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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사

삼국사기 백제 본기 (원문+한글) 권 제 25


三國史記卷第二十五.

삼국사기 권 제 25

百濟本紀第三.
<辰斯王>·<阿莘王>·< 支王>·<父木辛王{久 辛王}> ·<毗有王>·<盖鹵王>.

趙炳舜. 『三國史節要』.
백제본기 제 3
진사왕, 아신왕, 전지왕, 구이신왕, 비유왕, 개로왕.

○<辰斯王>, <近仇首王>之仲子, <枕流>之弟. 爲人强勇, 聰惠多智略. <枕流>之薨也, 太子少, 故叔父<辰斯>卽位.

진사왕은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며, 침류왕의 아우이다. 그는 사람됨이 용맹하며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침류왕이 죽었을 때 태자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태자의 숙부 진사가 즉위하였다.

○二年, 春, 發國內人年十五歲已上, 設關防, 自<靑木嶺>, 北距<八坤城>, 西至於海. 秋七月, 隕霜害 . 八月, <高句麗>來侵.

2년 봄, 국내의 15세 이상 되는 사람들을 징발하여 관문의 방어시설을 설치하였다. 그 길이가 청목령에서 시작하여 북으로는 팔곤성, 서로는 바다에 닿았다.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8월, 고구려가 침입하였다.

○三年, 春正月, 拜<眞嘉謨>爲達率, <豆知>爲恩率. 秋九月, 與<靺鞨>戰<關彌嶺>, 不捷.

3년 봄 정월, 진 가모를 달솔로 임명하고, 두지를 은솔로 임명하였다.
가을 9월, 관미령에서 말갈과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五年, 秋九月, 王遣兵, 侵掠<高句麗>南鄙.

5년 가을 9월, 왕이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하였다.

○六年, 秋七月, 星 于北河. 九月, 王命達率<眞嘉謨>, 伐<高句麗>, 拔<都坤城>, 虜得二百人. 王拜<嘉謨>爲兵官佐平. 冬十月, 獵於<狗原>, 七日乃返.

6년 가을 7월, 혜성이 북하 성좌에 나타났다.
9월, 왕이 달솔 진 가모로 하여금 고구려를 치게 하여 도곤성을 함락시키고, 포로 2백 명을 사로잡았다. 왕이 가모를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구원에서 사냥하다가 7일만에 돌아왔다.

○七年, 春正月, 重修宮室, 穿池造山, 以養奇禽異卉. 夏四月, <靺鞨>攻陷北鄙<赤峴城>. 秋七月, 獵國西大島, 王親射鹿. 八月, 又獵<橫岳>之西.

7년 봄 정월, 궁실을 중수하면서,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진귀한 새를 기르고 기이한 화초를 가꾸었다.
여름 4월, 말갈이 북쪽 변경의 적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가을 7월, 왕이 서쪽 지방의 큰 섬에서 사냥하다가 직접 사슴을 쏘아 적중시켰다.
8월, 왕이 다시 횡악 서쪽 지역에서 사냥하였다.

○八年, 夏五月丁卯朔, 日有食之. 秋七月, <高句麗>王<談德>, 帥兵四萬, 來攻北鄙, 陷<石峴>等十餘城. 王聞<談德>能用兵, 不得出拒, <漢水>北諸部落, 多沒焉. 冬十月, <高句麗>攻拔<關彌城>. 王田於<狗原>, 經旬不返. 十一月, 薨於<狗原>行宮.

8년 여름 5월 초하루 정묘일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 고구려왕 담덕이 4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변경을 침공하여 석현성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용병에 능통하다는 말을 듣고 대항하기를 회피하였다. 한수 북쪽의 여러 부락을 빼앗겼다.
겨울 10월, 고구려가 관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왕이 구원에서 사냥하며 열흘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11월, 왕이 구원의 행궁에서 사망하였다.

○<阿莘王>[或云<阿芳>.], <枕流王>之元子. 初, 生於<漢城>別宮, 神光炤夜. 及壯, 志氣豪邁, 好鷹馬. 王薨時, 年少, 故叔父<辰斯>繼位. 八年薨, 卽位.

아신왕[혹은 아방이라고도 한다.]은 침류왕의 맏아들이다. 그가 한성의 별궁에서 태어났을 때 신비로운 광채가 밤을 밝혔다. 그가 장성하자 의지와 기풍이 호방하였으며, 매사냥과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침류왕이 죽었을 때, 그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그의 숙부 진사가 왕위를 이었는데 진사왕이 재위 8년에 사망하자 그가 즉위하였다.

○二年, 春正月, 謁<東明>廟, 又祭天地於南壇. 拜<眞武>爲左將, 委以兵馬事. <武>, 王之親舅, 沈毅有大略, 時人服之. 秋八月, 王謂<武>曰: "<關彌城>者, 我北鄙之襟要也. 今爲<高句麗>所有. 此寡人之所痛惜, 而卿之所宜用心而雪 也." 遂謀將兵一萬, 伐<高句麗>南鄙. <武>身先士卒, 以冒矢石, 意復<石峴>等五城, 先圍<關彌城>, <麗>人 城固守. <武>以糧道不繼, 引而歸.

2년 봄 정월, 왕이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고 또한 남쪽 제단에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진무를 좌장으로 임명하여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다. 진무는 왕의 외삼촌으로서 침착하고 굳세며 지략이 많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가을 8월, 왕이 진무에게 "관미성은 우리 나라 북쪽 변경의 요새이다. 그 땅이 지금은 고구려의 소유로 되어 있다. 이것을 과인은 애통해 하니, 그대는 응당 이 점에 마음을 기울여, 이 땅을 빼앗긴 치욕을 갚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왕은 마침내 1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계획하였다. 진무는 병졸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석현 등의 다섯 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먼저 관미성을 포위했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둘러 싸고 굳게 방어하였다. 진무는 군량의 수송로를 확보하지 못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三年, 春二月, 立元子< 支>爲太子. 大赦. 拜庶弟<洪>爲內臣佐平. 秋七月, 與<高句麗>戰於<水谷城>下, 敗績. 大白{太白} 晝見.

趙炳舜. 『三國史節要』.
3년 봄 2월, 왕의 맏아들 전지를 태자로 삼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왕의 이복동생 홍을 내신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가을 7월, 고구려와 수곡성 아래에서 싸워 패배하였다.
낮에 태백성이 나타났다.

○四年, 春二月, 星 于西北, 二十日而滅. 秋八月, 王命左將<眞武>等, 伐<高句麗>, <麗>王<談德>親帥兵七千, 陣於<浿水>之上, 拒戰. 我軍大敗, 死者八千人. 冬十一月, 王欲報<浿水>之役, 親帥兵七千人, 過<漢水>, 次於<靑木嶺>下. 會, 大雪, 士卒多凍死. 廻軍至<漢山城>, 勞軍士.

4년 봄 2월, 혜성이 서북쪽에 나타났다가 20일만에 사라졌다.
가을 8월, 왕이 좌장 진무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니, 고구려왕 담덕이 직접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패수에 진을 치고 대항하였다.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으니 사망자가 8천 명이었다.
겨울 11월, 왕이 패수 전투의 패배를 보복하기 위하여, 직접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 청목령 아래에 진을 쳤다. 그 때 마침 큰 눈이 내려 병졸들 가운데 동사자가 많이 발생하자 왕은 회군하여 한산성에 와서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六年, 夏五月, 王與<倭>國結好, 以太子< 支>爲質. 秋七月, 大閱於<漢水>之南.

6년 여름 5월, 왕이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태자 전지를 인질로 보냈다.
가을 7월, 한수 남쪽에서 대대적으로 군대를 사열하였다.

○七年, 春二月, 以<眞武>爲兵官佐平, <沙豆>爲左將. 三月, 築<雙峴城>. 秋八月, 王將伐<高句麗>, 出帥{師} 至<漢山>北柵. 其夜大星落, 營中有聲. 王深惡之, 乃止. 九月, 集都人, 習射於<西臺>.

趙炳舜. 『三國史節要』.
7년 봄 2월, 진무를 병관 좌평으로 삼고 사두를 좌장으로 삼았다.
3월, 쌍현성을 쌓았다.
가을 8월, 왕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하여 군사를 출동하여 한산 북쪽 목책에 이르렀다. 그 날 밤에 큰 별이 떨어졌는데 진영에서 소리가 났다. 왕은 이를 매우 불안하게 생각하여 공격을 중지하였다.
9월, 서울 사람들을 모아 서대에서 활쏘기를 연습하게 하였다.

○八年, 秋八月, 王欲侵<高句麗>, 大徵兵馬, 民苦於役, 多奔<新羅>, 戶口襄{衰} 滅{減} .

今西龍.李丙燾.
8년 가을 8월, 왕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하여 군사와 말을 대대적으로 징발하니, 백성들이 병역을 고통스럽게 생각하여 많은 사람들이 신라로 도망하였고, 이 결과로 호구가 줄었다.

○九年, 春二月, 星 于奎婁. 夏六月庚辰朔, 日有食之.

9년 봄 2월, 혜성이 규성과 누성 성좌에 나타났다.
여름 6월 초하루 경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一年, 夏, 大旱, 禾苗焦枯, 王親祭<橫岳>, 乃雨. 五月, 遣使<倭>國求大珠.

11년 여름, 큰 가뭄이 들어 벼가 타들어가자, 왕이 직접 횡악에서 기우제를 지내니 곧 비가 내렸다.
5월, 왜국에 사신을 보내 큰 구슬을 요구하였다.

○十二年, 春二月, <倭>國使者至, 王迎勞之, 特厚. 秋七月, 遣兵侵<新羅>邊境.

12년 봄 2월, 왜국에서 사신이 오자 왕이 이들을 환영하고 위로하였으며, 특별히 후하게 대우하였다.
가을 7월, 군사를 보내 신라 변경을 침공하였다.

○十四年, 春三月, 白氣自王宮西起, 如匹練. 秋九月, 王薨.

14년 봄 3월, 흰 기운이 왕궁 서쪽에서 일어났는데 마치 비단을 펼쳐 놓은 것 같았다.
가을 9월, 왕이 사망하였다.

○< 支王>[或士{云} <直支>.], 『梁書』名<映{暎 /  }>, <阿莘>之元子. <阿莘>在位第三年, 立爲太子, 六年出質於<倭>國. 十四年, 王薨, 王仲弟<訓解>攝政, 以待太子還國, 季弟< 禮>殺<訓解>, 自立爲王. < 支>在<倭>聞訃, 哭泣請歸, <倭>王以兵士百人衛送. 旣至國界, <漢城>人<解忠>來告曰: "大王棄世, 王弟< 禮>殺兄自(+立) , 王願太子無輕入." < 支>留<倭>人自衛, 依海島以待之, 國人殺< 禮>, 迎< 支>卽位. 妃<八 >夫人, 生子<久 辛>.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
전지왕[혹은 직지라고도 한다.]의 이름을 [양서]에서는 영이라고 하였다. 그는 아신왕의 맏아들로서, 아신왕 재위 3년에 태자가 되었고, 6년에 왜국에 인질로 갔다. 14년에 아신왕이 사망하자 왕의 둘째 동생 훈해가 정사를 대리하며 태자의 귀국을 기다렸는데 왕의 막내 동생 첩례가 훈해를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었다. 이 때 전지가 왜국에서 부고를 듣고 울면서 귀국을 요청하니 왜왕이 1백 명의 군사로 하여금 그를 보호하여 귀국하게 하였다. 그가 국경에 이르자 한성 사람 해충이 와서 고하기를 "대왕이 죽은 후에, 왕의 동생 첩례가 형을 죽이고 자기가 왕위에 올랐으니, 태자께서는 경솔히 들어오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전지가 왜인을 체류시켜 자기를 호위하게 하면서, 바다 가운데의 섬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백성들이 첩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이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왕비는 팔수부인이다. 그녀는 아들 구이신을 낳았다.

○二年, 春正月, 王謁<東明>廟. 祭天地於南壇. 大赦. 二月, 遣使入<晉>朝貢. 秋九月, 以<解忠>爲達率, 賜<漢城>租一千石.

2년 봄 정월, 왕이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고 남쪽 제단에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내고 죄인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월, 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해충을 달솔로 임명하고, 한성의 벼 1천 석을 주었다.

○三年, 春二月, 拜庶弟<餘信>爲內臣佐平, <解 {解須}> 爲內法佐平, <解丘>爲兵官佐平, 皆王戚也.

『북한본』.
3년 봄 2월, 이복동생 여신을 내신 좌평으로 임명하고, 해수를 내법 좌평으로 임명하고, 해구를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니 모두가 왕의 친척이었다.

○四年, 春正月, 拜<餘信>爲上佐平, 委以軍國政事. 上佐平之職, 始於此, 若今之 宰.

4년 봄 정월, 여신을 상좌평으로 임명하여 군사와 정사를 맡겼다. 상좌평이라는 직위가 이 때부터 시작되었으니, 지금의 재상과 같은 것이었다.

○五年, <倭>國遣使, 送夜明珠, 王優禮待之.

5년, 왜국이 사신을 파견하여 야명주를 보내오니 왕이 특별히 예우하였다.

○十一年, 夏五月甲申, 彗星見.

11년 여름 5월 갑신에 혜성이 나타났다.

○十二年, <東晉><安帝>遣使, 冊命王, 爲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

12년, 동진의 안제가 사신을 보내 왕을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장군백제왕으로 책봉하였다.

○十三年, 春正月甲戌朔, 日有食之. 夏四月, 旱, 民饑. 秋七月, 徵東北二部人年十五已上, 築<沙口城>, 使兵官佐平<解丘>監役.

13년 봄 정월 초하루 갑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여름 4월,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렸다.
가을 7월, 동부와 북부 2부의 15세 이상 되는 사람들을 징발하여 사구성을 쌓게 하고 병관 좌평 해구를 시켜 이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十四年, 夏, 遣使<倭>國, 送白綿{錦} 十匹.

趙炳舜. 『三國史節要』.
14년 여름, 왜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흰 포목 열 필을 보냈다.

○十五年, 春正月戊戌, 星 于大微{太微}. 冬十(-一) 月丁亥朔, 日有食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15년 봄 정월 무술에 혜성이 태미 성좌에 나타났다.
겨울 11월 초하루 정해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六年, 春三月, 王薨.

16년 봄 3월, 왕이 사망하였다.

○<久 辛王>, < 支王>長子. < 支王>薨, 卽位.

구이신왕은 전지왕의 맏아들이다. 전지왕이 사망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 {八} 年, 冬十二月, 王薨.

趙炳舜. 『三國史節要』.
8년 겨울 12월, 왕이 사망하였다.

○<毗有王>, <久 辛王>之長子.[或云: < 支王>庶子. 未知孰是.] 美姿貌, 有口辯, 人所推重, <久 辛王>薨, 卽位.

비유왕은 구이신왕의 맏아들이다.[혹은 전지왕의 서자라고도 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용모가 훌륭하고 말을 잘 하여 사람들이 따르고 귀중히 여겼다. 구이신왕이 사망하자 그가 즉위하였다.

○二年, 春二月, 王巡撫四部, 賜貧乏 有差. <倭>國使至, 從者五十人.

2년 봄 2월, 왕이 4부를 순행하며 백성들을 위무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정도에 따라 곡식을 주었다.
왜국 사신이 왔는데 수행자가 50명이었다.

○三年, 秋, 遣使入<宋>朝貢. 冬十月, 上佐平<餘信>卒, 以<解 {解須}> 爲上佐平. 十一月, 地震, 大風飛瓦. 十二月, 無氷.

『북한본』.
3년 가을, 송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 상좌평 여신이 사망하자 해수를 상좌평으로 임명하였다.
11월, 지진이 발생하고, 큰 바람이 불어 기와가 날았다.
12월, 물이 얼지 않았다.

○四年, 夏四月, <宋><文皇帝>以王復修職貢, 降使冊授&先王<映>{前王< 支>} 爵號.[< 支王>十二年, <東晋>冊命, 爲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

趙炳舜. 『三國史節要』.
4년 여름 4월, 송 나라 문황제는 왕이 다시 조공한다 하여 사신을 보내 선대 임금 영의 작위를 주었다.[전지왕 12년, 동진에서 전지왕을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장군백제왕으로 책봉했었다.]

○七年, 春夏不雨. 秋七月, 遣使入<新羅>, 請和.

7년, 봄과 여름에 비가 오지 않았다.
가을 7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다.

○八年, 春二月, 遣使<新羅>, 送良馬二匹. 秋九月, 又送白鷹. 冬十月, <新羅>報聘以良金·明珠.

8년 봄 2월,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좋은 말 두 필을 보냈다.
가을 9월, 다시 흰 매를 보냈다.
겨울 10월, 신라에서 좋은 금과 구슬을 답례로 보내 왔다.

○十四年, 夏四月戊午朔, 日有食之. 冬十月, 遣使入<宋>朝貢.

14년 여름 4월 초하루 무오일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 송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一年, 夏五月, 宮南池中有火, 焰如車輪, 終夜而滅. 秋七月, 旱,  不熟, 民饑, 流入<新羅>者多.

21년 여름 5월, 대궐 남쪽 연못에서 불길이 일어 났는데, 불꽃이 수레바퀴 같았고, 밤새도록 타다가 사그러졌다.
가을 7월, 가뭄이 들어 곡식이 익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이 굶주려 신라로 들어간 자가 많았다.

○二十八年, 星隕如雨, 星 于西北, 長二丈許. 秋八月, 蝗害 , 年饑.

28년, 별이 비처럼 떨어지고 혜성이 서북쪽에 나타났는데 길이가 두 발 정도 되었다.
가을 8월, 메뚜기 떼가 발생하여 곡식에 해를 입혀 흉년이 들었다.

○二十九年, 春三月, 王獵于<漢山>. 秋九月, 黑龍見<漢江>,  {須} 臾雲霧晦冥飛去. 王薨.

『북한본』.
29년 봄 3월, 왕이 한산에서 사냥하였다.
가을 9월, 검은 용이 한강에 나타났는데, 잠시 구름과 안개가 끼어 어두워지자 날아갔다.
왕이 사망하였다.

○<蓋鹵王>[或云<近蓋婁>.], 諱<慶司>, <毗有王>之長子. <毗有>在位二十九年, 薨, 嗣.

개로왕[혹은 근개루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경사이니 비유왕의 맏아들이다. 비유왕이 재위 29년에 사망하자 왕위를 이었다.

○十四年, 冬十月癸酉朔, 日有食之.

14년 겨울 10월 초하루 계유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五年, 秋八月, 遣將侵<高句麗>南鄙. 冬十月, 葺<雙峴城>, 設大柵於<靑木嶺>, 分<北漢山城>士卒, 戍之.

15년 가을 8월, 왕이 장수를 파견하여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침공하였다.
겨울 10월, 쌍현성을 수축하고, 청목령에 큰 목책을 설치하고, 북한산성의 병졸들을 나누어 그곳을 수비하게 하였다.

○十八年, 遣使朝<魏>. 上表曰: "臣立國東極, 豺狼隔路, 雖世承靈化, 莫由奉藩. 瞻望雲闕, 馳情罔極, 凉風微應. 伏惟皇帝陛下,  {協} 和天休, 不勝係仰之情. 謹遣私署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餘禮>, 龍 將軍<帶方>太守司馬<張茂>等, 投舫波阻, 搜徑玄津, 託命自然之 {運} , 遣進萬一之誠. 冀神祇垂感, 皇靈洪覆, 克達天庭, 宣暢臣志, 雖旦聞夕沒, 永無餘恨."  又云: "臣與<高句麗>, 源出<扶餘{夫餘}> , 先世之時, 篤崇舊款. 其祖<釗>, 輕廢 好, 親率士衆, 凌踐臣境. 臣祖< {須}> , 整旅電邁, 應機馳擊, 矢石暫交, 梟斬<釗>首. 自爾已來, 莫敢南顧. 自<馮>氏數終, 餘燼奔竄, 醜類漸盛. 遂見凌逼, 構怨連禍, 三十餘載, 財 力竭, 轉自孱 . 若天慈曲矜, 遠及無外, 速遣一將, 來救臣國, 當奉送 {鄙} 女, 執□{  /掃 }後宮, 幷遣子弟, 牧 外廐, 尺壤匹夫, 不敢自有." 又云: "今<璉>有罪, 國自魚肉, 大臣彊族, 戮殺無已, 罪盈惡積, 民庶崩離, 是滅(+亡) 之期, 假手之秋也. 且<馬{馮}> 族士馬, 有鳥畜之戀, <樂浪>諸郡, 懷首丘之心, 天威一擧, 有征無戰, 臣雖不敏, 志 畢力, 當率所統, 承風響應. 且<高句麗>不義, 逆詐非一, 外慕<  >藩卑之辭, 內懷凶禍豕突之行. 或南通<劉>氏, 或北約<  >, 共相脣鹵{齒} , 謀凌王略. 昔<唐堯>至聖, 致罰<丹水>, <孟嘗>稱仁, 不捨塗 . 涓流之水, 宜早壅塞, 今若不取, 將貽後悔. 去庚辰年後, 臣西界<小石山>北國海中, 見屍十餘,  得衣器鞍勒, 視之, 非<高句麗>之物. 後聞, 乃是王人來降臣國, 長蛇隔路, 以沈于海. 雖未委當, 深懷憤 . 昔<宋>戮<申舟>, <楚><莊>徒跣,  撮放鳩, <信陵>不食. 克敵立名,  {美} 隆無已, 夫以區區偏鄙, 猶慕萬代之信,  陛下合氣天地, 勢傾山海, 豈令小 , 跨塞天達{逵} ? 今上所得鞍, 一以實驗." <顯祖>以其僻遠冒險朝獻, 禮遇尤厚. 遣使者<邵安>, 與其使俱還. 詔曰: "得表聞之, 無恙其{甚} 善{喜} . 卿在東隅, 處五服之外, 不遠山海, 歸誠<魏>闕, 欣嘉至意, 用 于懷. 朕承萬世之業, 君臨四海, 統御群生. 今宇內淸一, 八表歸義, 襁負而至者, 不可稱數. 風俗之和, 士馬之盛, 皆<餘禮>等, 親所聞見. 卿與<高句麗>不穆, 屢致凌犯, 苟能順義, 守之以仁, 亦何憂於寇 也? 前所遣使, 浮海以撫荒外之國, 從來積年, 往而不返, 存亡達否, 未能審悉. 卿所送鞍, 比校{較} 舊乘, 非中國之物. 不可以疑似之事, 以生必然之過, 經略權要, 以具別旨." 又詔曰: "知: <高句麗>阻疆, 侵 卿上{土} , 修先君之舊怨, 棄息民之大德. 兵交累載, 難結荒邊, 使兼<申胥>之誠, 國有<楚>·<越>之急. 乃應展義扶微, 乘機電擧. 但以<高句麗>稱藩先朝, 供職日久. 於彼, 雖有自昔之 , 於國, 未有犯令之愆. 卿使命始通, 便求致伐, 尋討事會, 理亦未周. 故往年遣<禮>等至<平壤>, 欲驗其由狀, 然<高句麗>奏請頻煩, 辭理俱詣, 行人不能抑其請, 司法無以成其責, 故聽其所啓, 詔<禮>等還. 若今復違旨, 則過各{咎} 益露, 後雖自陳, 無所逃罪, 然後興師討之, 於義爲得. 九夷之國, 世居海外, 道暢則奉藩, 惠 則保境. 故  著於前典,  貢曠於歲時. 卿備陳彊弱之形, 具列往代之迹, 俗殊事異, 擬 { } 乖衷. 洪規大略, 其致猶在. 今中夏平一, 宇內無虞. 每欲陵威東極, 懸旌域表, 拯荒黎於偏方, 舒皇風於遠服. 良由<高句麗>卽 , 未及卜征. 今若不從詔旨, 則卿之來謀, 載 {協} 朕意, 元戎啓行, 將不云遠. 便可豫率同興, 具以待事, 時遣報使, 速究彼情. 師擧之日, 卿爲鄕導之首, 大捷之後, 又受元功之賞, 不亦善乎? 所獻錦布海物, 雖不悉達, 明卿至心. 今賜雜物如別(+幅) ." 又詔<璉>護送<安>等. <安>等至<高句麗>, <璉>稱昔與<餘慶>有 , 不令東過, <安>等於是皆還, 乃下詔切責之. 後使<安>等, 從<東萊>浮海, 賜<餘慶>璽書, 褒其誠節. <安>等至海濱, 遇風飄蕩, 竟不達而還. 王以<麗>人屢犯邊鄙, 上表乞師於<魏>, 不從. 王怨之, 遂絶朝貢.

『북한본』.趙炳舜은 이를 '運'의 避諱字로 보았다.李丙燾.『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魏書].李丙燾. [魏書].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魏書].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魏書].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魏書].『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
18년,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고 왕이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제가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으나, 이리와 승냥이 같은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으니, 비록 대대로 중국의 교화를 받았으나 번방 신하의 도리를 다할 수 없었습니다. 멀리 천자의 궁궐을 바라보면서 달려가고 싶은 생각은 끝이 없으나, 북쪽의 서늘한 바람으로 말미암아 대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천명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니 존경하는 심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삼가 본국의 관군장군부마도위불사후장사 여례와 용양장군대방태수사마 장무 등을 보내어 험한 파도에 배를 띄워 아득한 나루를 찾아, 목숨을 자연의 운명에 맡기면서 저의 정성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내고자 하옵니다. 바라건대 천지신명이 감동하고 역대 황제의 신령이 크게 보호하여, 이들이 폐하의 거처에 도달하여 저의 뜻을 전하게 할 수 있다면, 비록 이를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더라도 길이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표문에서 또한 말했다.
"저와 고구려는 조상이 모두 부여 출신이므로 선조 시대에는 고구려가 옛 정을 굳건히 존중하였는데, 그의 조상 소가 경솔하게 우호 관계를 깨뜨리고 직접 군사를 거느려 우리 국경을 침범하여 왔습니다. 우리 조상 수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공격하니 잠시 싸우다가 소의 머리를 베어 효시하였습니다. 이로부터 감히 남쪽을 돌아보지 못하다가 풍씨의 운수가 다하자, 그의 잔적들이 고구려로 도망해온 이후로 추악한 무리가 차츰 세력을 쌓아 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우리를 무시하고 침략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한을 맺고 전화가 이어진지 30여 년이 되었으니, 재정은 탕진되고 힘은 고갈되어 나라가 점점 쇠약해졌습니다. 만일 폐하의 인자한 생각이 먼 곳까지 빠짐없이 미친다면, 속히 장수를 보내 우리 나라를 구해 주소서. 그렇해준다면 저의 딸을 보내 후궁을 청소하게 하고, 자식과 아우를 보내 외양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겠으며, 한 치의 땅, 한 명의 백성이라도 감히 저의 소유로 하지 않겠습니다."
표문에서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연은 죄를 지어 나라가 스스로 남에게 잡아 먹히게 되었고, 대신과 호족들의 살육 행위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죄악은 넘쳐나서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멸망할 시기로서 폐하의 힘을 빌릴 때입니다. 또한 풍족의 군사와 군마는 집에서 키우는 새나 가축이 주인을 따르는 것 같은 심정을 가지고 있고, 낙랑의 여러 군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황제의 위엄이 한번 움직여 토벌을 행한다면 전투가 벌어질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비록 명민하지는 않으나 힘을 다하여 우리 군사를 거느리고 위풍을 받들어 호응할 것입니다. 또한 고구려는 의롭지 못하여 반역하고 간계를 꾸미는 일이 많으니, 겉으로는 외효가 스스로 자신을 변방의 나라라고 낮추어 쓰던 말버릇을 본받으면서도, 속으로는 흉악한 화란과 행동을 꿈꾸면서, 남쪽으로는 유씨와 내통하기도 하고, 북쪽으로는 연연과 맹약을 맺어 강하게 결탁하기도 함으로써 폐하의 정책을 배반하려 하고 있습니다. 옛날 요 임금은 지극한 성인이었으나 단수에서 전투를 하여 묘만을 벌 주었으며, 맹상군은 어질다고 소문이 났었으나 길가에서 남을 꾸짖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작게 흐르는 물도 일찍 막아야 하는 것이니, 지금 만약 고구려를 치지 않는다면 앞으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경진년 후에 우리 나라 서쪽 경계의 소석산 북쪽 바다에서 10여 구의 시체를 보았고, 동시에 의복, 기물, 안장, 굴레 등을 얻었는데, 이를 살펴보니 고구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들으니 이는 바로 황제의 사신이 우리 나라로 오다가 고구려가 길을 막았기에 바다에 빠진 것이라 합니다. 비록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매우 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옛날 송 나라가 신주를 죽이니 초 장왕이 맨발로 다녔으며, 새매가 풀어준 비둘기를 잡아 요리를 하니 신릉군이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적을 이기고 이름을 세우는 것은 대단히 아름답고 훌륭한 일입니다. 작은 변방도 오히려 만대의 신의를 생각하는데 하물며 폐하께서는 천지의 기를 모으고, 세력이 산과 바다를 기울일 수 있는데 어찌 고구려와 같은 애숭이로 하여금 황제의 길을 막게 합니까? 이제, 북쪽 바다에서 얻었던 안장을 바쳐 증거로 삼고자 합니다."
위 나라 현조가 백제의 사신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조공을 바쳤다 하여 융숭하게 예우하고, 사신 소안으로 하여금 그들을 데리고 백제로 가게 하였다. 이 때 조칙을 내려 말했다.
"글을 받고 아무 일 없이 지낸다는 말을 들으니 매우 기쁘다. 그대가 동쪽 한 구석, 5복의 밖에 있으면서 산과 바다를 멀리 여기지 않고 위 나라 조정에 정성을 바치니, 그 지극한 뜻을 가상히 여겨 가슴 속에 기억해 두리라. 내가 만대에 누릴 위업을 계승하여 사해에 군림하면서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니, 이제 나라는 깨끗이 통일되고 8방에서 귀순하기 위하여 어린아이를 업고 이 땅에 이르는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평화로운 풍속과 성대한 군사는 여례 등이 직접 듣고 보았다. 그대는 고구려와 불화하여 여러 번 침범을 당하였지만 만일 정의를 따르고 어진 마음으로 방어할 수 있다면 원수에 대하여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이전에 사신을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국경 밖의 먼 나라를 위무하게 하였으나, 그 후 여러 해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또는 그곳에 도착했는지 도착하지 못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대가 보낸 안장을 예전 것과 비교하여 보니 중국의 산물이 아니었다. 의심되는 일을 사실로 단정하는 과오를 범할 수는 없는 일이니, 고구려를 침공할 계획은 별지에 상세히 밝힐 것이다."
이 조서에서 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도다. 즉, 고구려는 국토의 지세가 험하다는 사실을 믿고 그대의 국토를 침범하였으니, 이는 자기 선대 임금의 오랜 원한을 갚으려고 백성들을 편안케하는 큰 덕을 버린 것이다. 전쟁이 여러 해에 걸쳐 이어지니 변경을 단속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하여 사신은 신포서의 정성을 겸하게 되고 나라는 초, 월과 같이 위급하게 되었구나. 이제 마땅히 정의를 펴고 약자를 구하기 위하여 기회를 보아 번개처럼 공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선대로부터 번방의 신하로 자처하며 오랫동안 조공을 바쳐왔다. 그들 스스로는 비록 이전부터 잘못이 있었으나, 나에게는 명령을 위반한 죄를 지은 일이 없다. 그대가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와 그들을 곧 토벌하기를 요청하였으나, 사리를 검토해보아도 토벌의 이유가 또한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난해에 예 등을 평양에 보내 고구려의 상황을 조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여러 번 주청하고 그 말이 사리에 모두 맞으니 우리 사신은 그들의 요청을 막을 수 없었고, 법관은 그들에게 죄명을 줄만하지 못했던 바, 그들이 말하는 바를 들어 주고 예 등을 돌아오게 하였다. 만약 고구려가 이제 다시 명령을 어긴다면, 그들의 과오가 더욱 드러날 것이므로 뒷날 아무리 변명을 하더라도 죄를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니, 그렇게 된 연후에는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토벌하더라도 이치에 합당할 것이다. 모든 오랑캐 나라들은 대대로 바다 밖에 살면서, 왕도가 창성하면 번방 신하로서의 예절을 다하고, 은혜가 중단되면 자기의 영토를 지켜 왔다. 따라서 중국과 예속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예전의 법전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호시를 바치는 일은 세시에 그쳤다. 그대가 강약에 대한 형세를 말하였으며 지난 시대의 사실들을 모두 열거하였지만, 풍속이 다르고 사정이 변하여 무엇을 주려 하여도 나의 생각과 맞지 않는다. 우리의 너그러운 규범과 관대한 정책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이제 중국은 통일 평정되어 나라 안에 근심이 없다. 이에 따라 매번 동쪽 끝까지 위엄을 떨치고 국경 밖에 깃발을 휘날려 먼 나라의 굶주리는 백성을 구원하며, 먼 지방까지 황제의 위풍을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은 고구려가 그 때마다 진정을 토로하였기 때문에 미처 토벌을 도모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그들이 나의 조칙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계책이 나의 뜻과 맞으니 큰 군사가 토벌의 길을 떠나는 것도 장차 멀다고는 할 수 없다. 그대는 미리 군사를 정돈하여 함께 군사를 일으킬 수 있도록 준비할 것이며, 때에 맞추어 사신을 보내 그들의 실정을 즉시 알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 우리 군사가 출동하는 날, 그대가 향도의 선두가 된다면 승리한 후에는 역시 가장 큰 공로로 상을 받게 될 것이니,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대가 바친 포백과 해산물은 비록 모두 도착하지는 않았으나, 그대의 지극한 성의는 잘 알겠도다. 이제 별지와 같이 내가 여러 가지 물품을 보내노라."
또한 고구려왕 연에게 조서를 보내 소안 등을 백제로 보호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소안 등이 고구려에 이르자 연이 예전에 여경과 원수를 진 일이 있다 하여, 그들을 동쪽으로 통과하지 못하게 하므로 소안 등이 모두 돌아가니, 위 나라에서는 곧 고구려왕에게 조서를 내려 엄하게 꾸짖었다. 그 후에 소안 등으로 하여금 동래를 출발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여경에게 조서를 주어 그의 정성과 절조를 표창하게 하였다. 그러나 소안 등이 바닷가에 이르자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가 끝내 백제에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은 고구려가 자주 변경을 침범한다하여 위 나라에 표문을 올려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위 나라에서는 듣지 않았다. 왕이 이를 원망하여 마침내 조공을 중단하였다.

○二十一年, 秋九月, <麗>王<巨璉>帥兵三萬, 來圍王都<漢城>. 王閉城門不能出戰. <麗>人分兵爲四道, 夾攻, 又乘風縱火, 焚燒城門. 人心危懼, 或有欲出降者. 王窘不知所圖, 領數十騎, 出門西走. <麗>人追而害之. 先是, <高句麗><長壽王>, 陰謀<百濟>, 求可以間諜於彼者. 時, 浮屠<道琳>應募曰: "愚僧旣不能知道, 思有以報國恩. 願大王不以臣不肖, 指使之, 期不辱命." 王悅, 密使譎<百濟>. 於是, <道琳>佯逃罪, 奔入<百濟>. 時, <百濟>王<近蓋婁>好博 . <道琳>詣王門, 告曰: "臣少而學碁, 頗入妙, 願有聞於左右." 王召入對碁, 果國手也. 遂尊之, 爲上客, 甚親 之, 恨相見之晩. <道琳>一日侍坐, 從容曰: "臣異國人也, 上不我疎外, 恩私甚渥, 而惟一技之是效, 未嘗有分毫之益. 今願獻一言, 不知上意如何耳." 王曰: "第言之, 若有利於國, 此所望於師也." <道琳>曰: "大王之國, 四方皆山丘河海, 是天設之險, 非人爲之形也. 是以, 四 之國, 莫敢有 心, 但願奉事之不暇. 則王當以崇高之勢, 富有之業,  人之視聽, 而城郭不葺, 宮室不修. 先王之骸骨, 權 於露地, 百姓之屋廬, 屢壞於河流, 臣竊爲大王不取也." 王曰: "諾! 吾將爲之." 於是, 盡發國人, 烝土築城, 卽於其內, 作宮樓閣臺 , 無不壯麗. 又取大石於<郁里河>, 作槨以葬父骨, 緣河樹堰, 自<蛇城>之東, 至<崇山>之北. 是以, 倉庾虛竭, 人民窮困, 邦之  , 甚於累卵. 於是, <道琳>逃還以告之. <長壽王>喜, 將伐之, 乃授兵於帥臣. <近蓋婁>聞之, 謂子<文周>曰: "予愚而不明, 信用姦人之言, 以至於此. 民殘而兵弱, 雖有危事, 誰肯爲我力戰? 吾當死於社稷, 汝在此俱死, 無益也.  避難以續國系焉?" <文周>乃與<木 滿致>·<祖彌桀取>[<木 >·<祖彌>, 皆複姓, 『隋書』以<木 >爲二姓, 未知孰是.]南行焉. 至是, <高句麗>對盧<齊于>·<再曾桀婁>·<古 萬年>[<再曾>·<古 >, 皆複姓.]等帥兵, 來攻北城, 七日而拔之, 移攻南城, 城中危恐, 王出 {逃} . <麗>將<桀婁>等見王下馬拜己, 向王面三唾之, 乃數其罪, 縛送於<阿且城{阿旦城}> 下 之. <桀婁>·<萬年>, 本國人也, 獲罪逃竄<高句麗>.
論曰: <楚>< 王{昭王}> 之亡也, < 公><辛>之弟<懷>, 將弑王曰: "<平王>殺吾父, 我殺其子, 不亦可乎?" <辛>曰: "君討臣, 誰敢 之? 君命, 天也, 若死天命, 將誰 ?" <桀婁>等, 自以罪不見容於國, 而導敵兵, 縛前君而害之, 其不義也, 甚矣. 曰: "然則<伍子胥>之入< >鞭尸, 何也?" 曰: "<楊子>『法言』評此以爲不由德. 所謂德者, 仁與義而已, 則<子胥>之 , 不如< 公>之仁. 以此論之, <桀婁>等之爲不義也, 明矣."
三國史記卷第二十五.

今西龍.李丙燾.趙炳舜. ' '은 高麗 光宗의 諱인 '昭'의 避諱字.
21년 가을 9월, 고구려왕 거련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수도 한성을 포위했다. 왕이 싸울 수가 없어 성문을 닫고 있었다. 고구려 사람들이 군사를 네 방면으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한 바람을 이용해서 불을 질러 성문을 태웠다. 백성들 중에는 두려워 하여 성 밖으로 나가 항복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상황이 어렵게 되자 왕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도주하려 하였으나 고구려 군사가 추격하여 왕을 죽였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치기 위하여, 백제에 가서 첩자 노릇을 할만한 자를 구하였다. 이 때, 중 도림이 이에 응하여 말했다.
"소승이 원래 도는 알지 못하지만 나라의 은혜에 보답코자 합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저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마시고 일을 시켜 주신다면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을 기약합니다."
왕이 기뻐하여 비밀리에 그를 보내 백제를 속이도록 하였다. 이에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지어 도망하는 체하고 백제로 왔다. 당시의 백제왕 근개루는 장기와 바둑을 좋아하였다. 도림이 대궐 문에 이르러 "제가 어려서부터 바둑을 배워 상당한 묘수의 경지를 알고 있으니, 왕께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를 불러 들여 대국을 하여 보니 과연 국수였다. 왕은 마침내 그를 상객으로 대우하고 매우 친하게 여겨 서로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하였다. 도림이 하루는 왕을 모시고 앉아서 말했다.
"저는 다른 나라 사람인데 왕께서 저를 멀리 여기시지 않고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나, 다만 한 가지 재주로 보답했을 뿐이오, 아직 털끝만한 이익도 드린 적이 없습니다. 이제 한 말씀 올리려 하오나 왕의 뜻이 어떠한지 알 수 없습니다."
왕이 말했다.
"말해 보라. 만일 나라에 이롭다면 이는 선생에게서 바라는 것이로다."
도림이 말했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 언덕, 강, 바다이니 이는 하늘이 만든 요새이지 사람의 힘으로 된 지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방의 이웃나라들이 감히 엿볼 마음을 갖지 못하고 다만 받들어 섬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왕께서는 마땅히 숭고한 기세와 부유한 치적으로 남들을 놀라게 해야 할 것인데, 성곽은 수축되지 않았고 궁실은 수리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선왕의 해골은 들판에 가매장되어 있으며, 백성의 가옥은 자주 강물에 허물어지니, 이는 대왕이 취할 바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왕이 말했다.
"좋다! 내가 그리 하겠다."
이에 왕은 백성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흙을 구어 성을 쌓고, 그 안에는 궁실, 누각, 사대를 지으니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욱리하에서 큰 돌을 캐다가 관을 만들어 아버지의 해골을 장사하고, 사성 동쪽으로부터 숭산 북쪽까지 강을 따라 둑을 쌓았다. 이로 말미암아 창고가 텅비고 백성들이 곤궁하여져서 나라는 누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도림이 도망해 돌아와서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장수왕이 기뻐하며 백제를 치기 위하여 장수들에게 군사를 나누어 주었다. 근개루가 이 말을 듣고 아들 문주에게 말했다.
"내가 어리석고 총명하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다가 이렇게 되었다. 백성들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을 당하여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려 하겠는가? 나는 당연히 나라를 위하여 죽어야 하지만 네가 여기에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할 것이 없으니, 난리를 피하여 있다가 나라의 왕통을 잇도록 하라."
문주가 곧 목협 만치와 조미 걸취[목협, 조미는 모두 복성인데, [수서]에서는 목협을 두 개의 성으로 보았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를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다. 이 때 고구려의 대로 제우, 재증 걸루, 고이 만년[재증, 고이는 모두 복성이다.]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성을 공격한지 7일만에 함락시키고, 남쪽 성으로 옮겨 공격하자 성 안이 위험에 빠지고 왕은 도망하여 나갔다.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왕의 낯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서 죄목을 따진 다음 아차성 밑으로 묶어 보내 죽이게 하였다. 걸루와 만년은 원래 백제 사람으로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했었다.
저자의 견해 : 초 나라 소왕이 운 땅으로 도망갔을 때, 운공인 신의 아우 회가 소왕을 죽이려 하면서 말했다.
"평왕이 나의 아버지를 죽였으니, 내가 그 아들을 죽이는 것이 또한 옳지 않은가?"
신이 말했다.
"임금이 신하를 치는 것을 누가 감히 원수로 생각하겠는가? 임금의 명령은 하늘 같은 것이니, 하늘의 명령으로 죽었다면 장차 누구를 원수라 하겠는가?"
걸루 등은 자신의 죄 때문에 나라에서 용납되지 않았는데, 도리어 적병을 인도하여 이전의 자기 임금을 묶어 죽였으니, 의롭지 못한 정도가 심하다. 어떤 사람은 "그렇다면 오 자서가 초 나라 서울 영에 들어가, 평왕의 시체에 매질을 한 것은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라고 말할 것이다. 양자 [법언]에는 이를 평하여 "덕에 기반을 둔 행동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른바 덕이란 '인'과 '의'가 있을 뿐이니, 오 자서의 잔인함이 운공의 어진 행위만 못하다. 이렇게 평한다면 걸루 등이 의롭지 못하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난다.
삼국사기 권 제 25 끝