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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사

삼국사기 백제 본기 (원문+한글) 권 제 28


三國史記卷第二十八.

삼국사기 권 제 28

百濟本紀第六.
<義慈王>.

백제본기 제 6
의자왕

○<義慈王>, <武王>之元子, 雄勇膽決. <武王>在位三十三年, 立爲太子. 事親以孝, 與兄弟以友, 時號<海東曾子>. <武王>薨, 太子嗣位. <太宗>遣祠部郞中<鄭文表>, 冊命爲柱國<帶方郡>王{公} <百濟>王. 秋八月, 遣使入<唐>, 表謝, 兼獻方物.

趙炳舜. 『三國史節要』.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서 용감하고 대담하며 결단성이 있었다. 무왕 재위 33년에 태자가 되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서 당시에 해동증자라고 불렸다. 무왕이 사망하자 태자가 왕위를 이었다. 당 나라 태종이 사부 랑중 정 문표를 보내 왕을 주국대방국왕백제왕으로 책봉하였다.
가을 8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사의를 표하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쳤다.

○二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二月, 王巡撫州郡. 慮囚, 除死罪皆原之. 秋七月, 王親帥兵, 侵<新羅>, 下<  >等四十餘城. 八月, 遣將軍<允忠>, 領兵一萬, 攻<新羅><大耶城>. 城主<品釋>與妻子出降. <允忠>盡殺之, 斬其首, 傳之王都, 生獲男女一千餘人, 分居國西州縣, 留兵守其城. 王賞<允忠>功, 馬二十匹·穀一千石.

2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2월, 왕이 주, 군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위무하고 죄수들을 재심사하여 사형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용서하여 주었다.
가을 7월, 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침공하여 미후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8월, 장군 윤충을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였다. 성주 품석이 처자를 데리고 나와 항복하자 윤충이 그들을 모두 죽이고 그의 목을 베어 서울에 보내고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아 서쪽 지방의 주, 현에 나누어 살게 하고 군사를 남겨 그 성을 지키게 하였다. 왕이 윤충의 공로를 표창하여 말 20필과 곡식 1천 석을 주었다.

○三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冬十一月, 王與<高句麗>和親, 謀欲取<新羅>< 項城>, 以塞入朝之路, 遂發兵攻之. <羅>王<德曼>遣使, 請救於<唐>, 王聞之罷兵.

3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1월, 왕이 고구려와 화친을 맺었다. 그 목적은 신라의 당항성을 빼앗아 그들이 당 나라로 조공하러 가는 길을 막는 것이었다. 왕은 마침내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를 공격하였다. 신라왕 덕만이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니 왕이 이 사실을 듣고 군사를 철수시켰다.

○四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太宗>遣司農丞<相里玄奬>, 告諭兩國, 王奉表陳謝. 立王子<隆>爲太子. 大赦. 秋九月, <新羅>將軍<庾信>領兵來侵, 取七城.

4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태종이 사농승 상리현장을 보내 두 나라를 타이르자 왕이 표문을 올려 사죄하였다.
왕의 아들 융을 태자로 삼았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가을 9월, 신라 장군 유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일곱 성을 빼앗았다.

○五年, 夏五月, 王聞<太宗>親征<高句麗>, 徵兵<新羅>. 乘其間, 襲取<新羅>七城. <新羅>遣將軍<庾信>, 來侵.

5년 여름 5월, 왕은 태종이 직접 고구려를 치면서 신라에서 군사를 징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 틈을 타서 신라를 습격하여 7개 성을 빼앗으니, 신라에서 장군 유신을 보내 침공하였다.

○七年, 冬十月, 將軍<義直>, 帥步騎三千, 進屯<新羅><茂山城>下, 分兵攻<甘勿>·<桐岑>二城, <新羅>將軍<庾信>, 親勵士卒, 決死而戰, 大破之. <義直>匹馬而還.

7년 겨울 10월, 장군 의직이 보병과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무산성 아래에 주둔하고, 군사를 나누어 감물과 동잠 두 성을 공격하였다. 신라 장군 유신이 직접 군사들을 격려하며 결사적으로 싸워서 아군을 크게 격파하니 의직이 단신으로 돌아왔다.

○八年, 春三月, <義直>襲取<新羅>西鄙<腰車>等一十餘城. 夏四月, 進軍於<玉門谷>, <新羅>將軍<庾信>逆之, 再戰大敗之.

8년 봄 3월, 의직이 신라 서부 변경의 요차 등 10여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여름 4월, 옥문곡으로 진군하니, 신라 장군 유신이 이들과 두 번 전투하여 크게 이겼다.

○九年, 秋八月, 王遣左將<殷相>, 帥精兵七千, 攻取<新羅><石吐>等七城, <新羅>將<庾信>·<陳春>·<天存>·<竹旨>等, 逆擊之, 不利, 收散卒, 屯於<道薩城>下, 再戰, 我軍敗北. 冬十一月, 雷. 無氷.

9년 가을 8월, 왕이 좌장 은상을 보내 정예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석토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빼앗게 하였다. 신라 장수 유신, 진춘, 천존, 죽지 등이 이를 맞아 공격하였으나 불리해지자,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도살성 아래 진을 치고 재차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겨울 11월, 우레가 쳤고 물이 얼지 않았다.

○十一年, 遣使入<唐>朝貢. 使還, <高宗>降璽書, 諭王曰: "海東三國, 開基日久,  列疆界, 地實犬牙. 近代已來, 遂構嫌隙, 戰爭交起, 略無寧歲. 遂令<三韓>之氓, 命懸刀 {俎} , 築戈肆憤, 朝夕相仍. 朕代天理物, 載深矜憫. 去歲, <高句麗>·<新羅>等使,  來入朝, 朕命釋玆 怨, 更敦款睦. <新羅>使<金法敏>奏言: '<高句麗>·<百濟>, 脣齒相依, 竟擧干戈, 侵逼交至, 大城重鎭,  爲<百濟>所倂, 疆宇日蹙, 威力 謝, 乞詔<百濟>, 令歸所侵之城. 若不奉詔, 卽自興兵打取, 但得古地, 卽請交和.' 朕以其言旣順, 不可不許. 昔, <齊><桓>列士{土} 諸侯, 尙存亡國,  朕萬國之主, 豈可不恤危藩! 王所兼<新羅>之城,  宜還其本國, <新羅>所獲<百濟> 虜, 亦遣還王. 然後, 解患釋紛, 韜戈偃革, 百姓獲息肩之願, 三蕃無戰爭之勞. 比夫流血邊亭, 積屍疆 , 耕織 廢, 士女無聊, 豈可同年而語哉? 王若不從進止, 朕已依<法敏>所請, 任其與王決戰, 亦令約束<高句麗>, 不許遠相救恤. <高句麗>若不承命, 卽令<契丹>諸藩, 度<遼>, 深入抄掠. 王可深思朕言, 自求多福, 審圖良策, 無貽後悔."

趙炳舜. 『三國史節要』.今西龍.
11년,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이 돌아올 때 고종이 조서를 보내 왕에게 타일러 말했다.
"해동의 세 나라는 개국의 역사가 오래되고 국토가 나란히 붙어 있으니, 국경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태이다. 근대 이래로 마침내 사이가 벌어져 전쟁이 계속 일어나니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다. 이에 따라 삼한 백성들은 목숨을 도마 위에 올려놓은 상황이 되었으며, 무기를 쌓아 놓고 분노하는 일이 아침 저녁으로 이어졌다. 나는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입장이니 이를 매우 가엾게 여기는 바이다. 지난해에 고구려와 신라의 사신들이 함께 와서 입조하였을 때, 나는 이와 같은 원한을 풀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기를 명하였었다. 신라 사신 김 법민이 말하기를 '고구려와 백제는 긴밀히 의지하면서 군사를 일으켜 번갈아 우리를 침략하니, 우리의 큰 성과 중요한 진은 모두 백제에게 빼앗겨서, 국토는 날로 줄어들고 나라의 위엄조차 사라져 갑니다. 원컨대 백제에 조칙을 내려 빼앗아 간 성을 돌려 주게 하소서. 만일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즉시 우리 스스로 군사를 동원하여 잃었던 옛 땅만을 되찾고 즉시 화친을 맺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말이 순리에 맞았기 때문에 나는 승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 제 환공은 제후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멸망하는 나라를 구원하였는데, 하물며 나는 만국의 군주로서 어찌 위급하게 된 번방을 구제하지 않으랴! 왕은 빼앗은 신라의 성을 모두 돌려 주어야 하며, 신라도 사로잡은 백제 포로들을 왕에게 돌려 보내야 한다. 그렇게 한 후에야 근심이 풀리고 분규가 해결될 것이니, 전쟁이 끝나면 백성들은 쉬고 싶어하는 소망을 이룰 것이며, 세 번방은 전쟁의 괴로움을 잊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변경에서 피흘리고 국토 전역에 시체가 쌓이며, 농사와 길쌈을 모두 폐한 채, 남녀가 슬퍼하는 것과 어찌 같다고 말할 수 있으랴? 왕이 만일 이 분부를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법민의 요청대로 신라가 왕과 결전하도록 할 것이며, 또한 고구려로 하여금 신라와 약속하여 백제를 구원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고구려가 만일 명령을 거역한다면 즉시 거란과 모든 번방 국가들에게 명령하여 요수를 건너가서 공격케 할 것이니, 왕은 나의 말을 깊이 성찰하여 스스로 많은 복을 얻도록 할 것이며, 좋은 방책을 찾아 후회함이 없도록 하라."

○十二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12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三年, 春, 大旱. 民饑. 秋八月, 王與<倭>國通好.

13년 봄, 큰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렸다.
가을 8월, 왕이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十五年, 春二月, 修太子宮, 極侈麗. 立<望海亭>於王宮南. 夏五月,  馬入<北岳><烏含寺>, 鳴 佛宇數日死. 秋七月, 重修<馬川城>. 八月, 王與<高句麗>·<靺鞨>, 攻破<新羅>三十餘城. <新羅>王<金春秋>, 遣使朝<唐>, 表稱: "<百濟>與<高句麗>·<靺鞨>, 侵我北界, 沒三十餘城."

15년 봄 2월, 태자의 궁을 수리하는데 대단히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하였으며, 왕궁 남쪽에 망해정을 건축하였다.
여름 5월, 붉은 말이 북악 오함사에 들어와서 불당을 돌면서 울다가 며칠 후에 죽었다.
가을 7월, 마천성을 중수하였다.
8월, 왕이 고구려, 말갈과 함께 신라의 30여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신라왕 김 춘추가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백제, 고구려, 말갈 등이 우리의 북쪽 국경에 침입하여 30여 성을 함락시켰다"고 하였다.

○十六年, 春三月, 王與宮人, 淫荒耽樂, 飮酒不止. 佐平<成忠>[或云<淨忠>.]極諫, 王怒, 囚之獄中, 由是, 無敢言者. <成忠> 死{不食} . 臨終上書曰: "忠臣死不忘君, 願一言而死. 臣常觀時察變, 必有兵革之事. 凡用兵, 必審擇其地, 處上流以延敵, 然後可以保全. 若異國兵來, 陸路不使過<沈峴(+一云<炭峴>) >, 水軍不使入<伎伐浦(+一云<白江>) >之岸, 擧其險隘以禦之, 然後可也." 王不省焉.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16년 봄 3월,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충[혹은 정충이라고도 한다.]이 적극 말렸더니, 왕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하려는 자가 없었다. 성충은 옥에서 굶주려 죽었다. 그가 죽을 때 왕에게 글을 올려 말했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 마디 말만 하고 죽겠습니다. 제가 항상 형세의 변화를 관찰하였는 바, 전쟁은 틀림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무릇 전쟁에는 반드시 지형을 잘 선택해야 하는데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만 군사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의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방어하여야만 방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은 이를 명심하지 않았다.

○十七年, 春正月, 拜王庶子四十一人爲佐平, 各賜食邑. 夏四月, 大早{旱} , 赤地.

趙炳舜. 『三國史節要』.
17년 봄 정월, 왕의 서자 41 명을 좌평으로 임명하고, 그들에게 각각 식읍을 주었다.
여름 4월, 큰 가뭄이 들어 논밭이 붉은 땅이 되었다.

○十九年, 春二月, 衆狐入宮中, 一白狐坐上佐平書案. 夏四月, 太子宮, 雌 與小{黃} 雀交. 遣將侵攻<新羅><獨山>·<桐岑>二城. 五月, 王都西南<泗 河>, 大魚出死, 長三丈. 秋八月, 有女屍浮<生草津>, 長十八尺. 九月, 宮中槐樹鳴, 如人哭聲. 夜, 鬼哭於宮南路.

趙炳舜. 『三國史節要』.
19년 봄 2월, 여우떼가 궁중에 들어 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의 책상에 올라 앉았다.
여름 4월, 태자궁에서 암탉이 참새와 교미하였다. 장수를 보내 신라의 독산, 동잠 두 성을 침공하였다.
5월, 서울 서남쪽 사비하에서 큰 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세 발이었다.
가을 8월, 여자 시체가 생초진에 떠내려 왔는데 길이가 18척이었다.
9월, 대궐 뜰에 있는 홰나무가 사람이 곡하는 소리처럼 울었으며 밤에는 대궐 남쪽 행길에서 귀신의 곡소리가 들렸다.

○二十年, 春二月, 王都井水血色. 西海濱, 小{群} 魚出死, 百姓食之, 不能盡. <泗 河>水, 赤如血色. 夏四月, 蝦 數萬, 集於樹上. 王都市人, 無故驚走, 如有捕提{逐} 者,   而死百餘人, 立{亡} 失財物, 不可數. 五月, 風雨暴至, 震<天王>·<道讓>二寺塔, 又震<白石寺>講堂. 玄雲如龍, 東西相鬪於空中. 六{五} 月, <王興寺>衆僧皆見: 若有船楫, 隨大水, 入寺門. 有一犬狀如野鹿, 自西至<泗 河>岸, 向王宮吠之, 俄而不知所去. 王都群犬集於路上, 或吠或哭, 移時卽散. 有一鬼入宮中, 大呼: "<百濟>亡, <百濟>亡!" 卽入地, 王怪之, 使人掘地, 深三尺許, 有一龜. 其背有文曰: "<百濟>同月輪, <新羅>如月新." 王問之, 巫者曰: "同月輪者滿也, 滿則虧. 如月新者未滿也, 未滿則漸盈." 王怒殺之. 或曰: "同月輪者盛也, 如月新者微也. 意者國家盛, 而<新羅>寢{ } 微者乎." 王喜. <高宗>詔: 左衛大將軍<蘇定方>, 爲<神丘>道行軍大摠管, 率左衛將軍<劉伯英>·右武衛將軍<馮士貴>·左驍衛將軍<龐孝公>, 統兵十三萬, 以來征, 兼以<新羅>王<金春秋>, 爲< 夷>道行軍摠管, 將其國兵, 與之合勢. <蘇定方>引軍, 自<城山>濟海, 至國西<德物島>, <新羅>王遣將軍<金庾信>, 領精兵五萬以赴之. 王聞之, 會群臣, 問戰守之宜. 佐平<義直>進曰: "<唐>兵遠涉溟海, 不習水者, 在船必困. 當其初下陸, 士氣未平, 急擊之, 可以得志. <新羅>人恃大國之援, 故有輕我之心, 若見<唐>人失利, 則必疑懼, 而不敢銳進. 故知先與<唐>人決戰, 可也." 達率<常永>等曰: "不然. <唐>兵遠來, 意欲速戰, 其鋒不可當也. <新羅>前屢見敗於我軍, 今望我兵勢, 不得不恐. 今日之計, 宜塞<唐>人之路, 以待其師老. 先使偏師, 擊<羅>軍, 折其銳氣, 然後, 伺其便而合戰, 則可得以全軍, 而保國矣." 王猶豫, 不知所從. 時, 佐平<興首>得罪, 流竄<古馬彌知>之縣, 遣人問之曰: "事急矣, 如之何而可乎?" <興首>曰: "<唐>兵旣衆, 師律嚴明,  與<新羅>共謀 角. 若對陣於平原廣野, 勝敗未可知也. <白江>[或云<伎伐浦>.]·<炭峴>[或云<沈峴>.], 我國之要路也. 一夫單槍, 萬人莫當, 宜簡勇士, 往守之. 使<唐>兵不得入<白江>, <羅>人未得過<炭峴>. 大王重閉固守, 待其資粮盡, 士卒疲, 然後奮擊之, 破之必矣."  於時, 大臣等不信曰: "<興首>久在  之中, 怨君而不愛國, 其言不可用也. 莫若使<唐>兵入<白江>, 沿流而不得方舟, <羅>軍升<炭峴>, 由徑而不得幷馬. 當此之時, 縱兵擊之, 譬如殺在籠之 ·離網之魚也." 王然之. 又聞<唐><羅>兵已過<白江>·<炭峴>, 遣將軍< 伯>, 帥死士五千, 出<黃山>, 與<羅>兵戰, 四合皆勝之, 兵寡力屈, 竟敗, < 伯>死之. 於是, 合兵禦<熊津>口, 瀕江屯兵. <定方>出左涯, 乘山而陣. 與之戰, 我軍大敗. 王師乘潮,   銜尾進, 鼓而 . <定方>將步·騎, 直 眞都城{其都城} , 一舍止. 我軍悉衆拒之, 又敗, 死者萬餘人. <唐>兵乘勝薄城. 王知不免, 嘆曰: "悔不用<成忠>之言, 以至於此." 遂與太子<孝>, 走北鄙. <定方>圍其城. 王次子<泰>, 自立爲王, 率衆固守. 太子子<文思>, 謂王子<隆>曰: "王與太子出, 而叔擅爲王, 若<唐>兵解去, 我等安得全?" 遂率左右,  而出, 民皆從之, <泰>不能止. <定方>令士超堞, 立<唐>旗幟, <泰>窘迫, 開門請命. 於是, 王及太子<孝>與諸城皆降. <定方>以王及太子<孝>·王子<泰>·<隆>·<演>及大臣·將士八十八人·百姓一萬二千八百七人, 送京師. 國本有五部·三十七郡·二百城·七十六萬戶, 至是, 析置<熊津>·<馬韓>·<東明>·<金漣>·<德安>五都督府, 各統州縣. 擢渠長, 爲都督·刺史·縣令以理之. 命郞將<劉仁願>守都城, 又以左衛郞將<王文度>爲<熊津>都督, 撫其餘衆. <定方>以所 見上, 責而宥之. 王病死, 贈金紫光祿大夫衛尉卿, 許舊臣赴臨. 詔葬<孫皓>·<陳叔寶>墓側, 幷爲竪碑. 授<隆>司稼卿. <文度>濟海卒, 以<劉仁軌>代之. <武王>從子<福信>, 嘗將兵, 乃與浮屠<道琛>, 據<周留城>叛, 迎古王子<扶餘 >, 嘗質於<倭>國者, 立之爲王. 西北部皆應, 引兵圍<仁願>於都城. 詔起<劉仁軌>檢校<帶方州>刺史, 將<
王文度>之衆, 便道發<新羅>兵, 以救<仁願>. <仁軌>喜曰: "天將富貴此翁矣." 請<唐>曆及廟諱而行, 曰: "吾欲掃平東夷, 頒大<唐>正朔於海表." <仁軌>御軍嚴整, 轉鬪而前. <福信>等, 立兩柵於<熊津江>口, 以拒之. <仁軌>與<新羅>兵合擊之, 我軍退走入柵, 阻水橋狹, 墮溺及戰死者萬餘人. <福信>等乃釋都城之圍, 退保<任存城>, <新羅>人以粮盡引還. 時, <龍朔>元年三月也. 於是, <道琛>自稱領車{軍} 將軍, <福信>自稱霜岑將軍, 招集徒衆, 其勢益張. 使告<仁軌>曰: "聞大<唐>與<新羅>約誓, <百濟>無問老少, 一切殺之, 然後, 以國付<新羅>, 與其受死, 豈若戰亡! 所以聚結, 自固守耳." <仁軌>作書, 具陳禍福, 遣使諭之. <道琛>等, 恃衆驕倨, 置<仁軌>之使於外館,  報曰: "使人官小{卑} , 我是一國大將, 不合參." 不答書, 徒遣之. <仁軌>以衆小{少} , 與<仁願>合軍, 休息士卒, 上表, 請合<新羅>圖之. <羅>王<春秋>奉詔, 遣其將<金欽>, 將兵救<仁軌>等, 至<古泗>. <福信>邀擊, 敗之. <欽>自<葛嶺道>遁還, <新羅>不敢復出. 尋而<福信>殺<道琛>, 幷其還{衆} . < >不能制, 但主祭而已. <福信>等, 以<仁願>等孤城無援, 遣使慰之曰: "大使等, 何時西還? 當遣相送." 二年七月, <仁願>·<仁軌>等, 大破<福信>餘衆於<熊津>之東, 拔<支羅城>及<尹城>·<大山>·<沙井>等柵, 殺獲甚衆, 仍令分兵以鎭守之. <福信>等, 以<眞峴城>臨江高 , 當衝要, 加兵守之. <仁軌>夜督<新羅>兵, 薄城板堞, 比明而入城, 斬殺八百人, 遂通<新羅> 道. <仁願>奏請益兵, 詔發<淄>·<靑>·<萊>·<海>之兵七千人, 遣左威衛將軍<孫仁師>, 統衆浮海, 以益<仁願>之衆. 時, <福信>旣專權, 與<扶餘 >,  相猜忌. <福信>稱疾, 臥於窟室, 欲俟< >問疾, 執殺之. < >知之, 帥親信, 掩殺<福信>. 遣使<高句麗>·<倭>國, 乞師以拒<唐>兵. <孫仁師>中路迎擊破之, 遂與<仁願>之衆相合, 士氣大振. 於是, 諸將議所向, 或曰: "<加林城>水陸之衝, 合先擊之." <仁軌>曰: "兵法 '避實擊虛.'<加林> 而固, 攻則傷士, 守則曠日. <周留城>, <百濟>巢穴, 群聚焉, 若克之, 諸城自下." 於是, <仁師>·<仁願>及<羅>王<金法敏>, 帥陸軍進, <劉仁軌>及別帥<杜爽>·<扶餘隆>, 帥水軍及粮船, 自<熊津江>往<白江>, 以會陸軍, 同 <周留城>. 遇<倭>人<白江>口, 四戰皆克, 焚其舟四百 , 煙炎灼天, 海水爲丹. 王<扶餘 >脫身而走, 不知所在, 或云奔<高句麗>, 獲其寶劒. 王子<扶餘忠勝>·<忠志>等, 帥其衆, 與<倭>人 降. 獨<遲受信>據<任存城>, 未下. 初, <黑齒常之>嘯聚亡散, 旬日間, 歸附者三萬餘人. <定方>遣兵攻之. <常之>拒戰敗之, 復取二百餘城, <定方>不能克. <常之>與別部將<沙 相如>據 , 以應<福信>, 至是皆降. <仁軌>以赤心示之,  取<任存>自效, 卽給鎧·仗·粮 . <仁師>曰: "野心難信. 若受甲濟粟, 資寇便也." <仁軌>曰: "吾觀<相如>·<常之>, 忠而謀, 因機立功, 尙何疑?" 二人訖取其城, <遲受信>委妻子, 奔<高句麗>, 餘黨悉平, <仁師>等振旅還. 詔留<仁軌>, 統兵鎭守. 兵火之餘, 比屋凋殘,  屍如莽. <仁軌>始命,  骸骨, 籍戶口, 理村聚, 署官長, 通道塗, 立橋梁, 補堤堰, 復坡塘, 課農桑, 賑貧乏, 養孤老, 立<唐>社稷, 頒正朔及廟諱. 民皆悅, 各安其所. 帝以<扶餘隆>爲<熊津>都督,  歸國, 平<新羅>古憾, 招還遺人. <麟德>二年, 與<新羅>王會<熊津城>, 刑白馬以盟. <仁軌>爲盟辭, 乃作金書鐵契, 藏<新羅>廟中, 盟辭見『新羅紀』中. <仁願>等還, <隆>畏衆携散, 亦歸京師. <儀鳳>中, 以<隆>爲<熊津>都督<帶方郡>王, 遣歸國, 安輯餘衆, 仍移<安東>都護府於<新城>, 以統之. 時, <新羅>强, <隆>不敢入舊國, 寄理{治} <高句麗>死. <武后>又以其孫<敬>襲王, 而其地已爲<新羅>·<渤海>·<靺鞨>所分, 國系遂絶.
○論曰: <新羅>古事云: "天降金 , 故姓<金>氏." 其言可怪而不可信, 臣修史, 以其傳之舊, 不得刪落其辭. 然而又聞: "<新羅>人, 自以<小昊金天>氏之後, 故姓<金>氏[見<新羅>國子博士<薛因宣>撰<金庾信>碑, 及<朴居勿>撰<姚克一>書<三郞寺>碑文.], <高句麗>亦以<高辛>氏之後, 姓<高>氏."[見『晋書』載記.] 古史曰: "<百濟>與<高句麗>, 同出<扶餘>." 又云: "<秦>·<漢>亂離之時, <中國>人多竄海東." 則三國祖先, 豈其古聖人之苗裔耶? 何其享國之長也? 至於<百濟>之季, 所行多非道, 又世仇<新羅>, 與<高句麗>連和, 以侵 之, 因利乘便, 割取<新羅>重城·巨鎭, 不已, 非所謂親仁善 , 國之寶也. 於是, <唐>天子再下詔, 平其怨, 陽從而陰違之, 以獲罪於大國, 其亡也亦宜矣.
三國史記卷第二十八.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資治通鑑].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ぃ    20년 봄 2월, 서울의 우물이 핏빛으로 변했다. 서해에 조그만 물고기들이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이 모두 먹을 수 없이 많았다. 사비하의 물이 핏빛처럼 붉었다.
여름 4월, 두꺼비 수 만 마리가 나무 꼭대기에 모였다. 서울 시민들이 까닭도 없이 놀래 달아나니 누가 잡으러 오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쓰러져 죽은 자가 1백여 명이나 되고 재물을 잃어버린 자는 셀 수도 없었다.
5월, 폭풍우가 몰아치고 천왕사와 도양사의 탑에 벼락이 쳤으며, 또한 백석사 강당에도 벼락이 쳤다. 검은 구름이 용처럼 공중에서 동서로 나뉘어 서로 싸우는 듯하였다.
6월, 왕흥사의 여러 중들이 모두 배의 돛대와 같은 것이 큰 물을 따라 절 문간으로 들어 오는 것을 보았다. 들사슴 같은 개 한 마리가 서쪽으로부터 사비하 언덕에 와서 왕궁을 향하여 짖더니 잠시후에 행방이 묘연해졌다. 서울의 모든 개가 노상에 모여서 짖거나 울어대다가, 얼마 후에 흩어졌다. 귀신이 하나 대궐 안에 들어 와서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고 크게 외치다가 곧 땅 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시켜 땅을 파게 하였다. 석자 가량 파내려 가니 거북이 한 마리가 발견되었다. 그 등에 "백제는 둥근 달 같고, 신라는 초승달 같다."라는 글이 있었다. 왕이 무당에게 물으니 무당이 말하기를 "둥근 달 같다는 것은 가득 찬 것이니, 가득 차면 기울며, 초승달 같다는 것은 가득 차지 못한 것이니, 가득 차지 못하면 점점 차게 된다."고 하니 왕이 노하여 그를 죽여 버렸다. 어떤 자가 말하기를 "둥근 달 같다는 것은 왕성하다는 것이요, 초승달 같다는 것은 미약한 것입니다. 생각컨대 우리 나라는 왕성하여지고 신라는 차츰 쇠약하여 간다는 것인가 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였다.
당 나라 고종이 조서를 내려 좌위 대장군 소 정방을 신구도 행군 대총관으로 임명하여, 좌위장군 유 백영과 우무위 장군 풍 사귀와 좌효위 장군 방 효공 등과 함께 군사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로 와서 공격하게 하였다. 아울러 신라왕 김 춘추를 우이도 행군 총관으로 임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당 나라 군사와 합세하게 하였다. 소 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에서 바다를 건너 나라 서쪽 덕물도에 이르자, 신라왕이 장군 김 유신을 보내 정예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당 나라 군사와 합세하게 하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군신들을 모아 공격과 수비 중에 어느 것이 마땅한지를 물으니, 좌평 의직이 나서서 말하기를 "당 나라 군사는 멀리서 바다를 건너 왔습니다. 그들은 물에 익숙하지 못하므로 배를 오래 탄 탓에 분명 피곤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상륙하여 사기가 회복되지 못했을 때 급습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 사람들은 큰 나라의 도움을 믿기 때문에 우리를 경시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니 만일 당 나라 사람들이 불리해지는 것을 보면 반드시 주저하고 두려워서 감히 빨리 진격해 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당 군사와 결전을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달솔 상영 등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당 나라 군사는 멀리서 왔으므로 속전하려 할 것이니 그 서슬을 당할 수 없을 것이며, 신라 군사들은 이전에 여러번 우리 군사에게 패하였기 때문에 우리 군사의 기세를 보면 겁을 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계책으로는 당 나라 군사들이 들어 오는 길을 막아서 그들이 피곤하여지기를 기다리면서, 먼저 일부 군사로 하여금 신라 군사를 쳐서 예봉을 꺾은 후에, 형편을 보아 싸우게 하면 군사를 온전히 유지하면서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주저하면서 어느 말을 따라야할지를 몰랐다. 이 때 좌평 흥수는 죄를 지어 고마미지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왕이 그에게 사람을 보내 물었다. "사태가 위급하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흥수가 말했다.
"당 나라 군사는 숫자가 많을 뿐 아니라 군율이 엄하고 분명합니다. 더구나 신라와 함께 우리의 앞뒤를 견제하고 있으니 만일 평탄한 벌판과 넓은 들에서 마주하고 진을 친다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백강[혹은 기벌포라고도 한다.]과 탄현[혹은 침현이라고도 한다.]은 우리 나라의 요충지로서, 한 명의 군사와 한 자루의 창을 가지고도 만 명을 당할 수 있을 것이니, 마땅히 용감한 군사를 선발하여 그곳에 가서 지키게 하여, 당 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면서, 대왕께서는 성문을 굳게 닫고 든든히 지키면서 그들의 물자와 군량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피곤하여질 때를 기다린 후에 분발하여 갑자기 공격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대신들은 이를 믿지 않고 말했다.
"흥수는 오랫 동안 옥중에 있으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니, 그 말을 따를 수 없습니다. 차라리 당 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게 하여 강흐름에 따라 배를 나란히 가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에 올라가서 소롯길을 따라 말을 나란히 몰 수 없게 합시다. 이 때가 되어 군사를 풀어 공격하게 하면 마치 닭장에 든 닭이나 그물에 걸린 고기를 잡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왕은 이 말을 따랐다. 왕은 또한 당 나라와 신라 군사들이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소식을 듣고 장군 계백을 시켜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황산으로 가서 신라 군사와 싸우게 하였는데,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마침내 패하고 계백이 사망하였다. 이에 왕은 군사를 모아 웅진 어귀를 막고 강가에 주둔시켰다. 소 정방이 강 왼쪽 언덕으로 나와 산 위에 진을 치니 그들과 싸워서 아군이 크게 패하였다. 이 때 당 나라 군사는 조수가 밀려 오는 기회를 타고 배를 잇대어 북을 치고 떠들면서 들어 오고, 소 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진도성 30리 밖까지 와서 멈추었다. 우리 군사들이 모두 나가서 싸웠으나 다시 패배하여, 사망자가 1만여 명에 달하였다. 당 나라 군사는 승세를 타고 성으로 육박하였다. 왕이 패망을 면할 수 없음을 알고 탄식하며 말했다.
"성충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후회스럽구나."
왕은 마침내 태자 효를 데리고 북쪽 변경으로 도주하였다. 소 정방이 성을 포위하자 왕의 둘째 아들 태가 스스로 왕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가 왕의 아들 융에게 이르기를 "왕께서는 태자와 함께 나가 버렸고, 숙부는 자기 마음대로 왕노릇을 하고 있으니 만일 당 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가버리면 우리들이 어떻게 안전할 수 있겠는가?"라 하고, 마침내 측근들을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빠져 나가고 백성들도 모두 그를 뒤따르니, 태가 이를 만류하지 못하였다. 소 정방이 군사들을 시켜 성에 뛰어 올라 당 나라 깃발을 세우게 하자, 태는 다급하여 성문을 열고 목숨을 살려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 때 왕과 태자 효가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소 정방이 왕과 태자 효, 왕자 태, 융, 연 및 대신과 장병 88명과 주민 1만 2천 8백 7명을 당 나라 서울로 호송하였다.
백제는 원래 5부, 37군, 200성, 76만 호로 되어 있었는데, 이 때에 와서 지역을 나누어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 등 5개의 도독부를 두어 각각 주, 현들을 통할하게 하고, 우두머리를 뽑아서 도독, 자사, 현령을 삼아 관리하게 하고, 낭장 유 인원에게 명령하여 도성을 지키게 하였다. 또한 좌위 낭장 왕 문도를 웅진 도독으로 삼아 유민들을 무마하게 하였다. 소 정방이 포로들을 임금에게 바치니 임금이 그들을 꾸짖고 용서하여 주었다. 왕이 병으로 사망하자 그를 금자광록대부위위경으로 추증하고 옛 신하들의 문상을 허락하였다. 조서를 내려 손 호, 진 숙보의 무덤 곁에 장사지내고, 그 무덤과 함께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왕자 융을 사가경으로 임명하였다. 왕 문도가 바다를 건너다가 사망하자 유 인궤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무왕의 조카 복신은 일찌기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였는데, 이 때 중 도침을 데리고 주류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켜서, 전 임금의 아들로서 왜국에 인질로 가있던 부여 풍을 맞아서 왕으로 추대하였다. 서북부에서 모두 이에 호응하니, 군사를 이끌고 도성에 있는 유 인원을 포위했다. 당 나라에서는 조서를 내려 유 인궤를 검교 대방주 자사로 임명하여, 왕 문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신라 군사를 보내 유 인원을 구원하게 하였다. 유 인궤가 기뻐하며 "하늘이 장차 이 늙은이를 부귀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당 나라 책력과 묘휘를 요청하여 가지고 떠나면서 "내가 동쪽 오랑캐를 평정하고 대당의 정삭을 해외에 반포하려 한다"고 말하였다. 인궤가 군사를 엄하게 통솔하고 이동하면서 싸우고 전진하니, 복신 등이 웅진강 어귀에 두 개의 목책을 세워 그들을 방어하였다. 인궤가 신라 군사들과 합세하여 공격하니, 우리 군사들이 퇴각하여 목책 안으로 들어와 강을 저지선으로 삼으니, 다리가 좁아서 물에 빠지고 전사한 자가 1만여 명이었다. 복신 등이 이에 도성의 포위를 풀고 물러와서 임존성을 확보하고 있으니, 신라 군사들이 군량이 떨어져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 때가 당 나라 용삭 원년 3월이었다. 이 때 도침은 영군 장군으로 자칭하고 복신은 상잠 장군으로 자칭하며 여러 무리들을 불러 모으니 그 세력이 더욱 확장되었다. 그들은 사람을 보내 인궤에게 말했다.
"듣건대, 당 나라가 신라와 약속하기를 백제 사람은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죽이고, 그후에는 우리 나라를 신라에 넘겨 주기로 하였다고 하니, 죽음을 기다리기 보다는 차라리 싸우다가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모여 진지를 고수하고 있을 뿐이다."
인궤는 편지로 화복에 대하여 설명하고, 사람을 보내 타일렀다. 도침 등은 군사가 많은 것을 믿고 교만해져서 인궤의 사자를 바깥 숙소에 재우고 비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사자의 벼슬은 낮고, 나는 일국의 대장이므로 함께 말할 수 없다."
그는 답장을 주지 않고 그냥 돌려 보냈다. 인궤는 군사가 적었으므로, 인원의 군사와 합쳐서 군사들을 휴식시키면서 표문을 올려 신라와 협력하여 공격하기를 요청하였다. 신라왕 춘추가 당 나라의 조서를 받고, 장수 김 흠에게 군사를 주어 인궤 등을 구원하게 하였다. 김 흠이 고사에 이르자 복신이 그와 전투를 벌여 패배시켰다. 김 흠이 갈령도에서 도망하여 돌아간 후 신라는 감히 다시 출동하지 못하였다. 얼마 후에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의 군사를 합쳤는데, 풍은 이를 제어하지 못하고 제사만 주관하였다.
복신 등은, 인원 등이 성이 고립되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사람을 보내 위로하면서 말했다.
"대사 등은 언제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는가? 그 때 우리가 사람을 보내 전송하여 주겠다."
(당 용삭) 2년 7월에 인원, 인궤 등이 웅진 동쪽에서 복신의 남은 군사를 대파하고, 지라성 및 윤성, 대산, 사정 등의 목책을 함락시켰는데, 군사를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으며, 군사들을 나누어 그곳에 계속하여 주둔시키고 수비하게 하였다. 복신 등은 진현성이 강가에 있으며, 높고 험하여 요충지로 적당하다고 판단하여 군사를 증파하여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인궤가 밤에 신라 군사를 거느리고, 성에 가까이 접근하여 새벽에 입성하여 8백 명의 목을 베어 죽이니, 마침내 신라에서 오는 군량 수송로가 소통되었다. 인원이 증원병을 요청하니, 당 나라에서 조서를 내려 치주, 청주, 내주, 해주의 군사 7천 명을 징발하고, 좌위위 장군 손 인사에게 이 군사를 주어 바다를 건너 인원의 군사를 보충하게 하였다. 이 때 복신은 이미 권력을 독차지하여 부여 풍과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게 되었다. 복신은 병이 들었다는 구실로 굴속에 누어서 풍이 문병하러 오기를 기다려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풍이 이를 알고 심복들을 거느리고 복신을 급습하여 죽이고 고구려와 왜국에 사람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여 당 나라 군사를 막았는데, 손 인사가 중도에서 이들을 맞아 쳐부수고, 마침내 인원의 군사와 합세하니 군사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이에 모든 장수들이 공격의 방향을 의논하는데 어떤 자가 "가림성이 수륙의 요충이므로 먼저 쳐버려야 한다"고 말하니, 인궤가 대답하였다.
"병법에는 강한 곳을 피하고 약한 곳을 공격해야 한다고 하였다. 가림성은 험하고 튼튼하므로 공격하면 군사들이 상할 것이요, 밖에서 지키자면 날짜가 오래 걸릴 것이다. 주류성은 백제의 소굴로서 무리들이 모여 있으니, 만일 이곳을 쳐서 이기게 되면 여러 성은 저절로 항복할 것이다."
이에 인사, 인원과 신라왕 김 법민은 육군을 거느리고 나아가고, 유 인궤와 별수 두상과 부여 융은 수군과 군량 실은 배를 거느리고,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합세하여 주류성으로 갔다. 백강 어귀에서 왜국 군사를 만나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백 척을 불사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오르고 바닷물도 붉은 빛을 띄웠다. 이 때 왕 부여 풍은 탈출하여 도주하였으므로 거처를 알지 못하게 되었는데 어떤 사람은 고구려로 달아났다고 말하기도 한다.당 나라 군사들이 그의 보검을 노획하였다. 왕자 부여 충승과 충지 등이 부여 풍의 군사를 거느리고 왜국 군사들과 함께 항복하고, 지 수신이 혼자 남아 임존성에서 버티며 항복하지 않았다.
처음에 흑치 상지가 도망하여 흩어진 무리들을 모으니, 열흘 사이에 따르는 자가 3만여 명이었다. 소 정방이 이들을 공격하니 상지가 이들과 싸워서 승리하고, 다시 2백여 성을 빼앗으니 정방이 이길 수 없었다. 상지는 별부장 사타상여를 데리고 험준한 곳에 웅거하여 복신과 호응하다가, 이 때에 이르러 모두 항복하였다. 인궤가 그들에게 진심을 보이면서, 그들로 하여금 임존성을 빼앗아 그들 자신의 성의를 나타내는 기회를 갖게 하려고 갑옷과 병기, 군량 등을 주었다. 인사가 말하기를 "그들은 야심이 있어 믿기 어렵다. 만일 그들이 무기와 곡식을 얻는다면 이는 그들에게 도적질을 할 방책을 제공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인궤가 말하기를 "내가 상여와 상지를 보니, 그들에게는 충심과 지모가 있다. 그들에게 기회를 주면 공을 세울 것이니 무엇을 의심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그들 두 사람이 성을 빼앗으니, 지수신은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났으며 잔당들도 모두 평정되었다. 인사 등이 군사를 정돈하여 돌아가니, 당 나라에서는 조서를 내려 인궤로 하여금 그곳에 주둔하며 수비하게 하였다.
전쟁의 여파로 집집마다 영락하고, 시체가 풀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인궤가 이 때 처음으로 명령을 내려 해골을 묻고, 호구를 등록하며, 촌락을 정리하고, 관리들을 임명하였다. 또한 도로를 개통하고, 교량을 가설하고, 제방을 수축하고, 저수지를 복구하며, 농업을 장려하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고아와 노인을 양육하게 하였으며, 당 나라의 사직을 세우고 정삭과 묘휘를 반포하니, 백성들이 기뻐하여 각각 자기 집에 안주하게 되었다. 당 나라 임금이 부여 융을 웅진 도독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여 신라와의 오래된 감정을 풀고 나머지 무리들을 불러 오게 하였다.
인덕 2년, 융이 신라왕과 웅진성에서 만나 흰 말을 잡아 맹세하였다. 인궤가 맹세하는 글을 지었으며, 이것을 금으로 새기고, 무쇠로 책을 만들어 신라 종묘 안에 두었는데, 이 맹세의 글은 [신라기]에 보인다.
인원 등이 귀국하니, 융은 군사가 흩어질 것을 염려하여 그 또한 당 나라 서울로 돌아갔다. 당 의봉 년간에 융을 웅진도독대방군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여 남은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곧이어 안동 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겨 통할하게 하였다. 이 때 신라가 강성하여지니 융이 감히 고국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고구려에 가서 의탁하고 있다가 사망하였다. 무후가 또한 그의 손자 경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하려 했으나, 그 지역이 이미 신라, 발해, 말갈에 의하여 분할 통치되고 있었으므로 나라의 계통이 마침내 단절되었다.
저자의 견해 : 신라 고사에는 "하늘이 금궤를 내려 보냈기에 성을 김씨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 말이 괴이하여 믿을 수 없으나, 내가 역사를 편찬함에 있어서, 이 말이 전해 내려온지 오래되니, 이를 없앨 수가 없었다. 그러나 또한 듣건대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 금천씨의 후손이라 하여 김씨로 성을 삼았고,[이는 신라 국자박사 설 인선이 지은 김 유신의 비문과 박 거물이 지었고 요 극일이 쓴 삼랑사 비문에 보인다.] 고구려는 또한 고신씨의 후손이라 하여 고씨로 성을 삼았다"고 한다.[[진서]의 기록에 보인다.] 옛 사기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모두 부여에서 나왔다"고 하며, 또한 "진, 한의 난리 때, 중국 사람이 해동으로 많이 도망왔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삼국의 조상들은 옛 성인의 후예가 아니겠는가? 어찌하여 그렇게 오래도록 나라를 향유할 수 있었는가? 백제 말기에 와서는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이 많았으며, 또한 대대로 신라와는 원수를 맺고, 고구려와는 화친을 계속하면서 신라를 침공하여, 유리한 조건과 적당한 기회만 있으면 신라의 중요한 성과 큰 진을 빼앗기를 그치지 않았으니, 이른바 어진 사람을 가까이 하고 이웃과 잘 사귀는 것이 나라의 보배라는 말과는 달랐다. 이에 당 나라의 천자가 두 번이나 조서를 내려 백제와 신라 사이의 원한을 풀기 위하여 노력했으나, 겉으로는 순종하는 듯하면서도 안으로는 이를 어겨 대국에 죄를 졌으니, 그들이 패망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삼국사기 권 제 28 끝-

                                        출처:진갑곤의 한자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