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구려사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원문+한글) 권 제 16


三國史記卷第十六 삼국사기 권 제 16

高句麗本紀第四 <新大王>·<故國川王>·<山上王>.

고구려본기 제 4  신대왕, 고국천왕, 산상왕.

○<新大王>, 諱<伯固>[固, 一作句.], <大祖大王>之季弟. 儀表英特, 性仁恕. 初, <次大王>無道, 臣民不親附, 恐有禍亂, 害及於己, 遂遯於山谷. 及<次大王>被弑, 左輔< 支留>與群公議, 遣人迎致. 及至, < 支留> 獻國璽曰: "先君不幸棄國, 雖有子, 不克有國家. 夫{天} 人之心, 歸于至仁, 謹拜稽首, 請卽尊位." 於是, 俯伏三讓而後卽位. 時年七十七歲.

趙炳舜. 『三國史節要』.
신대왕의 이름은 백고['고(固)'를 '구(句)'라고도 한다.]이며, 태조대왕의 막내 아우이다. 의표가 영특하고 성품이 인자하며 너그러웠다. 선왕인 차대왕이 무도하여 신하와 백성들이 가까이 하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고는 환란이 생기면 자기에게도 해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산골짜기로 도망했었다. 차대왕이 살해되자 좌보 어지류가 여러 대신들과 의논하여 사람을 보내 백고를 모셔오게 하였다. 백고가 돌아오자 어지류가 무릎을 꿇고 옥새를 바치면서 말했다. "선왕이 불행하게 돌아가시고, 비록 그 아들이 있으나 나라를 맡길 수 없으며, 인심이 인자하신 당신에게 돌아가므로,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오니, 청컨대 존위에 오르소서." 이에 백고는 엎드려 세 번 사양한 뒤에 즉위하였다. 이 때 나이가 77세였다.

○二年, 春正月, 下令曰: "寡人生 王親, 本非君德, 向屬友于之政, 頗乖貽厥之謨. 畏害難安, 離群遠遯,  聞凶計{訃} , 但極哀 . 豈謂百姓樂推, 群公勸進? 謬以 未{末} , 據于崇高, 不敢遑寧, 如涉 {淵} 海. 宜推恩而及遠, 遂與衆而自新, 可大赦國內." 國人旣聞赦令, 無不歡呼慶 , 曰: "大哉, 新大王之德澤也!" 初, <明臨 天{明臨答夫}> 之難, <次大王>太子<鄒安>逃竄, 及聞嗣王赦令, 卽詣王門, 告曰: "嚮, 國有災禍, 臣不能死, 遯于山谷, 今聞新政, 敢以罪告. 若大王據法定罪, 棄之市朝, 惟命是聽, 若賜以不死, 放之遠方, 則生死肉骨之惠也, 臣所願也, 非敢望也." 王卽賜<狗山瀨>·<婁豆 {婁豆谷}> 二所, 仍封爲<讓國君>. 拜< 夫{答夫}> 爲國相, 加爵爲沛者, 令知內外兵馬兼領<梁貊>部落. 改左右輔爲國相, 始於此.

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通鑑].『북한본』.
2년 봄 정월에 왕이 명령을 내려 말했다. "내가 외람되게도 왕의 근친으로 태어났으나, 본래 임금의 덕성을 갖추지 못했다. 앞서 형제 사이에 정권을 맡긴 것은 왕위를 자손에게 전하는 법도에 대단히 어긋나는 것이었다. 나는 화를 입을까 두려워 마음이 편치 못했으며, 이에 따라 사람 사는 곳을 떠나 먼 곳에 은둔했다가, 선왕의 흉보를 듣고 슬픈 심정을 억누를 수 없었으니, 오늘 백성들이 나를 즐거이 추대하며 여러 대신들이 왕위를 권할 줄을 어찌 생각이나 하였으랴? 그릇되게도 못난 자격으로 거룩한 자리에 앉게 되니, 편치 못함이 마치 깊은 물 깊은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도다. 마땅히 은혜를 먼 곳까지 펴야 할 것이며, 대중들과 더불어 나를 새롭게 해야 할 것이니, 전국의 죄수들을 대사하라!" 백성들이 대사령을 듣고, 모두 기뻐하며 경하하여 "크도다! 새 임금의 은덕이여!"라고 말하였다. 애초에 명림답부의 난이 일어났을 때, 차대왕의 태자 추안이 도망하였다가 새 왕의 대사령을 듣고 곧 궐문에 이르러 고하였다. "지난번 나라에 재난이 있을 때, 제가 죽지 못하고 산곡으로 도망하였다가, 이제 새로운 정치가 베풀어졌다는 말을 듣고 감히 저의 죄를 말씀드립니다. 만약 대왕께서 법에 의하여 죄를 정하여 주시면, 시체를 저자에 버리는 형벌이라도 받겠으며, 만약 죽음을 면하게 하여 먼 곳으로 추방하신다면, 죽을 사람을 살리는 은혜이니, 이는 저의 원하는 바이나 감히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왕이 그에게 구산뢰·누두어 두 곳을 주고, 양국군으로 봉하였다. 답부를 국상으로 임명하고, 작위를 올려 패자로 삼아, 내외의 병마사를 맡게 하고, 동시에 양맥 부락을 다스리게 하였다. 좌보와 우보를 국상으로 고친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三年, 秋九月, 王如<卒本>, 杞{祀} 始祖廟. 冬十月, 王至自<卒本>.

趙炳舜. 『三國史節要』.
3년 가을 9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겨울 10월, 왕이 졸본에서 돌아왔다.

○四年, <漢><玄 郡>大守{太守} <耿臨>來侵, 殺我軍數百人, 王自降乞屬<玄 >.

趙炳舜. 『三國史節要』.
4년, 한 나라 현토군 태수 경 림이 침입하여 우리 군사 수백 명을 죽이자, 왕이 자진하여 항복하고 현토에 속하기를 요청하였다.

○五年, 王遣大加<優居>·主簿<然人>等, 將兵助<玄 >大守{太守} <公孫度>, 討<富山>賊.

趙炳舜. 『三國史節要』.
5년, 왕이 대가 우거와 주부 연인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현토 태수 공손 도를 도와 부산의 적을 치게 하였다.

○八年, 冬十一月, <漢>以大兵嚮我. 王問群臣, 戰守孰便. 衆議曰: "<漢>兵恃衆輕我, 若不出戰, 彼以我爲怯, 數來. 且我國山險而路隘, 此所謂一夫當關, 萬夫莫當者也. <漢>兵雖衆, 無如我何, 請出師禦之." < 夫{答夫}> 曰: "不然. <漢>, 國大民衆. 今以强兵遠鬪, 其鋒不可當也. 而又兵衆者宜戰, 兵少者宜守, 兵家之常也. 今<漢>人千里轉糧, 不能持久. 若我深溝高壘, 淸野以待之, 彼必不過旬月, 饑困而歸. 我以勁卒薄之, 可以得志." 王然之,  城固守. <漢>人攻之不克, 士卒饑餓引還. < 夫{答夫}> 帥數千騎追之, 戰於<坐原>, <漢>軍大敗, 匹馬不反. 王大悅, 賜< 夫{答夫}> <坐原>及<質山>, 爲食邑.

『북한본』.『북한본』.『북한본』.
8년 겨울 11월, 한 나라에서 대병을 일으켜 우리를 향하여 왔다. 왕이 군신들에게 공격과 수비의 어느 쪽이 좋은가를 물었다.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여 말했다.
"한 나라 군사들이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경시하니, 만약 나아가 싸우지 않으면, 적은 우리를 겁쟁이라 하여 자주 침입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으니, 이야말로 한 명이 문을 지키면 만 명이 와도 막아낼 수 있는 격입니다. 따라서 한 나라 군사의 수가 많을지라도, 우리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니, 군사를 출동시켜 방어하소서."
그러나 답부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 나라는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습니다. 이제 그들이 강병으로 멀리까지 쳐들어 오니, 그 예봉을 당할 수 없습니다. 또한 병력이 많은 자는 싸워야 하고, 병력이 적은 자는 수비해야한다는 것이 병가의 법도입니다. 이제 한 나라는 천리길이나 되는 먼 곳에서 군량미를 수송해야 하므로,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성밖에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으며, 성밖의 들판에 곡식 한 알, 사람 하나없이 비워 놓고 기다리게 되면, 그들은 반드시 열흘 혹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굶주림과 피곤으로 인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이 때 우리가 강한 군사로써 육박하면 뜻대로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이를 옳게 여겨 성을 닫고 굳게 수비하였다. 한 나라의 군사들이 공격하다가 승리하지 못하고, 장수와 졸병들이 굶주리다 못하여 퇴각하였다. 이 때 답부가 수천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좌원에서 전투를 벌리니, 한 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식읍으로 주었다.

○十二年, 春正月, 群臣請立太子. 三月, 立王子<男武>爲王太子.

12년 봄 정월, 군신들이 태자를 정할 것을 왕에게 요청하였다. 3월, 왕자 남무를 왕태자로 삼았다.

○十四年, 冬十月丙子晦, 日有食之.

14년 겨울 10월 그믐 병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五年, 秋九月, 國相< 天{答夫}> 卒, 年百十三歲. 王自臨慟, 罷朝七日. 乃以禮葬於<質山>, 置守墓二十家. 冬十二月, 王薨, 葬於<故國谷>, 號爲<新大王>.

『북한본』.
15년 가을 9월, 국상 답부가 죽으니, 나이가 113세였다. 왕이 직접 가서 애도를 표하고, 7일간 조회를 중지하였다. 예를 갖추어 질산에 장례를 지내고, 20여 호의 묘지기를 두었다.
겨울 12월, 왕이 별세하였다. 고국곡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신대왕이라 하였다.

   <故國川王 고국천왕>

○<故國川王>[或云<國襄>.], 諱<男武>[或云<伊夷謨{伊夷模}> .], <新大王><伯固>之第二子. <伯固>薨, 國人以長子<拔奇>不肖, 共立<伊夷謨>爲王. <漢><獻帝><建安>初, <拔奇>怨爲兄而不得立, 與<消奴加{涓奴加}> , 各將下戶三萬餘口, 詣<公孫康>降, 還住<沸流水>上. 王身長九尺, 姿表雄偉, 力能 鼎,  事聽斷, 寬猛得中.

李丙燾. [魏志].李丙燾. [魏志].
고국천왕[혹은 국양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남무[혹은 이이모라고도 한다.]이며, 신대왕 백고의 둘째 아들이다. 예전에 백고가 죽었을 때, 백성들이 왕의 맏아들 발기가 어질지 못하다 하여 이이모를 추대하여 왕을 삼았다. 한 헌제 건안 초기에 발기가 형임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소노가와 함께 각각 민호 3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동 태수 공손 강에게 가서 항복하고, 비류수가로 돌아와 살았다. 왕은 키가 9척이오, 풍채가 웅장하며 힘이 세었고, 일의 처리에 있어서 관용과 예리함을 알맞게 겸비하였다.

○二年, 春二月, 立妃<于>氏爲王后. 后, 提那部{ 那部} <于素>之女也. 秋九月, 王如<卒本>, 杞{祀} 始祖廟.

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봄 2월, 왕비 우씨를 왕후로 삼으니, 그는 제나부 우소의 딸이다.
가을 9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냈다.

 四年, 春三月甲寅夜, 赤氣貫於太微, 如蛇. 秋七月, 星 于太微.

4년 봄 3월 갑인일 밤에 붉은 기운이 태미 성좌를 관통하였는데, 그 형상이 뱀과 같았다.
가을 7월, 혜성이 태미 성좌에 나타났다.

○六年, <漢><遼東>太守興師, 伐我. 王遣王子<喬須>拒之, 不克. 王親帥精騎往, 與<漢>軍戰於<坐原>, 敗之. 斬首山積.

6년, 한 나라 요동 태수가 군사를 일으켜 우리 나라를 공격하였다. 왕이 왕자 계수를 파견하여 대항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왕이 직접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한 나라 군사와 좌원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적의 머리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八年, 夏四月乙卯, 熒惑守心. 五月壬辰晦, 日有食之.

8년 여름 4월 을묘에 형혹성이 심성 성좌에 머물렀다.
5월 그믐 임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二年, 秋九月, 京都雪六尺. 中畏大夫沛者<於留>·評者<左可慮>, 皆以王后親戚, 執國權柄. 其子弟幷恃勢驕侈, 掠人子女, 奪人田宅, 國人怨憤. 王聞之, 怒欲誅之. <左可慮>等與四椽那謀叛.

12년 가을 9월, 서울에 눈이 여섯 자 내렸다.
중외대부 패자 어비류와 평자 좌가려는 모두 왕후의 친척으로서 권력을 잡고 있었다. 그 자제들이 모두 그 세도를 믿고 교만하고 사치하였으며, 다른 사람의 딸을 겁탈하고, 남의 토지와 주택을 갈취하였다. 백성들이 원망하고 분개하였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노하여 그들을 처형하려 하니, 좌가려 등이 네 연나와 함께 모반하였다.

○十三年, 夏四月, (+<左可慮>等)  聚衆, 攻王都. 王徵幾{畿} 內兵馬, 平之. 遂下令日{曰} : "近者, 官以寵授, 位非德進, 毒流百姓, 動我王家, 此寡人不明所致也. 令汝四部(郡} , 各擧賢良在下者!" 於是, 四部共擧東部{都} <晏留>. 王徵之, 委以國政. <晏留>言於王曰: "微臣庸愚, 固不足以參大政. 西<鴨 谷><左勿村><乙巴素>者, <琉璃王>大臣<乙素>之孫也, 性質剛毅, 智慮淵深, 不見用於世, 力田自給. 大王若欲理國, 非此人則不可." 王遣使, 以卑辭重禮聘之, 拜中畏大夫, 加爵爲于台, 謂曰: "孤 承先業, 處臣民之上, 德薄才短, 未濟於理. 先生藏用晦明, 窮處草澤者久矣, 今不我棄, 幡然而來, 非獨孤之喜幸, 社稷生民之福也. 請安承敎, 公其盡心!" <巴素>意雖許國, 謂所受職不足以濟事. 乃對曰: "臣之駑蹇, 不敢當嚴命, 願大王, 選賢良, 授高官, 以成大業." 王知其意, 乃除爲國相, 令知政事. 於是, 朝臣國戚, 謂<素>以新閒舊, 疾之. 王有敎曰: "無貴賤, 苟不從國相者, 族之." <素>退而告人曰: "不逢時則隱, 逢時則仕, 士之常也. 今上待我以厚意, 其可復念舊隱乎?" 乃以至誠奉國, 明政敎, 愼賞罰, 人民以安, 內外無事. 冬十月, 王謂<晏留>曰: "若無子之一言, 孤不能得<巴素>以共理. 今庶績之疑{凝} , 子之功也." 乃拜爲大使者.
○論曰: 古先哲王之於賢者也, 立之無方, 用之不惑, 若<殷><高宗>之<傅說>, <蜀>先主之<孔明>, <秦><符堅{ 堅}> 之<王猛>, 然後賢在位, 能在職, 政敎修明而國家可保. 今王決然獨斷, 拔<巴素>於海濱, 不撓衆口, 置之百官之上, 而又賞其擧者, 可謂得先王之法矣.

李丙燾.『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
13년 여름 4월, 좌가려가 무리를 모아 서울을 침공했다. 왕은 서울 부근의 병마를 징발하여 그들을 진압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근자에 관직이 정실에 따라 주어지고, 직위는 덕행에 의하여 승진되지 않아서 해독이 백성들에게 미치고 나의 왕실을 동요시키고 있다. 이는 내가 총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너의 4부에 명령하노니, 각각 자기 하부에 있는 현명한 자들을 천거하라!"
이에 4부에서는 모두 동부의 안류를 천거하였다. 왕이 안류를 불러 국정을 맡겼다. 안류가 왕에게 말했다.
"미천한 저는 용렬하고 어리석어 실로 중대한 국정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서쪽 압록곡 좌물촌에 사는 을파소라는 사람은 유리왕의 대신이었던 을소의 자손인데, 성질이 강직하고 지혜로우며 사려깊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등용되지 못하고 농사로 생계를 삼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만약 나라를 잘 다스리려 하신다면 이 사람을 등용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왕이 사신을 보내 겸손한 말과 후한 예로써 을파소를 초빙하여 중외 대부로 임명하고 우태의 작위를 주고 말했다.
"내가 외람되게 선대의 왕업을 이어 신하와 백성의 윗자리에 처하였으나, 덕과 재주가 없어 정치를 잘 할 수 없었다. 선생은 재능과 총명을 감추고, 초야에 있은 지 오래였는데, 이제 나를 버리지 않고 마음을 돌려 이곳에 왔으니, 이는 나의 기쁨일 뿐 아니라 사직과 백성의 행복이다. 그대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니, 그대는 진정을 다하여 주기바란다."
파소는 비록 나라에 공헌하고 싶었으나, 맡은 직위가 일을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대답하였다.
"우둔한 저로서는 감히 왕의 엄명을 감당하기 어려우니, 왕께서는 현량한 사람을 선택하여 높은 관직을 주어 위업을 달성하게 하소서."
왕이 그 뜻을 알고, 곧 국상으로 임명하여 정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이에 조신과 외척들은, 을파소가 새로 들어와 옛 대신들을 이간질한다 하여 미워하였다. 왕이 교서를 내려 말했다.
"귀한 자나 천한 자를 막론하고 만약 국상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친족까지 징벌하리라."
을파소가 물러나와 사람들에게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고, 때를 만나면 벼슬을 하는 것은 선비의 도이다. 이제 왕께서 나를 후의로 대하시니, 어찌 다시 전일의 은거를 생각하랴!"라고 말하고, 지성으로 나라에 봉사하여 정치와 교화를 밝히고 상벌을 신중하게 처리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고, 나라 안팎이 무사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안류에게 말하기를 "만일 그대의 말이 아니었다면, 내가 을파소를 데리고 나라를 함께 다스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모든 일이 정리된 것은 그대의 공로이다"라 하고, 그를 대사자로 임명하였다.
저자의 견해 : 옛날의 명철한 임금들은 현명한 자를 등용함에 상례를 따지지 않았으며, 등용한 후에는 의심을 하지 않았으니, 은 나라 고종은 부열에게, 촉 나라 유비는 공명에게, 진 나라 부견은 왕맹에게 그러하였다. 이러한 연후에야 직위에서 현명함과 능력이 발휘되어 정치가 개선되고 교화가 이루어져 국가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왕이 결연히 혼자 용단을 내려 을파소를 바닷가에서 발탁하고, 중론에 구애받지 않고 그를 백관의 윗자리에 임용하였으며, 또한 천거한 자에게까지 상을 주었으니, 가히 옛 임금들의 법도를 체득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十六年, 秋七月, 墮{隕} 霜殺穀. 民饑, 開倉賑給. 冬十月, 王 于<質>陽, 路見坐而哭者, 問: "何以哭爲?" 對曰: "臣貧窮, 常以傭力養母. 今歲不登, 無所傭作, 不能得升斗之食, 是以哭耳." 王曰: "嗟呼! 孤爲民父母, 使民至於此極, 孤之罪也." 給衣食以存撫之. 仍命內外所司, 博問鰥寡孤獨老病貧乏不能自存者, 救恤之, 命有司, 每年自春三月至秋七月, 出官穀, 以百姓家口多少, 賑貸有差, 至冬十月還納, 以爲恒式, 內外大悅.

趙炳舜. 『三國史節要』.
16년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이 죽었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열어 구제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질산 남쪽에서 사냥하다가 길 가에 앉아 우는 자를 보고 우는 이유를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제가 빈궁하여 항상 품팔이로 어머님을 봉양하였는데, 금년에는 흉년이 들어 품팔이 할 곳이 없으므로, 한 되나 한 말의 곡식도 얻을 수 없기에 우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아아!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 백성으로 하여금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이는 나의 죄이다"라 하고, 그에게 옷과 음식을 주어 위로하였다. 이어서 서울과 지방의 해당 관청에 명령하여,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늙은이·늙고 병들고 가난하여 혼자 힘으로 살 수 없는 자들을 널리 탐문하여 구제하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들에게 명령하여 매년 봄 3월부터 가을 7월까지 관곡을 풀어, 백성들의 식구의 다소에 따라 차등있게 구제곡을 빌려 주었다가, 겨울 10월에 상환하게 하는 것을 법규로 정하였다. 모든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十九年, <中國>大亂, <漢>人避亂來投者甚多, 是<漢><獻帝><建安>二年也. 夏五月, 王薨. 葬于<故國川原>, 號爲<故國川王>.

19년, 중국에 큰 난리가 일어나, 피난하여 귀순하는 한 나라 백성들이 매우 많았다. 이 때가 한 헌제 건안 2년이었다. 여름 5월, 왕이 별세하였다. 고국천 언덕에 장사 지내고, 호를 고국천왕이라 하였다.

   <山上王 산상왕>

○<山上王>, 諱<延優>[一名<位宮>], <故國川王>之弟也. 『魏書』云: "<朱蒙>裔孫<宮>, 生而開目能視, 是爲<大祖{太祖}> . 今王是<大祖{太祖}> 曾孫, 亦生而視人, 似曾祖<宮>. <高句麗>呼'相似'爲'位', 故名<位宮>云." <故國川王>無子, 故<延優>嗣立. 初, <故國川王>之薨也, 王后<于>氏, 秘不發喪, 夜往王弟<發岐>宅, 曰: "王無後, 子宜嗣之." <發岐>不知王薨, 對曰: "天之曆數有所歸, 不可輕議.  婦人而夜行, 豈禮云乎?" 后慙, 便往<延優>之宅. <優>起衣冠, 迎門入座宴飮. 王后曰: "大王薨, 無子, <發岐>作{年} 長當嗣, 而謂妾有異心, 暴慢無禮. 是以見叔." 於是, <延優>加禮, 親自操刀割肉, 誤傷其指. 后解裙帶 其傷指. 將歸, 謂<延優>曰: "夜深恐有不虞, 子其送我至宮." <延優>從之, 王后執手入宮. 至翌日質明, 矯先王命, 令群臣, 立<延優>爲王. <發岐>聞之大怒, 以兵圍王宮, 呼曰: "兄死弟及, 禮也. 汝越次簒奪, 大罪也, 宜速出. 不然則誅及妻 ." <延優>閉門三日. 國人又無從<發岐>者. <發岐>知難, 以妻子奔<遼東>. 見大守{太守} <公孫度{公孫康}> , 告曰: "某, <高句麗>王<男武>之母弟也. <男武>死, 無子, 某之弟<延優>與嫂<于>氏謀, 卽位以廢天倫之義. 是用憤 , 來投上國, 伏願假兵三萬, 令擊之, 得以平亂." <公孫度>從之. <延優>遣弟<喬須>, 將兵禦之, <漢>兵大敗. <喬須>自爲先鋒追北, <發岐>告<喬須>曰: "汝今忍害老兄乎?" <喬須>不能無情於兄弟, 不敢害之, 曰: "<延優>不以國讓, 雖非義也, 爾以一時之憤, 欲滅宗國, 是何意耶? 身沒之後, 何面目以見先人乎?" <發岐>聞之, 不勝慙悔, 奔至<裴川>, 自刎死. <喬須>哀哭, 收其屍, 草葬訖而還. 王悲喜, 引<喬須>內中宴, 見以家人之禮, 且曰: "<發岐>請兵異國, 以侵國家, 罪莫大焉. 今子克之, 縱而不殺, 足矣, 及其自死, 哭甚哀, 反謂寡人道乎?" <喬須> 然銜淚而對曰: "臣今請一言而死." 王曰: "何也?" <喬須>曰: "王后雖以先王遺命立大王, 大王不以禮讓之, 曾無兄弟友恭之義. 臣欲成大王之美, 故收屍殯之, 豈圖緣此, 逢大王之怒乎? 大王若以仁忘惡, 以兄喪禮葬之, 孰謂大王不義乎? 臣旣以言之, 雖死猶生. 請出受誅有司." 王聞其言, 前席而坐, 溫顔慰諭曰: "寡人不肖, 不能無惑, 今聞子之言, 誠知過矣. 願子無責." 王子拜之, 王亦拜之, 盡歡而罷. 秋九月, 命有司, 奉迎<發岐>之喪, 以王禮葬於<裴嶺>. 王本因<于>氏得位, 不復更娶, 立<于>氏爲后.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魏志].
산상왕의 이름은 연우[위궁이라고도 한다.]이며 고국천왕의 아우이다.
[위서]에는 "주몽의 후손 궁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능히 볼 수 있었는데 이가 태조이다. 지금 왕은 태조의 증손으로서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사람을 알아 보는 것이 증조 궁과 같았다. 고구려에서는 서로 같다는 말을 '위(位)'라고 하므로, 위궁으로 이름을 지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국천왕이 아들이 없으므로, 연우가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처음 고국천왕이 별세하였을 때, 왕후 우씨는 왕이 죽은 사실을 비밀로 하여 발표하지 않고, 밤에 왕의 아우 발기의 집에 가서 말했다.
"왕이 아들이 없으니 그대가 왕의 뒤를 이어야겠다."
발기는 왕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고 대답하였다.
"하늘의 운수는 가는 방향이 정해져 있는 것이니 경솔하게 논의할 수 없다. 더구나 부인으로서 밤에 출입하는 것이 어찌 예절에 맞는다 하리오."
왕후가 부끄러워하며 곧 연우의 집으로 갔다. 연우는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문에 나와 왕후를 맞아들여 자리에 앉히고 잔치를 베풀었다. 왕후가 말했다.
"대왕이 돌아가셨는데 아들이 없으니, 발기가 맏아우로서 마땅히 뒤를 이어야 되겠으나, 그는 나에게 딴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무례하고 오만하며 예절없이 대하였다. 이에 따라 아주버니에게 온 것이다."
이 때 연우는 예절을 더욱 극진히 하여 직접 칼을 들고 왕후에게 고기를 베어주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을 다쳤다. 왕후가 허리띠를 풀어 그의 다친 손가락을 감싸주었다. 왕후가 환궁하려 할 때 연우에게 "밤이 깊어 뜻하지 않은 일이 생길가 염려되니, 그대가 나를 대궐까지 데려다 달라"고 하였다. 연우가 그렇게 하였다. 왕후는 연우의 손을 잡고 대궐로 들어갔다. 이튿날 날이 샐 무렵에 왕후가 선왕의 유명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군신들로 하여금 연우를 왕으로 삼게 하였다. 발기가 듣고 크게 노하여, 군사로 왕궁을 포위하고 외쳤다. "형이 죽으면 아우에게 왕위가 돌아가는 것이 예이거늘, 네가 차례를 어기고 왕위를 찬탈하는 것은 큰 죄악이니 빨리 나오라. 그렇지 않으면 너의 처자들까지 죽이겠다."
연우는 3일 동안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백성들도 발기를 따르는 자가 없었다. 발기는 성사되기 어려움을 알고, 처자들과 함께 요동으로 도주하였다. 그는 요동 태수 공손 도를 보고 말했다.
"나는 고구려왕 남무의 동복 아우이다. 남무가 죽고 아들이 없는데, 나의 아우 연우가 형수 우씨와 공모하여 왕위에 올라 천륜의 대의를 어겼다. 나는 이에 분개하여 상국으로 귀순하여 왔다. 원컨대 군사 3만 명을 빌려주어 연우를 치게 하면, 고구려의 분란을 평정할 수 있겠다."
공손 도가 그 말을 들어 주었다. 연우가 아우 계수에게 군사를 주어 요동에서 오는 군사를 막으니, 한 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계수가 스스로 선봉이 되어 도망가는 군사를 추격하였다. 발기가 계수에게 말했다.
"네가 오늘 감히 늙은 형을 죽이겠는가?"
계수가 형제간의 정의를 버릴 수 없어 감히 그를 죽이지 못하고 말했다.
"연우가 왕위를 사양하지 않은 것은 비록 정의로운 행동은 아니지만, 형이 일시의 분한 생각을 못이겨 나라를 멸망시키려함은 무슨 뜻인가? 죽은 후에 무슨 면목으로 선조들을 대하려는가?"
발기가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움과 뉘우침을 이길 수 없어 배천으로 도주하여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계수가 슬피 울고 발기의 시체를 거두어 초빈을 하고 돌아왔다. 왕은 슬퍼하면서도 일면 기뻐하며, 계수를 궐내로 불러 들여 잔치를 베풀고, 형제의 예로 대하면서 말했다.
"발기가 타국에 청병하여 국가를 침범하였으니, 죄가 이보다 더 클 수 없다. 이제 그대가 이기고도, 발기를 풀어주어 죽이지 않은 것만 하여도 족한 일인데, 그가 자결한 것을 대단히 애통해하니, 그대는 도리어 나를 무도하다고 생각하는것이 아닌가?"
계수가 서글프게 눈물을 머금으며 대답하였다.
"제가 지금 한 마디 말을 하고 죽기를 청합니다."
왕이 "무슨 말인가?"하고 물으니 계수가 말했다.
"왕후가 비록 선왕의 유명으로 대왕을 즉위하게 하였으나, 대왕께서는 예로써 사양하지 않았으니, 이미 형제간에 우애하고 공손해야 한다는 의리는 없어진 것입니다. 저는 대왕의 미덕을 이루고자, 짐짓 발기의 시체를 거두어 초빈을 한 것인데, 이로 말미암아 대왕의 노여움을 당할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대왕께서 만약 어진 마음을 베풀어 발기의 죄악을 잊어 버리고, 형에 대한 상례를 갖추어 장례지내 주신다면, 누가 대왕이 옳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제가 이미 이 말을 하였으니 죽음을 당하여도 사는 것과 같습니다. 청컨대 나아가 형리의 처형을 받겠습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앞으로 다가 앉으며, 따뜻한 표정으로 위로하여 말했다.
"내가 불초하여 미혹됨이 없을 수 없었는데, 이제 너의 말을 들으니, 진실로 나의 잘못을 알게 되었구나. 너는 나를 탓하지 말라."
동생이 왕에게 절하고, 왕도 그에게 또한 절을 하여 마음껏 즐기다가 헤어졌다.
가을 9월, 관리에게 명하여 발기의 상례를 지내되, 왕례로써 배령에 장사하게 하였다.
왕이 원래 우씨에 의하여 왕위를 얻게 되었으므로, 다시 장가들지 않고 우씨를 왕후로 삼았다.

○二年, 春二月, 築<丸都城>. 夏四月, 赦國內二罪已下.

2년 봄 2월, 환도성을 쌓았다.
여름 4월, 전국의 사형수 이하의 죄수들을 사면하였다.

○三年, 秋九月, 王 于<質>陽.

3년 가을 9월, 왕이 질산 남쪽에서 사냥하였다.

○七年, 春三月, 王以無子, 禱於山川, 是月十五夜夢, 天謂曰: "吾令汝少后生男, 勿憂." 王覺語群臣曰: "夢天語我, 諄諄如此, 而無少后, 奈何?" <巴素>對曰: "天命不可測, 王其待之." 秋八月, 國相<乙巴素>率{卒} , 國人哭之慟. 王以<高優婁>爲國相.

趙炳舜. 『三國史節要』.
7년 봄 3월, 왕이 아들이 없어 산천에 기도하였는데, 이 달 15일 밤 꿈에 하늘이 왕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의 소후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왕이 잠을 깨어 군신에게 말하기를 "꿈에 하늘이 나에게 이와 같이 간곡하게 말하였는데, 소후가 없으니 어찌하면 좋은가?" 하니, 을파소가 대답하였다. "천명이란 헤아릴 수 없으니 왕께서는 기다리소서."
가을 8월, 국상 을파소가 죽으니 온 백성이 통곡하였다. 왕이 고우루를 국상으로 삼았다.

○十二年, 冬十(-一) 月, 郊豕逸. 掌者追之, 至<酒桶村>,   不能捉{獲} . 有一女子, 年二十許, 色美而艶, 笑而前執之, 然後追者得之. 王聞而異之, 欲見其女, 微行夜至女家. 使侍人說之, 其家知王來不敢拒. 王入室, 召其女, 欲御之. 女告曰: "大王之命, 不敢避, 若幸而有子, 願不見遺." 王諸{諾} 之. 至丙夜, 王起還宮.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12년 겨울 11월, 교제에 잡을 돼지가 달아났다. 관리하는 자가 쫓아가 주통촌에 이르렀는데, 돼지가 이리저리 달뛰어 잡지 못하였다. 이 때 나이가 20세 가량 되고 얼굴이 아름다운 한 여자가 웃으면서 앞으로 걸어와 돼지를 잡아주어 쫓던 자가 돼지를 얻을 수 있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이상하게 여겼다. 왕은 그 여자가 보고 싶어 평복을 입고, 밤에 여자의 집에 갔다. 시종을 시켜 말하니, 그 집에서 왕이 온 줄 알고 감히 거절하지 못하였다. 왕이 방으로 들어가 그 여자를 불러 동침하려 하였다. 그 여자가 말하기를 "대왕의 명령을 감히 피할 수 없으니, 만약 아이가 있게되면 버리지 말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승낙하였다. 자정이 되자 왕이 일어나 환궁하였다.

○十三年, 春三月, 王后知王幸<酒桶村>女, 妬之, 陰遣兵士殺之. 其女聞知, 衣男服逃走. 追及欲害之, 其女問曰: "爾等今來殺我, 王命乎, 王后命乎? 今妾腹有子, 實王之遺體也. 殺妾身可也, 亦殺王子乎?" 兵士不敢害, 來以女所言告之. 王后怒, 必欲殺之, 而未果. 王聞之, 乃復幸女家, 問曰: "汝今有娠, 是誰之子?" 對曰: "妾平生不與兄弟同席, 況敢近異姓男子乎. 今在腹之子, 實大王之遺體也." 王慰藉贈與, 甚厚. 乃還告王后, 竟不敢害. 秋九月, <酒桶>女生男. 王喜曰: "此天賚予嗣胤也." 始自郊豕之事, 得以幸其母, 乃名其子曰<郊 >, 立其母爲小后. 初, 小后母孕未産, 巫卜之曰: "必生王后." 母喜, 及生, 名曰<后女>. 冬十月, 王移都於<九都{丸都}> .

趙炳舜. 『三國史節要』.
13년 봄 3월, 왕이 주통촌 여자에게 갔던 사실을 왕후가 알고, 그 여자를 질투하여 남몰래 군사를 보내 죽이려 하였으나, 그 여자가 이 소문을 듣고 남장을 하고 도주하였다. 병사들이 그 여자를 추격하여 죽이려 하니, 그 여자가 물었다.
"너희들이 지금 나를 죽이려 하니, 이것이 왕의 명령이냐, 왕후의 명령이냐? 이제 나의 뱃속에 아이가 있으니, 이 아이는 왕의 혈육이다. 나를 죽이는 것은 좋으나 왕자도 죽일 것인가?"
병사들이 그 여자를 감히 죽이지 못하고 돌아와, 그 여자의 말을 보고하였다. 왕후가 노하여 기어코 죽이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곧 다시 그 여자의 집에 가서 묻기를 "네가 지금 임신한 것이 누구의 아이냐?"라 하니, 그 여자가 대답하기를 "제가 평생에 형제와도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는데, 황차 성이 다른 남자와 가까이 했겠습니까? 지금 저의 뱃속에 있는 아이는 진실로 대왕의 혈육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여자를 위로하고 선물을 후하게 주었다. 그리고 곧 돌아와 왕후에게 말하니 왕후가 끝내 그 여자를 죽이지 못하였다.
가을 9월, 주통촌 여자가 아들을 낳았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후계자이다"라고 하였다. 교제에 잡을 돼지로 말미암아 그 어머니를 사랑할 수 있었다 하여, 그 아이의 이름을 교체라 하고, 아이의 어머니를 소후로 삼았다. 처음 소후의 어머니가 그녀를 배었을 때 무당이 점을 치고 말하기를 "반드시 왕후를 낳으리라"하여 어머니가 기뻐하였고, 아이를 낳게 되자 후녀라고 이름지었었다.
겨울 10월, 왕이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十七年, 春正月, 立<郊 >王大子{太子} .

趙炳舜. 『三國史節要』.
17년 봄 정월, 교체를 왕태자로 삼았다.

○二十一年, 秋八月, <漢><平州>人<夏瑤>, 以百姓一千餘家來投, 王納之, 安置<柵城>. 冬十月, 雷, 地震. 星學{ } 于東北.

趙炳舜. 『三國史節要』.
21년 가을 8월, 한 나라 평주 사람 하요가 백성 1천여 호를 데리고 귀순해왔다. 왕이 그를 받아 들여 책성에 배치하였다. 겨울 10월, 우레와 지진이 있었다. 혜성이 동북방에 나타났다.

○二十三年, 春二月壬子晦, 日有食之.

23년 봄 그믐 임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二十四年, 夏四月, 異鳥集于王庭.

24년 여름 4월, 이상한 새들이 대궐에 모였다.

○二十八年, 王孫<然弗>生.

28년, 왕의 손자 연불이 태어났다.

○三十一年, 夏五月, 王薨. 葬於<山上陵>, 號爲<山上王>.
三國史記卷第十六.

31년 여름 5월, 왕이 별세하였다. 산상릉에 장례지내고, 호를 산상왕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16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