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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사

삼국사기 신라 본기 (원문+한글) 권 제 7

三國史記卷第七.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集賢殿太學士監修國史上柱國致仕臣<金富軾>奉宣撰.

삼국사기 권 제 7
수충 정난 정국 찬화 동덕 공신, 개부 외동삼사, 검교 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 이례부사, 집현전 태학사, 감수국사, 상주국, 치사 신 김 부식이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편찬함.

新羅本紀第七.
<文武王>下.

신라본기 제 7
문무왕(하).

○十一年春正月, 拜伊 <禮元>爲中侍. 發兵侵<百濟>, 戰<熊津>南, 幢主<夫果>死之. <靺鞨>兵來圍<舌口城>, 不克將退, 出兵擊之, 斬殺三百餘人. (+王) 聞<唐>兵欲來 {  /救 }<百濟>, 遣大阿 <眞功>·阿 , □□□□兵守<甕浦>. 白魚躍入□□□□□□□□□□一寸. 夏四月, 震<興輪寺>南門. 六月, 遣將軍<竹旨>等, 領兵踐<百濟><加林城>禾, 遂與<唐>兵戰於<石城>, 斬首五千三百級, 獲<百濟>將軍二人·<唐>果毅六人. 秋七月二十六日, 大<唐>摠管<薛仁貴>&使{遣僧} <琳潤>法師寄書曰: "行軍摠管<薛仁貴>致書<新羅>王. 淸風萬里, 大海三千, 天命有期, 行遵此境. 奉承機心稍動, 窮武邊城, 去<由>也之片言, 失<侯生>之一諾. 兄爲逆首, 弟作忠臣, 遠分花 之陰, 空照相思之月. 興言彼此, 良增歎詠. 先王<開府>, 謀猷一國, 展轉百城, 西畏<百濟>之侵, 北警<&高麗{高句麗} >之寇. 地方千里, 數處爭鋒, 蠶女不及桑時, 耘人失其疇序. 年將耳順, 楡景日侵, 不懼船海之危, 遠涉<陽侯>之險, 瀝心華境, 頓 天門, 具陳孤弱, 明論侵擾, 情之所露, 聽不勝悲. <太宗文皇帝>, 氣雄天下, 神王宇宙, 若<盤古>之九變, 同<巨靈>之一掌, 扶傾救弱, 日不暇給. 哀納先君, 矜收所請, 輕車駿馬, 美衣上藥, 一日之內, 頻遇殊私. 亦旣承恩, 對揚軍事, 契同魚水, 明於金石. 鳳 千重{里} , 鶴關萬戶, 留連酒德,  笑金除, 參論兵馬. 分期聲援, 一朝大擧, 水陸交鋒. 于時, 塞草分花, 楡星上莢. <駐 >之戰, <文帝>親行, 弔人恤隱, 義之深也. 旣而, 山海異形, 日月廻薄, 聖人下武, 王亦承家. 巖葛因依, 聲塵共擧, 洗兵刷馬, 咸遵先志. 數十年外, <中國>疲勞, 帑藏時開, 飛 日給. 以蒼島之地, 起黃圖之兵, 貴於有益, 貪於無用. 豈不知止, 恐失先君之信也. 今强寇已淸, 讐人喪國, 士馬玉帛, 王亦有之. 當應心 不移, 中外相輔, 銷鏑而化, 虛室爲情, 自然貽厥孫謀, 以燕翼子. 良史之讚, 豈不休哉? 今王去安然之基, 厭守常之策, 遠乖天命, 近棄父言, 侮暴天時, 侵欺隣好, 一隅之地, 僻左之 , 率戶徵兵, 連年擧斧, 孀姬輓粟, 稚子屯田. 守無所支, 進不能拒. 以得裨喪, 以存補亡, 大小不 , 逆順乖敍, 亦由持彈而往, 暗於枯井之危, 捕蟬而前, 不知黃雀之難, 此王之不知量也. 先王在日, 早蒙天 , 審懷險 之心, 假以披誠之禮, 從己私欲, 貪天至功, 苟希前惠, 圖爲後逆, 此先君之不長者也. 必其誓<河>若帶, 義分如霜, 違君之命, 不忠, 背父之心, 非孝, 一身二名, 何以自寧? 王之父子, 一朝振立, 此竝天情遠及, 威力相持, 方州連郡, 遂爲盤錯. 從此, 遞蒙冊命, 拜以稱臣. 坐治經書, 備詳詩禮, 聞義不從, 見善而輕, 聽縱橫之說, 煩耳目之神, 忽高門之基, 延鬼瞰之責. 先君盛業, 奉而異圖, 內潰疑臣, 外招强陣, 豈爲智也? 又<&高麗{高句麗} ><安勝>, 年尙幼沖, 遺壑殘 , 生人減半, 自懷去就之疑, 匪堪襟帶之重. <仁貴>樓船, 竟翼風帆, 連旗巡於北岸, 矜其舊日傷弓之羽, 未忍加兵, 恃爲外援, 斯何謬也! 皇帝德澤無涯, 仁風遠 , 愛同 {日} 景, 炤若春華. 遠聞消息,  然不信, 爰命下臣, 來觀由委. 而王不能行人相問, 牛酒 師, 遂便隱甲雀陂{ } , 藏兵江口,  行林薄, 喘息萊{荒} 丘. 潛生自 之鋒, 而無相持之氣. 大軍未出, 游兵具行, 望海浮江, 魚驚鳥竄. 以此形況, 人事可求, 沈迷猖惑, 幸而知止. 夫擧大事者, 不貪小利, 杖高節者, 寄以英奇. 必其鸞鳳不馴, 豺狼有顧, <高>將軍之<漢>騎, <李謹行>之蕃云兵, <吳>·<楚>棹歌, 幽幷惡少, 四面雲合, 方舟而下, 依險築戍, 闢地耕田, 此王之膏盲{ } 也. 王若勞者歌, 事屈而頓申, 具論所由, 明陳彼此. <仁貴>夙陪大駕, 親承委寄, 錄狀聞奏, 事必昭蘇, 何苦  , 自相 擾? 嗚呼, 昔爲忠義, 今乃逆臣, 恨始吉而終凶, 怨本同而末異. 風高氣切, 葉落年悲, 憑山遠望, 有傷懷抱. 王以機 {晤 /悟 }淸明, 風神爽秀, 歸以流謙之義, 存於順迪之心, 血食依時, 茅 不易, 占休納祐, 王之策也. 嚴鋒之間, 行人來往, 今遣王所部僧<琳潤>齎書, 佇布一二." 大王報書云: "先王<貞觀>二十二年, 入朝, 面奉<太宗文皇帝>恩勅 '朕今伐<高□麗{高句麗} >, 非有他
故, 憐 <新羅>, 攝乎兩國, 每被侵陵, 靡有寧歲. 山川土地, 非我所貪, 玉帛子女, 是我所有. 我平定兩國, <平壤>已南<百濟>土地, 竝乞 <新羅>, 永爲安逸.' 垂以計會, 賜以軍期. <新羅>百姓, 具聞恩勅, 人人畜力, 家家待用. 大事未終, <文帝>先崩, 今帝踐祚, 復繼前恩, 頻蒙慈造, 有踰往日. 兄弟及兒, 懷金拖紫, 榮寵之極,  古未有. 粉身碎骨, 望盡驅馳之用, 肝腦塗原, 仰報萬分之一. 至<顯慶>五年, 聖上感先志之未終, 成 日之遺緖, 泛舟命將, 大發船兵. 先王年衰力弱, 不堪行軍, 追感前恩, 勉强至於界首, 遣某領兵, 應接大軍. 東西唱和, 水陸俱進, 船兵 入江口, 陸軍已破大賊. 兩軍俱到王都, 共平一國. 平定已後, 先王遂共<蘇>大摠管平章, 留<漢>兵一萬, <新羅>亦遣弟<仁泰>, 領兵七千, 同鎭<熊津>. 大軍廻後, 賊臣<福信>, 起於江西, 取集餘燼, 圍逼<府城>, 先破外柵, 摠奪軍資, 復攻<府城>, 幾將陷沒. 又於<府城>側近四處, 作城圍守, 於此, <府城>不得出入. 某領兵往赴解圍, 四面賊城, 竝皆打破, 先救其危, 復運粮食, 遂使一萬漢兵, 免虎吻之危難, 留鎭餓軍, 無易子而相食. 至六年, <福信>徒黨漸多, 侵取江東之地, <熊津><漢>兵一千, 往打賊徒,  {被} 賊 破, 一人不歸. 自敗已來, <熊津>請兵, 日夕相繼. <新羅>多有疫病, 不可徵發兵馬, 苦請難違, 遂發兵衆, 往圍<周留城>. 賊知兵小, 遂卽來打, 大損兵馬, 失利而歸. 南方諸城, 一時摠叛, 竝屬<福信>, <福信>乘勝, 復圍<府城>. 因卽<熊津>道斷, 絶於鹽 , 卽募律{健} 兒, 偸道送鹽, 救其乏困. 至六月, 先王薨, 送葬 訖, 喪服未除, 不能應赴, 勅旨發兵北歸. <含資道>摠管<劉德敏>等至, 奉勅遣<新羅>供運<平壤>軍粮. 此時, <熊津>使人來, 具陳<府城>孤危. <劉>摠管與某平章自云: '若先送<平壤>軍粮, 卽恐<熊津>道斷, <熊津>若其道斷, 留鎭<漢>兵, 卽入賊手.' <劉>摠管遂共某相隨, 先打<瓮山城>. 旣拔<瓮山>, 仍於<熊津{熊峴}> 造城, 開通<熊津>道路. 至十二月, <熊津>粮盡. 先運<熊津>, 恐違勅旨, 若送<平壤>, 卽恐<熊津>絶粮. 所以差遣老弱, 運送<熊津>, 强健精兵, 擬向<平壤>. <熊津>送粮, 路上逢雪, 人馬死盡, 百不一歸. 至<龍朔>二年正月, <劉>摠管共<新羅><兩河道{西河道}> 摠管<金庾信>等, 同送<平壤>軍粮. 當時陰雨連月, 風雪極寒, 人馬凍死, 所將兵粮, 不能勝致. <平壤>大軍, 又欲歸還. <新羅>兵馬, 粮盡亦廻. 兵士饑寒, 手足凍 , 路上死者, 不可勝數. 行至<瓠瀘河>, <高□麗{高句麗} >兵馬, 尋後來 , 岸上列陣. <新羅>兵士, 疲乏日久, 恐賊遠 , 賊未渡河, 先渡交刃, 前鋒暫交, 賊徒瓦解, 遂收兵歸來. 此兵到家, 未經一月, <熊津府城>, 頻索種子, 前後所送, 數萬餘斛. 南運<熊津>, 北供<平壤>,  小<新羅>, 分供兩所, 人力疲極, 牛馬死盡, 田作失時, 年穀不熟, 所貯倉粮, 漕運竝盡, <新羅>百姓, 草根猶自不足, <熊津><漢>兵, 粮食有餘. 又留鎭<漢>兵, 離家日久, 衣裳破壞, 身無全褐. <新羅>勸課百姓, 送給時服. 都護<劉仁願>, 遠鎭孤城, 四面皆賊, 恒被<百濟>侵圍, 常蒙<新羅>解救. 一萬<漢>兵, 四年衣食<新羅>, <仁願>已下, 兵士已上, 皮骨雖生<漢>地, 血肉俱是<新羅>. 國家恩澤, 雖復無涯, <新羅>效忠, 亦足矜憫. 至<龍朔>三年, 摠管<孫仁師>領兵, 來救<府城>, <新羅>兵馬, 亦發同征, 行至<周留城>下. 此時, <倭>國船兵, 來助<百濟>, <倭>船千 , 停在<白沙{白江}> , <百濟>精騎, 岸上守船. <新羅>驍騎爲<漢>前鋒, 先破岸陣, <周留>失膽, 遂卽降下. 南方已定, 廻軍北伐, <任存>一城, 執迷不降. 兩軍倂力, 共打一城, 固守拒 , 不能打得. <新羅>卽欲廻還, <杜>大夫云: '準勅, 旣平已後, 共相盟會, <任存>一城, 雖未降下, 卽可共相盟誓.' <新羅>以爲準勅 '旣平' 已後, 共相盟會, <任存>未降, 不可以爲 '旣平'. 又且<百濟>, 姦詐百端, 反覆不恒{恤} , 今雖共相盟會, 於後恐有 臍之患, 奏請停盟. 至<麟德>元年, 復降嚴勅, 責不盟誓, 卽遣人於<熊嶺>, 築壇共相盟會. 仍於盟處, 遂爲兩界. 盟會之事, 雖非
所願, 不敢違勅. 又於<就利山>築壇, 對勅使<劉仁願>,  血相盟, 山河爲誓, 畵界立封, 永爲 {彊} 界, 百姓居住, 各營産業. 至<乾封>二年, 聞大摠管<英國公>征<遼某{遼東}> , 往<漢城州{漢山州}> , 遣兵集於界首. <新羅>兵馬, 不可獨入, 先遣細作三度, 船相次發遣,  候大軍. 細作廻來竝云: '大軍未到<平壤>.' 且打<高□麗{高句麗}><七重城>, 開通道路, 佇待大軍來至. 其城垂垂欲破, <英公>使人<江深>來云: '奉大摠管處分, <新羅>兵馬不須打城, 早赴<平壤>, 卽給兵粮.' 遣令赴會, 行至<水谷城>, 聞大軍已廻, <新羅>兵馬, 遂卽抽來. 至<乾封>三年, 遣大監<金寶嘉>入海, 取<英公>進止. 奉處分, <新羅>兵馬, 赴集<平壤>. 至五月, <劉>右相來, 發<新羅>兵馬, 同赴<平壤>. 某亦往<漢城州>, 檢校兵馬. 此時, <蕃>·<漢>諸軍, 摠集<蛇水>, <男建>出兵, 欲決一戰. <新羅>兵馬, 獨爲前鋒, 先破大陣, <平壤>城中, 挫鋒縮氣. 於後<英公>更取<新羅>驍騎五百人, 先入城門, 遂破<平壤>, 克成大功. 於此<新羅>兵士竝云: '自征伐已經九年, 人力 盡, 終始平兩國, 累代長望, 今日乃成, 必當國蒙盡忠之恩, 人受效力之賞.' <英公>漏云: '<新羅>前失軍期, 亦須計定.' <新羅>兵士得聞此語, 更增 懼. 又立功軍將,  錄入朝, 已到京下, 卽云: '今<新羅> 無功.' 夫軍將歸來, 百姓更加 懼. 又<卑列>之城, 本是<新羅>, <高 麗{高句麗} >打得三十餘年, <新羅>還得此城, 移配百姓, 置官守捉, 又取此城, 還與<&高麗{高句麗} >. 且<新羅>自平<百濟>,  定<&高麗{高句麗} >, 盡忠效力, 不負國家, 未知何罪, 一朝遺棄. 雖有如此寃枉, 終無反叛之心. 至<總章>元年, <百濟>於盟會處, 移封易標, 侵取田地,  我奴婢, 誘我百姓, 隱藏內地, 頻從索取, 至竟不還. 又通消息云: '國家修理船 , 外託征伐<倭>國, 其實欲打<新羅>.' 百姓聞之, 驚懼不安. 又將<百濟>婦女, 嫁與<新羅><漢城>都督<朴都儒>, 同謀合計, 偸取<新羅>兵器, 襲打一州之地, 賴得事覺, 卽斬<都儒>, 所謀不成. 至<咸亨>元年六月, <&高麗{高句麗} >謀叛, 摠殺<漢>官. <新羅>卽欲發兵, 先報<熊津>云: '<&高麗{高句麗} >旣叛, 不可不伐, 彼此俱是帝臣, 理須同討凶賊, 發兵之事, 須有平章, 請遣官人來此, 共相計會.' <百濟>司馬< 軍>來此, 遂共平章云: '發兵已後, 卽{旣} 恐彼此相疑, 宜令兩處官人, 互相交質.' 卽遣<金儒敦>及府城<百濟>主簿<首彌>·<長貴>等, 向府平論交質之事. <百濟>雖許交質, 城中仍集兵馬, 到彼城下, 夜卽{則} 來打. 至七月, 入朝使<金欽純>等至, 將畵界地, 案圖披 <百濟>舊地, 摠令割還. <黃河>未帶, <太山>未礪, 三四年間, 一與一奪, <新羅>百姓, 皆失本望,  云: '<新羅>·<百濟>累代深讐, 今見<百濟>形況, 別當自立一國, 百年已後, 子孫必見呑滅. <新羅>旣是國家之州, 不可分爲兩國. 願爲一家, 長無後患.' 去年九月, 具錄事狀, 發使奏聞, 被漂却來. 更發遣使, 亦不能達. 於後, 風寒浪急, 未及聞奏. <百濟>構架奏云: '<新羅>反叛.' <新羅>前失貴臣之志{心} , 後被<百濟>之 , 進退見咎, 未申忠款. 似是之讒, 日經聖聽, 不貳之患{忠} , 曾無一達. 使人<琳潤>至, 辱書仰承, 摠管犯冒風波, 遠來海外, 理須發使郊迎, 致其牛酒, 遠居異城, 未獲致禮, 時闕迎接, 請不爲怪. 披讀摠管來書, 專以<新羅>已爲叛逆, 旣非本心,  然驚懼. 數自功夫, 恐被斯辱之譏, 緘口受責, 亦入不弔之數, 今略陳寃枉, 具錄無叛. 國家不降一介之使, 垂問元由. 卽遣數萬之衆, 傾覆巢穴, 樓船滿於滄海,   連於江口, 數(救} 彼<熊律{熊津}> , 伐此<新羅>. 嗚呼! 兩國未定平, 蒙指 之驅馳, 野獸今盡, 反見烹宰之侵逼. 賊殘<百濟>, 皮{反} 蒙<雍齒>之賞, 殉<漢><新羅>, 已見<丁公>之誅. 大陽之曜, 雖不廻光, 葵藿本心, 猶 {懷} 向日. 摠管 英雄之秀氣, 抱將相之高材, 七德兼備, 九流涉獵, 恭行天罰, 濫加非罪? 天兵未出, 先問元由. 緣此來書, 敢陳不叛, 請摠管審自商量, 具狀申奏. < 林州>大都督左衛大將軍開府儀同三司上柱國<新羅>王<金法敏>白." 置<所夫里州>
, 以阿 <眞王>爲都督. 九月, <唐>將軍<高侃>等, 率蕃兵四萬到<平壤>, 深溝高壘侵<帶方>. 冬十月六日, 擊<唐>漕船七十餘 , 捉郞將<鉗耳大侯>·士卒百餘人. 其淪沒死者, 不可勝數. 級 <當千{當干}> 功第一, 授位沙 .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通鑑].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허성도.趙炳舜. 『三國史節要』.허성도.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通鑑].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李丙燾.李丙燾.『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李丙燾.李丙燾.李丙燾.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今西龍.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11년 봄 정월에 이찬 예원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였다. 웅진 남쪽의 전투에서 당주 부과가 전사하였다. 말갈 군사가 와서 설구성을 포위했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퇴각하려 하자, 우리 군사가 공격하여 3백여 명을 목베어 죽였다. 당 나라 군사가 백제를 구원하러 온다는 말을 듣고, 대아찬 진공과 아찬(원문 4자 결자)을 보내 옹포를 수비하게 하였다.
백어가…에 뛰어 들었는데(원문 열 자 결자)…한 치 였다.
여름 4월, 흥륜사 남문에 벼락이 쳤다.
6월, 장군 죽지 등에게 군사를 주어 백제 가림성의 벼를 짓밟게 하였다. 그 때 마침 당 나라 군사와 석성에서 전투가 벌어져 5천 3백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백제 장군 두 사람과 당 나라 과의(果毅) 여섯 사람을 포로로 잡았다.
가을 7월 26일, 대당총관 설 인귀가 임륜 법사를 시켜 신라왕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행군 총관 설 인귀는 신라왕에게 글을 보냅니다. 육로 만리 해로 삼천리를 지나 본인은 황제의 명령으로, 이 땅에 왔습니다. 삼가 듣건대 왕은 사심이 발동하여, 변경에 무력을 배치한다 하오니, 이는 자유(子由)의 한마디 말을 버린 것이요, 후생(侯生)의 한번 약속을 버린 것입니다. 형은 역적의 우두머리가 되고, 아우는 충신이 되었으며, 꽃과 꽃받침의 그늘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그리움의 달빛만 헛되이 비치고 있습니다. 이제 당나라와 신라 사이의 일을 말씀드리려 하니 실로 더욱 탄식이 나올 뿐입니다. 선왕 개부는 통일을 도모하여 온갖 성을 전전하면서, 서쪽으로는 백제의 침노를 염려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의 약탈을 경계하였습니다. 사방 천리 땅 도처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니, 누에 치는 여인들은 뽕 따는 시기를 놓쳤고, 김 매는 농부들은 밭갈이 할 시기를 잃었습니다. 선왕은 나이 60세라는 인생의 황혼기에도 뱃길의 위험을 감내하고 파도를 넘어 와서, 중국에 의지하는 심정으로, 황제의 대문에 머리 숙이며 어려운 상황을 고하였고, 백제와 고구려의 침략 상황을 호소하는 말에 진정이 묻어 나왔으니, 이를 듣는 사람은 슬픈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습니다. 태종 문황제는 기품이 천하에 제일이었으며, 정신은 우주에 군림하였으니, 반고의 아홉번 변화나 거령(巨靈)의 손과 같이, 쓰러지는 자를 부축해주고 약한 자를 구원하기에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황제는 선왕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가 요청하는 것을 기꺼이 들어 주셨으며, 가벼운 수레와 빠른 말, 좋은 의복과 훌륭한 약품을 하루에도 여러번 주어 특별히 우대하였습니다. 이렇게 은혜를 입으며, 군사에 관한 토의를 하게 되니, 그들의 약속은 고기와 물의 관계처럼 서로 의지하였으며, 쇠와 돌에 새긴 것 보다 더 분명하였습니다. 두 분은 찬란한 대궐과 번화한 수도에서 주연을 벌였으며, 궁정의 연회에서 대화를 나누고, 군사에 대한 일을 의논하였습니다. 그들은 기일을 달리하여 서로 응원하기로 하고, 일시에 대규모의 군사를 동원하여 바다와 육지에서 전투를 벌렸습니다. 그 때는 변방의 잡초에 꽃잎이 매달리고, 느릅나무에는 열매가 매달리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주필 전투에는 문제가 직접 가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불쌍한 자들을 구휼하였으니, 이는 매우 정의로운 행동이었습니다. 이로부터 얼마 후, 산과 바다가 형상을 바꾸고 해와 달이 빛을 잃은 듯, 황제는 무기를 놓으셨고 왕도 역시 선왕의 뒤를 잇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바위와 칡이 서로 의지하듯 함께 토벌군을 일으켰고, 병기와 말을 정비하여 선대의 뜻을 따랐습니다. 그 후로 수십년이 흘러 중국은 국세가 흥성치 못하였으나 때때로 창고를 열어 일용할 물자를 공급하여 주었습니다. 신라를 위하여 중국의 군사를 일으키니, 중국에 유익한 일은 적고, 쓸 데 없는 일은 많았습니다. 이를 중지할 줄을 어찌 몰랐으리오마는, 선왕의 신의를 저버릴까 염려하여 그만 두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제는 강했던 적들이 이미 숙청되었고, 원수들은 나라를 잃었으며, 그 병사와 말과 재물을 왕이 또한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왕은 마땅히 정신과 육체를 헛되이 쓰지 말고, 안팎이 서로 도와 병기를 녹이고 허욕에 눈뜨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실정에 알맞는 일입니다. 후손에게 좋은 국책을 전해 주어, 그들을 평안하니 돕는다면, 역사는 이를 칭찬할 것이니, 이렇게 된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왕은 지금 평안한 국가의 기반을 버리고, 원칙을 지키는 정책을 싫어하여, 멀리는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가까이는 부친의 말씀을 어기며, 천시(天時)를 업신여기고, 이웃 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깨뜨리면서, 한 구석의 궁벽한 작은 땅에서, 집집마다 군사를 징발하고 해마다 전쟁을 일으켜, 젊은 과부가 곡식을 나르고, 어린 아이로 하여금 밭 일을 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나라를 지키자니 의지할 곳이 없고, 나아가 싸우려해도 대항할 능력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얻은 것을 잃게 되는 것이며, 있는 것을 없애는 것이요, 크고 작은 것이 짝맞지 아니하고, 순리
와 역리가 차례를 잃은 격이니, 이는 또한 활을 가지고 닭을 잡으러 가다가 마른 우물에 빠지는 위험을 못 보는 것과 같고, 사마귀가 매미를 잡으려다 참새가 자기를 덮치는 것을 모르는 것과 같으니, 이는 왕이 자신의 능력을 알지 못한 탓입니다. 만약 선왕이 살아 계실 때, 일찍부터 황제의 은혜를 입고도 음험한 생각을 품고, 거짓 예절로 정성을 내보이며, 자기의 사욕을 위하여 황제의 큰 공을 차지하려 하고, 앞에서는 구차하게 은혜를 바라고, 뒤에서 반역을 도모했다면, 이는 선왕의 단점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맹세는 반드시 황하가 허리띠처럼 좁아질 때까지 지켜질 것이며, 의리와 명분은 추상같이 엄정해야 할 것이니, 임금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충성이 아니오, 아버지의 뜻을 어기는 것은 효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왕은 충성과 배반의 두 가지를 한 몸에 지녔으니, 어찌 스스로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선왕과 지금의 당신이 하루 아침에 확고한 터전을 마련하게 된 것은, 모두 황제의 염려가 멀리 미쳤고, 그 위력이 서로를 협조하게 하였으며, 이에 따라 주와 군이 이어져 마침내 기반이 확고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선왕과 그대 왕이 번갈아 책명을 받았고, 스스로 신하임을 일컬어 왔던 것입니다. 왕은 앉아서는 경서를 읽고, 시와 예를 상세히 알면서도, 정의를 들으면 따르지 않고, 선을 보고도 경멸하며, 권모술수에 귀기울이니, 이는 눈과 귀가 어두운 것이며, 고귀한 가문의 기반을 소홀히 하는 것이니, 필경 귀신이 엿보는 결과를 맞아 들이게 될 것입니다. 선왕의 성대한 업적을 받들면서도 다른 뜻을 품고, 안으로는 충신을 없애고 밖으로는 강적을 불러 들이니, 이를 어찌 슬기롭다고 하겠습니까? 또한 고구려의 안승은 아직도 나이가 어리며, 패망 후의 마을과 성읍에는 주민이 반이나 줄어서, 자신의 거취에 스스로 의심을 품고 있으므로, 왕의 직위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본인 설 인귀의 병선은 돛을 펴고 깃발을 달아 북쪽 해안을 순시하면서도, 예전에 받은 신라의 고통을 불쌍히 여겨 차마 병사를 풀지 않았는데, 왕은 도리어 외부의 원조를 믿고 나와 대적하려 하니, 이것이 어찌된 잘못 입니까! 황제의 은덕은 끝이 없고, 어진 교화는 멀리 미치며, 사랑은 햇볕처럼 따스하여 봄날의 꽃잎 같이 밝게 비치나니, 멀리서 신라와 고구려가 꾸미는 일을 듣고도, 이를 염려할지언정 믿지 아니하고, 마침내 본인에게 명령하여 이 곳에 와서 자세한 사유를 알아 보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본인이 온 사정을 묻지도 않았고, 술과 고기를 보내 우리 군사를 먹이지도 않았으며, 마침내 군사를 언덕 밑에 숨기거나, 병기를 강 어구에 감추거나, 병사들을 숲속으로 숨어 다니게 하며, 풀이 무성한 언덕에서 가쁜 숨을 몰아 쉬게 하였습니다. 이는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해칠 군사를 양성하는 것이요, 우리가 서로 돕기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 나라의 대군이 출동하기 전에, 유격대가 먼저 대열을 정비하여 바다로 출동하니, 물고기는 놀라고 새들은 도망을 쳤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볼 때, 왕은 사람의 도리로 해야할 일을 스스로 찾아, 망령된 행위를 요행스럽게나마 그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무릇 큰 일을 하려는 자는 적은 이익을 탐하지 않으며, 높은 절개를 가진 자는 영명해야 합니다. 선량한 나라와 사귀지 못하면 적국이 엿보게 되는 법입니다. 고장군이 거느렸던 한 나라 기병이나 이 근행이 거느렸던 번병, 오 나라 초 나라의 용감한 수군들과 북방의 사나운 군사들이 사방에서 운집하여, 병선을 열지어 내려가서, 험한 곳에 의지하여 진지를 쌓고, 그들이 귀국의 땅을 개간하여 밭을 갈게 된다면, 이는 왕에게 치유될 수 없는 병이 될 것입니다. 왕이 만약 전쟁에 지친 병사들로 하여금 평화의 노래를 부르게 한다면, 잘못된 일도 단번에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니, 왕은 사유를 모두 말하고 우리와의 관계를 명백히 말씀하십시오! 본인 설 인귀는 일찌기 황제의 행차를 수행했을 때, 직접 황제로부터 위임을 받았으니, 이제 보고문을 기록하여 황제에게 상주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모든 일이 밝게 해결될 것인데, 왕은 왜 그리 초조하여, 스스로 복잡하게 소동을 부립니까? 슬픈 일입니다. 옛날에는 충의를 다하다가, 이제는 역신이 되었으니, 처음의 좋은 관계가 나중에 와서 나빠진 것이 유감이며, 근본은 같았는데 말단이 달라진 것이 원망스럽습니다. 바람은 높고 날씨는 차며, 나뭇잎은 떨어져 한 해가 슬프게 흘러 가는데, 산자락에 기대어 먼 곳을 바라보니 가슴 아픈 회포가 떠오릅니다. 왕은 마음이 밝고 풍신이 준수하니,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원칙으로 돌아가 당 나라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때에 따라 제향을 받을 것이요, 왕통이 바뀌지 않고 이어질 것이니, 이러한 행운을 선택하고, 복을 받아 들이는 것이 바로 왕의 정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삼엄한 군진 사이로 사절이 내왕하니, 이제 왕의 휘하에 있는 스님 임윤에게 편지를 맡겨, 몇가지 본인의 의견을 말씀드립니다."
대왕의 답장은 다음과 같았다.
"선왕께서 정관 22년에 입조하여, 태종 문황제의 은혜로운 조칙을 직접 받았으니, 그 조칙에는 '내가 지금 고구려를 치려는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너희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끼어 매번 침해를 받아 편안한 날이 없음을 가련히 여겼기 때문이다. 산천도 토지도 내가 탐하는 것이 아니며, 재물도 자녀도 모두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내가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 백제의 토지는 전부 너희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토록 하려 한다'고 하면서 계획을 지시하고, 군사의 동원 기일을 정하여 주었다. 신라 백성들이 모두 이 은혜로운 조칙을 듣고, 사람마다 힘을 기르고 집집마다 동원되기를 기다렸었다. 그러나 대업이 끝나기도 전에 문제가 먼저 세상을 떠나시고 지금 황제가 위에 오르자, 선대 황제의 은혜가 이어져, 지난 날보다 더욱 자주 은덕을 입었다. 나의 형제와 아들이 귀한 선물과 관직을 받았고, 영광스러운 총애는 지극하였으니, 이는 예전에 없던 일이었다. 이에 따라 몸이 가루가 되고 뼈가 부서지도록 시키는 일을 다하려 하였으며, 비록 우리의 간과 뇌가 평원을 덮더라도, 은혜의 만분지 일이나마 보답코자 하였다. 현경 5년에 황제는 선대 황제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여겼으니, 전일에 남겨 둔 대업을 이루기 위하여 전함을 띄우고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대부대의 수군을 동원하였다. 당시 무열왕은 늙고 힘이 없어 행군을 견디기 어려웠으나, 예전의 은혜를 추모하는 감정으로, 억지로 국경까지 나왔으며, 나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귀국의 군대를 영접하게 하였다. 동서가 호응하며 수륙 양군이 함께 진격하여, 수군이 겨우 강 어구에 들어올 즈음 육군은 이미 대부대의 적군을 격파하였다. 이리하여 두 나라 군사가 함께 백제의 수도에 이르러 백제 전국을 평정하였다. 평정 후에 선왕은 소정방 대총관과 함께 뒷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당 나라 군사 1만을 머물게 하고, 신라도 또한 아우 인태에게 군사 7천을 주어, 그들과 함께 웅진을 지키게 하였다. 당 나라 군사가 돌아간 뒤에 적의 신하 복신이 강의 서쪽 지방에서 봉기하여 백제의 유민을 모아 부성(사비성)을 포위하였는데, 먼저 바깥 성책를 부수어 군수품을 탈취하고, 다시 부성(사비성)을 공격하여 거의 함락될 상황이 되었다. 또한 부성(사비성) 부근 네 곳에 성을 쌓아, 부성(사비성)을 포위한 채 수비하고 있으므로 부성(사비성)에 출입할 수 없었다. 이 때 나는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서 포위를 풀고, 사면의 적의 성을 한꺼번에 모두 격파하여, 우선 그들의 위급함을 구원하였고, 다시 군량을 수송하여 마침내 1만 명의 당 나라 군사들로 하여금 범의 아가리에 든 위험을 면하게 하였으며, 그 곳에 남아 수비하던 굶주린 군사들로 하여금 자식을 바꾸어 잡아 먹는 참상에서 벗어나도록 하였다. 6년에 이르러 복신의 도당이 점점 증가하여 강의 동쪽 땅을 침탈하였으므로, 웅진의 당 나라 군사 1천 명이 가서 적을 공격하다가 오히려 적에게 격파 당하여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 전투의 패배 이후 웅진으로부터 구원병의 요청이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그 당시 신라에는 전염병이 많이 돌아 군마를 징발할 수가 없었으나, 그들의 애타는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워 드디어 군사를 파견하여 주류성을 포위하였다. 적은 우리 군사가 적은 것을 알고 나와 공격하여, 우리의 군마는 크게 손상 당했고, 결국 우리는 승리하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남쪽 지방의 여러 성들이 일시에 반란을 일으키고 복신에게 복속하니, 복신이 승세를 타고 다시 부성(사비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따라 웅진으로 가는 길이 즉시 차단되어 소금과 된장이 떨어졌으므로, 건장한 청년들을 모집하여 다른 길로 몰래 소금을 보내 곤핍해진 그들을 구원하였다. 6월에 이르러 선왕이 돌아가시자 장례를 겨우 끝냈는데, 상복도 미쳐 벗지 못한 상황이었으므로 군사를 웅진으로 보내지 못하였던 바, 황제의 칙서가 내려 군사를 북방으로 보내라고 하였다. 그 때, 함자도 총관 유 덕민 등이 왔는데, 그들은 신라로 하여금 평양으로 군량을 운반하게
 하라는 황제의 칙명을 전하였다. 이 때 웅진에서 사람을 보내와 부성(사비성)이 고립되어 위태롭다는 사정을 자세히 전하였다. 유 총관이 나와 함께 일을 처리하면서 스스로 '만약 먼저 평양으로 군량을 보낸다면, 웅진 길이 차단될 것이오, 웅진 길이 차단된다면 그 곳에 주둔하고 있는 당 나라 군사가 바로 적의 손아귀에 들어 갈 것이 걱정된다'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유 총관은 드디어 나와 동행하여 우선 옹산성을 공격하였다. 옹산을 점령하고 이어 웅진에 성을 쌓고, 웅진 길을 개통시켰다. 12월에 이르러 웅진의 군량이 모두 소진되었다. 그러나 먼저 웅진으로 군량을 보낸다면 칙령을 어긴다는 문제가 있었고, 평양으로 군량을 보낸다면 웅진의 군량이 끊길 것이 염려 되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노약자를 시켜 웅진으로 군량을 운반하고, 건장한 장병은 평양으로 향하도록 하였다. 웅진으로의 군량 수송 도중에 눈이 내려 사람과 말이 모두 죽어서 백 명에 한 명도 살아 돌아오지 못하였다. 용삭 2년 정월, 유 총관이 신라 양하도 총관 김 유신 등과 함께 평양으로 군량을 보냈다. 이 때 궂은 비가 한 달 이상 계속 내리고 눈과 바람으로 날씨가 몹시 추웠기 때문에 사람과 말이 동상을 입어 군량을 전할 수 없었다. 평양의 당 나라 군사들은 귀국을 원했다. 신라 군사들도 양식이 떨어져 역시 귀환하였다. 군사들은 굶주림과 추위 때문에 손발에 동상이 걸려 도중에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행군이 호로하에 이르자 고구려 군사가 뒤를 따라와 언덕에 진을 쳤다. 신라 군사들은 오래도록 피곤한 상황이었으나, 적이 멀리까지 따라 올까 염려하여, 적이 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강을 건너가서 접전을 벌였는데, 선봉대가 잠시 교전하는 사이에 적이 와해되고 말았으므로, 마침내 군사를 거두어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 온 군사들이 집에 도착한 지 한 달도 못되어, 웅진 부성에서는 여러 차례 곡식을 요청하였다. 이 때 앞뒤에 보낸 곡식이 수만여 곡이었다. 이와 같이 소국 신라가 남으로는 웅진, 북으로는 평양으로 소국 신라가 두 군데나 공급을 하고 보니, 인력은 극도로 피로하고 소와 말은 모두 죽었으며, 농사 지을 시기를 놓쳐서 흉년이 들고, 저축해 두었던 창고의 양식은 두 지역의 수송으로 모두 없어졌으므로 신라의 백성들에게는 풀뿌리도 모자랐는데, 웅진에 있는 당 나라 군사들에게는 식량이 남아 돌았다. 또한 진에 주둔하는 당 나라 군사들은 집 떠난 지가 오래되어 옷이 헤어져 몸에 걸칠 성한 의복이 없었다. 이에 따라 신라에서는 백성들을 독려하여 철에 맞는 의복을 지어 보냈다. 도호 유 인원은 멀리 고립된 성을 수비하는데, 사면이 모두 적이어서 항상 백제의 포위를 당하였으므로 언제나 신라의 구원을 받았다. 1만 명의 당 나라 군사가 4년 동안 신라의 식량을 먹고 신라의 의복을 입었으니, 유 인원 이하 모든 병사들의 가죽과 뼈는 비록 중국 땅에서 났으나, 피와 살은 모두 신라의 것이었다. 당 나라의 은택이 비록 대단하다고 하지만, 신라가 바친 충성도 또한 가볍게 여길 만한 것은 아니었다.
용삭 3년에 이르러 총관 손 인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부성을 구원할 때, 신라의 병마도 역시 참여하여 행군이 주류성에 이르렀었다. 이 때 왜국의 수군이 와서 백제를 돕게 되어, 왜선 일천 척이 백강에 머물러 있었으며, 백제의 정예 기병들이 강가에서 배를 수비하고 있었다. 신라의 정예 기병들이 당 나라 군의 선봉이 되어 먼저 강가의 진지를 격파하니, 주류성은 사기를 잃고 마침내 항복하였다. 남쪽 지방이 평정되자 군사를 돌려 북방을 치는데 임존성 한 곳이 미욱하게도 항복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두 군대가 협력하여 그 성을 함께 공격하였으나, 그들이 성을 굳게 수비하고 강력히 저항하였기 때문에 승리할 수 없었다. 신라는 즉시 회군하고자 하였으나 두대부가 '칙령에 의하면 백제를 평정한 후에는 모두가 함께 맹약을 하게 되어 있으니, 임존성 하나가 비록 항복하지 않았더라도 모두 모여 맹약을 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신라는, 칙령대로라면 '완전한 평정' 이후에 맹약의 회합을 가져야 하며, 임존이 평정되지 않았으므로 '완전한 평정'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신라는 또한, 백제는 모든 행동이 간사하여 향후의 행동 변화를 예측할 수 없으니, 지금 비록 함께 모여 맹약을 하더라도, 뒤에 가서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 염려되므로, 맹약을 하지 않겠다고 황제에게 주청하였다. 인덕 원년에 다시 엄한 칙령이 내려 맹약하지 않은 것을 질책하였으므로, 나는 즉시 사신을 웅령으로 파견하여 제단을 쌓아놓고 모두 함께 모여 맹약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맹약을 한 지역을 두 나라의 경계로 삼았다. 맹약의 행사는 비록 우리가 원한 바는 아니었지만 감히 칙령을 어길 수 없어 행한 것이었다. 또한 다시 취리산에 제단을 쌓고 칙사 유 인원과 마주하여 피를 입에 머금으면서 산하를 두고 맹약하였는데, 맹약의 내용은 경계를 확정하고 봉토를 쌓아서 이를 영원한 국토로 삼아, 백성들이 거주하고 저마다 생업을 경영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건봉 2년에, 대총관 영국공이 요동을 공격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한성주에 갔으며, 그 곳에서 군사를 파견하여 국경에 집합하도록 하였다. 신라 군사가 단독으로 들어가서는 안되겠기에 먼저 3회에 걸쳐 정탐을 보내고, 배를 잇달아 보내 당 나라 군사의 상황을 알아 보았었다. 정탐꾼들이 돌아와서 한결같이 '당 나라 군사가 아직 평양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우선 고구려의 칠중성을 공격하여 길을 열어 놓고, 당 나라 군대가 오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 성이 거의 함락되려 할 때, 영공의 사자인 강심이 와서 '신라 군사가 반드시 성을 공격할 필요는 없으니, 평양으로 조속히 군대를 파견하여 병기와 군량을 공급하라는 대총관의 명령이 있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리하여 명령을 내려 군대를 모아 행군하여 수곡성에 당도하자, 당 나라 군사가 이미 회군하였다는 말을 듣게되어 신라 군사도 그 곳을 즉시 빠져 나왔다.
건봉 3년, 대감 김 보가를 시켜 해로를 통하여 요동에 들어가 영공의 명령을 받아오도록 하였는데, 그는 신라 군사를 평양에 집합시키라는 분부를 받아 왔다. 5월에 이르러 유 우상이 와서 신라의 군사를 동원하여 함께 평양으로 갔다. 나도 역시 한성주로 가서 군사들을 검열하였다. 이 때 번군 한군 모두가 사수에 집결하니, 남건도 출병하여 결전을 하고자 하였다. 신라 군사가 단독으로 선봉이 되어 먼저 큰 진을 격파하니, 평양 성중의 기세가 꺾였다. 그후 영공이 다시 신라의 정예 기병 5백 명을 선발하여 먼저 성문으로 들어가 마침내 평양을 격파하는 큰 공을 세웠다. 이에 신라 군사들이 모두 '정벌을 시작한지 9년이 이미 지나 인력은 소진되었으나 마침내 두 나라를 평정하여 누대에 걸친 소망을 오늘에야 이루었으니, 나라는 충성을 다한 은혜를 입은 것이요, 백성들은 힘을 다한 상을 받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영공이 '신라가 이전에 군사의 동원 기일을 지키지 않았으니, 반드시 조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소문이 있어, 신라 군사들이 이 소문을 듣고 더욱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또한 공을 세운 장군들이 모두 기록되어 당 나라 서울에 전달되었는데 '지금 신라에는 아무런 공이 없다'는 말이 나왔다. 그 장군들이 돌아오자 백성들의 공포심이 더하였다. 또한 비열성은 본래 신라 땅이었는데, 고구려가 빼앗은지 30여 년 만에 신라가 다시 이 성을 회복하여 백성들을 이주시키고 관리를 두어 수비했으나, 당 나라는 이 성을 다시 빼앗아 고구려에 돌려 주었다. 신라가 백제를 평정할 때부터 고구려를 평정할 때까지, 충성을 바치고 힘을 다하여 당 나라를 배반하지 않았는데, 무슨 죄가 있기에 하루 아침에 이렇게 신라를 저버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신라는 비록 이와 같은 억울한 일을 당하였지만 끝까지 배반할 마음은 없었다. 총장 원년에 백제는 앞서 모여 맹약하였던 곳에서 경계를 옮기고, 경계 표시를 바꾸어 전지를 침탈하였으며, 우리의 노비들을 달래고 백성들을 유혹하여 내지로 데려가 숨겨 놓고는, 우리가 여러 번 찾아도 끝까지 돌려 보내지 않았다. 또한 '당 나라가 배를 수리하면서 밖으로는 왜국을 정벌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신라를 공격하려는 것이다'라는 소문이 들려오니, 백성들은 이 소식을 듣고 놀라고 두려워 하면서 불안하게 지냈다. 또한 백제 여자를 데려다가 신라의 한성 도독 박 도유에게 시집 보내고, 그와 음모하여 신라의 병기를 훔쳐서 어떤 한 주를 습격하려 하였으나, 다행히 일이 발각되어 즉시 도유를 참수하였기에 음모가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함형 원년 6월, 고구려가 모반하여 당 나라 관리를 모두 죽였다. 신라는 바로 군사를 출동시키고자, 먼저 웅진에 알리기를 '고구려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황제의 신하이니 반드시 함께 흉적을 토벌하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군사의 출동은 상호 토론해야할 문제이니, 청컨대 관인을 이 곳에 파견하여 함께 토벌을 계획하여 보자'라고 하였는데, 백제의 사마 니군이 이 곳에 와서 의논하는 중에 말하기를 '군사를 동원한 뒤에 서로가 의심할 수 있으니, 응당 신라와 백제의 두 편 관인을 상호 인질로 교환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김 유돈과 부성의 백제 주부 수미, 장귀 등을 부로 파견하여, 인질 교환의 문제를 의논하게 하였다. 백제는 인질의 교환에 찬성하기는 하였으나, 성 안에서는 여전히 병마를 모아 성 아래에 있다가 밤이 되면 나와서 공격을 했다.
7월에 당 나라에 갔던 사신 김 흠순 등이 귀국하여, 장차 경계를 확정할 것인데, 지도에 의하여 백제의 옛 국토를 조사하여, 백제의 국토는 백제로 돌려줄 것이라고 말했다. 황하가 아직 마르지 않았고, 태산이 아직 닳지 않았거늘, 3,4년 사이에 주었다가 다시 빼앗으니, 신라 백성들이 모두 원래 바라던 바가 아니라고 실망하면서, '신라와 백제는 누대에 걸친 철천지 원수인데, 지금 백제의 정황을 보면 스스로 별도의 한 국가를 세우고 있는 것이니, 백년 이후에는 우리 자손들이 반드시 그들에 의하여 멸망될 것이다. 신라는 원래 당 나라의 한 지방이므로 두 나라로 나뉘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원컨대 이를 한 집안으로 만들어 영원히 후환을 없애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작년 9월에 이러한 사정을 모두 기록하여, 사신을 보내 상주를 올리고자 하였으나 바다에서 표류하여 돌아오고 말았다. 이에 다시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역시 당 나라에 도착할 수 없었다. 그 후에는 바람이 차고 풍랑이 심하여 결국 상주를 올리지 못했다. 백제는 거짓으로 '신라가 반역한다'고 상주하였다. 신라는, 앞으로는 당 나라 고관의 심정적 후원을 잃고, 뒤로는 백제의 참소를 당하여, 어떻게 행동하든 언제나 질책만 당하였으므로 충성심을 보일 길이 없었다. 황제는 이와 같은 참소를 날마다 들었으므로, 변함 없는 충성을 한 번도 황제에게 보일 수 없었던 것이다. 사자 임 윤이 전하는 편지를 보니, 총관이 풍파를 무릅쓰고 멀리 해외에서 왔다하므로, 도리상 사신을 교외에 파견하여 영접하고 고기와 술을 올려야만 할 것이나, 다른 지역에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예를 갖추지 못하고 영접을 못 한 것이니, 청컨대 크게 탓하지 말라. 총관의 편지를 보면 전적으로 신라가 반역을 한 것으로 취급되어 있으나, 이는 본심이 아니었으니, 걱정스럽고 놀랍고 두려운 심정이다. 우리가 기울인 노력을 조목 조목 말하면 욕된 꾸지람이나 들을까 걱정되어 입을 다물고 질책을 받으려 하였으나, 이리하면 또한 사정을 모르는 당 나라가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도 있으므로, 이제 억울한 사정을 대략이라도 설명하여 우리가 반역할 뜻이 없었음을 상세하게 글로 쓰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당 나라는 사신 한 명 보내어 근본적인 사유를 물은 적이 없다. 그리고 곧바로 우리의 터전을 뒤엎고자 수만의 군사를 파견하였으니, 병선은 창해를 덮어 배의 수미가 강 어구에 줄을 이었고, 저들 웅진을 독촉하여 우리 신라를 공격하려 하고 있다. 아아! 고구려와 백제가 평정되기 전에는 사냥개처럼 심부름을 시키더니, 들짐승이 없어진 지금에는 도리어 삶아 먹히는 사냥개의 박해를 당하고 있도다. 잔악한 백제는 오히려 옹치의 상을 받고, 당 나라에 희생 당한 신라는 이미 정공의 죽음을 당하였도다. 태양이 비치지 않건마는 해바라기와 콩잎의 본심은 오히려 해를 향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 총관은 영웅의 기상을 받고 태어났으며, 장수와 재상의 높은 재기를 갖추었고, 일곱 가지 덕을 겸비하였으며, 아홉가지 종류의 학술을 섭렵하였는데, 삼가 천벌을 주는 데 있어 함부로 죄없는 자에게 죄를 주려 하는가? 황제의 군대가 출동하기 이전에 그대는 먼저 그 근본 이유를 물었어야 할 것이다.
이번에 보내는 편지를 계기로 우리가 배반하지 않은 사정을 설명하노니, 청컨대 총관은 깊이 생각하여 실상을 정리하여 황제께 상주하라. 계림주대도독좌위대장군개부의동삼사상주국신라왕김법민이 말하노라."
소부리주를 설치하고 아찬 진왕을 도독으로 임명하였다.
9월, 당 나라 장군 고간 등이 번병 4만을 거느리고 평양에 도착하여,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고 대방을 침범하였다.
겨울 10월 6일, 당 나라 수송선 70여 척을 공격하여, 낭장 겸이대후와 군사 백여 명을 사로잡았다.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셀 수 없었다. 이 싸움에서 급찬 당천의 공로가 제일이었으므로 사찬의 직위를 주었다.

○十二年春正月, 王遣將攻<百濟><古省城>, 克之. 二月, 攻<百濟><加林城>, 不克. 秋七月, <唐>將<高保{高侃}> 率兵一萬, <李謹行>率兵三萬, 一時至<平壤>, 作八營留屯. 八月, 攻<韓始城>·<馬邑城>, 克之進兵, 距<白水城>五百許步作營, 我兵與<高句麗>兵逆戰, 斬首數千級. <高保{高侃}> 等退, 追至<石門>戰之, 我兵敗績, 大阿 <曉川>·沙 <義文>·<山世>·阿 <能申>·<豆善>·一吉 <安那含>·<良臣>等死之. 築<漢山州><晝長城>, 周四千三百六十步. 九月, 彗星七出北方. 王以向者<百濟>往訴於<唐>, 請兵侵我, 事勢急迫, 不獲申奏, 出兵討之. 由是, 獲罪大朝, 遂遣級 <原川>·奈麻<邊山>及所留兵船郞將<鉗耳大侯>·<萊州>司馬<王藝>·<本烈州>長史<王益>·<熊州>都督府司馬< 軍{ 軍}> ·<曾山>司馬<法聰>·軍士一百七十人, 上表乞罪曰: "臣某死罪謹言, 昔臣危急, 事若倒懸, 遠蒙拯救, 得免屠滅. 粉身 骨, 未足上報鴻恩, 碎首灰塵, 何能仰酬慈造? 然深讐<百濟>, 逼近臣蕃, 告引天兵, 滅臣雪恥. 臣忙{懼} 破滅, 自欲求存, 枉被凶逆之名, 遂入難赦之罪. 臣恐事意未申, 先從刑戮, 生爲逆命之臣, 死爲背恩之鬼, 謹錄事狀, 冒死奏聞, 伏願少垂神聽, 炤審元由. 臣前代已來, 朝貢不絶, 近爲<百濟>, 再虧職貢, 遂使聖朝出言命將, 討臣之罪, 死有餘刑. <南山>之竹, 不足書臣之罪, <褒斜>之林, 未足作臣之械.  池宗社, 屠裂臣身, 事聽勅裁, 甘心受戮. 臣 轝在側, 泥首未乾, 泣血待朝, 伏聽刑命. 伏惟: 皇帝陛下, 明同日月, 容光 蒙曲炤, 德合乾坤, 動植咸被亭毒, 好生之德, 遠被昆蟲, 惡殺之仁, 爰流翔泳.  降服捨之宥, 賜全腰領之恩, 雖死之年, 猶生之日. 非所希冀, 敢陳所懷, 不勝伏劒之志. 謹遣<原川>等, 拜表謝罪, 伏聽勅旨. 某頓首頓首, 死罪死罪." 兼進貢銀三萬三千五百分, 銅三萬三千分, 針四百枚, 牛黃百二十分, 金百二十分, 四十升{綜} 布六匹, 三十升{綜} 布六十匹. 是歲,  貴人飢.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12년 봄 정월, 왕이 장수를 보내 백제 고성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2월에 백제 가림성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가을 7월, 당 나라 장수 고간이 군사 1만, 이근행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동시에 평양에 와서 여덟 개의 군영을 짓고 주둔하였다. 8월에 한시성과 마읍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그들은 군대를 진군시켜 백수성으로부터 5백여 보 떨어진 곳에 군영을 설치하였다. 우리 군사와 고구려 군사가 그들과 격전을 벌여 수천 명의 머리를 베었다. 고간 등이 퇴각하자, 이를 추격하여 석문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우리 군사가 패배하고, 대아찬 효천·사찬 의문·사찬 산세·아찬 능신·아찬 두선·일길찬 안나함·일길찬 양신 등이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으니 둘레가 4천 3백 60보였다.
9월, 혜성이 일곱 번 북방에 나타났다.
얼마 전 백제가 당 나라에 가서 호소하고 군사를 빌려 우리를 침략하자, 왕은 사세가 급박하여 황제에게 알리지 않고 출병하여 이를 토벌하였다. 이 때문에 당 조정에 죄를 지었으므로, 마침내 급찬 원천·내마 변산과 억류했던 병선낭장 겸이대후·내주 사마 왕예·본열주 장사 왕익·웅주 도독부 사마 니군·증산 사마 법총과 군사 1백 70명을 당 나라에 보내면서 청죄하는 다음과 같은 표를 올렸다.
"저는 죽을 죄를 짓고 삼가 말씀 드립니다. 예전에 제가 위급하여 어려운 지경에 처하였을 때, 먼 곳에서 와서 구원해주어 제가 멸망을 면했습니다. 그러하니 몸을 부수고 뼈를 갈아도 그 크나큰 은혜에 보답하기가 부족할 것이며, 머리를 부수어 재와 먼지가 되더라도 어찌 그 자비의 덕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철천지 원수 백제는 우리의 변경을 핍박하고, 황제에게 청병하여 우리를 멸망시키고 원수를 갚으려 하였습니다. 저는 파멸이 두려워 우리의 생존을 추구하려다가, 억울하게도 흉악한 역적의 취급을 받게 되었고, 마침내 용서받기 어려운 죄를 지은 셈이 되었습니다. 제가 일을 저지른 의도를 말하지 않은 채 먼저 형벌을 당한다면, 살아서는 명령을 거역한 신하가 될 것이요, 죽어서는 은혜를 배반한 귀신이 될까 염려되어, 삼가 사실을 기록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마음을 기울여 들어 주시고 근본적인 사유를 밝게 살펴주기를 원합니다. 저는 선대 이래로 조공을 하지 않은 적이 없으나, 근자에 백제 때문에 두 번 조공을 하지 않아 마침내 황제의 조정에 의론을 일으키고, 장수에게 명하여 저의 죄를 성토하게 하였으니, 죽은 후에도 받아야 할 벌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남산의 대나무도 저의 죄를 적기에 부족할 것이요, 포야산의 나무도 저의 착고를 만드는데 부족할 것이니, 종묘와 사직을 연못으로 만들고, 저를 죽여 몸을 찢어 버리더라도, 이 사정을 듣고나서 친히 판단하여 주신다면 기꺼이 형벌을 받겠습니다. 저는 부왕의 관과 상여를 옆에 두고, 머리의 진흙이 마르지 않은 채로, 피눈물을 흘리면서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며 삼가 형벌에 관한 명령을 듣겠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황제 폐하의 밝음이 해와 달 같아서 그 광명이 세상 어느 곳이나 골고루 비치며, 덕은 천지와 같아서 동식물이 모두 그 덕으로 자라나며,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은 멀리 곤충에게도 미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어진 마음은 날짐승과 물고기에게도 미치고 있습니다. 만일 용서를 내려 머리와 허리를 베지 않는 은혜를 베푸신다면, 제가 죽어야 하는 날이 오히려 태어나는 날로 변할 것입니다. 바라기는 어려우나 감히 생각한 바를 아뢰옵자니 황공한 심정을 누를 길이 없습니다. 삼가 원천 등을 보내 글을 올려 사죄하며, 엎드려 칙명을 듣고자 합니다. 황송하고 황송하여 저는 머리를 조아리고 조아립니다."
이와 동시에 은 3만 3천 5백 푼, 구리 3만 3천 푼, 바늘 4백 개, 우황 1백 20푼, 금 1백 2십 푼, 40승포 6필, 30승포 60필을 진상하였다.
이 해에 곡식이 귀하여 사람들이 굶주렸다.

○十三年春正月, 大星隕<皇龍寺>, <在城>中間(+地震) . 拜<强首>爲沙 , 歲賜租二百石. 二月, 增築<西兄山城>. 夏六月, 虎入大宮庭, 殺之. 秋七月一日, <庾信>卒. 阿 <大吐>謀叛付<唐>, 事泄伏誅, 妻 充賤. 八月, 以波珍 <天光>爲中侍. 增築<沙熱山城>. 九月, 築<國原城>[<古 長城>]·<北兄山城>·<召文城>·<耳山城>·<首若州><走壤城>[一名<迭巖城>]·<達含郡><主岑城>·<居烈州><萬興寺山城>·< 良州><骨爭峴城>. 王遣大阿 <徹川>等, 領兵船一百 , 鎭西海. <唐>兵與<靺鞨><契丹>兵來侵北邊, 凡九戰, 我兵克之, 斬首二千{百} 餘級. <唐>兵溺<瓠瀘>·<王逢>二河, 死者不可勝計. 冬, <唐>兵攻<高句麗><牛岑城>, 降之. <契丹>·<靺鞨>兵攻<大楊城>·<童子城>, 滅之. 始置外司正, 州二人郡一人. 初, <太宗王>滅<百濟>, 罷戍兵, 至是復置.

趙炳舜. 『三國史節要』, 『三國史記』 列傳.趙炳舜. 『三國史節要』.
13년 봄 정월, 큰 별이 황룡사에 떨어지고, 재성에 지진이 발생하였다.
강수를 사찬으로 임명하고, 해마다 벼 2백 석을 주기로 하였다.
2월, 서형산성을 증축하였다.
여름 6월, 호랑이가 대궁 뜰에 들어오자 잡아 죽였다.
가을 7월 1일, 유신이 사망하였다.
아찬 대토가 모반하여 당 나라에 붙으려다가, 사건이 누설되어 사형을 받았으며, 처자는 천인에 편입되었다.
8월, 파진찬 천광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사열산성을 증축하였다.
9월, 국원성[예전의 난완성]·북형산성·소문성·이산성·수약주의 주양성[혹은 질암성]·달함군의 주잠성·거열주의 만흥사산성·삽량주의 골쟁현성을 쌓았다.
왕이 대아찬 철천 등을 보내 병선 1백 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수비하게 하였다. 당 나라 군사가 말갈·거란 군사와 함께 와서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아홉 번 전투에서 우리 군사가 승리하였고, 2천 명의 머리를 베었다. 호로·왕봉 두 강에 빠져 죽은 당 나라 군사가 이루 셀 수 없었다.
겨울에 당 나라 군사가 고구려 우잠성을 쳐서 항복을 받았다. 거란과 말갈 군사가 대양성과 동자성을 쳐서 멸망시켰다.
처음으로 주에 2인, 군에 1인의 외사정을 두었다. 애초에 태종왕이 백제를 멸하고 수자리 군사를 없앴던 것을 이 때 다시 두게 되었다.

○十四年春正月, 入<唐>宿衛大奈麻<德福傳>, 學曆術還, 改用新曆法. 王納<高句麗>叛衆. 又據<百濟>故地, 使人守之. <唐><高宗>大怒, 詔削王官爵, 王弟右驍衛員外大將軍<臨海郡>公<仁問>在京師, 立以爲<新羅>王, 使歸國, 以左庶子同中書門下三品<劉仁軌>爲< 林>道大摠管, 衛尉卿<李弼>·右領軍大將軍<李謹行>副之, 發兵來討. 二月, 宮內穿池造山, 種花草, 養珍禽奇獸. 秋七月, 大風毁<皇龍寺>佛殿. 八月, 大閱於<西兄山>下. 九月, 命<義安>法師爲大書省, 封<安勝>爲<報德王>.[十年, 封<安勝><高句麗>王, 今再封, 不知<報德>之言, 若歸名等耶, 或地名耶.] 幸<靈廟寺>前路閱兵, 觀阿 <薛秀眞>六陣兵法.

14년 봄 정월, 당 나라에 갔던 숙위 대내마 덕복전이 역술을 배우고 돌아와, 그 때까지 사용하던 역법을 새 역법으로 고쳐 사용하였다.
당 나라에 반기를 든 고구려 백성들을 왕이 받아 들이고, 또한 백제의 옛 땅을 점거하여 관리로 하여금 수비하게 하였다. 당 나라 고종이 크게 노하여 조서를 내려 왕의 관작을 없애고, 당 나라에 있던 왕의 아우 우효위 원외 대장군 임해군공 인문을 신라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고, 좌서자 동중서문하 3품 유 인궤를 계림 방면 대총관으로 삼고, 위위경 이 필과 우령군 대장군 이 근행을 부관으로 삼아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해왔다.
2월, 대궐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었으며, 진기한 새와 짐승들을 길렀다.
가을 7월, 큰 바람이 불어서 황룡사 불전이 훼손되었다.
8월, 서형산 아래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9월, 의안 법사를 대서성으로 삼고, 안승을 보덕왕으로 봉하였다.[10년에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는데, 지금 두 번째 봉하였으니, 보덕이라는 이름이 귀명 등과 같이 불교적 용어인지 아니면 지명인지 알 수 없다.]
왕이 영묘사 앞길에 나가 군대를 사열하고, 아찬 설 수진의 육진 병법을 관람하였다.

○十五年春正月, 以銅鑄百司及州郡印, 頒之. 二月, <劉仁軌>破我兵於<七重城>. <仁軌>引兵還, 詔以<李謹行>爲<安東>鎭撫大使, 以經略之. 王乃遣使, 入貢且謝罪, 帝赦之, 復王官爵. <金仁問>中路而還, 改封<臨海郡>公. 然多取<百濟>地, 遂抵<高句麗>南境爲州郡. 聞<唐>兵與<契丹>·<靺鞨>兵來侵, 出九軍, 待之. 秋九月, <薛仁貴>以宿衛學生<風訓>之父<金眞珠>, 伏誅於本國, 引<風訓>爲鄕導, 來攻<&泉城{白水城}> . 我將軍<文訓>等, 逆戰勝之, 斬首一千四百級, 取兵船四十 . <仁貴>解圍退走, 得戰馬一千匹. 二十九日, <李謹行>率兵二十萬, 屯<買肖城>, 我軍擊走之, 得戰馬三萬三百八十匹, 其餘兵仗, 稱是. 遣使入<唐>貢方物. 緣<安北河>設關·城, 又築<鐵關城>. <靺鞨>入<阿達城>劫掠, 城主<素那>逆戰死之. <唐>兵與<契丹>·<靺鞨>兵來, 圍七重城, 不克. 小守<儒冬>死之. <靺鞨>又圍<赤木城>滅之, 縣令<脫起>率百姓, 拒之, 力竭俱死. <唐>兵又圍<石峴城>, 拔之, 縣令<仙伯>·<悉毛>等, 力戰死之. 又我兵與<唐>兵大小十八戰, 皆勝之, 斬首六千四十七級, 得戰馬二百匹.

李丙燾.
[북한본].
15년 봄 정월, 모든 관청과 주와 군의 인장을 구리로 주조하여 나누어 주었다.
2월, 유 인궤가 우리 나라 군사를 칠중성에서 격파하였다. 인궤가 군사를 이끌고 귀국하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 이 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아 그 곳 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왕이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또한 사죄하니 황제가 이를 용서하고 왕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귀국하던 김 인문이 당 나라로 돌아가자, 그를 임해군공으로 바꾸어 봉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백제의 땅을 많이 빼앗아 마침내 국경이 고구려 남쪽 지방에 이르렀고, 그 곳을 주와 군으로 만들었다.
당 나라 군사가 거란과 말갈 군사와 함께 침범한다는 소문을 듣고, 구군(九軍)을 출동시켜 이에 대비하였다.
가을 9월, 설 인귀가 숙위 학생 풍훈의 아버지 김 진주가 본국에서 사형을 당했다고 하여, 그것을 빌미로하여 풍훈을 향도로 삼아 천성을 공격하였다. 우리 장군 문훈 등이 그들과 싸워 이기고, 1천 4백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병선 40척을 빼앗았다. 설 인귀가 포위를 풀고 퇴각하매, 우리는 전마 1천 필을 얻었다.
29일, 이 근행이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매초성에 주둔하자, 우리 군사가 그들을 격퇴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3만 3백 80필의 전마와 그 이외에 이에 상당하는 병기도 얻었다.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안북하를 따라 관문과 성을 건설하고 또한 철관성을 쌓았다.
말갈이 아달성에 들어와 약탈을 시작하자, 성주 소나가 그들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당 나라 군사가 거란 및 말갈 군사와 함께 칠중성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소수 유동이 전사하였다. 말갈이 또 적목성을 포위 공격하자, 현령 탈기가 백성들을 이끌고 대항하다가 힘이 다하여 백성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당 나라 군사가 또한 석현성을 포위하고 이를 점령하려 하자, 현령 선백과 실모 등이 전력을 기울여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또한 우리 군사가 당 나라 군사와 크고 작은 열여덟 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여 6천 47명의 머리를 베고 2백 필의 전마를 얻었다.

○十六年春二月, 高僧<義相>奉旨, 創<浮石寺>. 秋七月, 彗星出北河·積水之間, 長六七許步. <唐>兵來攻<道臨城>拔之, 縣令<居尸知>死之. 作<壤宮>. 冬十一月, 沙 <施得>領船兵, 與<薛仁貴>戰於<所夫里州><伎伐浦>, 敗績, 又進大小二十二戰, 克之, 斬首四千餘級. 宰相<陳純>乞致仕, 不允, 賜 杖.

16년 봄 2월, 고승 의상이 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하였다.
가을 7월, 혜성이 북하와 적수 두 별 사이에 나타났는데, 길이가 6,7보 가량 되었다.
당 나라 군사가 도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현령 거시지가 전사하였다.
양궁을 지었다.
겨울 11월, 사찬 시득이 수군을 이끌고 설 인귀와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싸우다가 패하였으나, 다시 크고 작은 20번의 전투에 나아가 승리하고 4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재상 진순이 은퇴를 요청하였으나 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十七年春三月, 觀射於<講武殿>南門. 始置左司祿館{左司祿官} . <所夫里州>獻白鷹.

趙炳舜. 『三國史節要』.
17년 봄 3월, 강무전 남문에서 왕이 활 쏘기를 구경하였다.
처음으로 좌사록관을 설치하였다.
소부리주에서 흰 매를 바쳤다.

○十八年春正月, 置船府令一員, 掌船楫事. 加左右理方府卿各一員. 置<北原>小京, 以大阿 <吳起>守之. 三月, 拜大阿 <春長>爲中侍. 夏四月, 阿 <天訓>爲<武珍州>都督. 五月, <北原>獻異鳥, 羽 有文, 脛有毛.

18년 봄 정월, 선부령 한 명을 두어 선박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좌우 이방부경 각 1명을 증원하였다. 북원을 소경으로 하고, 대아찬 오기로 하여금 그 곳을 수비하게 하였다.
3월, 대아찬 춘장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 아찬 천훈을 무진주 도독으로 임명하였다.
5월, 북원에서 이상한 모양의 새를 바쳤는데, 깃털에 무늬가 있고 정강이에 털이 나 있었다.

○十九年春正月, 中侍<春長>病免, 舒弗邯<天存>爲中侍. 二月, 發使略<耽羅國>. 重修宮闕, 頗極壯麗. 夏四月, 熒惑守羽林. 六月, 太白入月, 流星犯參大星. 秋八月, 太白入月. 角干<天存>卒. 創造東宮, 始定內外諸門額號. <四天王寺>成. 增築<南山城>.

19년 봄 정월, 중시 춘장이 병으로 사직하자 서불한 천존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2월, 사신을 보내 탐라국을 경략하였다.
궁궐을 다시 수리하였는데 매우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여름 4월, 화성이 우림을 지키고, 6월에 금성이 달에 들어가고, 유성이 삼대성을 범하였다.
가을 8월, 금성이 달에 들어 갔다. 각간 천존이 사망하였다. 동궁을 처음으로 짓고 안팎의 모든 문의 현판 이름을 지었다. 사천왕사가 낙성되었다. 남산성을 증축하였다.

○二十年春二月, 拜伊 <金軍官>爲上大等. 三月, 以金銀器及雜綵百段, 賜<報德王><安勝>, 遂以王&妹{兄之女} 妻之.[一云  <金義官>之女也.] 下敎書曰: "人倫之本, 夫婦攸先; 王化之基, 繼嗣爲主. 王鵲巢位曠,  鳴在心. 不可久空內輔之儀, 永闕起家之業. 今良辰吉日, 率順{循} 舊章, 以寡人妹{兄} 女爲伉儷, 王宜共敦心義, 式奉宗 , 克茂子孫, 永 盤石, 豈不盛歟, 豈不美歟!" 夏五月, <高句麗>王使大將軍<延武>等上表曰: "臣<安勝>言: 大阿 <金官長>至, 奉宣敎旨, 幷賜敎書, 以外生公{女} , 爲下邑內主, 仍以四月十五日至此, 喜懼交懷, 罔知攸 . 竊以<帝女>降< >, <王姬>適<齊>, 本揚聖德, 匪關凡才. 臣本庸流, 行能無 , 幸逢昌運, 沐浴聖化, 每荷殊澤, 欲報無 . 重蒙天寵, 降此姻親, 遂卽 華表慶, 肅 成德. 吉月令辰, 言歸弊館, 億載難遇, 一朝獲申, 事非望始, 喜出意表. 豈惟一二父兄, 實受其賜? 其自先祖已下, 寔寵喜之. 臣未蒙敎旨, 不敢直朝, 無任悅豫之至, 謹遣臣大將軍太大兄<延武>, 奉表以聞." <加耶郡>置<金官>小京.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20년 봄 2월, 이찬 김 군관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3월, 보덕왕 안승에게 금은으로 만든 그릇과 잡색 비단 백단을 내리고, 왕의 누이를 아내로 삼게하고[잡찬 김 의관의 딸이라는 주장도 있다.], 교서를 내려 "인륜의 근본은 부부가 제일이며, 교화의 기초는 자손을 잇는 것이 중요하다. 왕은 아내가 없으므로 아내를 맞이할 생각이 많을 것이다. 내조할 자리를 오래도록 비워두어, 가문을 일으킬 도리를 영원히 없애는 것은 옳지 않다. 이제 좋은 때 길한 날을 맞이하여 옛날의 예절에 따라 나의 생질로 배필을 삼게 할 것이니, 왕이 그녀와 더불어 정의를 두터이 하고,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자손을 크게 융성토록 하여, 길이 반석같이 번성하게 한다면 어찌 성대하고도 아름다운 일이 아니랴!"라고 말하였다.
여름 5월, 고구려왕이 대장군 연무 등을 시켜 왕에게 글을 올렸다.
"신 안승은 아뢰나이다. 대아찬 김 관장이 와서 교지를 받들어 전하고 동시에 교서를 내렸으며, 동시에 왕의 생질을 우리 작은 마을의 안주인으로 삼기 위해 4월 15일 이 곳에 도착하였으니, 기쁘고 두려운 생각이 교차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생각하건대, 요 임금은 자기의 딸을 순에게 시집보내고, 주나라 왕은 딸을 제 나라에 시집보냈으니, 이러한 행위는 딸을 범부에게 줌으로써 그들의 거룩한 덕을 높이 드러내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은 바탕이 용렬하고 행실과 재능에 뛰어난 점이 없으면서도, 요행히 좋은 운명을 만나 왕의 거룩한 교화에 젖게되고 매번 남다른 은혜를 입게 되었으니, 이러한 은혜는 갚고자 하여도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왕의 인척을 내려 보내시는 총애를 입게 되었으니, 마침내 꽃이 만발하여 경사임을 나타내고, 사람들은 화목하여 덕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좋은 날 좋은 때를 선택하여 누추한 저의 집안으로 출가를 하게 되니, 억년을 살아도 만나기 어려운 일을 하루 아침에 얻게 되었습니다. 이는 원래 바라지도 못한 것이요, 이 기쁨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어찌 오직 저의 한두 명의 부형만이 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겠습니까? 선조 이하 모두를 총애하고 기쁘게 하신 것입니다. 신은 아직 왕의 지시를 받지 못하여 감히 바로 가서 뵙지 못하지만, 지극한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대장군 태대형 연무를 보내 글을 바쳐 아룁니다."
가야군에 금관 소경을 설치하였다.

○二十一年春正月朔, 終日黑暗如夜. 沙 <武仙>率精兵三千, 以戍<比列忽>. 置右司祿館. 夏五月, 地震. 流星犯參大星. 六月, 天狗落坤方. 王欲新京城, 問浮屠<義相>, 對曰: "雖在草野茅屋, 行正道, 則福業長, 苟爲不然, 雖勞人作城, 亦無所益." 王乃止役. 秋七月一日, 王薨, 諡曰<文武>. 群臣以遺言葬東海口{中} 大石上, 俗傳王化爲龍, 仍指其石爲<大王石>. 遺詔曰: "寡人運屬紛 , 時當爭戰. 西征北討, 克定疆封, 伐叛招携, 聿寧遐邇. 上慰宗 之遺顧, 下報父子之宿寃, 追賞遍於存亡,  爵均於內外. 鑄兵戈爲農器, 驅黎元於仁壽, 薄賦省 , 家給人足, 民間安堵, 域內無虞. 倉 積於丘山, 囹圄成於茂草, 可謂無愧於幽顯, 無負於士人. 自犯冒風霜, 遂成痼疾, 憂勞政敎, 更結沈 . 運往名存, 古今一揆, 奄歸大夜, 何有恨焉! 太子早蘊離輝, 久居震位, 上從群宰, 下至庶寮, 送往之義勿違, 事居之禮莫闕. 宗廟之主, 不可暫空, 太子卽於柩前, 嗣立王位. 且山谷遷貿, 人代椎{推} 移, <吳>王<北山>之墳,  見金鳧之彩, <魏>主<西陵>之望, 唯聞<銅雀>之名.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 樵牧歌其上, 狐兎穴其旁. 徒費資財, 貽譏簡牘, 空勞人力, 莫濟幽魂. 靜而思之, 傷痛無已, 如此之類, 非所樂焉. 屬 之後十日, 便於庫門外庭, 依西國之式, 以火燒葬. 服輕重, 自有常科, 喪制度, 務從儉約. 其邊城鎭 , 及州縣課稅, 於事非要者,  宜量廢, 律令格式, 有不便者, 卽便改張, 布告遠近, 令知此意. 主者施行!"
三國史記卷第七.

李丙燾. [三國遺事].李丙燾. [通鑑].
趙炳舜. [三國史節要].
21년 봄 정월 초하루, 날씨가 종일 밤처럼 캄캄하게 어두었다. 사찬 무선이 정병 3천을 거느리고 비열홀을 지켰다.
우사록관을 두었다.
여름 5월, 지진이 있었다. 유성이 삼대성을 범하였다. 6월 천구성이 서남방에 떨어졌다.
왕이 서울을 새로 꾸미고자하여 중 의상에게 물으니, 의상이 "비록 풀밭과 초막에 살지라도 바른 도를 실천한다면 복스러운 세업이 오래 갈 것이요,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비록 사람을 고생시켜 성을 만든다 할지라도 유익함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니 왕이 이 일을 중지하였다.
가을 7월 1일,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문무라 하고 여러 신하들이 유언에 따라 동해 어구 큰 바위에 장사지냈다. 속설에 전하기를 왕이 용으로 변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그 바위를 대왕석이라고 불렀다. 왕은 다음과 같이 유언하였다.
"과인은 어지러운 때에 태어난 운명이어서 자주 전쟁을 만났다. 서쪽을 치고 북쪽을 정벌하여 강토를 평정하였으며, 반란자를 토벌하고 화해를 원하는 자와 손을 잡아, 마침내 원근을 안정시켰다. 위로는 선조의 유훈을 받들고 아래로는 부자의 원수를 갚았으며, 전쟁 중에 죽은 자와 산 자에게 공평하게 상을 주었고, 안팎으로 고르게 관작을 주었다.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천수를 다하도록 하였으며, 납세와 부역을 줄여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게 하여, 백성들은 자기의 집을 편하게 여기고, 나라에는 근심이 사라지게 하였다. 창고에는 산처럼 곡식이 쌓이고 감옥에는 풀밭이 우거졌으니, 가히 선조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었고, 백성들에게도 짐진 것이 없었다고 할만 하였다. 내가 풍상을 겪어 드디어 병이 생겼고, 정사에 힘이 들어 더욱 병이 중하게 되었다. 운명이 다하면 이름만 남는 것은 고금에 동일하니, 홀연 죽음의 어두운 길로 되돌아 가는 데에 무슨 여한이 있으랴! 태자는 일찍부터 현덕을 쌓았고, 오랫동안 동궁의 자리에 있었으니, 위로는 여러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낮은 관리에 이르기까지, 죽은 자를 보내는 의리를 어기지 말고, 산 자를 섬기는 예를 잊지 말라. 종묘의 주인은 잠시라도 비어서는 안 될 것이니, 태자는 나의 관 앞에서 왕위를 계승하라. 세월이 가면 산과 계곡도 변하고, 세대 또한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오 왕의 북산 무덤에서 어찌 향로의 광채를 볼 수 있겠는가? 위 왕의 서릉에는 동작이란 이름만 들릴 뿐이로다. 옛날 만사를 처리하던 영웅도 마지막에는 한 무더기 흙이 되어, 나뭇꾼과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팔 것이다. 그러므로 헛되이 재물을 낭비하는 것은 역사서의 비방거리가 될 것이요,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더라도 나의 혼백을 구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일을 조용히 생각하면 마음 아프기 그지 없으니, 이는 내가 즐기는 바가 아니다. 숨을 거둔 열흘 후, 바깥 뜰 창고 앞에서 나의 시체를 불교의 법식으로 화장하라. 상복의 경중은 본래의 규정이 있으니 그대로 하되, 장례의 절차는 철저히 검소하게 해야 할 것이다. 변경의 성과 요새 및 주와 군의 과세 중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것은 잘 살펴서 모두 폐지할 것이요, 법령과 격식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즉시 바꾸고, 원근에 포고하여, 백성들이 그 뜻을 알게 하라. 다음 왕이 이를 시행하라!"
삼국사기 권 제 7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