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史記卷第十.
삼국사기 권 제 10
新羅本紀第十.
<元聖王>·<昭聖王>·<哀莊王>·<憲德王>·<興德王>·<僖康王>·<閔哀王{敏哀王}> ·<神武王>.
趙炳舜. 『新羅敏哀大王石塔記銘』.
신라본기 제 10
원성왕, 소성왕, 애장왕, 헌덕왕,
흥덕왕,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
○<元聖王>立. 諱<敬信>, <奈勿王>十二世孫. 母, <朴>氏<繼烏>夫人; 妃, <金>氏, <神述>角干之女. 初, <惠恭王>末年, 叛臣跋扈, <宣德>時爲上大等, 首唱除君側之惡. <敬信>預之, 平亂有功, <宣德>卽位, 邦{卽} 爲上大等. 及<宣德>薨, 無子. 群臣議後, 欲立王之族子<周元>. <周元>宅於京北二十里, 會, 大雨, <閼川>水漲, <周元>不得渡. 或曰: "卽人君大位, 固非人謀, 今日暴雨, 天其或者不欲立<周元>乎? 今上大等<敬信>, 前王之弟, 德望素高, 有人君之體." 於是, 衆議翕然, 立之繼位. 旣而雨止, 國人皆呼萬歲. 二月, 追封高祖大阿 <法宣>爲<玄聖大王>, 曾祖伊 <義寬>爲<神英大王>, 祖伊 <魏文>爲<興平大王>, 考一吉 <孝讓>爲<明德大王>, 母<朴>氏爲<昭文太后>, 立子<仁謙>, 爲王太子. 毁<聖德大王>·<開聖大王>二廟, 以<始祖大王>·<太宗大王>·<文武大王>及祖<興平大王>·考<明德大王>爲五廟. 增文武百官爵一級. 拜伊 兵部令<忠廉>爲上大等. 伊 <悌恭>爲侍中, <悌恭>免, 伊 <世强>爲侍中. 三月, 出前妃<具足王后>於外宮, 賜租三萬四千石. <浿江鎭>進赤烏. 改摠管爲都督.
李丙燾.
[북한본].
원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경신이며, 내물왕의 12대손이다. 어머니는 박씨 계오부인이다. 왕비는 김씨이니 신술 각간의 딸이다. 처음 혜공왕 말년에 신하들이 반역하여 발호하였는데, 선덕이 이 당시에 상대등이 되어 임금 측근의 악당들을 제거할 것을 앞장 서서 주장하였다. 경신이 이에 동조하여 반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자, 선덕이 왕위에 오르면서 바로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선덕이 죽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한 후, 왕의 족질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그 때 주원은 서울 북쪽 20리 되는 곳에 살았는데, 때마침 큰 비가 내려 알천의 물이 불어나 주원이 건너올 수 없었다. 누군가가 "임금이라는 큰 지위는 실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인데, 오늘 폭우가 내리니 하늘이 혹시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전 임금의 아우로서,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통을 가졌다"고 말하였다. 이에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하여, 그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다. 얼마 후 비가 그치니 백성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2월, 왕의 고조부 대아찬 법선을 현성대왕으로 추봉하고, 증조부 이찬 의관을 신영대왕으로, 조부 이찬 위문을 흥평대왕으로, 아버지 일길찬 효양을 명덕대왕으로, 어머니 박씨를 소문태후로 추봉하고, 아들 인겸을 왕태자로 삼았다. 성덕대왕과 개성대왕의 두 묘당을 헐고, 시조대왕과 태종대왕, 문무대왕 및 조부 흥평대왕과 부 명덕대왕을 5묘로 정하였다.
문무 백관에게 작위를 한 급씩 올려주었다. 이찬 병부령 충렴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이찬 제공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가, 제공이 퇴직하자, 이찬 세강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3월, 전 왕비 구족왕후를 외궁으로 내보내고, 벼 3만 4천 석을 주었다.
패강진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였다.
총관을 고쳐 도독이라 하였다.
○二年, 夏四月, 國東雨雹, 桑麥皆傷. 遣<金元全>入<唐>, 進奉方物. <德宗>下詔書曰: " <新羅>王<金敬信>. <金元全>至, 省表及所進奉具悉. 卿俗敦信義, 志秉貞純, 夙奉邦家, 克遵聲敎. 撫玆藩服, 皆 儒風, 禮法興行, 封部寧乂, 而竭誠向闕, 述職無虧. 累遣使臣, 聿修貢獻, 雖溟渤遐廣, 道路悠長, 贄幣往來, 率循舊興{典} , 忠 益著, 嘉歎良深. 朕君臨萬方, 作人父母, 自中及外, 合軌同文, 期致太和, 共 仁壽. 卿宜保安封內, 勤恤蒼生, 永作藩臣, 以寧海裔. 今賜卿羅錦綾綵等三十匹, 衣一副, 銀 一口, 至宜領之; 妃錦綵綾羅等二十匹, 押金線繡羅裙衣一副, 銀椀一; 大宰相一人衣一副, 銀椀一; 次宰相二人各衣一副, 銀椀各一. 卿宜領受分給. 夏中盛熱, 卿比平安好, 宰相已下, 存問之. 遣書指不多及." 秋七月, 旱. 九月, 王都民饑, 出粟三萬三千二百四十石以賑給之. 冬十月, 又出粟三萬三千石以給之. 大舍<武烏>, 獻『兵法』十五卷·『花鈴圖』二卷, 授以<屈 縣{屈岬縣 /屈押縣 }>令.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
2년 여름 4월, 동쪽 지방에 우박이 내려 뽕과 보리가 모두 상하였다.
김 원전을 당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당 나라 덕종이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신라왕 김 경신에게 말하노라. 김 원전이 와서 바친 표문과 진상한 물건을 살펴 보았다. 그대 나라의 풍속은 신의를 중시하고, 지조는 바르며, 일찍부터 중국의 번방으로서 교시를 잘 받들었다. 또한 변방에 속한 무리들을 훌륭하게 진무하였으며, 유교의 풍습을 받들어 예법이 성행하고, 나라가 평안하게 다스려졌으며, 중국에 정성을 다하고, 천자에게 직무를 보고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또한 자주 사신을 보내 조공과 진상을 계속하였고, 비록 바닷길이 멀고 육로로도 먼 곳에 떨어져 있지만, 폐백의 왕래가 옛법을 따르고, 충성은 더욱 드러나니 더없이 가상하고 감탄할 일이다. 나는 만방에 백성의 부모로 군림하였으니, 안으로부터 중외에 이르기까지, 법도에 맞게하며, 문화를 공유하고, 태평화락을 이루어서, 모두와 함께 안락장수의 경계에 오르고자 한다. 그대는 마땅히 국내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열성으로 구휼하며, 길이 변방의 신하가 되어, 바다 변방의 백성들을 평안케 하라. 이제 그대에게 비단·능직·채단 등 30필과 옷 한 벌·은합 한 개를 주노니, 이들이 도착하면 받을 것이며, 왕비에게 비단·채단·능직 등 20필과 금실로 수놓은 비단 치마 한 벌과 은쟁반 한 개를, 가장 높은 재상 한 사람에게 옷 한벌과 은합 한 개를, 다음 직위의 재상 두 사람에게는 각각 옷 한 벌과 은쟁반 한 개를 준다. 그대는 이를 받아서 나누어 주라. 여름이 깊어 날씨가 더워지는데, 그대 내내 평안하기 바라며, 재상 이하 모두에게도 안부를 묻는다. 글월로는 나의 뜻을 다 싣지 못하노라."
가을 7월, 가뭄이 들었다.
9월, 서울에 기근이 들어 곡식 3만 3천 2백 40석을 내어 구제하였고, 겨울 10월에도, 곡식 3만 3천 석을 나누어 주었다.
대사 무오가 병법 15권과 화령도 2권을 바쳤으므로, 굴압 현령으로 임명하였다.
○三年, 春二月, 京都地震. 親祀神宮. 大赦. 夏五月, 太白晝見. 秋七月, 蝗害 . 八月辛巳朔, 日有食之.
3년 봄 2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여름 5월, 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가을 7월, 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8월 초하루 신사일에 일식이 있었다.
○四年, 春, 始定讀書三品以出身. 讀『春秋左氏傳』若『禮記』若『文選』, 而能通其義, 兼明『論語』·『孝經』者爲上; 讀『曲禮』·『論語』·『孝經』者爲中; 讀『曲禮』·『孝經』者爲下. 若博通五經·三史·諸子百家書者, 超擢用之. 前祇以弓箭選人, 至是改之. 秋, 國西, 旱蝗, 多盜賊, 王發使安撫之.
4년 봄, 처음으로 독서 삼품과를 설치하여 벼슬을 주었다. [춘추좌씨전]·[예기]·[문선]을 읽어서 그 뜻을 능히 알고, 이와 동시에 [논어]와 [효경]에 밝은 자를 상등으로 하고, [곡례]·[논어]·[효경]을 읽은 자를 중등으로 하고, [곡례]와 [효경]을 읽은 자를 하등으로 하였다. 5경, 3사, 제자백가서에 모두 능통한 자는 절차를 밟지 않고 등용하였다. 예전에는 활 쏘기만으로 인물을 선발하던 것을 이 때에 와서 바꾼 것이다.
가을, 서쪽 지방에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가 나타나고, 도적이 많이 일어났으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 위무하였다.
○五年, 春正月甲辰朔, 日有食之. <漢山州>民饑, 出粟以 之. 秋七月, 隕霜傷 . 九月, 以<子玉>爲<楊根縣>小守, 執事史<毛肖> {駁} 言: "<子玉>不以文籍出身, 不可委分憂之職." 侍中議云: "雖不以文籍出身, 曾入大<唐>爲學生, 不亦可用耶?" 王從之.
○論曰: "惟學焉然後聞道, 惟聞道然後灼知事之本末. 故學而後仕者, 其於事也, 先本而末自正. 譬如擧一綱, 萬目從而皆正. 不學者反此, 不知事有先後·本末之序, 但區區弊精神於枝末, 或 {斂} 以爲利, 或苛察以相高, 雖欲利國安民, 而反害之. 是故, 『學記』之言, 終於'務本', 而『書』亦言: '不學牆面, 事惟煩.' 則執事<毛肖>一言, 可爲萬世之模範者焉."
趙炳舜. 『三國史節要』.허성도.
5년 봄 정월 초하루 갑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한산주 백성들에게 기근이 들어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9월, 자옥을 양근현 소수로 임명하였는데, 집사사 모초가 반박하여 "자옥은 학문을 잘하여 등용된 것이 아니므로 지방 장관의 관직을 맡길 수 없다"라고 말했다. 시중이 "비록 학문을 잘하여 출세한 것은 아니지만, 일찌기 당 나라에 가서 학생이 된 적이 있으니, 역시 등용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자 왕은 시중의 말을 따랐다.
저자의 견해 : 오직 학문을 닦은 연후에 도리를 알게 되고, 도리를 알고난 이후에야 사물의 근본과 말단을 확실히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학문을 연마한 뒤에 벼슬을 하는 자는, 사물에 대하여 근본적인 것을 먼저 바르게 처리하므로, 말단은 저절로 바르게 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그물의 벼리 하나를 들면, 만 개의 그물코가 바르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학문을 연마하지 않은 자는 이와 반대이니, 사물에 선후와 본말의 순서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다만 구구하게 정신을 지엽적인 것에만 빼앗기게 되어, 백성들로부터 거두어 들이는 것으로 이익을 삼기도 하고, 백성을 까다롭게 규찰하는 것으로 높은 체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람은 비록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려고 할지라도 도리어 해가 된다. 그러므로 [학기]는 "근본에 힘써야 한다"는 문장으로 끝을 맺고 있으며, [상서]에도 또한 "배우지 않으면 벽에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답답하며, 오직 번거롭게 일을 처리한다"고 하였으니, 집사 모초의 한 마디는 만대의 모범이 될 만하다.
○六年, 春正月, 以<宗基>爲侍中. 增築<碧骨堤>, 徵<全州>等七州人, 興役. <熊川州>進赤烏. 三月, 以一吉 <伯魚>使北國. 大旱. 夏四月, 太白辰星, 聚于東井. 五月, 出粟賑<漢山>·<熊川>二州饑民.
6년 봄 정월, 종기를 시중에 임명하였다.
벽골제를 증축하였다. 전주 등 일곱 주의 사람을 징발하여 이 공사를 하였다.
웅천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바쳤다.
3월, 일길찬 백어를 북국에 사신으로 보냈다. 큰 가뭄이 들었다.
여름 4월, 금성과 진성이 동정성좌에 모였다.
5월, 한산·웅천 두 주의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곡식을 주어 구제하였다.
○七年, 春正月, 王太子卒, 諡曰<惠忠>. 伊 <悌恭>叛, 伏誅. <熊川州><向省>大舍妻, 一産三男. 冬十月, 京都雪三尺, 人有凍死. 侍中<宗基>免, 大阿 <俊邕>爲侍中. 十一{二} 月, 京都地震. 內省侍郞<金言>爲三重阿 .
趙炳舜. 『三國史節要』.
7년 봄 정월, 왕태자가 사망하자 시호를 혜충이라 하였다.
이찬 제공이 반역하다가 처형 당했다.
웅천주 대사 향성의 아내가 한꺼번에 아들 셋을 낳았다.
겨울 10월, 서울에 눈이 석 자나 내리고 사람이 얼어 죽었다.
시중 종기가 퇴직하자, 대아찬 준옹이 시중이 되었다.
11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내성 시랑 김언이 3중 아찬이 되었다.
○八年, 秋七月, 遣使入<唐>, 獻美女<金井蘭>, 其女國色身香. 八月, 封王子<義英>爲大子{太子} . 上大等<忠廉>卒, 伊 <世强>爲上大等. 侍中<俊邕>病免, 伊 <崇斌>爲侍中. 冬十一月壬子朔, 日有食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8년 가을 7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미인 김 정란을 바쳤다. 그녀는 국색으로서 몸에서 향내가 났다.
8월, 왕자 의영을 태자로 봉하였다. 상대등 충렴이 죽자, 이찬 세강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시중 준옹이 병으로 사직하자, 이찬 숭빈을 시중으로 삼았다.
겨울 11월 초하루 임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九年, 秋八月, 大風折木偃禾. 奈麻<金惱>獻白雉.
9년 가을 8월, 큰 바람이 불어와 나무가 꺾이고 벼가 쓰러졌다.
내마 김뇌가 흰 꿩을 바쳤다.
○十年, 春二月, 地震. 太子<義英>卒, 諡曰<憲平>. 侍中<崇斌>免, 以 <彦昇>爲侍中. 秋七月, 始創<奉恩寺>. <漢山州>進白鳥{白烏} . 起<望恩樓>於宮西.
趙炳舜. 『三國史節要』.
10년 봄 2월, 지진이 있었다. 태자 의영이 사망하자 시호를 헌평이라 하였다.
시중 숭빈이 사직하자, 잡찬 언승을 시중으로 삼았다.
가을 7월, 봉은사를 창건하였다.
한산주에서 흰 까마귀를 진상하였다.
망은루를 대궐 서쪽에 세웠다.
○十一年, 春正月, 封<惠忠太子>之子<俊邕>爲太子. 夏四月, 旱, 親錄囚. 至六月乃雨. 秋八月, 隕霜害 .
11년 봄 정월, 혜충 태자의 아들 준옹을 태자로 봉하였다.
여름 4월, 가뭄이 들자 왕이 직접 죄수를 재심사하여 형량을 낮추어 주었다. 6월에 이르러 비가 내렸다.
가을 8월,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十二年, 春, 京都飢疫, 王發倉 賑恤之. 夏四月, 侍中<彦昇>爲兵部令, 伊 <智原>爲侍中.
12년 봄, 서울에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돌았다. 왕이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여름 4월, 시중 언승이 병부령이 되고, 이찬 지원이 시중이 되었다.
○十三年, 秋九月, 國東, 蝗害 , 大水山崩. 侍中<智原>免, 阿 <金三朝>爲侍中.
13년 가을 9월, 동쪽 지방에 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치고, 홍수가 발생하여 산이 무너졌다.
시중 지원이 사직하였다. 아찬 김 삼조가 시중이 되었다.
○十四年, 春三月, 宮南樓橋災. <望德寺>二塔相擊. 夏六月, 旱. <屈自郡><石南烏>大舍妻, 一産三男一女. 冬十二月二十九日, 王薨. 諡曰<元聖>, 以遺命擧柩燒於<奉德寺>南.[『唐書』云: "<貞元>十四年, <敬信>死." 『通鑑』云: "<貞元>十六年, <敬信>死." 以本史孝{考} 之, 『通鑑』, 誤.]
趙炳舜. 『顯宗實錄字本』.
14년 봄 3월, 대궐 남쪽의 누교(樓橋)에 화재가 났다. 망덕사의 두 탑이 서로 부딪쳤다.
여름 6월, 가뭄이 들었다. 굴자군 대사 석남오의 아내가 한번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다.
겨울 12월 29일,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원성이라 하고, 유언에 따라 관을 봉덕사 남쪽에 옮겨 화장하였다.[[당서]에는 '정원 14년에 경신이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통감]에는 '정원 16년에 경신이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본 사기를 기준으로 고찰하면 [통감]이 틀린 것이다.]
○<昭聖[或云<昭成>]王>立. 諱<俊邕>, <元聖王>太子<仁謙>之子也. 母, <金>氏. 妃, <金>氏<桂花>夫人, 大阿 <叔明>女也. <元聖大王>元年, 封子<仁謙>爲太子, 至七年卒, <元聖>養其子於宮中. 五年, 奉使大<唐>, 受位大阿 ; 六年, 以波珍 爲宰相; 七年爲侍中; 八年爲兵府令{兵部令} ; 十一年爲太子, 及<元聖>薨, 繼位.
趙炳舜. 『三國史節要』.
소성왕['昭聖'을 '昭成'으로도 쓴다.]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준옹이며, 원성왕의 태자 인겸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이고, 왕비는 김씨 계화부인이며 대아찬 숙명의 딸이다. 원성대왕 원년에 그의 아들 인겸을 태자로 봉하였으나 7년에 죽었으므로 원성이 태자의 아들을 궁중에서 길렀다. 원성은 5년에 사신으로 당 나라에 가서 대아찬 직위를 받았고, 6년에 파진찬으로 재상이 되었고, 7년에는 시중이 되었고, 8년에는 병부령이 되었고, 11년에는 태자가 되었다가, 원성이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元年, 春三月, 以<菁州><居老縣>爲學生祿邑. <冷井縣>令<廉哲>進白鹿. 夏五月, 追封考<惠忠太子>爲<惠忠大王>. <牛頭州>都督遣使奏言: "有異獸若牛, 身長且高, 尾長三尺許, 無毛長鼻, 自<峴城川>向<烏食壤>去." 秋七月, 得人蔘九尺, 甚異之, 遣使如<唐>進奉, <德宗>謂非人蔘, 不受. 八月, 追封母<金>氏爲<聖穆太后>. <漢山州>獻白烏.
원년 봄 3월, 청주의 거노현을 국학생의 녹읍으로 정하였다.
냉정현령 염 철이 흰 사슴을 진상하였다.
여름 5월, 왕의 아버지인 혜충 태자를 혜충대왕으로 추봉하였다.
우두주 도독이 사신을 보내 왕에게 말했다.
"소와 비슷한 이상한 짐승이 나타났습니다. 그 짐승의 몸체는 길고 크며, 꼬리 길이가 석 자 쯤 되고, 털은 없고 코가 긴 데, 현성천에서 오식양을 향하여 갔습니다."
가을 7월, 길이가 아홉 자인 인삼을 얻었다. 이를 매우 기이하게 여겨서 사신에게 주어 당 나라에 바쳤다. 덕종은 인삼이 아니라하여 받지 않았다.
8월, 어머니 김씨를 성목태후로 추봉하였다.
한산주에서 흰 까마귀를 바쳤다.
○二年, 春正月, 封妃<金>氏爲王后, 以<忠芬>爲侍中. 夏四月, 暴風折木蜚瓦, <瑞蘭殿>簾飛不知處, <臨海>·<仁化>二門壞. 六月, 封王子爲太子. 王薨, 諡曰<昭聖>.
2년 봄 정월, 왕비 김씨를 왕후로 봉하고, 충분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 폭풍이 불어 나무가 부러지고 기와가 날렸다. 서란전에 쳤던 발이 날아갔는데 어디로 갔는지를 알 수 없었으며, 임해문과 인화문이 무너졌다.
6월, 왕자를 태자로 봉하였다.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소성이라 하였다.
○<哀莊王>立. 諱<淸明>, <昭聖王>太子也. 母, <金>氏<桂花>夫人. 卽位時, 年十三歲, 阿 兵部令<彦昇>攝政. 初, <元聖>之薨也, <唐><德宗>遣司封郞中兼御史中丞<韋丹>, 持節吊慰, 且冊命王<俊邕>, 爲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新羅>王. <丹>至< 州>, 聞王薨, 乃還. 秋七月, 王更名<重熙>. 八月, 授前入<唐>宿衛學生<梁悅><豆 >小守. 初, <德宗>幸<奉天>, <悅>從難有功, 帝授右贊善大夫還之, 故王擢用之.
애장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청명이며, 소성왕의 태자이었다. 어머니는 김씨 계화부인이다. 왕위에 오를 때 나이가 13세였으므로, 아찬 병부령 언승이 섭정하였다.
앞서 원성이 죽었을 때, 당 나라 덕종이 사봉낭중겸어사중승 위 단을 지절사로 보내 조문하게 하고, 또한 왕 준옹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신라왕으로 책봉하려 하였는데, 위 단이 운주에 도착했을 때, 새로운 왕이 또 죽었다는 말을 듣고 돌아 갔다.
가을 7월, 왕이 이름을 중희로 고쳤다.
8월, 당 나라에 가서 숙위했던 학생 양열에게 두힐소수 벼슬을 주었다. 예전에 당 나라 덕종이 봉천으로 피난갔을 때, 양열이 난리 중에 공을 세웠다 하여, 황제가 우찬선대부 벼슬을 주어 귀국시켰기 때문에 왕이 그를 발탁한 것이다.
○二年, 春二月, 謁始祖廟. 別立<太宗大王>·<文武大王>二廟. 以始祖大王及王高祖<明德大王>·曾祖<元聖大王>·皇祖<惠忠大王>·皇考<昭聖大王>爲五廟. 以兵部令<彦昇>, 爲御龍省私臣, 未幾爲上大等. 大赦. 夏五月壬戌朔, 日當食, 不食. 秋九月, 焚惑入月, 星隕如雨. <武珍州>進赤烏, <牛頭州>進白雉. 冬十月, 大寒, 松竹皆死. <耽羅國>遣使朝貢.
2년 봄 2월, 왕이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태종대왕과 문무대왕의 두 묘는 별도로 세우고, 시조대왕 및 왕의 고조부 명덕대왕, 증조부 원성대왕, 조부 혜충대왕, 아버지 소성대왕을 5묘로 정했다.
병부령 언승을 어룡성 사신으로 임명했다가, 얼마 되지 않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여름 5월 초하루 임술일에 꼭 있어야 할 일식이 일어나지 않았다.
가을 9월, 화성이 달에 들어가고, 별이 비오듯 떨어졌다.
무진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고, 우두주에서는 흰 꿩을 진상하였다.
겨울 10월, 날씨가 아주 추워서 소나무와 대나무가 모두 죽었다.
탐라국에서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三年, 春正月, 王親祀神宮. 夏四月, 以阿 <金宙碧{金富碧}> 女, 入後宮. 秋七月, 地震. 八月, 創<加耶山><海印寺>. < 良州>進赤烏. 冬十二月, 授<均貞>大阿 , 爲假王子, 欲以質<倭>國, <均貞>辭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3년 봄 정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여름 4월, 아찬 김 주벽의 딸이 왕의 후궁으로 들어왔다.
가을 7월, 지진이 있었다.
8월, 가야산 해인사를 창건하였다.
삽량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였다.
겨울 12월, 균정에게 대아찬의 위를 주고, 거짓 왕자로 꾸며 왜국에 볼모로 보내려 하였으나 균정이 이를 사양하였다.
○四年, 夏四月, 王幸南郊觀麥. 秋七月, 與<日本國>交聘結好. 冬十月, 地震.
4년 여름 4월, 왕이 남쪽 교외로 행차하여 보리 농사를 시찰하였다.
가을 7월, 일본국과 사신을 교환하고 우호관계를 맺었다.
겨울 10월, 지진이 있었다.
○五年, 春正月, 以伊 <秀昇>爲侍中. 夏五月, <日本國>遣使, 進黃金三百兩. 秋七月, 大閱於<閼川>之上. < 良州>進白鵲. 重修<臨海殿>, 新作東宮<萬壽房>. <牛頭州><蘭山縣>伏石起立. <熊川州><蘇大縣><釜浦>水變血. 九月, <望德寺>二塔戰.
5년 봄 정월, 이찬 수승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5월, 일본국이 사신을 보내 황금 3백냥을 바쳤다.
가을 7월, 알천 강가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삽량주에서 흰 까치를 진상하였다.
임해전을 중수하고, 동궁의 만수방을 새로 지었다.
우두주 난산현에서 누워 있던 돌이 일어났다. 웅천주 소대현 부포의 물이 핏빛으로 변하였다.
9월, 망해사의 두 탑이 부딪쳤다.
○六年, 春正月, 封母<金>氏, 爲大王后; 妃<朴>氏, 爲王后. 是年, <唐><德宗>崩, <順宗>遣兵部郞中兼御史大夫<元季方>, 告哀, 且冊王爲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使持節大都督< 林州>諸軍事< 林州>刺史兼持節充寧海軍使上柱國<新羅>王. 其母<叔>氏爲大妃, [王母父<叔明>, <奈勿王>十三世孫, 則母姓<金>氏, 以父名爲<叔>氏, 誤也.] 妻<朴>氏爲妃. 秋八月, 頒示公式二十餘條. 冬十一月, 地震.
6년 봄 정월, 왕의 어머니 김씨를 태왕후로 봉하고, 왕비 박씨를 왕후로 봉하였다. 이 해에 당 나라 덕종이 사망하자, 새로운 황제 순종이 병부낭중겸어사대부 원 계방을 보내 부고를 전하고, 또한 왕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계림주자사겸지절충영해군사상주국신라왕'으로 책봉하고, 그 어머니 숙씨를 대비로 책봉하고[왕모의 부친인 숙명은 내물왕의 13대손이므로, 왕모의 성은 김씨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숙씨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아내 박씨를 왕비로 하였다.
가을 8월, 공식 20여 조를 반포하였다.
겨울 11월, 지진이 있었다.
○七年, 春三月, <日本國>使至, 引見<朝元殿>. 下敎: 禁新創佛寺, 唯許修葺. 又禁以錦繡爲佛事, 金銀爲器用, 宜令所司, 普告施行. <唐><憲宗>, 放宿衛王子<金獻忠>歸國, 仍加試秘書監. 秋八月, 遣使入<唐>朝貢.
7년 봄 3월, 일본국 사신이 오자, 왕이 조원전에서 접견하였다.
왕이 교서를 내려 새로 절을 짓는 것을 금하고, 수리하는 것만을 허락하였다. 또한 불교행사에 고급 비단을 사용하지 못하며, 금은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담당자로 하여금 이를 널리 알려 시행하도록 하였다.
당 나라 헌종이, 숙위하던 왕자 김 헌충을 귀국하게 하고, 그에게 시비서감의 직을 더하여 주었다.
가을 8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八年, 春正月, 伊 <金憲昌>[一作貞.]爲侍中. 二月, 王坐<崇禮殿>觀樂. 秋八月, 大雪.
8년 봄 정월, 이찬 김 헌창['昌'을 '貞'이라고도 한다.]이 시중이 되었다.
2월, 왕이 숭례전에 앉아 음악을 감상하였다.
가을 8월, 큰 눈이 내렸다.
○九年, 春二月, <日本國>使至, 王厚禮待之. 遣<金力奇>入<唐>朝貢. <力奇>上言: "<貞元>十六年, 詔冊臣故主<金俊邕>爲<新羅>王, 母<申>氏爲大妃, 妻<叔>氏爲王妃. 冊使<韋丹>至中路, 聞王薨却廻, 其冊在中書省, 今臣還國, 伏請授臣以歸." : "<金俊邕>等冊, 宜令鴻 寺, 於中書省受領, 至寺宣授與<金力奇>, 令奉歸國." 仍賜王叔<彦昇>及其弟<仲恭{忠恭}> 等門戟, 令本國准例給之.[<申>氏, <金神述>之女, 以神字同韻, 申爲氏, 誤也.] 發使十二道, 分定諸郡邑疆境. 秋七月辛巳朔, 日有食之.
李丙燾.
9년 봄 2월, 일본국 사신이 오자 왕이 후대하였다.
김 역기를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역기가 황제에게 "정원 16년에 조서로 신라의 전 임금 김 준옹을 신라왕으로 책봉하고, 왕모 신씨를 대비로 책봉하고, 왕의 아내 숙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는데, 책봉사신 위 단이 도중에서 왕이 사망했다는 말을 듣고 돌아갔습니다. 현재 그 책문이 중서성에 있사오니, 청컨대 지금 제가 귀국하는 길에 그것을 가지고 돌아가도록 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황제는, "김 준옹 등의 책문은 응당 홍려시가 중서성에서 수령해와서 김 역기에게 주어 그가 가지고 귀국하도록 하라"는 칙명을 내리고, 이어 왕의 숙부 언승과 그의 아우 중공 등에게 문극을 하사하고, 이를 신라가 그들의 기준과 예규에 따라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신(申)씨는 김 신술(金神述)의 딸인데, 신(神)과 동운이라 하여 신(申)씨라 한 것은 잘못이다.]
왕이 12도에 특사를 보내 모든 군과 읍의 경계를 획정하였다.
가을 7월 초하루 신사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年, 春正月, 月犯畢. 夏六月, <西兄山城>鹽庫鳴, 聲如牛. <碧寺>蝦 食蛇. 秋七月, 遣大阿 <金陸珍>, 入<唐>謝恩, 兼進奉方物. 大旱. 王叔父<彦昇>與弟伊 <悌邕>, 將兵入內, 作亂弑王. 王弟< 明>侍衛王幷害之. 追諡王爲<哀莊>.
10년 봄 정월, 달이 필성 성좌를 범하였다.
여름 6월, 서형산성 소금 창고에서 소 우는 소리가 들렸다. 벽사에서 두꺼비가 뱀을 잡아 먹었다.
가을 7월, 대아찬 김 육진을 당에 보내 사은하고, 동시에 토산물을 바쳤다. 날씨가 크게 가물었다.
왕의 숙부 언승이 그의 아우 이찬 제옹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궁중에 들어가 반란을 일으켜 왕을 죽였다. 왕의 아우 체명이 왕을 시위하고 있다가 함께 살해당했다. 왕의 시호를 애장으로 추증하였다.
○<憲德王>立. 諱<彦昇>, <昭聖王>同母弟也. <元聖王>六年, 奉使大<唐>, 受位大阿 ; 七年, 誅逆臣, 爲 ; 十年爲侍中; 十一年, 以伊 爲宰相; 十二年爲兵部令; <哀莊王>元年爲角干; 二年爲御龍省私臣; 未幾爲上大等, 至是, 卽位. 妃<貴勝>夫人, <禮英>角干女也. 以伊 <金崇斌>爲上大等. 秋八月, 大赦. 遣伊 <金昌南>等, 入<唐>告哀. <憲宗>遣職方員外郞攝御史中丞<崔廷>, 以其質子<金士信>副之, 持節吊祭, 冊立王爲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持節大都督< 林州>諸軍事兼持節充寧海軍使上柱國<新羅>王. 冊妻<貞>氏爲妃. 賜大宰相<金崇斌>等三人門戟.[按: 王妃, <禮英>角干女也, 今云<貞>氏, 未詳.]
헌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이름은 언승이며, 소성왕의 동복 아우이다. 왕은 이보다 앞서 원성왕 6년에 사신으로 당 나라에 갔다가 대아찬의 작위를 받았고, 7년에 반역하는 신하를 처형하여 잡찬이 되었고, 10년에 시중이 되었고, 11년에 이찬으로서 재상이 되었고, 12년에 병부령이 되었고, 애장왕 원년에 각간이 되었고, 2년에 어룡성 사신이 되었고, 그 후 얼마 안 되어 상대등이 되었다가, 이 때에 와서 즉위한 것이다. 왕비는 귀승부인이니 각간 예영의 딸이다.
이찬 김 숭빈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가을 8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이찬 김 창남 등을 당에 보내 이전 왕의 죽음을 알렸다. 당 헌종은 직방원외랑섭어사중승 최 정을 정사로, 인질로 가있던 김 사신을 부사로 파견하면서, 황제의 신임표를 지니고 가서 조의를 표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면서, 새로운 왕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지절충영해군사상주국신라왕'으로 책봉하고, 그의 아내 정씨를 왕비로 책봉하였으며, 대재상 김 숭빈 등 3명에게 문극을 주었다.[살펴보면 왕비는 각간 예영의 딸인데, 여기에서는 정씨라고 했으니 확실하지 않다.]
○二年, 春正月, 以波珍 <亮宗>爲侍中. <河西州>進赤鳥{赤烏} . 二月, 王親祀神宮. 發使修葺國內 防. 秋七月, 流星入紫微. <西原京>進白雉. 冬十月, 遣王子<金憲章>入<唐>, 獻金銀佛像及佛經等, 上言: "爲<順宗>祈福." 流星入王良.
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봄 정월, 파진찬 양종을 시중으로 삼았다.
하서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였다.
2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내고, 사람을 보내 국내의 제방을 수리하게 하였다.
가을 7월, 유성이 자미 성좌에 들어갔다. 서원경에서 흰 꿩을 진상하였다.
겨울 10월, 왕자 김 헌장을 당에 보내, 금은으로 만든 불상과 불경 등을 바치고 아뢰기를 "순종을 위하여 명복을 빈다"고 하였다. 유성이 왕량 성좌에 들어 갔다.
○三年, 春正月, 侍中<亮宗>以病免, 伊 <元興>爲侍中. 二月, 以伊 <雄元>爲<完山州>都督. 夏四月, 始御<平議殿>聽政.
3년 봄 정월, 시중 양종이 병으로 사직하자, 이찬 원흥이 시중이 되었다.
2월, 이찬 웅원을 완산주 도독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 왕이 처음으로 평의전에서 정사를 처리하였다.
○四年春, 以<均貞>爲侍中, 以伊 <忠永>年七十, 賜 杖. 秋九月, 遣級 <崇正>使北國.
4년 봄, 균정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이찬 충영이 나이 70세가 되었으므로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가을 9월, 급찬 숭정을 북국에 사신으로 보냈다.
○五年, 春正月, 以伊 <憲昌>爲<武珍州>都督. 二月, 謁始祖廟. <玄德門>火.
5년 봄 정월, 이찬 헌창을 무진주 도독으로 임명하였다.
2월,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현덕문에 불이 났다.
○六年, 春三月, 宴群臣於<崇禮殿>, 樂極, 王鼓琴, 伊 <忠榮>起舞. 夏五月, 國西大水, 發使撫問經水州郡人民, 復一年租調. 秋八月, 京都風霧如夜. <武珍州>都督<憲昌>, 入爲侍中. 冬十月, <黔牟>大舍妻, 一産三男.
6년 봄 3월, 숭례전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즐거움이 극에 달하자, 왕은 거문고를 연주하고, 이찬 충영은 일어나 춤을 추었다.
여름 5월, 서쪽 지방에 홍수가 나자, 왕이 사자를 보내 수재를 당한 주군의 백성들을 위문하고, 1년 간의 조세와 공물을 면제하였다.
가을 8월, 서울에 바람이 불고 안개가 끼어 낮이 밤과 같았다.
무진주 도독 헌창을 중앙으로 불러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겨울 10월, 대사 검모의 아내가 한꺼번에 아들 셋을 낳았다.
○七年, 春正月, 遣使朝<唐>, <憲宗>引見, 宴賜有差. 夏五月, 下雪. 秋八月己亥朔, 日有食之. 西邊州郡大飢, 盜賊蜂起, 出軍討平之. 大星出翼軫間, 指庚, 芒長六許尺, 廣二許寸.
7년 봄 정월, 당에 사신을 보냈다. 헌종이 그를 접견하고 사신의 등급에 따라 연회를 열어주고 등급에 따라 하사품을 주었다.
여름 5월, 눈이 내렸다.
가을 8월 초하루 기해일에 일식이 있었고, 서쪽 변방의 주와 군에 큰 기근이 들어 도적이 봉기하므로 군사를 파견하여 토벌하였다.
큰 별이 익성 성좌와 진성 성좌 사이에 나타나서 서쪽을 향하였다. 그 빛이 길이는 6척 정도였고, 폭은 두 치 가량이었다.
○八年, 春正月, 侍中<憲昌>出爲<菁州>都督, <璋如>爲侍中. 年荒民飢, 抵<浙東>求食者一百七十人. <漢山州><唐恩縣{唐恩郡}> 石長十尺, 廣八尺, 高三尺五寸, 自移一百餘步. 夏六月, <望德寺>二塔戰.
李丙燾.
8년 봄 정월, 시중 헌창이 외직으로 나가 청주 도독이 되었고, 장여가 시중이 되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절동 지방으로 가서 먹을 것을 구하는 자가 170명이었다.
한산주 당은현에서 길이 10척, 넓이 8척, 높이 3척 5촌이 되는 큰 바위가 저절로 1백여 보 이동하였다.
여름 6월, 망덕사의 두 탑이 서로 부딪쳤다.
○九年, 春正月, 以伊 <金忠恭>爲侍中. 夏五月, 不雨, 遍祈山川, 至秋七月, 乃雨. 冬十月, 人多飢死, 敎州郡發倉 存恤. 遣王子<金張廉>, 入<唐>朝貢.
9년 봄 정월, 이찬 김 충공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5월, 비가 내리지 않아 산천에 두루 기도하였다. 가을 7월이 되자 비가 내렸다.
겨울 10월, 굶어 죽는 사람이 늘어나자, 왕은 주와 군에 교서를 내려, 창고를 열어 그들을 구제하게 하였다.
왕자 김 장렴을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十年, 夏六月癸丑朔, 日有食之.
10년 여름 6월 초하루 계축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一年, 春正月, 以伊 <眞元>年七十, 賜 杖. 以伊 <憲貞>病不能行, 年未七十, 賜金飾紫檀杖. 二月, 上大等<金崇斌>卒, 伊 <金秀宗>爲上大等. 三月, 草賊遍起, 命諸州郡都督大守{太守} , 捕捉之. 秋七月, <唐>< 州>節度使<李師道>叛. <憲宗>將欲討平, 詔遣<楊州>節度使<趙恭>, 徵發我兵馬, 王奉 旨, 命順天軍將軍<金雄元>, 率甲兵三萬以助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11년 봄 정월, 이찬 진원의 나이가 70세가 되자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이찬 헌정이 병이 나서 걷지 못하므로, 나이 70세가 안되었으나 금으로 장식한 자단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2월, 상대등 김 숭빈이 사망하자, 이찬 김 수종이 상대등이 되었다.
3월, 초적들이 도처에서 봉기하였다. 왕은 모든 주와 군의 도독 및 태수에게 명하여 그들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가을 7월, 당 나라 운주 절도사 이사도가 반란을 일으켰다. 헌종이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양주절도사 조 공을 보내 우리 병마의 출동을 요구하였다. 왕은 이에 따라 순천군장군 김 웅원으로 하여금 군사 3만을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돕게 하였다.
○十二年, 春夏旱, 冬飢. 十一月, 遣使入<唐>朝貢, <穆宗>召見<麟德殿>, 宴賜有差.
12년,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겨울에 기근이 들었다.
11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목종이 인덕전에서 사신을 접견하고, 사신의 등급에 따라 연회를 열어 주고 등급에 따라 하사품을 주었다.
○十三年, 春, 民饑, 賣子孫自活. 夏四月, 侍中<金忠恭>卒, 伊 <永恭>爲侍中, <菁州>都督<憲昌>, 改爲<熊川州>都督. 秋七月, <浿江><南川>二石戰. 冬十二月二十九日, 大雷.
13년 봄, 백성들이 굶주려 자손을 팔아 연명하는 자가 있었다.
여름 4월, 시중 김 충공이 사망하자 이찬 영공이 시중이 되었다. 청주 도독 헌창이 웅천주 도독이 되었다.
가을 7월, 패강 남천에 있는 두 돌이 서로 맞붙었다.
겨울 12월 29일, 큰 우레가 있었다.
○十四年, 春正月, 以母弟<秀宗>爲副君, 入<月池宮>.[<秀宗>或云<秀升>.] 二月, 雪五尺. 樹木枯. 三月, <熊川州>都督<憲昌>, 以父<周元>不得爲王, 反叛, 國號<長安>, 建元<慶雲>元年, 脅<武珍>·<完山>·<菁>·<沙伐>四州都督, <國原>·<西原>·<金官>仕臣及諸郡縣守令, 以爲己屬. <菁州>都督<向榮>, 脫身走<推火郡>, <漢山>·<牛頭>·< 良>·<浿江>·<北原>等, 先知<憲昌>逆謀, 擧兵自守. 十八日, <完山>長史<崔雄>, 助阿 <正連>之子<令忠>等, 遁走王京告之, 王卽授<崔雄>位級 , <速含郡>大守{太守} , <令忠>位級 , 遂差員將八人, 守王都八方, 然後出師. 一吉 <張雄>先發, <衛恭>·波珍 <悌陵>繼之, 伊 <均貞>· <雄元>·大阿 <祐徵>等, 掌三軍 征. 角干<忠恭>· <允膺>, 守<蚊火>關門. <明基>·<安樂>二郞, 各請從軍, <明基>與徒衆赴<黃山>, <安樂>赴<施彌知鎭>. 於是, <憲昌>遣其將, 據要路以待. <張雄>遇賊兵於<道冬峴>, 擊敗之. <衛恭>·<悌凌>合<張雄>軍, 攻<三年山城>, 克之, 進兵<俗離山>, 擊賊兵滅之. <均貞>等與賊戰<星山{黃山}> , 滅之. 諸軍共到<熊津>, 與賊大戰, 斬獲不可勝計. <憲昌>僅以身免, 入城固守. 諸軍圍攻浹旬, 城將陷, <憲昌>知不免, 自死. 從者斷首與身, 各藏. 及城陷, 得其身於古塚, 誅之, 戮宗族黨與凡二百三十九人, 縱其民. 後, 論功爵賞有差. 阿 <祿眞>授位大阿 , 辭不受. 以< 良州><屈自郡>近賊, 不 於亂, 復七年. 先是, <菁州>太守廳事南, 池中有異鳥, 身長五尺, 色黑, 頭如五歲許兒, 喙長一尺五寸, 目如人, 如受五升許器, 三日而死, <憲昌>敗望兆也. 聘角干<忠恭>之女<貞嬌>, 爲太子妃. <浿江>山谷間, 顚木生蘖, 一夜高十三尺, 圍四尺七寸. 夏四月十三日, 月色如血. 秋七月十二日, 日有黑暈, 指南北. 冬十二月, 遣<柱弼>入<唐>朝貢.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14년 봄 정월, 왕의 동복 아우 수종을 부군으로 삼아 월지궁에 들어오도록 하였다.[수종을 수승이라고도 한다.]
2월, 눈이 다섯 자나 내리고 나무가 말랐다.
3월, 웅천주 도독 헌창은 그의 아버지 주원이 왕이 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반역하여 국호를 장안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 원년이라 하고, 무진·완산·청주·사벌 네 주의 도독과 국원경·서원경·금관경의 사신과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협박하여 자기 부하로 삼았다. 청주 도독 상영이 추화군으로 도주하고, 한산주·우두주·삽량주·패강진·북원경 등의 여러 성은 헌창의 역모를 미리 알고, 군사를 모아 스스로 수비하였다. 18일, 완산주 장사 최 웅과 조아찬 정련의 아들 영충 등이 서울로 도주해와서 변고를 알렸다. 왕은 곧 최 웅에게 급찬의 위와 속함군 태수의 벼슬을 주고, 영충에게는 급찬의 위를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원장 8명을 파견하여 서울의 8방을 지키게 하고, 그 후에 군사를 출동시켰다. 일길찬 장 웅이 먼저 출발하고, 잡찬 위공과 파진찬 제릉이 뒤를 잇고, 이찬 균정과 잡찬 웅원과 대아찬 우징 등이 삼군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각간 충공과 잡찬 윤응은 문화의 관문을 지켰다. 명기와 안락 두 화랑이 모두 종군을 요청하여, 명기는 여러 무리들과 함께 황산으로 가고, 안락은 시미지진으로 갔다. 이 때 헌창은 그의 장수를 보내, 요충지를 차지하고 관군을 기다렸다. 장 웅이 적병을 도동현에서 만나 격파하였다. 위공과 제릉은 장 웅의 군사와 연합하여 삼년산성을 공격하여 승리하고, 속리산으로 진군하여 적병을 격멸하였다. 균정 등은 성산에서 적과 싸워 격멸시켰다. 여러 군대가 함께 웅진에 도착하여, 적과 크게 싸웠는데 죽이거나 생포한 숫자를 모두 헤아릴 수 없었다. 헌창이 가까스로 몸을 피하여 성으로 들어가 수비하였다. 모든 군사가 그들을 포위하고 공격한지 열흘 만에 성이 함락되려 하자, 헌창은 패배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결하였다. 그의 종자가 머리와 몸을 베어 각각 따로 묻었다. 성이 점령되자 그의 몸을 옛무덤에서 찾아내어 다시 베고, 그의 친족과 도당 239명을 죽이고, 그 백성들은 방면하였다. 후에 전공을 논하여 정도에 따라 작위를 상으로 주었다. 아찬 녹진에게는 대아찬의 작위를 주었으나,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삽량주의 굴자군은 적지와 근접한 곳에 있었으나 반란에 동참하지 않았으므로 7년 동안의 조세를 면제하였다.
이에 앞서 청주 태수의 청사 남쪽 연못에 이상한 새가 있었다. 그 키는 다섯 자였으며, 빛깔이 검고, 머리는 다섯 살 정도의 아이의 머리 크기만하고, 부리의 길이는 한 자 다섯 치였으며, 눈은 사람의 눈과 흡사하고, 위장은 닷되들이 그릇 정도였는데, 사흘 만에 죽었다. 이는 헌창이 패망할 징조였다.
각간 충공의 딸 정교를 태자비로 맞았다.
패강 산골짜기의 쓰러진 나무에서 새싹이 돋아났다. 그 싹은 하룻밤에 높이가 열 세 자, 둘레가 넉 자 일곱 치나 자랐다.
여름 4월 13일, 달빛이 핏빛 같았다.
가을 7월 12일, 해에 흑점이 생겨 남북을 가리켰다.
겨울 12월, 주필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十五年, 春正月五日, <西原京>有蟲, 從天而墮. 九日有白·黑·赤三種蟲, 冒雪能行, 見陽而止. <元順>·<平原>二角干, 七十告老, 賜 杖. 二月, 合<水城郡>·<唐恩縣{唐恩郡}> . 夏四月十二日, 流星起天市, 犯帝座, 過天市東北垣·織女·王良至閣道, 分爲三, 聲如擊鼓而滅. 秋七月, 雪.
李丙燾.
15년 봄 정월 5일, 서원경에, 하늘에서 벌레가 떨어졌다. 9일에는 흰 색·검은 색·붉은 색의 세 가지 벌레가 눈밭을 기어 다니다가 햇볕이 나자 사라졌다.
원순·평원 두 각간이 나이 70세가 되어 은퇴하고자 하였다. 왕은 그에게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2월, 수성군과 당은현을 합쳤다.
여름 4월 12일, 유성이 천시 성좌에서 나와 제좌를 범하고, 천시 성좌 동북쪽의 원 성좌, 직녀 성좌, 왕량 성좌를 지나 각도성에 이르러 셋으로 나뉘었는데, 북치는 소리를 내면서 사라졌다.
가을 7월, 눈이 내렸다.
○十七年, 春正月, <憲昌>子<梵文>, 與<高達山>賊<壽神>等百餘人, 同謀叛, 欲立都於<平壤>, 攻<北漢山州{北漢山城}> . 都督<聰明>率兵, 捕殺之.[<平壤>, 今<楊州>也, <太祖>製<庄義寺>齋文, 有<高麗>舊壤, <平壤>名山之句.] 三月, <武珍州><馬彌知縣>女人産兒, 二頭二身四臂, 産時天大雷. 夏五月, 遣王子<金昕>, 入<唐>朝貢, 遂奏言: "先在大學生, <崔利貞>·<金叔貞>·<朴季業>等, 請放還蕃, 其新赴朝<金允夫>·<金立之>·<朴亮之>等一十二人, 請留宿衛. 仍請配國子監習業, 鴻 寺給資粮." 從之. 秋, < 良州>獻白烏{白馬} . <牛頭州><大楊管郡><黃知>奈麻妻, 一産二男二女, 賜租一百石.
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
17년 봄 정월, 헌창의 아들 범문이 고달산의 적 수신 등 백여 명과 함께 모반하였다. 그들은 평양에 도읍을 세우기 위하여, 북한산주를 공격해왔다. 도독 총명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를 잡아 처형하였다.[평양은 지금의 양주인데, 태조가 지은 장의사 재문에 '고려의 옛 땅이요, 평양 명산'이라는 글귀가 있다.]
3월, 무진주 마미지현에 사는 여자가 아이를 낳았는데 머리가 둘, 몸이 둘, 팔이 넷이었다. 이 아이를 낳을 때, 천둥 소리가 크게 울렸다.
여름 5월, 왕자 김 흔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황제에게 말했다. "이전에 와있는 대학생 최 이정·김 숙정·박 계업 등을 본국으로 돌려 보내주고, 새로 입조한 김 윤부·김 입지·박 양지 등 열 두명을 숙위로 머물도록 해주소서. 그리고 그들을 국자감에 배치하여 공부를 하게 하고, 홍려시에서 물자와 식량을 공급하여 주소서."
황제가 이를 따랐다.
가을에 삽량주에서 흰 까마귀를 바쳤다.
우두주 대양관군에 사는 내마 황지의 아내가 아들 둘과 딸 둘을 한 번에 낳았다. 그 녀에게 벼 1백 석을 주었다.
○十八年, 秋七月, 命<牛岑>太守<白永>, 徵<漢山>北諸州郡人一萬, 築<浿江>長城三百里. 冬十月, 王薨. 諡曰<憲德>, 葬于<泉林寺>北.[『古記』云: "在位十八年, <寶曆>二年丙午四月卒." 『新唐書』云: "<長慶><寶曆>間, <羅>王<彦昇>卒." 而『資治通鑑』及『舊唐書』皆云: "<大和>五年卒." 豈其誤耶.]
18년 가을 7월, 우잠 태수 백영으로 하여금 한산 북쪽의 여러 주와 군에서 1만 명을 징발하여, 패강에 장성 300리를 쌓게 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헌덕이라 하고, 천림사 북쪽에 장사지냈다.[고기에는 '재위 18년 보력 2년 병오 4월에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당서]에는 '장경 보력 연간에 신라왕 언승이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자치통감]과 [구당서]에는 모두 태화 5년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興德王>立. 諱<秀宗>, 後改爲<景徽>. <憲德王>同母弟也. 冬十二月, 妃<章和>夫人卒, 追封爲<定穆王后>. 王思不能忘, 然不樂. 群臣表, 請再納妃. 王曰: "隻鳥有喪匹之悲, 失良匹, 何忍無情遽再娶乎?" 遂不從, 亦不親近女侍. 左右使令, 唯宦竪而己.[<章和>, 姓<金>氏, <昭聖王>之女也.]
흥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수종이지만, 그 후에 경휘로 바꾸었다. 그는 헌덕왕의 동복 아우이다.
겨울 12월, 왕비 장화부인이 사망하자, 정목왕후로 추봉하였다. 왕은 왕비를 잊지 못하고 슬퍼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표문을 올려 다시 왕비를 맞아 들이기를 요청하였다. 왕이 말했다.
"짝을 잃은 새에게도 자기의 짝을 잃은 슬픔이 있는데, 좋은 배필을 잃고나서 어찌하여 무정스럽게도 바로 다시 부인을 얻겠는가?"
왕은 끝내 요청을 듣지 않고, 시녀들조차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좌우의 심부름꾼은 오직 내시 뿐이었다.[장화의 성은 김씨이고, 소성왕의 딸이다.]
○二年, 春正月, 親祀神宮. <唐><文宗>聞王薨, 廢朝, 命太子左諭德兼御史中丞<源寂>, 持節吊祭. 仍冊立嗣王爲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使持節大都督< 林州>諸軍事兼持節充寧海軍使<新羅>王. 母<朴>氏爲大妃; 妻<朴>氏爲妃. 三月, <高句麗>僧<丘德>入<唐>, 齎經至. 王集諸寺僧徒, 出迎之. 夏五月, 降霜. 秋八月, 太白晝見. 京都大旱. 侍中<永恭>退.
2년 봄 정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당 문종은 헌덕왕이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조회를 폐지하고 태자좌유덕겸어사중승 원적을 지절사로 파견하여 조의를 표하고 제사에 참여케 하였다. 이어 새 왕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지절충영해군사신라왕'으로 책봉하고, 어머니 박씨를 대비로, 아내 박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3월, 고구려의 중 구덕이 당 나라에 갔다가 불경을 가지고 오자, 왕이 여러 절의 중을 소집하여 그를 맞이하게 하였다.
여름 5월, 서리가 내렸다.
가을 8월, 금성이 낮에 나타나고, 서울에 큰 가뭄이 들었다. 시중 영공이 퇴직하였다.
○三年, 春正月, 大阿 <金祐徵>爲侍中. 二月, 遣使入<唐>朝貢. 三月, 雪深三尺. 夏四月, <淸海>大使<弓福>, 姓<張>氏.[一名<保 >.] 入<唐><徐州>, 爲軍中小將. 後歸國謁王, 以卒萬人鎭<淸海>.[<淸海>, 今之<莞島>.] <漢山州><瓢川縣>妖人, 自言有速富之術, 衆人頗惑之. 王聞之, 曰: "執左道以惑衆者, 刑之, 先王之法也. 投 {棄} 其人遠島." 冬十二日{月} , 遣使入<唐>朝貢. <文宗>召對于<麟德殿>, 宴賜有差. 入<唐>廻使<大廉>, 持茶種子來, 王使植<地理山>. 茶自<善德王>時有之, 至於此盛焉.
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
3년 봄 정월, 대아찬 김 우징이 시중이 되었다.
2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3월, 눈이 석자나 내렸다.
여름 4월, 청해대사 궁복은 성이 장씨였다.[일명 보고이다.] 그는 당 나라 서주에 건너가 군중소장이 되었다가 후에 귀국하였다. 그는 왕을 알현하고,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청해[청해는 지금의 완도이다.]를 수비하게 되었다.
한산주 표천현에 사는 요망스러운 자가, 빨리 부자가 되는 술수가 있다고 말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에 미혹되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옳지 않은 방도로 많은 사람을 미혹시키는 자에게는 벌을 주는 것은 선왕의 법도이다. 그 자를 먼 섬으로 쫓아 버리라"라고 말하였다.
겨울 12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문종이 인덕전에서 접견하고, 사신의 등급에 따라 연회를 베풀어 주고, 사신의 등급에 따라 하사품을 주었다. 당 나라에 갔다가 귀국한 사신 대렴이 차나무 종자를 가지고 왔다. 왕은 그것을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으나, 크게 유행한 것은 이 시기부터였다.
○四年, 春二月, 以<唐恩郡>爲<唐城鎭>, 以沙 <極正>往守之.
4년 봄 2월, 당은군을 당성진으로 바꾸고, 사찬 극정을 파견하여 이 곳을 수비하게 하였다.
○五年, 夏四月, 王不豫, 祈禱, 仍許度僧一百五十人. 冬十二月, 遣使入<唐>朝貢.
5년 여름 4월, 왕의 건강이 좋지 않게되자, 기도를 드리고 이어서 중 15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겨울 12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六年, 春正月, 地震. 侍中<祐徵>免, 伊 <允芬>爲侍中. 二月, 遣王子<金能儒>幷僧九人朝<唐>. 秋七月, 入<唐>進奉使<能儒>等一行人, 廻次溺海(+死) . 冬十一月, 遣使入<唐>朝貢.
趙炳舜. 『三國史節要』.
6년 봄 정월, 지진이 있었다. 시중 우징이 퇴직하고, 이찬 윤분이 시중이 되었다.
2월, 왕자 김 능유와 중 아홉 명을 당 나라에 보냈다.
가을 7월, 당 나라에 갔던 진봉사 능유 등 일행이 귀국하다가 바다에 빠져 익사하였다.
겨울 11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七年, 春夏旱, 赤地. 王避正殿, 減常膳, 赦內外獄囚. 秋七月, 乃雨. 八月, 飢荒, 盜賊遍起. 冬十月, 王命使安撫之.
7년 봄과 여름이 가물어 땅의 빛깔이 붉은 색으로 변했다. 왕은 정전에 나가지 않고 음식을 줄였으며, 중앙과 지방의 죄수들을 특사하였다. 가을 7월에야 비가 내렸다.
8월, 흉년이 들어 도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겨울 10월에 왕은 사자를 파견하여 백성들을 위무하였다.
○八年, 春, 國內大飢. 夏四月, 王謁始祖廟. 冬十月, 桃李再華. 民多疫死. 十一月, 侍中<允芬>退.
8년 봄, 나라에 대 기근이 들었다.
여름 4월, 왕이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겨울 10월, 복숭아와 오얏나무에 두 번째 꽃이 피었고,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많았다.
11월, 시중 윤분이 사직하였다.
○九年, 春正月, <祐徵>復爲侍中. 秋九月, 王幸<西兄山>下大閱, 御<武平門>觀射. 冬十月, 巡幸國南州郡, 存問耆老及鰥寡孤獨, 賜 布有差.
9년 봄 정월, 우징을 다시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가을 9월, 왕이 서형산에 행차하여 크게 군대를 사열하고, 무평문에서 활쏘기를 관람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남쪽 지방의 주와 군을 순행하면서, 노인과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노인들을 위문하고, 정도에 따라 곡식과 베를 하사하였다.
○十年, 春二月, 拜阿 <金均貞>爲上大等. 侍中<祐徵>以父<均貞>入相, 表乞解職. 大阿 <金明>爲侍中.
10년 봄 2월, 아찬 김 균정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시중 우징이, 그의 아버지 균정이 재상이 되었다는 이유로 사직할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대아찬 김 명이 시중을 맡았다.
○十一年, 春正月辛丑朔, 日有食之. 遣王子<金義琮>, 如<唐>謝恩兼宿衛. 夏六月, 星 于東. 秋七月, 太白犯月. 冬十二月, 王薨. 諡曰<興德>, 朝廷以遺言, 合葬<章和王妃>之陵.
11년 봄 정월 초하루 신축일에 일식이 있었다.
왕자 김 의종을 당에 보내 사은하고, 아울러 숙위를 들게 하였다.
여름 6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가을 7월, 금성이 달을 범하였다.
겨울 12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흥덕이라 하였다. 조정에서는 왕의 유언에 따라 장화왕비의 능에 합장하였다.
○<僖康王>立. 諱<悌隆>[一云<悌 >.], <元聖大王>孫伊 <憲貞>[一云<草奴>.]之子也. 母, <包道夫人>. 妃, <文穆夫人>, 葛文王<忠恭>之女. 初, <興德王>之薨也, 其堂弟<均貞>·堂弟之子<悌隆>, 皆欲爲君. 於是, 侍中<金明>·阿 <利弘><裴萱伯>等, 奉<悌隆>. 阿 <祐徵>與姪<禮徵>及<金陽>, 奉其父<均貞>, 一時, 入內相戰. <金陽>中箭, 與<祐徵>等逃走, <均貞>遇害, 而後<悌隆>乃得卽位.
희강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제융[제옹이라고도 한다]이다. 그는 원성대왕의 손자 이찬 헌정[초노라고도 한다.]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포도부인이다. 왕비는 문목부인이니, 갈문왕 충공의 딸이다.
이전에 흥덕왕이 사망했을 때, 그의 종제 균정과 종제의 아들 제융이 모두 임금이 되고자 하였다. 이 때 시중 김 명과 아찬 이홍과 아찬 배 훤백 등은 제융을 지지하였고, 아찬 우징은 조카 예징 및 김 양과 더불어 그의 아버지 균정을 지지하였다. 그들은 동시에 대궐로 들어가 서로 싸웠다. 김 양은 화살에 맞아 우징 등과 함께 도주하였고, 균정은 죽었다. 이에 따라 후에 제융이 즉위하게 된 것이다.
○二年, 春正月, 大赦獄囚誅{殊} 死已下. 追封考爲<翌成大王>, 母<朴>氏爲<順成太后>. 拜侍中<金明>爲上大等, 阿 <利弘>爲侍中. 夏四月, <唐><文宗>放還宿衛王子<金義琮>. 阿 <祐徵>, 以父<均貞>遇害, 出怨言, <金明>·<利弘>等不平之. 五月, <祐徵>懼禍及, 與妻子奔<黃山津>口, 乘舟往依於<淸海鎭>大使<弓福>. 六月, <均貞>妹壻阿 <禮徵>, 與阿 <良順>亡投於<祐徵>. <唐><文宗>賜宿衛<金忠信>等錦綵有差.
李丙燾.
[북한본].
2년 봄 정월, 사형수 이외의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왕의 아버지를 익성대왕, 어머니 박씨를 순성태후로 추봉하였다. 시중 김 명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아찬 이홍을 시중으로 삼았다.
여름 4월, 당 문종은 숙위하던 왕자 김 의종을 돌려 보냈다.
아찬 우징이 그의 아버지 균정이 피살되었다는 이유로 원망에 찬 말을 하고 다니자, 김 명과 이홍 등이 이를 불만스럽게 생각하였다.
5월, 우징은 자기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 하여, 그의 처자와 함께 황산진 어구로 도주하여, 배를 타고 가서 청해진 대사 궁복에게 의탁하였다.
6월, 균정의 매부 아찬 예징이 아찬 양순과 함께 도주하여 우징에게 투항하였다.
당 나라 문종이 숙위 김 충신 등에게 등급에 따라 비단을 주었다.
○三年, 春正月, 上大等<金明>·侍中<利弘>等, 興兵作亂, 害王左右. 王知不能自全, 乃縊於宮中. 諡曰<僖康>, 葬于<蘇山>.
3년 봄 정월, 상대등 김 명과 시중 이홍 등이 군사를 동원하여 반역하고, 왕의 측근들을 죽였다. 왕은 자신도 무사할 수 없음을 알고, 궁중에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그의 시호를 희강이라 하고 소산에 장사지냈다.
○<閔哀王{敏哀王}> 立. 姓<金>氏, 諱<明>, <元聖大王>之曾孫也, 大阿 <忠恭>之子. 累官爲上大等, 與侍中<利弘>, 逼王殺之, 自立爲王. 追諡考爲<宣康大王>, 母<朴>氏<貴寶>夫人爲<宣懿太后>, 妻<金>氏爲<允容王后>. 拜伊 <金貴>爲上大等, 阿 <憲崇>爲侍中. 二月, <金陽>募集兵士, 入<淸海鎭>, 謁<祐徵>. 阿 <祐徵>在<淸海鎭>, 聞<金明>簒位, 謂鎭大使<弓福>曰: "<金明>弑君自立, <利弘>枉殺君{吾} 父, 不可共戴天也. 願仗將軍之兵, 以報君父之 ." <弓福>曰: "古人有言, 見義不爲, 無勇. 吾雖庸劣, 唯命是從." 遂分兵五千人, 與其友<鄭年>, 曰: "非子, 不能平禍亂." 冬十二月, <金陽>爲平東將軍, 與<閻長>·<張弁>·<鄭年>·<駱金>·<張建榮>·<李順行>統軍, 至<武州><鐵治縣{鐵冶縣}> . 王使大監<金敏周>出軍迎戰. 遣<駱金>·<李順行>, 以馬軍三千突擊, 殺傷殆盡.
趙炳舜. 『新羅敏哀大王石塔記銘』.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三國史節要』.
민애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명이다. 그는 원성대왕의 증손이며, 대아찬 충공의 아들이다. 그는 여러 종류의 관직을 거쳐 상대등이 되었던 바, 시중 이홍과 함께 왕을 핍박하여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추존하여 선강대왕이라 하고, 어머니 박씨 귀보부인은 선의태후라 하고, 아내 김씨를 윤용왕후라 하였으며, 이찬 김 귀를 상대등으로, 그리고 아찬 헌숭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2월, 김 양은 군사를 모집하여 청해진으로 들어가 우징을 만났다. 아찬 우징은 청해진에서 김 명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문을 듣고 청해진 대사 궁복에게 말했다.
"김 명은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고, 이홍은 임금과 아비를 함부로 살해하였으니, 그들과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다. 원컨대 장군의 군사를 빌려, 임금과 아비의 원수를 갚고자 한다."
궁복은 "옛사람의 말에 '정의를 보고도 실천하지 않는 자는 용기 없는 자'라고 하였으니, 내 비록 용렬하나 명령에 따르겠다"라고 대답하고, 마침내 군사 5천을 그의 친구인 정 년에게 주면서 "자네가 아니면 이 화란을 평정하지 못하리라"라고 말하였다.
겨울 12월, 김 양이 평동장군이 되어 염 장·장 변·정 년·낙 금·장 건영·이 순행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무주 철야현에 도착하였다. 왕은 대감 김 민주로 하여금 군사를 출동시켜 싸우게 하였다. 이에 김 양이 낙 금과 이 순행에게 기병 3천을 주어 돌격케 하여, 거의 모두를 섬멸하였다.
○二年, 春閏正月, 晝夜兼行, 十九日, 至于<達伐>之丘. 王聞兵至, 命伊 <大昕>·大阿 <允璘>·< 勛>等, 將兵拒之. 又一戰大克, 王軍死者過半. 時, 王在西郊大樹之下, 左右皆散, 獨立不知所爲, 奔入<月遊宅>, 兵士尋而害之. 群臣以禮葬之, 諡曰<閔哀{敏哀}> .
趙炳舜. 『新羅敏哀大王石塔記銘』.
2년 봄 윤정월, 김 양의 군사가 주야로 행군하여, 19일에 달벌에 도착하였다. 왕은 김 양의 군사가 도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찬 대흔과 대아찬 윤린·의훈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이에 대항하도록 하였다. 김 양의 군사가 다시 한번 싸워 대승하였다. 왕의 군사 중에는 사망자가 절반이 넘었다. 이 때 왕이 서쪽 교외의 큰 나무 밑에 있다가, 측근들이 모두 흩어지고 혼자 남게되자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월유택으로 도주하였다. 군사들은 그를 찾아내어 죽였다. 여러 신하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 지내고, 시호를 민애라 하였다.
○<神武王>立. 諱<祐徵>, <元聖大王>孫<均貞>上大等之子, <僖康王>之從弟也. <禮徵>等旣淸宮禁, 備禮迎之, 卽位. 追尊祖伊 <禮英>[一云<孝眞>.]爲<惠康大王>, 考爲<成德大王>, 母<朴>氏<眞矯>夫人爲<憲穆太后>, 立子<慶膺>爲太子. 封<淸海鎭>大使<弓福>爲感義軍使, 食實封二千戶. <利弘>懼, 棄妻子, 遁山林, 王遣騎士, 追捕殺之. 秋七月, 遣使如<唐>, 遺<淄靑>節度使奴婢. 帝聞之矜遠人, 詔令歸國. 王寢疾, 夢<利弘>射中背, 旣寤, 瘡發背. 至是月二十三日, 薨. 諡白{曰} <神武>, 葬于<弟兄山>西北.
○論曰: "<歐陽子>之論, 曰: '<魯><桓公>, 弑<隱公>而自立者; <宣公>, 弑<子赤>而自立者; <鄭>< 公>, 逐世子<忽>而自立者; <衛>公<孫剽>, 逐其君< >而自立者. 聖人於『春秋』, 皆不絶其爲君, 各傳其實, 而使後世信之, 則四君之罪, 不可得而掩耳, 則人之爲惡, 庶乎其息矣.' <羅>之<彦昇>, 弑<哀莊>而卽位; <金明>, 弑<僖康>而卽位; <祐徵>, 弑<閔哀{敏哀}> 而卽位. 今皆書其實, 亦『春秋』之志也."
三國史記卷第十.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新羅敏哀大王石塔記銘』.
신무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우징이다. 그는 원성대왕의 손자인 상대등 균정의 아들이며, 희강왕의 종제이다. 예징 등이 이미 궁중을 숙청하고, 예절을 갖추어 그를 맞이하고,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왕의 조부 이찬 예영[효진이라고도 한다.]을 추존하여 혜강대왕이라 하고, 아버지를 성덕대왕이라 하고, 어머니 박씨 진교부인을 헌목태후라 하고, 아들 경응을 태자로 삼았다. 청해진 대사 궁복을 감의 군사로 삼는 동시에 식읍 2천 호를 주었다. 이홍은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 하여, 처자를 버리고 산림으로 도주하였으나, 왕이 기병을 보내 추격시켜 잡아 죽였다.
가을 7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그들이 당 나라로 가는 도중에 치청의 절도사에게 노비를 주었다. 황제가 이를 듣고 먼 지방 사람이라고 불쌍히 여겨서, 그들을 귀국시키게 하였다.
왕이 병으로 누웠는데, 꿈에 이홍이 왕의 등에 활을 쏘았다. 왕이 잠을 깨어 보니 등에 종기가 났다. 이 달 23일에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신무라 하고 제형산 서북쪽에 장사지냈다.
저자의 견해 : 구양자는 "노 환공은 은공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자요, 선공은 자적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자이며, 정 여공은 세자 홀을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된 자요, 위공 손표는 그의 임금 간을 쫓아내고 스스로 왕이 된 자이다. 공자가 [춘추]에 그들이 임금된 것을 하나도 빼지 아니하고 일일이 사실대로 전한 것은, 후인들로 하여금 이를 알고 믿게하기 위함이다. 위의 네 왕의 죄는 귀를 가려도 들릴 수 밖에 없는 사실이므로, 이제 사람들의 악행이 거의 없어질만도 하다"라고 주장하였다. 신라의 언승은 애장왕을 죽이고 즉위하였고, 김 명은 희강왕을 죽이고 즉위하였고, 우징은 민애왕을 죽이고 즉위하였다. 지금 그 사실을 모두 기록하는 것도 또한 [춘추]의 의도와 동일하다.
삼국사기 권 제 10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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