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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원문+한글) 권 제 17


三國史記卷第十七 삼국사기 권 제 17

高句麗本紀第五.
<東川王>·<中川王>·<西川王>·<烽上王>·<美川王>.

고구려본기 제 5
동천왕, 중천왕, 서천왕, 봉상왕, 미천왕.

   <東川王 동천왕>

○<東川王>[或云<東襄>.], 諱<憂位居>, 少名<郊 >, <山上王>之子. 母<酒桶村>人, 入爲<山上>小后, 史失其族姓. 前王十七年, 立爲太子, 至是嗣位. 王性寬仁, 王后欲試王心, 候王出遊, 使人截王路馬 . 王還曰: "馬無 可憐!" 又令侍者進食時, 陽覆羹於王衣, 亦不怒.

동천왕[동양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우위거이며, 아명은 교체이고, 산상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주통촌 사람으로서 산상왕의 소후가 되었는데, 사기에는 그의 가족과 성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왕은 전왕 17년에 태자가 되었고, 이 때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왕은 성격이 너그럽고 인자하였다. 왕후가 왕의 심정을 시험해 보기 위하여, 왕이 유람하러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사람을 시켜 왕이 타는 말의 갈기를 잘랐다. 왕이 돌아와서 "말이 갈기가 없으니 가련하구나"라고 말하였다. 왕후가 또한 시종으로 하여금 밥상을 올릴 때 일부러 왕의 옷에 국을 엎지르게 하였는데, 왕은 역시 성내지 않았다.

○二年, 春二月, 如<卒本>, 祀始祖廟. 大赦. 三月, 封<于>氏爲王太后.

2년 봄 2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3월, 우씨를 왕태후로 봉했다.

○四年, 秋七月, 國相<高優婁>卒, 以于台<明臨於漱>爲國相.

4년 가을 7월, 국상 고우루가 죽었다. 우태 명림 어수를 국상으로 삼았다.

○八年, <魏>遣使和親. 秋九月, 大后{太后} <于>氏薨. 大后{太后} 臨終遺言日{曰} : "妾失行, 將何面日{目} 見<國壤>於地下? 若群臣不忍 於溝壑, 則請葬我於<山上王>陵之側." 遂葬之如其言. 巫者曰: "<國壤>降於予曰: '昨見<于>氏歸于<川上{山上}> , 不勝憤 , 遂與之戰. 退而思之, 顔厚不忍見國人. 爾告於朝, 遮我以物.'" 是用植松七重於陵前.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通鑑].
趙炳舜. [三國史節要].
8년, 위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맺었다.
가을 9월, 태후 우씨가 죽었다. 태후가 죽을 때 다음과 같이 유언하였다.
"내가 행실이 좋지 않았으니,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국양왕을 보겠는가? 만약 여러 신하들이 계곡이나 구덩이에 나의 시신을 차마 버리지 못하겠거든, 나를 산상왕릉 옆에 묻어 달라."
태후의 유언대로 장사하였다. 무당이 말했다.
"국양왕이 나에게 내려와서 '어제 우씨가 산상왕에게 가는 것을 보고는, 분함을 참을 수 없어서 마침내 우씨와 다투었다. 내가 돌아와 생각하니 낯이 아무리 두껍다 하여도 차마 백성들을 대할 수 없구나. 네가 조정에 이를 알려서, 나의 무덤을 가리는 시설을 하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국양왕의 능 앞에 일곱 겹으로 소나무를 심었다.

○十年, 春二月, <吳>王<孫權>, 遣使者<胡衛>通和. 王留其使, 至秋七月, 斬之, 傳首於<魏>.

10년 봄 2월, 오 나라의 왕인 손 권이 사신 호 위를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왕이 그 사신을 억류했다가, 가을 7월에 그의 목을 베어 위 나라에 전하였다.

○十一年, 遣使如<魏>, 賀改年號. 是<景初>元年也.

11년,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위의 연호가 개정된 것을 축하하였다. 이 때가 경초 원년이었다.

○十二年, <魏>太傅{太尉} <司馬宣王>率衆, 討<公孫淵>. 王遣主簿<大加>, 將兵千人助之.

李丙燾. [魏志].
12년, 위 나라 태부 사마 선왕이 군사를 동원하여 공손 연을 토벌했다. 왕이 주부 대가로 하여금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돕게 하였다.

○十六年, 王遣將, 襲破<遼東><西安平>.

16년, 왕이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을 격파하였다.

○十七年, 春正月, 立王子<然弗>爲王太子, 赦國囚{內} .

趙炳舜. 『三國史節要』.
17년 봄 정월, 왕자 연불을 왕태자로 삼고, 국내의 죄수들을 사면하였다.

○十九年, 春三月, 東海人獻美女, 王納之後宮. 冬十月, 出師侵<新羅>北邊.

19년 봄 삼월, 동해 사람이 미녀를 바쳤다. 왕이 그를 후궁으로 맞이 하였다.
겨울 10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 북쪽 변방을 침공하였다.

○二十年, 秋八月, <魏>遣<幽州>刺史<毋丘儉>, 將萬人, 出<玄 >來侵. 王將步騎二萬人, 逆戰於<沸流水>上, 敗之, 斬首三千餘級. 又引兵再戰於<梁貊>之谷, 又敗之, 斬獲三千餘人. 王謂諸將曰: "<魏>之大兵, 反不如我之小兵. <毋丘儉>者<魏>之名將, 今日命在我掌握之中乎." 乃領鐵騎五千, 進而擊之. <儉>爲方陣, 決死而戰, 我軍大潰, 死者一萬八千餘人. 王以一千餘騎, 奔<鴨 原>. 冬十月, <儉>攻陷<丸都城>, 屠之. 乃遣將軍<王 >, 追王. 王奔<南 沮{南沃沮}> , 至于<竹嶺>, 軍士分散殆盡, 唯東部<密友>獨在側, 謂王曰: "今追兵甚迫, 勢不可脫. 臣請決死而禦之, 王可遯矣." 遂募死士, 與之赴敵力戰. 王間行{僅得} 脫而去, 依山谷, 聚散卒自衛, 謂曰: "若有能取<密友>者, 厚賞之." 下部<劉屋句>前對曰: "臣試往焉." 遂於戰地, 見<密友>伏地, 乃負而至. 王枕之以股, 久而乃蘇. 王間行轉輾, 至<南 沮{南沃沮}> , <魏>軍追不止. 王計窮勢屈, 不知所爲. 東部人<紐由>進曰: "勢甚危迫, 不可徒死. 臣有愚計, 請以飮食往 <魏>軍, 因伺隙刺殺彼將. 若臣計得成, 則王可奮擊決勝矣." 王曰: "諾." <紐由>入<魏>軍詐降曰: "寡君獲罪於大國, 逃至海濱, 措躬無地, 將以請降於陣前, 歸死司寇, 先遣小臣, 致不 之物, 爲從者羞." <魏>將聞之, 將受其降. <紐由>隱刀食器, 進前, 拔刀刺<魏>將胸, 與之俱死, <魏>軍遂亂.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不能陳, 遂自<樂浪>而退. 王復國論功, 以<密友>·<紐由>爲第一, 賜<密友><巨谷>·<靑木谷>, 賜<屋句><鴨 >·<杜訥河原>以爲食邑. 追贈<紐由>爲九使者, 又以其子<多優>爲大使者. 是役也, <魏>將到<肅愼>南界, 刻石紀功, 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歸. 初, 其臣<得來>, 見王侵叛中國, 數諫, 王不從. <得來>嘆曰: "立見此地, 將生蓬蒿." 遂不食而死. <毋丘儉>令諸軍, 不壞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之.[『括地志』云: "<不耐城>卽<國內城>也, 城累石爲之." 此卽<丸都山>與<國內城>相接. 『梁書』: "以<司馬懿>討<公孫淵>, 王遣將, 襲<西安平>, <毋丘儉>來侵." 『通鑑』: "以<得來>諫王, 爲王<位宮>時事." 誤也.]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密友紐由傳.趙炳舜. 『三國史節要』.
20년 가을 8월, 위 나라가 유주 자사 관구 검으로 하여금 1만 명을 거느리고 현토를 침공하게 하였다. 왕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에서 전투를 벌여 그들을 쳐부수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다시 군사를 이끌어 양맥 골짜기에서 전투를 벌여, 역시 적군을 쳐부수고 3천여 명을 죽이거나 생포하였다. 왕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위 나라의 대병력이 오히려 우리의 적은 군사만도 못하다. 관구 검이란 자는 위 나라의 명장이지만, 오늘날에는 그의 목숨이 나의 손에 달려 있구나."
왕은 곧 철기 5천 명을 거느리고 진격하였다. 관구 검이 방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우자, 우리 군사가 대패하여 사망자가 1만 8천여 명이었다. 왕이 기병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압록원으로 도주하였다.
겨울 10월, 관구 검이 환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백성들을 도륙하였다. 그리고 곧 장군 왕 기를 보내 왕을 추격하였다. 왕은 남옥저로 도주하다가 죽령에 이르렀다. 군사들은 흩어져 거의 모두 없어지고, 다만 동부의 밀우가 혼자 왕의 옆에 있다가 왕에게 말했다.
"지금 추격해오는 적병이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이를 피할 수 없는 형세가 되었습니다. 제가 결사적으로 적군을 방어하면, 왕께서는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드디어 결사대를 모아 그들과 함께 적에게 달려들어 전력을 다하여 싸웠다. 왕은 사잇길로 가다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호위토록 하였다. 왕은 군사들에게 말했다.
"만약 밀우를 찾아 올 수 있는 자가 있으면 후한 상을 주겠다."
하부 유옥구가 앞으로 나와서 "제가 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곧 전장으로 가서 땅에 쓰러져 있는 밀우를 발견하고 등에 업어 왔다. 왕은 자신의 다리위에 밀우를 눕혔다. 밀우는 한참이 지나서야 소생하였다. 왕은 다시 사잇길을 전전하며 남옥저에 이르렀다. 그러나 위 나라 군사는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왕은 적절한 계책도 없고 형세가 어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동부 사람 유유가 나와 말했다.
"형세가 위급하다고 하여 헛되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저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있습니다. 제가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 나라 군사를 위로하다가, 기회를 보아 적장을 찔러 죽이고자 합니다. 만약 저의 계책대로 되면, 그 때 왕께서 적을 맹렬히 공격하여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좋다"고 말하였다. 유유가 위 나라 군중에 들어가서 항복을 가장하고 말했다.
"우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짓고 바닷가로 도망하였으나, 이제 왕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장차 귀국의 진영에 항복하여 귀국의 법관에게 죽음을 맡기려 하는데, 저를 먼저 보내 변변치 못한 음식으로 군사들을 대접하게 하였습니다."
위 나라 장수가 이 말을 듣고 그의 항복을 받으려 하였다. 이 때 유유가 식기에 칼을 감추어 가지고 나아가서 칼을 뽑아 위 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었다. 위 나라 군사는 곧 혼란에 빠졌다. 왕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급습하였다. 위 나라 군사들은 혼란 속에서 전열을 가다듬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에서 퇴각하였다. 왕은 귀국하여 공적을 평가하였다. 밀우와 유유는 1등이었다. 밀우에게는 거곡과 청목곡을 주고, 옥구에게는 압록과 두눌하원을 주어 식읍으로 삼게하고, 유유에게는 구사자를 추증하고, 또한 유유의 아들 다우를 대사자로 삼았다.이 전쟁 시에 위 나라 장수가 숙신 남쪽 경계에 이르러, 돌에 전공을 새겨 기념하고, 또한 환도산에 이르러 불내성에 기념비를 새기고 돌아갔다.
예전에, 왕의 신하 득래는, 왕이 중국을 침략하고 배반하는 것을 보고 이를 중단하기를 수차례 간하였다. 그러나 왕은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득래는 탄식하며 "머지 않아 이 땅이 쑥대밭이 되는 것을 보게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음식을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 위 나라 장수 관구 검이 군사들로 하여금 그의 무덤을 헐지 말며 무덤의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하고, 그의 처자들을 찾아 모두 풀어 주도록 명령하였다.[[괄지지]에는 "불내성은 곧 국내성이다. 그 성은 돌을 쌓아 만들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접해 있기 때문이다. [양서]에는 "사마 의가 공손 연을 치자, 고구려왕이 장수를 보내 서안평을 습격하였으므로, 관구 검이 와서 침노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통감]에는 "득래가 왕에게 간한 것은 고구려왕 위궁 때의 사실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잘못된 기록이다.]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儉>.

21년 봄 2월, 왕은 환도성이 난리를 겪었으므로, 다시 도읍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평양성을 쌓아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이라는 지방은 본래 선인 왕검의 택지였다. 어떤 사람은 왕이 왕검성에 도읍을 정했다라고도 말한다.

○二十二年, 春二月, <新羅>遣使結和. 秋九月, 王薨. 葬於<柴原>, 號曰<東川王>. 國人懷其恩德, 莫不哀傷. 近臣欲自殺以殉者衆, 嗣王以爲非禮, 禁之. 至葬日, 至墓自死者甚多. 國人伐柴, 以覆其屍, 遂名其地曰<柴原>.

22년 봄 2월, 신라가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맺었다.
가을 9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원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동천왕이라 하였다. 백성들이 왕의 은덕을 생각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근신 중에는 자살하여 순장되기를 바라는 자가 많았으나, 새로 등극한 왕이 예가 아니라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례일에 왕의 무덤에 와서 자결한 자가 아주 많았다. 백성들이 섶을 베어 그들의 시체를 덮어 주었기 때문에 그 곳을 시원이라고 불렀다.

   <中川王 중천왕>

○<中川王>[或云<中壤>.], 諱<然弗>, <東川王>之子. 儀表俊爽, 有智略. <東川>十七年, 立爲王太子. 二十二年, 秋九月, 王薨, 太子卽位. 冬十月, 立< >氏爲后. 十一月, 王弟<預物>·<奢句>等, 謀叛伏誅.

중천왕[혹은 중양이라고 한다.]의 이름은 연불이며, 동천왕의 아들이다. 외모가 준수하고 지략이 많았다. 동천왕 17년에 왕태자가 되었다. 22년 가을 9월에 왕이 사망하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겨울 10월, 연씨를 왕후로 삼았다.
11월, 왕의 아우 예물·사구 등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형 당하였다.

○三年, 春二月, 王命相<明臨於漱>, 兼知內外兵馬事.

3년 봄 2월, 왕이 국상 명림어수로 하여금 내외의 군사에 관한 사무를 동시에 맡아 보도록 명하였다.

○四年, 夏四月, 王以<貫那>夫人置革囊, 投之西海. <貫那>夫人, 顔色佳麗, 髮長九尺, 王愛之, 將立以爲小后. 王后< >氏, 恐其專寵, 乃言於王曰: "妾聞西<魏>求長髮, 購以千金. 昔我先王, 不致禮於<中國>, 被兵出奔, 殆喪社稷. 今王順其所欲, 遣一個行李, 以進長髮美人, 則彼必欣納, 無復侵伐之事." 王知其意, 默不答. 夫人聞之, 恐其加害, 反讒后於王曰: "王后常罵妾曰: '田舍之女, 安得在此. 若不自歸, 必有後悔.' 意者后欲伺大王之出, 以害於妾, 如之何?" 後, 王獵于<箕丘>而還, 夫人將革囊迎哭曰: "后欲以妾盛此, 投諸海, 幸大王賜妾微命, 以返於家, 何敢更望侍左右乎?" 王問知其詐, 怒謂夫人曰: "汝要入海乎?" 使人投之.

4년 여름 4월, 왕이 관나부인을 가죽 주머니에 넣어 서해에 던지게 하였다. 원래 관나부인은 얼굴이 아름답고 머리털의 길이가 9척이나 되어, 왕이 사랑하였고, 장차 소후를 삼으려 하였다. 왕후 연씨는 그가 왕의 사랑을 독차지할 것을 걱정하여 왕에게 말했다.
"제가 듣건대 서쪽 위 나라에서 긴 머리털을 천금을 주고 산다고 합니다. 옛적에 우리 선대 임금은 중국에 예물을 보내지 않아 병란을 당하여 쫓겨 다녔으며, 나라를 잃을 뻔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하니 이제 왕께서는 위 나라가 원하는 대로 사신을 보내 머리털 긴 미인을 진상하면, 그들은 반드시 흔쾌히 받아들일 것이며, 다시는 침범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왕은 그녀가 말하는 의도를 짐작하고 묵묵히 대답하지 않았다. 관나부인이 이 말을 듣고 자기에게 해가 미칠까 겁을 내어 도리어 왕에게 왕후를 참소하여 말했다.
"왕후가 항상 나를 욕하여 '시골 계집이 어찌 여기에 있느냐? 만약 스스로 돌아가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하리라'라고 합니다. 대왕이 나가시는 기회를 이용하여 왕후가 나를 해칠 것 같은 생각이 드니 어찌하오리까?"
그 후 왕이 기구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오자, 관나부인이 가죽 주머니를 들고 나와 왕을 맞이하며 울면서 말했다.
"왕후가 나를 여기에 담아 바다에 버리려 하니, 대왕께서 미천한 목숨을 돌보아 집으로 돌아가게 하여 주신다면, 어찌 이 이상 대왕을 옆에서 모시기를 감히 바라겠습니까?"
왕은 그것이 거짓말임을 알고 노하여 부인에게 말했다.
"네가 바다에 들어 가기를 원하느냐?"
그리고 사람을 시켜 바다에 던지게 하였던 것이다.

○七年, 夏四月, 國相<明臨於漱>卒, 以<沸流>沛者<陰友>爲國相. 秋七月, 地震.

7년 여름 4월, 국상 명림어수가 사망하자, 비류 패자 음우를 국상으로 임명하였다.
가을 7월, 지진이 있었다.

○八年, 立王子<藥盧>爲王太子, 赦國內.

8년에 왕자 약로를 왕태자로 삼았다. 국내에 사면령을 내렸다.

○九年, 冬十一月, 以 那<明臨笏覩>, 尙公主, 爲駙馬都尉. 十二月, 無雪. 大疫.

9년 겨울 11월, 연나부의 명림 홀도에게 공주를 주어 혼인시켜서, 부마도위를 삼았다.
12월, 눈이 내리지 않았다.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十二年, 冬十二月, 王 于<杜訥>之谷. <魏>將<&尉遲{尉遲楷}> [名犯<長陵>諱.]將兵來伐. 王簡精騎五千, 戰於<梁貊>之谷, 敗之, 斬首八千餘級.

李丙燾.
12년 겨울 12월, 왕이 두눌곡에서 사냥을 하였다.
위 나라 장수 울지해[이름이 장릉의 이름에 저촉되었다.]가 군사를 동원하여 침입하였다. 왕이 정예 기병 5천 명을 선발하여, 양맥 골짜기에서 싸워 이기고, 8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十三年, 秋九月, 王如<卒本>, 祀始祖廟.

13년 가을 9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냈다.

○十五年, 秋七月, 王獵<箕丘>, 獲白獐. 冬十一月, 雷, 地震.

15년 가을 7월, 왕이 기구에서 사냥하다가 흰 노루를 잡았다.
겨울 11월, 우레와 지진이 있었다.

○二十三年, 冬十月, 王薨. 葬於<中川>之原, 號曰<中川王>.

23년 겨울 10월, 왕이 별세하였다. 중천 언덕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중천왕이라 하였다.

   <西川王 서천왕>

○<西川王>[或云<西壤>.], 諱<藥盧>[一云<若友>.], <中川王>第二子. 性聰悟而仁, 國人愛敬之. <中川王>八年, 立爲太子. 二十三年, 冬十月, 王薨, 太子卽位.

서천왕[혹은 서양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약로[약우라고도 한다.]이며, 중천왕의 둘째 아들이다. 성격이 총명하고 어질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를 아끼고 존경하였다. 중천왕 8년에 태자가 되었고, 23년 겨울 10월에 왕이 별세하였다. 태자가 즉위하였다.

○二年, 春正月, 立西部大使者<于漱>之女, 爲王后. 秋七月, 國相<陰友>卒. 九月, 以<尙婁>爲國相. <尙婁>, <陰友>子也. 冬十二月, 地震.

2년 봄 정월, 서부 대사자 우수의 딸을 왕후로 삼았다.
가을 7월, 국상 음우가 죽었다.
9월, 상루를 국상으로 삼았다. 상루는 음우의 아들이었다.
겨울 12월, 지진이 있었다.

○三年, 夏四月, 隕霜害麥. 六月, 大旱.

3년 여름 4월, 서리가 내려 보리가 피해를 입었다.
6월, 큰 가뭄이 들었다.

○四年, 秋七月丁酉朔, 日有食之. 民饑, 發倉賑之.

4년 가을 7월 초하루 정유일에 일식이 있었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七年, 夏四月, 王如<新城>[或云: <新城>, 國之東北大鎭也.], 獵獲白鹿. 秋八月, 王至自<新城>. 九月, 神雀集宮庭.

7년 여름 4월, 왕이 신성[어떤 사람은 '신성은 동북 지방에 있는 큰 진(鎭)'이라고 말한다.]에 가서 사냥하다가 흰 사슴을 잡았다.가을 8월, 왕이 신성에서 돌아왔다. 9월, 이상한 새가 대궐에 모였다.

○十一年, 冬十月, <肅愼>來侵, 屠害邊民{氓} . 王謂群臣曰: "寡人以 未{末} 之軀, 謬襲邦基, 德不能綏, 威不能震, 致此 敵, 猾我疆域. 思得謀臣猛將, 以折遐衝, 咨爾群公, 各擧奇謀異略才堪將帥者." 群臣皆曰: "王弟<達賈>, 勇而有智略, 堪爲大將." 王於是, 遣<達賈>往伐之. <達賈>出奇掩擊, 拔<檀盧城>, 殺酋長, 遷六百餘家於<扶餘>南<烏川>, 降部落六七所, 以爲附庸. 王大悅, 拜{封} <達賈>爲<安國君>, 知內外兵馬事, 兼統<梁貊>·<肅愼>諸部落.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11년 겨울 10월, 숙신이 침입하여 변방 백성들을 죽였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했다.
"내가 미미한 몸으로 외람되게 왕위를 이었으나, 나의 덕은 백성들을 편하게 할 수 없고, 위엄은 먼 곳에 떨치지 못하여, 인근의 적들이 우리 강토를 침범하게 하였다. 이제 지략있는 신하와 용감한 장수를 얻어 외적을 부수고자 하니, 너희들은 각각 특출한 계략을 지녀 장수가 될만한 인재를 천거하라."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했다.
"왕의 아우 달가는 용맹스럽고 지략이 있어 대장이 될만 합니다."
왕은 곧 달가를 보내 숙신을 치게 하였다. 달가가 뛰어난 계략으로 적을 기습하여 단로성을 빼앗고, 추장을 죽이고, 주민 6백 여 호를 부여 남쪽 오천으로 옮기고, 6·7개소의 부락을 항복하게 하여 부용으로 삼았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달가를 안국군으로 삼고, 서울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으며, 겸하여 양백·숙신 등의 여러 부락을 통솔하게 하였다.

○十七年, 春二月, 王弟<逸友>·<素勃>等二人, 謀叛, 詐稱病, 往溫湯, 與黨類, 戱樂無節, 出言悖逆. 王召之, 僞許拜相, 及其至, 令力士執而誅之.

17년 봄 2월, 왕의 아우인 일우·소발 등의 두 사람이 모반하여, 병을 핑계대며, 온탕으로 가서 자기 무리들과 방종하게 놀며, 불온한 언사를 퍼뜨렸다. 왕이 국상을 시키겠다고 거짓말을 하여 그들을 불렀다. 그들이 도착하자 왕이 역사를 시켜 죽였다.

○十九年, 夏四月, 王幸<新城>. <海谷>太守獻鯨魚目, 夜有光. 秋八月, 王東狩, 獲白鹿. 九月, 地震. 冬十一月, 王至自<新城>.

19년 여름 4월, 왕이 신성에 갔다. 해곡 태수가 고래의 눈을 바쳤는데 밤에도 광채가 났다.
가을 8월, 왕이 동쪽 지방에서 사냥하다가 흰 사슴을 잡았다. 9월, 지진이 있었다.
겨울 11월, 왕이 신성에서 돌아왔다.

○二十三年, 王薨, 葬於<西川>之原, 號曰<西川王>.

23년, 왕이 별세하였다. 서천 언덕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서천왕이라 하였다.

   <烽上王 봉상왕>

○<烽上王>[一云<雉葛>.], 諱<相夫>[或云< 矢婁>.], <西川王>之太子也. 幼驕逸多疑忌. <西川王>二十三年, 薨, 太子卽位.

봉상왕[치갈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상부[혹은 삽시루라고도 한다.]이며, 서천왕의 태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하며, 의심과 시기가 많았다. 23년에 서천왕이 별세하자 태자가 즉위하였다.

○元年, 春三月, 殺<安國君達賈>. 王以<賈>在諸父之行, 有大功業, 爲百姓所瞻望, 故疑之謀殺. 國人曰: "微<安國君>, 民不能免<梁貊>·<肅愼>之難. 今其死矣, 其將焉託?" 無不揮涕相弔. 秋九月, 地震.

원년 봄 3월, 왕이 안국군 달가를 죽였다. 왕은, 달가가 아버지의 항렬에 있고 큰 공적이 있으며 백성들이 존경하므로, 그를 의심하여 모살한 것이다. 백성들이 말했다.
"안국군이 아니었다면 백성들이 양맥과 숙신의 환난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제 그가 죽었으니 우리는 장차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백성들이 눈물을 뿌리며 서로 위로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가을 9월, 지진이 있었다.

○二年, 秋八月, <慕容 >來侵. 王欲往<新城>避賊, 行至<鵠林>, <慕容 >知王出, 引兵追之. 將及, 王懼. 時, <新城>宰北部小兄<高奴子>, 領五百騎迎王, 逢賊奮擊之, < >軍敗退. 王喜, 加<高奴子>爵爲大兄, 兼賜<鵠林>爲食邑. 九月, 王謂其弟< 固>有異心, 賜死. 國人以< 固>無罪哀慟之. < 固>子<乙弗>出遯於野.

2년 가을 8월, 모용 외가 침노하였다. 왕은 신성으로 가서 적을 피하고자 하였다. 왕이 곡림에 이르렀을 때, 모용 외가 왕이 나간 것을 알고 군사를 이끌고 추격해왔다. 그들이 거의 도달하려 하자 왕은 이를 두려워 하였다. 그 때 신성 태수인 북부 소형 고노자가 기병 5백 명을 거느리고 왕을 맞으러 나갔다가 적군과 만나 전투를 벌렸다. 모용 외의 군사가 패배하여 퇴각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고노자의 작위를 대형으로 높이고, 또한 곡림을 그의 식읍으로 주었다.
9월, 왕이 그의 아우 돌고가 모반하려는 의도를 가졌다 하여 자결하게 하였다. 백성들은 돌고가 죄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의 죽음을 애통하게 생각하였다. 돌고의 아들 을불은 시골로 도주하였다.

○三年, 秋九月, 國相<尙婁>卒. 以南部大使者<倉助利>爲國相, 進爵爲大主簿.

3년 가을 9월, 국상 상루가 죽었다. 남부 대사자 창조리를 국상으로 임명하고, 작위를 대주부로 올렸다.

○五年, 秋八月, <慕容 >來侵, 至<故國原>, 見<西川王>墓, 使人發之, 役者有暴死者, 亦聞壙內有樂聲, 恐有神乃引退. 王謂群臣曰: "<慕容>氏, 兵馬精强, 屢犯我疆 , 爲之奈何?" 相國{國相} <倉助利>對曰: "北部大兄<高奴子>, 賢且勇. 大王若欲禦寇安民, 非<高奴子>, 無可用者." 王以<高奴子>爲<新城>大守{太守} . 善政有威聲, <慕容 >不復來寇.

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
5년 가을 8월, 모용 외가 침입하여 고국원에 이르렀다. 그는 서천왕의 무덤을 보고 사람을 시켜 파게 하였다. 그런데 일하는 사람 중에 갑자기 사망자가 생기고 또한 광중에서 음악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귀신이 있는 것으로 알고 겁을 내어 곧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였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모용씨는 군대가 강력하여 우리 강토를 여러 차례 침범하였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국상 창조리가 대답하였다.
"북부 대형 고노자는 어질고 용감한 사람입니다. 만약 적을 방어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 한다면 고노자가 아니면 쓸 만한 자가 없을 것입니다."
왕이 고노자를 신성 태수로 삼았다. 고노자는 선정을 베풀어 명성이 높았다. 모용 외는 다시는 침범하지 못하였다.

○七年, 秋九月, 霜雹殺穀, 民饑. 冬十月, 王增營宮室, 頗極侈麗, 民饑且困, 群臣驟諫, 不從. 十(-一) 月, 王使人索<乙弗>, 殺之不得.

趙炳舜. 『三國史節要』.
7년 가을 9월, 서리와 우박이 곡식을 해쳤다. 백성들이 굶주렸다.
겨울 10월, 왕이 극도로 사치하고 화려하게 궁실을 증축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굶주리고 또한 피로하였다. 이에 따라 많은 신하들이 공사의 중단을 여러번 간하였다. 왕이 이를 듣지 않았다.
11월, 왕이 사람을 시켜 을불을 찾아 죽이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八年, 秋九月, 鬼哭于<烽山>. 客星犯月. 冬十二月, 雷, 地震.

8년 가을 9월, 귀신이 봉산에서 울었다. 객성이 달을 범하였다. 겨울 12월, 우레와 지진이 있었다.

○九年, 春正月, 地震. 自二月至秋七月不雨, 年饑, 民相食. 八月, 王發國內男女年十五已上, 修理宮室. 民乏於食, 困於役, 因之以流亡. <倉助利>諫曰: "天災 至, 年穀不登, 黎民失所, 壯者流離四方, 老幼轉乎溝壑, 此誠畏天憂民, 恐懼修省之時也. 大王曾是不思, 驅饑餓之人, 困木石之役, 甚乖爲民父母之意. 而 比 有强梗之敵, 若乘吾 以來, 其如社稷生民何? 願大王熟計之." 王 曰: "君者, 百姓之所瞻望也. 宮室不壯麗, 無以示威重. 今國相蓋欲謗寡人, 以干百姓之譽也." <助利>曰: "君不恤民, 非仁也; 臣不諫君, 非忠也. 臣旣承乏國相, 不敢不言, 豈敢干譽乎?" 王笑曰: "國相欲爲百姓死耶? 冀無後{復} 言." <助利>知王之不悛, 且畏及害, 退與群臣同謀, 廢之, 迎<乙弗>爲王. 王知不免, 自經, 二子亦從而死. 葬於<烽山>之原, 號曰<烽上王>.

李丙燾.
9년 봄 정월, 지진이 있었다.
2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오지 않았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서로 잡아 먹었다.
8월, 왕이 국내의 15세 이상의 남녀를 징발하여 궁실을 수리하게 하였다. 백성들은 식량의 결핍과 부역의 고통으로 인하여 사방으로 유랑하였다. 창조리가 왕에게 간하였다.
"천재가 연속하여 발생하고,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은 살 곳을 잃었습니다. 그리하여 젊은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노약자들은 계곡과 구렁텅이를 헤매고 있으니, 지금은 진실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들을 걱정하여 근신하고 반성할 때입니다. 대왕은 이러한 사정을 한번도 생각하지 않고, 굶주리는 백성들을 몰아다가 나무를 깎고 돌을 나르는 부역으로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는 왕이 백성의 부모라는 뜻에 대단히 어긋나는 일입니다. 더구나 주위에는 강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만약 우리가 피폐한 기회를 이용하여 침범해 온다면, 사직과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원컨대 대왕께서는 이를 깊이 생각하소서"
왕이 이를 듣고 노하여 말했다.
"임금이란 백성들이 위로 받드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궁실이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중함을 내보일 수 없는 것이다. 지금 국상은 아마도 나를 비방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듣고자 하는 것 같구려."
조리가 말했다.
"임금이 백성을 걱정하지 않으면 어진 것이 아니고, 신하가 임금에게 충간하지 않으면 충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미 국상이라는 어려운 자리를 이었으니 말을 아니할 수 없는 것이지, 어찌 감히 백성의 칭송을 구하는 것이겠습니까?"
왕이 웃으며 말했다.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으려는가? 이후로는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
조리는 왕이 잘못을 고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해가 미칠 것을 두려워 하였다. 그는 왕 앞에서 물러나와 군신들과 의논하여 왕을 폐위시키고 을불을 왕으로 세웠다. 왕은 화를 면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그의 두 아들도 따라 죽었다. 봉산 언덕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봉상왕이라 하였다.

   <美川王 미천왕>

○<美川王>[一云<好壤王>.], 諱<乙弗>[或云<憂弗>.], <西川王>之子古鄒加< 固>之子. 初, <烽上王>疑弗{弟} < 固>有異心, 殺之, 子<乙弗>畏害出遁. 始就<水室村>人<陰牟>家傭作. <陰牟>不知其何許人, 使之甚苦. 其家側草澤, 蛙鳴, 使<乙弗>夜投瓦石, 禁其聲, 晝日督之樵採, 不許暫息, 不勝艱苦, 周年, 乃去. 與<東村>人<再牟>販鹽. 乘舟抵<鴨 >, 將鹽下寄江東<思收村>人家. 其家老 請鹽, 許之斗許, 再請不與. 其 恨 , 潛以 置之鹽中. <乙弗>不知, 負而上道.  追索之, 誣以  , 告<鴨 >宰. 宰以 直, 取鹽與 , 決笞放之. 於是, 形容枯槁, 衣裳藍縷, 人見之, 不知其爲王孫也. 是時, 國相<倉助利>將廢王, 先遣北部<祖弗>·東部<蕭友>等, 物色訪<乙弗>於山野. 至<沸流河>邊, 見一丈夫在船上, 雖形貌憔悴, 而動止非常. <蕭友>等疑是<乙弗>, 就而拜之曰: "今國王無道, 國相與群臣陰謀, 廢之. 以王孫操行儉約, 仁慈愛人, 可以嗣祖業, 故遣臣等奉迎." <乙弗>疑曰: "予野人, 非王孫也, 請更審之." <蕭友>等曰: "今上, 失人心 {久} 英{矣} , 固不足爲國主, 故群臣望王孫甚勤, 請無疑." 遂奉引以歸. <助利>喜, 致於<鳥陌{烏陌}> 南家, 不令人知. 秋九月, 王獵於<侯山>之陰, 國相<助利>從之. 謂衆人曰: "與我同心者,  我." 乃以蘆 {葉} 揷冠, 衆人皆揷之. <助利>知衆心皆同, 遂其廢王, 幽之別室, 以兵周衛. 遂迎王孫, 上璽綬, 卽王位. 冬十月, 黃霧四塞. 十一月, 風從西北來, 飛砂走石六日. 十二月, 星 于東方.

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顯宗實錄字本』.李丙燾. [東國通鑑].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미천왕[호양왕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을불[혹은 우불이라고도 한다.]이고, 서천왕의 아들 고추가 돌고의 아들이다. 예전에 봉상왕은 그의 아우 돌고가 모반할 생각을 가졌다고 의심하여 그를 죽였다. 그의 아들 을불은 자기에게도 해가 미칠 것을 두려워 하여 도망했었다. 처음에는 수실촌 사람 음모의 집에서 머슴 생활을 하였다. 음모는 을불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지 못하고 힘든 일을 시켰다. 그 집 옆의 연못에서 개구리가 울면, 음모는 개구리 소리가 나지 않도록 을불로 하여금 밤마다 기와 조각과 돌을 던지게 하였고, 낮이면 나무를 해오라고 독촉하여, 잠시도 쉬지 못하게 했다. 을불은 고생을 이기지 못하고 일년만에 그 집을 떠났다. 을불은 동촌 사람 재모와 함께 소금 장사를 하였다. 배를 타고 압록에 가서 소금을 가지고 내려와 강의 동쪽 사수촌 사람의 집에 머물었다. 그 집 노파가 소금을 요구하여, 한 말 가량 주었다. 그러나 그 노파는 그 이상 주기를 요청하였다. 을불은 주지 않았다. 그러자 노파가 그를 미워하여 몰래 자기의 신발을 소금 속에 묻었다. 을불은 이를 모르고 소금을 지고 길을 떠났다. 노파가 쫓아와 신발을 찾아들고, 을불이 자기의 신발을 감추었다고 거짓으로 압록 성주에게 고발하였다. 성주는 신발 값으로 소금을 빼앗아 노파에게 주고, 을불에게 매를 때린 후 석방하였다. 이리하여 을불은 얼굴이 여위고 의복이 남루하여, 누구든 그가 왕손임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 때 국상 창조리가 장차 왕을 폐하고자 하여, 먼저 북부 조불과 동부 소우 등을 파견하여, 온 나라에서 을불을 찾게 하였다. 그들이 비류하 물가에 도착하였을 때, 한 사나이가 배에 있었는데 얼굴은 비록 초췌하였으나, 행동 거지가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 소우 등은 이 사람이 을불이 아닌가 생각하고, 그 앞에 나아가 절을 하고 말했다.
"지금 국왕이 무도하므로 국상이 군신들과 함께 왕을 폐하려고 합니다. 왕손께서는 행동이 검소하고 인자하며 사람을 사랑하므로, 조상의 유업을 이을 수 있다 하여, 저희들을 보내 맞아 오게 하였습니다."
을불이 의심하여 말했다.
"나는 평민이오 왕손이 아닙니다. 달리 알아 보시오."
소우 등이 말했다.
"지금 왕이 인심을 잃은지 오래여서, 실로 나라의 주인이 되기에 부족합니다. 이로 인하여 여러 신하들이 왕손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청컨대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곧 을불을 받들어 돌아왔다. 조리가 기뻐하며 을불을 조맥 남쪽 인가에 머물게 하고,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하였다. 가을 9월에 왕이 후산 북쪽에서 사냥할 때 국상 조리가 따라갔다. 조리가 여러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와 마음이 같은 자는 내가 하는 대로 하라."
그는 곧 갈대잎을 모자에 꽂았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그를 따라 갈대잎을 꽂았다. 조리는 여러 사람의 마음이 모두 같다는 것을 알고, 드디어 그들과 함께 왕을 폐하여 별실에 가두고, 군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곧 왕손을 맞아 옥새를 올려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겨울 10월, 누런 안개가 사방에 끼었다.
11월, 바람이 서북에서 불어와 6일간이나 모래를 날리고 돌을 굴렸다.
12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三年, 秋九月, 王率兵三萬, 侵<玄 郡>, 虜獲八千人, 移之<平壤>.

3년 가을 9월, 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현토군을 공격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十二年, 秋八月, 遣將襲取<遼東><西安平>.

12년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十四年, 冬十月,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14년 겨울 10월, 낙랑군을 침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十五年, 春正月, 立王子<斯由> 爲太子. 秋九月, 南侵<帶方郡>.

15년 봄 정월, 왕자 사유를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공하였다.

○十六年, 春二月, 攻破<玄 城>, 殺獲甚衆. 秋八月, 星 于東北.

16년 봄 2월, 현토성을 격파하였다. 적의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가을 8월, 혜성이 동북방에 나타났다.

○二十年, 冬十二月, <晉><平州>刺史{刺使} <崔毖>來奔. 初, <崔毖>陰說我及<段>氏·<宇文>氏, 使共攻<慕容 >, 三國進攻<棘城>. < >閉門自守, 獨以牛酒,  <宇文>氏. 與國疑<宇文>氏與< >有謀, 各引兵歸. <宇文>大人<悉獨官>曰: "二國雖歸, 吾當獨取之." < >使其子< >與長史<裴 >, 將精銳爲前鋒, 自將大兵繼之, <悉獨官>大敗, 僅以身免. <崔毖>聞之, 使其兄子<燾>詣<棘城>僞賀. < >臨之以兵, <燾>懼首服, < > 遣<燾>歸. 謂<毖>曰: "降者, 上策; 走者, 下策也." 引兵隨之. <毖>與數十騎, 棄家來奔, 其衆悉降於< >. < >以其子<仁>, 鎭<遼東>官府, 市里案堵如故. 我將<如 >據于<河城>, < >遣將軍<張統>掩擊擒之,  其衆千餘家, 歸于<棘城>. 王數遣兵寇<遼東>, <慕容 >遣<慕容翰>·<慕容仁>, 伐之, 王求盟, <翰>·<仁>乃還.

趙炳舜. 『三國史節要』.
20년 겨울 12월, 진 나라 평주 자사 최 비가 도망해왔다. 예전에 최 비는 비밀리에 우리 나라·단씨·우문씨를 회유하여, 모용 외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세 나라가 극성으로 진공하였다. 모용 외는 성문을 닫고 수비하면서 우문씨에게 쇠고기와 술을 보내 위로하였다. 다른 두 나라는 우문씨와 모용 외 사이에 남모르는 계략이 있다고 의심하여, 각각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우문 대인 실독관이 말했다.
"두 나라는 비록 돌아갔으나, 내가 혼자 힘으로 극성을 빼앗을 수 있다."
모용 외가 그의 아들 황으로 하여금 장사 배 억과 함께 정예 부대를 이끌고 선봉에 서게 하고, 자신은 대부대를 거느리고 뒤를 이었다. 실독관은 대패하고 몸만 간신히 빠져 나갔다. 최 비가 이 말을 듣고 형의 아들 도로 하여금 극성에 가서 거짓으로 승리를 치하하였다. 모용 외가 군사를 옆에 세우고 도를 접견하였다. 도는 이를 보고 겁을 내어 자복하였다. 모용 외는 곧 도를 돌려 보내면서 최 비에게 말했다. "항복하는 것이 상책이오, 도주하는 것은 하책이다." 모용 외는 군사를 이끌고 도의 뒤를 따랐다. 최 비는 기병 수십 명을 데리고 집을 버리고 우리에게 도망해왔고, 나머지 군사들은 모두 모용 외에게 항복하였다. 모용 외는 그의 아들 인으로 하여금 요동 관부에 진을 치게 하였다. 시장과 마을이 예전과 같이 평안하였다. 우리 장수 여노가 하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모용 외가 장군 장 통을 보내 습격하여 사로잡고, 주민 1천여 호를 포로로 잡아 극성으로 돌아갔다. 왕은 여러번 군사를 파견하여 요동을 침공하였고, 모용 외는 모용 한과 모용 인을 시켜 우리를 공격하였다. 이리하여 왕은 동맹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한과 인이 바로 돌아갔다.

○二十一年, 冬十二月, 遣兵寇<遼東>, <慕容仁>拒戰破之.

21년 겨울 12월, 군사를 보내 요동을 침공하였다. 모용 인이 항전하여 우리가 패배하였다.

○三十一年, 遣使<後趙><石勒>, 致其 矢.

31년, 후조의 석륵에게 사신을 보내 싸리나무 화살을 주었다.

○三十二年, 春二月, 王薨, 葬於<美川>之原, 號曰<美川王>.
三國史記卷第十七.

32년 봄 2월, 왕이 별세하였다. 미천 언덕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미천왕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17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