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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사

삼국사기 백제 본기 (원문+한글) 권 제 23


  三國史記 百濟本紀
             
 卷第二十三~卷第二十八

三國史記卷第二十三.

삼국사기 권 제 23

百濟本紀第一.
始祖<溫祚王>·<多婁王>·<己婁王>·<盖婁王>·<肖古王>.

백제본기 제 1
시조 온조왕, 다루왕, 기루왕, 개루왕, 초고왕.

○<百濟>始祖<溫祚王>, 其父, <鄒牟>, 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 <扶餘>王無子, 只有三女子, 見<朱蒙>, 知非常人, 以第二女妻之. 未幾, <扶餘>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或云: "<朱蒙>, 到<卒本>, 娶<越郡>女, 生二子."] 及<朱蒙>在<北扶餘>所生子, 來爲太子. <沸流>·<溫祚>, 恐爲太子所不容, 遂與<鳥干{烏干}> ·<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 多.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 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 鄒>, 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 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一云: 始祖<沸流王>, 其父<優台>, <北扶餘>王<解扶婁>庶孫. 母<召西奴>, <卒本>人<延  勃>之女, 始歸于<優台>, 生子二人, 長曰<沸流>, 次曰<溫祚>. <優台>死, 寡居于<卒本>. 後<朱蒙>不容於<扶餘>, 以<前漢><建昭>二年, 春二月, 南奔至<卒本>, 立都號<高句麗>, 娶<召西奴>爲妃. 其於問{開} 基創業,  {頗} 有內助, 故<朱蒙>寵接之特厚, 待<沸流>等如己子. 及<朱蒙>在<扶餘>所生<禮>氏子<孺留>來, 立之爲大子{太子} , 以至嗣位焉. 於是, <沸流>謂弟<溫祚>曰: "始, 大王避<扶餘>之難, 逃歸至此, 我母氏傾家財, 助成邦業, 其勸勞多矣. 及大王厭世, 國家屬於<孺留>, 吾等徒在此, 鬱鬱如 贅, 不如奉母氏, 南遊卜地, 別立國都." 遂與弟率黨類, 渡<浿>·<帶>二水, 至< 鄒忽{彌鄒忽}> 以居之. 『北史』及『隋書』皆云: "<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初立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 未知孰是.]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아버지가 추모이다. 혹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은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 부여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세 명의 딸만 있었는데, 주몽을 본 후, 그가 비상한 사람임을 알고는 그에게 둘째 딸을 시집보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뒤를 이었다. 주몽은 두명의 아들을 낳았다. 맏아들은 비류, 둘째 아들은 온조라고 한다.[혹은 '주몽이 졸본에서 월군 여자를 취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았던 아들이 이곳에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자신이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걱정되어, 마침내 오간·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 지방으로 떠났다. 백성 가운데 그들을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는 한산에 도착하여 부아악에 올라가 거주할만한 곳을 찾았다. 비류는 바닷가에 거주하기를 원하였다. 열 명의 신하가 간하여 말했다.
"이곳 하남 땅만이 북쪽으로는 한수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이 보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이러한 천험의 요새는 다시 얻기 어렵습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터를 잡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고, 국호를 십제라고 하였다. 이 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토지가 습기가 많고, 물에 소금기가 있어 편히 살 수가 없다고 하여 위례로 돌아왔다. 그는 이곳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태평한 것을 보고는 부끄러워 하며 후회하다가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위례로 돌아왔다. 그 후 애초에 백성들이 즐거이 따라왔다고하여 국호를 백제로 바꾸었다. 그의 조상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시조 비류왕의 아버지는 우태이니,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었다. 어머니는 소서노이니 졸본 사람 연타취발의 딸이다. 그녀가 처음 우태에게 시집와서 두 아들을 낳았다. 첫째는 비류, 둘째는 온조였다. 어머니는 우태가 죽은 뒤 졸본에서 혼자 살았다. 그 후 주몽이 부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한 건소 2년 봄 2월,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도착하여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으며, 소서노에게 장가들어 그녀를 왕비로 삼았다. 주몽이 나라의 기초를 개척하며 왕업을 창시함에 있어서 소서노의 내조가 매우 컸으므로, 주몽은 소서노를 극진히 사랑했고, 비류 등을 자기 소생과 같이 대우하였다. 주몽은 부여에서 낳았던 예씨의 아들 유류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다. 그 후 그가 주몽의 뒤를 잇게 되었다. 이 때 비류가 아우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내주어 나라의 기초를 세우는 위업을 도와 주었으니, 어머니의 조력과 공로가 많았다. 그러나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나라가 유류에게 돌아갔다. 우리가 공연히 여기에 있으면서 쓸모없는 사람같이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것 보다는, 차라리 어머님을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살 곳을 선택하여 별도로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라 하고, 마침내 그의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는 설도 있다. 한 편, [북사]와 [수서]에는 모두 "동명의 후손 중에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이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 나라 요동 태수 공손도가 자기의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고, 그들은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어느 주장이 옳은지 알 수 없다.]

○元年, 夏五月, 立<東明王>廟.

원년 여름 5월,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

○二年, 春正月, 王謂群臣曰: "<靺鞨>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宜繕兵積 , 爲拒守之計." 三月, 王以族父<乙音>, 有智識膽力, 拜爲右輔, 委以兵馬之事.

2년 봄 정월, 왕이 군신들에게 말했다.
"말갈이 우리의 북부 국경과 인접하여 있는데, 그 사람들은 용맹스러우면서도 거짓말을 잘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병기를 수선하고 식량을 저축하여, 그들을 방어할 계획을 세워야 한다."
3월, 왕이 그의 재종숙부 을음이 지혜와 담력이 있다 하여 우보로 임명하고, 그에게 군사 관계의 임무를 맡겼다.

○三年, 秋九月, <靺鞨>侵北境, 王帥勁兵, 急擊大敗之, 賊生還者十一二. 冬十月, 雷. 桃李華.

3년 가을 9월, 말갈이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다. 왕은 정예군을 이끌고 재빨리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격파하였다. 적군 중에 살아 돌아간 자가 열 사람 중에 한 두 명이었다.
겨울 10월, 우레가 쳤고 복숭아와 오얏 꽃이 피었다.

○四年, 春夏, 旱, 饑, 疫. 秋八月, 遣使<樂浪>修好.

4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어 흉년이었다. 전염병이 돌았다.
가을 8월, 낙랑에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맺었다.

○五年, 冬十月, 巡撫北邊, 獵獲神鹿.

5년 겨울 10월, 왕이 북쪽 변경을 순행하면서 사냥하여 신기한 사슴을 잡았다.

○六年, 秋七月辛未{辛卯} 晦, 日有食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6년 가을 7월 그믐 신미일에 일식이 있었다.

○八年, 春二月, <靺鞨>賊{兵} 三千來圍<慰禮城>, 王閉城門不出. 經旬, 賊糧盡而歸. 王簡銳卒, 追及<大斧峴>, 一戰克之, 殺虜五百餘人. 秋七月, 築<馬首城>, 竪<甁山>柵. <樂浪>太守使告曰: "頃者, 聘問結好, 意同一家, 今逼我疆, 造立城柵, 或者其有蠶食之謀乎? 若不 舊好,  城破柵, 則無所猜疑. 苟或不然, 請一戰以決勝負." 王報曰: "設險守國, 古今常道, 豈敢以此, 有 於和好? 宜若執事之所不疑也. 若執事恃强出師, 則小國亦有以待之耳." 由是, 與<樂浪>失和.

趙炳舜. 『三國史節要』.
8년 봄 2월, 말갈군 3천명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포위했다. 왕은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자 적은 군량이 떨어져 돌아갔다. 왕은 정예군을 선발하여 대부현까지 추격하여 단번에 이기고, 적병 500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가을 7월, 마수성을 쌓고 병산에 목책을 세웠다. 낙랑 태수가 사람을 보내 말했다.
"지난 날 서로 사신을 교환하고, 우호관계를 맺어 한 집안과 같이 여기고 있는 터에, 지금 우리의 영역에 접근하여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고 있으니, 혹시 우리 땅을 점점 차지하려는 계획이 아닌가? 만일 옛날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려면, 성을 허물고 목책을 제거하여, 즉시 억측과 의심을 하지 않도록 하라!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전투로 승부를 결정내보자!"
왕이 이에 대답하였다.
"요새를 설치하여 나라를 수비하는 것은 고금의 상도이다. 어찌 이 문제로 화친과 우호관계에 변함이 있겠는가? 이는 당연히 그대가 의심할 일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강한 것을 믿고 군사를 출동시킨다면, 우리 또한 이에 대응할 뿐이다."
이로 말미암아 낙랑과 우호관계가 단절되었다.

○十年, 秋九月, 王出獵, 獲神鹿, 以送<馬韓>. 冬十月, <靺鞨>寇北境. 王遣兵二百, 拒戰於<昆彌川>上. 我軍敗績, 依<靑木山>自保. 王親帥精騎一百, 出<烽峴>, 救之. 賊見之, 卽退.

10년 가을 9월, 왕이 사냥하다가 신기한 사슴을 잡았다. 이를 마한에 보냈다.
겨울 10월, 말갈이 북부 국경을 침략하였다. 왕이 200명의 군사를 보내 곤미천에서 싸웠다. 그러나 우리 군사가 패하여 청목산을 거점으로 자체 수비를 하고 있었다. 왕은 직접 100명의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봉현으로 나와 구원하였다. 적들이 이를 보고 즉시 퇴각하였다.

○十一年, 夏四月, <樂浪>使<靺鞨>襲破<甁山>柵, 殺掠一百餘人. 秋七月, 設<禿山>·<狗川>兩柵, 以塞<樂浪>之路.

11년 여름 4월, 낙랑이 말갈로 하여금 병산의 목책을 습격해서 파괴한 다음 1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 잡았다.
 가을 7월, 독산과 구천 두 곳에 목책을 설치하여 낙랑으로 가는 도로를 차단하였다.

○十三年, 春二月, 王都老 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 疆境, 少有寧日.  今妖祥屢見, 國母棄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 .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秋七月, 就<漢山>下, 立柵, 移<慰禮城>民戶. 八月, 遣使<馬韓>, 告遷都. 遂畵定疆 ,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九月, 立城闕.

13년 봄 2월, 서울에서 늙은 할미가 남자로 둔갑했고,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나이 61세였다.
여름 5월,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그들이 변경을 침공하여 편안한 날이 없다. 황차 요즈음에는 요사스러운 징조가 자주 보이고,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셨으며, 나라의 형세가 불안하다.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하는 중에 한수의 남쪽을 보니, 토양이 비옥하였다. 따라서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원히 평안할 계획을 세워야겠다."
가을 7월, 한산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을 이주시켰다.
8월, 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는 것을 알렸다. 마침내 국토의 영역을 확정하였다. 북으로는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이 경계이며, 서로는 큰 바다에 닿고, 동으로는 주양에 이르렀다.
9월, 성과 대궐을 수축하였다.

○十四年, 春正月, (+來) 遷<(+漢山)> 都. 二月, 王巡撫部落, 務勸農事. 秋七月, 築城<漢江>西北, 分<漢城>民.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14년 봄 정월, 도읍을 옮겼다.
2월, 왕이 부락을 순회하면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농사를 장려하였다.
가을 7월, 한강 서북방에 성을 쌓았다. 그곳에 한성 주민의 일부를 이주시켰다.

○十五年, 春正月, 作新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

15년 봄 정월, 새 궁실을 지었다. 궁실은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았다.

○十七年, 春, <樂浪>來侵, 焚<慰禮城>. 夏四月, 立廟以祀國母.

17년 봄, 낙랑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불태웠다.
여름 4월, 사당을 세우고 왕의 어머니에게 제사지냈다.

○十八年, 冬十月, <靺鞨>掩至, 王帥兵, 逆戰於<七重河>, 虜獲酋長<素牟>, 送<馬韓>, 其餘賊盡坑之. 十一月, 王欲襲<樂浪><牛頭山城>, 至<臼谷>, 遇大雪, 乃還.

18년 겨울 10월, 말갈이 습격해왔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에서 그들과 싸웠다. 추장 소모를 생포하여 마한에 보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생매장하였다.
11월,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을 습격하기 위하여 구곡까지 갔다. 그러나 눈이 크게 내렸으므로 되돌아왔다.

○二十年, 春二月, 王設大壇, 親祠{祀} 天地, 異鳥五來翔.

趙炳舜. 『三國史節要』.
20년 봄 2월, 왕이 큰 제단을 설치하고 천지신명에게 직접 제사를 지냈다. 이상한 새 다섯 마리가 그 위를 날았다.

○二十二年, 秋八月, 築<石頭>·<高木>二城. 九月, 王帥騎兵一千, 獵<斧峴>東, 遇<靺鞨>賊, 一戰破之, 虜獲生口, 分賜將士.

22년 가을 8월, 석두·고목의 2성을 쌓았다.
9월, 왕이 1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부현 동쪽 지방에서 사냥하다가, 말갈의 도적을 만나 단번에 물리쳤다. 이 때 잡은 포로들을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二十四年, 秋七月,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 安之, 其待王不爲不厚. 宜思有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如義何?" 王慙, 遂壞其柵.

24년 가을 7월, 왕이 웅천 목책을 세웠다.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 책망하였다.
"왕이 애초에 강을 건너와 발 붙일 곳이 없을 때, 나는 동북방의 100리 땅을 주어 살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왕을 후하게 대우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해야 할 것인데, 지금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어 대적할 자가 없다고 생각하여, 성과 연못을 크게 만들고 우리의 강토를 침범하니, 이것이 어찌 의리라고 할 수 있는가?"
왕이 부끄러워하며 목책을 허물었다.

○二十五年, 春二月, 王宮井水暴溢. <漢城>人家馬生牛, 一首二身. 日者曰: "井水暴溢者, 大王勃興之兆也, 牛一首二身者, 大王幷 國之應也." 王聞之喜, 遂有幷呑<辰>·<馬>之心.

25년 봄 2월, 왕궁의 우물이 엄청나게 넘쳤다. 한성의 민가에서 말이 소를 낳았다. 머리는 하나였으며, 몸은 둘이었다. 점치는 자가 말했다.
"우물이 엄청나게 넘친 것은 대왕께서 융성할 징조이며, 하나의 머리에 몸이 둘인 소가 태어난 것은, 대왕께서 이웃 나라를 합병할 징조입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여, 마침내 진한과 마한을 합병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二十六年, 秋七月, 王曰: "<馬韓>漸弱, 上下離心, 其勢不能又{久} .  爲他所幷, 則唇亡齒寒, 悔不可及. 不如先人而取之, 以免後艱." 冬十月, 王出師, 陽言田獵, 潛襲<馬韓>, 遂幷其國邑, 唯<圓山>·<錦峴>二城固守不下.

趙炳舜. 『三國史節要』.
26년 가을 7월, 왕이 말했다.
"마한이 점점 약해지고 임금과 신하가 각각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니, 그 국세가 오래 유지될 수 없다. 만일 다른 나라가 이들을 합병해 버린다면 순망치한이 되어, 그 때는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차라리 남보다 먼저 빼앗아 후환을 없애는 것이 낫겠다."
겨울 10월, 왕이 사냥을 간다고 하면서, 군사를 출동시켜 마한을 기습하였다. 마침내 마한을 합병하였는데, 오직 원산과 금현 두 성만은 굳게 수비하고 항복하지 않았다.

○二十七年, 夏四月, 二城降, 移其民於<漢山>之北, <馬韓>遂滅. 秋七月, 築<大豆山城>.

27년 여름 4월, 원산과 금현 두 성이 항복하였다. 그곳의 백성들을 한산 북쪽으로 이주시켰다. 마한이 마침내 멸망하였다.
가을 7월, 대두산성을 쌓았다.

○二十八年, 春二月, 立元子<多婁>爲太子, 委以內外兵事. 夏四月, 隕霜害麥.

28년 봄 2월, 왕의 맏아들 다루를 태자로 삼고, 그에게 서울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다.
여름 4월, 서리가 내려 보리가 피해를 입었다.

○三十一年, 春正月, 分國內民戶, 爲南北部. 夏四月, 雹. 五月, 地震. 六月, 又震.

31년 봄 정월, 국내의 민가들을 나누어서 남북부를 만들었다.
여름 4월, 우박이 내렸다.
5월, 지진이 났다.
6월, 지진이 다시 났다.

○三十三年, 春夏大旱. 民饑相食, 盜賊大起, 王撫安之. 秋八月, 加置東西二部.

33년,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다.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 먹었으며, 도적이 많이 생기자, 왕이 이들을 위무하여 안정시켰다.
가을 8월, 동부와 서부의 2부를 더 설치하였다.

○三十四年, 冬十月, <馬韓>舊將<周勤>, 據<牛谷城>叛. 王躬帥兵五千, 討之, <周勤>自經. 腰斬其尸, 幷誅其妻子.

34년 겨울 10월, 마한의 옛장수 주근이 우곡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직접 5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하였다. 주근은 목매어 자결하였다. 그 시체의 허리를 자르고 처자들도 죽였다.

○三十六年, 秋七月, 築<湯井城>, 分<大豆城>民戶, 居之. 八月, 修葺<圓山>·<錦峴>二城, 築<古沙夫里城>.

36년 가을 7월, 탕정성을 쌓고, 대두성 주민의 일부를 이주시켰다.
8월, 원산·금현의 두 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을 쌓았다.

○三十七年, 春三月, 雹大如 子, 鳥雀遇者死. 夏四月, 旱, 至六月乃雨. <漢水>東北部落饑荒, 亡入<高句麗>者一千餘戶, <浿>·<帶>之間, 空無居人.

37년 봄 3월, 크기가 달걀 정도인 우박이 내려 새가 맞아 죽었다.
여름 4월부터 가물다가 6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내렸다. 한수의 동북 부락에 흉년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간 자가 1천여 호에 달하였고, 패수와 대수 사이에는 사는 사람이 없었다.

○三十八年, 春二月, 王巡撫, 東至<走壤>, 北至<浿河>, 五旬而返. 三月, 發使勸農桑, 其以不急之事擾民者, 皆除之. 冬十月, 王築大壇, 祠{祀} 天地.

趙炳舜. 『三國史節要』.
38년 봄 2월, 왕이 순무하여 동으로 주양, 북으로 패하까지 갔다가 50일만에 돌아왔다.
3월, 왕이 사람을 보내 농업과 잠업을 권장하고, 급하지 않은 일로 백성들을 괴롭히는 부역을 모두 없앴다.
겨울 10월, 왕이 큰 제단을 쌓고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四十年, 秋九月, <靺鞨>來攻<述川城>. 冬十一月, 又襲<釜峴城>, 殺掠百餘人, 王命勁騎二百, 拒擊之.

40년 가을 9월, 말갈이 술천성을 침공하였다.
겨울 11월, 말갈이 다시 부현성을 습격하여 백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왕이 2백 명의 정예 기병을 보내 방어하였다.

○四十一年, 春正月, 右輔<乙音>卒, 拜北部<解婁>爲右輔. <解婁>, 本<扶餘>人也. 神識淵與{奧} , 年過七十, 旅{ } 力不愆, 故用之. 二月, 發<漢水>東北諸部落人年十五歲以上, 修營<慰禮城>.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41년 봄 정월, 우보 을음이 사망하자, 북부의 해루를 우보로 임명하였다. 해루는 본래 부여 사람이었다. 그는 도량이 넓고 식견이 깊으며, 70세가 넘었으나, 체력이 강하여 등용한 것이다.
2월, 한수 동북의 모든 부락의 15세 이상 되는 장정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수리하였다.

○四十三年, 秋八月, 王田<牙山>之原五日. 九月, 鴻 百餘集王宮. 日者曰: "鴻 , 民之象也, 將有遠人來投者乎!" 冬十月, <南沃沮><仇頗解>等二十餘家, 至<斧壤>, 納款. 王納之, 安置<漢山>之西.

43년 가을 8월, 왕이 5일 동안 아산 벌에서 사냥하였다.
9월, 1백여 마리의 기러기가 왕궁에 모였다. 점치는 자가 말했다.
"기러기는 백성의 상징이므로, 장차 먼 곳에서 귀순하여 오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겨울 10월, 남옥저의 구파해 등 20여 명이 부양에 와서 귀순하였다. 왕은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 서쪽에 거주하도록 하였다.

○四十五年, 春夏大旱, 草木焦枯. 冬十月, 地震, 傾倒人屋.

45년,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초목이 말랐다.
겨울 10월, 지진이 발생하여 백성들의 가옥이 기울거나 쓰러졌다.

○四十六年, 春二月, 王薨.

46년 봄 2월, 왕이 사망하였다.

○<多婁王>, <溫祚王>之元子. 器宇寬厚, 有威望. <溫祚王>在位第二十八年, 立爲太子, 至四十六年, 王薨, 繼位.

다루왕은 온조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도량이 넓고 명망이 높았다. 온조왕 재위 28년에 태자가 되었고, 46년에 왕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었다.

○二年, 春正月, (+王) 謁始祖<東明>廟. 二月, 王祀天地於南壇.

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봄 정월, 왕이 시조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였다.
2월, 왕이 남쪽 제단에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三年, 冬十月, 東部<屹于>, 與<靺鞨>戰於<馬首山>西, 克之, 殺獲甚衆. 王喜, 賞<屹于>馬十匹·租五百石.

3년 겨울 10월, 동부 흘우가 마수산 서쪽에서 말갈과 싸워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 죽이거나 생포한 자가 매우 많았다. 왕이 기뻐하여 흘우에게 말 열 필과 벼 5백 석을 상으로 주었다.

○四年, 秋八月, <高木城><昆優>, 與<靺鞨>戰, 大克, 斬首二百餘級. 九月, 王田於<橫岳>下, 連中雙鹿, 衆人歎美之.

4년 가을 8월, 고목성 곤우가 말갈과 싸워 크게 이겼다. 2백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9월, 왕이 횡악 아래에서 사냥하다가 두 마리의 사슴을 연이어 적중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감탄하고 칭찬하였다.

○六年, 春正月, 立元子<己婁>爲太子. 大赦. 二月, 下令國南州郡, 始作稻田.

6년 봄 정월, 왕의 맏아들 기루를 태자로 삼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월, 남쪽 주군에 명령하여 처음으로 논에서 쌀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七年, 春二月, 右輔<解婁>卒, 年九十歲. 以東部<屹于>爲右輔. 夏四月, 東方有赤氣. 秋九月, <靺鞨>攻陷<馬首城>, 放火, 燒百姓廬屋. 冬十月, 又襲<甁山>柵.

7년 봄 2월, 우보 해루가 나이 90세로 사망하였다. 동부 흘우를 우보로 삼았다.
여름 4월, 동방에 붉은 기운이 나타났다.
가을 9월, 말갈이 마수성을 침공하여 함락시키고 불을 질러 백성들의 가옥을 태웠다.
겨울 10월, 그들이 또 병산책을 습격하였다.

○十年, 冬十月, 右輔<屹于>爲左輔, 北部<眞會>爲右輔. 十一月, 地震聲如雷.

10년 겨울 10월, 우보 흘우를 좌보로 삼고, 북부 진회를 우보로 삼았다.
11월, 지진이 났는데 우레 같은 소리가 났다.

○十一年, 秋, 穀不成, 禁百姓私釀酒. 冬十月, 王巡撫東西兩部, 貧不能自存者, 給穀人二石.

11년 가을, 곡식이 잘 익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사사로이 술빚는 것을 금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동서 양부를 순회하며 백성들을 위무하고, 가난하여 자력으로 살 수 없는 자들에게는 일인당 곡식 두 섬을 주었다.

○二十一年, 春二月, 宮中大槐樹自枯. 三月, 左輔<屹于>卒, 王哭之哀.

21년 봄 2월, 왕궁 뜰에 있는 큰 홰나무가 저절로 말라 죽었다.
3월, 좌보 흘우가 사망하자 왕이 슬프게 울었다.

○二十八年, 春夏旱. 慮囚, 赦死罪. 秋八月, <靺鞨>侵北鄙.

28년, 봄과 여름이 가물었다. 죄수들을 재심사하고 사형수들을 사면하였다.
가을 8월,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二十九年, 春二月, 王命東部, 築<牛谷城>, 以備<靺鞨>.

29년 봄 2월, 왕이 동부에 명령하여 우곡성을 쌓아 말갈을 방어하게 하였다.

○三十六年, 冬十月, 王拓地至<娘子谷城>. 仍遣使<新羅>請會, 不從.

36년 겨울 10월, 왕이 낭자곡성까지 토지를 개척하였다. 신라왕에게 사신을 보내 만나기를 요청하였으나, 신라는 거절하였다.

○三十七年, (+秋八月) 王遣兵攻<新羅><蛙山城>, 不克, (+冬十月) , 移兵<狗壤城>. <新羅>發騎兵二千, 逆擊走之.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37년, 왕이 군사를 보내 신라의 와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군사를 옮겨 구양성을 공격하였다. 신라는 기병 2천 명을 동원하였으나 우리 군사는 이들과 대적하여 물리쳤다.

○三十九年, 攻取<蛙山城>, 留二百人, 守之, 尋爲<新羅>所敗.

39년, 와산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군사 2백 명을 그곳에 두어 수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신라에게 쫓겨났다.

○四十三年, 遣兵侵<新羅>.

43년, 군사를 보내 신라를 침공하였다.

○四十六年, 夏五月戊午晦, 日有食之.

46년 여름 5월 그믐 무오일에 일식이 있었다.

○四十七年, 秋八月, 遣將侵<新羅>.

47년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신라를 침공하였다.

○四十八年, 冬十月, 又攻<蛙山城>, 拔之.

48년 겨울 10월, 다시 와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四十九年, 秋九月, <蛙山城>爲<新羅>所復.

49년 가을 9월, 와산성을 신라가 회복하였다.

○五十年, 秋九月, 王薨.

50년 가을 9월, 왕이 사망하였다.

○<己婁王>, <多婁王>之元子. 志識宏遠, 不留心細事. <多婁王>在位第六年, 立爲太子, 至五十年, 王薨, 繼位.

기루왕은 다루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뜻과 식견이 넓고 원대하여, 사소한 일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는 다루왕 재위 6년에 태자가 되었고, 50년에 왕이 사망하자 즉위하였다.

○九年, 春正月, 遣兵侵<新羅>邊境. 夏四月乙巳, 客星入紫微.

9년 봄 정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침공하였다.
여름 4월 을사에 객성이 자미 성좌로 들어갔다.

○十一年, 秋八月乙未晦, 日有食之.

11년 가을 8월 그믐 을미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三年, 夏六月, 地震, 裂陷民屋, 死者多.

13년 여름 6월, 지진이 나서 땅이 갈라지고 주민들의 가옥이 무너졌다. 사망자가 많았다.

○十四年, 春三月, 大旱, 無 {麥} . 夏六月, 大風拔木.

趙炳舜. 『三國史節要』.
14년 봄 3월, 큰 가뭄이 들어 보리가 나지 않았다.
여름 6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를 쓰러뜨렸다.

○十六年, 夏六月戊戌朔, 日有食之.

16년 여름 6월 초하루 무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七年, 秋八月, <橫岳>大石五, 一時隕落.

17년 가을 8월, 횡악의 큰 바위 다섯 개가 한꺼번에 떨어졌다.

○二十一年, 夏四月, 二龍見<漢江>.

21년 여름 4월, 두 마리 용이 한강에 나타났다.

○二十三年, 秋八月, 隕霜殺菽. 冬十月, 雨雹.

23년 가을 8월, 서리가 내려 콩이 죽었다.
겨울 10월, 우박이 내렸다.

○二十七年, 王獵<漢山>, 獲神鹿.

27년, 왕이 한산에서 사냥하다가 신기한 사슴을 잡았다.

○二十九年, 遣使<新羅>請和.

29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다.

○三十一年, 冬, 無氷.

31년,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三十二年, 春夏旱, 年饑民相食. 秋七月, <靺鞨>入<牛谷>, 奪掠民口而歸.

32년, 봄과 여름이 가물어 흉년이 들었다. 백성들이 서로 잡아 먹었다.
가을 7월, 말갈이 우곡에 침입하여 주민들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三十五年, 春三月, 地震. 冬十月, 又震.

35년 봄 3월, 지진이 났다.
겨울 10월, 또 지진이 났다.

○三十七年, 遣使聘<新羅>.

37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四十年, 夏四月,  巢于都城門上. 六月, 大雨浹旬, <漢江>水漲, 漂毁民屋. 秋七月, 命有司, 補水損之田.

40년 여름 4월, 서울 성문 위에 황새가 둥지를 틀었다.
6월, 열흘동안 큰 비가 내려서 한강물이 넘쳐서, 주민들의 가옥이 유실되었다.
가을 7월, 관리에게 명령하여 수해를 당한 논밭을 복구하게 하였다.

○四十九年, <新羅>爲<靺鞨>所侵掠, 移書請兵, 王遣五將軍, 救之.

49년, 신라가 말갈에게 침략을 당하자 서신을 보내와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왕이 다섯 명의 장수를 보내 구원하게 하였다.

○五十二年, 冬十一月, 王薨.

52년 겨울 11월, 왕이 사망하였다.

○<蓋婁王>, <己婁王>之子, 性恭順, 有操行. <己婁>在位五十二年薨, 卽位.

개루왕은 기루왕의 아들이다. 그는 성격이 공손하고 품행이 방정하였다. 기루왕이 재위 52년에 사망하자 그가 즉위하였다.

○四年, 夏四月, 王獵<漢山>.

4년 여름 4월, 왕이 한산에서 사냥하였다.

○五年, 春二月, 築<北漢山城>.

5년 봄 2월, 북한산성을 쌓았다.

○十年, 秋八月庚子, 熒惑犯南斗(-一) .

趙炳舜. 『三國史節要』.
10년 가을 8월 경자에 형혹성이 남두 성좌를 범하였다.

○二十八年, 春正月丙申晦, 日有食之. 冬十月, <新羅>阿 <吉宣>謀叛, 事露來奔. <羅>王移書請之, 不送. <羅>王怒, 出師來伐. 諸城堅壁, 自守不出, <羅>兵絶糧而歸.
○論曰: <春秋>時, < 僕>來奔<魯>. <季文子>曰: '見有禮於其君者, 事之如孝子之養父母也; 見無禮於其君者, 誅之如鷹 之逐鳥雀也. 觀< 僕>, 不度於善而在於凶德, 是以去之.' 今<吉宣>亦姦賊之人, <百濟>王納而匿之, 是謂掩賊爲藏者也. 由是, 失 國之和, 使民困於兵革之役, 其不明, 甚矣.

28년 봄 정월 그믐 병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 신라의 아찬 길선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자 우리 나라로 도망해왔다. 신라왕이 글을 보내 소환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를 보내지 않았다. 신라왕이 노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공격해왔으나 모든 성이 굳게 방어하고 나아가 싸우지 않았다. 신라 군사들은 군량이 떨어져 돌아갔다.
저자의 견해 : 춘추 시대에 거복이 노 나라로 도망해왔을 때, 계문자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기 임금에게 예절이 있는 자를 보면, 임금 섬기기를 마치 효자가 부모를 봉양하는 것같이 하며, 자기 임금에게 예절이 없는 자를 보면, 임금 죽이기를 마치 매가 참새를 쫓는 것같이 한다. 거복을 보니 그의 뜻이 선한 데 있지 않고 악한 데 있기 때문에 그를 쫓아버리노라."
지금보면 길선도 역시 간사한 역적인데 백제왕이 그를 받아들여 숨겨 주었으니 이야말로 도적을 비호하여 탐오를 함께 하는 격이다. 이로 말미암아 이웃 나라와 화친함을 잃고 백성들로 하여금 병역에 시달리게 하였으니, 그는 대단히 명철하지 못했다.

○三十九年, 王薨.

39년, 왕이 사망하였다.

○<肖古王>[一云<素古>.], <蓋婁王>之子. <蓋婁>在位三十九年薨, 嗣位.

초고왕[소고라고도 한다.]은 개루왕의 아들이다. 개루왕이 재위 39년에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었다.

○二年, 秋七月, 潛師襲破<新羅>西鄙二城, 虜獲男女一千而還. 八月, <羅>王遣一吉 <興宣>, 領兵二萬, 來侵國東諸城. <羅>王又親帥精騎八千繼之, 掩至<漢水>. 王度<羅>兵, 衆不可敵, 乃還前所掠.

2년 가을 7월, 군사를 몰래 보내 신라의 서쪽 변경에 있는 두 성을 격파하고 남녀 1천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8월, 신라왕이 일길찬 흥선으로 하여금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동쪽의 여러 성을 침공하게 하였다. 신라왕은 또한 직접 정예 기병 8천 명을 거느리고 뒤를 이어 한수까지 진격해왔다. 왕은 신라군이 많아서 대적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곧 이전에 빼앗았던 성을 돌려주었다.

○五年, 春三月丙寅晦, 日有食之. 冬十月, 出兵侵<新羅>邊鄙.

5년 봄 3월 그믐 병인일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의 변경을 침공하였다.

○二十一年, 冬十月, 無雲而雷. 星 于西北, 二十日而滅.

21년 겨울 10월, 구름 없이 우레가 쳤고, 혜성이 서북쪽에 나타났다가 20일만에 사라졌다.

○二十二年, 夏五月, 王都井及<漢水>皆竭.

22년 여름 5월, 서울의 우물과 한수가 모두 말랐다.

○二十三年, 春二月, 重修宮室. 出師攻<新羅><母山城>.

23년 봄 2월, 궁실을 중수하였다. 군사를 출동하여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하였다.

○二十四年, 夏四月丙午朔, 日有食之. 秋七月, 我軍與<新羅>戰於<狗壤>, 敗北, 死者五百餘人.

24년 여름 4월 초하루 병오일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 우리 군사가 신라와 구양에서 싸우다가 패배하여 죽은 자가 5백여 명이었다.

○二十五年, 秋八月, 出兵襲<新羅>西境<圓山鄕>, 進圍<缶谷城>. <新羅>將軍<仇道>, 帥馬兵五百, 拒之. 我兵佯退, <仇道>追至<蛙山>, 我兵反擊之, 大克.

25년 가을 8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 서쪽 국경에 있는 원산향을 공격하고, 더 진격하여 부곡성을 포위했다. 신라 장수 구도가 기병 5백 명을 거느리고 저항하였다. 우리 군사가 퇴각하는 척하자 구도는 와산까지 추격해왔다. 이 때 우리 군사가 반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二十六年, 秋九月, 蚩尤旗見于角·亢.

26년 가을 9월, 치우기별이 각성과 항성 성좌에 나타났다.

○三十四年, 秋七月, 地震. 遣兵, 侵<新羅>邊境.

34년 가을 7월, 지진이 났다. 군사를 보내 신라 변경을 침공하였다.

○三十九年, 秋七月, 出兵攻<新羅><腰車城>, 拔之, 殺其城主<薛夫>. <羅>王<奈解>怒, 命伊伐 <利音>爲將, 帥六部精兵, 來攻我<沙峴城>. 冬十月, 星 于東井.

39년 가을 7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의 요차성을 공략하고, 성주 설부를 죽였다. 신라왕 나해가 분개하여 이벌찬 이음을 장수로 삼아 6부의 정예군을 거느리고 와서 우리의 사현성을 치게 하였다.
겨울 10월, 혜성이 동정 성좌에 나타났다.

○四十年, 秋七月, 太白犯月.

40년 가을 7월, 태백성이 달을 범하였다.

○四十三年, 秋, 蝗, 旱,  不順成, 盜賊多起, 王撫安之.

43년 가을, 메뚜기 떼가 생기고 가물어서 곡식이 잘 익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도적이 많이 생기자 왕이 그들을 위무하여 안정시켰다.

○四十四年, 冬十月, 大風拔木.

44년 겨울 10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四十五年, 春二月, 築<赤峴>·<沙道>二城, 移東部民戶. 冬十月, <靺鞨>來攻<沙道城>, 不克, 焚燒城門而遁.

45년 봄 2월, 적현성과 사도성을 쌓고 동부의 민가를 그곳으로 옮겼다.
겨울 10월, 말갈이 사도성에 와서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자 성문에 불을 지르고 도망하였다.

○四十六年, 秋八月, 國南, 蝗害 , 民饑. 冬十一月, 無氷.

46년 가을 8월, 남쪽 지역에 메뚜기 떼가 곡식을 해쳐 백성들이 굶주렸다.
겨울 11월, 물이 얼지 않았다.

○四十七年, 夏六月庚寅晦, 目{日} 有食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47년 여름 6월 그믐 경인일에 일식이 있었다.

○四十八年, 秋七月, 西部人<茴會{荀會}> 獲白鹿, 獻之. 王以爲瑞, 賜 一百石.

趙炳舜. 『三國史節要』.
48년 가을 7월, 서부 사람 회회가 흰 사슴을 잡아 바쳤다. 왕이 상서로운 일이라 하여 곡식 1백 석을 주었다.

○四十九年, 秋九月, 命北部<眞果>, 領兵一千, 襲取<靺鞨><石門城>. 冬十月, <靺鞨>以勁騎來侵. 至于<述川>. 王薨.
三國史記卷第二十三.

49년 가을 9월, 북부의 진과에게 명령하여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말갈의 석문성을 습격하여 빼앗게 하였다.
겨울 10월, 말갈이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침입하여 우술천에 이르렀다.
왕이 사망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23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