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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원문+한글) 권 제 14


三國史記卷第十四 삼국사기 권 제 14

高句麗本紀第二 <大武神王>·<閔中王>·<慕本王>.

고구려본기 제 2 대무신왕, 민중왕, 모본왕.

   <大武神王 대무신왕>

○<大武神王>立.[或云<大解宋留王{大解朱留王}> .] 諱<武恤>, <&琉璃王{瑠璃明王}> 第三子. 生而聰慧, 壯而雄傑有大略. <&琉璃王{瑠璃明王}> 在位三十三年, 甲戌, 立爲太子, 時年十一歲, 至是卽位. 母<松>氏, <多勿國>王<松讓>女也.

『북한본』.趙炳舜. 『高句麗本紀』.趙炳舜. 『高句麗本紀』.
대무신왕이 왕위에 올랐다.[혹은 대해주류왕이라고도 한다.] 그의 이름은 무휼이며, 유리왕의 세째 아들이다. 그는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장성하여서는 호걸의 풍모를 갖추었고, 지략이 많았다. 유리왕 재위 33년 갑술에 무휼을 태자로 삼았다. 당시의 나이는 11세였는데, 이제 왕위에 올랐다. 어머니는 송씨이니, 다물국왕 송양의 딸이다.

○二年, 春正月, 京都震. 大赦. <百濟>民一千餘戶來投.

2년 봄 정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백제의 백성 1천여 호가 귀순하여 왔다.

○三年, 春三月, 立<東明王>廟. 秋九月, 王田<骨句川>, 得神馬, 名<  >. 冬十月, <扶餘>王<帶素>遣使送赤烏, 一頭二身. 初, <扶餘>人得此烏獻之王, 或曰: "烏者黑也, 今變而爲赤, 又一頭二身, 幷二國之徵也, 王其兼<高句麗>乎?" <帶素>喜送之, 兼示或者之言. 王與群臣議答曰: "黑者, 北方之色, 今變而爲南方之色, 又赤烏瑞物也, 君得而不有之, 以送於我, 兩國存亡, 未可知也." <帶素>聞之, 驚悔.

3년 봄 3월,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
가을 9월, 왕이 골구천에서 사냥하다가 신마를 얻어 거루라고 이름 지었다.
겨울 10월,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통하여 붉은 까마귀를 보내왔다. 그 까마귀의 머리는 하나이고 몸은 둘이었다. 처음에 부여 사람이 이 까마귀를 얻어서 왕에게 바쳤는데, 어떤 사람이 부여왕에게 "까마귀는 검은 법인데, 이제 빛이 변하여 붉게 되었고, 또한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이니, 이는 두 나라가 병합될 징조입니다. 왕께서는 고구려를 합병함이 어떤가요?"라고 말하였다. 대소가 기뻐하며 붉은 까마귀를 고구려에 보내면서, 동시에 이 사람이 한 말도 전하였다. 왕이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고 부여왕에게 대답하기를 "검은 색은 북방의 색깔인데, 이제 변하여 남방의 색이 되었으며, 또한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것인데, 그대가 이것을 얻었으나 가지지 못하고 나에게 보냈으니, 두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구나!"라고 하였다. 대소가 이 말을 듣고 놀라며 후회하였다.

○四年, 冬十二月, 王出師, 伐<扶餘>, 次<沸流水>上, 望見水涯, 若有女人,  鼎游 . 就見之, 只有鼎. 使之炊, 不待火自熱, 因得作食, 飽一軍. 忽有一壯夫曰: "是鼎吾家物也, 我妹失之, 王今得之, 請負以從." 遂賜姓<負鼎>氏. 抵<利勿林{理勿林}> 宿, 夜聞金聲. 向明, 使人尋之, 得金璽兵物等, 曰: "天賜也." 拜受之. 上道有一人, 身長九尺許, 面白而目有光. 拜王曰: "臣是<北溟>人<怪由>. 竊聞大王北伐<扶餘>, 臣請從行, 取<扶餘>王頭." 王悅許之. 又有人曰: "臣<赤谷>人<麻盧>, 請以長矛爲導." 王又許之.

李丙燾. 地理志.
4년 겨울 12월, 왕이 군사를 동원하여 부여를 공격하러 가는 도중에 비류수 옆에 머무르며 물가를 바라보니, 마치 어떤 여인이 솥을 들고 유희를 하는 것 같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여인은 없고 솥만 있었다. 왕이 그 솥에 밥을 짓게 하니, 불을 때기도 전에 솥이 저절로 뜨거워졌고, 이에 따라 밥을 짓게 되어 모든 군사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었다. 이 때 갑자기 건장한 한 사나이가 나타나 말하기를 "이 솥은 우리 집 물건이었는데, 제 누이가 잃었다가 이제 왕께서 얻었으니, 제가 이 솥을 지고 왕을 따라가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은 곧 그에게 부정(負鼎)씨라는 성을 주었다. 왕이 이물림에 도착하여 묵게 되었는데 밤에 쇳소리가 들려왔다. 날이 밝을 무렵에 사람을 시켜 그곳을 찾는 중에 금으로 만든 옥새와 병기 등을 얻었다. 왕이 "이는 하늘이 주시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절을 하고 받았다. 길을 떠나려 할 때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의 키는 9척 가량이었으며, 얼굴이 희고 눈에서 광채가 빛났다. 그는 왕에게 절을 하고 "저는 북명 사람 괴유입니다. 듣건대 대왕께서 북쪽으로 부여를 친다하니 제가 따라 가서 부여왕의 머리를 베어 오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왕이 기뻐하며 이를 허락하였다. 또한 어떤 사람이 "저는 적곡사람 마로입니다. 긴 창을 들고 길을 인도하게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왕이 이를 또한 허락하였다.

○五年, 春二月, 王進軍於<扶餘國>南, 其地多泥塗{ } , 王使擇平地爲營, 解鞍休卒, 無恐懼之態. <扶餘>王擧國出戰. 欲掩其不備, 策馬以前, 陷 不能進退. 王於是揮<怪由>. <怪由>拔劍號吼擊之, 萬軍披靡, 不能支. 直進執<扶餘>王, 斬頭. <扶餘>人, 旣失其王, 氣力 折, 而猶不自屈, 圍數重. 王以糧盡士饑, 憂懼不知所爲. 乃乞靈於天, 忽大霧咫尺不辨人物七日. 王令作草偶人, 執兵立營內外, 爲疑兵. 從間道潛軍夜出. 失<骨句川>神馬, <沸流源>大鼎. 至<利勿林>, 兵飢不興, 得野獸以給食. 王旣至國, 乃會群臣飮至曰: "孤以不德, 輕伐<扶餘>. 雖殺其王, 未滅其國, 而又多失我軍資, 此孤之過也." 遂親吊死問疾, 以存慰百姓. 是以國人感王德義, 皆許殺身於國事矣. 三月, 神馬<  >將<扶餘>馬百匹, 俱至<鶴盤嶺>下<車廻谷>. 夏四月, <扶餘>王<帶素>弟, 至<曷思水>濱, 立國稱王, 是<扶餘>王<金蛙>季子, 史失其名. 初, <帶素>之見殺也, 知國之將亡, 與從者百餘人, 至<鴨 谷>, 見<海頭王>出獵, 遂殺之, 取其百姓, 至此始都, 是爲<曷思王>. 秋七月, <扶餘>王從弟, 謂國人曰: "我先王身亡國滅, 民無所依, 王弟逃竄, 都於<曷思>, 吾亦不肖, 無以興復." 乃與萬餘人來投. 王封爲王, 安置< 那部>. 以其背有絡文, 賜姓<絡>氏. 冬十月, <怪由>卒. 初疾革, 王親臨存問. <怪由>言: "臣<北溟>微賤之人, 屢蒙厚恩. 雖死猶生, 不敢忘報." 王善其言, 又以有大功勞, 葬於<北溟山>陽, 命有司以時祀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5년 봄 2월, 왕이 부여국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그곳에는 진흙 수렁이 많으므로 왕은 평지를 선택하여 병영을 만들고, 말 안장을 풀고 병사들을 쉬게 하여, 두려워 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부여왕이 전국의 군사를 동원하여 출전하였다. 그는 고구려가 대비하지 않는 틈을 노려 기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말을 급히 몰아 진군하다가 진흙 수렁에 빠져서 앞으로 갈수도 뒤로 갈 수도 없게 되었다. 왕이 이 때 괴유를 출동시켰다. 괴유가 칼을 뽑아 들고 고함을 지르며 공격해가니, 부여의 1만여 군졸들이 넘어지고 쓰러져서 버틸 수 없었다. 이 때 괴유가 곧바로 전진하여 부여왕을 붙잡아 목을 베었다. 부여 사람들은 이미 왕을 잃고 기세가 꺾였으나, 그래도 굴복하지 않고 고구려 군사를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군량이 다하고 군사들이 굶주리니 왕은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이 하늘에 영험을 빌자, 갑자기 큰 안개가 7일 동안 끼어 지척에서도 사람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없었다. 왕은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고 허수아비에게 병기를 들게하여 병영 안팎에 세워서 마치 병사로 보이도록 위장하였다. 그리고 사잇길로 밤을 도와 몰래 행군하였다. 이 와중에 골구천에서 얻은 신마와 비류수 상류에서 얻은 큰 솥을 잃어 버렸다. 이물림에 이르러 군사들이 배고파 일어나지 못하므로 들짐승을 잡아 군사들에게 먹였다. 왕이 본국으로 돌아와서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음지(飮至)의 예식을 거행하면서 "내가 부덕하여 경솔하게 부여를 공격하였다. 비록 그 왕을 죽였으나 그 나라를 멸망시키지는 못하였으며, 또한 우리 군사와 물자를 많이 잃었으니, 이는 나의 잘못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곧바로 전사자를 직접 조상하고, 부상당한 자를 문병하여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왕의 덕행과 의리에 감동되어, 나라 일에 생명을 바치기로 모두 다짐하였다.
3월, 신마 거루가 부여의 말 백 필을 가지고 학반령 아래 차회곡에 왔다.
여름 4월, 부여왕 대소의 아우가 갈사수 가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자칭하였다. 이 사람은 부여왕 금와의 막내아들인데, 역사서에는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처음에 대소왕이 살해되자 그는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 자기를 따르는 자 백여 명을 데리고 압록곡에 이르렀다가, 사냥나온 해두왕을 죽이고 그의 백성을 빼앗았는데, 이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도읍을 정하였다. 이 사람이 곧 갈사왕이다.
가을 7월, 부여왕의 종제가 백성에게 "우리 선왕이 별세하고 나라가 멸망하여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고, 왕의 아우는 도망하여 갈사에 도읍을 정하였으며, 나 역시 불초하여 나라를 부흥시킬 수 없다"라고 말하고, 만여 명을 데리고 귀순하여 왔다. 왕이 그를 왕으로 봉하여 연나부에 있게 하였다. 그의 등에 낙(絡) 무늬가 있다 하여 성씨를 낙(絡)으로 정하여 주었다.
겨울 10월, 괴유가 죽었다. 처음 그의 병이 위독했을 때 왕이 직접 가서 문병하였다. 그 때 괴유가 "저는 북명의 미천한 사람으로서, 왕의 두터운 은혜를 여러 번 입었습니다. 비록 죽더라도 살아서와 같이 은혜에 보답할 것을 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왕이 그 말을 훌륭하다고 생각하였고, 또한 그가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북명산 남쪽에 장사지내고, 관리를 시켜 철에 따라 제사지내게 하였다.

○八年, 春二月, 拜<乙豆智>, 爲右輔, 委以軍國之事.

8년 봄 2월, 을두지를 우보로 삼아 군사와 국정에 대한 일을 맡겼다.

○九年, 冬十月, 王親征<蓋馬國>, 殺其王, 慰安百姓, 毋{禁} 虜掠, 但以其地爲郡縣. 十二月, <句茶國>王, 聞<蓋馬>滅, 懼害及己, 擧國來降. 由是拓地浸廣.

趙炳舜. 『三國史節要』.
9년 겨울 10월, 왕이 직접 개마국을 쳐서 그 왕을 죽이고,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왕은 자기 군사들이 백성을 약탈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 지역만 따로 군현으로 만들었다.
12월, 구다국 왕이 개마가 멸망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에게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항복하였다. 이에 따라 고구려의 개척 지역이 점점 넓어졌다.

○十年, 春正月, 拜<乙豆智>, 爲左輔, <松屋句>爲右輔.

10년 봄 정월, 을두지를 좌보로 삼고, 송옥구를 우보로 삼았다.

○十一年, 秋七月, <漢><遼東>太守將兵來伐. 王會群臣, 問戰守之計. 右輔<松屋句>曰: "臣聞恃德者昌, 恃力者亡. 今中國荒儉, 盜賊蜂起, 而兵出無名, 此非君臣定策, 必是邊將規利, 擅侵吾邦. 逆天違人, 師必無功, 憑險出奇, 破之必矣." 左輔<乙豆智>曰: "小敵之强, 大敵之禽也. 臣度大王之兵, 孰與<漢>兵之多, 可以謀伐, 不可力勝." 王曰: "謀伐若何?" 對曰: "今<漢>兵遠鬪, 其鋒不可當也. 大王閉城自固, 待其師老, 出而擊之, 可也." 王然之, 入<尉那巖>城, 固守數旬, <漢>兵圍不解. 王以力盡兵疲, 謂<豆智>曰: "勢不能守, 爲之奈何?" <豆智>曰: "<漢>人謂我巖石之地, 無水泉, 是以長圍, 以待吾人之困. 宜取池中鯉魚, 包以氷{水} 草, 兼旨酒若干, 致 漢軍." 王從之, 貽書曰: "寡人愚昧, 獲罪於上國, 致令將軍帥百萬之軍, 暴露弊境. 無以將厚意, 輒用薄物, 致供於左右." 於是, <漢>將謂城內有水, 不可猝拔. 乃報曰: "我皇帝不以臣駑, 下令出師, 問大王之罪. 及境踰旬, 未得要領, 今聞來旨, 言順且恭, 敢不藉口以報皇帝." 遂引退.

趙炳舜. 『三國史節要』.
11년 가을 7월, 한의 요동 태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해왔다. 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공격과 방어에 대한 계책을 물었다. 우보 송옥구가 말했다. "제가 듣건대 덕을 믿는 자는 창성하고, 힘을 믿는 자는 망한다 하였습니다. 지금 중국에는 흉년이 들어 도적들이 봉기하고 있는데, 이유없이 군사를 일으키니, 이는 조정에서 결정한 사항이 아니고, 필시 변방의 장수가 사욕을 채울 목적으로 우리 나라를 무단 침범한 것입니다. 이는 하늘의 이치에 위배되고, 사람의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이므로, 그들의 군사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니, 우리가 험준한 지형에 의지하였다가 불시에 기습을 한다면, 적을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좌보 을두지가 말했다. "수가 적은 편이 비록 강하다 할지라도, 결국은 수가 많은 편에게 잡히게 됩니다. 제가 대왕의 군사와 한 나라 군사 중에 어느 편이 많은가를 생각하여 보았는데, 계략으로 그들을 공격할 수 있을지언정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왕이 물었다. "계략으로 공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을두지가 대답했다. "지금 한 나라 군사가 멀리 와서 싸우니, 그들의 서슬을 당해 낼 수 없습니다. 대왕은 성문을 닫고 우리의 군사를 튼튼히 하여, 적군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린 후에 나아가 공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이 이 의견을 옳게 여기고 위나암성에 들어가서 수십일 동안 굳게 수비하였으나 한 나라 군사는 포위를 풀지 않았다. 아군의 힘이 다하고 군사가 피로해졌으므로 두지에게 물었다. "더 이상 수비할 수 없는 형세가 되었으니 어떻게 할까?" 두지가 대답하였다. "그들은, 우리가 암석 지대에 처하고 있으므로 물있는 샘이 없다고 생각하여, 오랫동안 포위하여 우리가 곤궁에 처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못의 잉어를 잡아서 수초로 싸고, 또한 약간의 맛 좋은 술을 준비하여 한 나라 군사에게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이 두지의 말에 따라 편지를 보내어 말했다. "내가 우매하여 상국에 죄를 지어, 장군으로 하여금 백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의 황폐한 경내에서 노숙 생활을 하게 하였다. 장군의 후의에 보답할 길이 없어, 이에 보잘 것 없는 물건이나마 장군의 막하에 보낸다." 이 때 한 나라 장수가, 성 안에 물이 있으니 빠른 시간 내에 점령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그들은 곧 회답하여 말했다. "우리 황제가 나의 어리석음을 생각하지 않고, 나에게 출사의 명령을 내려 대왕의 죄과를 묻게 하였다. 이에 따라 고구려 국경에 온지 열흘이 넘도록 행동할 바를 몰랐는데, 이제 보내 온 편지를 보니 말이 순리에 맞고 공손하니, 내가 황제에게 이 말대로 보고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는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十三年, 秋七月, <買溝谷>人<尙須>, 與其弟<尉須>及堂弟<于刀>等來投.

13년 가을 7월, 매구곡 사람 상수가 그의 아우 위수 및 사촌 우도 등을 데리고 귀순하여 왔다.

○十四年, 冬十一月, 有雷. 無雪.

14년 겨울 11월, 우레가 있었다. 눈이 내리지 않았다.

○十五年, 春三月, 黜大臣<仇都>·<逸苟>·<焚求>等三人爲庶人. 此三人爲<沸流>部長, 資貪鄙, 奪人妻妾·牛馬·財貨,  {恣} 其所欲, 有不與者卽鞭之, 人皆忿{懷忿} 怨. 王聞之, 欲殺之, 以<東明>舊臣, 不忍致極法, 黜退而已. 遂使南部使者<鄒 素>, 代爲部長. < 素>旣上任, 別作大室以處, 以<仇都>等罪人, 不令升堂. <仇都>等詣前, 告曰: "吾 小人, 故犯王法, 不勝愧悔. 願公赦過, 以令自新, 則死無恨矣." < 素>引上之, 共坐曰: "人不能無過, 過而能改, 則善莫大焉." 乃與之爲友. <仇都>等感愧, 不復爲惡. 王聞之曰: "< 素>不用威嚴, 能以智懲惡, 可謂能矣." 賜姓曰<大室>氏. 夏四月, 王子<好童>, 遊於<沃沮>. <樂浪王><崔理>出行, 因見之. 問曰: "觀君顔色, 非常人, 豈非<北國><神王>之子乎?" 遂同歸, 以女妻之. 後, <好童>還國潛遣人, 告<崔>氏女曰: "若能入而國武庫, 割破鼓角, 則我以禮迎, 不然則否." 先是, <樂浪>有鼓角, 若有敵兵, 則自鳴, 故令破之. 於是, <崔>女將利刀, 潛入庫中, 割鼓面·角口, 以報<好童>. <好童>勸王襲<樂浪>. <崔理>以鼓角不鳴, 不備, 我兵掩至城下, 然後知鼓角皆破. 遂殺女子, 出降.[或云: 欲滅<樂浪>, 遂請婚, 娶其女, 爲子妻, 後使歸本國, 壞其兵物.] 冬十一月, 王子<好童>自殺. <好童>, 王之次妃<曷思王>孫女所生也. 顔容美麗, 王甚愛之, 故名<好童>. 元妃恐奪嫡爲太子, 乃讒於王曰: "<好童>不以禮待妾, 殆欲亂乎." 王曰: "若以他兒憎疾乎?" 妃知王不信, 恐禍將及, 乃涕泣而告曰: "請大王密候, 若無此事, 妾自伏罪." 於是, 大王不能不疑, 將罪之. 或謂<好童>曰: "子何不自釋乎?" 答曰: "我若釋之, 是顯母之惡, 貽王之憂, 可謂孝乎?" 乃伏劍而死.
○論曰: 今王信讒言, 殺無辜之愛子, 其不仁不足道矣, 而<好童>不得無罪. 何則? 子之見責於其父也, 宜若<舜>之於<  {  }> , 小杖則受, 大杖則走, 期不陷父於不義. <好童>不知出於此, 而死非其所, 可謂執於小謹而昧於大義, 其公子<申生>之譬耶? 十二月, 立王子<解憂>爲太子. 遣使入<漢>朝貢. <光虎帝{光武帝}> 復其王號, 是<立武{建武}> 八年也.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資治通鑑』.趙炳舜. 『資治通鑑』.
15년 봄 3월, 대신 구도·일구·분구 등의 세 사람을 축출하여 서인으로 만들었다. 이 세 사람은 비류의 부장으로 있을 때, 자질이 탐욕스럽고 야비하여, 남의 처첩과 우마와 재물을 함부로 빼앗으며, 자신의 욕망대로 행동했었다. 만약 이를 주지 않는 자가 있으면 곧 매질을 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분개하며 원망하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그들을 처형하고자 하였으나 동명왕의 옛 신하들을 차마 극형에 처할 수 없다 하여 축출한 것이다. 그리고 곧 남부 사자 추발소로 하여금 그들을 대신하여 부장이 되게 하였다. 발소가 부임한 후, 별도로 큰 집을 짓고 살면서 구도 등은 죄인이라 하여 마루에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구도 등이 앞에 와서 말했다. "우리들은 소인이라 왕법을 위반하였으니, 그 부끄럽고 뉘우치는 심정이야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원컨대 공이 우리들의 죄과를 용서하여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해준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발소가 그들을 오르게 하여 같이 앉아서 말했다. "사람이란 잘못이 없을 수 없으니, 잘못을 능히 고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 발소는 그들과 더불어 벗을 삼았다. 구도 등이 수치심을 느끼고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발소는 위엄이 아닌 지혜로써 악한 사람을 바로 잡았으니 유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라 하고, 발소에게 대실씨라는 성을 주었다.
여름 4월, 왕자 호동이 옥저에서 유람하고 있었다. 그 때 낙랑왕 최 리가 그곳을 다니다가 그를 보고 물었다.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로구나. 그대가 어찌 북국신왕의 아들이 아니리오?" 낙랑왕 최 리는 마침내 그를 데리고 돌아가서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그 후, 호동이 본국에 돌아와서 남몰래 아내에게 사자를 보내 말했다. "네가 너의 나라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과 나팔을 부수어 버릴 수 있다면, 내가 예를 갖추어 너를 맞이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못하다면 너를 맞아 들이지 않겠다." 옛날부터 낙랑에는 북과 나팔이 있었는데, 적병이 쳐들어 오면 저절로 소리를 내기 때문에 그녀로 하여금 이를 부수어 버리게 한 것이었다. 이 때 최씨의 딸은 예리한 칼을 들고 남모르게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을 찢고 나팔의 입을 베어 버린 후, 이를 호동에게 알려 주었다. 호동이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하였다. 최 리는 북과 나팔이 울지 않아 방비를 하지 않았고, 우리 군사들이 소리없이 성밑까지 이르게 된 이후에야 북과 나팔이 모두 부수어진 것을 알았다. 그는 마침내 자기 딸을 죽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낙랑을 없애기 위하여 청혼하고, 그의 딸을 데려다가 며느리를 삼은 다음, 그녀를 본국에 돌려 보내 그 병기를 부수게 하였다는 설도 있다.]
겨울 11월, 왕자 호동이 자살하였다. 호동은 왕의 둘째 왕비인 갈사왕 손녀의 소생이었다. 그는 얼굴이 미려하여 왕이 매우 귀여워하였으며, 이에 따라 이름도 호동이라고 하였다. 첫째 왕비는 호동이 종통을 빼앗아 태자가 될 것을 염려하여, 왕에게 참소하였다. "호동은 나를 무례하게 대하며, 간통하려 한다." 왕이 대답히였다. "너는 호동이 다른 사람의 소생이라 하여 미워하느냐?" 첫째 왕비는 왕이 자기를 믿지 않음을 알고, 화가 장차 자기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울면서 말했다. "청컨대 대왕께서 가만히 엿보소서. 만약 이런 일이 없으면, 내가 죄를 받겠습니다." 이렇게 되자 대왕이 호동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 그에게 죄를 주려 하였다. 어떤 사람이 호동에게 말했다. "그대는 왜 스스로 해명하지 않는가?" 호동이 대답하였다. "내가 만일 해명한다면, 이것은 어머니의 죄악을 드러내는 것이며, 왕에게 근심을 더해주는 것이니, 이를 어찌 효라 할 수 있겠는가?" 호동은 곧 칼을 품고 엎드려 자결하였다.
저자의 견해 : 왕은 참소하는 말을 믿고, 죄없는 사랑하는 아들을 죽였으니, 그의 어질지 못함은 말할 것도 없으나, 호동에게도 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런가? 자식이 아버지에게서 책망을 들었을 때는, 마땅히 순이 고수에게 하듯이 조금 때리면 맞고 많이 때리면 피하여, 아버지가 불의에 빠지지 않게 하여야 할 것이다. 호동은 이러한 행동으로 나아갈 줄을 모르고, 죽지 않을 일로 죽었으니, 가히 작은 성실을 행하기 위하여 대의에 어두웠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옛날의 공자 신생에 비유할 만하다.
12월, 왕자 해우를 태자로 삼았다.
한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광무제가 왕호를 회복시켰다. 이 때가 건무 8년이었다.

○二十年, 王襲<樂浪>, 滅之.

20년,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二十四年, 春三月, 京都雨雹. 秋七月, 隕霜殺穀. 八月, 梅花發.

24년 봄 3월, 서울에 우박이 내렸다.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이 죽었다.
8월, 매화가 피었다.

○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遣兵渡海, 伐<樂浪>, 取其地, 爲郡縣, <薩水>已南{北} 屬<漢>. 冬十月, 王薨. 葬於<大獸村原{大獸林原}> , 號爲<大武神王>.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27년 가을 9월, 한 나라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 와서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살수 이북이 한 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겨울 10월, 왕이 별세하였다. 그를 대수촌 언덕에 장사지내고, 호를 대무신왕이라 하였다.

   <閔中王 민중왕>

○<閔中王>, 諱<解色朱{解邑朱}> , <大武神王>之弟也. <大武神王>薨, 大子{太子} 幼少, 不克卽政. 於是, 國人推戴以立之. 冬十一月, 大赦.

李丙燾. [三國遺事]. [通鑑].
趙炳舜. 『三國史節要』.
민중왕의 이름은 해색주이며, 대무신왕의 아우이다. 대무신왕이 죽었을 때, 태자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정사를 담당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백성들이 해색주를 추대하여 왕으로 세웠다.
겨울 11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二年, 春三月, 宴群臣. 夏五月, 國東大水, 民饑, 發倉賑給.

2년 봄 3월, 여러 신하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었다.
여름 5월, 동쪽 지방에 홍수가 나서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三年, 秋七月, 王東狩, 獲白獐. 冬十一月, 星 于南, 二十日而滅. 十二月, 京都無雪.

3년 가을 7월,왕이 동쪽지방으로 사냥을 나가 흰 노루를 잡았다.
겨울 11월, 혜성이 남쪽에 나타났다가 20일 만에 사라졌다.
12월, 서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四年, 夏四月, 王田於<閔中原>. 秋七月, 又田, 見石窟, 顧謂左右曰: "吾死, 必葬於此, 不須更作陵墓." 九月, 東海人<高朱利>獻鯨魚目, 夜有光. 冬十月, <蠶友落部{蠶支落部}> 大家<戴升>等一萬餘家, 詣<樂浪>投<漢>.[『後漢書』云: "大加<戴升>等萬餘口."].

李丙燾. 地理志. [後漢書].
趙炳舜. [三國史節要].
4년 여름 4월, 왕이 민중원에서 사냥을 하였다.
가을 7월, 다시 사냥을 하다가 석굴을 보고 측근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반드시 여기에 장사할 것이며, 별도로 능묘를 만들지 말라!"고 하였다.
9월, 동해 사람 고주리가 고래의 눈을 바쳤는데 밤에도 빛이 났다.
겨울 10월, 잠우락부의 대가 대승 등 1만여 호가 낙랑으로 가서 한 나라에 투항하였다.[[후한서]에는 '대가 대승 등 1만여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五年, 王薨. 王后及群臣, 重違遺命, 乃葬於石窟, 號爲<閔中王>.

5년에 왕이 별세하였다. 왕후와 여러 신하들이 왕의 유언을 어기기 어려워 석굴에 장사지내고, 호를 민중왕이라 하였다.

   <慕本王 모본왕>

○<慕本王>, 諱<解憂>[一云<解愛婁>.], <大武神王>元子. <閔中王>薨, 繼而卽位. 爲人, 暴戾不仁, 不恤國事, 百姓怨之.

모본왕의 이름은 해우[해애루라고도 한다.]이며, 대무신왕의 맏아들이다. 민중왕이 별세하자, 뒤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사람됨이 포악하고 어질지 못하여 나라 일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를 원망하였다.

○元年, 秋八月, 大水, 山崩二十餘所. 冬十月, 立王子<翊>爲王大子{太子} .

趙炳舜. 『三國史節要』.
원년 가을 8월, 홍수가 나서 20여 개 소의 산이 무너졌다.
겨울 10월, 왕자 익을 왕태자로 삼았다.

○二年, 春,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蔡 {祭 }> ,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三月, 暴風拔樹. 夏四月, 殞霜雨雹. 秋八月, 發使賑恤國內饑民.

李丙燾. [後漢書].
2년 봄, 장수를 보내 한의 북평·어양·상곡·태원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요동 태수 채동이 은혜와 신의로써 대접하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3월,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여름 4월, 서리와 우박이 내렸다.
가을 8월, 사신을 보내 국내의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四年, 王日增暴虐, 居常坐人, 臥則枕人. 人或動搖, 殺無赦, 臣有諫者, 彎弓射之.

4년, 왕이 날이 갈수록 포악하여, 앉을 때는 사람을 깔고 앉으며, 누울 때는 사람을 베고 누웠다. 만일 사람이 조금만 움직이면 용서없이 죽였으며, 신하 중에서 간하는 자가 있으면 그에게 활을 쏘았다.

○六年, 冬十一月, <杜魯>弑其君. <杜魯>, <慕本>人, 侍王左右, 慮其見殺, 乃哭. 或曰: "大丈夫何哭爲? 古人曰: '撫我則后, 虐我則 .' 今王行虐以殺人, 百姓之 也, 爾其圖之." <杜魯>藏刀以進王前, 王引而坐. 於是, 拔力{刀} 害之. 遂葬於<慕本原>, 號爲<慕本王>.
三國史記卷第十四.

趙炳舜. 『三國史節要』.
6년 겨울 11월, 두노가 임금을 죽였다. 두노는 모본 사람으로서 왕의 근신이었는데, 자기가 해를 입을까 걱정하여 통곡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기를 "대장부가 왜 우는가? 옛 사람의 말에 '나를 사랑하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라고 하였다. 이제 왕이 포악한 짓을 하여 사람을 죽이니, 이는 백성의 원수이다. 그대는 왕을 처치하라"라고 하였다. 두노가 칼을 품고 왕 앞으로 가니 왕이 그를 앉게 하였다. 이 때 두노가 칼을 빼어 왕을 죽였다. 그를 모본 언덕에 장사지내고, 호를 모본왕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14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