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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원문+한글) 권 제 20


三國史記卷第二十 삼국사기 권 제 20

高句麗本紀第八 <陽王>·<建武王{榮留王}> .

趙炳舜.
고구려본기 제 8 영양왕, 건무왕(영류왕).
 

   26대 <陽王 영양왕> 재위28년
               수문왕,양왕 부자의 대규모공격을 물리침
               대장군 강이식,을지문덕의 활약이 돋보임

○<陽王>[一云<平陽>.], 諱<元>[一云<大元>.], <平原王>長子也. 風神俊爽, 以濟世安民自任. <平原王>在位七年, 立爲太子. 三十二年, 王薨, 太子卽位. <隋><文帝>遣使拜王, 爲上開府儀同三司, 襲爵<遼東郡>公, 賜衣一襲.

영양왕[평양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원[대원이라고도 한다.]이며, 평원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풍채가 준수하고 쾌활하였으며,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였다. 평원왕 재위 7년에 태자가 되었다. 32년에 왕이 별세하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수 나라 문제가 사신을 보내 왕을 상개부의동삼사로 임명하고, 전왕의 요동군공의 관직을 계승케 하고, 옷 한 벌을 주었다.

○二年, 春正月, 遣使入<隋>, 奉表謝恩進奉, 因請封王, 帝許之. 三月, 策封爲<高句麗>王, 仍賜車服. 夏五月, 遣使謝恩.

2년 봄 정월,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사은하고 선물을 바친 다음, 왕으로 봉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문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3월, 왕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수레와 복식을 주었다.
여름 5월, 왕이 사신을 보내 사은하였다.

○三年, 春正月, 遣使入<隋>朝貢.

3년 봄 정월,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八年, 夏五月, 遣使入<隋>朝貢.

8년 여름 5월,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九年, 王率<靺鞨>之衆萬餘, 侵<遼西>, <營州>摠管<韋 >擊退之. <隋><文帝>聞而大怒, 命<漢>王<諒>·<王世績{王世積}>  爲元帥, 將水陸三十萬來伐. 夏六月, 帝下詔黜王官爵. <漢>王<諒>軍出臨< 關>, 値水 ,  轉不繼, 軍中乏食, 復遇疾疫. <周羅 >自<東萊>泛海, 趣<平壤城>, 亦遭風, 舡多漂沒. 秋九月, 還師, 死者十八九. 王亦恐懼, 遣使謝罪, 上表稱<遼東>糞土臣某. 帝於是罷兵, 待之如初. <百濟>王<昌>遣使奉表, 請爲軍導. 帝下詔: 諭以<高句麗>服罪, 朕已赦之, 不可致伐. 厚其使而遣之. 王知其事, 侵掠<百濟>之境.

李丙燾. [隋書]. [資治通鑑].
9년, 왕이 말갈 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침공하였으나, 영주 총관 위 충이 우리 군사를 물리쳤다. 수 나라 문제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한왕 양과 왕 세적 등을 모두 원수로 임명하여, 수륙군 30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여름 6월, 문제가 조서를 내려 왕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한왕 양의 군대가 유관에 도착하였을 때, 장마로 인하여 군량미의 수송이 계속되지 못했다. 이에 따라 군중에 식량이 떨어지고 또한 전염병이 돌았다. 주 나후는 동래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성으로 오다가 풍파를 만나 선박이 거의 모두 유실되거나 침몰되었다. 가을 9월, 이들이 돌아갔으나, 그들 중의 대부분이 죽었다. 왕은 이를 두려워 하여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표문을 올렸다. 표문에서 자신을 "요동의 분토(糞土)에 사는 신하 아무개"라고 자칭하였다. 문제가 그 때서야 군대를 철수하고 처음과 같이 대우하였다. 백제왕 창이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리고, 고구려로 가는 수 나라 군사의 향도가 되기를 자청하였다. 문제가 백제왕에게 조서를 내려 "고구려가 죄를 자복하여 내가 이미 용서하였으므로 그들을 칠 수가 없다"라고 말하고, 그 사신을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왕이 이 사실을 알고 백제의 국경을 침공하였다.

○十一年, 春正月, 遣使入<隋>朝貢. 詔: 太學博士<李文眞>, 約古史爲『新集』五卷. 國初始用文字時, 有人記事一百卷, 名曰『留記』, 至是刪修.

11년 봄 정월,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왕이 태학 박사 이 문진으로 하여금 옛 사기를 요약하여 [신집(新集)] 다섯 권을 만들도록 명령하였다. 건국 초기에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했을 때, 어떤 사람이 사적을 기록한 책 1백권을 쓰고, 이것를 [유기]라 하였는데, 이 때에 와서 이를 정리하고 수정하였다.

○十四年, 王遣將軍<高勝>, 攻<新羅><北漢山城>, <羅>王率兵, 過<漢水>. 城中鼓 相應, <勝>以彼衆我寡, 恐不克而退.

14년, 왕이 장군 고 승을 보내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이를 구원하기 위하여 신라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왔다. 그 때 북한산성의 신라군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신라군의 함성과 호응하였다. 고 승이 상대의 군사는 많고 우리 군사는 적어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물러났다.

○十八年, 初, <煬帝>之幸<啓民>帳也, 我使者在<啓民>所. <啓民>不敢隱, 與之見帝. 黃門侍郞<裴矩>說帝曰: "<高句麗>本<箕子>所封之地, <漢>·<晋>皆爲郡縣. 今乃不臣, 別爲異城, 先帝欲征之久矣. 但<楊諒>不肖, 師出無功. 當陛下之時, 安可不取, 使冠帶之境, 遂爲蠻貊之鄕乎? 今其使者, 親見<啓民>, 擧國從化, 可因其恐懼, 脅使入朝." 帝從之,  <牛弘>宣旨曰: "朕以<啓民>誠心奉國, 故親至其帳, 明年當往< 郡>. 爾還日語爾王, 宜早來朝, 勿自疑懼, 存育之禮, 當如<啓民>, 苟或不朝, 將帥<啓民>, 往巡彼土." 王懼: 藩禮頗闕, 帝將討之. <啓民>, <突厥>可汗也. 夏五月, 遣師攻<百濟><松山城>, 不下, 移襲<石頭城>, 虜男女三千而還.

18년, 초기 수 나라 양제가 계민의 막부에 행차하였을 때, 우리 사신이 마침 계민에게 가 있었다. 계민이 우리 사신을 감히 숨길 수 없어, 우리 사신과 함께 양제를 배알하였다. 이 때 황문 시랑 배 구가 양제에게 말했다.
"고구려는 원래 기자에게 봉하였던 땅이며, 한 나라와 진 나라가 모두 군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하의 나라로 행동하지 않고, 별도의 지역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선제께서는 오랫 동안 그들을 정벌하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양 량에게 군사를 주어 출동시켰으나, 그가 불초하여 공을 세우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는 폐하의 시대이니, 어찌 그들을 정벌하지 않고, 예절의 땅이 오랑캐의 소굴로 변하도록 방치할 것입니까? 오늘 고구려 사신은, 계민이 나라를 바쳐 왕화에 복종하는 것을 직접 보았으니, 그가 우리를 두려워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고구려가 우리에게 조공하도록 위협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양제가 이에 따라 고구려 사신에게 자기의 뜻을 전하도록 우 홍에게 명령하였다.
"계민은 성심으로 중국을 받들었기 때문에 내가 직접 계민의 막부에 온 것이며, 명년에는 응당 탁군으로 갈 것이다. 너는 돌아가는 날로 너의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라. 마땅히 빠른 시간 내에 입조하되, 스스로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이리하면 내가 너의 왕을 보호하기를 계민과 같이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입조하지 않는다면, 계민을 거느리고 너의 땅을 토벌하리라."
왕이 이 말을 듣고, 번방으로서의 예절을 하지 않았으므로, 양제가 장차 토벌하러 올 것을 걱정하였다. 계민은 돌궐의 가한, 즉 추장이었다.
여름 5월, 왕이 군사를 보내 백제의 송산성을 공격하다가 항복받지 못하고, 군사를 석두성으로 옮겨 습격하여, 남녀 3천 명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十九年, 春二月, 命將襲<新羅>北境, 虜獲八千人. 夏四月, 拔<新羅><牛鳴山城>.

19년 봄 2월, 장수에게 신라의 북쪽 국경을 습격하도록 명령하여, 8천 명을 포로로 잡아왔다.
여름 4월, 신라의 우명산성을 빼앗았다.

○二十二年, 春二月, <煬帝>下詔, 討<高句麗>. 夏四月, 車蓋至< 郡>之<臨朔宮>, 四方兵皆集< 郡>.

22년 봄 2월, 수 나라 양제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다.
여름 4월, 양제의 행차가 탁군의 임삭궁에 도착하니, 사방의 군사들이 모두 탁군으로 모였다.

○二十三年, 春正月王午{壬午} , 帝下詔曰: "<高句麗>小醜, 迷昏不恭, 崇聚<勃{渤}> ·<碣>之間,  食<遼>·<濊>之境. 雖復<漢>·<魏>誅戮, 巢穴暫傾, 亂離多阻, 種落還集. 萃川藪於往代, 播寔繁以訖{ } 今.  彼華壤,  爲夷類, 歷年永久, 惡稔旣盈. 天道禍淫, 亡徵已兆. 亂常敗德, 非可勝圖, 掩慝懷姦, 唯曰{日} 不足. 移告之嚴, 未嘗面受; 朝覲之禮, 莫肯躬親. 誘納亡叛, 不知紀極; 充斥邊垂,  勞烽候. 關柝以之不靜, 生人爲之廢業. 在昔薄伐, 已漏天網, 旣緩前禽之戮, 未卽後服之誅, 曾不懷恩,  爲長惡, 乃兼<契丹>之黨, 處劉海戍, 習<靺鞨>之服, 侵 <遼西>. 又<靑丘>之表, 咸修職貢, 碧海之濱, 同 正朔, 遂復 攘琛責{ } ,  絶往來. 虐及弗辜, 誠而遇禍.  車奉使, 爰 海東, 旌節所次, 途經藩境, 而擁塞道路, 拒絶王人, 無事君之心, 豈爲臣之禮? 此而可忍, 孰不可容! 且法令苛酷, 賦斂煩重, 强臣豪族, 咸執國鈞, 朋黨比周, 以之成俗. 賄貨如市, 寃枉莫申. 重以仍歲災凶, 比屋饑饉, 兵戈不息,  役無期, 力竭轉輸, 身塡溝壑. 百姓愁苦, 爰誰適從? 境內哀惶, 不勝其弊. 廻首面內, 各懷性命之圖, 黃髮稚齒, 咸興酷毒之歎. 省俗觀風, 爰 幽朔, 弔人問罪, 無俟再駕. 於是, 親摠六師, 用申九伐, 拯厥 危,  {協} 從天意, 殄玆逋穢, 剋嗣先謨. 今宜授律啓行, 分麾 路, 掩<渤海>而雷震, 歷<扶餘>以電掃. 比干{戈} 按甲誓旅而後行, 三令{先} 五申必勝而後戰. 左十二軍, 出<鏤方>·<長岑>·<溟海>·<蓋馬>·<建安>·<南蘇>·<遼東>·<玄 >·<扶餘>·<朝鮮>·<沃沮>·<樂浪>等道; 右十二軍, 出< 蟬>·<含資>·<渾彌>·<臨屯>·<候城>·<提奚>·<踏頓>·<肅愼>·<碣石>·<東 >·< 方{帶方}> ·<襄平>等道. 絡驛{繹} 引途, 摠集<平壤>." 凡一百十三萬三千八百人, 號二百萬. 其 輸者倍之. 宜杜{社} 於南<桑乾水>上, 類上帝於<臨朔宮>南, 祭馬祖於< 城>北. 帝親授節度, 每軍上將·亞將各一人, 騎兵四十隊. 隊百人, 十隊爲團. 步卒八十隊, 分爲四團, 團各有偏將一人, 其鎧胄·纓拂·旗 , 每團異色. 日遣一軍, 相去四十里, 連營漸進, 終四十日發, 乃盡. 首尾相繼, 鼓角相聞, 旌旗亘九百六十里. 御營內, 合十二衛·三臺·五省·九寺, 分隸內外·前後·左右六軍, 次後發, 又亘八十里. 近古出師之盛, 未之有也. 二月, 帝御師進至<遼水>, 衆軍摠會, 臨水爲大陣. 我兵阻水拒守, <隋>兵不得濟. 帝命工部尙書<宇文愷>, 造浮橋三道於<遼水>西岸, 旣成, 引橋趣東岸, 短不及岸丈餘. 我兵大至, <隋>兵驍勇者, 爭赴水接戰, 我兵乘高擊之, <隋>兵不得登岸, 死者甚衆. <麥鐵杖>躍登岸, 與<錢士雄>·<孟叉{孟(+金)叉}> 等, 皆戰死, 乃斂兵引橋, 復就西岸. 更命少府監<何稠>接橋, 二日而成. 諸軍相次繼進, 大戰于東岸. 我兵大敗, 死者萬計. 諸軍乘勝, 進圍<遼東城>, 則<漢>之<襄平城>也. 車駕到{度} <遼>, 下詔赦天下, 命刑部尙書<衛文昇>等, 撫<遼>左之民, 給復十年, 建置郡縣, 以相統攝. 夏五月, 初, <(+隋)> 諸將之東下也, 帝戒之曰: "凡軍士進止, 皆須奏聞待報, 無得專擅." <遼東>數出戰不利, 乃 城固守. 帝命諸軍攻之, 又 諸將, <高句麗>若降, 則宜撫納, 不得縱兵. <遼東城>將陷, 城中人輒言請降, 諸將奉旨, 不敢赴期{機} , 先令馳奏. 比報至, 城中守禦亦備, 隨出拒戰. 如此再三, 帝終不悟, 旣而城久不下. 六月己未, 帝幸<遼東城>南, 觀其城池形勢, 因召諸將, 詰責之曰: "公等自以官高, 又恃家世, 欲以暗懦待我邪? 在都之日, 公等皆不願我來, 恐見病敗耳. 我今來此, 正欲觀公等所爲, 斬公輩爾, 公今畏死, 莫肯盡力, 謂我不能殺公邪?" 諸將咸戰懼失色. 帝因留止城西數里, 御<六合城>, 我諸城堅守不下. 左翊衛(-大) 將軍<來護兒>, 帥<江>·<淮>水軍,   數百里, 浮海先進入自<浿水>, 去<平壤>六十里. 與我軍相遇, 進擊大破之. <護兒>欲乘勝趣其城, 副摠管<周法尙>止之, 請俟諸軍至俱進. <護兒>不聽, 簡精甲數萬, 直造城下. 我將伏兵於羅郭內空寺中, 出兵與<護兒>戰, 而僞敗. <護兒>逐之入城, 縱兵 掠, 無復部伍. 伏兵發, <護兒>大敗, 僅而獲免,
 士卒還者, 不過數千人. 我軍追至舡所, <周法尙>整陣待之, 我軍乃退. <護兒>引兵還屯海浦, 不敢復留應接諸軍. 左翊衛大將軍<宇文述>, 出<扶餘>道; 右翊衛大將軍<于仲文>, 出<樂浪>道; 左驍衛大將軍<荊元恒>, 出<遼東>道; 右翊衛大將軍<薛世雄>, 出<沃沮>道; 右屯衛將軍<辛世雄>, 出<玄 >道; 右禦衛將軍<張瑾>, 出<襄平>道; 右武侯將軍<趙孝才>, 出<碣石>道; < 郡>太守檢校左武衛將軍<崔弘昇>, 出<遂城>道; 檢校右禦衛虎賁郞將<衛文昇>, 出<增地>道, 皆會於<鴨 {鴨綠}水> 西. <述>等兵, 自<瀘河>·<懷遠>二鎭, 人馬皆給百日糧, 又給排甲槍 幷衣資戎具火幕, 人別三石已上, 重莫能勝致. 下令軍中: "遺棄米粟者斬!" 士卒皆於幕下, 掘坑埋之,  行及中路, 糧已將盡. 王遣大臣<乙支文德>, 詣其營詐降, 實欲觀虛實. <子仲文{于仲文}> 先奉密旨: "若遇王及<文德>來者, 必擒之." <仲文>將執之, 尙書右丞<劉士龍>, 爲慰撫使, 固止之. <仲文>遂聽, <文德>還, 旣而悔之, 遣人 <文德>曰: "更欲有言, 可復來." <文德>不顧, 濟<鴨 {鴨綠}水> 而去. <仲文>與<述>等, 旣失<文德>, 內不自安. <述>以糧盡欲還. <仲文>議以精銳追<文德>, 可以有功, <述>固止之. <仲文>怒曰: "將軍仗十萬之衆, 不能破小賊, 何顔以見帝? 且<仲文>此行, 固知無功. 何則? 古之良將, 能成功者, 軍中之事, 決在一人. 今人各有心, 何以勝敵?" 時, 帝以<仲文>有計劃, 令諸軍諮稟節度, 故有此言. 由是, <述>等不得已而從之, 與諸將, 渡水追<文德>. <文德>見<述>軍士有饑色, 故欲疲之, 每戰輒走. <述>一日之中, 七戰皆捷, 旣恃驟勝, 又逼群議, 於是, 遂進東濟<薩水>, 去<平壤城>三十里, 因山爲營. <文德>復遣使詐降, 請於<述>曰: "若旋師者, 當奉王, 朝行在所." <述>見士卒疲弊, 不可復戰, 又<平壤城>險固, 度難猝拔, 遂因其詐而還. <述>等爲方陣而行, 我軍四面 擊, <述>等且戰且行. 秋七月, 至<薩水>, 軍半濟, 我軍自後擊其後軍, 右屯衛將軍<辛世雄>戰死. 於是, 諸軍俱潰, 不可禁止. 將士奔還, 一日一夜, 至<鴨 水{鴨綠水}> , 行四百五十里. 將軍<天水><王仁恭>爲殿, 擊我軍却之. <來護兒>聞<述>等敗, 亦引還. 唯<衛文昇>一軍獨全. 初, 九軍到{度} <遼>, 凡三十萬五千, 及還至<遼東城>, 唯二千七百人, 資儲器械巨萬計, 失亡蕩盡. 帝大怒, 鎖擊{繫} <述>等, 癸卯引還. 初, <百濟>王<璋>遣使, 請討<高句麗>. 帝使之 我動靜, <璋>內與我潛通. <隋>軍將出, <璋>使其臣<國知牟{國智牟}> , 入<唐{隋}> 請師期. 帝大悅, 厚加賞賜, 遣尙書起部郞<席律>, 詣<百濟>, 告以期會. 及<隋>軍渡<遼>, <百濟>亦嚴兵境上, 聲言助<隋>, 實持兩端. 是行也, 唯於<遼水>西, 拔我<武 邏>, 置<遼東郡>及<通定鎭>而已.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북한본].『북한본』.李丙燾. [隋書].李丙燾. [隋書].『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隋書]. [資治通鑑].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隋書]. [資治通鑑].李丙燾. [資治通鑑].『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북한본』.李丙燾. [隋書]. [資治通鑑].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濟紀. [資治通鑑].趙炳舜. 『三國史節要』.
23년 봄 정월 임오일에 양제가 조서를 내려 말했다.
"고구려의 미물들이 어리석고 불손하게도 발해와 갈석 사이에 모여 요와 예의 땅을 잠식하여 왔다. 비록 한 나라와 위 나라의 거듭된 토벌로 그 소굴이 잠시 허물어졌으나, 그로부터 세월이 오래 지나니, 그 족속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지난 세대에는 내와 늪의 물고기나 새처럼 조금씩 모였던 것이 이제는 퍼지고 번식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요동·현토·낙랑 등의 아름다운 강토를 돌아보니 이제 모두 오랑캐의 땅이 되었고, 세월이 오래되니 죄악이 이미 가득하였다. 천도는 사악한 자에게 화를 내리나니, 그들이 패망할 징조가 이미 나타났다. 그들이 도덕을 손상시키는 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드러나지 않은 흉악한 행동과 속에 품은 간사한 생각이 넘치고 있다. 조칙으로 내리는 엄명을 (왕이) 한 번도 직접 받는 일이 없으며, 입조하는 의식에도 (왕이) 직접 오기를 꺼려 하였다. 중국의 반역자들을 수없이 유혹하고, 변방에 척후를 놓아 우리의 봉후들을 자주 괴롭혔다. 이로 말미암아 치안은 안정되지 못하였고, 백성들은 생업을 버리게 되었다. 지난날 문제의 정벌 시에 그들은 천망에서 빠져 나갔다. 이전에 사로잡았을 때에는 죽이지 않은 채 놓아 주었고, 뒷날 항복하였을 때도 처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죄를 저질러 거란의 무리들과 합세하여 바다의 우리 수비병들을 살해하였으며, 말갈의 행동을 본받아 요서를 침략하였다. 또한 온 동방의 나라가 모두 조공 술직하며, 해변지역의 모든 나라가 하나같이 신년이 되면 축하의 사절을 중국에 보내거늘, 고구려는 이 때 조공하는 물품을 탈취하고, 다른 나라의 사절이 내왕하는 길을 막고 있다. 그들은 죄없는 자를 학대하며 성실한 자를 해치고 있다. 천자의 사신이 탄 수레가 해동에 갈 때, 칙사의 행차는 속국의 국경을 통과하게 되는데, 고구려는 도로를 차단하고 우리의 사신을 거절하니, 이는 임금을 섬길 마음이 없는 것이다. 이를 어찌 신하의 예절이라 하겠는가? 이런 행동을 용서한다면, 어떤 행동인들 용서하지 못하랴! 또한 고구려는 법령이 가혹하고 부세가 과중하며, 권력있는 신하들과 세도있는 벌족들이 나라의 권력을 잡고, 당파끼리 결탁하는 것이 습속으로 되어 있다. 이들이 뇌물로 주고 받는 재화가 시장을 이루니, 백성들은 억울한 사정을 호소할 곳이 없다. 해마다 재변과 흉년이 거듭 들어 집집마다 굶주리며, 전쟁은 그치지 않고 부역은 기한없이 계속되어, 전쟁 물자를 나르는 일에 힘을 다 쓰니, 지친 몸이 계곡에 쓰러져 간다. 이러한 백성들의 근심과 고통을 누가 제거해줄 것인가? 고구려의 전 지역이 이와 같이 슬픔과 공포에 잠겨 있으니, 그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머리를 돌려 백성들의 마음을 살펴보면, 그들은 각각 생명이나 보존하기를 도모하며, 늙은이와 어린이들까지도 모두 정치의 혹독함을 한탄하고 있다. 나는 지방의 풍속을 살피기 위하여 북방에 왔으니, 백성들을 위로하고 죄 있는 자에게 죄를 물어, 두 번 다시 오지 않아도 되도록 할 것이다. 이에 나는 육사(六師)를 거느리고, 구벌(九伐)을 밝혀서 위급한 자를 구해주며, 하늘에 순종하여 이 역적을 무찔러 선조의 뜻을 이어갈 것이다. 이제 마땅히 군율에 따라 행군을 개시하되, 대오를 나누어 목적지로 향할지니, 발해를 뒤덮어 우레같이 진동케 하고, 부여를 짓밟아 번개처럼 휩쓸 것이다. 병기와 갑마를 정돈하고 부대를 경계한 후에 행군할 것이며, 재삼재사 훈시하여 필승을 꾀한 후에 전투를 시작할 것이다. 좌 12군은 누방·장잠·명해·개마·건안·남소·요동·현토·부여·조선·옥저·낙랑 방면으로 진군할 것이오, 우 12군은 점선·함자·혼미·임둔·후성·제해·답돈·숙신·갈석·동이·대방·양평 방면으로 진군하되, 진군로를 서로 연락하여 전부 평양으로 집합하게 하라."
군사의 총수는 1백13만 3천8백 명이였는데, 외형적으로는 2백만 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군량 수송을 맡은 자의 수는 배가 되었다. 수 나라에서는 남쪽 상건수에서 토지 신령께 제사지내고, 임삭궁 남쪽에서 상제께 제사지내고, 계성 북쪽에서 마조에게 제사지냈다. 양제는 직접 지휘관을 임명하여, 각 군에 상장·아장 각 1명과 기병 40대를 두었다. 1대는 1백 명이며, 10대가 1단이다. 보병은 80대였는데, 4단으로 나누어, 단마다 각각 편장 1명을 두었으며, 단의 갑옷과 투구의 끈과 깃발의 빛깔을 다르게 하였다. 매일 1군씩 파송하되, 상호 거리가 40리씩 되게 하였다. 각 군영이 연속적으로 출발하였다. 40일 만에 출발이 모두 끝났다. 한 대열의 뒤와 다음 대열의 앞이 서로 연결되고, 북과 나팔 소리가 연이어 들렸으며, 깃발은 9백 60리에 뻗쳤다. 황제의 진영에는 12위·3대·5성·9시가 있는데, 내외·전후·좌우의 6군을 나누어 배속시켜 뒤따라 출발하였다. 이 대열이 또한 80리에 뻗쳤다. 근고 이래 군사의 출동이 이와 같이 성대한 적이 없었다.
2월, 양제가 군사를 이끌고 요수에 도착하였다. 모든 군사가 모여 강 앞에 큰 진을 쳤다. 우리 군사들은 물을 사이에 두고 방어하였기 때문에 수 나라 군사가 건너오지 못하였다. 양제가 공부 상서 우문 개에게 명하여, 요수의 서쪽 언덕에서 세 개의 부교를 만들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완성된 후, 부교를 끌어 동쪽 언덕으로 잇고자 하였다. 그러나 부교가 1장 정도 짧아서 언덕까지 닿지 못하였다. 이 때 우리 군사가 크게 공격하였다. 수 나라 군사들 가운데 날쌔고 용맹한 자들이 물로 뛰어들어 접전을 하였으나, 우리 군사들은 높은 곳에서 공격하였으므로, 수 나라 군사들은 언덕에 오르지 못하였다. 수 나라 군사 중에 전사자가 매우 많았다. 맥 철장이 언덕으로 뛰어 올랐다가, 전 사웅·맹 차 등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기 때문에 수나라 군사는 곧 부교를 걷어 다시 서쪽 언덕으로 돌아갔다. 양제가 다시 소부감 하 조에게 명하여 부교를 길게 늘이도록 하였다. 부교는 이틀 만에 완성되었다. 모든 부대가 차례로 건너와 동쪽 언덕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다. 우리 군사들이 크게 패하여 1만 명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수 나라의 여러 부대는 승세를 타고 진격하여 요동성을 포위하였다. 요동성은 곧 한 나라 때의 양평성이다. 양제가 요에 이르러 조서를 내려 전국의 죄수를 사면하고, 형부 상서 위 문승 등을 시켜 요수의 왼쪽 지방 백성들을 위무하였으며, 그들에게 10년 간의 부역을 면제시키고, 그곳에 군현을 설치하여 통치하게 하였다.
여름 5월, 수 나라 장수들이 동쪽으로 오는 초기에 양제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주의를 주었다. "모든 군사들의 진퇴를 반드시 나에게 보고하고, 나의 지시를 기다릴 것이며,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 때 요동의 우리 군사는 자주 싸우는 것이 해롭다 하여, 성을 굳게 수비하고 있었다. 양제는 여러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요동성을 치게 하고, 또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고구려가 만일 항복하면, 그들을 무마하여 받아들일 것이며, 군사들에게 방종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요동성이 함락될 지경이 되면, 성 안 사람들은 번번이 항복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 나라 장수들은 양제의 지시로 말미암아 적시에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먼저 양제에게 보고를 띄웠다. 그러나 회보가 올 때마다 성의 방비가 갖추어져서 수시로 나와 항거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두세 번 계속되었으나, 양제는 끝내 알아채지를 못하고, 성은 오랫동안 항복하지 않았다.
6월 기미일에 양제가 요동성 남쪽으로 가서 성곽과 연못의 형세를 관찰하고, 곧 여러 장수들을 불러 꾸짖으며 말했다.
"그대들은 벼슬이 높다거나 또한 가문과 세도를 믿고 나를 어리석은 자로 대하려 하는가? 전일 내가 서울에 있을 때 그대들이 내가 이곳에 오는 것을 원하지 않은 것은, 그대들의 단점이 들어날까 두려워 한 것이로구나. 이제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바로 그대들의 행동을 보아 그대들의 목을 베려는 것인데, 그대들은 지금 죽는 것이 무서워 힘을 다하지 않고 있으니, 내가 그대들을 죽일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여러 장수들이 모두 실색을 하고 무서워 떨었다. 양제는 성의 서쪽으로 몇 리 떨어진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육합성을 엿보고 있었으나 우리의 모든 성은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좌익위 대장군 내호아가 강·회의 수군을 실은 수백 리에 달하는 선단을 이끌고 바다를 통하여 패수로부터 들어오니, 평양과의 거리가 60리였다. 우리 군사와 조우하자 그들이 진격하여 우리가 대패하였다. 내호아는 승세를 타고 성으로 진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부총관 주 법상이 만류하며, 여러 군사들이 오기를 기다려 함께 진격하자고 하였다. 내호아가 듣지 않고 정예병 수만 명을 선발하여 곧장 성밑까지 왔다. 이 때 우리 장수는 외성에 있는 빈 절간에 군사를 숨겨 놓고, 군사를 출동시켜 내호아와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하는 체 하였다. 내호아가 성 안으로 쫓아 들어와 군사들을 풀어 백성들을 사로잡고 재물을 약탈하며, 미쳐 대오를 정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우리의 숨었던 군사들이 출동하니 내호아가 대패하였다. 내호아는 간신히 포로 신세를 면하였고, 살아서 돌아간 군사는 수천명에 불과하였다. 우리 군사는 선창까지 추격하였다. 그러나 수 나라 장수 주 법상이 진을 정비하여 대비하고 있으므로 우리 군사는 곧 물러 나왔다. 내호아는 군사들을 데리고 바닷가로 돌아가서 주둔하며, 다시는 감히 다른 군사들과 호응하고 접촉할 수 없게 되었다.
좌익위 대장군 우문 술은 부여로 출동하고, 우익위 대장군 우 중문은 낙랑으로 출동하고, 좌효위 대장군 형 원항은 요동으로 출동하고, 우익위 대장군 설 세웅은 옥저로 출동하고, 우둔위 장군 신 세웅은 현토로 출동하고, 우어위 장군 장 근은 양평으로 출동하고, 우무후 장군 조 효재는 갈석으로 출동하고, 탁군 태수 검교 좌무위 장군 최 홍승은 수성으로 출동하고, 검교 우어위 호분 낭장 위 문승은 증지로 출동하여 모두 압록강 서쪽에 집결하였다. 우문 술 등의 군사가 노하·회원 두 진 지역에서 군사와 말에게 각각 백일분의 식량을 주고, 또한 갑옷·짧은 창·긴 창·옷감·전투 기재·장막 등을 주었다. 이에 따라 군사마다 3섬 이상의 짐을 지게 되어 그 무게를 당해낼 수 없었다. 우문 술은 군사들에게 명을 내려 "도중에서 곡식을 버리는 자는 참수한다"고 하였다. 군졸들은 모두 장막 밑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이에 따라 겨우 중간 쯤 행군하였을 때, 군량은 이미 거의 떨어졌다. 이 때 왕은 대신 을지 문덕을 수 나라 군영으로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게 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의 실력 유무를 알아 보고자 한 것이었다. 이보다 앞서 우 중문은 양제로부터 만일 고려왕이나 을지 문덕이 오는 기회가 있거든 꼭 사로잡으라는 비밀 지시를 받고 있었으므로 우 중문은 을지 문덕을 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상서 우승 유 사룡이 위무사로 와있다가 강력히 이를 말렸다. 우 중문은 마침내 이 말을 듣고 을지 문덕을 돌아가게 하였다. 우 중문은 곧 이를 후회하여 사람을 보내 을지 문덕에게 거짓으로 말했다. "다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또 와도 좋다." 그러나 을지 문덕은 뒤돌아보지 않고 압록강을 건넜다. 우 중문과 우문 술 등은 을지 문덕을 놓치고 내심 불안하였다. 우문 술은 군량이 떨어졌다 하여 돌아가려 하였다. 우 중문이 우문 술에게, 정예 부대로 문덕을 추격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니 우문 술이 강하게 말렸다. 중문이 성을 내어 말하기를 "장군이 십만 대병을 거느리고도 적은 적군을 깨뜨리지 못하고, 무슨 낯으로 황제를 보려는가? 그리고 나는 이번의 정벌에 공이 없을 줄 미리부터 짐작하였다. 왜냐 하면 옛날 명장들이 공을 이룬 것은, 군사에 관한 일이 한 사람에 의하여 결정되었기 때문인데, 지금 우리는 사람마다 각각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어떻게 적을 이길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당시 양제는 중문이 계교와 전략이 훌륭하다하여, 모든 부대로 하여금 지휘 사항을 자문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였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우문 술 등이 마지 못하여 우 중문의 말대로 여러 장수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을지 문덕을 추격하였다. 을지 문덕은 우문 술의 군사가 굶주린 기색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피로하게 하기 위하여 싸울 때마다 도주하였다. 우문 술은 하루에 일곱 번 싸워서 일곱 번을 모두 이겼다. 그들은 여러번 이겼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을 가지게 되었고, 또한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밀려서, 곧 동쪽으로 진군하여 살수를 건넜다. 그들은 평양성 30리 떨어진 곳에 이르러 산을 의지하고 진을 쳤다. 을지 문덕이 다시 사람을 보내 거짓 항복하는 체하고 우문 술에게 청하기를 "만약 군사를 거두어 돌아 간다면, 왕을 모시고 황제가 계신 곳으로 가서 예방하겠다"고 하였다. 우문 술은 자기 군사들이 피로하여 다시 싸울 수 없음을 알고 있었고, 또한 평양성이 험하고 견고하여 조기에 함락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우리의 거짓말을 곧이 듣고 돌아갔다. 우문 술은 방진을 치면서 행군하였다. 그 때, 우리 군사가 사면으로 공격하였다. 우문 술 등은 한편으로 싸우며 한편으로 행군하였다.
가을 7월, 우문 술의 군사가 살수에 이르러 강을 절반쯤 건널 때, 우리 군사가 후방에서 그들의 후속 부대를 공격하였다. 적장 우둔위 장군 신 세웅이 여기에서 전사하였다. 그러자 여러 부대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걷잡을 수가 없었다. 장수와 군졸이 뛰어 도주하는데, 하루낮 하룻밤 사이에 압록강까지 4백5십 리를 행군하였다. 수 나라 장군 천수 사람 왕 인공이 후군이 되어 우리 군사를 막아 물리쳤다. 내호아는 우문 술이 패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역시 퇴각하였다. 다만 위 문승의 군대만이 온전하였다. 처음 9군이 요동에 도착했을 때는 총수가 30만 5천 명이었는데, 요동성으로 돌아갔을 때는 다만 2천 7백명 뿐이었고, 수만에 달하는 군량과 군사 기재들이 탕진되었다. 양제가 크게 노하여 우문 술 등을 쇠사슬로 묶어 계묘일에 돌아갔다.
애초에, 백제왕 장이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치자고 요청했을 때, 양제는 백제로 하여금 우리의 동정을 엿보게 하였으나, 이 때 백제왕 장은 비밀리에 우리와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수 나라 군사가 출동할 때, 백제왕 장이 그의 신하 국지모로 하여금 수 나라에 가서 양국 군사가 만날 기일을 알려 주기를 요청하였다. 양제는 크게 기뻐하여 후하게 상을 주고, 상서 기부랑 석률을 백제에 보내 양국 군사가 만날 기일을 알려 주었다. 수 나라 군사가 요수를 건너오게 되자, 백제도 역시 국경에서 군사를 정비하고 수 나라에 협조한다는 것을 성명하였으나, 실제로는 양 쪽을 모두 지지하였던 것이다. 이 번 싸움에서 수 나라는 다만 요수 서쪽에서 우리의 무려라 지역을 빼앗아 요동군과 통정진을 설치하였을 뿐이었다.

○二十四年, 春正月, 帝詔徵天下兵, 集< 郡>, 募民爲驍果, 修<遼東>古城, 以貯軍糧. 二月, 帝謂侍臣曰: "<高句麗>小虜, 侮慢上國. 今, 拔海移山, 猶望克果,  此虜乎?" 乃復議代{伐} . 左光祿大夫<郭榮>諫曰: "戎狄失禮, 臣下之事. 千鈞之弩, 不爲 鼠發機. 奈何親辱萬乘, 以敵小寇乎?" 帝不聽. 夏四月, 車駕度<遼>, 遣<宇文述>與<楊義臣>, 趣<平壤>. <王仁恭>出<扶餘>道, 進軍至<新城>. 我兵數萬拒戰, <仁恭>帥勁騎一千, 擊破之. 我軍 城固守. 帝命諸將攻<遼東>, 聽以便宜從事. 飛樓 ·雲梯·地道, 四面俱進, 晝夜不息. 我應變拒之, 二十餘日不拔. 主客死者甚衆. 衝梯竿長十五丈, 驍果<沈光>升其端, 臨城與我軍戰, 短兵接殺十數人. 我軍競擊之, 而墜未及地, 適遇竿有垂 , <光>接而復上. 帝望見壯之, 卽拜朝散大夫. <遼東城>久不下, 帝遣造布囊百餘萬口, 滿貯士{土} , 欲積爲魚梁大道, 闊三十步, 高與城齊, 使戰士登而攻之. 又作八輪樓車, 高出於城, 夾魚梁道, 欲俯射城內. 指期將攻, 城內危蹙. 會, <楊玄感>叛書至, 帝大懼. 又聞達官子弟皆在<玄感>所, 益憂之. 兵部侍郞<斛斯政>, 素與<玄感>善, 內不自安, 來奔. 帝夜密召諸將, 使引軍還. 軍資器械攻具, 積如丘山, 營壘帳幕, 案堵不動, 衆心 懼, 無復部分, 諸道分散. 我軍卽時覺之, 然不敢出, 但於城內鼓 . 至來日午時, 方漸出外, 猶疑<隋>軍詐之. 經二日, 乃出數千兵追 , 畏<隋>軍之衆, 不敢逼, 常相去八九十里. 將至<遼水>, 知御營畢度, 乃敢逼後軍. 時, 後軍猶數萬人, 我軍隨而 擊, 殺 數千人.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24년 봄 정월, 수 나라 양제가 조서를 내려 전국 군사들을 탁군으로 소집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효과를 만들고, 요동의 옛 성을 수리하고 군량을 저장하게 하였다.
2월, 양제가 근신들에게 "고구려와 같이 하찮은 것들이 상국을 무시하고 있다. 오늘 날 우리의 국력이 바다물을 뽑아내고 산을 옮길 수 있거늘 하물며 이런 따위의 적이야 무엇이 문제이겠는가?"라고 말하고, 고구려를 다시 정벌할 것을 논의하였다. 이 때 좌광록 대부 곽 영이 간하여 말하기를 "오랑캐로서 예절을 지키지 못한 것은 신하로서의 일입니다. 천근 무게의 큰 활은 생쥐를 잡기 위하여 사용하지 않는 법이니, 어찌하여 직접 천자의 자리를 더럽혀 작은 도적을 대적하려 하십니까?"라고 하였으나, 양제는 이 말을 듣지 않았다.
여름 4월, 양제는 요수를 건넜다. 그는 우문 술과 양 의신으로 하여금 평양으로 진격하게 하고, 왕 인공은 부여를 경유하여 신성으로 진군하도록 하였다. 우리 군사 수만 명이 이들과 대항하여 싸우다가 인공의 강병 1천여 명에게 패배하였다. 우리 군사는 성을 굳게 지켰다. 양제가 모든 장수에게 명령하여 요동을 치게하고, 그들로 하여금 사태에 따라 명령을 기다리지 말고 적절하게 조치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비루동·운제·지도를 이용하여 사면에서 동시에 밤낮으로 공격하였다. 그러나 우리도 그때마다 적절히 대응하였기 때문에 20여 일이 지나도록 성을 빼앗기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양 편 모두 전사자가 매우 많았다. 수 나라에서 길이가 열댓 길 되는 성곽 공격용 사다리를 세우고, 효과 심 광이 그 끝에 올라서서 성을 내려다 보며 우리 군사와 단병으로 접전하여 10여 명을 죽였다. 우리 군사들이 앞다투어 그를 밀었는데, 그는 땅에 채 닿기 전에 사다리에 매달려 있던 줄을 잡고 다시 올라갔다. 양제가 이를 바라보고 장하게 여겨 즉시 그에게 조산 대부 벼슬을 주었다. 요동성이 오래도록 함락되지 않자, 양제는 1백여 만 개의 푸대를 만들어 보냈다. 그는 푸대에 흙을 채운 후에, 넓이가 30보이며, 성과 높이가 동일한 큰 뚝길을 쌓게 하고, 군사들로 하여금 그 위에 올라서서 성 안을 공격하게 하는 작전을 구상하였다. 또 한편으로 높이가 성보다 훨씬 높은 팔륜누거를 만들어, 새로 만든 큰 뚝길에 세워 성 안을 내려다 보며 활을 쏘게 하는 방법도 구상하였다. 장차 날짜를 정하여 이러한 방법으로 공격하려 하자, 성 안에서는 위협을 느끼고 위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때마침 수 나라에서 양 현감이 반역하였다는 보고가 오자, 양제는 크게 두려워 하였다. 또한 고관들의 자제가 모두 현감의 편에 섰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걱정하게 되었다. 이 때 수 나라 병부 시랑 곡 사정이 본래부터 현감과 친한 사이였으므로, 내심 불안하게 생각하여 우리에게 도망해왔다. 양제는 밤에 여러 장수들을 조용히 불러 군사를 인솔하고 돌아가도록 하였다. 군수 기재와 공격용 도구들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병영과 보루, 장막들도 자리에 둔 채 그대로 있었으나, 군사들의 마음은 흉흉하여 다시 부대를 정비하지 못하고, 여러 길로 흩어졌다. 우리 군사가 이를 즉시 알았으나, 감히 나가지는 못하고 성 안에서 북을 울리며 떠들고 있다가 이튿날 오시에야 조금씩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때도 오히려 수 나라 군사가 우리를 속이는 것으로 의심하였다. 이틀이 지나서야 수천 명의 군사를 출동하여 추적해 갔다. 그러나 수 나라 군사의 수가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일정하게 8·9십리의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거의 요수에 이르러서야 양제의 친병이 모두 건너간 것을 알고, 곧 그들의 후군을 공격하였다. 이 때에도 후군의 수가 수만 명이었는데, 우리 군사가 따라 가면서 끝까지 공격하여 대략 수천 명을 죽였다.

○二十五年, 春二月, 帝詔百寮, 議伐<高句麗>, 數日無敢言. 詔復徵天下兵, 百道俱進. 秋七月, 車駕次<懷遠鎭>. 時, 天下已亂, 所徵兵多失期不至, 吾國亦困弊. <來護兒>至<卑奢城>, 我兵逆戰. <護兒>擊克之, 將趣<平壤>. 王懼, 遣使乞降, 因{囚} 送<斛斯政>. 帝大悅, 遣使持節, 召<護兒>還. 八月, 帝自<懷遠鎭>班師. 冬十月, 帝還<西京>, 以我使者及<斛斯政>, 告太廟, 仍徵王入朝, 王竟不從.  將帥嚴裝, 更圖後擧, 竟不果行.

李丙燾. [隋書]. [資治通鑑].
25년 봄 2월, 양제가 백관들에게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공격하는 문제를 의논하게 하였으나, 수일 동안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양제가 조서를 내려 다시 전국 군사를 소집하여 모든 방면의 길로 일시에 진공하게 하였다.
가을 7월, 양제가 회원진으로 행차하였다. 이 때 수 나라는 나라 전체가 이미 혼란하여, 소집한 군사의 대부분이 기일을 어기고 오지 않았고, 우리 나라도 역시 피폐된 상태였다. 수 나라 장군 내호아가 비사성에 이르자, 우리 군사가 나아가 싸웠으나 호아가 승리하고 곧 평양으로 진격하려 하였다. 왕이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고, 곡사정을 돌려 보냈다. 양제가 크게 기뻐하여 신임표 가진 사절을 보내 내호아를 소환하였다.
8월, 양제가 회원진에서 군사를 거두었다.
겨울 10월, 양제가 서경에 돌아가서 우리의 사신과 곡사정에 대한 일을 태묘에 고하고, 또한 우리 왕에게 수 나라 조정에 들어와 예방하라고 하였으나 왕이 끝내 듣지 않았다. 양제가 장수들에게 엄밀하게 대비할 것을 명하고, 다시 공격할 것을 기도하였으나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二十九年, 秋九月, 王薨, 號曰< 陽王>.

29년 가을 9월, 왕이 별세하였다. 호를 영양왕이라 하였다.

   <榮留王 영류왕>

○<榮留王>, 諱<建武>[一云成.], < 陽王>異母弟也. < 陽>在位二十九年薨, 卽位.

영류왕의 이름은 건무[무를 성이라고도 한다.]이며, 영양왕의 이복 아우이다. 영양왕이 재위 29년에 죽자, 건무가 왕위에 올랐다.

○二年, 春二月, 遣使如<唐>朝貢. 夏四月, 王幸<卒本>, 祀始祖廟. 五月, 王至自<卒本>.

2년 봄 2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4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 지냈다.
5월, 왕이 졸본에서 돌아왔다.

○四年, 秋七月, 遣使如<唐>朝貢.

4년 가을 7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五年, 遣使如<唐>朝貢. <唐><高祖>感<隋>末戰士多陷於此, 賜王詔書曰: "朕恭膺寶命, 君臨率土, 祗順三靈, 懷柔萬國, 普天之下, 情均撫字, 日月所炤, 咸使乂安. 王統攝<遼>左, 世居藩服, 思稟正朔, 遠循職貢. 故遣使者, 跋涉山川, 申布誠懇, 朕甚嘉揖{焉} . 方今, 六合寧晏, 四海淸平, 玉帛旣通, 道路無壅, 方申緝{輯} 睦, 永敦聘好, 各保疆 , 豈非盛美? 但<隋>氏季年, 連兵構難, 攻戰之所, 各失其泯{氓} , 遂使骨肉乖離, 室家分析, 多歷年歲, 怨曠不申. 今, 二國通和, 義無阻異. 在此所有<高句麗>人等, 已令追括, 尋卽遣送, 彼處所有此國人者, 王可放還, 務盡綏{撫} 育之方, 共弘仁恕之道." 於是, 悉搜括華人以送之, 數至萬餘. <高祖>大喜.

李丙燾. [舊唐書].李丙燾. [舊唐書].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舊唐書].
5년,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당 나라 고조가 수 나라 말기에 많은 군사들이 우리 나라에 붙잡혀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왕에게 조서를 내려 말했다.
"내가 공손히 천명을 받아 천하에 군림하고, 삼가 천·지·인의 삼령에 순응하여 만국을 회유하니, 천하 백성들이 모두 나의 사랑을 입을 것이요, 해와 달이 비치는 곳은 어디나 모두 편안하게 될 것이다. 왕은 요동의 동쪽 지역을 통치하면서, 대대로 번방의 자격으로 중국의 정삭을 받들며, 오랜 동안 술직과 조공의 직무를 수행하여, 사신을 보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성을 보여왔으니, 이를 나는 매우 가상히 여긴다. 지금은 바야흐로 천지사방이 편안하며 사해가 무사하니, 예물이 내왕하되 길이 막힘이 없으며, 서로 화목하고 우호의 정을 길이 굳건히 하면서 각각 자기의 영역을 보호하고 있으니, 어찌 성대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다만 수 나라 말년에 연이어 전쟁을 하였으니, 전쟁의 땅에는 어디에나 유랑민이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마침내 골육이 헤어지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갈라져 긴 세월이 지나도록 짝 잃은 원한을 풀지 못하고 있다. 이제 우리 두 나라가 화친을 맺으니, 우리의 정의는 동일하게 되었다. 이곳에 있는 고구려인은 이미 전부 조사하여 즉시 돌려 보내기로 하였으니, 그곳에 있는 우리 나라 사람도 왕이 돌려 보내어, 백성들을 편하게 하는 정책에 힘을 다하여, 인자하고 너그러운 도리를 서로 넒혀 나가자."
이리하여 우리 나라에 있는 중국인들을 전부 찾아 모아 돌려 보냈다. 그 수가 1만여 명에 달하였다. 당 나라 고조가 크게 기뻐하였다.

○六年, 冬十二月, 遣使如<唐>朝貢.

6년 겨울 12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七年, 春二月, 王遣使如<唐>, 請班曆. 遣刑部尙書<沈叔安>, 策王爲上枉國<遼東郡>公<高句麗>國王. 命道士, 以天尊像及道法, 往爲之講『老子』, 王及國人聽之. 冬十二月, 遣使入<唐>朝貢.

7년 봄 2월, 왕이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책력을 반포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 나라에서 형부 상서 심 숙안을 보내 왕을 상주국요동군공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도사에게 명하여 천존의 화상과 도교를 가지고 고구려에 가서 [노자]를 강의하게 하였다. 왕과 백성들이 이 강의를 들었다.
겨울 12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八年, 王遣使入<唐>, 求學佛·老敎法, 帝許之.

8년, 왕이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불교와 노자의 교리를 가르쳐 주기를 요청하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九年, <新羅>·<百濟>遣使於<唐>, 上言: "<高句麗>閉道, 使不得朝, 又屢相侵掠." 帝遣散騎侍郞<未子奢{朱子奢}> , 持節諭和. 王奉表謝罪, 請與二國平.

趙炳舜. 『三國史節要』.
9년, 신라와 백제가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가 길을 막고 예방하지 못하게 하며, 또한 자주 침략한다"라고 말하였다. 당 나라 황제가 산기 시랑 주 자사에게 황제의 신임표를 주어 보내며, 세 나라가 화친하기를 권하였다. 왕이 당 나라에 표문을 올려 사죄하고, 신라·백제 두 나라와 화친하겠다고 하였다.

○十一年, 秋九月, 遣使入<唐>, 賀<太宗>擒<突厥>< 利>可汗, 兼上封域圖.

11년 가을 9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태종이 돌궐의 힐리 가한을 사로잡은 것을 축하하고, 동시에 봉역도를 올렸다.

○十二年, 秋八月, <新羅>將軍<金庾信>, 來侵東邊, 破<娘臂城>. 九月, 遣使入<唐>朝貢.

12년 가을 8월, 신라 장군 김 유신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여 낭비성을 함락시켰다.
9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四年, <唐>遣<廣州>司馬<長孫師>, 臨 <隋>戰士骸骨, 祭之, 毁當時所立京觀. 春二月, 王動衆築長城, 東北自<扶餘城>, 東{西} 南至海千有餘里, 凡一十六年畢功.

李丙燾. [舊唐書].
14년, 당 나라에서 광주 사마 장 손사를 보내 수 나라 전사들의 해골을 묻은 곳에 제사지내고, 당시에 세웠던 경관을 헐어 버렸다.
봄 2월, 왕이 백성을 동원하여 장성을 쌓았다. 그 성의 동북 쪽은 부여성에서 시작하여 동남 쪽으로 바다까지 1천여 리가 되었다. 이 성은 16년 만에 준공되었다.

○二十一年, 冬十月, 侵<新羅>北邊<七重城>. <新羅>將軍<閼川>逆之, 戰於<七重城>外, 我兵敗 .

21년 겨울 10월, 신라 북쪽 변경에 있는 칠중성을 침공하였다. 신라 장군 알천이 칠중성 밖에서 우리와 싸웠다.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二十三年, 春二月, 遣世子<桓權>, 入<唐>朝貢. <太宗>勞尉{慰} , 賜賚之特厚. 遣王子弟入<唐>, 請入國學. 秋九月, 日無光, 經三日復明.

趙炳舜. 『三國史節要』.
23년 봄 2월, 당 나라에 세자 환권을 보내 조공하였다. 태종이 수고를 위로하고 특별히 후하게 예물을 주었다. 왕이 당 나라에 자제들을 보내 국학에 입학시켜줄 것을 요청하였다.
가을 9월, 햇빛이 없어졌다가 사흘 후에 다시 밝아졌다.

○二十四年, 帝以我太子入朝, 遣職方郞中<陳大德>答勞. <大德>入境, 所至城邑, 以綾綺厚餉官守者曰: "吾雅好山水, 此有勝處, 吾欲觀之." 守者喜導之, 遊歷無所不至. 由是, 悉得其纖曲. 見<華>人<隋>末從軍沒留者, 爲道親戚存亡, 人人垂涕, 故所至士女夾道觀之. 王盛陳兵衛, 引見使者. <大德>回{因} 奉使 國虛實, 吾人不知. <大德>還奏, 帝悅. <大德>言於帝曰: "其國聞<高昌>亡, 大懼, 館候之勤, 加於常數." 帝曰: "<高句麗>本四郡地耳. 吾發卒數萬, 攻<遼東>, 彼必傾國救之. 別遣舟師出<東萊>, 自海道趨<平壤>, 水陸合勢, 取之不難. 但<山東>州縣, 凋 未復, 吾不欲勞之耳."

趙炳舜. 『三國史節要』.
24년, 당 나라 임금이 우리 나라 태자의 예방에 대한 답례로, 직방 낭중 진 대덕을 보내 왔다. 대덕이 우리 나라 경내에 들어오면서 이르는 성읍마다 그 성읍을 수비하는 관리들에게 비단을 후하게 주면서 "내가 원래 산수 구경을 좋아하니, 여기에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 있으면 보고 싶다"고 말하였다. 수비하는 자들이 기꺼이 안내하니, 그의 발걸음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써 그는 우리 나라 지리에 대하여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그는 중국인으로서 수 나라 말기에 군대를 따라 왔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을 만나 친척들의 안부를 전하여 주니,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 때문에 도로 양편에서는 남녀들이 이를 구경삼아 보았다. 왕이 호위병을 장대하게 세우고 당 나라 사신을 접견하였다. 대덕은 사신으로 온 기회에 우리 나라의 국력을 살폈으나,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 대덕이 본국으로 돌아가서 보고하니 황제가 기뻐하였다. 대덕은 황제에게 "고구려는, 고창이 멸망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우리 사신들의 숙소 접대 범절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황제는 "고구려는 본래 중국의 4군이었던 곳이다. 내가 군사 수만을 출동시켜 요동을 공격하면, 그들은 반드시 온 국력을 기울여 요동을 구원하러 나올 것이다. 이 때 별도로 수군을 동래에서 출발시켜 바다로부터 평양을 향하게 하여 수륙군이 합세하면 고구려를 점령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만 산동의 주현에 전쟁의 상처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니, 내가 그들을 수고롭게 하기를 원하지 않을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二十五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王命西{東} 部大人<蓋蘇文>, 監長城之役. 冬十月, <蓋蘇文>弑王. 十一月, <太宗>聞王死, 擧哀於苑中, 詔贈物三百段, 遣使持節吊祭.
三國史記卷第二十.

李丙燾. 列傳.
趙炳舜. [三國史節要].
25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왕이 서부 대인 개소문에게 명령하여 장성을 쌓는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겨울 10월, 개소문이 왕을 죽였다.
11월, 당 나라 태종은 왕이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원중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고, 3백 단의 폐백을 부의로 보내도록 하였으며, 지절사를 보내 조문하고 제사에 참여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20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