. "이는 어린 여자가 취할 행동이 아니니 필시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일 것이다.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 온달은 그만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공주는 혼자 돌아와 사립문 밖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에 다시 들어가서 모자에게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온달이 우물쭈물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그의 어머니가 말했다. "내 자식은 비루하여 귀인의 짝이 될 수 없고, 내 집은 몹시 가난하여 정말로 귀인이 거처할 수 없습니다." 공주가 대답하였다. "옛 사람의 말에 '한 말의 곡식도 방아를 찧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도 꿰맬 수 있다.'고 하였으니 만일 마음만 맞는다면 어찌 꼭 부귀해야만 같이 살겠습니까?" 말을 마치고 공주가 금팔찌를 팔아서 전지, 주택, 노비, 우마, 기물 등을 사들이니 살림 용품이 모두 구비되었다.
○初, 買馬, 公主語<溫達>曰: "愼勿買市人馬, 須擇國馬病瘦而見放者, 而後換之." <溫達>如其言. 公主養飼甚勤, 馬日肥且壯. <高句麗>常以春三月三日, 會獵<樂浪>之丘, 以所獲猪鹿, 祭天及山川神. 至其日, 王出獵, 群臣及五部兵士皆從. 於是, <溫達>以所養之馬隨行, 其馳騁, 常在前, 所獲亦多, 他無若者. 王召來, 問姓名, 驚且異之.
처음 말을 살 때 공주가 온달에게 말하기를 "부디 시장의 말을 사지 말고, 나라에서 쓸모가 없다고 판단하여 백성에게 파는 말을 선택하되, 병들고 수척한 말을 골라 사오세요." 라고 하니 온달이 그대로 말을 사왔다. 공주는 부지런히 말을 길렀다. 말은 날로 살찌고 건장해졌다. 고구려에서는 언제나 봄 3월 3일을 기하여 낙랑 언덕에 모여서 사냥하여 잡은 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의 신령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 날이 되어 왕이 사냥을 나가는데 여러 신하와 5부의 군사들이 모두 수행하였다. 이 때 온달도 자기가 기르던 말을 타고 수행하였는데, 그는 항상 앞장 서서 달리고, 또한 포획한 짐승도 많아서 다른 사람이 그를 따를 수 없었다. 왕이 불러서 성명을 듣고 놀라며 기이하게 여겼다.
○時, <後周><武帝>出師伐<遼東>, 王領軍逆戰於<拜山{肄山}> 之野. <溫達>爲先鋒, 疾鬪斬數十餘級, 諸軍乘勝奮擊大克. 及論功, 無不以<溫達>爲策{第} 一. 王嘉歎之曰: "是吾女壻也." 備禮迎之, 賜爵爲大兄. 由此, 寵榮尤渥, 威權日盛. 及<陽岡王{ 陽王}> 卽位, <溫達>奏曰: "惟<新羅>, 割我<漢北>之地, 爲郡縣, 百姓痛恨, 未嘗忘父母之國. 願大王不以愚不肖, 授之以兵, 一往必還吾地." 王許焉. 臨行誓曰: "<鷄立峴>·<竹嶺>已西, 不歸於我, 則不返也." 遂行, 與<羅>軍戰於<阿旦城>之下, 爲流矢所中, 路{ } 而死. 欲葬, 柩不肯動, 公主來撫棺曰: "死生決矣, 於乎, 歸矣." 遂擧而 . 大王聞之悲慟.
三國史記卷第四十五.
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이 때, 후주의 무제가 군사를 출동시켜 요동을 공격하자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 들에서 맞아 싸웠다. 그 때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용감하게 싸워 수십여 명의 목을 베니, 여러 군사들이 이 기세를 타고 공격하여 대승하였다.
공을 논의할 때 온달을 제일이라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왕이 그를 가상히 여기어 감탄하기를 "이 사람은 나의 사위다"라 하고, 예를 갖추어 그를 영접하고 그에게 작위를 주어 대형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그에 대한 왕의 은총이 더욱 두터워졌으며, 위풍과 권세가 날로 성하여졌다. 양강왕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기를 "지금 신라가 우리의 한북 지역을 차지하여 자기들의 군현으로 만들었으므로, 그곳의 백성들이 통탄하며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저를 어리석고 불초하다고 여기지 마시고 군사를 주신다면 단번에 우리 땅을 도로 찾겠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그가 길을 떠날 때 맹세하였다. "계립현과 죽령 서쪽의 땅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그는 드디어 진격하여 아단성 밑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를 장사지내려 하였으나 영구가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면서 "사생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아! 돌아가소서!"라 말하고, 마침내 영구를 들어 하관하였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비통해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45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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