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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원문+한글) 권 제 22

 

三國史記卷第二十二 삼국사기 권 제 22

高句麗本紀第十 <寶藏王>下.

고구려본기 제 10 보장왕(하)

○六年, <太宗>將復行師, 朝議以爲: "<高句麗>依山爲城, 不可猝拔. 前大駕親征, 國人不得耕種, 所克之城, 實收其 , 繼以旱災, 民太半乏食. 今若數遣偏師, 更迭擾其疆 , 使彼疲於奔命, 釋 入堡, 數年之間, 千里蕭條, 則人心自離, <鴨 >之北, 可不戰而取矣." 帝從之, 以左武衛大將軍<牛進達>, 爲<靑丘>道行軍大摠管, 右武衛將軍<李海岸>副之, 發兵萬餘人, 乘樓舡, 自<萊州>, 泛海而入, 又以太子詹事<李世勣>, 爲<遼東>道行軍大摠管, 右武衛將軍<孫貳郞>等副之, 將兵三千人, 因<營州>都督府兵, 自<新城>道入. 兩軍, 皆選習水善戰者, 配之. <李世勣>軍旣度<遼>, 歷<南蘇>等數城, 皆背城拒戰, <世勣>擊破之, 焚其羅郭而還. 秋七月, <牛進達>·<李海岸>入我境, 凡百餘戰, 攻<石城>拔之, 進至<積利城>下. 我兵萬餘人出戰, <李海岸>擊克之, 我軍死者三千人{二千級} . <太宗> <宋州>刺史<王波利>等, 發<江南>十二州工人, 造大舡數百 , 欲以伐我. 冬十二月, 王使第二子莫離支<任武>, 入謝罪, 帝許之.

李丙燾. [資治通鑑].
6년, 당 나라 태종이 다시 원정을 하려 하였다. 조정의 논의가 다음과 같았다.
"고구려는 산에 의지하여 성을 만들었기 때문에 조기에 함락시킬 수 없다. 앞서 황제가 직접 원정했을 때, 그 백성들은 농사를 짓지 못했으며, 우리가 정복한 성에서는 곡물들을 수확하였으나, 가뭄이 계속되어 백성의 태반이 식량이 부족하게 되었다. 이제 만약 적은 군사를 자주 보내, 그 영역을 번갈아 침략하여 그들로 하여금 방어에 지치게 하고, 쟁기를 놓고 싸움터로 나가게 한다면, 수년 내에 천리의 들판은 적막해질 것이며, 민심은 저절로 이반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압록강 이북은 싸우지 않고도 빼앗을 수 있을 것이다."
황제가 이에 따라, 좌무위 대장군 우 진달을 청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 장군 이 해안을 보좌관으로 하여, 군사 1만여 명을 출동시켜, 누선을 타고 내주로부터 해로로 진격케 하고, 또한 태자 첨사 이 세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 장군 손 이랑 등을 보좌관으로 하여,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영주 도독부의 군사와 함께 신성에서 진격하게 하였다. 이 두 부대에는 모두 수전에 익숙하고 전투에 능한 자들을 선발하여 배속시켰다. 이 세적의 군사가 요수를 건너 남소 등의 몇 성을 지났는데, 그 성이 모두 성을 등지고 싸웠으므로, 세적이 이들을 격파하고 외성을 불지르고 돌아갔다.
가을 7월, 우 진달·이 해안 등이 우리 국경에 들어와 1백여 차례 싸웠다. 그들은 석성을 격파하고, 적리성 아래까지 진격해왔다. 우리 군사 1만여 명이 나가 싸웠다. 그러나 이 해안이 우리 군사를 공격하여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사망한 우리 군사가 3천명이었다. 태종은 송주 자사 왕 파리 등에게 명령하여, 강남 12주의 공인들을 징발하여, 큰 배 수백 척을 만들어 우리를 공격하려 하였다.
겨울 12월, 왕이 둘째 아들 막리지 임무로 하여금 당 나라에 들어가 사죄하게 하였다. 황제가 이를 받아들였다.

○七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帝詔右武衛大將軍<薛萬徹>, 爲<靑丘>道行軍大摠管, 右衛將軍<裴行方>副之, 將兵三萬餘人, 及樓舡戰艦, 自<萊州>, 泛海來擊. 夏四月, <烏胡鎭>將<古神感>, 將兵浮海來擊, 遇我步騎五千, 戰於<易山>, 破之. 其夜, 我軍萬餘人, 襲<神感>舡, <神感>伏發, 乃敗. 帝謂我困弊, 議以明年發三十萬衆, 一擧滅之. 或以爲大軍東征, 須備經歲之糧, 非畜乘所能載, 宜具是{舟} 艦, 爲水轉. <隋>末<劒南>, 獨無寇盜, 屬者<遼東>之役, <劒南>復不預及. 其百姓富庶, 宜使之造舟艦. 帝從之. 秋七月, 王都女産子, 一身兩頭. <大宗{太宗}> 遣左領左右府長史<强偉>於<劒南道>, 伐木造舟艦. 大者或長百尺, 其廣半之. 別遣使行水道, 自<巫峽>, 抵<江>·<楊>, 趣<萊州>. 九月, 群獐渡河西走, 群狼向西行, 三日不絶. <太宗>遣將軍<薛萬徹>等來伐. 渡海入<鴨 >, 至<泊灼城>南四十里, 止營. <泊灼>城主<所夫孫>, 帥步騎萬餘, 拒之, <萬徹>遣右衛將軍<裴行方>, 領步卒及諸軍乘之, 我兵潰. <行方>等進兵圍之, <泊灼城>因山設險, 阻<鴨 水>以爲固, 攻之不拔. 我將<高文>, 率<烏骨>·<安地>諸城兵三萬餘人, 來援, 分置兩陣, <萬徹>分軍以當之, 我軍敗潰. 帝又詔<萊州>刺史<李道裕>, 轉糧及器械,  {貯} 於<烏胡島>, 將欲大擧.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7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태종이 조서를 내려 우무위 대장군 설 만철을 청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위 장군 배 행방으로 그를 보좌케 하여 장병 3만여 명과 누선 및 전함을 가지고 내주로부터 바다를 건너 우리를 공격하게 하였다.
여름 4월, 오호진 장수 고 신감이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와 공격하였다. 그는 우리의 보병, 기병 5천명과 역산에서 조우하여 우리 군사를 이겼다. 그날 밤, 우리 군사 1만여 명이 신감의 배를 습격하다가 신감의 복병이 출동하여 패배하였다. 태종은 우리가 피폐되었다고 판단하고, 다음 해에 30만 대군을 출동시켜 일거에 멸망시킬 것을 논의에 붙였다. 누군가가 다음과 같은 의견을 말했다.
'대군이 동방으로 원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1년의 군량미를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군량을 마소나 수레에 실을 수는 없으니, 마땅히 선박을 준비하여 수로로 운반해야 할 것이다. 수 나라 말기에 검남 지방만은 도적의 침입이 없었고, 지난 번의 요동 정벌 때에도 검남이 참여하지 않았으니, 그곳의 부유한 백성들로 하여금 선박을 만들게 해야할 것이다.'
태종이 이 말을 따랐다.
가을 7월, 서울 여자가 아이를 낳았는데, 몸뚱이는 하나이고 머리가 둘이었다.
태종이 좌령 좌우부 장사 강 위를 검남도에 파견하여, 나무를 베어 선박을 만들게 하였다. 큰 배 중에는, 길이가 1백 척, 넓이가 오십 척이 되는 것이 있었다. 이 배들은 따로 사신을 파견하여 수로를 통하여 무협에서 강남과 양주를 거쳐 내주로 가게 하였다.
9월, 노루가 떼를 지어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고, 이리도 떼를 지어 사흘 동안 서쪽으로 갔다.
태종이 장군 설 만철 등으로 하여금 우리 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들은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서, 박작성 남쪽 40리 지점에 진을 쳤다. 박작 성주 소부손이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방어하였다. 만철이 우위 장군 배 행방으로 하여금 보병과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이들을 공격케 하자 우리 군사가 무너졌다. 배 행방 등이 진격하여 포위하였으나, 박작성은 산을 이용한 험준한 요새였으며, 압록강으로 튼튼하게 막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우리 장수 고 문이 오골성·안지성 등 여러 성의 군사 3만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두 진으로 나누어 구원하였다. 만철이 군사를 나누어 이에 대응하여,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태종이 또한 내주 자사 이 도유에게, 군량과 기계를 운반하여 오호도에 비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장차 대정벌을 일으키려는 것이었다.

○八年, 夏四月, <唐><太宗>崩. 遺詔罷<遼東>之役.
○論曰: 初, <太宗>有事於<遼東>也, 諫者非一. 又自<安市>旋軍之後, 自以不能成功, 深悔之. 歎曰: "若使<魏徵>在, 不使我有此行也." 及其將復伐也, 司空<房玄齡>病中上表, 諫以爲: "『老子』曰: '知足不辱, 知止不殆.' 陛下威名功德, 旣云足矣, 拓地開疆, 亦可止矣. 且陛下每決一重囚, 必令三復五奏, 進素膳, 止音樂者, 重人命也. 今驅無罪之士卒, 委之鋒刃之下, 使肝腦塗地, 獨不足憫乎? 嚮使<高句麗>違失臣節, 誅之可也; 侵擾百姓, 滅之可也; 他日能爲<中國>患, 除之可也. 今無此三條, 而坐煩<中國>, 內爲前代雪 , 外爲<新羅>報 , 豈非所存者小, 所損者大乎? 願陛下許<高句麗>自新, 焚凌波之舡, 罷應募之衆. 自然華夷慶賴, 遠肅邇安." <梁公>將死之言, 諄諄若此, 而帝不從, 思欲丘墟東域而自快, 死而後已. 史論曰: "好大喜功, 勤{勒} 兵於遠者." 非此之謂乎? <柳公權>小說曰: "<住 {駐 }> 之役, <高句麗>與<靺鞨>合軍, 方四十里, <太宗>望之, 有懼色." 又日{曰} : "六軍爲<高句麗>所乘, 殆將不振. 候者告<英公>之麾, 黑旗被圍, 帝大恐." 雖終於自脫, 而危懼如彼, 而『新舊書』及<司馬公>『通鑑』, 不言者, 豈非爲國, 諱之者乎?

今西龍.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8년 여름 4월, 당 나라 태종이 사망하였다. 태종은 조칙을 내려 요동 정벌을 중지하게 하였다.
저자의 견해 : 처음에 태종이 요동 원정을 할 때, 이를 말리는 자가 한 사람 뿐이 아니었다. 또한 안시성으로부터 군사를 철수한 뒤에는, 자기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고 한탄하며, "만약 위 징이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번 원정을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다시 고구려를 치려 할 때 사공 방 현령이 병중에 있으면서도 표문을 올려 다음과 같이 간했다.
"노자는 '만족함을 알면 욕을 당하지 않으며,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폐하의 위대한 명성과 공덕은 이미 만족할만 하며, 국토를 넓히는 일도 역시 멈출만한 정도가 되었습니다. 폐하께서는 한 명의 중죄인을 처형할 때도 언제나 필히 세 번 심사하고 다섯 번 변명할 기회를 주었으며, 검소한 식사를 올리게 하고, 풍류를 중지하게 하였으니, 이는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일 터인데, 이제 무죄한 사졸들을 몰아다가 칼날 밑에 맡겨 참혹히 죽게 하는 것만은 왜 불쌍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지난날, 고구려가 신하의 절차를 어겼다면 벌주는 것이 옳으며, 우리 백성들을 침략하였다면 없애버리는 것이 옳으며, 후일 중국의 걱정거리가 된다면 제거하여 버리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와 같은 세 가지 조건이 하나도 갖추어져 있지 않은데, 공연히 중국 자신을 괴롭히면서, 안으로는 선대의 치욕을 씻고, 밖으로는 신라의 복수를 한다하니, 이야말로 어찌 얻는 것은 작고 잃는 것은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원컨대 폐하는 고구려가 스스로 새로 태어나도록 허락하시어, 창파에 띄운 선박을 불태우고, 징발해온 군사들을 돌려 보내십시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중국에는 경사가 깃들고, 오랑캐들은 우리를 믿을 것이며, 먼 곳은 조용하고 가까운 곳은 평안해질 것입니다."
양공이 죽음을 앞두고 한 말이 이와 같이 간곡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이 말을 따르지 않고, 동방을 폐허로 만드는 것을 자기 만족으로 삼으려다가 죽은 뒤에야 그만 두었다. 사론에서 말하는 바 "큰 것을 즐기고, 공명을 좋아하여, 먼 곳으로 군사를 내몰았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유 공권의 소설에서는 "주필산 전쟁에서 고구려가 말갈과 군사를 연합하니, 그 군사가 바야흐로 40리나 뻗쳤다. 태종이 이를 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또한 "황제의 6군이 고구려 군사에게 제압되어 거의 꼼작 못하였네. 영공의 휘하에 있는 검은 깃발이 포위되었다고 척후병이 보고하니, 황제가 크게 두려워 하였네."라고 하였다. 비록 나중에 몸은 탈출했으나 그와 같이 겁을 내었는데, [신구당서]와 사마광의 [통감]에 이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나라의 체면 때문에 말하기를 기피한 것이 아니겠는가?

○九年, 夏六月, <盤龍寺><普德>和尙, 以國家奉道, 不信佛法, 南移<完山><孤大山>. 秋七月, 霜雹害 , 民饑.

9년 여름 6월, 반룡사의 보덕 화상은, 나라에서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믿지 않는다 하여, 남쪽에 있는 완산 고대산으로 옮겨 갔다.
가을 7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에 해가 미치고, 백성들이 굶주렸다.

○十一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11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三年, 夏四月, 人或言: "於<馬嶺>上, 見神人, 曰: '汝君臣, 奢侈無度, 敗亡無日(+矣) .'" 冬十月, 王遣將<安固>出師, 及<靺鞨>兵, 擊<契丹>. <松漠>都督<李窟哥>禦之, 大敗我軍於<新城>.

趙炳舜. 『三國史節要』.
13년 여름 4월, 어떤 사람이 말했다.
"마령에서 신령스런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너의 임금과 신하들이 사치스럽기 한이 없으니 패망할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장수 안고로 하여금 말갈군과 함께 거란을 공격하게 하였다. 송막 도독 이 굴가가 대항하여 신성에서 우리 군사를 대패시켰다.

○十四年, 春正月, 先是, 我與<百濟>·<靺鞨>, 侵<新羅>北境, 取三十三城, <新羅>王<金春秋>, 遣使於<唐>求援. 二{三} 月, <高宗>遣<營州>都督<程名振>·左(+右) 衛中郞將<蘇定方>, 將兵來擊. 夏五月, <程名振>等, 渡<遼水>. 吾人見其兵少, 開門度<貴湍水{貴端水}> , 逆戰. <名振>等奮擊, 大克之, 殺獲千餘人, 焚其外郭及村落而歸.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兩唐書. [冊府元龜]. [資治通鑑].
趙炳舜. [三國史節要].
14년 봄 정월, 이보다 앞서 우리가 백제·말갈과 더불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하여 33개 성을 점령하였는데, 신라왕 김 춘추가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2월, 당 나라 고종이 영주 도독 정 명진과 좌위 중랑장 소 정방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였다.
여름 5월, 명진 등이 요수를 건너 오자, 우리 군사는 상대방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성문을 열고 귀단수를 건너가 전투를 벌였다. 명진 등은 우리를 맹공하여 크게 이기고, 우리 군사 1천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으며, 우리의 외성과 촌락에 불을 지르고 돌아갔다.

○十五年, 夏五月, 王都雨鐵. 冬十二月, 遣使入<唐>, 賀冊皇太子.

15년 여름 5월, 서울에 쇳가루가 비처럼 떨어졌다.
겨울 12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황태자의 책봉을 축하하였다.

○十七年, 夏六月, <唐><營州>都督兼東夷都護<程名振>·右領軍中郞將<薛仁貴>, 將兵來攻, 不能克.

17년 여름 6월, 당 나라 영주 도독 겸 동이 도호 정 명진과 우령군 중랑장 설 인귀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우리를 공격하였으나 이길 수 없었다.

○十八年, 秋九月, 九虎一時入城食人, 捕之不獲. 冬十一月, <唐>右領軍中郞將<薛仁貴>等, 與我將<溫沙門>, 戰於<橫山>, 破之.

18년 가을 9월, 호랑이 아홉 마리가 한꺼번에 성안으로 들어와서 사람을 잡아 먹었으나, 이들을 잡지 못했다.
겨울 11월, 당 나라 우령군 중랑장 설 인귀 등이 우리 장수 온 사문과 횡산에서 싸워 우리 군사를 패배시켰다.

○十九年, 秋七月, <平壤>河水血色, 凡三日. 冬十一月, <唐>左驍衛大將軍<契苾何力>, 爲<浿江>道行軍大摠管; 左武衛大將軍<蘇定方>, 爲<遼東>道行軍大摠管; 左驍衛將軍<劉伯英>, 爲<平壤>道行軍大摠管; <蒲州>刺史<程名振>, 爲<鏤方>道摠管, 將兵分道來擊.

19년 가을 7월, 평양의 강물이 3일 동안 핏빛으로 변했다.
겨울 11월, 당 나라에서 좌효위 대장군 설필 하력을 패강도행군대총관, 좌무위 대장군 소 정방을 요동도행군대총관, 좌효위 장군 유 백영을 평양도행군대총관, 포주 자사 정 명진을 누방도총관으로 삼아 각각 다른 길로 군사를 이끌고 와서 우리를 공격했다.

○二十年, 春正月, <唐>募<河南·北>·<淮南>六十七州兵, 得四萬四千餘人, 詣<平壤>·<鏤方>行營, 又以鴻 卿<蕭嗣業>, 爲<扶餘>道行軍摠管, 帥<回紇>等諸部兵, 詣<平壤>. 夏四月, 以<任雅相>, 爲<浿江>道行軍摠管; <契苾何力>, 爲<遼東>道行軍摠管; <蘇定方>, 爲<平壤>道行軍摠管, 與<蕭嗣業>及諸胡兵凡三十五軍, 水陸分道 進. 帝欲自將大軍, <蔚州>刺史<李君球>立言: "<高句麗>小國, 何至傾<中國>事之有? 如<高句麗>旣滅, 必發兵以守. 小發則威不振, 多發則人不安, 是天下疲於轉戍. 臣謂: 征之未如勿征, 滅之未如勿滅." 亦會<武后>諫帝, 乃止. 夏五月, 王遣將軍<惱音信>, 領<靺鞨>衆, 圍<新羅><北漢山城>, 浹旬不解, <新羅>餉道絶, 城中危懼. 忽有大星落於我營, 又雷雨震擊, <惱音信>等, 疑駭引退. 秋八月, <蘇定方>破我軍於<浿江>, 奪<馬邑山>, 遂圍<平壤城>. 九月, <蓋蘇文>遣其子<男生>, 以精兵數萬, 守<鴨 {鴨綠}> , 諸軍不得渡. <契苾何力>至, 値氷大合, <何力>引衆乘氷度{渡} 水, 鼓 而進, 我軍潰奔. <何力>追數十里, 殺三萬人. 餘衆悉降, <男生>僅以身免. 會, 有詔班師, 乃還.

『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
20년 봄 정월, 당 나라가 하남·하북·회남 등의 67개 주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4만 4천여 명을 평양과 누방 군영으로 가게 하고, 또한 홍려경 소 사업을 부여도행군총관으로 삼아, 회흘 등 제 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으로 진군하게 하였다.
여름 4월, 임 아상을 패강도행군총관, 설필 하력을 요동도행군총관, 소 정방을 평양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소 사업과 모든 오랑캐 군사 35군을 거느리고 수륙으로 길을 나누어 동시에 진군하였다. 이 때 황제가 직접 대군을 통솔하려 하였다. 울주 자사 이 군구가 말했다.
"고구려는 소국인데, 어찌 중국의 모든 국력을 기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만약 고구려가 망한다면 우리가 반드시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지켜 주어야 합니다. 이 때 군사를 적게 출동시키면 위신이 서지 않을 것이오, 많이 출동시킨다면 백성들이 평안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온 나라 사람들을 전쟁으로 내몰아 피곤하게 하는 것입니다. 토벌하는 것이 토벌하지 않는 것만 못하며, 멸망시키는 것이 멸망시키지 않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에 또한 무후도 말렸으므로 황제가 중지하였다.
여름 5월, 왕이 장군 뇌 음신으로 하여금 말갈군을 거느리고 신라의 북한산성을 포위하였다. 열흘이 되도록 포위를 풀지 않았다. 신라의 군량 수송이 차단되어 성안에서는 위험과 공포를 느꼈다. 갑자기 큰 별이 우리의 병영에 떨어지고 우레가 치며 비가 오고 벼락이 쳤다. 뇌 음신 등은 의심스럽고 놀라서 퇴각하였다.
가을 8월, 소 정방이 패강에서 우리 군사를 격파하여 마읍산을 탈취하고 마침내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9월, 개소문이 그의 아들 남생에게 정병 수만 명을 주어 압록강을 수비케 하였다. 당 나라의 모든 부대가 건너오지 못하였다. 설필 하력이 압록강에 도착하였을 때는 강에 얼음이 얼었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얼음 위로 강을 건너 북을 두드리고 함성을 지르며 공격해왔다. 우리 군사가 패주하였다. 하력이 수십 리를 추격하며 우리 군사 3만명을 죽였다. 남은 군사는 모두 항복하였고, 남생은 간신히 자기 몸만 피하여 달아났다. 이즈음, 당 나라에서 군사를 철수하라는 조서가 있었으므로 그들은 곧 돌아갔다.

○二十一年, 春正月, <(+唐)> 左驍衛將軍<白州>刺史< 沮{沃沮}> 道摠管<龐孝泰>, 與<蓋蘇文>戰於<蛇水>之上, 擧軍沒, 與其子十三人, 皆戰死. <蘇定方>圍<平壤>, 會大雪, 解而退. 凡前後之行, 皆無大功而退.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21년 봄 정월, 좌효위 장군 백주 자사 옥저도총관 방 효태가 개소문과 사수 언덕에서 싸우다가 그의 군사가 전멸하였다. 효태도 그의 아들 13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소 정방은 평양을 포위했다. 그 때 마침 폭설이 내렸으므로 그들은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이리하여 당 나라는 전후의 정벌에서 매번 큰 성과없이 물러갔다.

○二十五年, 王遣太子<福男>[『新唐書』云<男福>.]入<唐>, 侍祠<泰山>. <蓋蘇文>死, 長子<男生>代爲莫離支. 初, 知國政, 出巡諸城, 使其弟<男建>·<男産>, 留知後事. 或謂二弟曰: "<男生>惡二弟之逼, 意欲除之, 不如先爲計." 二弟初未之信. 又有告<男生>者, 曰: "二弟恐兄還奪其權, 欲拒兄不納." <男生>潛遣所親, 往<平壤>伺之. 二弟收掩得之, 乃以王命召<男生>, <男生>不敢歸. <男建>自爲莫離支, 發兵討之. <男生>走據<國內城>, 使其子<獻誠>, 詣<唐>求哀. 六月, <高宗>命左驍衛大將軍<契苾何力>, 帥兵應接之, <男生>脫身奔<唐>. 秋八月, 王以<男建>爲莫離支, 兼知內外兵馬事. 九月, 帝詔<男生>, 授特進<遼東>都督兼<平壤>道安撫大使, 封<玄 郡>公. 冬十二月, <高宗>以<李勣>, 爲<遼東>道行軍大摠管兼安撫大使, 以司列少常<伯安陸>·< 處俊>副之. <龐同善>·<契苾何力>,  爲<遼東>道行軍副大摠管兼安撫大使. 其水陸諸軍摠管,  轉糧使<竇義積>·<獨孤卿雲>·<郭待封>等,  受<勣>處分. <河北>諸州租賦, 悉詣<遼東>, 給軍用.

25년, 왕이 태자 복남[[신당서]에는 남복이라 하였다.]을 당 나라에 파견하여 황제가 지내는 태산의 봉선에 참가케 하였다.
개소문이 죽고 그의 맏아들 남생이 부친을 대신하여 막리지가 되었다. 처음 정사를 맡아 여러 성을 순행하면서, 그의 두 아우 남건과 남산으로 하여금 조정에 남아 뒷 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어떤 자가 두 아우에게 말했다.
"남생은 두 아우가 자기의 자리를 빼앗을까 두려워 하여, 당신들을 처치하려 합니다. 먼저 계책을 세워 도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두 아우가 처음에는 이를 믿지 않았다. 어떤 자가 남생에게 또 말했다.
"두 아우가, 형이 돌아오면 자기들의 권세를 빼앗을까 두려워 하여 형에게 대항하여 조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 합니다."
남생은 남몰래 자기의 심복을 평양으로 보내, 두 아우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두 아우가 이를 알고 남생의 심복을 체포하고, 곧 왕명으로 남생을 소환하였다. 남생은 감히 돌아오지 못하였다. 남건은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군사를 출동시켜 남생을 토벌하였다. 남생이 국내성으로 도주하여 그곳에 웅거하면서, 그의 아들 헌성을 당 나라에 보내 구해줄 것을 애원하였다.
6월, 고종이 좌효위 대장군 설필 하력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맞이하게 하였다. 남생은 탈출하여 당 나라로 도주하였다.
가을 8월, 왕이 남건을 막리지로 삼아 내외의 군사에 대한 직무를 겸직하도록 하였다.
9월, 고종이 남생에게 조서를 내려, 요동 도독 겸 평양도 안무 대사로 특진시키고, 현토군공으로 책봉하였다.
겨울 12월, 고종이 이 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 겸 안무 대사로 삼고, 사열소상 백 안육과 학 처준으로 하여금 이들을 보좌케 하며, 방 동선과 설필 하력을 요동도행군부대총관 겸 안무 대사로 삼고, 기타 수륙군 모든 부대의 총관들과 전량사인 두 의적·독고 경운·곽 대봉 등은 모두 이 적의 지휘를 받게 하고, 하북 여러 주의 조세는 모두 요동으로 보내 군사용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二十六年, 秋九月, <李勣>拔<新城>, 使<契苾何力>守之. <勣>初渡<遼>, 謂諸將曰: "<新城>, <高句麗>西邊要害, 不先得之, 餘城未易取也." 遂攻之. 城人<師夫仇>等, 縛城主, 開門降. <勣>引兵進擊, 一十六城皆下. <龐同善>·<高侃>尙在<新城>, <泉男建>遣兵襲其營, 左武衛將軍<薛仁貴>, 擊破之. <侃>進至<金山>, 與我軍戰敗. 我軍乘勝逐北, <薛仁貴>引兵橫擊之, 殺我軍五萬餘人, 拔<南蘇>·<木 >·<蒼 >三城, 與<泉男生>軍合. <郭待封>以水軍, 自別道, 趣<平壤>. <勣>遣別將<馮師本>, 載糧仗以資之, <師本>舡破失期, <待封>軍中飢窘. 欲作書與<勣>, 恐爲他所得, 知其虛實, 乃作離合詩, 以與<勣>. <勣>怒曰: "軍事方急, 何以詩爲? 必斬之." 行軍管記通事舍人<元萬頃>, 爲釋其義, <勣>乃更遣糧仗赴之. <萬頃>作檄文曰: "不知守<鴨 >之險?" <泉男建>報曰: "謹聞命矣." 卽移兵據<鴨 津>, <唐>兵不得度. <高宗>聞之, 流<萬頃>於<嶺南>. < 處俊>在<安市城>下, 未及成列, 我軍三萬掩至, 軍中大駭. <處俊>據胡床, 方食乾 , 簡精銳, 擊敗之.

26년 가을 9월, 이 적이 신성을 함락시키고, 설필 하력으로 하여금 그곳을 수비하게 하였다. 이 적이 처음에 요수를 건너올 때 모든 장수들에게 말했다.
"신성은 고구려 서쪽 변경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이곳을 먼저 얻지 않으면 다른 성을 쉽게 빼앗을 수 없다."
그는 드디어 신성을 공격하였다. 신성 사람 사부구 등이 성주를 결박하여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였다. 이 적이 군사를 이끌고 계속 진격하자 16개 성이 모두 항복하였다. 이 때 방 동선과 고 간이 아직 신성에 있었으므로, 천 남건이 군사를 보내 그들의 병영을 습격하였다. 좌무위 장군 설 인귀가 우리 군사를 격파하였다. 고 간이 금산으로 나와서 우리 군사와 싸워 패배하였다. 우리 군사는 승세를 타고 패배한 군사를 추격하였다. 설 인귀가 군사를 이끌고 측면을 공격하여 우리 군사 5만여 명을 죽이고, 남소·목저·창암 등 3성을 함락시킨 후, 천 남생의 군사와 합세하였다.
곽 대봉은 수군을 이끌고 다른 길을 통하여 평양으로 왔다. 이 적은 별장 풍사본을 파견하여 곽 대봉에게 군량과 병기를 공급케 하였는데, 사본의 배가 파괴되어 약속 기일을 놓쳤으므로 대봉의 진영에서 군사들이 굶주렸다. 이에 따라 그가 이 적에게 편지를 보내려다가, 만일의 경우 적에게 발견되어 내부의 허실이 알려질까 두려워 이합시를 지어서 이 적에게 보냈다. 이 적이 이를 보고 노하여 말하기를 "군사의 일이 바야흐로 위급한데 시가 도대체 무엇인가? 필히 목을 베겠다."라고 하였다. 행군 관기 통사 사인 원 만경이 그 시의 뜻을 해석하여 주었다. 이 적은 그 때서야 다시 군량과 병기를 대봉에게 보냈다. 만경이 격문을 써서 말하기를 "압록의 요충지를 지킬 줄 모르는가?"라고 하였다. 천 남건이 회보하기를 "삼가 명령을 듣겠다"라 하고, 즉시 군사를 옮겨 압록강 나루에 진을 쳤다. 이에 따라 당 나라 군사가 건너오지 못하였다. 고종은 이 말을 듣고 만경을 영남으로 유배하였다. 학 처준은 안시성 아래에 있었다. 그가 아직 군사 대열을 짓지 못하였을 때, 우리 군사 3만 명이 엄습하니 그 군사들이 크게 당황하였다. 처준이 의자에 앉아서 한참 마른 밥을 먹다가, 정예 군사를 선발하여 우리 군사를 격파하였다.

○二十七年, 春正月, 以右相<劉仁軌>, 爲<遼東>道副大摠管, < 處俊>·<金仁問>副之. 二月, <李勣>等, 拔我<扶餘城>. <薛仁貴>旣破我軍於<金山>, 乘勝, 將三千人, 將攻<扶餘城>, 諸將以其兵少, 止之. <仁貴>曰: "兵不必多, 顧用之何如耳." 遂爲前鋒以進, 與我軍戰, 勝之, 殺獲我軍, 遂拔<扶餘城>, <扶餘川{扶餘州}> 中四十餘城, 皆請服. 侍御史<賈言忠>奉使, 自<遼東>還. 帝問: "軍中云何?" 對曰: "必克. 昔, 先帝問罪, 所以不得志者, 虜未有 也. 諺曰: '軍無媒, 中道回.' 今<男生>元{兄} 弟  , 爲我嚮導, 虜之情僞, 我盡知之, 將忠士力, 臣故曰必克. 且<高句麗>『秘記』曰: '不及九百年, 當有八十大將, 滅之.' <高>氏自<漢>有國, 今九百年, <勣>年八十矣. 虜仍 饑, 人常{相} 掠賣, 地震裂, 狼狐入城,  穴於門, 人心危駭, 是行不再擧矣." <泉男建>復遣兵五萬人, 救<扶餘城>, 與<李勣>等, 遇於<薛賀水>, 合戰, 敗死者三萬餘人. <勣>進攻<大行城>. 夏四月, 彗星見於畢·昴之間. <唐><許 宗{許敬宗}> 曰: "彗見東北, <高句麗>將滅之兆也." 秋九月, <李勣>拔<平壤>. <勣>旣克<大行城>, 諸軍出他道者, 皆與<勣>會, 進至<鴨 >柵. 我軍拒戰, <勣>等敗之, 追奔二百餘里, 拔<辱夷城>, 諸城遁逃及降者, 相繼. <契苾何力>先引兵, 至<平壤城>下, <勣>軍繼之, 圍<平壤>月餘. 王<臧{藏} >遣<泉男産>, 帥首領九十八人, 持白幡, 詣<勣>降, <勣>以禮接之. <泉男建>猶閉門拒守, 頻遣兵出戰, 皆敗. <男建>以軍事委浮圖<信誠>. <信誠>與小將<烏沙>·<饒苗>等, 密遣人詣<勣>, 請爲內應. 後五日, <信誠>開門, <勣>縱兵登城, 鼓 焚城. <男建>自刺不死. 執王及<男建>等. 冬十月, <李勣>將還, <高宗>命: 先以王等獻于<昭陵>, 具軍容, 奏凱歌, 入京師, 獻于大廟. 十二月, 帝受 于<含元殿>. 以王政非己出, 赦以爲司平太常伯員外同正; 以<泉男産>爲司宰少卿; 僧<信誠>爲銀靑光祿大夫; <泉男生>爲右衛大將軍. <李勣>已下, 封賞有差, <泉男建>流<黔州>. 分五部, 百七十六城, 六十九萬餘戶, 爲九都督府, 四十二州, 百縣, 置安東都護府於<平壤>, 以統之. 擢我將帥有功者, 爲都督·刺史·縣令, 與<華>人 理. 以右威衛大將軍<薛仁貴>, 檢校安東都護, 摠兵二萬人, 以鎭撫之. 是<高宗><摠章>元年戊辰歲也. 二年, 己巳二月, 王之庶子<安勝>, 率四千餘戶, 投<新羅>. 夏四月, <高宗>移三{二} 萬八千三百戶於<江>·<淮>之南, 及<山南>·<京西>諸州空曠之地. 至<咸亨>元年庚午歲, 夏四月, <劒牟岑>欲興復國家, 叛<唐>, 立王外孫<安舜>[『羅紀』作勝.]爲主. <唐><高宗>遣大將軍<高侃>, 爲<東州>道行軍摠管, 發兵討之. <安舜>殺<劒牟岑>, 奔<新羅>. 二年辛未歲, 秋七月, <高侃>破餘衆於<安市城>. 三年壬申歲, 十二月, <高侃>與我餘衆, 戰于<白氷山{白水山}> , 破之. <新羅>遣兵救我, <高侃>擊克之, 虜獲二千人. 四年癸酉歲, 夏閏五月, <燕山道>管大將軍<李謹行>, 破我人於<瓠瀘河>,  獲數千人. 餘衆皆奔<新羅>. <儀鳳>二年丁丑歲, 春二月, 以降王爲<遼東州>都督, 封<朝鮮>王, 遣歸<遼東>, 安輯餘衆. 東人先在諸州者, 皆遣與王俱歸, 仍移安東都護府於<新城>, 以統之. 王至<遼東>, 謀叛, 潛與<靺鞨>通. <開曜{開耀}> 元年, 召還< 州>, 以<永淳>初死. 贈衛尉卿, 詔送至京師, 葬< 利>墓左, 樹碑其阡, 散徙其人於<何南{河南}> ·< 右>諸州. 貧者留<安東城>傍舊城, 往往沒於<新羅>, 餘衆散入<靺鞨>及<突厥>. <高>氏君長遂絶. <垂拱>二年, 以降王孫<寶元>, 爲<朝鮮郡>王, 至<聖曆>初, 進左鷹揚衛大將軍, 更封忠誠國王, 賜{使} 統安東舊部, 不行. 明年, 以降王子<德武>, 爲安東都督, 後稍自國, 至<元和>十三年, 遣使入<唐>, 獻樂工.
○論曰: <玄 >·<樂浪>, 本<朝鮮>之地, <箕子>所封. <箕子>敎其民, 以禮義·田蠶·織作, 設禁八條. 是以其民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 飮食以 豆, 此仁賢之化也. 而又天性柔順, 異於三方. 故<孔子>悼道不行, 欲浮 於海以居之, 有以也夫. 然而『易』之 "爻, 二多譽, 四多懼, 近也." <高句麗>自<秦>·<漢>之後, 介在<中國>東北隅, 其北隣, 皆天者有司, 亂世則英雄特起,  竊名位者也, 可謂居多懼之地, 而無謙巽之意, 侵其封 以讐之, 入其郡縣以居之. 是故兵連禍結, 略無寧歲. 及其東遷, 値<隋>·<唐>之一統, 而猶拒詔命以不順, 囚王人於土室. 其頑然不畏如此, 故屢致問罪之師. 雖或有時設奇以陷大軍, 而終於王降, 國滅而後止. 然觀始末, 當其上下和, 衆庶睦, 雖大國, 不能以取之, 及其不義於國, 不仁於民, 以興衆怨, 則崩潰而不自振. 故<孟子>曰: "天時·地利, 不如人和." 『左』氏曰: "國之興也, 以福; 其亡也, 以禍. 國之興也, 視民如傷, 是其福也; 其亡也, 以民爲土芥, 是其禍也." 有味哉, 斯言也! 夫然則凡有國家者, 縱暴吏之驅迫, 强宗之聚斂, 以失人心, 雖欲理而不亂, 存而不亡, 又何異强酒而惡醉者乎?
三國史記卷二十二.

李丙燾. [冊府元龜].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唐書].趙炳舜. 『三國史節要』.허성도.李丙燾. [唐會要].李丙燾. [羅紀]. [資治通鑑].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唐書].
27년 봄 정월, 당 나라 고종은 우상 유 인궤를 요동도부대총관으로 삼고, 학 처준과 김 인문 등으로 하여금 그를 보좌하게 하였다.
2월, 이 적 등이 우리 부여성을 점령하였다.
설 인귀는 이미 금산에서 우리 군사를 격파하여, 승세를 타고 군사 3천 명을 이끌어 부여성을 치려 하였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이 자기 편 군사가 적다고 하며 이를 중지하기를 권하였다. 인귀가 말했다.
"병력은 반드시 많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어떻게 쓰는가에 달린 것이다."
그는 마침내 스스로 선봉이 되어 우리 군사와 싸워 이기고, 우리 군사를 죽이고 사로잡았다. 그가 또한 부여성을 점령하자, 부여천 안에 있는 40여 성이 모두 항복하기를 요청하였다. 시어사 이 언충이 임무를 받들고 요동에서 귀국하였다. 고종은 "군대 내부 상황이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그가 대답하였다.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이전에 선제께서 고구려에 죄를 물었을 때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은, 적에게 빈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속담에 '군대에도 중매잡이가 없으면 중도에 돌아선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남생이 형제끼리 싸워 우리의 향도가 됨으로써, 적의 내부 상황을 우리가 모두 알고 있으며, 또한 장수들은 충성스럽고 군사들은 힘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비기]에는 '9백년이 되기 전에 80대장이 있어 고구려를 멸망시킨다'라는 말이 있는데, 고씨가 한 나라 때 나라를 세워 지금 9백 년이 되었고, 이 적의 나이가 80입니다. 적들은 거듭 흉년이 들고, 백성들은 항상 수탈을 당하고 팔려갔으며, 지진으로 땅이 갈라지고, 이리와 여우가 성에 들어오고, 두더지가 문에 구멍을 뚫으며, 인심이 흉흉하니, 이번 원정이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천 남건이 부여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다시 군사 5만 명을 보냈는데, 설하수에서 이 적 등과 조우하여 싸우다가 패하여 사망자가 3만여 명이나 되었다. 이 적은 대행성으로 진격하였다.
여름 4월, 혜성이 필성과 묘성 사이에 나타났다. 당 나라 허 경종이 "혜성이 동북방에 보이는 것은 고구려가 장차 멸망할 징조이다"라고 말하였다.
가을 9월, 이 적이 평양을 점령하였다. 이 적이 이미 대행성에서 승리하자, 다른 도로 출동하였던 제군이 모두 이 적과 만나 압록책으로 진군하여 왔다. 우리 군사가 대적하여 싸우다가 이 적 등에게 패배하였고, 이 적 등은 2백여 리를 추격해와서 욕이성을 함락시켰다. 여러 성에서 도망하고 항복하는 자가 연이었다. 설필 하력이 먼저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 밖에 도착하고, 이 적의 군사가 뒤따라 와서 한 달이 넘도록 평양을 포위하였다.
보장왕 장이 천 남산으로 하여금 수령 98명을 거느리고 백기를 들고 이 적에게 항복하게 하였다. 이 적은 예를 갖추어 접대하였다. 그러나 천 남건은 오히려 성문을 닫고 수비하며 대항하였다. 그는 자주 군사를 출동시켜 싸웠으나 그때마다 패배하였다. 남건은 승려 신성에게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다. 신성은 소장 오사·요묘 등과 함께 이 적에게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내응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5일 뒤에 신성이 성문을 열었다. 이 적은 군사를 풀어 성위에 올라가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불을 지르게 하였다. 남건은 스스로 칼을 들어 자신을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당 나라 군사가 왕과 남건 등을 붙잡았다.
겨울 10월, 이 적이 귀국하려 하자, 고종이 그에게 먼저 고구려의 왕 등을 소릉에 인사시킨 후, 군용을 갖추어 개선가를 부르며 서울로 들어와 다시 태묘에 인사시키도록 명령하였다.
12월, 고종이 함원전에서 포로를 전해 받았다. 고구려왕은 정치를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하여 죄를 용서하여 사평태상백원외동정으로 삼았다. 그리고 천 남산은 사재 소경, 승려 신성은 은청 광록대부, 천 남생은 우위 대장군으로 삼았다. 이 적 이하 여러 사람들에게는 벼슬과 상을 정도에 따라 주었다. 천 남건은 검주로 유배시켰다. 고구려 지역의 5부, 1백76성, 69만여 호를 나누어 9도독부, 42주, 1백 현으로 만들고, 평양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여 이들을 통치하게 하였다. 우리 장수들 중에서 공로가 있는 자들을 발탁하여 도독·자사·현령으로 삼아, 중국인들과 함께 정치에 참여하게 하였다. 우위위 대장군 설 인귀를 검교안동도호를 삼아,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이 지역을 진무케 하였다. 이 때가 고종 총장 원년 무진년이었다.
2년 기사 2월, 왕의 서자 안승이 4천여 호를 인솔하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여름 4월, 고종이 3만 8천3백 호를 강·회의 남쪽과 산남·경서 등지에 있는 모든 주의 빈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함형 원년 경오 여름 4월, 검모잠이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하여, 당 나라를 배반하고, 왕의 외손 안순[[신라본기]에는 승으로 되어있다.]을 임금으로 세웠다. 당 고종이 대장군 고 간을 동주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이를 토벌케 하였다. 안순은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도주하였다.
2년 신미 가을 7월, 고 간이 안시성에서 우리의 남은 군사를 격파하였다.
3년 임신 12월, 고 간이 우리의 남은 군사와 백빙산에서 싸워 우리 군사를 격파하니, 신라에서 군사를 보내 우리를 구원하였다. 그러나 고 간이 이를 다시 격파하여 2천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갔다.
4년 계유 여름 윤 5월, 연산도총관대장군 이 근행이 호로하에서 우리 군사를 격파하고 수천 명을 사로잡았다. 남은 군사들은 모두 신라로 도주하였다.
의봉 2년 정축 봄 2월, 항복한 고구려의 보장왕을 요동주 도독으로 삼고 조선왕으로 봉하였다. 그리고 그를 요동으로 돌려 보내 남은 백성들을 수습하여 안정시키게 하였다. 이 때, 동방 사람으로서 이전부터 여러 주에 살고있던 자들을 모두 왕과 함께 돌아가게 하였다. 안동 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겨 통할하게 하였다. 왕은 요동에 도착하여 당 나라에 대항하고자 비밀리에 말갈과 내통하였다.
개요 원년, 왕이 앙주로 소환되었다가 영순 초에 사망하였다. 고종이 그에게 위위경을 추증하고, 조서를 내려 영구를 서울로 오게 하여 힐리의 무덤 왼편에 장례를 지냈다. 묘 앞에 비를 세웠다. 그 백성은 하남·농우의 여러 주에 분산 거주케 하였다. 그 가운데 가난한 자들은 안동성 부근의 옛성에 머무르게 하였다. 그러나 일부는 신라로 도주하고, 남은 사람들은 흩어져 말갈과 돌궐로 갔다.
마침내 고씨의 왕통이 끊어졌다.
수공 2년, 항복한 왕의 손자 보원을 조선군왕으로 삼았다가, 성력 초에 좌응양위 대장군으로 승진시키고, 다시 충성국왕으로 봉하여 안동의 구부를 주어 통치하게 하였으나 부임하지는 않았다. 이듬해에, 항복한 왕의 아들 덕무를 안동 도독으로 삼았는데, 후에 조금씩 스스로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원화 13년에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악공을 바쳤다.
저자의 견해 : 현토와 낙랑은 원래 조선의 국토로서 기자가 봉해졌던 곳이다. 기자는 백성들에게 예의와 농사와 누에치기와 베 짜는 법을 가르치고, 8조의 금법을 만들었다. 이리하여 이곳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하지 않고, 대문을 닫지 않고, 부녀들이 정조와 신의를 지켜 음란하지 않고, 음식을 먹을 때 그릇을 사용하였다. 이는 어질고 현명한 사람의 교화가 미친 탓이었다. 또한 그들은 서·남·북방의 오랑캐들과는 달리 천성이 유순하였다. 이리하여 공자는 자기의 도가 중국에서 행하여지지 않음을 슬퍼하고, 바다에 배를 띄워 이곳에 살고자 하였으니, 이 또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역의 괘가 효이(爻二)를 다예(多譽), 효사(爻四)를 다구(多懼)라 한 것은 군위(君位)에 가깝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진·한 이후로 중국의 동북방의 한 쪽에 끼어 있었다. 북쪽 인근 지역들은 모두 천자가 관리를 보내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혼란한 시기에는 영웅들이 나타나 참람되게도 황제의 이름과 지위를 차지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실로 다구(多懼)의 지역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는 겸양하려는 생각없이, 천자의 영역을 침노하여 원수를 맺었으며, 천자의 군현에 들어가 살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전쟁이 계속되고 화근이 맺어졌으므로 평안한 해가 거의 없었다.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때는 수·당이 중국의 통일을 이루었던 시기에 해당한다. 이 때 고구려는 오히려 불손하게도 중국의 조서와 명령을 거역했으며, 천자의 사신을 토방에 가두기도 하였다. 고구려는 이와 같이 고집스럽고 겁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 번이나 죄를 묻는 정벌의 군사를 부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비록 어떤 시기에는 기묘한 계책으로 대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던 적도 있었으나, 결국은 왕이 항복하고 나라가 멸망하였다. 고구려 전체의 역사를 살펴보면, 임금과 신하가 화평하고 백성들이 서로 화목했을 때는, 비록 대국이라 할지라도 고구려를 빼앗지 못하였지만, 나라에 정의가 사라지고, 군주가 백성들을 사랑하지 않아 그들의 원성이 일어난 뒤에는, 나라가 붕괴되어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맹자는 "전쟁의 승리에 있어서, 시기의 이로움과 지형의 이로움이 인심의 화목함만 못하다."라고 말했으며, 좌씨는 "국가는 복으로 흥하고 화로 망한다. 나라가 흥하려면, 군주가 자기 몸에 난 상처를 보듯이 백성을 보살펴야 하나니, 이것이 복이다. 나라가 망하려면 백성을 흙먼지 같이 여기나니 이것이 화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렇다면 무릇 나라를 맡은 군주들이 횡포한 관리들을 풀어놓아 백성을 구박하게 하며, 권문세가들로 하여금 가혹한 수탈을 일삼게 하여 인심을 잃게 되면, 비록 정치를 잘하여 혼란을 제거하고, 나라를 유지하여 망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할지라도, 이것이 또한 억지로 술을 권하면서도 취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삼국사기 권 제 22 끝

                  출처:진갑곤의 한자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