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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원문+한글) 삼국사기 권 제 13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卷第十三~卷第二十二).

三國史記卷第十三 삼국사기 권 제 13

高句麗本紀第一 始祖<東明聖王>·<&琉璃王{瑠璃明王} >.

趙炳舜.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고구려본기 제 1 시조 동명성왕, 유리왕.

 
  
始祖<東明聖王 동명성왕>

○始祖<東明聖王>, 姓<高>氏, 諱<朱蒙>[一云<鄒□{鄒牟}> , 一云<衆解{衆牟}> ]. 先是, <扶餘>王<解夫婁>老無子, 祭山川求嗣. 其所御馬至<鯤淵>, 見大石, 相對流淚. 王怪之, 使人轉其石, 有小兒, 金色蛙形.[蛙, 一作蝸.] 王喜曰: "此乃天賚我令胤乎!" 乃收而養之, 名曰<金蛙>. 及其長, 立爲太子. 後, 其相<阿蘭弗>曰: "日者, 天降我曰: '將使吾子孫立國於此, 汝其避之. 東海之濱有地, 號曰<迦葉原>. 土壤膏 宜五穀, 可都也.'" <阿蘭弗>遂勸王, 移都於彼, 國號<東扶餘>. 其舊都有人, 不知所從來, 自稱天帝子<解慕漱>, 來都焉. 及<解夫婁>薨, <金蛙>嗣位. 於是時, 得女子於<太白山>南<優渤水>, 問之曰: "我是<河伯>之女, 名<柳花>. 與諸弟出遊, 時有一男子, 自言天帝子<解慕漱>, 誘我於<熊心山{熊神山}> 下<鴨 {鴨綠}> 邊室中, 私之, 卽往不返. 父母責我無媒而從人, 遂謫居<優渤水>." <金蛙>異之, 幽閉於室中. 爲日所炤, 引身避之, 日影又逐而炤之. 因而有孕, 生一卵, 大如五升許. 王棄之, 與犬豕, 皆不食, 又棄之路中, 牛馬避之, 後棄之野, 鳥覆翼之. 王欲剖之, 不能破, 遂還其母. 其母以物 之, 置於暖處, 有一男兒, 破殼而出, 骨表英奇. 年甫七歲,  然異常, 自作弓矢, 射之, 百發百中. <扶餘>俗語, 善射爲<朱蒙>, 故以名云. <金蛙>有七子, 常與<朱蒙>遊戱, 其伎能皆不及<朱蒙>. 其長子<帶素>言於王曰: "<朱蒙>非人所生, 其爲人也勇, 若不早圖, 恐有後患, 請除之." 王不聽, 使之養馬. <朱蒙>知其駿者, 而減食令瘦, 駑者, 善養令肥. 王以肥者自乘, 瘦者給<朱蒙>. 後, 獵于野, 以<朱蒙>善射, 與其矢小而<朱蒙> 獸甚多. 王子及諸臣又謀殺之. <朱蒙>母陰知之, 告曰: "國人將害汝. 以汝才略, 何往而不可? 與其遲留而受辱, 不若遠適以有爲." <朱蒙>乃與<鳥伊{烏伊}> ·<摩離>·<陜父>等三人爲友, 行至<淹 水>[一名<盖斯水>, 在今<鴨綠>東北]. 欲渡無梁, 恐爲追兵所迫. 告水曰: "我是天帝子, <何伯{河伯}> 外孫{甥} . 今日逃走, 追者垂及如何?" 於是, 魚鼈浮出成橋, <朱蒙>得渡, 魚鼈乃解, 追騎不得渡. <朱蒙>行至<毛屯谷>[『魏書』云; "至<普述水>."], 遇三人: 其一人着麻衣, 一人着衲衣, 一人着水藻衣. <朱蒙>問曰: "子等何許人也, 何姓何名乎?" 麻衣者曰: "名<再思>", 衲衣者曰: "名<武骨>", 水藻衣者曰: "名<默居>", 而不言姓. <朱蒙>賜<再思>姓<克>氏; <武骨><仲室>氏; <默居><少室>氏. 乃告於衆曰: "我方承景命, 欲啓元基, 而適遇此三賢, 豈非天賜乎?" 遂揆其能, 各任以事, 與之俱至<卒本川>[『魏書』云: "至<紇升骨城>."]. 觀其土壤肥美, 山河險固, 遂欲都焉. 而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 居之.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一云: <朱蒙>至<卒本扶餘>, 王無子, 見<朱蒙>知非常人, 以其女妻之, 王薨, <朱蒙>嗣位.] 時, <朱蒙>年二十二歲, 是<漢><孝元帝><建昭>二年, <新羅>始祖<赫居世>二十一年甲申歲也. 四方聞之, 來附者衆. 其地連<靺鞨>部落, 恐侵盜爲害, 遂攘斥之, <靺鞨>畏服, 不敢犯焉. 王見<沸流水>中, 有菓{菜} 葉逐流下, 知有人在上流者. 因以獵往尋, 至<沸流國>. 其國王<松讓>出見曰: "寡人僻在海隅, 未嘗得見君子, 今日邂逅相遇, 不亦幸乎! 然不識吾子自何而來." 答曰: "我是天帝子, 來都於某所." <松讓>曰: "我累世爲王, 地小不足容兩主, 君立都日淺, 爲我附庸, 可乎?" 王忿其言, 因與之鬪辯, 亦相射以校藝, <松讓>不能抗.

趙炳舜. 『廣開土大王碑銘』에는 '牟', 『三國史節要』에는 '祥'으로 되어 있다.李丙燾.李丙燾. [三國遺事].『북한본』.李丙燾. [三國遺事].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고씨이고, 이름은 주몽[추모 혹은 중해라고도 한다.]이다. 이보다 앞서 부여왕 해부루가 늙을 때까지 아들이 없었다. 그는 산천에 제사를 드려 아들 낳기를 기원하였다. 하루는 그가 탄 말이 곤연에 이르렀는데, 말이 그곳의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기고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려보니, 금빛 개구리[와(蛙)는 와(蝸)라고도 한다.] 모양의 어린 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이 아이가 바로 하늘이 나에게 주신 아들이구나!"라고 말하고, 그를 데려와 기르며 금와라고 이름 지었다. 그가 장성하자 태자를 삼았다. 훗날 국상 아란불이 말했다.
"어느 날 하느님이 나에게 내려와 이르되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니, 너는 여기서 피하라. 동쪽 바닷가에 가섭원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져서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니 가히 도읍을 정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아란불은 마침내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게 하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 하였다. 그 옛 도읍에는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 그곳에 도읍을 정하였다.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 때 금와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나 그녀의 내력을 물었다. 그녀가 말하기를 "나는 하백의 딸이고, 이름은 유화이다. 여러 동생들을 데리고 나가 놀았는데, 때마침 한 남자가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면서 나를 웅심산 아래 압록강 가에 있는 집으로 유인하여 사욕을 채우고, 그 길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의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남자와 관계한 것을 꾸짖고, 마침내 우발수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하였다"고 대답하였다. 금와가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녀를 방에 가두었는데, 그녀에게 햇빛이 비쳤고, 그녀가 몸을 피하면 햇빛이 또한 그녀를 따라 가면서 비쳤다. 이로 인하여 태기가 있어 다섯 되들이만한 큰 알을 낳았다. 왕이 그 알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으며, 다시 길 가운데 버렸으나, 소와 말이 피하고 밟지 않았다. 나중에는 들에 버렸으나 새가 날개로 그것을 덮어 주었다. 왕이 그것을 쪼개려 하였으나 깨뜨릴 수가 없었으므로 마침내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었다. 그 어머니가 그것을 감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다. 그의 골격과 외모가 뛰어났다. 그의 나이 7세에 보통 사람과 크게 달라서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 속담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였기 때문에 이로써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금와에게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들은 항상 주몽과 함께 놀았는데, 그들의 재주가 모두 주몽을 따르지 못하였다. 그의 맏아들 대소가 왕에게 말했다. "주몽은 사람이 낳지 않았으며, 그 사람됨이 용맹하므로, 만일 일찍 처치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려우니, 청컨대 그를 없애버리소서." 그러나 왕이 이를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은 여러 말 중에서 빨리 달리는 말을 알아내어, 그 말에게는 먹이를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 아둔한 말은 잘 길러 살찌게 하였다. 왕은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훗날 들에서 사냥을 하는데, 주몽은 활을 잘 쏜다 하여 화살을 적게 주었다. 그러나 주몽이 잡은 짐승이 훨씬 많았다. 왕자와 여러 신하들은 주몽을 죽이려 하였다. 주몽의 어머니가 그들의 책략을 몰래 알아 내고 주몽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장차 너를 죽이려 한다. 너의 재능과 지략이라면 어디간들 살지 못하겠는가? 여기에서 주저하다가 해를 당하기보다 차라리 멀리 가서 큰 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에 주몽은 오이·마리·협보 등의 세 사람과 벗이 되어, 엄호수[개사수라고도 하는데, 현재의 압록강 동북방에 있다.]에 이르렀다. 거기에서 강을 건너고자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그들은 추격해오는 군사들에게 붙잡힐까 걱정이 되었다. 주몽이 강을 향하여 말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을 하는 길인데, 뒤쫓는 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해야 하는가?" 이 때, 물고기와 자라가 물위로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주몽은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러나 물고기와 자라는 곧 흩어졌으므로 뒤쫓던 기병들은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이 모둔곡[[위서]에는 '보술수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다. 한 사람은 삼베 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장삼을 입었고, 한 사람은 수초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주몽이 물었다. "그대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성과 이름이 무엇인가?" 삼베 옷을 입은 사람은 "이름이 재사"라고 대답했으며, 장삼을 입은 사람은 "이름이 무골"이라고 대답했고, 수초로 만든 옷을 입은 사람은 "이름이 묵거"라고 대답하면서 성은 말하지 않았다. 주몽은 재사에게는 극씨, 무골에게는 중실씨, 묵거에게는 소실씨라는 성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곧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바야흐로 하늘의 명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창건하려 하는데, 마침 세 분의 어진 인물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내려 준 사람이 아니겠는가?" 주몽은 드디어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 각각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위서]에는 '흘승골성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에 이르렀다. 그들은 그곳의 토지가 비옥하고 산하가 준험한 것을 보고, 마침내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려 하였다. 그러나 미쳐 궁실을 짓지 못하여, 비류수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이에 따라 고를 성씨로 삼았다.[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을 때, 그 곳 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이 비상한 사람임을 알아보고, 그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왕이 별세하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는 설도 있다.] 이 해에 주몽의 나이 22세였으며, 한 나라 효원제 건소 2년, 신라 시조 혁거세 21년 갑신년이었다.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와서 이곳에 살고자 하는 자가 많았다. 그곳이 말갈부락과 인접하여 있었으므로, 그들이 침범할까 염려하여 물리쳐 버리니, 말갈이 두려워 하여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왕은 비류수에 채소가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따라 왕은 사냥을 하며 그곳을 찾아 올라가 비류국에 이르렀다. 그 나라 임금 송양이 나와 왕을 보고 말했다. "과인이 바닷가 한 구석에 외따로 살아와서 군자를 만난 적이 없는데, 오늘 우연히 만나게 되었으니 또한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대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모르겠다." 주몽은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모처에 와서 도읍을 정하였다"라고 대답하였다. 송양이 말했다. "우리 집안은 누대에 걸쳐 왕 노릇을 하였고, 또한 땅이 비좁아 두 임금을 세울 수 없는데, 그대는 도읍을 정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의 속국이 되는 것이 어떤가?" 왕이 그의 말에 분노하여 그와 논쟁을 벌이다가 다시 활 쏘기로 재주를 비교하게 되었는데, 송양은 대항할 수 없었다.

○二年, 夏六月, <松讓>以國來降, 以其地爲<多勿都>, 封<松讓>爲主. <麗>語謂復舊土爲'多勿', 故以名焉.

2년 여름 6월,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했다. 그곳을 다물도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군주로 봉했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이라 하기 때문에 그곳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

○三年, 春三月, 黃龍見於< 嶺>. 秋七月, 慶雲見< 嶺>南, 其色{邑} 靑赤.

李丙燾. 舊本.
3년 봄 3월, 황룡이 골령에 나타났다.
가을 7월, 상서로운 구름이 골령 남쪽에 나타났다. 그 빛이 푸르고 붉었다.

○四年, 夏四月, 雲霧四起, 人不辨色七日. 秋七月, 營作城郭宮室.

4년 여름 4월,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일어나 7일 동안이나 사람들이 색깔을 분별하지 못했다.
가을 7월, 성곽과 궁실을 건축하였다.

○六年, 秋八月, 神雀集宮庭. 冬十月, 王命<烏伊>·<扶芬奴>, 伐<大白山{太白山}> 東南<荇人國>, 取其地, 爲城邑.

趙炳舜. 『三國史節要』.
6년 가을 8월, 이상한 새가 대궐에 날아 들었다.
겨울 10월, 왕이 오이와 부분노에게 명하여 태백산 동남방에 있는 해인국을 치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을 만들었다.

○十(+一) 年, 秋九月, 鸞集於王臺. 冬十一月, 王命<扶尉 >, 伐<北沃沮>, 滅之, 以其地爲城邑.

趙炳舜. 『三國史節要』.
10년 가을 9월, 난새가 왕대에 모였다.
겨울 11월, 왕이 부위염에게 명하여 북옥저를 격멸하고, 그 지역을 성읍으로 만들었다.

○十四年, 秋八月, 王母<柳花>薨於<東扶餘>. 其王<金蛙>以太后禮, 葬之, 遂立神廟. 冬十月, 遣使<扶餘>饋方物, 以報其德.

14년 가을 8월, 왕의 어머니 유화가 동부여에서 죽었다. 그곳의 왕 금와가 그를 태후의 예로 장례지내고, 그의 신묘를 세웠다.
겨울 10월, 사신을 부여에 보내 토산물을 주어 그 은덕에 보답하였다.

○十九年, 夏四月, 王子<類利>自<扶餘>與其母逃歸. 王喜之, 立爲太子. 秋九月, 王升遐, 時年四十歲. 葬<龍山>, 號<東明聖王>.

19년 여름 4월, 왕의 아들 유리가 부여로부터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해오니, 왕이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가을 9월, 왕이 별세하였다.이 때 왕의 나이 40세였다. 용산에 장사지내고, 호를 동명성왕이라 하였다.

   <瑠璃明王  유리명왕>

○<瑠璃明王>立. 諱<類利>, 或云<孺留>. <朱蒙>元子, 母<禮>氏. 初, <朱蒙>在<扶餘>, 娶<禮>氏女有娠. <朱蒙>歸後乃生, 是爲<類利>. 幼年, 出遊陌上, 彈雀誤破汲水婦人瓦器. 婦人罵曰: "此兒無父, 故頑如此." <類利>慙, 歸問母氏: "我父何人, 今在何處?" 母曰: "汝父非常人也, 不見容於國, 逃歸南地, 開國稱王. 歸時謂予曰: '汝若生男子, 則言我有遺物, 藏在七稜石上松下, 若能得此者, 乃吾子也.'" <類利>聞之, 乃往山谷, 索之不得, 倦而還. 一旦在堂上, 聞柱礎間若有聲, 就而見之, 礎石有七稜. 乃搜於柱下, 得斷劒一段. 遂持之與<屋智>·<句鄒>·<都祖>等三人, 行至<卒本>, 見父王, 以斷劒奉之. 王出己所有斷劒, 合之, 連爲一劒. 王悅之, 立爲太子, 至是繼位.

유리명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유리인데, 혹은 유류라고도 하였다. 그는 주몽의 맏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예씨이다. 에전에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에게 장가 들었는데 그녀에게 태기가 있었다. 그녀는 주몽이 떠난 뒤에 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가 유리였다. 유리가 어렸을 때, 거리에 나가 놀면서 참새를 쏘다가 물긷는 부인의 물동이를 잘못 쏘아 깨뜨렸다. 그 부인이 꾸짖어 말하기를 "이 아이는 애비가 없어서 이렇게 논다"라고 하였다. 유리가 부끄럽게 여기고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우리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며 지금은 어디에 계십니까?"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너의 아버지는 비상한 사람이어서 나라에서 용납하지 않았기에, 남쪽 지방으로 도망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 아버지가 떠날 때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만약 아들을 낳으면, 나의 유물이 칠각형의 돌 위에 있는 소나무 밑에 숨겨져 있다고 말하시오. 만일 이것을 발견하면 곧 나의 아들일 것이오'라고 말했다." 유리가 이 말을 듣고 바로 산골로 들어가 그것을 찾았으나 실패하고 지친 상태로 돌아왔다. 하루는 유리가 마루에 앉아 있었는데, 기둥과 주춧돌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듯하여 가보니, 주춧돌이 칠각형이었다. 그는 곧 기둥 밑을 뒤져서 부러진 칼 조각을 찾아냈다. 그는 마침내 이것을 가지고 옥지·구추·도조 등의 세 사람과 함께 졸본으로 가서, 부왕을 만나 부러진 칼을 바쳤다. 왕이 자기가 가졌던 부러진 칼 조각을 꺼내어 맞추어 보니, 하나의 칼로 이어졌다. 왕이 기뻐하여 그를 태자로 삼았는데, 이 때에 와서 왕위를 잇게된 것이다.

○二年, 秋七月, 納<多勿>侯<松讓>之女爲妃. 九月, 西狩獲白獐. 冬十月, 神雀集王庭. <百濟>始祖<溫祚>立.

2년 가을 7월, 다물후 송양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9월, 서쪽 지방으로 사냥을 나가 흰 노루를 잡았다.
겨울 10월, 이상한 새들이 대궐에 모였다.
백제 시조 온조가 왕위에 올랐다.

○三年, 秋七月, 作離宮於< 川>. 冬十月, 王妃<松>氏薨. 王更娶二女{姬} 繼室, 一曰<禾姬>, < 川>人之女也, 一曰<雉姬>, <漢>人之女也. 二女爭寵, 不相和, 王於< 谷>造東西二宮, 各置之. 後, 王田於<箕山>, 七日不返. 二女{姬} 爭鬪, <禾姬>罵<雉姬>曰: "汝<漢>家婢妾, 何無禮之甚乎?" <雉姬>慙恨亡歸. 王聞之, 策馬追之, <雉姬>怒不還. 王嘗息樹下, 見黃鳥飛集, 乃感而歌曰: "  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3년 가을 7월, 골천에 이궁을 지었다.
겨울 10월, 왕비 송씨가 죽었다. 왕이 다시 두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후취를 삼았는데, 한 사람은 화희이니 골천 사람의 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치희이니 한 나라 사람의 딸이었다. 두 여자는 서로 사랑을 차지하려 했으므로 화목하게 지내지 못했다. 왕은 양곡에 동궁과 서궁을 지어 각각 따로 살게 하였다. 그 후, 왕이 기산으로 사냥을 떠나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두 여인은 다투다가 화희가 치희를 욕하며 말했다. "네가 한인의 집에 살던 비첩으로서 어찌 무례함이 이토록 심한가?" 치희는 부끄럽고 분하여 집으로 도망가버렸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말을 채찍질하여 쫓아 갔으나, 치희는 분함을 참지 못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왕이 나무 밑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꾀꼬리가 모여드는 것을 보고 느끼는 바 있어 노래를 불렀다. "꾀꼬리도 이리저리, 암수가 서로 의지하며 노는데, 외로운 나는, 누구와 함께 돌아가리."

○十一年, 夏四月, 王謂群臣曰: "<鮮卑>恃險, 不我和親, 利則出抄, 不利則入守, 爲國之患. 若有人能折此者, 我將重賞之." <扶芬奴>進曰: "<鮮卑>險固之國, 人勇而愚, 難以力鬪, 易以謀屈." 王曰: "然則爲之奈何?" 答曰: "宜使人反間入彼, 僞說: '我國小而兵弱. 怯而難動' 則<鮮卑>必易我, 不爲之備. 臣俟其隙, 率精兵從間路, 依山林以望其城. 王使以羸兵出其城南, 彼必空城而遠追之. 臣以精兵走入其城, 王親率勇騎挾擊之, 則可克矣." 王從之. <鮮卑>果開門出兵追之. <扶芬奴>將兵走入其城, <鮮卑>望之, 大驚還奔. <扶芬奴>當關拒戰, 斬殺甚多. 王擧旗鳴鼓而前, <鮮卑>首尾受敵, 計窮力屈, 降爲屬國. 王念<扶芬奴>功, 賞以食邑, 辭曰: "此王之德也. 臣何功焉." 遂不受, 王乃賜黃金三十斤·良馬一十匹.

11년 여름 4월, 왕이 여러 신하에게 말했다. "선비가 자기네 땅의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려 하지 않으며, 정세가 유리하면 나와서 약탈하고, 불리하면 들어가 수비를 하니, 나라의 걱정거리로다. 만약 이들을 제거하는 자가 있다면 내가 장차 큰 상을 주겠노라." 부분노가 앞으로 나와 "선비는 지세가 험준하며, 사람들이 용감하고 우직하여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지만, 꾀로써 그들을 굴복시키기는 쉽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은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물었다. 부분노가 대답했다. "거짓 간첩을 만들어 그들에게 보내어 거짓말을 하되, '우리 나라는 작고, 군대가 약하므로 겁이 나서 움직이지 못한다'고 하면, 선비가 반드시 우리를 얕잡아 보고 수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그 틈을 이용하여 정병을 거느리고 사잇길로 들어가 산림 속에 숨어서 그 성을 노리고 있겠습니다. 이 때 왕께서 약간의 군사를 적의 성 남쪽으로 출동시킨다면, 적은 틀림없이 성을 비우고 먼 곳까지 추격해올 것입니다. 그리되면 저는 정병을 거느리고 그들의 성으로 달려 들어가고, 왕께서 용감한 기병을 거느리고 그들을 양쪽에서 협공하면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이 의견을 따랐다. 선비는 과연 성문을 열고 군사를 출동시켜 추격해왔다. 이 때, 부분노가 군사를 거느리고 성으로 달려 들어가니, 선비가 이것을 보고 크게 놀래어 다시 성안으로 달려 들어 왔다. 부분노는 성문에서 싸워 그들을 수없이 목베어 죽였다. 그 때, 왕이 깃발을 들고 북을 올리며 전진하였다. 선비가 앞뒤로 적을 맞이하여, 대책이 없고 힘이 다하자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왕이 부분노의 공로를 생각하여, 상으로 식읍을 주었다. 부분노는 사양하며 "이는 왕의 덕이 훌륭한 결과입니다. 저에게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한 채, 상을 받지 않았다. 왕은 황금 30근과 좋은 말 열 필을 주었다.

○十三年, 春正月, 熒惑守心星.

13년 봄 정월, 화성이 심성 성좌에 머물렀다.

○十四年, 春正月, <扶餘>王<帶素>遣使來聘, 請交質子, 王憚<扶餘>强大, 欲以太子<都切>爲質, <都切>恐不行, <帶素> 之. 冬十(-一) 月, <帶素>以兵五萬來侵, 大雪人多凍死, 乃去.

趙炳舜. 『三國史節要』.
14년 봄 정월,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보내와 방문하고, 인질의 교환을 요청하였다. 왕은 부여의 강대함을 두려워하여, 태자 도절을 인질로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도절이 두려워하여 가지 않자 대소가 분개하였다.
겨울 11월, 대소가 군사 5만을 거느리고 와서 침범하였으나, 큰 눈이 내려 동사자가 많이 생기자 곧 돌아갔다.

○十九年, 秋八月, 郊豕逸, 王使<託利>·<斯卑>追之, 至<長屋>澤中得之, 以刀斷其脚筋. 王聞之怒曰: "祭天之牲, 豈可傷也?" 遂投二人坑中殺之. 九月, 王疾病, 巫曰: "<託利>·<斯卑>爲崇{ } ." 王使謝之, 卽愈.

趙炳舜. 『三國史節要』.
19년 가을 8월, 교제에 쓸 돼지가 달아 났다. 왕은 탁리와 사비를 시켜 잡아오게 하였다. 그들은 장옥 늪에 이르러 돼지를 발견하고, 칼로 다리의 힘줄을 잘랐다. 왕이 이를 듣고 노하여 말했다. "하늘에 제사지낼 희생에 어찌 상처를 낼 수 있는가?" 왕은 두 사람을 구덩이 속에 던져 죽였다.
9월, 왕이 병들었다. 무당이 "탁리, 사비의 귀신이 화근이 되었다"고 하므로, 왕이 그를 시켜 귀신에게 사죄하게 하였다. 곧 왕의 병이 나았다.

○二十年, 春正月, 太子<都切>卒.

20년 봄 정월, 태자 도절이 죽었다.

○二十一年, 春三月, 郊豕逸. 王命掌牲<薛支>, 逐之. 至<國內><尉那巖>得之, 拘於<國內>人家, 養之. 返見王, 曰: "臣逐豕, 至<國內><尉那巖>, 見其山水深險, 地宜五穀, 又多 鹿魚鼈之産. 王若移都, 則不唯民利之無窮, 又可免兵革之患也." 夏四月, 王田于<尉中林>. 秋八月, 地震. 九月, 王如<國內>, 觀地勢, 還至<沙勿>澤, 見一丈夫坐澤上石. 謂王曰: "願爲王臣." 王喜許之, 因賜名<沙勿>, 姓<位>氏.

21년 봄 3월, 교제에 쓸 돼지가 달아 났다. 왕이 장생 설지에게 명하여 뒤쫓게 하였다. 그는 국내 위나암에 이르러서 돼지를 붙잡아 우선 국내 사람의 집에서 기르게 하였다. 설지가 돌아와 왕에게 말했다. "제가 돼지를 따라 국내 위나암에 갔는데, 그곳 자연이 준험하고, 토양이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며, 또한 산짐승과 물고기 등 산물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왕께서 그곳으로 도읍을 옮긴다면, 백성들의 복리가 무궁할 뿐 아니라, 또한 전쟁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여름 4월, 왕이 위중림에서 사냥을 하였다.
가을 8월, 지진이 있었다.
9월, 왕이 국내에 가서 지세를 돌아 보고 오다가 사물 못에 이르러, 한 사나이가 연못 가운데의 돌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왕에게 "왕의 신하가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흔쾌히 허락하고, 그에게 사물이라는 이름과 위씨라는 성을 주었다.

○二十二年, 冬十月, 王遷都於<&國內(國內城)> , 築<尉那巖>城. 十二月, 王田于<質山>陰, 五日不返. 大輔<陜父>諫曰: "王新移都邑, 民不安堵. 宜孜孜焉, 刑政之是恤, 而不念此, 馳騁田獵, 久而不返, 若不改過自新, 臣恐政荒民散, 先王之業, 墜地." 王聞之, 震怒, 罷<陜父>職,  司官園. <陜父>憤去之<南韓>.

趙炳舜. 『三國史記』 志.
22년 겨울 10월, 왕이 국내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12월, 왕이 질산 북쪽에서 사냥하면서 닷새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대보 협보가 말했다. "왕께서 새로 도읍을 옮겨, 백성들이 아직 안정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응당 열심히 사회의 안정과 정치와 백성의 구휼 사업을 돌보아야 할 것인데, 이러한 일을 생각하지 않고, 말을 달려 사냥을 떠나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니, 왕께서 만일 이러한 잘못을 고쳐 자신을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정치는 황폐하고 백성들은 흩어져 선왕의 업적이 사라지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협보의 관직을 파면하고, 관가의 장원을 관리하게 하였다. 협보가 분개하여 그 나라를 떠나 남한으로 갔다.

○二十三年, 春二月, 立王子<解明>, 爲太子, 大赦國內.

23년 봄 2월, 왕의 아들 해명을 태자를 삼고, 국내의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二十四年, 秋九月, 王田于<箕山>之野, 得異人, 兩腋有羽. 登之朝賜姓<羽>氏,  尙王女.

24년 가을 9월, 왕이 기산의 들에서 사냥하다가 비상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양쪽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었다. 그를 조정에 등용하여 우씨 성을 주고, 왕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二十七年, 春正月, 王太子<解明>在古都, 有力而好勇. <黃龍國>王聞之, 遣使以强弓爲贈. <解明>對其使者, 挽而折之曰: "非予有力, 弓自不勁耳." <黃龍王>慙. 王聞之怒, 告<黃龍>曰: "<解明>爲子不孝, 請爲寡人誅之." 三月, <黃龍王>遣使, 請太子相見. 太子欲行, 人有諫者, 曰: "今隣國無故請見, 其意不可則{測} 也." 太子曰: "天之不欲殺我, <黃龍王>其如我何?" 遂行. <黃龍王>始謀殺之, 及見不敢加害, 禮送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27년 봄 정월, 왕태자 해명이 옛 도읍에 남아 있었다. 그는 힘이 세고 용감하였다. 황룡국 왕이 이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센 활을 선사하였다. 해명이 그 사신 앞에서 활을 당겨 꺾으면서 "내가 힘이 센 것이 아니라 활 자체가 강하지 않다"고 말했다. 황룡왕이 부끄러워 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황룡왕에게 "해명은 자식으로서 효성이 없으니, 청컨대 나를 위하여 죽여 버리라"라고 말했다.
3월, 황룡왕이 사신을 보내 태자와 만나기를 요청하였다. 태자가 가려고 하니 어떤 사람이 만류하며 간하기를 "오늘 이웃 나라에서 이유없이 만나자고 하니, 그 의도를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태자가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죽이려 하지 않는다면, 황룡왕이 나를 어찌하겠는가?"라고 하면서 드디어 떠났다. 황룡왕이 처음에는 그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만나보고는 감히 해치지 못하고, 예절을 갖추어 돌려 보냈다.

○二十八年, 春三月, 王遣人, 謂<解明>曰: "吾遷都, 欲安民以固邦業, 汝不我隨, 而恃剛力, 結怨於隣國, 爲子之道, 其若是乎?" 乃賜劒使自裁. 太子卽欲自殺, 或止之曰: "大王長子已卒, 太子正當爲後. 今使者一至而自殺, 安知其非詐乎?" 太子曰: "嚮, <黃龍王>以强弓遺之, 我恐其輕我國家, 故挽折而報之, 不意見責於父王. 今父王以我爲不孝, 賜劒自裁, 父之命, 其可逃乎?" 乃往<礪津><東原>, 以槍揷地, 走馬觸之而死, 時年, 二十一歲. 以太子禮, 葬於<東原>, 立廟. 號其地爲<槍原{槍京}> .
○論曰: 孝子之事親也, 當不離左右以致孝, 若<文王>之爲世子. <解明>在於別都, 以好勇聞, 其於得罪也, 宜矣. 又聞之, 傳曰: "愛子敎之以義方, 弗{不} 納於邪." 今王, 始未嘗敎之, 及其惡成, 疾之已甚, 殺之而後已. 可謂父不父, 子不子矣. 秋八月, <扶餘>王<帶素>使來讓王曰: "我先王, 與先君<東明王>相好, 而誘我臣逃至此, 欲完聚以成國家. 夫國有大小, 人有長幼, 以小事大者, 禮也, 以幼事長者, 順也. 今王若能以禮順事我, 則天必佑{祐} 之, 國祚永終, 不然則欲保其社稷, 難矣." 於是, 王自謂: 立國日淺, 民孱兵弱, 勢合忍恥屈服, 以圖後 , 乃與群臣謀, 報曰: "寡人僻在海隅, 未聞禮義. 今承大王之敎, 敢不惟命之從." 時, 王子<無恤>, 年尙幼少. 聞王欲報<扶餘>言, 自見其使曰: "我先祖神靈之孫, 賢而多才, 大王妬害, 讒之父王, 辱之以牧馬, 故不安而出. 今大王不念前愆, 但恃兵多, 輕蔑我邦邑, 請使者, 歸報大王: '今有累卵於此, 若大王不毁其卵, 則臣將事之, 不然則否.'" <扶餘王>聞之,  問群下. 有一老 對曰: "累卵者危也, 不毁其卵者安也." 其意曰: 王不知己危, 而欲人之來, 不如易危以安而自理也.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28년 봄 3월, 왕이 사람을 보내 해명에게 말했다. "내가 도읍을 옮긴 것은, 백성들을 안정시켜 국가의 위업을 다지려는 것인데, 네가 나를 따르지 않고 힘이 센 것을 믿고 이웃 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자식된 도리가 이와 같을 수 있는가?" 그리고 태자에게 칼을 주어 자결하게 하였다. 태자가 즉시 자결하려 하니 어떤 사람이 말리면서 말했다. "대왕의 맏아들이 이미 죽었으므로, 태자께서는 정당하게 후계자가 될 것입니다. 지금 왕의 사자가 한 번 와서 말한다 하여 자결한다면, 왕의 지시가 진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태자가 말했다. "전번에 황룡왕이 강한 활을 보냈기에, 나는 그들이 우리 나라를 업신여길까 걱정되어, 일부러 활을 잡아 당겨 꺾음으로써 답한 것인데, 뜻밖에 부왕의 견책을 당하게 되었다. 이제 부왕이 나를 불효하다고 생각하여 칼을 내려 자결케 하니,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겠느냐?" 태자는 여진 동원으로 가서 창을 땅에 꽂아 놓고, 말을 타고 달려 그 창에 찔려 자결하였다. 이 때 나이가 21세였다. 태자의 예식으로 동원에 장사지내고, 그곳에 사당을 세웠다. 이에 따라 그 땅을 창원이라 하였다.
저자의 견해 : 효자가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는, 마땅히 어버이의 곁을 떠나지 않는 것으로 효도를 삼아, 마치 문왕이 세자 시절에 행동하듯 하여야 한다. 해명은 옛 도읍에 살면서 용맹을 좋아한다고 소문이 났으니, 그는 당연히 죄를 범한 것이다. 또한 전해오는 말에 "아들을 사랑하거든 옳은 방향으로 가르치고, 사악한 길로 들어가지 않도록 하라"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으니, 왕이 처음에는 한 번도 가르친 일이 없다가, 죄악이 이루어진 다음에 지나치게 미워하여 죽여 버리고 말았으니, 이야말로 애비는 애비답지 못하고, 자식은 자식답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가을 8월, 부여왕 대소의 사신이 와서 왕을 꾸짖으며 "우리 선왕이 그대의 선왕 동명왕과 서로 의좋게 지냈는데, 이제 우리 신하들을 이곳으로 도망하여 오도록 유인하는 것은, 백성을 모두 모아 나라를 세우려는 것이다. 나라에는 대국과 소국의 구분이 있고, 사람에도 어른과 아이의 구분이 있으니, 소국으로서 대국을 섬기는 것은 예절이며, 아이가 어른을 섬기는 것은 순리이다. 이제 왕이 만약 예절과 순리로써 우리를 섬긴다면, 하늘이 반드시 도와 나라의 운명이 영원히 보존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사직을 보존하려 해도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왕은, 나라를 세운 역사가 짧으며, 백성과 군대는 약하므로, 치욕을 참고 굴복하여, 후일의 성과를 도모하는 것이 형세에 합치된다고 스스로 말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의논하여 부여왕에게 "과인이 바다 한 구석에 외따로 살아왔기에 예의에 대한 것을 듣지 못하였다. 이제 대왕의 교시를 받고 보니,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회답하였다. 이 때, 왕자 무휼은 나이가 아직 어렸다. 그가 왕이 부여에 회답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직접 부여의 사신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선조는 신령의 자손으로서 현명하고 재주가 많았었는데, 대왕이 질투하고 모해하였고, 부왕에게 말이나 기르게 하는 직위를 주도록 참소하여 욕을 보인 까닭에 불안하여 탈출했던 것이다. 이제 대왕이 전날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군사가 많은 것을 믿어 우리 나라를 멸시하고 있으니, 사신은 돌아가서 대왕에게 '이곳에 알을 쌓아 놓았으니, 만약 대왕이 그 알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내가 대왕을 섬길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섬기지 못하겠다.'고 보고하라." 부여왕이 이 말을 듣고 여러 사람에게 그 뜻을 두루 물었다. 한 노파가 "쌓아놓은 알은 위태로운 것이니, 그 알을 무너뜨리지 않는 자는 편안할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노파의 말은 곧, 왕이 자신에게 위기가 왔음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남이 와서 굴복하기를 강요하고 있으니, 이는 스스로 위기를 만들지 않고 차라리 평화를 택하여 자기 나라를 먼저 잘 다스리는 것만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二十九年, 夏六月, <矛川>上有黑蛙與赤蛙群鬪, 黑蛙不勝, 死. 議者曰: "黑, 北方之色, <北扶餘>破滅之徵也." 秋七月, 作離宮於<豆谷>.

29년 여름 6월, 모천에서 검은 개구리와 붉은 개구리가 떼지어 싸우다가, 검은 개구리가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 해설하는 사람이 "검은 것은 북방의 색깔이니, 북부여가 파멸될 징조"라고 말했다.
가을 7월, 두곡에 이궁을 지었다.

○三十一年, <漢><王莽>發我兵, 伐胡. 吾人不欲行, 强迫遣之, 皆亡出塞, 因犯法爲寇. <遼西>大尹<田譚>追擊之, 爲所殺, 州郡歸咎於我. <嚴尤>奏言: "<貊>人犯法, 宜令州郡, 且慰安之. 今猥被以大罪, 恐其遂叛. <扶餘>之屬, 必有和者, <匈奴>未克, <扶餘>·< 貊{穢貊}> 復起, 此大憂也." <王莽>不聽, 詔<尤>擊之. <尤>誘我將<延丕{侯雛}> ,  {斬} 之, 傳首京師.[兩<漢書>及<南北史>皆云: "誘<句麗>侯< {騶 /鄒 }>斬之.] <莽>悅之, 更名吾王爲<下句麗侯>, 布告天下, 令咸知焉. 於是, 寇<漢>邊地, 愈甚.

『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後漢書]. [梁書]. [北史].[북한본].
31년, 한 나라 왕망이 우리 군사를 동원하여 오랑캐를 치고자 하였다. 우리 군사들이 가기를 원하지 않으므로 강제로 협박하여 보내려 하니, 모두 변방으로 도망하여 법을 위반하고 약탈을 하였다. 요서 대윤 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죽었다. 한 나라 주와 군에서는 우리에게 잘못을 돌렸다. 엄우가 왕망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맥(貊) 사람들이 법을 위반하고 있으니, 마땅히 (요동과 현토의) 주군들로 하여금 그들을 위무토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금 함부로 그들에게 큰 죄를 묻게 되면,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된다. 부여의 족속 가운데 반드시 그들을 추종하는 자가 있을 것이니, 우리가 오랑캐를 부수지 못하고 있는 지금 다시 부여, 예맥이 일어난다면 이는 큰 걱정거리이다"라고 하였다. 왕망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엄우에게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를 꾀어내어 목을 베어 한 나라 서울로 보냈다.[양[한서]와 [남북사]에는 모두 "구려후 추(騶)를 꾀어 목을 베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왕망이 기뻐하여 우리 왕을 하구려후(下句麗侯)로 개칭하고, 이를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였다. 이로부터 한 나라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더욱 심해졌다.

○三十二年, 冬十一月, <扶餘>人來侵. 王使子<無恤>, 率師禦之. <無恤>以兵小, 恐不能敵, 設奇計, 親率軍, 伏于山谷以待之. <扶餘>兵直至<鶴盤嶺>下, 伏兵發, 擊其不意, <扶餘>軍大敗, 棄馬登山. <無恤>縱兵盡殺之.

32년 겨울 11월, 부여가 침범해왔다. 왕이 아들 무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이를 방어하게 하였다. 무휼은 병력이 적어 대적할 수 없음을 염려하여, 기묘한 계책을 내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산골짜기에 숨어 기다리고 있었다. 부여 군사가 곧바로 학반령 아래에 이르자, 숨겼던 군사를 출동시켜 불의의 공격을 하니, 부여 군사들이 크게 패하여 마필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무휼이 군사를 풀어 그들을 전부 죽여 버렸다.

○三十三年, 春正月, 立王子<無恤>爲太子, 委以軍國之事. 秋八月, 王命<鳥伊{烏伊}> ·<摩離>, 領兵二萬, 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高句麗縣
>.[縣屬<玄 郡>.]

『북한본』.
33년 봄 정월, 왕자 무휼을 태자를 삼고, 군사와 국정에 관한 일을 맡겼다.
가을 8월, 왕이 오이와 마리에게 명하여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계속 진군하여 한 나라의 고구려현을 습격 탈취토록 하였다.[현은 현토군에 속한다.]

○三十七年, 夏四月, 王子<如津>, 溺水死. 王哀慟, 使人求屍, 不得. 後<沸流>人<祭須>得之, 以聞, 遂以禮葬於<王骨嶺>, 賜<祭須>金十斤·田十頃. 秋七月, 王幸<豆谷>. 冬十月, 薨於<豆谷>離宮. 葬於<豆谷><東原>, 號爲<琉璃明王{瑠璃明王}> .
三國史記卷第十三.

趙炳舜. 『高句麗本紀』.
37년 여름 4월, 왕자 여진이 물에 빠져 죽었다. 왕이 슬퍼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시체를 찾게 하였으나 결국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 후, 비류 사람 제수가 시체를 찾았다고 알려왔으므로, 곧 예식을 갖추어 왕골령에 장사지내고, 제수에게 금 10근과 밭 10경을 주었다.
가을 7월, 왕이 두곡에 행차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두곡 이궁에서 죽었다. 두곡 동원에 장사지내고, 호를 유리명왕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13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