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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삼국사기 고국려 본기 (원문+한글) 권 제 21

 

三國史記卷第二十一 삼국사기 권 제 21

高句麗本紀第九 <寶臧王{寶藏王}> 上.

고구려본기 제 9 보장왕(상)
 
허성도.『三國史記』 목록의 21권조와 22권조, 『三國史記』 21卷 高句麗本紀 9권의 제목과 본문에는 '寶臧王'으로 되어 있으나, 『三國史記』 22卷 高句麗本紀 10권의 제목에는 '寶藏王'으로 되어 있다. 趙炳舜은 이를 근거로 ''寶臧王'이 옳다고 보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國史大事典 등에 입각하여 '寶藏王'으로 기록한다.

   <寶藏王(上)  보장왕(상)>

○王, 諱<臧{藏} >[或云<寶臧{寶藏} >.], 以失國故無諡. <建武王>弟<大陽王>之子也. <建武王>在位第二十五年, <盖蘇文{蓋蘇文} >弑之, 立<臧>繼位. <新羅>謀伐<百濟>, 遣<金春秋>乞師, 不從.

허성도.허성도.李丙燾.
왕의 이름은 장[혹은 보장이라고도 한다.]이다. 그는 나라를 잃은 까닭에 시호가 없다. 그는 건무왕의 아우인 대양왕의 아들이다. 건무왕 재위 25년에 개소문이 왕을 죽이고, 장을 세워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신라가 백제를 치기 위하여 김 춘추를 보내 구원병을 청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았다.

○二年, 春正月, 封父爲王. 遣使入<唐>朝貢. 三月, <蘇文>告王曰: "三敎譬如鼎足, 闕一不可. 今儒釋 興, 而道敎未盛, 非所謂備天下之道術者也. 伏請遣使於<唐>, 求道敎以訓國人." 大王深然之, 奉表陳請. <太宗>遣道士<叔達>等八人, 兼賜<老子>『道德經』. 王喜, 取僧寺館之. 閏六月, <唐><太宗>曰: "<蓋蘇文>弑其君, 而專國政, 誠不可忍. 以今日兵力, 取之不難, 但不欲勞百姓, 吾欲使<契丹>·<靺鞨>擾之, 何如?" <長孫無忌>曰: "<蘇文>自知罪大, 畏大國之討, 嚴設守備. 陛下姑爲之隱忍, 彼得以自安, 必更驕惰, 愈肆其惡, 然後討之, 未晩也." 帝曰: "善." 遣使持節備禮冊命, 詔曰: "懷遠之規, 前王令典, 繼世之義, 列代舊章. <高句麗>國王<臧{藏} >, 器懷韶{昭} 敏, 識宇詳正, 早習禮敎, 德義有聞. 肇承藩業, 誠款先著, 宜加爵命, 允玆故實, 可上柱國<遼東郡>公{王} <高句麗>王." 秋九月, <新羅>遣使於<唐>, 言: <百濟>攻取我四十餘城, 復與<高句麗>連兵, 謀絶入朝之路. 乞兵救援. 十五日, 夜明不見月, 衆星西流.

허성도.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資治通鑑]. [冊府元龜].
2년 봄 정월, 왕이 자기의 아버지를 왕으로 봉하였다.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3월, 개소문이 왕에게 말했다.
"유교·불교·도교의 삼교는, 솥의 다리에 비유되나니, 어느 하나도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유교와 불교는 함께 흥하고 있으나 도교가 성하지 않으니 천하의 도술을 모두 갖추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삼가 청하건대 당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구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치게 하소서."
왕이 이 말을 매우 옳게 여겨 당 나라에 표문을 올려 이 뜻을 알렸다. 태종이 도사 숙달 등 여덟 명을 보내고, 동시에 노자 도덕경을 주었다. 왕이 기뻐하며, 사찰에 그들의 숙소를 정해 주었다.
윤 6월, 당 나라 태종이 물었다.
"개소문은 자기 임금을 죽이고 국정을 휘두르고 있으니, 이는 실로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오늘 우리의 병력으로 고구려을 빼앗기는 어렵지 않으나, 다만 백성들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으니, 거란과 말갈로 하여금 그들을 치게 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장손 무기가 대답하였다.
"소문은 자기의 죄가 크다는 것을 알고, 우리가 토죄할가 두려워 견고한 수비를 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우선 참고 계시면 그는 방심하게 될 것이며, 또한 반드시 교만하고 나태해져서 그의 죄가 더욱 커질 것입니다. 이렇게 된 연후에 토벌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황제는 "옳다"라고 대답하고, 지절사를 보내 예를 갖추어 왕을 책봉하는 조칙을 주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방을 포섭하는 것은 선왕의 훌륭한 법도이며, 세대를 계승케 하는 것은 역대의 오래된 규칙이다. 고구려 국왕 장은 사람됨이 밝고 명민하며, 식견이 상세하고 바르며, 일찍부터 예교를 배워 덕망과 의리에 대한 칭송이 자자하였다. 이제 처음으로 번방의 왕위를 계승하여, 성실과 정성이 이미 드러나고 있으니, 마땅히 작위를 주어야 할 것이므로, 전례에 의하여 상주국 요동군공고구려왕으로 봉함이 가할 것이다."
가을 9월, 신라가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백제가 우리의 40여 성을 점령하고, 다시 고구려와 연합하여 조공하는 길을 막으려 한다."고 말하면서, 군사를 보내 구원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15일, 밤이 밝기는 하였으나 달이 보이지 않았으며, 뭇별들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三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帝命司農丞<相里玄奬>, 齎璽書賜王曰: "<新羅>委質國家, 朝貢不乏, 爾與<百濟>, 各宜 兵. 若更攻之, 明年發兵, 擊爾國矣." <玄奬>入境, <蓋蘇文>已將兵擊<新羅>, 破其兩城. 王使召之, 乃還. <玄奬>諭以勿侵<新羅>, <蓋蘇文>謂<玄奬>曰: "我與<新羅>, 怨隙已久. 往者, <隋>人入寇, <新羅>乘 , 奪我地五百里, 其城邑皆據有之. 自非歸我侵地, 兵恐未能已." <玄奬>曰: "旣往之事, 焉可追論? 今<遼東>諸城, 本皆<中國>郡縣, <中國>尙且不言, <高句麗>豈得必求故地?" 莫離支竟不從. <玄奬>還, 具言其狀. <太宗>曰: "<蓋蘇文>弑其君, 賊其大臣, 殘虐其民, 今又違我詔命, (+侵暴 國) 不可以不討." 秋七月, 帝將出兵,  <洪>·<饒>·<江>三州, 造舡四百 , 以載軍糧. 遣<營州>都督<張儉>等, 帥<幽>·<營>二都督兵, 及<契丹>·<奚>·<靺鞨>, 先擊<遼東>, 以觀其勢. 以大理鄕{大理卿} <韋挺>, 爲饋輸使, 自<河北>諸州, 皆受<挺>節度, 聽以便宜從事. 又命小卿<蕭銳>, 轉<河南>諸州糧入海. 九月, 莫離支貢白金於<唐>. <楮遂良>曰: "莫離支弑其君, 九夷所不容. 今將討之, 而納其金, 此 鼎之類也, 臣謂不可受." 帝從之. 使者又言: "莫離支遣官五十, 入宿衛." 帝怒謂使者曰: "汝曹皆事<高><武>, 有官爵, 莫離支弑逆, 汝曹不能復 , 今更爲之遊說, 以欺大國, 罪孰大焉?" 悉以屬大理. 冬十月, <平壤>雪{雨} 色赤. 帝欲自將討之, 召<長安>耆老, 勞曰: "<遼東>, 故<中國>地, 而莫離支賊殺其主, 朕將自行經略之. 故與父老納{約} , 子若孫從我行者, 我能 循之, 無容恤也." 則厚賜布粟. 群臣皆勸帝毋行. 帝曰: "吾知之矣, 去本以趣末; 捨高以取下; 釋近而之遠, 三者爲不祥, 伐<高句麗>, 是也. 然<蓋蘇文>弑君, 又戮大臣以逞, 一國之人, 延頸待救, 議者顧未亮耳." 於是, 北輸粟<營州>, 東儲粟<古大人城>. 十一月, 帝至<洛陽>. 前<宜州>刺史<鄭天璹>, 已致仕, 帝以其嘗從<隋><煬帝>伐<高句麗>, 召詣行在問之. 對曰: "<遼東>道遠, 糧轉艱阻, 東夷善守城, 不可猝下." 帝曰: "今日非<隋>之比, 公但聽之." 以刑部尙書<張亮>, 爲<平壤>道行軍大摠管, 帥<江>·<淮>·<嶺>·< >兵四萬, <長安>·<洛陽>募士三千, 戰艦五百 , 自<(+東)萊州> 泛海, 趣<平壤>. 又以太子詹事左衛率<李世勣>, 爲<遼東>道行軍大摠管, 帥步騎六萬, 及<蘭>·<河>二州降胡, 趣<遼東>. 兩軍合勢, 大集於<幽州>. 遣行軍摠管<江行本{姜行本}> ·少監<丘行淹>, 先督衆士, 造梯衝於<安羅山{安蘿山}> . 時, 遠近勇士應募, 及獻攻城器械者, 不可勝數. 帝皆親加損益, 取其便易. 又手詔諭天下: "以<高句麗><蓋蘇文>, 弑主虐民, 情何可忍? 今欲巡幸<幽>·< >, 問罪<遼>·<碣>, 所過營頓, 無爲勞費." 且言: "昔, <隋><煬帝>殘暴其下, <高句麗>王, 仁愛其民. 以思亂之軍, 擊安和之衆, 故不能成功. 今略言必勝之道有五: 一曰, 以大擊小; 二曰, 以順討逆; 三曰, 以理乘亂; 四曰, 以逸敵勞; 五曰, 以悅當怨, 何憂不克? 布告元元, 勿爲疑懼." 於是, 凡頓舍供備之具,  者太半. 詔諸軍及<新羅>·<百濟>·<奚>·<契丹>, 分道擊之.

李丙燾. [資治通鑑].『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唐書].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資治通鑑][冊府元龜].李丙燾. [資治通鑑].
3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황제가 사농승 상리 현장을 보내 왕에게 조서를 내려 말했다.
"신라는 인질을 보낸 나라이며 조공을 계속하는 나라이다. 그대와 백제는 군사를 철수하여야 한다. 만약 다시 신라를 공격하면, 내년에는 군사를 출동시켜 그대의 나라를 칠 것이다."
현장이 국경에 들어왔을 때, 개소문은 이미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여 두 성을 점령하였다. 왕이 사자를 보내 개소문을 소환하자, 그가 돌아왔다. 현장이 개소문에게 신라를 침공하지 말 것을 권유하자, 개소문이 현장에게 말했다.
"우리와 신라는 원한으로 사이가 벌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다. 지난 날 수 나라가 침입하였을 때, 신라는 그 기회를 노려 우리 땅 5백 리를 빼앗았고, 그 성읍을 모두 점거하고 있다. 그들이 스스로 우리의 빼앗긴 땅을 돌려 주지 않는다면 아마도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현장이 말했다.
"지난 일을 어찌 재론할 수 있겠는가? 지금 요동의 여러 성은 본래 중국의 군현이었지만 중국에서는 이를 따지지 않고 있는데 어찌 고구려만 반드시 옛 땅을 찾으려 하는가?"
그러나 막리지는 결국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현장이 귀국하여 이러한 실정을 모두 보고하니 태종이 말했다.
"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대신들을 해치고, 백성들을 학대하며, 이제는 또한 나의 명령을 듣지 않으니, 그를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가을 7월, 당 나라 태종은 군사를 출동시키기로 하고, 홍주·요주·강주의 3주에 명령하여 배 4백 척을 만들어 군량을 싣게 하고, 영주 도독 장 검 등을 파견하여 유주·영주의 두 도독의 군사와, 거란·해·말갈 등을 거느리고 먼저 요동을 공격하여 형세를 관찰하게 하였다. 대리경 위 정을 궤수사로 삼아서 하북의 여러 주를 모두 그의 지휘하에 두고, 그로 하여금 명령없이도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처하도록 하였다. 또한 소경 소예에게 명령하여 하남 여러 주의 양곡을 운반하여 해로로 들어오게 하였다.
9월, 막리지가 당 나라에 백금을 바쳤다. 저 수량이 말했다.
"막리지가 자기 임금을 시해한 죄는 동방의 모든 오랑캐들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를 토벌하려 하면서 금을 받는다면, 이는 곡정( 鼎)과 같은 것입니다. 이를 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황제가 그의 말을 따랐다. 고구려의 사신이 또한 "막리지가 관리 50명을 궁중 숙위로 보내려 한다"고 말하였다. 황제가 노하여 사신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모두 고구려의 건무를 섬겨 관작을 받았는데, 막리지가 임금을 죽여도 복수하지 않고, 이제 다시 그를 위하여 유세함으로써 대국을 속이려 하니 이보다 더 큰 죄가 있겠는가?"
황제는 말을 마치고 사신들을 모두 형관에게 맡겼다.
겨울 10월, 평양에 붉은 색의 눈이 내렸다.
당 나라 황제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치기 위하여, 수도 장안의 노인들을 초청하여 위로하며 말했다.
"요동은 옛날 중국의 국토이고, 또한 막리지가 그의 임금을 죽였으므로, 내가 직접 가서 그들을 다스리려 한다. 따라서 그대들에게 약속하건대, 나를 따라 종군하는 자손들은 내가 잘 위무할 것이니 근심하지 말라."
황제는 그들에게 옷감과 곡식을 후하게 주었다. 여러 신하들은 모두 황제가 원정에 참가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황제가 말했다.
"나도 알고 있다.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향하며, 높은 곳을 버리고 낮은 곳으로 나아가며, 가까운 곳을 버리고 먼 곳으로 가는 세 가지는 모두 상서로운 행위가 아니다. 고구려를 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임을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개소문이 임금을 죽였고, 또한 대신들을 함부로 도륙하고 있으니, 온 백성들이 고개를 들고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 나에게 가지 않기를 권하는 사람들은 이를 모르고 있을 뿐이다."
이리하여 북으로는 영주로 군량을 수송케 하고, 동으로는 고대인성에 군량을 비축하였다.
11월, 황제가 낙양에 이르렀다. 전 의주 자사 정 천숙은 이미 관직을 물러나 있었다. 황제는 그가 이전에 수 양제를 따라 고구려 정벌에 참가한 적이 있다하여, 황제가 있는 곳으로 불러 상황을 물었다. 그가 대답하였다.
"요동은 길이 멀어서 군량의 수송에 문제가 많으며, 동이 사람들은 성을 잘 수비하기 때문에 조기에 항복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지금은 수 나라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대는 나의 의견을 따르라."
황제는 형부상서 장 량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강·회·영·협의 군사 4만 명과 장안·낙양에서 모집한 군사 3천 명, 전함 5백 척을 거느리고 내주로부터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진군하도록 계획하였다. 또한 태자첨사좌위솔 이 세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보병과 기병 6만 명과 난주·하주의 항복한 오랑캐들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가도록 계획하였다. 두 부대는 합세하여 유주에 대대적으로 집합하였다. 황제는 행군총관 강 행본과 소감 구 행엄으로 하여금 우선 여러 군사들을 감독하여 안라산에서 운제와 충거를 만들게 하였다. 이 때 원근의 용사들이 헤아릴 수 없이 모였으며, 성곽 공격용 기자재를 바치는 자들도 셀 수 없이 많았다.
황제가 이 전투 기자재들을 직접 살피고, 그 중 편리한 것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친필로 천하에 조서를 발표하였다.
"고구려의 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백성을 학대하니 인정상 이를 어찌 참을 수 있으랴? 이제 유주·계주 등지를 순행하며, 요동과 갈석에서 죄를 물으려 하나니, 행군 도중의 군영이나 숙소에서는 백성에게 수고를 끼치거나 백성의 재물을 낭비하지 말라."
조서는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전에 수 양제는 부하들에게 잔인하고 포악하였으며, 고구려왕은 백성들을 사랑하였다. 이는, 반란을 도모하는 군대를 거느려 평화로운 무리를 공격한 격이므로 수 양제가 성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필승의 조건이 다섯 가지가 있다. 그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는 큰 것으로 작은 것을 치는 것이며, 둘째는 순리로 반역을 토벌하는 것이며, 세째는 정돈된 나라로 어지러운 틈을 이용하는 것이며, 네째는 편안한 군사로 피로한 군사를 대적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기쁨에 충만된 군사로 원한에 쌓인 군사와 맞서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어찌 승리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겠는가? 백성들에게 포고하노니, 의심하거나 두려워 하지 말라!"
이에 모든 숙소, 공급과 설비에 따르는 도구를 절반이나 삭감하였다. 모든 군단과 신라·백제·해·거란 등에 명하여 길을 나누어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四年, 春正月, <李世勣>軍, 至<幽州>. 三月, 帝至<定州>, 謂侍臣曰: "<遼東>本<中國>之地, <隋>氏四出師, 而不能得. 朕今東征, 欲爲<中國>報子弟之 , <高句麗>雪君父之恥耳. 且方隅大定, 唯此未平, 故及朕之未老, 用士大夫餘力, 以取之." 帝發<定州>, 親佩弓矢, 手結雨衣於鞍後. <李世勣>軍發<柳城>, 多張形勢, 若出<懷遠鎭>者, 而潛師北趣甬道, 出我不意. 夏四月, <世勣>自<通定>, 濟<遼水>, 至<玄 >, 我城邑大駭, 皆閉門自守. 副大摠管江夏王<道宗>, 將兵數千, 至<新城>, 折衝都尉<曹三良>, 引十餘騎, 直壓城門, 城中驚(+懼) , 無敢出者. <營州>都督<張儉>, 將胡兵爲前鋒, 進度<遼水>, 趨<建安城>, 破我兵, 殺數千人. <李世勣>·江夏王<道宗>, 攻<盖牟城>,  {拔} 之, 獲一{二} 萬人·糧十萬石, 以其地爲<盖州>. <張亮>帥舟師, 自<東萊>度海, 襲<卑沙城>. 城四面懸絶, 惟西門可上. <程名振>引兵夜至, 副摠管<王大度>先登. 五月, 城陷, 男女八千口沒焉. <李世勣>進至<遼東城>下. 帝至<遼>澤, 泥 二百餘里, 人馬不可通. 將作大匠<閻立德>, 布土作橋, 軍不留行, 度澤東. 王發<新城>·<國內城>步騎四萬, 救<遼東>. 江夏王<道宗>, 將四千騎逆之, 軍中皆以爲衆寡懸絶, 不若深溝高壘, 以待車駕之至. <道宗>曰: "賊恃衆有輕我心, 遠來疲頓, 擊之必敗. 當淸路以待乘輿, 乃更以賊遺君父乎?" 都尉<馬文擧>曰: "不遇勍敵, 何以顯壯士?" 策馬奔擊, 所向皆靡. 衆心稍安, 旣合戰, 行軍摠管<張君乂>退走, <唐>兵敗 . <道宗>收散卒, 登高而望見, 我軍陣亂, 與驍騎數千衝之. <李世勣>引兵助之, 我軍大敗, 死者千餘人. 帝度<遼水>, 撤橋以堅上{士} 卒之心, 軍於<馬首山>. 勞賜江夏王<道宗>, 超拜<馬文擧>中郞將, 斬<張君乂>. 帝自將數百騎, 至<遼東城>下, 見士卒負土塡塹, 帝分其尤重者, 於馬上持之, 從官爭負土置城下. <李世勣>攻<遼東城>, 晝夜不息, 旬有二日. 帝引精兵會之, 圍其城數百重{里} , 鼓 聲振天地. 城有<朱蒙>祠, 祠有鎖甲 矛. 妄言前<燕>世天所降. 方圍急, 飾美女以婦神, 巫言: "<朱蒙>悅, 城必完." <勣>列砲車, 飛大石過三百步, 所當輒潰. 吾人積木爲樓, 結 罔{網} , 不能拒, 以衝車撞 屋碎之. 時, <百濟>上金 鎧, 丈{又} 以玄金爲文鎧, 士被以從. 帝與<勣>會, 甲光炫日. 南風急, 帝遣銳卒, 登衝竿之未{末} ,  其西南樓. 火延燒城中, 因揮將士登城. 我軍力戰不克, 死者萬餘人. 見捉勝兵萬餘人, 男女四萬口, 糧五十萬石, 以其城爲<遼州>. <李世勣>進攻<白巖城{白崖城}> 西南, 帝臨其西北. 城主<孫代音{孫伐音}> , 潛遣腹心請降, 臨城捉{投} 刀鉞爲信,  {曰} : "奴願降, 城中有不從者." 帝以<唐>幟與其使曰: "必降者, 宜立之城上." <代音>立幟, 城中人以爲<唐>兵已登城, 皆從之. 帝之克<遼東>也, <白巖城>請降, 旣而中悔. 帝怒其反覆, 令軍中曰: "得城, 當悉以人物, 賞戰士." <李世勣>見帝將受其降, 帥甲士數十人, 請曰: "士卒所以爭冒矢石, 不顧其死者, 貪虜獲耳. 今城垂拔, 奈何更受其降, 孤戰士之心?" 帝下馬謝曰: "將軍言是也, 然縱兵殺人, 而虜其妻 , 朕所不忍. 將軍麾下有功者, 朕以庫物賞之, 庶因將軍贖此一城." <世勣>乃退, 得城中男女萬餘口, 臨水設幄, 受其降, 仍賜之食, 八十已上, 賜帛有差. 他城之兵在<白巖>者, 悉慰諭給糧仗, 任其所之. 先是, <遼東城>長史, 爲部下所殺, 其省事奉其妻子, 奔<白巖>. 帝憐其有義, 賜帛五匹, 爲長史造靈輿, 歸之<平壤>. 以<白巖城>爲<巖州>, 以<孫代音>爲刺史. 初, 莫離支遣<加尸城>七百人, 戍<盖牟城>, <李世勣>盡虜之. 其人請從軍自效. 帝曰: "汝家皆在<加尸>, 汝爲我戰, 莫離支必殺汝妻子. 得一人之力, 而滅一家, 吾不忍也." 皆稟賜遣之. 以<盖牟城>爲<蓋州>. 帝至<安市城>, 進兵攻之. 北部 薩<高延壽>·南部 薩<高惠眞>, 帥我軍及<靺鞨>兵十五萬, 救<安市>. 帝謂侍臣曰: "今爲<延壽>策有三. 引兵直前, 連<安市城>爲壘, 據高山之險, 食城中之粟, 縱<靺鞨>掠吾牛馬, 攻之不可猝下, 欲歸則泥 爲阻, 坐困吾軍, 上策也; 拔城中之衆, 與之宵遯, 中策
也; 不度智能, 來與吾戰, 下策也. 卿曹觀之, 彼必出下策, 成擒在吾目中矣." 時, 對盧<高正義>年老習事, 謂<延壽>日{曰} : "<秦>王內芟 雄, 外服戎狄, 獨立爲帝, 此命世之才. 今據{擧} 海內之衆而來, 不可敵也. 爲吾計者, 莫若頓兵不戰, 曠日持久, 分遣奇兵, 斷其糧道. 糧食旣盡, 求戰不得, 欲歸無路, 乃可勝." <延壽>不從, 引軍直進, 去<安市城>四十里. 帝恐其低徊不至, 命大將軍<阿史那杜 {阿史那社 }> , 將<突厥>千騎以誘之. 兵始交而僞走, <延壽>曰: "易與耳." 競進乘之, 至<安市城>東南八里, 依山而陣. 帝悉召諸將問計. <長孫無忌>對曰: "臣聞: '臨敵將戰, 必先觀士卒之情.' 臣適行經諸營, 見士卒聞<高句麗>至, 皆拔刀結 , 喜形於色. 此必勝之兵也. 陛下未冠, 身親行陣. 凡出奇制勝, 皆上稟聖謀, 諸將奉成 耳. 今日之事, 乞陛下指 ." 帝笑曰: "諸公以此見讓, 朕當爲諸公商度." 乃與<無忌>等, 從數百騎, 乘高望之, 觀山川形勢, 可以伏兵及出入之所. 我軍與<靺鞨>合兵爲陣, 長四十里. 帝望之, 有懼色. 江夏王<道宗>曰: "<高句麗>傾國以拒王師, <平壤>之守必弱. 願假臣精卒五千, 覆其本根, 則數十萬之衆, 可不戰而降." 帝不應. 遣使 <延壽>曰: "我以爾國强臣弑其主, 故來問罪, 至於交戰, 非吾本心. 入爾境, 芻粟不給, 故取爾數城, 俟爾國修臣禮, 則所失必復矣." <延壽>信之, 不復設備. 帝夜召文武計事, 命<李世勣>將步騎萬五千, 陣於西嶺, <長孫無忌>·<牛進達>, 將精兵萬一千, 爲奇兵, 自山北出於狹谷, 以衝其後, 帝自將步騎四千, 挾鼓角, 偃旗幟, 登山. 帝 諸軍, 聞鼓角, 齊出奮擊. 因命有司, 張受降幕於朝堂之側. 是夜, 流星墜<延壽>營. &日一{旦} 曰{日} , <延壽>等, 獨見<李世勣>軍少, 勒兵欲戰. 帝望見<無忌>軍塵起, 命作鼓角, 擧旗幟, 諸軍鼓  進. <延壽>等懼, 欲分兵禦之, 而其陣已亂. 會, 有雷電, <龍門>人<薛仁貴>, 著奇服, 大呼陷陣, 所向無敵, 我軍披靡. 大軍乘之, 我軍大潰, 死者三{二} 萬餘人. 帝望見<仁貴>, 拜遊擊將軍. <延壽>等將餘衆, 依山自固. 帝命諸軍圍之, <長孫無忌>悉撤橋梁, 斷其歸路. <延壽>·<惠眞>, 帥其衆三萬六千八百人, 請降, 入軍門, 拜伏請命. 帝簡 薩已下官長三千五百人, 遷之內地, 餘皆縱之, 使還<平壤>, 收<靺鞨>三千三百人, 悉坑之. 獲馬五萬匹·牛五萬頭·明光鎧萬領,  器械稱是. 更名所幸山, 曰<駐 山>. 以<高延壽>爲鴻 卿, <高惠眞>爲司農卿. 帝之克<白巖>也, 謂<李世勣>曰: "吾聞, <安市>城險而兵精, 其城主村{材} 勇, 莫離支之亂, 城守不服, 莫離支擊之, 不能下, 因而與之. <建安>兵弱而糧少, 若出其不意, 攻之必克. 公可先攻<建安>, <建安>下, 則<安市>在吾腹中. 此兵法所謂'城有所不攻者'也." 對曰: "<建安>在南, <安市>在北, 吾軍糧皆在<遼東>. 今踰<安市>, 而攻<建安>, 若<麗>人斷吾糧道, 將若之何? 不如先攻<安市>, <安市>下, 則鼓行而取<建安>耳." 帝曰: "以公爲將, 安得不用公策, 勿誤吾事!" <世勣>遂攻<安市>. <安市>人望見帝旗蓋, 輒乘城鼓 , 帝怒. <世勣>請克城之日, 男子皆坑之. <安市>人聞之, 益堅守, 攻久不下. <高延壽>·<高惠眞>請於帝曰: "奴旣委身大國, 不敢不獻其誠. 欲天子早成大功, 奴得與妻子相見. <安市>人顧惜其家, 人自爲戰, 未易猝拔. 今, 奴以<高句麗>十餘萬衆, 望旗沮潰, 國人膽破. <烏骨城> 薩老 , 不能堅守, 移兵臨之, 朝至夕克, 其餘當道小城, 必望風奔潰. 然後收其資糧, 鼓行而前, <平壤>必不守矣." 群臣亦言: "<張亮>兵在<沙城>, 召之, 信宿可至. 乘<高句麗> 懼, 倂力拔<烏骨城>, 度<鴨綠水>, 直取<平壤>, 在此擧矣." 帝將從之, 獨<長孫無忌>以爲天子親征, 異於諸將, 不可乘危 倖, 今<建安>·<新城>之虜衆, 猶十萬, 若回{向} <烏骨>, 皆 吾後, 不如先破<安市>, 取<建安>, 然後長驅而進, 此萬全之策也. 帝乃止. 諸將急攻<安市>. 帝聞城中  聲, 謂<世勣>曰: "圍城積久, 城中 {烟} 火日微, 今鷄 甚喧, 此必饗士, 欲夜出襲我, 宜嚴兵備之." 是夜, 我軍數百人,  城而下. 帝聞之, 自至城下, 召兵急擊. 我軍死者數十人
, 餘軍退走. 江夏王<道宗>, 督衆第{築} 土山於城東南隅, 侵逼其城. 城中亦增高其城, 以拒之. 士卒分番, 交戰日六七合. 衝車· 石, 壞其樓堞, 城中隨立木柵, 以塞其缺. <道宗>傷是{足} , 帝親爲之針. 築山, 晝夜不息, 凡六旬, 用功五十萬. 山頂去城數丈, 下臨城中. <道宗>使果毅<傅伏愛>, 將兵屯山頂, 以備敵. 山頹壓城, 城崩. 會, <伏愛>私離所部, 我軍數百人, 從城缺出戰, 遂奪據土山, 塹而守之. 帝怒, 斬<伏愛>以徇, 命諸將攻之, 三日不能克. <道宗>徒跣詣旗下, 請罪. 帝曰: "汝罪當死, 但朕以<漢><武>殺<王恢>, 不如<秦><穆>用<孟明>, 且有破<盖牟>·<遼東>之功, 故特赦汝耳." 帝以<遼>左早寒, 草枯水凍, 士馬難久留, 且糧食將盡,  班師. 先拔<遼>·<盖>二州戶口, 度<遼>, 乃耀兵於<安市城>下而旋, 城中皆屛跡不出. 城主登城拜辭, 帝嘉其固守, 賜 百疋, 以勵事君. 命<世勣>·<道宗>, 將步騎四萬爲殿, 至<遼東>度<遼水>. <遼>澤泥 , 車馬不通. 命<無忌>, 將萬人,  草塡道, 水深處, 以車爲梁, 帝自繫薪於馬 , 以助役. 冬十月, 帝至<蒲蒲{蒲溝}> 駐馬, 督塡道. 諸軍度<渤錯水>, 暴風雪, 士卒沾濕多死者.  燃火於道以待之. 凡 <玄 >·<橫山>·<盖牟>·<磨米>·<遼東>·<白巖>·<卑沙>·<夾谷>·<銀山>·<後黃>十城, 徙<遼>·<盖>·<巖>三州戶口, 入<中國>者七萬人. <高延壽>自降後, 常憤歎, 尋以憂死, <惠眞>竟至<長安>. <新城>·<建安>·<駐 >三大戰, 我軍及<唐>兵馬死亡者, 甚衆. 帝以不能成功, 深悔之. 嘆曰: "<魏徵>若在, 不使我有是行也."
○論曰: <唐><太宗>, 聖明不世出之君. 除亂比於<湯>·<武>, 致理幾於<成>·<康>. 至於用兵之際, 出奇無窮, 所向無敵. 而東征之功, 敗於<安市>, 則其城主, 可謂豪傑非常者矣. 而史失其姓名, 與<楊子>所云: "<齊>·<魯>大臣, 史失其名." 無異. 甚可惜也.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舊唐書]. [資治通鑑].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通鑑].李丙燾. [舊唐書].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兩唐書에는 '白崖城', [冊府元龜]와 [唐書] 및 [資治通鑑]에는 '白巖城'으로 되어 있음.李丙燾. [冊府元龜]와 兩唐書에는 '孫伐音'으로, [資治通鑑]에는 '孫代音'으로 되어 있다.趙炳舜. 『三國史節要』.今西龍.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資治通鑑].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4년 봄 정월, 이 세적의 군대가 유주에 도착하였다.
3월, 황제가 정주에 도착하여 시신들에게 말했다.
"요동은 본래 중국의 국토인데, 수 나라가 네 번이나 군사를 출동시켰으나 이를 회복하지 못하였다. 내가 지금 동방을 정벌하는 것은, 중국을 위해서는 전사한 자제들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며, 고구려를 위해서는 죽은 임금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일 뿐이다. 또한 사방이 평정되었는데, 오직 고구려만이 평정되지 않았으니, 내가 늙기 전에 사대부의 여력을 빌어 이 땅을 찾으려는 것이다."
황제가 정주를 떠나면서 직접 활과 화살을 차고, 안장 뒤에 비옷을 자기 손으로 매달았다. 이 세적의 군사는 유성을 떠나면서, 형세를 과장하여 마치 회원진을 향하는 것으로 위장하였다. 그리고 비밀리에 북쪽 샛길로 진군하여, 우리가 예상치 못하던 곳으로 진군하였다.
여름 4월, 이 세적이 통정에서 요수를 건너 현토에 이르렀다. 우리 성읍에서는 크게 놀라 모두 성문을 닫고 수비태세로 들어갔다. 부대총관 강하왕 도종은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신성에 이르렀고, 절충도위 조 삼량은 기병 10여 명을 데리고 직접 성문을 위압하였다. 성 안 사람들이 놀라서 감히 나오려는 자가 없었다.
영주 도독 장 검이 오랑캐 군사를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요수를 건너 건안성으로 와서, 우리 군사를 격파하고 수천 명을 죽였다. 이 세적과 강하왕 도종이 개모성을 쳐서 빼앗고, 1만 명을 생포하였으며, 양곡 10만 석을 탈취한 후, 개모성을 개주로 개칭하였다. 장 량은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로부터 바다를 지나 비사성을 습격하였다. 성은 사면이 절벽으로 되어있고, 다만 서문으로만 오를 수 있었다. 이 때 정 명진이 군사를 데리고 밤에 도착하였는데, 부총관 왕 대도가 먼저 성에 올랐다.
5월, 성이 함락되고 남녀 8천 명이 죽었다. 이 세적이 요동성 아래까지 진격하였다. 황제는 요의 늪 지대에 이르렀는데, 진흙이 2백여 리나 펼쳐져 있어 사람과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장작 대장 염 입덕이 흙을 퍼부어 다리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군사들이 행군을 멈추지 않고 늪 지대 동쪽으로 통과하였다. 왕이 신성과 국내성의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동원하여 요동을 구원하려 하였다. 강하왕 도종은 4천 명의 기병으로 이에 대항하려 하였다. 그러나 군사들은 모두 병력의 차이가 현격하다 하여,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으며 황제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도종이 말했다.
"고구려는 군사가 많음을 믿고 우리를 경시하고 있으나, 그들은 멀리서 왔기 때문에 피곤한 상태이므로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 이렇게 하여 길을 깨끗이 닦아놓고 황제를 기다리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어찌하여 황제 앞에 적을 넘겨 드리려 하는가?"
도위 마 문거가 말했다.
"강한 적을 만나지 않고서야 어떻게 장사의 능력을 드러내겠느냐?"
그는 말을 마치자,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가 공격하였다. 그가 가는 곳마다 우리 군사가 쓰러졌다. 이에 당 나라 군사들의 마음이 약간 안정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자 행군 총관 장 군예가 퇴주하고 당 나라 군사가 패배하였다. 도종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높은 곳에 올라섰다. 그는 우리 군대의 진영이 혼란스러운 것을 보고, 기병 수천 명을 이끌어 돌격해왔다. 그 때 이 세적이 군사를 이끌고 협공하였다. 이리하여 우리 군사가 크게 패배하니, 사망자가 1천여 명이었다.
황제는 요수를 건넌 다음 다리를 철거하여, 군사들의 결심을 굳게 하고 마수산에 진을 쳤다. 황제는 강하왕 도종을 위로하여 상을 주고, 마 문거를 몇 급 올려 중랑장으로 삼고, 장 군예의 목을 베었다. 황제는 직접 수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요동성 밑에 가서, 군사들이 흙을 지고 참호를 쌓는 것을 보았다. 황제는 직접 제일 무거운 것을 자기 말에 실었다. 이에 시종들이 다투어 흙을 운반하여 성 밑에 쌓았다.
이 세적은 밤낮없이 12일 간 요동성을 공격하였다. 황제가 정예 부대를 이끌고 이 세적에게 와서 성을 수백 겹으로 포위하였다. 북소리와 함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성 안에는 주몽의 사당이 있었고, 이 사당에는 쇠사슬 갑옷과 날카로운 창이 있었는데, 망녕되게도 이전 연 나라 시대에 하늘이 내려 준 것이라고 하였다. 바야흐로 포위 태세가 긴박해지자, 미인을 부신으로 분장시켜 놓고 무당이 말하기를 "주몽이 기뻐하니 성은 반드시 보전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세적이 포차를 열지어 놓고, 큰 돌을 3백 보 이상 날려 보냈다. 돌이 맞는 곳마다 모두 허물어졌다. 우리는 나무를 쌓아 누대를 만들고 그물을 쳤으나 돌을 막을 수 없었다. 당 나라 군사는 충거로 성 위의 집을 부수었다. 이 때 백제가 황색 칠을 한 쇠 갑옷을 바치고, 또 검은 쇠로 만든 무늬있는 갑옷을 군사들에게 입혀 종군하였다. 황제가 이 세적과 만나자 갑옷의 광채가 햇빛에 번쩍거렸다. 남풍이 세게 불자 황제가 민첩한 군사로 하여금 장대의 꼭대기에 올라가서 성의 서남루를 불사르게 하였다. 불이 성 안으로 타들어가자 황제는 곧 장병들을 지휘하여 성에 오르게 하였다. 우리 군사들은 사력을 다하여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했고, 사망자가 1만여 명이었다. 당 나라는 군사 1만여 명과 남녀 주민 4만 명을 생포하고, 양곡 50만 석을 탈취하였으며, 요동성을 요주로 개칭하였다. 이 세적은 백암성 서남 쪽을 공격하고, 황제는 서북쪽으로 갔다. 백암성 성주 손 대음이 비밀리에 심복을 보내 항복하기를 청하고, 성에 나와 칼과 도끼를 던지는 것으로 신호를 삼겠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저는 항복하기를 원하지만 성 안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라고 하였다. 황제는 당 나라 깃발을 사자에게 주면서 "틀림없이 항복하겠으면 이 깃발을 성 위에 세우라"고 하였다. 대음이 그 깃발을 세우니 성 안 사람들은 당 나라 군사가 이미 성에 올랐다고 생각하여, 모두 손 대음을 따라 항복하였다.
황제가 요동을 공격하여 승리하였을 때, 백암성이 항복을 청했다가 얼마 후에는 후회하였다. 황제는 그들의 변심을 보고 노하여 군사들에게 명령하였다.
"성을 빼앗으면 마땅히 빼앗은 사람과 물건을 모두 전사들에게 상으로 주리라."
이 때 이 세적은 황제가 백암성의 항복을 받으려는 것을 알아채고, 갑병 수십 명을 데리고 와서 황제에게 말했다.
"사졸들이 화살과 돌을 무릅쓰며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싸우는 것은, 노획물을 탐내기 때문입니다. 지금 성이 거의 함락되어 가는데 어찌하여 항복을 받음으로써 전사들의 마음을 저버리려 합니까?"
황제가 말에서 내려와 사과하며 말했다.
"장군의 말이 옳다. 그러나 군사를 함부로 풀어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처자를 사로잡는 것은, 내가 차마 저지를 수 없는 행위이다. 장군의 부하로서 공로가 있는 자에게는 내가 창고의 물건으로 상을 줄 것이다. 장군으로 인하여 이 성이 속죄받기를 원한다."
세적은 물러나와 성 안의 남녀 1만여 명을 잡아, 물가에 장막을 치고 그들의 항복을 받았다. 그런 후에 곧 먹을 것을 주고, 80세의 노인에게는 정도에 따라 비단을 주었다. 다른 성의 군사로서 백암성에 와있던 자들은 전부 위로하여 타이르고, 양식과 군기를 주어 원하는 곳으로 가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서 요동성 장사가 부하에게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었다. 그 성의 성사 한 사람이 장사의 처자들을 데리고 백암성으로 도망해왔었다. 황제는 그의 의리를 가상히 여겨 비단 다섯 필을 주고, 장사의 상여를 만들어 평양으로 보냈다. 백암성을 암주로 개칭하고, 손 대음을 자사로 삼았다.
애초에 막리지는 가시성의 군사 7백 명을 파견하여 개모성을 수비하게 하였으나, 이 세적은 그들을 모두 생포하였다. 그들은 당 나라 군사에 종군하여 공을 세우기를 요청하였다. 황제가 말했다.
"너희들의 집이 모두 가시성에 있다. 그러나 너희들이 나를 위하여 싸우게 되면 막리지가 반드시 너희들의 처자를 죽일 것이다. 한 사람의 힘을 얻기 위하여 한 집안을 멸망하게 하는 일을 나는 차마 할 수가 없다."
황제는 그들에게 모두 곡식을 주어 돌려 보냈다. 개모성을 개주로 개칭하였다.
황제가 안시성에 도착하여 성을 공격하자, 북부 욕살 고 연수와 남부 욕살 고 혜진은 우리 군사와 말갈군 15만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원하였다. 황제가 근신들에게 말했다.
"지금 연수에게 전략이 있다면 그것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 째는, 군사를 이끌고 직접 앞으로 나가서, 안시성과 연결되는 보루를 쌓고, 높은 산의 험한 지세에 의지하여 성 안의 곡식을 먹으면서 말갈군을 풀어 우리의 마소를 약탈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공격한다고 해도 빨리 항복받을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늪지가 장애가 될 것이므로, 우리 군사들은 앉아서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된다. 이것이 상책이다. 둘 째는, 성 안의 군사를 데리고 야간 도주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책이다. 셋 째는, 자기의 지혜와 재능을 모르고, 우리와 대적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책이다. 그대들은 두고 보라. 그가 필히 하책으로 나올 것이니, 그들을 사로잡게 되는 작전이 내 눈 앞에서 벌어질 것이다."
이 때, 나이 많고 경험이 풍부한 대노 고 정의가 연수에게 말했다.
"진왕은, 안으로는 여러 영웅들을 쳐 없애고, 밖으로는 오랑캐들을 굴복시켜 스스로 황제가 되었으니, 이는 세상을 제도하라는 천명을 받은 인재이다. 지금 그가 전국의 군사를 이끌고 왔으므로 이에 대적할 수는 없다. 나의 계책은, 군사를 정비하되 싸우지 않고, 여러 날을 두고 지구전을 펴면서 기습병을 보내 그들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는 것이다. 저들은 군량이 떨어지면 싸우려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갈 길이 없게 될 것이다. 이 때만이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때이다."
그러나 연수는 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군사를 거느리고 안시성 밖 40리까지 진군하였다. 황제는 연수가 주저하고 진군해오지 않을까 염려하여, 대장군 아사나 두이에게 명하여 돌궐의 기병 1천 명을 이끌고 그를 유인하게 하였다. 첫 교전에서 당 나라 군사가 패주하는 척하자, 연수는 "다루기가 쉽구나"라고 말하며, 앞을 다투어 진격하였다. 그는 안시성 동남방 8리 지점에 이르러서 산에 의지하여 진을 쳤다. 황제가 여러 장수들을 전부 불러 놓고 계책을 물으니 장손 무기가 대답하였다.
"'적을 만나 싸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군사들의 심정을 살펴야 한다'고 저는 들었습니다. 제가 마침 여러 병영을 다니는데, 군사들이 고구려 군사가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칼을 뽑아 들고 깃발을 달면서 얼굴에 희색이 도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는 반드시 승리할 군사들입니다. 폐하께서는 면류관을 벗어놓고 직접 진지에 나섰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뛰어난 전술로 승리를 거듭한 것은, 모두 위로 폐하의 책략을 받들어 모든 장수들이 성공을 이루어낸 것 뿐입니다. 오늘 일도 폐하께서 직접 지휘하시기 바랍니다."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제공들이 이 일을 나에게 사양하니, 내가 제공들을 위하여 방법을 구상하겠노라."
황제는 곧 무기 등과 함께 수백 명의 기병을 데리고 고지에 올라 산천의 형세 가운데 복병시킬 수 있는 곳과 병력의 출입이 가능한 곳을 관찰하였다. 이 때 우리 군사는 말갈군과 연합하여 진을 치고 있었다. 그 진의 길이는 40리에 달했다. 황제가 이를 관찰하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나타났다. 강하왕 도종이 말했다.
"고구려는 전력을 다하여 천자의 군대를 방어하고 있으니, 틀림없이 평양의 수비에는 약점이 있을 것입니다. 저에게 정예군 5천 명을 주시어, 그들의 근본을 뒤엎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싸우지 않고도 수십만 군사를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
황제는 이를 듣지 않고, 사신을 보내 연수에게 거짓으로 말했다.
"나는 너희 나라의 권력 있는 신하가 임금을 시해한 죄를 물으러 온 것이니, 우리가 서로 전투를 하게 된 것은 나의 본심이 아니다. 너희 나라 경내에 들어오니 마초와 양식이 충분하지 않아 몇 개 성을 빼앗기는 하였으나, 너희 나라가 신하의 예절을 지킨다면 잃었던 성은 반드시 돌려 줄 것이다."
연수는 이 말을 믿고, 다시 수비 태세를 더 갖추지 않았다. 황제가 밤에 문무관을 불러 계책을 의논한 다음, 이 세적에게 보병과 기병 1만 5천 명을 주어 서쪽 고개에 진을 치게 하고, 장손 무기와 우 진달에게 정예군 1만 1천 명을 주어 기습병을 조직하였다. 그들은 산의 북쪽에서 협곡으로 나와 우리 군사의 후면을 공격하게 하고, 황제는 직접 보병과 기병 4천명을 이끌고 북과 나팔을 옆에 끼고 깃발을 눕혀서 산으로 올랐다. 황제는 모든 군대에게 북과 나팔 소리가 들리면 일제히 맹공하라고 명령하였으며, 또한 관리에게는 항복받을 장막을 조회당 옆에 설치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날 밤, 유성이 연수의 병영에 떨어졌다. 아침에 연수 등은 이 세적의 군사가 적은 것만 보고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하려 하였다. 황제는 무기의 부대에서 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깃발을 들게 하였다. 이에 따라 모든 군사들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진격하였다. 연수 등은 두려워하며 군사를 나누어 방어하려 하였다. 그러나 진영은 이미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그 때 마침 천둥과 번개가 쳤는데, 당 나라 용문 사람 설 인귀가 기이한 복장을 하고, 고함을 치면서 우리의 진영으로 깊숙히 들어왔다. 그가 가는 곳마다 적수가 없어 우리 군사가 쓰러졌다. 당 나라의 대군이 이 때를 이용하여 공격해왔다. 우리 군사는 큰 혼란에 빠지고, 3만여 명의 사망자가 생겼다. 황제는 멀리서 인귀를 바라보다가 그를 유격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연수 등은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산에 의지하여 자체 수비를 강화하였다. 황제가 모든 부대에 명령하여 우리 군사를 포위하게 하고, 장손 무기에게는 교량을 전부 철거하여 우리 군사의 귀로를 차단하게 하였다. 연수와 혜진은 자기 군사 3만 6천8백 명을 이끌고 항복을 청하면서, 당 나라 군문에 들어가 절하고 목숨을 살려달라고 빌었다. 황제는 욕살 이하의 관장 3천 5백 명을 선발하여 당 나라 지역으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여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말갈인 3천 3백 명은 전부 생매장 하였다. 말 5만 필·소 5만 두·명광 갑옷 1만 벌을 노획하였으며, 기타의 기자재도 이 정도 노획하였다. 황제가 갔던 산의 명칭을 주필산으로 개명하고, 고 연수를 홍려경, 고 혜진을 사농경에 임명하였다.
황제가 백암성을 공격하여 승리했을 때, 이 세적에게 말했다.
"내가 듣건대, 안시성은 성이 험하고 군사가 강하며, 그 성주가 용맹스러워, 막리지의 난에도 성을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으며, 막리지가 공격하였으나 그를 굴복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성을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건안성은 병력이 약하고 군량미도 적다. 따라서 만약 불시에 그 성을 공격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먼저 건안성을 공격하라. 건안성이 항복하면 안시성은 이미 우리의 손 안에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것이 병법에서 말하는 '성 가운데는 공격해서는 안될 성도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이 세적이 대답하였다.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북쪽에 있는데, 우리의 군량은 전부 요동에 있습니다. 이제 안시성를 지나 건안성을 공격하다가 만약 고구려인들이 우리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면 어찌 하겠습니까?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안시성이 항복하면, 당당하게 북을 울리며 행군하여 건안성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내가 그대를 장군으로 삼았으니, 어찌 그대의 계책을 따르지 않겠느냐? 부디 나의 일을 그르치지 말라!"
세적은 드디어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이 황제의 깃발과 일산을 바라보고, 즉시 성에 올라 북을 두드리고 함성을 지르니 황제가 분노하였다. 세적은, 성이 함락되는 날 안시성의 남자를 모두 구덩이에 묻어 버릴 것을 황제에게 요청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더욱 굳게 수비하였다. 당 나라 군사가 오랫동안 공격하였으나 안시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고 연수·고 혜진 등이 황제에게 말했다.
"저희들이 이미 대국에 몸을 맡겼으니, 정성을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자께서 빨리 큰 공을 이루어 우리가 처자와 만나게 하여 주기를 원합니다. 안시성 사람들은 그의 가족들을 생각하여 자진하여 싸우고 있기 때문에 빨리 함락시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저희들은 고구려의 10여 만 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깃발을 보는 것만으로 사기가 꺾여 허물어졌으며, 백성들의 간담이 서늘하였습니다. 오골성의 욕살은 늙어서 수비가 견실할 수 없으니, 군사를 옮겨 그곳을 공격한다면, 아침에 도착하면 저녁에는 승리할 것이며, 도중에 있는 여타의 작은 성들은 위풍만 보고도 반드시 허물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연후에 그곳의 자재와 군량을 거두어 북을 울리며 전진하면, 그들은 틀림없이 평양을 지켜내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 신하들이 또 말했다.
"장 량의 군사가 사성에 있으니, 그를 부르면 이틀이면 올 수 있습니다. 고구려가 두려워 하고 있는 틈을 이용하여, 장 량의 군사와 힘을 합하여 오골성을 함락시키고, 압록강을 건너 곧바로 평양을 빼앗는 것이 이번 일에 달렸습니다."
황제가 이 말을 따르려 하자 장손 무기가 홀로 나서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천자의 원정은 보통 장수들의 정벌과는 다르다. 따라서 모험을 하면서 요행을 바랄 수는 없다. 지금 건안성과 신성의 무리가 아직도 10만이나 되는데, 우리가 만약 오골성으로 간다면, 고구려 군사들이 반드시 우리의 뒤를 추격할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안시성을 점령하고 건안성을 취한 후에 군사를 먼 곳으로 진군시키는 것이 옳다. 이것이 만전의 계책이다. 장손 무기의 말을 듣고 황제는 곧 앞서의 계획을 중지하였다.
모든 장수들이 안시성을 급히 공격하였다. 황제가 성 안에서 들리는 닭과 돼지의 소리를 듣고 세적에게 말했다.
"성을 포위한지 오래되어, 성 안에는 밥짓는 연기가 나날이 줄어들고 있는데, 지금 닭과 돼지 소리가 요란하니, 이는 틀림없이 군사들을 잘 먹인 후에 야습하려는 것이다. 군사를 단속하여 이에 대비하라."
이날 밤, 우리 군사 수백 명이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왔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직접 성 밑에 와서 군사를 소집하여 재빨리 공격하였다. 우리 군사 중에 사망자가 수십 명이나 되었고, 나머지는 도주하였다.
강하왕 도종이 군사들을 독려하여 성의 동남 쪽에 토산을 쌓아 점점 성으로 접근해왔다. 성 안에서도 역시 성을 더욱 높게 쌓아 굳게 방어하였다. 군사들은 당번을 정하여 하루에도 6, 7회씩 교전하였다. 당 나라 군사의 충거와 포석이 누대와 성위의 작은 담을 허물었으나, 성 안에서는 그 때마다 목책을 세워 부서진 곳을 막았다. 도종이 발을 다치자 황제가 직접 침을 놓아 주었다. 당 나라 군사는 밤낮을 쉬지 않고 60일 동안 토산을 쌓았다. 이 작업에 연인원 50만 명이 동원되었다. 토산이 완성되

자, 이 토산의 꼭대기가 성보다 두어 길이나 높았기 때문에 성 안을 내려볼 수 있었다. 도종이 과의 부복애를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산정에 주둔하여 적을 대비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에 산이 허물어지면서 성을 덮치는 바람에 성의 일부가 무너졌다. 바로 이 때, 복애는 사사로운 이유로 수비하던 곳을 떠나 있었다. 우리 군사 수백 명이 성이 허물어진 곳으로 나가 싸워서 마침내 토산을 탈취하여 그곳에 참호를 파고 수비하였다. 황제가 노하여 복애의 목을 베어 조리를 돌리고,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사흘이 지나도 이길 수 없었다. 도종이 맨발로 황제의 깃발 아래 가서 죄를 청했다. 황제가 말했다.
"너의 죄는 죽어 마땅하지만, 나는 한 무제가 왕회를 죽인 것이 진 목공이 맹명을 등용한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너는 개모성과 요동을 점령한 공로가 있기 때문에 특별히 용서한다."
황제는, 요동 지방은 일찍 추워지므로 풀이 마르고 물이 얼을 것이므로, 군사와 말을 오래 머무르게 할 수 없으며, 또한 군량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여 군대의 철수를 명령하였다. 먼저 요주·개주 두 주의 주민을 선발하여 요수를 건너게 하고, 안시성 밑에서는 군사를 동원하여 시위를 하고 돌아갔다. 성 안에서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다.
성주는 성에 올라가 절을 하며 작별하였다. 황제는 그가 성을 굳게 지킨 것을 가상히 여기면서, 겹실로 짠 비단 1백 필을 주어, 임금을 섬기는 자세를 격려하였다. 황제는 세적과 도종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4만을 이끌고 후군으로 서게 하였다. 그들이 요동에 이르러 요수를 건너려 하였다. 그러나 그곳 습지의 진흙 때문에 수레와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황제는 무기에게 명령하여 1만 명의 군사로 하여금 풀을 베어 진흙길을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에서는 수레를 다리로 삼아 건너도록 하였다. 황제가 직접 말채찍으로 나무를 묶어 이 일을 도와 주었다.
겨울 10월, 황제가 포구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진흙길 메우는 작업을 독려하였다. 모든 군사가 발착수를 건넜다. 바람과 눈이 휘몰아쳐서 군사들의 옷이 젖고 동사자가 많이 생겼다. 황제는 길가에 불을 피워놓고 군사를 기다리도록 하였다. 현토·횡산·개모·마미·요동·백암·비사·협곡·은산·후황 등 10개 성을 철폐하고, 요주·개주·암주 3개 주에서 7만 명의 주민을 중국으로 옮겨 갔다. 고 연수는 항복한 뒤로부터 항상 분개하고 한탄하다가, 얼마 후에 홧병으로 죽고, 고 혜진은 결국 장안에 도착하였다.
신성·건안성·주필산의 세 차례의 큰 싸움에서 우리 군대와 당 나라 군사 중에 사망자가 많았으며, 마필도 아주 많이 죽었다. 황제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고 탄식하면서 "만일 위징이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번 원정을 못하게 하였으리라."라고 말하였다.
저자의 견해 : 당 태종은 어질고 명철한 불세출의 임금이다. 난을 평정하기는 탕과 무왕에 견줄만 하고, 이치에 통달하기는 성왕·강왕과 비슷하였으며, 병법에는 기묘한 전술이 무궁하였으니, 가는 곳마다 적수가 없었다. 그러나 동방 정벌의 공이 안시성에서 무너졌으니, 그 성주는 가히 비상한 호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기는 그의 성명을 전하지 않고 있다. 이는 양자가 이른바 "제·노의 대신은 역사에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라고 한 것과 다름이 없다. 매우 애석한 일이다.

○五年, 春二月, <太宗>還京師, 謂<李靖>曰: "吾以天下之衆, 困於小夷, 何也?" <靖>曰: "此, <道宗>所解." 帝顧問, <道宗>具陳: 在<駐 >時, 乘虛取<平壤>之言. 帝 然曰: "當時悤悤, 吾不憶也." 夏五月, 王及莫離支<蓋金>, 遣使謝罪, 幷獻二美女. 帝還之, 謂使者曰: "色者人所重, 然憫其去親戚以傷乃心, 我不取也." <東明王>母塑像, 泣血三日. 初, 帝將還, 帝以弓服賜<盖蘇文>, 受之不謝, 而又益驕恣. 雖遣使奉表, 其言率皆詭誕, 又待<唐>使者倨傲, 常窺伺邊隙. 屢 令不攻<新羅>, 而侵凌不止. <太宗>詔勿受其朝貢, 更議討之.
三國史記卷第二十一.

5년 봄 2월, 태종이 서울로 돌아가서 이 정에게 말했다.
"내가 천하의 군사를 가지고도 작은 오랑캐에게 곤욕을 당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정이 대답했다.
"이는 도종이 풀어드릴 것입니다."
황제는 도종을 돌아다보며 물었다. 도종은 주필산에 있을 때, 평양이 빈 틈을 이용하여 그 곳을 점령하자고 한 말을 상세하게 진술하였다. 황제가 한탄하며 말했다.
"당시에는 내가 정신이 없었기에 생각 나지 않는다."
여름 5월, 왕과 막리지 개금이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아울러 두 명의 미인을 바쳤다. 황제가 이들을 돌려 보내며 사신에게 말했다.
"색은 사람이 중히 여기는 것이지만, 그들이 친척과 떨어져 애태우는 것이 딱하니 내가 이를 받지 않겠다."
동명왕 어머니의 소상이 사흘 동안 피를 흘리며 울었다.
애초에, 당 태종이 돌아가려 할 때 개소문에게 활과 의복을 주었었다. 개소문은 이를 받고도 사례하지 않았으며, 더욱 교만하고 방자해졌다. 비록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렸으나, 그의 말은 거의 거짓이고 황당하였다. 그는 또한 당 나라 사신을 거만하게 대하였으며, 항상 변경의 틈을 엿보고 있었다. 당 나라에서는 여러번 칙령을 내려 신라를 치지 말게 하였으나, 이를 업신여기고 침공을 그치지 않았다. 태종이 조서를 내려 고구려의 조공을 받지 못하게 하고, 고구려를 칠 것을 다시 논의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21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