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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사

삼국사기 백제 본기 (원문+한글) 권 제 26


三國史記卷第二十六.

삼국사기 권 제 26

百濟本紀第四.
<文周王>·<三斤王>·<東城王>·<武寧王>·<聖王>.

백제본기 제4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무녕왕, 성왕.

○<文周王>[或作<汶州>.], <蓋鹵王>之子也. 初, <毗有王>薨, <蓋鹵>嗣位, <文周>輔之, 位至上佐平. <蓋鹵>在位二十一年, <高句麗>來侵, 圍<漢城>. <蓋鹵> 城自固, 使<文周>求救於<新羅>, 得兵一萬廻. <麗>兵雖退, 城破王死, 遂卽位. 性柔不斷, 而亦愛民, 百姓愛之. 冬十月,  {移} 都於<熊津>.

趙炳舜. 『三國史節要』.
문주왕['文周'를 '汶州'로도 쓴다.]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처음에 비유왕이 죽고 개로가 왕위를 이었을 때 문주가 그를 보좌하여 직위가 상좌평에 이르렀다. 개로 재위 21년에 고구려가 침입하여 한성을 포위하였다. 개로가 성을 막고 굳게 수비하면서 문주를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토록 하였다. 그는 구원병 1만 명을 얻어 돌아왔다. 고구려 군사는 비록 물러갔으나 성이 파괴되고 왕이 죽어서 문주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격은 우유부단하였으나, 또한 백성을 사랑하였으므로 백성들도 그를 사랑하였다.
겨울 10월,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다.

○二年, 春二月, 修葺<大豆山城>, 移<漢>北民戶. 三月, 遣使朝<宋>, <高句麗>塞路, 不達而還. 夏四月, <耽羅>國獻方物, 王喜, 拜使者爲恩率. 秋八月, 拜<解仇>爲兵官佐平.

2년 봄 2월, 대두산성을 수축하고 이곳으로 한강 이북의 민가를 옮겼다.
3월, 송 나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려 하였으나 고구려가 길을 막았으므로 되돌아왔다.
여름 4월, 탐라국에서 토산물을 바쳐오자 왕이 기뻐하여 그 사신을 은솔로 임명하였다.
가을 8월, 해구를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三年, 春二月, 重修宮室. 夏四月, 拜王弟<昆支>爲內臣佐平, 封長子<三斤>爲太子. 五月, 黑龍見<熊津>. 秋七月, 內臣佐平<昆支>卒.

3년 봄 2월, 궁실을 중수하였다.
여름 4월, 왕의 아우 곤지를 내신 좌평으로 임명하고, 맏아들 삼근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5월, 검은 용이 웅진에 나타났다.
가을 7월, 내신 좌평 곤지가 사망하였다.

○四年 , 秋八月, 兵官佐平<解仇>, 擅權亂法, 有無君之心, 王不能制. 九月, 王出獵, 宿於外, <解仇>使盜害之, 遂薨.

李丙燾는, 연표에 의하면 文周王은 재위한 것이 3년 뿐이므로, 이 四年의 기사는 모두 잘못 들어간 것으로 본다.
趙炳舜은 [三國史節要]와 [三國史記]의 연표에 근거하여 四年의 이 기사를 모두 3년의 기사로 본다.
4년 가을 8월, 병관 좌평 해구가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하여, 법 질서를 문란하게 하며, 임금을 경시하였으나 왕이 이를 제어하지 못하였다.
9월, 왕이 사냥하기 위하여 나갔다가 외부에서 묵었는데, 해구가 도적으로 하여금 그를 해치게 하여, 왕이 마침내 사망하였다.

○<三斤王>[或云<壬乞>.], <文周王>之長子. 王薨, 繼位, 年十三歲, 軍國政事, 一切委於佐平<解仇>.

삼근왕[혹은 임걸이라고도 한다.]은 문주왕의 맏아들이다. 왕이 사망하자 왕위를 이었으니, 나이 13세였다. 군사 임무와 나라 정사에 대한 일체의 권한을 좌평 해구에게 맡겼다.

○二年, 春, 佐平<解仇>與恩率<燕信>聚衆, 據<大豆城>叛. 王命佐平<眞男>以兵二千討之, 不克. 更命德率<眞老>, 帥精兵五百, 擊殺<解仇>. <燕信>奔<高句麗>, 收其妻子, 斬於<熊建{熊津}> 市.
○論曰: 『春秋』之法, 君弑而賊不討, 則深責之, 以爲無臣子也. <解仇>賊害<文周>, 其子<三斤>繼位, 非徒不能誅之, 又委之以國政, 至於據一城以叛, 然後再興大兵以克之. 所謂履霜不戒, 馴致堅氷, 熒熒不滅, 至于炎炎, 其所由來, 漸矣. <唐><憲宗>之弑, 三世後, 僅能殺其賊,  海隅之荒僻, <三斤>之童蒙, 又烏足道哉! 三月己酉朔, 日有食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봄, 좌평 해구가 은솔 연신과 함께 무리를 모아 대두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좌평 진남에게 명령하여 군사 2천 명으로 토벌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다시 덕솔 진로에게 명하여 정예 군사 5백 명을 거느리고 해구를 공격하여 죽이게 했다. 연신이 고구려로 달아나자 그의 처자들을 체포하여 웅진 시장에서 목을 베었다.
저자의 견해 : [춘추]의 논법에서는 임금을 죽였는데도 그 역적의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이를 엄하게 규탄하여 이는 신하다운 신하가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해구가 문주왕을 시해하였는데 그의 아들 삼근이 왕위를 계승하여 그를 죽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정사를 그에게 맡겼다가 그가 하나의 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키게 된 후에야 두 번이나 대병을 출동시켜 그를 제압하였다. 이는 소위 서리를 밟으면서도 경계하지 않다가 얼음이 얼 때 이르는 격이며, 조그만 불씨를 끄지 않다가 큰 불을 일으키는 격이니,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연유는 모두 점차로 그렇게 변하는 것이다. 당 나라 헌종이 살해되었을 때도 3대 후에야 겨우 그 역적을 죽였으니, 황차 바다 모퉁이에 있는 외진 땅의 삼근과 같은 애숭이에 있어서야 어찌 말할 것이 있으랴!
3월 초하루 기유일에 일식이 있었다.

○三年, 春夏大旱. 秋九月, 移<大豆城>於<斗谷>. 冬十一月, 王薨.

3년,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다.
가을 9월, 대두성을 두곡으로 옮겼다.
겨울 11월, 왕이 사망하였다.

○<東城王>, 諱<牟大>[或作<摩牟{摩帝}> .], <文周王>弟<昆支>之子. 膽力過人, 善射, 百發百中. <三斤王>薨, 卽位.

李丙燾. [三國遺事].
동성왕의 이름은 모대[혹은 마모라고도 한다.]이니, 문주왕의 아우 곤지의 아들이다. 담력이 대단히 컸으며,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이었다. 삼근왕이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

○四年, 春正月, 拜<眞老>爲兵官佐平, 兼知內外兵馬事. 秋九月, <靺鞨>襲破<漢山城>, 虜三百餘戶以歸. 冬十月, 大雪丈餘.

4년 봄 정월, 진로를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고, 서울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겸하여 맡게 하였다.
가을 9월, 말갈이 한산성을 습격하여 함락시키고 3백여 호를 포로로 잡아 돌아갔다.
겨울 10월, 큰 눈이 한 길 넘게 내렸다.

○五年, 春, 王以獵出至<漢山城>, 撫問軍民, 浹旬乃還. 夏四月, 獵於<熊津>北, 獲神鹿.

5년 봄, 왕이 사냥하기 위하여 한산성에 이르러 군사와 백성들을 위무하고 열흘만에 돌아왔다.
여름 4월, 웅진 북쪽에서 사냥하다가 신기한 사슴을 잡았다.

○六年, 春二月, 王聞<南齊><蕭道成>, 冊<高句麗><巨璉>, 爲驃騎大將軍, 遣使上表, 請內屬, 許之. 秋七月, 遣內法佐平<沙若思>, 如<南齊>朝貢, <若思>至西海中, 遇<高句麗>兵, 不進.

6년 봄 2월, 남제 태조 소도성이 고구려왕 거련을 표기 대장군으로 책봉하였다는 말을 왕이 듣고, 남제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리고 속국이 되기를 요청하니 태조가 승락하였다.
가을 7월, 내법 좌평 사 약사를 남제에 보내 조공하려 했으나, 약사가 서해에서 고구려 군사와 조우하여 가지 못하였다.

○七年, 夏五月, 遣使聘<新羅>.

7년 여름 5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八年, 春二月, 拜< 加{芍加}> 爲衛士佐平. 三月, 遣使<南齊>朝貢. 秋七月, 重修宮室, 築<牛頭城>. 冬十月, 大閱於宮南.

趙炳舜. 『三國史節要』. 『東國史略』.
8년 봄 2월, 백가를 위사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3월, 남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 궁실을 중수하고 우두성을 쌓았다.
겨울 10월, 대궐 남쪽에서 대대적으로 군대를 사열하였다.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10년, 위 나라가 우리를 침공하였으나 우리 군사가 그들을 물리쳤다.

○十一年, 秋, 大有年. 國南海村人獻合穎禾. 冬十月, 王設壇祭天地. 十一月, 宴群臣於南堂.

11년 가을, 크게 풍년이 들었다. 남해의 어촌 사람이 두 이삭이 하나로 합쳐진 벼를 바쳤다.
겨울 10월, 왕이 제단을 만들어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11월, 왕이 남당에서 군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十二年, 秋七月, 徵北部人年十五歲已上, 築<沙峴>·<耳山>二城. 九月, 王田於國西<泗 >原. 拜<燕突>爲達率. 冬十一月, 無氷.

12년 가을 7월, 나이가 15세 이상인 북부 사람들을 징발하여 사현과 이산 두 성을 쌓았다.
9월, 왕이 나라 서쪽 사비 벌판에서 사냥하였고 연돌을 달솔로 임명하였다.
겨울 11월, 물이 얼지 않았다.

○十三年, 夏六月, <熊川>水漲, 漂沒王都二百餘家. 秋七月, 民饑, 亡入<新羅>者, 六百餘家.

13년 여름 6월, 웅천물이 불어서 서울에서 2백여 호가 떠내려 가고 물에 잠겼다.
가을 7월, 백성들이 굶주려 신라로 도망간 자가 6백여 호나 되었다.

○十四年, 春三月, 雪. 夏四月, 大風拔木. 冬十月, 王獵<牛鳴谷>, 親射鹿.

14년 봄 3월, 눈이 내렸다. 여름 4월, 큰 바람이 불어와 나무가 뽑혔다.
겨울 10월, 왕이 우명곡에서 사냥하면서 직접 사슴을 쏘아 맞혔다.

○十五年, 春三月, 王遣使<新羅>請婚, <羅>王以伊 <比智>女, 歸之.

15년 봄 3월,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요청하니 신라왕이 이찬 비지의 딸을 시집보냈다.

○十六年, 秋七月, <高句麗>與<新羅>戰<薩水>之原, <新羅>不克, 退保<犬牙城>. <高句麗>圍之, 王遣兵三千救, 解圍.

16년 가을 7월, 고구려와 신라가 살수 벌판에서 싸웠는데 신라가 이기지 못하고 견아성으로 퇴각하여 방어하고 있다가 고구려 군사에게 포위되었다. 왕이 군사 3천 명을 보내 구원하자 포위가 풀렸다.

○十七年, 夏五月甲戌朔, 日有食之. 秋八月, <高句麗>來圍<雉壤城>. 王遣使<新羅>, 請救, <羅>王命將軍<德智>, 帥兵救之, <麗>兵退歸.

17년 여름 5월 초하루 갑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8월, 고구려가 치양성을 포위하자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 왕이 장군 덕지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니 고구려 군사가 물러갔다.

○十九年, 夏五月, 兵官佐平<眞老>卒, 拜達率<燕突>爲兵官佐平. 夏六月, 大雨, 漂毁民屋.

19년 여름 5월, 병관 좌평 진로가 사망하자 달솔 연돌을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6월, 큰 비가 내려 백성들의 가옥이 유실되고 무너졌다.

○二十年, 設<熊津橋>. 秋七月, 築<沙井城>, 以 率<毗 >鎭之. 八月, 王以<耽羅>不修貢賦, 親征, 至<武珍州>. <耽羅>聞之, 遣使乞罪, 乃止.[<耽羅>, 卽<耽牟羅>.]

20년, 웅진교를 가설하였다.
가을 7월, 사정성을 쌓고 한솔 비타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8월, 왕이 탐라에서 공납과 조세를 바치지 않는다 하여 그를 직접 치려고 무진주에 이르니 탐라에서 이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사죄하므로 중지하였다.[탐라는 곧 탐모라이다.]

○二十一年, 夏大旱, 民饑相食, 盜賊多起. 臣寮請發倉賑救, 王不聽. <漢山>人亡入<高句麗>者二千. 冬十月, 大疫.

21년,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서 서로 잡아 먹고, 도적이 많이 생기자 신하들이 창고를 풀어 구제하자고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한산 사람들 중에 고구려로 도망간 자가 2천 명이나 되었다.
겨울 10월,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二十二年, 春, 起<臨流閣>於宮東, 高五丈, 又穿池養奇禽. 諫臣抗疏不報, 恐有復諫者, 閉宮門.
○論曰: 良藥苦口, 利於病; 忠言逆耳, 利於行. 是以, 古之明君, 虛己問政, 和顔受諫, 猶恐人之不言, 懸敢諫之鼓, 立誹謗之木而不已. 今<牟大王>諫書上而不省, 復閉門以拒之. 『莊子』曰: "見過不更, 聞諫愈甚, 謂之 ." 其<牟大王>之謂乎.
夏四月, 田於<牛頭城>, 遇雨雹, 乃止. 五月, 旱. 王與左右宴<臨流閣>, 終夜極歡.

22년 봄, 대궐 동쪽에 임류각을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 길이었다. 또한 연못을 파고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 간관들이 이에 항의하여 글을 올렸으나 듣지 않고 다시 간하는 자가 있을까 염려하여 대궐 문을 닫아 버렸다.
저자의 견해 : 좋은 약은 입에는 쓰지만 병에는 이롭고, 바른 말은 귀에는 거슬리지만 행동에는 유익하다. 그러므로 옛날의 명철한 임금은 겸허한 자세로 정사를 남에게 물었으며,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여 간하는 말을 수용하면서도, 오히려 사람들이 간하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간하고자 할 때 칠 수 있는 북을 달았으며, 비방하는 말을 기록하게 하는 기둥을 세우는 등, 온갖 조치를 그치지 않았다. 지금 모대왕은 간하는 글이 올라 와도 반성하지 않고, 더욱 문을 닫고 거절하였다. 장자는 "잘못을 보고도 고치지 않으며, 간하는 말을 듣고도 더욱 심해지는 것을 사납다고 한다"라고 말하였으니, 이는 모대왕과 같은 사람을 두고 이른 말일 것이다.
여름 4월, 왕이 우두성에서 사냥하다가 비와 우박을 만나서 중지하였다.
5월, 가물었다. 왕이 측근들과 함께 임류각에서 잔치를 베풀며 밤새도록 실컷 즐겼다.

○二十三年, 春正月, 王都老 , 化狐而去. 二虎鬪於南山, 捕之不得. 三月, 降霜害麥. 夏五月, 不雨至秋. 七月, 設柵於<炭峴>, 以備<新羅>. 八月, 築<加林城>, 以衛士佐平< 加{芍加}> 鎭之. 冬十月, 王獵於<泗 >東原. 十一月, 獵於<熊川>北原, 又田於<泗 >西原, 阻大雪, 宿於<馬浦村>. 初, 王以< 加{芍加}> 鎭<加林城>, <加>不欲往, 辭以疾. 王不許. 是以, 怨王. 至是, 使人刺王, 至十二月乃薨. 諡曰<東城王>.[『冊府元龜』云: <南濟><建元>二年, <百濟>王<牟都>, 遣使貢獻. 詔曰: "寶命惟新, 澤被絶域, <牟都>世蕃東表, 守職遐外, 可卽授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 又<永明>八年, <百濟>王<牟大>遣使上表. 遣謁者僕射<孫副>, 策命<大>襲亡祖父<牟都>, 爲<百濟>王, 曰: "於戱, 惟爾世襲忠勤, 誠著遐表, 海路肅澄, 要貢無替, 式循彛典, 用纂顯命, 往敬哉. 其敬膺休業, 可不愼歟. 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 而『三韓古記』無<牟都>爲王之事. 又按<牟大>, <盖鹵王>之孫, <盖鹵>第二子<昆支>之子, 不言其祖<牟都>, 則『齊書』所載, 不可不疑.]

趙炳舜. 『三國史節要』. 『東國史略』.趙炳舜. 『三國史節要』. 『東國史略』.
23년 봄 정월, 서울에서 노파가 여우로 둔갑하여 사라졌다. 남산에서 호랑이 두 마리가 싸웠는데 잡지 못하였다.
3월,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여름 5월부터 가을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7월, 탄현에 목책을 세워 신라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8월, 가림성을 쌓고 위사 좌평 백가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사비 동쪽 벌판에서 사냥하였다.
11월, 왕이 웅천 북쪽 벌판과 사비 서쪽 벌판에서 사냥하였는데 큰 눈에 길이 막혀 마포촌에서 묵었다.
이전에 왕이 백가로 하여금 가림성을 지키게 하였을 때 백가는 가기를 원하지 않아 병을 핑계로 퇴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왕은 이를 승락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백가는 왕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 때에 와서 백가가 사람을 시켜 왕을 칼로 찔러서 12월에 이르러 왕이 죽으니 시호를 동성왕이라 하였다.[[책부 원구]에는 "남제 건원 2년, 백제왕 모도가 사신을 보내 공납을 바쳤다. 이 때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하늘의 명령을 새로 받드니 은택이 먼 곳까지 미치고 있다. 모도는 대대로 동방의 번신으로 있으면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기의 직무를 다하고 있으므로,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을 제수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또한 영명 8년, 백제왕 모대가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리자 알자 복야 손부를 보내 모대에게 그의 죽은 할아버지 모도의 관작을 계승케 하고 백제왕으로 삼는 책명을 내리면서 말하기를 '아아! 그대는 대대로 충성과 근면을 계승하였으니 그 정성이 멀리까지 드러나 보였다. 해로가 고요하고 조공이 변함 없기를 바라며, 법식과 법전을 따를 것이며, 천명을 돌아보며 행동을 삼가하라. 국가의 위업을 잇는 것이니 어찌 조심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에 행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백제왕으로 임명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삼한 고기]에는 모도가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 없다. 또한 모대는 개로왕의 손자요, 개로왕의 둘째 아들인 곤지의 아들로서, 그의 할아버지가 모도라고는 하지 않았으니, [제서(齊書)]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武寧王>, 諱<斯摩{斯麻}> [或云<(+餘) 隆>.], <牟大王>之第二子也. 身長八尺, 眉目如畵, 仁慈寬厚, 民心歸附, <牟大>在位二十三年薨, 卽位. 春正月, 佐平< 加{芍加} >據<加林城>叛, 王帥兵馬, 至<牛頭城>, 命 率<解明>討之. < 加{芍加}> 出降, 王斬之, 投於<白江>.
○論日{曰} : 『春秋』曰: "人臣無將, 將而必誅." 若< 加>之元惡大 , 則天地所不容, 不卽罪之, 至是自知難免, 謀叛而後誅之, 晩也. 冬十一月, 遣達率<優永>, 帥兵五千, 襲<高句麗><水谷城>.

趙炳舜. 『百濟武寧王墓誌石銘』.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무녕왕의 이름은 사마[혹은 융이라고도 한다.]이니 모대왕의 둘째 아들이다. 신장이 8척이오, 눈매가 그림과 같았으며 인자하고 너그러워서 민심이 그를 따랐다. 모대왕이 재위 23년에 사망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봄 정월, 좌평 백가가 가림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키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우두성에 가서 한솔 해명을 시켜 공격하게 하였다. 백가가 나와서 항복하자 왕이 백가의 목을 베어 백강에 던졌다.
저자의 견해 : [춘추]에는 "신하된 자는 장래를 도모해서는 안되나니, 이러한 마음을 가진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가와 같은 극악한 역적은 천하에 용납될 수 없는데 즉시 처단하지 않고, 이 때에 와서 그가 스스로 죄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반역을 일으킨 후에야 처단하였으니 늦은 것이다.
겨울 11월, 달솔 우영을 보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수곡성을 습격하게 하였다.

○二年, 春, 民饑且疫. 冬十一月, 遣兵侵<高句麗>邊境.

2년 봄, 백성들이 굶주렸고 또 전염병이 돌았다.
겨울 11월,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변경을 침공하였다.

○三年, 秋九月, <靺鞨>燒<馬首>柵, 進攻<高木城>. 王遣兵五千, 擊退之. 冬無氷.

3년 가을 9월, 말갈이 마수책을 소각하고 고목성으로 진공하여 오자 왕이 군사 5천 명을 보내 이들을 물리쳤다.
겨울, 물이 얼지 않았다.

○六年, 春大疫. 三月至五月, 不雨, 川澤竭. 民饑, 發倉賑救. 秋七月, <靺鞨>來侵, 破<高木城>, 殺虜六百餘人.

6년, 봄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3월부터 5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서 시냇물과 연못물이 말랐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열어 구제하였다.
가을 7월, 말갈이 침입하여 고목성을 격파하고 6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갔다.

○七年, 夏五月, 立二柵於<高木城>南, 又築<長嶺城>, 以備<靺鞨>. 冬十月, <高句麗>將<高老>與<靺鞨>謀, 欲攻<漢城>, 進屯於<橫岳>下, 王出師, 戰退之.

7년 여름 5월, 고목성 남쪽에 두 개의 목책을 세우고 또 장령성을 쌓아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겨울 10월, 고구려 장수 고로가 말갈과 짜고 한성을 치기 위하여 횡악 아래에 와서 진을 치니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물리쳤다.

○十年, 春正月, 下令: 完固 防, 驅內外游食者, 歸農.

10년 봄 정월, 명령을 내려 제방을 튼튼히 하고 서울과 지방의 무직자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였다.

○十二年, 夏四月, 遣使入<梁>朝貢. 秋九月, <高句麗>襲取<加弗城>, 移兵破<圓山城>, 殺掠甚衆. 王帥勇騎三千, 戰於<葦川>之北. <麗>人見王軍小{少} , 易之, 不設陣. 王出奇急擊, 大破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12년 여름 4월,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고구려가 가불성을 습격하여 빼앗고, 다시 군사를 옮겨 원산성을 격파하니 죽이거나 약탈하여 간 것이 매우 많았다. 왕이 용감한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위천 북쪽에 나가 싸우니 고구려 병사들이 왕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업수이 여겨 진을 치지 않았으므로 왕이 기발한 작전을 써서 기습을 하여 크게 무찔렀다.

○十六年, 春三月戊辰朔, 日有食之.

16년 봄 3월 초하루 무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二十一年, 夏五月, 大水. 秋八月, 蝗害 . 民饑, 亡入<新羅>者, 九百戶. 冬十一月, 遣使入<梁>朝貢. 先是, 爲<高句麗>所破, 衰弱累年. 至是上表, 稱: "累破<高句麗>, 始與通好, 而更爲强國." 十二月, <高祖>詔冊王, 曰: "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餘隆>, 守藩海外, 遠修貢職,  誠款到, 朕有嘉焉. 宜率舊章, 授玆榮命, 可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

21년 여름 5월, 홍수가 났다.
가을 8월, 메뚜기 떼가 곡식을 해치자 백성들이 굶주려 신라로 도망 간 자가 9백 호였다.
겨울 11월,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이에 앞서 고구려에게 격파당하여 나라가 쇠약하여진 지가 여러 해 되었는데 이 때 표문을 올려서 "백제가 여러 번 고구려를 격파하여 그들과 처음으로 우호 관계를 맺었고, 이제 다시 강국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12월, 양 고조가 조서를 보내 왕을 책명하여 말하기를 "행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백제왕 여륭은 해외에서 번방을 지키며 멀리 와서 조공을 바치니 그의 정성이 지극하여 나는 이를 가상히 여긴다. 마땅히 옛 법에 따라 이 영광스러운 책명을 보내는 바,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으로 봉함이 가하다"라고 하였다.

○二十二年, 秋九月, 王獵于<狐山>之原. 冬十月, 地震.

22년 가을 9월, 왕이 호산 벌판에서 사냥하였다.
겨울 10월, 지진이 났다.

○二十三年, 春二月, 王幸<漢城>, 命佐平<因友{因支}> ·達率<沙烏>等, 徵<漢>北州郡民年十五歲已上, 築<雙峴城>. 三月, 至自<漢城>. 夏五月, 王薨. 諡曰<武寧>.

趙炳舜. 『三國史節要』.
23년 봄 2월, 왕이 한성으로 가서 좌평 인우와 달솔 사오 등에게 명령하여 15세 이상 되는 한수 이북 주, 군의 백성들을 징발하여 쌍현성을 쌓게 하였다.
3월, 왕이 한성에서 돌아왔다.
여름 5월, 왕이 사망하였다. 시호를 무녕이라 하였다.

○<聖王>, 諱<明 >, <武寧王>之子也. 智識英邁, 能斷事. <武寧>薨, 繼位, 國人稱爲<聖王>. 秋八月, <高句麗>兵至<浿水>, 王命左將<志忠>, 帥步騎一萬, 出戰退之.

성왕의 이름은 명농이니 무녕왕의 아들이다. 지혜와 식견이 뛰어나고 일을 처리함에 결단성이 있었다. 무녕왕이 죽고 왕위에 오르자 백성들이 성왕이라고 불렀다.
가을 8월, 고구려 군사가 패수에 이르자 왕이 좌장 지충에게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주어 출전케 하니 그가 적을 물리쳤다.

○二年, <梁><高祖>詔冊王爲持節都督<百濟>諸軍事綏東將軍<百濟>王.

2년, 양 고조가 조서를 내려 왕을 지절도독백제제군사수동장군백제왕으로 책봉하였다.

○三年, 春二月, 與<新羅>交聘.

3년 봄 2월, 신라와 서로 예방하였다.

○四年, 冬十月, 修葺<熊津城>, 立<沙井>柵.

4년 겨울 10월, 웅진성을 수축하고 사정책을 세웠다.

○七年, 冬十月, <高句麗>王<興安>, 躬帥兵馬來侵, 拔北鄙<穴城>. 命佐平<燕謨>, 領步騎三萬, 拒戰於<五谷>之原, 不克. 死者二千餘人.

7년 겨울 10월, 고구려왕 흥안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북쪽 변경 혈성을 함락시켰다. 왕이 좌평 연모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오곡 벌판에서 항전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사망자가 2천여 명이었다.

○十年, 秋七月甲辰, 星隕如雨.

10년 가을 7월 갑진에 별이 비오듯 떨어졌다.

○十二年, 春三月, 遣使入<梁>朝貢. 夏四月丁卯, 熒惑犯南斗.

12년 봄 3월,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4월 정묘에 형혹성이 남두 성좌를 범하였다.

○十六年, 春, 移都於<泗 >[一名<所夫里>.], 國號<南扶餘>.

16년 봄, 도읍을 사비[소부리라고도 한다.]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하였다.

○十八年, 秋九月, 王命將軍<燕會>, 攻<高句麗><牛山城>, 不克.

18년 가을 9월, 왕이 장군 연회에게 명령하여 고구려의 우산성을 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十九年, 王遣使入<梁>朝貢, 兼表請『毛詩』博士·涅槃等經義, 幷工匠·畵師等, 從之.

19년, 왕이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아울러 표문을 올려 [모시(毛詩)] 박사와 열반(涅槃) 등의 의미를 풀이한 책과 기술자, 화가 등을 보내 주기를 요청하니, 양 나라에서 이를 허락하였다.

○二十五年, 春正月己亥朔, 日有食之.

25년 봄 정월 초하루 기해일에 일식이 있었다.

○二十六年, 春正月, <高句麗>王<平成>與<濊>謀, 攻<漢>北<獨山城>. 王遣使請救於<新羅>. <羅>王命將軍<朱珍>, 領甲卒三千, 發之. <朱珍>日夜兼程, 至<獨山城>下, 與<麗>兵一戰, 大破之.

26년 봄 정월, 고구려왕 평성이 예와 공모하여 한수 이북의 독산성을 공격해왔다.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왕이 장군 주진을 시켜 갑병 3천 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였다. 주진은 밤낮으로 행군하여 독산성 아래에 이르렀는데, 그곳에서 고구려 군사들과 일전을 벌려 크게 이겼다.

○二十七年, 春正月庚申, 白虹貫日. 冬十月, 王不知<梁>京師有寇賊, 遣使朝貢. 使人旣至, 見城闕荒毁,  號泣於端門外, 行路見者, 莫不灑淚. <侯景>聞之, 大怒, 執囚之. 及<景>平, 方得還國.

27년 봄 정월 경신에 흰 무지개가 해를 가로 질렀다.
겨울 10월, 왕이 양 나라 서울에 반란이 일어났음을 알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조공하게 하였다. 사신이 그곳에 이르러 성과 대궐이 황폐하고 허물어진 것을 보고 모두들 대궐 단문 밖에서 소리내어 울었는데, 행인들이 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후경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그들을 투옥하였다. 그후 그들은 후경의 난이 평정된 뒤에야 비로소 귀국하였다.

○二十八年, 春正月, 王遣將軍<達己>, 領兵一萬, 攻取<高句麗><道薩城>. 三月, <高句麗>兵圍<金峴城>.

28년 봄 정월, 왕이 장군 달기를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케 하여 이를 함락시켰다.
3월, 고구려 군사가 금현성을 포위했다.

○三十一年, 秋七月, <新羅>取東北鄙, 置<新州>. 冬十月, 王女歸于<新羅>.

31년 가을 7월, 신라가 동북 변경을 빼앗아 신주를 설치하였다.
겨울 10월, 왕의 딸이 신라에 시집갔다.

○三十二年, 秋七月, 王欲襲<新羅>, 親帥步騎五十, 夜至<狗川>,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所害薨. 諡曰<聖>.
三國史記卷第二十六.

32년 가을 7월,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26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